미안해 은실아
서 영 복
영화의 첫 장면부터가 심상치 않았다. 여성주간행사의 목적으로 여성영화제의 출품작을 상영한다고 해서 이미 어느 정도 내용을 짐작은 했었다. 하지만 상영 시작부터 영화가 끝나는 71분 내내 나는 계속 차멀미가 나는 것처럼 구토가 일었고 점점 머리가 아파져 왔다.
지적장애인인 여자아이 주인공 은실이가 캄캄한 밤중에 혼자 아기를 낳았다. 폐교되어 인적도 없는 어느 시골 학교의 숙직실에서다. 그리고 그녀는 하늘나라로 날아갔다. 은실이는 결혼한 적도 없고 더구나 아직 미성년의 나이이다.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집에서 기르던 메리가 새끼를 낳았는데 강아지들의 아빠를 아무도 몰랐다. 은실이를 보며 나는 비참하게도 어렸을 적의 우리 집 메리가 생각났다. 은실이는 메리와 같은 일을 당하였다.
아기의 아버지를 알 수 없는 시골 마을 사람들은 술렁이기 시작했고 아기에 대해 안타까움은 눈곱만큼도 없이 온통 은실이의 아기를 피하려 한다. 아니 끔찍하게도 아기를 죽일 생각까지 하게 된다. 천하보다 소중한 사람의 생명이 세상에 태어나면 당연히 환영받고 축복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어떻게 잉태되었는지 모르는 생명은 세상에 나오자마자 죽음의 위기에 처하게 된다.
피해자는 은실이와 그녀가 낳은 아기 단 두 사람인데 가해자는 마을에 살던 수많은 남자다. 아니다. 또 있다. 적어도 나는 그러한 상황을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방조했던 마을 전체의 어른들까지도 가해자의 줄에 세워 놓고 싶다. 이 영화의 내용에 더욱더 치미는 분노를 참을 수 없는 것은 단지 작가가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어느 마을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일을 근거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나는 교직에서 비교적 일찍 퇴직하고 십 년 가까이 여성장애인 단체에서 자원 활동가로 이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해마다 진행되는 여러 프로그램에 합류해서 함께 합창도 하고 휠체어를 밀며 특별수업을 받기도 한다. 그래서 이 영화도 이들과 함께 단체관람을 하였다.
나는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마치 내가 가해자가 된 듯 안절부절 어쩔 줄 몰랐다. 어떻게 이런 일이 실제로 있었던 일이란 말인가? 이 마을의 남자들은 나이가 많든지 적든지, 사회적으로 지위가 있든지 없든지, 기혼이든 미혼이든 한결같이 은실이의 몸을 탐내었고 쉽게 아주 쉽게 은실이를 망가뜨릴 수 있었다. 그러고도 일말의 양심의 가책 같은 것을 느끼지 않았을까? 더욱 내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은 은실이가 이런 못된 짓을 하는 남자들을 미워하는 것조차 할 수 없는 천진하고 나약한 하나의 꽃송이였다는 점이다.
그 사람들에게 외치고 싶다. 아니 이 세상의 모든 남성에게 말하고 싶다. “정말 이래도 되는 겁니까?” 은실이가 피를 흘리며 죽어갈 때, 나는 눈물을 줄줄 흘렸다. 은실이는 사랑스러운 내 제자일 수 있고 내 가족일 수도 있다.
몇 년 사이에 성폭력이나 성희롱에 대한 사건들이 자주 매스컴에 등장했다. 흉악한 성폭행범에 대해서는 정말 많은 사람이 그를 향해 돌을 던졌고 절대로 가볍게 넘어가선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리고 이제는 법에서도 예전보다 무겁게 처벌한다고 해왔다. 모르면 몰라도 일반인에게 저지른 성폭행보다 어린이나 장애인을 대상으로 죄를 저질렀을 때 처벌은 가중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범죄자들은 나약한 여성들을 노리고 있다. 어리거나 지능이 온전치 않아 시키는 대로 하므로 상대를 얕잡아보고 범행을 쉽게 저지른다. 이 들도 똑같은 하나의 인격체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물건처럼 함부로 대한다면 이것은 얼마나 비겁한 일인가. 그러나 처벌이 강화된 요즘도 이곳저곳에서 이런 뉴스들을 자주 듣게 된다. 우리는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몹쓸 일들을 보아야 하는지 참으로 슬픈 현실이다.
몇 년 전 내가 매주 만나던 야학교의 우리 교실에도 뇌병변 장애를 가지고 있는 쉰 살에 가까운 어른여학생이 있었다. 그녀는 어렸을 적에 뇌의 손상을 입어 정신연령이 낮을 뿐 아니라 신체도 온전치 못하기 때문에 혼자서는 보행조차 부자연스럽다. 2박 3일 수학여행을 갈 때도 어머니와 함께였고 심지어 학교에서 화장실에 갈 때도 어머니는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그녀를 보살핀다. 그녀는 늘 웃는 얼굴이었고 나를 보면 자주 어머니가 새 옷을 사주었거나 신발을 사주었다고 자랑을 한다.
그녀의 어머니는 50년을 그녀와 함께하였지만, 딸에게 늘 미안한 생각하고 있다. 그녀가 그렇게 된 것이 자기의 탓인 것만 같다고 하였다. 그리고 혹시라도 자신이 그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 그녀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염려한다. 사실 칠십이 넘은 어머니도 몇 년 전 뇌 신경계의 병력이 있어 조심스럽고 거동이 활발하지 않다.
그때에도 자신의 딸을 보살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어떻게든지 병을 이겨내려 최선의 노력을 다한 것이다. 어쩌면 자신의 딸 덕분에 지금 살아있지 않나 생각된다고 하였다. 일상의 이야기 말고는 속 깊은 대화가 잘 통하지 않는 그녀를 어머니가 아니라면 어느 누가 그렇게 보살펴줄 수 있겠는가? 딸을 위해 학교에 결석은커녕 매주 재활 치료를 함께 다니는 그녀의 어머니가 존경스럽기까지 한다. 영화의 주인공 은실이는 불쌍하게도 부모마저 없이 세상 물정을 모르는 할머니와 살고 있었다. 그런 할머니는 은실이에게 바람막이가 되어주지 못하였기에 무참히 짓밟혀 피어나지 못한 한 송이의 슬픈 꽃이 되지 않았던가.
그해 여름 서울에서 전국 여성 장애인대회가 1박 2일 일정으로 열렸었다. 몇 백 명의 여성장애인들이 곳곳에서 모여들었다. 주제는 정보문화권 확보였다. 이들도 문화 예술 활동 참여를 위해 모든 사회영역에서 정당한 편의를 제공 받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내었다. 그리고 이 대회를 통해 아직도 우리 국민에게 만연해 있는 장애인에 대해 바르지 못한 인식을 하루빨리 개선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같은 장애인이라도 남성보다 여성장애인이 받는 어려움과 피해가 더욱 크다는 것은 새삼스러운 사실이 아니다.
수 년 전 다녀온 뉴질랜드는 세계인들이 복지 천국이라 부른다. 그런 별명은 그냥 얻어지는 게 아니었다. 그 나라에는 장애인업무만을 전담하는 장애인 관리청이 있고 그 상위에 장애인 장관이 별도로 있어 국가의 보호나 지원이 다른 나라에 비해 월등하다. 수화가 이미 그 나라의 공식 언어로서 인정받는 것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우리나라도 과거에 비하면 장애인에 대한 복지가 많이 좋아지고 있다.
그러나 막상 이들이 못 견뎌 하는 것은 따로 있다. 그것은 일반인들이 딱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시선이다. 제발 어디서든 장애인이 길을 갈 때 그에게 시선을 집중해서는 안 된다. 장애인들도 평범한 사람처럼 살게 해주는 것이 국가가 하는 일이라면 사회의 인식도 그래야 한다. 단지 시력이 안 좋아 안경을 낀 사람을 대하듯 그렇게 평범한 사람처럼 대하여야 한다.
이 영화는 지적장애인에 대한 성폭행을 고발하는 영화였다. 우리는 모두 아무도 장애인이 아니라고 장담할 수 없다. 아직 장애인이 아닐 뿐이다. 이 나라, 이 아름다운 나라에서 절대로 또 다른 은실이가 생겨나서는 안 된다. 은실아 미안해. 미안해 은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