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0-10-08 02:58:14, 조회 : 500, 추천 : 161 |
밤 늦게까지 차를 마셔서 자주 잠을 깨다. 아침 순례의 길을 나서다.
1>융흥사(隆興寺)는 하북성 정정(正定)현에 있는 대찰로서 수나라 문제(文帝)때 창건되었다. 인도의 아쇼카대왕은 법(Dharma)의 성(法城, 진리, 정의의 성)을 쌓아 제국을 다스린데 비해, 중국의 진시황제는 '만리장성'이란 물리적인 성을 쌓았다가 제국을 망하게 만들었다. 융흥사는 황실사찰이다.
마니전(摩尼殿, Manichaen Hall)이 있는데 아마도 페르시아의 성인 마니(Mani,215~277)가 창시한 사랑과 평화의 종교였던 마니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내부의 후불조각탱은 관세음보살인데 마니성인을 불교적인 도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닌가 한다.
융흥사 참배 소감,
老 檜 列 碑 地 苔 靈, 노 회 열 비 지 태 령 始 拜 摩 尼 後 龍 騰; 시 배 마 니 후 용 등 登 高 大 悲 禱 千 手, 등 고 대 비 도 천 수 萬 古 正 定 成 佛 場. 만 고 정 정 성 불 장
늙은 회나무와 비석이 늘어서 있고 땅이 신령하니 지의(地衣, '땅의 옷'이니 곧 이끼)가 끼었네, 마니전을 참배하고 용등원(龍騰園, 절 뒤에 있는 정원)을 노닌다, 대비전(관음을 모신 전각)으로 높이 올라가 천수천안께 기도드리오니 옛날부터 정정(이곳의 지명)은 부처를 이루는 도량이었도다.
용흥사가 위치한 지명이 '정정(正定)'이니 곧 팔정도의 정정-바른 삼매라, 바른 삼매를 닦는 곳이 곧 성불하는 도량이 아니겠는가.
2>조주 백림선사(柏林禪寺)를 찾다.
조주선사(趙州,778~857)은 산동성 조현(趙縣) 출생으로 120세 장수하셨다. 이런 경우 쌍갑(雙甲)을 누렸다고 표현한다. 즉 환갑을 두번 맞았다는 뜻이니, 120세 장수하였다는 의미겠다. 속성이 호(胡)씨. 천하를 유력하다가 80세가 되어서야 조주의 관음원에 주석하고 수행자들을 가르쳤다. 초라했던 관음원이 지금은 <백림선사>라는 거찰로 변모했다.
백림선사 참방 소감:
僧 笑 柏 樹 健, 승 소 백 수 건 宗 旨 緬 緬 傳; 종 지 면 면 전 千 古 柏 子 話, 천 고 백 자 화 闊 然 無 門 關. 활 연 무 문 관
스님이 웃고 측백나무는 정정하니 종지는 면면히 전해온다, 천고의 백수자화두여 무문관이 활짝 열려있네.
백림선사는 바야흐로 부흥의 기운을 보이고 있다. 도량내에 젊은 스님네들이 활기차게 움직이고 있다. 천년이 된 고목 측백나무가 정정해 보인다.
한 스님이 조주선사를 찾아와 도를 물었다, 선사가 답하길, "정전 백수자(庭前 柏樹子)니라, 뜰 앞에 측백나무이니라" 이것이 그 유명한 '백수자화두'이다. 예전에는 '뜰 앞에 잣나무'라고들 했다. 그러나 현재 백림선사에 와서 보면 측백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고, 또 다른 선사(禪寺)들을 다녀보아도 잣나무보다는 측백나무가 많이 심겨져 있기에 '백수자'란 측백나무를 지칭하는 것이 맞다.
한국이나 중국 혹은 일본을 막론하고 외부인이 선방을 구경하기란 매우 어렵다. 그러나 멀리 한국에서 온 조계종 스님들이란 것을 고려한 지객스님이 우리 일행을 선당(禪堂)으로 초대하여 잠시 둘러 보게 해준다. <무문관>이란 편액이 붙어 있다. 사방 벽 둘레에 높은 포단(1m정도의 좌대)를 놓고 그 위에 스님들이 돌아 앉아, 면벽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전방을 향해 앉는다. 이것을 우리는 대좌(對座)라고 한다. 경책죽비가 세워져 있다. 권향(卷香, 돌돌 말린 향)을 다 태우는 데 대략 50분 정도 걸리니까 그것으로 참선시간을 잰다. 중국에서 여법하게 선방정진을 하는 것을 보는 나그네의 마음이 흐뭇해진다. 형제들을 만난듯 하다.
3>조주 석교(石橋)로 향하다.
조주석교는 당나라 때 이춘(李春)이란 신인(神人)이 세웠다는 유명한 석축 다리이다. 다리 중간에는 수천년 동안 왕래하였던 마차바퀴에 홈이 파여져 있는 흔적을 볼 수 있다.
渡 馬 渡 驢, 도 마 도 려 濟 安 神 橋; 제 안 신 교 兩 岸 往 來, 양 안 왕 래 會 通 大 開. 회 통 대 개
말도 건네주고 나귀도 건네준다 편안한 곳으로 건네주는 마음의 다리여, 차안과 피안을 왕래하면서 서로 통해주며 크게 열어놓았네.
조주석교는 곧 달도인(達道人)의 통 큰 마음씀이다.
4>원부사(元符寺)
달마대사의 법을 이어받은 최초의 중국인 선사이신 혜가(慧可, 487~593)선사가 입적하신 원부사로 향한다. 혜가대사, 속성은 희씨, 속명은 신광(神光), 낙양사람. 북위 효문제 때 출생하여 천하의 학문을 완성하고 30세에 향산에서 출가하여 스님이 되다. 40세에 달마를 친견하고 팔을 끊어 구법의지를 보이다. 달마에게서 안심법문을 듣고 마음이 열리다. 후에 능가경과 의발을 전수 받고 선종의 제 2대 조사가 되다.
그의 교화는 민중지향적이어서, '낮은 곳으로 임하소서'였다. 광교사 근처 마당에서 법회가 벌어졌는데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모여들자 이를 시기한 광교사 주지가 모함하니 지방장관은 불문곡직하고 곧 바로 선사를 참수하였다. 억울한 죽음이었으나 선사는 담담히 받아들였다. 생사가 바람에 날리는 한가닥 인연이겠거니 하셨던 게다. 107세 때의 일이었다.
시골길 옥수수밭길을 달려 원부사에 도착하다. 마을사람과 사중 스님들이 길 양쪽에 도열하여 우리 일행을 환영한다. 최근 2조 혜가 선사의 사리와 비문이 땅 속에서 출토되어 마을 사람들과 사중에서는 대규모의 중창불사를 계획하여 지방정부의 인가를 받아 놓고 있다. 외부 세계에서 주어질 불사후원에 대한 기대가 크다. 그래서인지 우리 일행을 환영한 것이다.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절을 나오자 마을 사람들이 크게 아쉬워하면서 배웅을 한다.
5>광교사(匡敎寺)
혜가스님이 머물었던 절인데 지금은 비구니스님들이 관리하고 있다. 캄캄한 밤이다. 또 다시 길을 달려 숭산으로 오다. 등봉(登封)시 선무대주점에 투숙하다. 중국에서는 호텔을 '대주점(大酒店)"이라한다. 한자 뜻만 따라가 무슨 '큰 술집'인가보다 했다가는 큰 오산이다. 나라가 다르면 한자(漢字)의 용도도 달라진다. 같은 글자를 두고도 한, 중,일은 각기 다른 의미로 쓰이는 경우가 더러 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