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는 여전히 공부하고 배우는 입장에서 글을 썼습니다. 너그러히, 마음 편하게 봐주시고
부족한 부분이나 다르다고 판단되어지는 지점에서는 가감없이 지적해 주시길 바랍니다.
에세이 형식입니다. (불어에서 에세이는 '시도' 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럭키연변쑈>
우리는 과거 속에 있다. 이 말은, 시간은 연속적이라는 의미이고 지금의 '나' 를 말하는 것 또한 과거에
속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 와 '우리' 는 공통된 시간 속에 있다. 역사를 지나고 지금의 너와 나,
우리가 형성된 것 또한 역사가 결정 한다.
과연?
'럭키연변쑈' 에서는 아버지와 두 아들이 나온다. 좀 더 정확하게는 과거의 한 사건에 얽힌 사람들이 다 등장한다.
이들은 괴이하기도하고 경이로움을 느낄 정도의 우스꽝스러운 생활을 한다. -또 배우들의 대사마저도 서사적이며
굉장히 길다! 찬사를 보냅니다.- 그들의 삶 속에는 아버지라는 권력과 강제성이 있다. 그리고 그닥 따라 하고 싶지 않아
보이는 아들도 있고 당연한 것처럼 삶을 받아들이는 아들도 있다.
그렇다. 과거의 한 사건이 이들을 이렇게 만든 것이다. 왜일까? 아버지 본인의 과거를 사실로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아니면 두 아들에게 좀 더 나은 아버지가 되기 위해서? 어쩌면 둘 다 일 수도 있겠고, 둘다 아닐 수도 있겠다.
자, 연극의 줄거리는 각설하고, 나는 이 지점에서 그들이 반복해 온 '삶의 방식' 에, 그리고 그 삶의 방식이
깨어지는 어떠한 지점에 촛점을 두고 해석을 해보고자 했다.
아버지와 그 슬하의 당연한 삶은 마트에서 일하는 이국땅의 여인에게서 시작되어, 다시 그녀를 끝으로
차남에 의해 깨어진다. 이 안에서는 현재의 삶이 '진실' 이 아니라는 것에 기인한다. 그리고 가상(simulation) 의 삶 속에서의
리얼리티가 침투해 인지한다.
연극이 말하고저 함은,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아니 전혀 인식하지 못했던- 어떤 지점을 지적하고
비판하려는 시도를 가진다. 즉, 역사를 '새로운 목표들이 서서히 출현' 하는 것에 대한 중요 담론을 '선택'
해서 대화를 시도한다. 거기에다가 과거를 배경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전경으로 보는 듯한 태도를 취한다.
우리에게 던지는 화두를 우리 삶에 대입해보면, 우리가 정상과 비정상으로 나누는 것들은 과거에는
그런 적이 없었음을 내포한다. 차남이 과거의 조각들로 현재를 응시하여 꿰뚫는 진실을 우리들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예로 들어, 동성애 문제를 보자. (현재에는 동성애를 정상적(?) 인 것으로 보고 그런 담론들이 활성화되었다.
그러나 이 전에는 종교적, 비과학적-생명 탄생의 부재, 종족 번식의 본능 불가 등- 이라는 이유로 비정상이라는
범주에 들어 있었던 건 사실이다.)
플라톤의 향연에서는 아리스토파네스의 세 종류의 존재를 말한다.
이는 남과 여가 등을 맞대고 있었고, 남과 남, 여와 여가 그렇게 존재했는 것이다.
그래서 네 팔과 네 다리의 성이 있었고, 이들은 그 것들로 재주 넘 듯 굴러 다녔다. 그러던 어느날 신에게
방자한 태도를 보였다는 이유로 제우스가 반으로 나 눠버린다. 이후 반으로 나뉜 그들은 원래 한몸이던 나머지를 그리워했고
사랑했다.
이 향연 속에서는 세 종류의 성애. 즉, 세가지의 사랑이 있었던 것이다. 남과 여, 남남, 여여. 더욱이 이 이야기의 한 인물은
생식이라는 불순에 대한 남과 여의 사랑보다 동성간의 사랑을 더 고귀하다고 말한다.
플라톤이 있던 역사속에서는 모두가 다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지금은 어떨까? 과학이 발달하고 종교가 정치적으로 변하면서 숨은 권력에 의해 의식이 형성되진 않았을까?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는 그의 저서 '성의 역사', '감시와 처벌' 에서 아주 당연하다고 생각한 의식 저변에는
권력이 숨어있다고 말한다. 더불어, 현재의 당연함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과거 배경을 전경으로 바꾸는 작업을 했다.
나는 럭키연변쑈에서 이 과정이 매우 닮아있다고 느꼈다. 그리고 이 작업은 매우 중요한 시도이고 필요한 과정이다.
사실 원작자가 누군지, 어떤 담론을 던지는지는 모른다. 또 각자의 감상과 판단이 있을지도 혹은 대부분 비슷하게 느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했다.
극 중 아버지-현재, 권력-의 틀 안에서 우스꽝스럽고 괴기한 연기-가상과 거짓의 얽힘-, 마트 여직원-역사를 보는 다른 시각, 진실-을 거쳐
아들-의심, 비판-에 이르기 까지의 과정을 하자라고 하는 것. 그 것은, 깨어있자! 살자! 하는 것이 이 연극이 주는 핵심 담론이 아닐까?
그러나 조마조마함과 두려움에 그리고 미련과 연민에 사로잡혀 이내 리얼리티로 바꾸지 못하는 미련함은 버리고
극 중 이들 보다 좀 더 과감히, 그러나 깊이 있고 진중한 태도를 갖고 의심 해보자.
우리 삶 속에 자리잡은 당연하다고 느껴왔던 일련의 의식과 그 흐름들을 다시 보고 재해석 해보며 진일보한 세상을 바라보자.
마지막 씬에서 럭키 '연변쑈' 가 럭키 '서울쑈' 로 바뀌는 것이 아닌
진짜 럭키 연변, 럭키 서울로 바뀌듯이 말이다!
무엇을?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첫댓글 한시간 오십분간 공연장 안에 함께 있어주신 관객님 글이라면, 절대로 거기 어떤 '부족함'이나 '잘못'은 있을 수 없다고 봅니다. '다름?' 정도야 있을 수 있겠지요..^-^ 저희들이 무대화시킨 연극에는 모자람이 많아 전달에 한계가 있었을텐데, 작가가 의도한바를 (사실은 저도 그러리라 믿고있을 뿐인 바를) 정확히 짚어주신게 아닌가싶네요. 훌륭한 에세이,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