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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2시, 윤우일은 여의도의 조그만 커피숍에 혼자 앉아 있었다. 손님은 그 하나뿐이었고 역시 하나
뿐인 종업원은 카운터 옆 테이블에 엎드려 자다 깨다 하는 중이었다.
간통사건 해결사 배기용은 서비스로 김경명의 내역을 알아봐 주었는데 순발력이 대단했다. 한시간 반
동안 김경명의 학력과 경력, 그리고 남자 관계까지 모조리 조사해서 팩스로 보내준 것이다. 그리고 사
흘만 더 시간을 준다면 만족할만한 자료를 갖추겠다고 했지만 윤우일은 일단 보류시켰다. 오늘 상황
을 보고 결정할 작정인 것이다. 해결사로 세계를 떠돌면서 얻은 경험은 철저한 정보가 모든 것의 기본
이라는 점이었다. 정보가 완벽할수록 사고의 위험이 적었으며 살아남을 확률이 컸던 경험이 지금 사
회생활에서도 도움이 되고 있었다.
식은 커피를 한 모금 삼킨 윤우일은 의자에 등을 붙이고 편안히 앉았다. 나는 한국을 떠난 순간 이미
김희연을 버렸다. 사랑은 조건이 맞았을 때에야 정상적으로 성립이 된다. 어느 한쪽의 희생이 전제로
되는 사랑은 온전한 관계가 아닌 것이다. 그것은 잘한 일이었고 나에게 새로운 인생에 눈을 뜰 계기가
되었기도 했다.
앞쪽 유리창 밖의 거리를 노려본 채 윤우일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렇다고 나는 김희연의 행복이나 기
회를 틈타 친구 애인을 가로채간 박동진의 건승을 기원해줄 만큼 오지랖이 넓지도 못하다. 김희연의
불행은 그 원인이 어디에 있던간에 조금 더 길어져도 상관이 없다. 시간이 흐르면 나처럼 무뎌질 수도
있겠지. 그러나 박동진만큼은 가만 놔둘 수 없다. 놈은 이 세상의 혜택은 다 가지고 태어났고 또 언제
나 여유가 있었다. 놈은 내가 김희연하고 같이 있었을 때에도 노골적으로 부러운 눈치를 보이곤 했었
다.
손을 뻗어 커피잔을 든 윤우일은 식어서 더 써진 커피를 한 모금 삼켰다. 남편이 죽었어도 마음을 주
지 않았던 여자도 있었다. 나는 하마터면 한국에 영영 돌아오지도 못하고 외국에서 죽은 듯이 눌러 살
뻔했다. 내가 이렇게 이곳에 앉아 있는 것도 다 그 여자 덕분이다.
제5장 배반
[당신은 이상한 사람이에요.]
김경명이 표정 없는 얼굴로 윤우일을 보았다. 신라호텔 라운지에는 손님이 많았지만 가라앉은 분위기
였다. 마주앉았을 때 인사도 없이 대뜸 그렇게 말한 김경명이 희미하게 웃었다.
[어떤 목적 때문에 그랬다면 오히려 역효과가 난 것 같아요, 그리고 --]
[불러낸 용건이나 말해.]
김경명의 시선을 잡은 윤우일이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그리고 그 일, 지하실 건을 말하는 모양인데, 좋았어. 반응도 괜찮았고, 그것으로 끝났으니까 더 이상
매달리지 마.]
[매달리다니 --]
김경명이 화가 난 듯 눈을 치켜 떴다.
[좋아, 용건을 말하지. 그 지하실을 털어 줘.]
그 말에 윤우일이 싱긋 웃었다. 김경명은 어느새 말을 놓고 있었다.
[나눠 먹자는 말이야?]
[머리 회전은 빠르군.]
김경명이 입술만 비틀고는 따라 웃는 시늉을 했다.
[털려도 경찰에 신고할 수 없을 테니까 둘이 나누자구.]
[그리고 내가 털어 간 것으로 덮어 씌운단 말이지?]
[50억이 넘는 현금이 있어. 25억이면 평생 먹고 살 수 있어.]
[그렇군.]
정색한 윤우일이 머리를 끄덕였다.
[경제통인 김은배 의원의 딸다운 계산이시군.]
[할 거야, 말 거야? 너 아니더라도 시킬 사람은 있어.]
김경명은 이제 거침없이 반말을 썼다.
[지하실을 털고 달러로 바꿔서 외국으로 가든지, 며칠간은 털린지 모를 테니까 말이야.]
[내가 싫다면 소병호를 시키겠군.]
[그 여우는 믿음성이 가지 않지만 대안 중의 하나이긴 하지.]
윤우일이 의자에 등을 붙이고는 김경명을 쏘아보았다.
[나한테 뒤집어씌운 다음 너도 곧 사라지겠군. 매일 얼굴 맞대고 살기는 불편할 테니까 말이야.]
[그건 네가 상관할 것 없어.]
[좋다. 하자.]
윤우일이 웃음 띈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이런 제의를 거절하는 놈은 미친 놈 뿐이겠지?]
다음날 아침 일본에서 귀국한 김은배가 일찍 사무실부터 들렀다. 임시국회가 사흘 후부터 열리게 되
어서 예정보다 이틀을 당겨 귀국한 것이다.
김은배의 방으로 먼저 보좌관 이민성이 들어갔다 나오더니 곧 소병호가 불려갔다. 윤우일은 앞쪽 책
상에 앉아 있었는데 아까부터 조윤경의 시선이 여러 번 스치고 지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소병호와
의 이야기가 길어지는 동안 이민성이 사무실을 나가 두 사람만 남게 되었을 때 조윤경이 입을 열었다.
[저 -- 우리 화해해요.]
윤우일의 시선을 받은 조윤경이 어색하게 웃었다.
[제가 너무 딱딱하게 굴었어요.]
[아니, 나도 마찬가지지 뭐.]
자리에서 일어선 윤우일이 조윤경의 책상 앞으로 다가가 섰다.
[직장생활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내 성격이.]
은근히 말을 내렸지만 조윤경은 개의치 않는 듯이 이제는 밝게 웃었다.
[그런 것 같긴 해요. 하지만 이곳이 정상적인 직장이라고 볼 수도 없겠죠.]
[내가 사과하는 의미로 오늘 밤 한잔 샀으면 하는데.]
[좋아요, 화해주를 한잔하죠.]
그때 김은배의 방에서 소병호가 나오더니 그들을 번갈아 보앗다. 그리고는 윤우일에게 말했다.
[윤 형, 의원님이 부르셔.]
그 일이 있고 나서부터 소병호는 윤우일에게 깎듯해졌다. 그것을 본 이민성과 조윤경이 처음에는 의
아한 듯이 보았지만 금방 익숙해졌다. 윤우일이 방에 들어서자 서류를 읽고 있던 김은배가 머리를 들
었다.
[어, 거기 앉아.]
턱으로 소파를 가리킨 김은배는 피로가 가시지 않은 듯 지친 표정이었다.
[자네, 태성실업이란 회사 알지?]
김은배가 불쑥 물었다.
[예, 압니다.]
[그럼 오늘 오후에 태성실업 박 전무를 만나고 와, 여기 명함이 있어.]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낸 김은배가 윤우일의 앞에 밀어놓았다.
[세 시에 찾아가기로 했으니까 기다리고 있을거야.]
[가서 만나기만 하면 됩니까?]
[그래, 내가 연락을 해놓을 테니까.]
그리고는 소파에 등을 붙였던 김은배가 잊고 있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참, 그 애 말인데. 내 딸, 내일 오전에 친구들하고 별장에 가겠다는 거야. 그곳에서 파티를 하겠다는
데.]
김은배가 정색하고 윤우일을 보았다.
[자네가 별장에 있어 줘야겠어. 아침에 곧장 그곳으로 출근하라구.]
[알겠습니다.]
김은배의 지시를 받은 윤우일은 일어나서 공손하게 머리를 숙이고는 방을 나왔다.
김경명은 결행일을 내일로 잡은 것이다. 친구들과의 파티는 별장에 가기 위한 구실일 것이었고 아마
시중들 사람으로 자신을 지목한 것이 분명했다. 만일 김은배가 들어주지 않는다면 불러내도 그만이지
만 이것이 자연스러운 방법이다.
태성실업은 반도체 제조회사로 올해 초에 경영압박을 받아 채권은행단으로부터 7천억의 자금을 지원
받았다. 세계 시장 점유율이 18퍼센트로 세계 제2위의 반도체 제조업체였지만 작년 말부터 폭락한 반
도체 가격과 구조조정의 부진으로 주가는 작년보다 20퍼센트 수준으로 떨어졌다. 정부 주도의 빅딜에
의해 태성실업이 부채 덩어리인 덕산반도체와 통합을 했던 것이 불운의 시작이었다. 구조조정은 무엇
보다도 인원감축과 효율적 운영을 시발로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강성 노조가 지배하는 덕산반도
체는 감축에 결사 반대를 했고 조정을 해줘야 할 정부와 노사정위원회가 노조는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고 태성실업측에만 닥달을 했다. 그렇다고 법정관리나 부도로 간다면 국민경제에 엄청난 파장이
올 것이 분명했고, 그래서 앞으로는 1조 가까운 자금을 지원 받아야 올해를 넘긴다는 경제 기사까지
나오고 있었다.
윤우일이 역삼동의 거대한 태성빌딩 본관 사옥에 닿았을 때는 오후 2시 40분이었다. 대리석이 깔린 로
비를 지나 지하 1층의 커피숍으로 들어선 그는 곧 공중전화 부스로 들어섰다. 박길훈 전무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금방 전화를 받았다.
[저, 윤 비서인데 지금 커피숍에 있습니다.]
[네, 곧 내려가겠습니다.]
윤우일이 조심스럽게 말하자 짧게 대답한 박길훈은 5분도 안 되어서 커피숍에 모습을 드러냈다. 커피
숍에는 손님이 두 테이블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도 윤우일을 쉽게 알아보고는 거침없이 다가와 앞자리
에 앉았다. 박길훈은 40대 후반이나 50대 초반쯤의 나이에 건장한 체격이었다. 안경알 밑의 눈매가 날
카로웠고 얼굴 윤곽이 뚜렷한 호남형이었다.
[의원님한테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표정 없는 얼굴로 말한 그가 커피숍 안을 둘러보는 시늉을 한 것은 조심해야 한다는 암시일 것이었다.
[차 가져오셨습니까?]
박길훈이 불쑥 물었다.
[택시 타고 왔는데요.]
[그럼 20분쯤 후에 지하 4층 주차장으로 내려 가시면 6375호 차가 대기하고 있을 겁니다. 그걸 타고
가시지요.]
박길훈이 안경알 밑의 눈을 치켜 뜨고 말을 이었다.
[곧 의원님께서 전화를 하실 겁니다. 그리고 가방은 트렁크에 넣어져 있습니다.]
그로부터 30분쯤 후에 윤우일은 강남대로를 달리는 승용차 안에서 김은배의 전화를 받았다.
[자네 지금 어딘가?]
[예, 한남대교 방향으로 가는 중입니다.]
[그럼 그대로 퇴근해, 조심하고.]
[예, 알겠습니다.]
가방을 보관하고 있으라는 뜻이었다. 하긴 가방을 가지고 의원회관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
다. 전원을 끈 윤우일이 앞좌석의 운전사에게 말했다.
[미안하지만 논현동으로 돌아가십시다.]
트렁크의 가방은 아직 보지 않았지만 틀림없이 현찰일 것이었다. 수표는 추적당할 위험이 있어서 김
은배의 창고에는 현찰만 쌓여져 있다. 푹신한 가죽 등받이에 상체를 기댄 윤우일은 쓴웃음을 지었다.
태성실업의 규모가 큰 만큼 가방에 든 돈 액수도 클 것이었다.
골프 가방은 두 개였다. 안이 가득 차 있어서 무거웠다. 윤우일이 골목 앞에서 내려 가방 두 개를 양쪽
어깨에다 매고 오피스텔 안으로 들어 섰을 때는 이마에 땀까지 맺혔다.
방바닥에다 가방을 내던진 윤우일은 냉장고부터 열고는 생수병을 꺼내 벌컥이며 물을 마셨다. 물을
마시면서 시선이 간 벽시계가 오후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윤우일은 골프 가방을 열었다. 예상했던 대로 신권 만 원 짜리 뭉치가 가방에 가득 차 있었다. 가방 한
개에 어림짐작으로 50개는 되어 보였으니 모두 1억이다.
윤우일은 만원권 뭉치 하나를 빼어 주머니에 넣었다. 어차피 이 돈도 내일 창고에다 보관시킬 것이었
고 그 일도 맡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김은배가 세어 볼지도 모르지만 그때는 상황이 어떻게 변해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전화벨이 울렸을 때 김희연은 목욕을 시킨 명혜의 옷을 갈아 입히는 중이었다.
[여보세요.]
아직 한 손으로 명혜의 팬티를 끌어올리며 김희연이 응답을 했다. 그러나 아무 말도 흘러나오지 않았
다. 김희연이 다시 여보세요 하고 불렀을 때 사내의 목소리가 울렸다.
[거기 부산이야?]
윤우일이었다. 목소리를 금방 분간해 낸 김희연은 명혜에게서 손을 떼었다. 그리고 미번에는 이쪽에
서 가만 있었다.
[부산인 모양이군, 애 목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까.]
명혜가 옆에서 짜증을 내고 있었던 것이다. 윤우일의 목소리가 조금 가볍게 이어졌다.
[동진이를 빼다 박았다던데, 그렇다면 여자로서는 별로 미인형은 안 되겠구만.]
[갑자기 웬일이세요?]
[난 돈의 위력이 과연 얼마나 큰지 앞으로 시험해 볼 생각이야.]
[그러세요?]
[너에 대한 원망은 없어, 다 내가 자초한 일이니까.]
[---]
[다만 행복하게 잘 사느 꼴은 못 보겠어, 이건 미련이 남았기 때문만은 아니야.]
[---]
[하지만 동진이는 --]
잠시 말을 그쳤던 윤우일이 짧게 웃었다. 그늘진 모습이 떠오르는 웃음이었다.
[가만두지 않겠어. 그래야 돌아온 의미가 있을 테니까.]
[아주 위대한 포부시군요.]
[그걸로 살아왔지. 한순간도 너와 동진이를 잊은 적이 없지. 그러면서 나는 죽을 고비도 넘겼고, 또 이
렇게 살아있어.]
윤우일의 말투가 딱딱해졌다.
[동진이는 불행해져야 한다. 선의건 악의건 간에 그놈은 나에게 상처를 주었고 이제는 그 대가를 받아
야만 해.]
[이제 그만 전화 끊어도 될까요?]
김희연이 정색하고 물었다. 그 말과 동시에 윤우일은 전화를 끊었다.
[누구 전화냐?]
주방에 있던 어머니가 물었지만 김희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옆에서 칭얼거리던 명혜가 치마를 잡고
늘어졌다. 김희연은 순간적으로 명혜의 볼기를 때렸다.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은 윤우일은 쓴웃음을 지었다. 김희연의 차가운 반응에 오히려 가슴이 후련해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을 빌어준다든가 또는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신파는 모두 위신이
다. 나에게서 찾지 못한 행복을 다른 여성으로부터 찾았다면 먼저 먼저 굴욕감을 느껴야 정상이지 않
을까? 저주를 하고 재를 뿌리면서 달려드는 것이 더 순수하다. 그리고 더 처참한 꼴로 밀려나야 양쪽
모두가 개운해질 것이다.
윤우일은 오피스텔을 나와 골목 입구 쪽으로 향했다. 포장마차는 마악 영업을 시작했는지 여주인이
도마에다 파를 썰고 있었다. 손님은 아직 없었다.
윤우일이 들어서자 여주인의 눈자위가 금방 붉어졌다. 그날 이후로 그는 한 번도 포장마차에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오가며 몇 번 시선은 마주쳤지만 짧은 눈인사만 했을 뿐이다.
[장사 잘 됩니까?]
건성으로 묻던 윤우일은 아직 여자의 이름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저 그래요.]
시선을 내린 여자도 뜬 목소리로 대답했다. 국솥에서 오뎅이 먹음직하게 끓고 있었다.
[소주 한 병하고 안주는 아무거나 해주세요.]
잠자코 술과 안주를 준비하는 여자를 보던 윤우일은 울컥 성욕이 솟구쳤다. 허름한 셔츠와 이것 저것
얼룩진 행주치마 속 여자의 알몸은 건강했고 윤기가 흐르고 있었다. 그 밤의 기억을 떠올리며 윤우일
은 쓴웃음을 지었다.
여자가 오뎅국을 들고 와 내려놓자 윤우일이 물었다.
[장사 끝나고 오실랍니까?]
여자가 시선을 들고 윤우일을 보았다. 두 볼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어때요?]
[오늘은 일찍 들어가 봐야 돼요.]
여자가 입술만을 달삭이며 대답했다. 그리고는 마개를 딴 소주병을 앞에 놓았다.
[애가 아파서요.]
[어디가 아픈데요?]
[학교에서 오다가 차에 치어서 다리를 다쳤어요.]
[저런.]
이맛살을 찌푸린 윤우일이 술병을 내려놓았다.
[그럼 애가 병원에 있습니까?]
[퇴원하고 집에 있어요.]
[집에 애가 혼자 있는 겁니까?]
[친정 어머니가 와 계시지만 --]
말끝을 흐린 여자가 정색하고 윤우일을 보았다.
[그날 일은 잊었으면 좋겠어요.]
[그러지요.]
윤우일이 선선하게 대답하고는 술잔을 들고 웃었다.
[후회하시게 만들어서 미안합니다.]
[제가 오히려 --]
시선을 내린 여자가 빈 그릇을 그냥 들었다가 놓았다.
[그날 -- 제가 미쳤었나봐요.]
[좋았습니다. 좋은 추억이었지요.]
한 모금에 소주를 삼킨 윤우일이 다시 웃었다.
[끝날 것을 걱정부터 한다면 아예 처음부터 시작하지 않는 것이 낫지요.]
조윤경은 인사동의 전통찻집에서 다소곳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가 윤우일이 들어서자 얼굴을 활짝 펴
고 웃었다. 다소 뜻밖의 반응이었지만 윤우일도 따라서 웃었다. 약속시간보다 10분 늦은 7시 10분이었
다.
[미안, 기다리게 해서.]
앞자리에 앉은 윤우일의 얼굴이 술기운으로 붉었지만 조윤경은 내색하지 않았다.
[손님을 만나서 한잔했어.]
[그럼, 우리 저녁 대신 술 마셔요.]
조윤경이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나도 술 고파요.]
[좋지.]
조윤경은 김은배의 사무실에서 일한 지 햇수로 이 년째였으니 알건 다 안다고 봐도 되었다. 본래 전문
대학 비서학과 출신으로 국회사무처에서 1년을 근무하다 이쪽으로 온 터라 정계는 윤우일의 대 선배
가 될 것이다.
찻집에서 쑥차를 마시는 둥 마는 둥 하고 그들이 찾아 들어간 곳은 인사동 골목의 소란스런 민속주점
이었다. 조윤경이 안내해 간 것이다. 파전에다 더덕구이 등 안주와 술까지 일사불란하게 시킨 조윤경
이 웃음 띈 얼굴로 윤우일을 보았다.
[여긴 친구들하고 자주 와요.]
윤우일은 처음이었다. 좁은 식당에 가득 찬 손님들은 대개 윤우일 또래였다.
[얼마 전에는 소 비서관님 하고도 여기 왔었는데 셋이서 소주 다섯 병을 마셨죠.]
[셋이라면, 나머지 하나는 누구야?]
[내 친구를 소개시켜 달라고 해서요.]
[왜 조윤경 씨는?]
[난 소 비서관 같은 스타일은 싫어요.]
머리를 끄덕인 윤우일이 날라져온 술병을 들어 잔을 채웠다. 주위는 무척 소란스러웠다. 그래서 이야
기를 할 때면 목소리를 높여야 했다.
[저 --, 오빠라고 불러도 돼요?]
술잔을 든 조윤경이 불쑥 물었다. 윤우일은 시선을 들고 조윤경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좋아, 오빠 하자. 그런데 소 비서관한테도 오빠라고 부르나?]
[아니, 그쪽은 그냥 비서관님이야.]
조윤경이 금방 말을 내리더니 눈웃음을 쳤다.
[그 사람은 신경쓰지 마, 오빠. 하도 보채서 내 친구를 소개시켜줬을 뿐이니까.]
[뭘 보채?]
[달라고.]
윤우일의 시선을 잡은 조윤경이 눈웃음을 쳤다. 술기운으로 달아오른 눈가가 붉게 물들었고 두 눈은
번들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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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히 읽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ㅈ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