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神話)의 인물 아산(峨山) 정주영(鄭周永)
1001마리 소(牛) 방북 / 고(故) 정주영(鄭周永) 회장 / 조선입국(朴正熙 글)
현대그룹의 총수(總帥)였던 고 정주영(鄭周永) 회장은 1915년생으로 강원도 통천(북한)에서 출생했다.
집안이 가난했던 정주영은 머리는 비상했지만, 학력은 소학교(통천송전소학교)가 전부로, 가난에서 탈출하려 수차례 가출을 했다가 집으로 돌아오고는 했는데 3번째 가출에 아버지가 소를 판 돈 70만 원을 들고 가출하였다가 다시 잡혀 오지만 1933년 19세에 4번째로 가출하여 홀로 객지 생활을 시작한다.
처음에는 인천 신포동에서 부두하역과 막노동을 하다가 경성(서울)으로 옮겨 쌀가게 배달원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고생길에 접어드는 등 젊은 시절 정주영의 인생은 파란만장(波瀾萬丈)의 연속이었다.
1. 유엔군 묘지 잔디 공사
정 회장의 기지(機智)가 일찍 발휘되었던 에피소드...
한국전쟁(6.25)이 끝나기 직전인 1952년 12월, 미국 아이젠하워(Eisenhower)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아이젠하워가 방문할 유엔군 전사자들을 안장(安葬)한 부산 유엔군 묘지가 너무나 허술하고 겨울이라 썰렁한 것이 한국주재 미국(美國) 대사의 고민이었다.
미 대사는 서둘러 묘지(墓地)정비를 발주(發注)하는데 당시 37세이던 정주영이 맡아서 공사를 마쳤는데 공사현장을 둘러보던 대사는 정비는 잘 됐지만, 겨울이라 너무 썰렁하니 잔디를 심는 방법은 없느냐고 묻는다. ‘꼭 잔디는 아니어도 파랗게만 보이면 됩니까?’ 그렇다는 대답을 듣자 정주영은 낙동강변의 보리밭을 사서 한창 파랗게 올라오는 보리를 파서 30트럭을 실어다가 단 5일 만에 유엔군 묘지를 녹색의 동산으로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미국에서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와서 유엔군 묘지에 헌화하고 둘러보니 겨울인데도 푸른 잔디가 깔려있는 모습을 보고 한국은 너무나 아름답다고 찬사를....
대통령이 귀국 후 미 대사는 고마움의 표시로 정주영이 입찰했던 금액의 3배를 지불했다고 한다.
2. 세계 제1의 조선왕국(造船王國) 대한민국(大韓民國)
현재 우리나라는 명실상부, 배를 잘 만드는 세계 제1의 조선왕국(造船王國)이다.
전 세계 여러 나라 중에서 신조(新造)되어 바다에 띄우는 배 5척 중에서 1척이 현대중공업 제품이고 10척 중 4척이 한국산(韓國産)이라고 하니 우리나라는 세계 제1의 조선(造船)왕국임이 틀림없다.
정주영의 현대조선소가 설립되기 전, 세계의 조선업계는 북유럽과 영국 등이 거머쥐고 있다가 일본으로, 그러나 현대조선소가 생긴 후 우리나라가 1위를 차지하게 되는데 얼마 후 중국이 다시 세계 1위 수주량으로 부상하지만, 건조기술의 부실이 드러나면서 곧바로 우리나라가 다시 세계 톱을 차지하게 되는데 금년 세계 조선발주량의 44%를 한국이 수주(수주)했다니 놀라울 뿐이다.
1961년, 5.16군사혁명 등 소용돌이를 겪던 우리나라는 1963년 제5대 대통령으로 박정희가 결국 정권을 잡는다.
1968년, 박태준에 의해 포항제철(POSCO)이 완공되면서 포철에서 생산되는 철을 대량으로 소비해줄 산업이 필요했다. 박정희는 먼저 삼성회장이었던 이병철에게 조선(造船) 사업을 권유하지만, 당시 우리나라에는 조선소가 없었음은 물론, 그 방면에 전혀 축적된 지식조차 없어 완전히 맨땅에 헤엄치기... 이병철은 ‘도저히 자신이 없습니다.’하자 박정희는 정주영 회장을 불러 ‘임자가 한번 해 보소.’
정 회장 또한 조선소를 짓기 위해 여러 방법을 생각해봤지만, 이번만은 해결책이 없어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하자 박정희는 불같이 화를 내며 ‘무조건 해 내라’고 했다고 한다.
3. 현대 미포(尾浦) 조선소 설립
유조선 건조 / 오나시스와 재클린 / 당시 500원 지폐(거북선 그림)
결국, 시도해 보기로 결심을 굳힌 정주영은 무작정 일본에도 가고 미국에 가서 두루 알아봤지만 아무도 정주영을 상대해주지도 않았다고 한다.
1971년, 정주영은 영국으로 가서 바클레이즈(Barclays) 은행에 조선소를 지을 차관 4,300만 달러를 신청했지만, 은행 담당자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거절했다. 그리고 꼭 차관을 받고 싶으면 선박 컨설턴트(Consultant) 기업의 추천서를 받아오라고 했다고 한다. 지금은 세계금융센터가 미국 맨해튼의 브룩필드(Brookfield Place)지만 당시는 영국이었다고 한다.
1971년 9월, 정주영은 차관은행 바클레이즈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선박 컨설턴트 회사 애플도어(Appledore)의 회장인 롱 바텀을 찾아갔다. 롱 바텀의 추천서가 있으면 영국의 차관은행에서 쉽게 투자를 유치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정회장은 즉시 조선소를 지을 예정인 미포만(尾浦灣) 해변 사진과 축척 지도, 외국 조선소에서 빌린 유조선 설계도를 들고 롱 바텀을 찾아가서 사업계획서와 추천서를 의뢰했다.
그러자 서류를 검토한 롱 바텀은 일언지하(一言之下)에 거절하자 정회장은 기지(機智)를 발휘하여 주머니에서 5백 원짜리 한국지폐를 꺼내 뒤집어 펴 놓으며 이순신의 거북선을 보여준다.
‘우리는 영국보다 300년 앞서 1,500년대에 이런 철갑선을 만들었소.’
롱 바텀은 5백 원짜리 우리나라 지폐에 그려져 있는 거북선을 요리조리 들여다보다가 물어본다.
‘이거 정말로 철판(鐵板)을 붙인 배냐? 이 배로 전쟁을 진짜 했냐?’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은 이 거북 철갑선으로 수십 배의 일본 해군을 물리쳤소. 못 들어 봤소?’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우리는 틀림없이 할 수 있으니 믿어달라고 설득하여 마침내 추천서를 받아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영국 수출신용보증국(ECGD)에서는 선주의 선박주문서를 제출해야 차관을 승인하겠다는 것이었다. 정주영은 즉시 당시 전 세계의 선박왕이라 일컬어지던 그리스의 오나시스(Onassis)를 찾아가는데 당시 회장은 오나시스의 처남 리바노스(George Livanos)였는데 그를 찾아가서 만났다.
정주영은 모든 서류를 내밀고 선박 주문을 의뢰한다고 하자 조선소(造船所)도, 조선 기술도 전무(全無)하던 시절의 한국인데 단지 정주영의 자신만만한 말만 듣고 의외로 리바노스는 26만 톤급 유조선 2척을 주문한다.
정 회장은 의외의 선선한 주문에 놀라면서 너무 고마워서,
‘틀림없이 좋은 배를 만들어주겠다. 대신 배 값도 싸게 해주며, 만약 약속을 못 지키면 계약금에 이자를 얹어 돌려주겠다. 그리고 계약금도 조금만 받고 우리가 배를 만드는 진척상황을 와서 보고 조금씩 중도금을 내고 만약 우리가 만드는 배에 하자(瑕疵)가 있으면 인수를 안 해도 좋고 원금은 몽땅 되돌려주겠다.’
훗날 정주영이 한 말은... ‘리바노스는 나보다도 더 미친 사람이었다!!’였다고 한다.
정주영은 유조선 수주(受注)계약서를 들고 영국 수출신용보증국(ECGD)으로 가서 보증을 받았고, 다시 바클레이스(Barclays) 은행으로 가서 서류를 내밀자 현대가 건설한 화력 발전소, 비료 공장, 시멘트 공장 등을 치밀하게 다시 한번 조사를 한 후 ‘수주계약서를 가지고 오면 승인하겠다.’는 자기가 한 말을 번복할 수는 없으니 황당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차관을 승인했다고 한다.
한국으로 온 정주영은 즉시 박정희에게 상세히 보고했고, 박대통령은 빙그레 웃으며 곧바로 비서들을 불러 울산 미포(尾浦)에 조선소를 짓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지원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정주영은 즉시 스웨덴에서 배 만드는 설계사를 데려오고 공사를 시작하는데 또 한 번 그의 특기인 기상천외한 발상을 한다. ‘조선소(造船所)는 조선소이고, 선박건조(船舶建造)는 선박건조다. 반드시 다 지어진 조선소에서 선박을 만들어야 된다는 법이라도 있는 것이냐?’
즉 조선소를 다 지은 후 배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조선소와 배를 동시에 만들기로 한 것이다.
리바노스가 주문한 배 한 척을 모래 해변에 구덩이를 파고 배를 만들면서 동시에 방파제를 쌓고, 바다를 준설(濬渫)하고 안벽을 만들고, 도크를 파고.... 14만 평의 공장을 단숨에 완공해버린다.
도크(Dock)와 배의 건조는 도크가 부분 완공되면 그 자리에 바로 철판을 대어 배를 만들어나가 도크와 배를 동시에 만든 것이다. 그리하여 5년 계약의 26만 톤급 두 척의 유조선을 2년 6개월 만에 성공적으로 만들어 리바노스에게 납품하는데 성공한다. 선박 건조능력 70만 톤, 부지 60만 평, 70만 톤급 드라이 도크 2기를 갖춘 국제 규모의 조선소는 기공식이 1972년, 준공을 본 것은 1974년 6월이니 만 2년 3개월 만이었다고 한다.
1974년 6월, 준공식에 참석한 박 대통령은 ‘조선입국(造船立國)’이라는 휘호를 내렸다.
그런데 국제적인 불황이 찾아오자 리바노스는 유조선을 수주해놓고 인수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정주영은 그에 대한 감사함이 남아있어 그 배를 우리나라 유조선으로 둔갑시켜 우리나라 석유(石油)운송사업의 기틀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니 오히려 전화위복(轉禍爲福)의 계기가 된 셈이다.
박정희가 1961년 군사쿠데타로 집권하여 5, 6, 7, 8, 9대 대통령을 역임하며 1979년 암살당할 때까지 18년간 집권하는데 정주영과 호흡이 잘 맞아 우리나라 근대사의 한 획을 그은 분들이라 할 것이다.
정주영의 어록(語錄) 중 재미있는 것은 사업지시를 하고 나서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면 ‘이봐, 해봤어?’
선박왕 오나시스는 케네디 대통령의 미망인 재클린과 결혼하여 세인의 이목을 끌었던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