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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16. 묵상글 들 ( 연중 1주 토요일-두려우면서도 자비로우신 하느님.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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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16.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연중 1주 토요일-두려우면서도 자비로우신 하느님
우리에게 하느님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무서우신 하느님과 자비하신 하느님,
초월적인 하느님과 함께 계시는 하느님.
그리고 사람에 따라 하느님을
두려움의 하느님으로 만나기도 하고 자비하신 하느님으로 만나기도 하는데
보통 아버지 하느님이 초월적인 분이시고 두려움의 하느님이라면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시고
우리를 위해 고통을 받으시는 자비하신 하느님이십니다.
오늘 히브리서도 이런 관점에서 하느님을 얘기합니다.
먼저 아버지 하느님을 이렇게 얘기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어떠한 피조물도 감추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그분 눈에는 모든 것이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이러한 하느님께 우리는 셈을 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읽으며 저절로 떠오르는 것이 바로 죄지은 후의 아담과 하와지요.
이들은 자기의 벌거벗은 모습을 감추려고 옷을 해 입고, 그것으로 부족하여
나무 사이에 숨는데 그 바람에 자기들은 하느님과 단절되지만 하느님은
감춘다고 감춘 그들의 숨은 모습을 다 보시며 너희 어디 있느냐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또한 시편 139편을 떠올립니다.
"주님, 당신은 저를 샅샅이 보고 아시나이다.
앉거나 서거나 매양 나를 아옵시고 멀리서도 제 생각을 꿰뚫으시나이다.
말소리 제 혀끝에 채 오르기 전에 주는 벌써 모든 것을 알고 계시나이다.
당신의 얼을 떠나 어디로 가오리까? 당신 얼굴 피해 갈 곳 어디오리까?
하늘로 올라가도 거기 계시옵고 지옥으로 내려가도 거기 또한 계시나이다.
어둠이나마 나를 덮씌워서 빛인 듯 밤이 나를 휘감는다면 할 때에도
어두움 그것마저 당신께는 어둡지 않아 밤 또한 낮과 같이 환히 밝으며
캄캄함도 당신께는 빛과 같으오리이다."
제가 너무도 사랑하는 시편인데 이렇게 하느님 앞에서 감출 수 없다고
생각하니 차라리 속이 편하고 다윗처럼 벌거숭이로 나가려고 합니다.
다윗도 자기 죄 숨기려고 하다가 들통이 나니 오히려 이렇게 노래하지요.
"당신의 눈앞에서 죄를 지었사오니 히솝의 채로써 내게 뿌려 주소서.
나는 곧 깨끗하여지리이다. 나를 씻어 주소서 눈에서 더 희어지리다."
문제는 우리가 다윗처럼 이리할 수 있으면 좋은데 그렇지 못하다는 겁니다.
단죄와 벌만 있다고 생각되면 하느님이 두렵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우리 편인 대사제가 계시다고 오늘 히브리서는 얘기합니다.
히브리서는 하느님께서 두려워 당신께 오지 못할 사람들을 위하여
우리 편이 되어줄 당신의 아드님을 대사제와 인도자로 보내셨는데
그분이 우리보다 앞서 하늘애 올라가 계시니 은총의 어좌로 나가라 합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 그러므로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
여기서 그 유명한 히브리서의 대사제론이 나옵니다.
사제란 어떤 존재입니까?
겁주는 것이 사제입니까?
인간의 연약함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무섭게 죄를 추궁하는 존재입니까?
사제란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서 하느님의 뜻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사람들의 고통에 동병상련하고 사람들 마음을 하느님께 아뢰는 중개자지요.
그래서 우리는 두 하느님, 두려우면서도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동시에 만나야 하느님을 온전히 만나는 것임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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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16. 연중 제1주간 토요일 /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
오늘의 묵상
오늘 독서인 히브리서의 특징은 ‘말씀하시는 하느님’ 또는 ‘하느님 말씀’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특히 초대 교회의 어떤 기록보다도 구약 성경의 내용을 많이 인용하면서, 창조 때부터 지속되는 하느님의 말씀을 통한 구원의 업적을 전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이러한 하느님의 말씀이 믿음을 통하여 어떻게 교회 안에서 전해지며, 그 말씀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은 참으로 삶을 변화시킬 힘을 가지고 있다.”라고 하십니다. 곧 하느님의 말씀은 입에는 꿀같이 달고 위로가 되는 달콤함을 주지만, 우리 마음에 불안을 안겨 주는 칼이기도 하여 깊은 곳을 꿰찌르고 영혼의 깊숙한 곳에서 어둠을 밝히는 빛을 가져옵니다.
우리의 영혼은 하느님의 말씀에 꿰찔림으로써 정화됩니다. 곧 말씀인 칼이 처음에는 상처를 주지만 하느님의 사랑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모든 것을 베어 내어 다시 하느님께 향하게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레위에게 “나를 따라라.” 하시는 예수님의 부르심은 레위를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를 빛으로 부르시며 당신 말씀의 칼로써 회개의 삶으로 이끄시어 당신의 사랑과 일치하게 하시려는 초대입니다. 우리도 매번 “나를 따라라.”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나의 삶이 그리스도를 통한 사랑의 삶으로 변화되어야 하겠습니다.
- 신우식 토마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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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16. 이영근 아오스딩 수사님.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습니다.” (연중 1주 토)
오늘 <복음>은 세리인 레위를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관에 앉아있는 레위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습니다.”(마르 2,14)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발의 움직임이라기보다는 마음의 움직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발걸음으로서가 아니라, 삶의 방식으로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곧 앵무새처럼 입으로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혹은 다람쥐처럼 행실로만 본받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이고 본질적인 삶의 자세와 태도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단순이 겉으로만 따르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이 가치관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전인격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이요 세상을 바라보는 눈의 전환입니다. 곧 사랑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삶의 방식이요, 용서와 자비의 삶의 방식이요,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마르 2,16) 방식입니다. 죄인이기에 단죄하고 처벌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눈과 방식이 아니라, 죄인이기에 용서하고 사랑해야 할 눈과 방식인 것입니다. 그야말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요, 나아가서는 바오로 사도의 표현대로 그리스도로와 같은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바오로는 “그리스도와 같은 모습이 되는 것”(로마 8,29;필립 3,10)이요, “그분의 형상을 지니는 것”(1코린 15,49)이요, “그리스도를 입는 것”(로마 13,14;갈라 3,27;콜로 3,10;에페 4,24)을 말합니다. 곧 단순히 도덕적 치원에서 이루어지는 모방을 넘어서는 신비주의적 차원까지를 포함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삶의 방식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단죄하고 비난하였습니다. 사실, 죄인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은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었습니다. 불결한 이들과의 접촉은 그도 불결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과 식사를 하신 것은 단순히 그들과의 타협도, 그들을 두둔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보내는 신의요, 자비요, 호의였습니다. 그들을 단죄한 것이 아니라 용서하신 까닭입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죄인들과 함께 어울린다.’고 비난하는 것은, 마치 의사가 병자들과 함께 있다 하여 비난하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사실,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상징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서로 기쁨을 나누는 것이요, 사랑을 나누는 행위요, 한 가족임을 나타내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죄인들 속으로 들어와 그들을 당신의 가족으로 삼으십니다. 자신의 몸에 죄를 묻힘으로 죄인들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인가? 이 얼마나 놀라운 감격인가? 이는 죄인을 ‘먼저’ 용서하신 까닭입니다. 죄인들의 회개를 앞세우기보다, ‘먼저’ 용서하신 까닭입니다. 흔히, 우리는 죄지은 이에게 ‘먼저’ 회개하라고 강요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먼저’ 용서하시고, ‘먼저’ 함께 식사를 하시며 당신과 한 가족으로 받아들이십니다. ‘먼저’ 죄인을 찾아오시고, ‘먼저’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보다 ‘먼저’ 죽으시고, 우리보다 ‘먼저’ 당신을 건네주십니다. 우리 역시 죄지은 형제에게 ‘먼저’ 다가가고, ‘먼저’ 용서해야 할 입니다.
오늘도 그 놀라운 사랑으로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라.”(마르 2,14)
하오니, 주님!
오늘 우리가 죄지은 형제에게 ‘먼저’ 회개해야 용서하겠다고 완고해지는 일이 없게 하소서! ‘먼저’ 용서하고 자비롭게 하소서! 당신께서 저희를 먼저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17)
주님!
당신께서는 제가 죄인이기에 부르셨습니다.
이미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분명, 저는 용서받은 죄인입니다.
그처럼 용서하라 하십니다.
그렇게 당신을 따르라 하십니다.
오늘 제가 용서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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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16. 연중 제1주간 토요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2,13-17: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예수께서는 돈벌이에 대한 탐욕으로 가득 찬 레위가 세관에 앉아있는 것을 보셨다. 그가 받은 새 이름은 마태오였다. ‘마태오’라는 이름은 ‘선물 받은 사람’이란 뜻으로 거룩한 은총의 위대한 선물을 받은 사람에게 어울리는 이름이다. 그는 탐욕에 젖은 세리 생활에서 떠나 주님을 따른 사람이다.
“나를 따라라.”(14절) 이 말씀은 당신을 닮으라는 말씀이다. 발걸음으로 그분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생활방식을 따르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머문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도 그분께서 살아가신 것처럼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1요한 2,6) 이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다.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14절) 주님의 명령 한 마디에 마태오가 모든 것을 버리고 빈털터리이신 주님을 따랐다. 말씀을 통하여 그를 외적으로 부르시고 주님께서는 내적으로도 보이지 않는 선물을 주시어 당신을 따라다닐 수 있게 하셨다.
예수께서는 마태오를 부르시고 그와 함께 식사하시면서 많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하셨기 때문에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을 비난한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어울리시는 것은 그들의 구원을 위한 것이다. 그래서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17절) 말씀하신다.
그분은 의로운 이들을 건강하다 하시고, 죄인들을 병들었다 하셨다. 그러기에 병든 사람들은 자기 힘을 자랑해서는 안 된다. 자기 힘이 아무리 세다 하여도 스스로 구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제는 건강하지도 않으면서 스스로 건강하다고 생각하여, 의사를 찾지도 않을 뿐 아니라 성가시게 여기며 때리기까지 한다. 자기 병을 제대로 알고 고치기 위해서는 그만한 고통이 따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13) 우리는 누구도 완벽하게 의로운 사람은 없다. 모두가 죄인이기 때문에 “주님, 구원을 베푸소서. 의로운 이는 사라져 버렸습니다.”(시편 12,2)라고 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의인이 되도록 기도해야 한다. 우리가 간절히 바라고 그렇게 노력하면 그렇게 되어 갈 것이다. 여기서 필요한 것이 성령의 은총이다. 성령의 은총으로 치유되고 도움을 받지 않으면 그러한 일이 이루어지기는 힘들 것이다.
예술가가 투박한 돌을 아름답게 조각하여 멋진 예술작품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그 돌을 귀하게 다룬다. 예수께서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까닭은 우리가 죄인인 채로 그냥 남아있게 하시려고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다. 조각가이신 주님께서는 우리를 투박한 돌을 보시듯 하신다. 투박한 돌이 아니라, 앞으로 만드실 작품을 생각하시며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온전히 그분의 말씀을 따르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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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16.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 17)
등잔 밑이
어둡다.
우리자신을
새롭게
보게된다.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이다.
구원하시는
주님이시다.
포기할 줄
모르시는
주님이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새로운
일이시다.
복음의
생명력은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겸허함에 있다.
망가져 있는
우리자신을
부르시는
사랑에 있다.
의인의 모습과
죄인의 모습이
뒤섞여 있다.
부르심을
선물로
주셨다.
부르심은
만남이다.
숨겨져 있던
선함과
아름다움을
다시
만나는 것이다.
사랑은
결국 모든
것을 선하게
만든다.
사랑은
서로를
비추어준다.
예수님의
진정한 힘은
죄인을
부르시는
사랑의 깊이에
있다.
모두가
사랑받을
충분한 가치가
있는
사람들이다.
빼앗긴
사랑의 품위를
되찾아 주신다.
부르심은
변화와
기쁨이다.
그리고
하느님 자녀로
다시 돌아가는
회복이다.
살아볼만한
삶이다.
죄인을 다시
하느님의
사람으로
바꾸어놓는
신비이다.
주님의 힘
주님의
그 방식을
믿고 따른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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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16. 새벽을 열며. 연중 제1주간 토요일. 빠다킹 신부님.
한때 세계 최고의 부자라고 이름을 올렸던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빌 게이츠는 통 큰 기부를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그의 검소한 생활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렇게 부자이면서도 웬만한 거리가 아니면 비행기 좌석으로 이코노믹 클래스를 이용합니다. 그 이유를 “일등석 요금으로 몇 배의 금액을 지불한다고 해서 도착하는 시간이 몇 배 빠른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라고 말합니다. 호텔에 투숙할 때도 “큰 방은 아깝습니다. 누울 자리와 통신만 연결된다면 그것으로 좋습니다.”라면서 좋은 방을 요구하는 법도 없습니다.
빌게이츠를 향해 사람들은 돈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라고 평가합니다. 자신의 편함을 위해 돈을 쓰는 것이 아니라, 더 큰 목적을 위해 사용하고 있기에 그는 돈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종종 돈에 얽매이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나눔을 실천할 생각 없이 자신의 돈에 대한 욕심으로 인해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항상 부족한 마음만 가득합니다. 하긴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의 돈을 가지고 있으면 충분하겠냐고 물어보면, 본인은 욕심이 없다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지금보다 조금만 더 많이요.”
예수님께서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에게 “나를 따라라.”라고 부르십니다. 그는 곧바로 주님을 따릅니다.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의 불만이 생겼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리인 레위를 제자로 부르는 것도 그렇지만, 죄인이라는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시면서 어울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예수님께서는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라고 하시지요. 의사가 병자들에게 다가갔다 하여 비난받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건강을 얻으려면 병을 일으키는 행실을 바꿔야 합니다. 레위는 일어나 곧바로 주님을 따르지요. 주님과 함께 하는 행실로 바꾼 것입니다. 이제까지는 돈만을 바라보면서 살았다면, 이제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살게 된 것입니다. 그는 의사이신 주님으로부터 치료를 받아, 세상에 얽매이는 삶에서 벗어나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구원의 길에 더 가까워졌습니다.
우리도 나 자신의 행실을 바꿀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세상 것에 대한 욕심과 이기심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을 실천하면서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고, 주님의 제자가 되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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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재주가 없어서라기보다는 목적이 없어서 실패한다(윌리임 A 빌리 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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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해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영어의 ‘thank’와 ‘think’는 같은 어원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즉, 우리가 깊이 생각하면 감사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실존주의 철학가 하이데거도 ‘생각하는 것이 곧 감사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생각해보면 감사할 일이 참 많습니다. 미처 깨닫지 못하는 세상의 많은 사람으로부터 도움을 받고 있으며, 지금 이렇게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할 일입니다. 감사할 대상이 있다면 여기에 추가할 항목은 늘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감사하지 못하는 사람은 추가할 항목 자체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행복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결정됩니다. 그래서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채워야 행복할 것이라는 바람은 헛된 꿈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가지고 있는 것을 어떻게 바라보느냐가 중요합니다. 가난해도 행복할 수 있고, 부유해도 비참해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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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16. 연중 제1주간 토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마르 1,10)고 마르코가
증언한 것은, “아, 하늘을 쪼개시고 내려오소서”(이사 63,19) 하도 내다보았던 이사야의 영향일 것입니다.
과연 강생하신 메시아께서는 거짓의 현실을 쪼개는 날카로운 말씀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히브 4,12).
그리하여 이 창조의 전망 하에서는 “어떠한 피조물도 감추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히브 4,13).
마르코가 1장에서 예수님의 복음선포 활동을 보도한 대로, 그분의 활동 가운데
기적들이 나타났기 때문에 그 소문이 삽시간에 퍼져서 군중이 모여 들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분은 마을을 벗어나서 호숫가로 나가셨습니다.
따라 나온 군중을 모아 놓고 하느님 나라의 복음으로 가르치셨을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분이 무슨 이야기로 가르치셨는지를 유난히 귀 기울여서 듣던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을 길을 지나가시던
예수님께서 만나셨습니다. 그는 레위 지파 출신 알패오의 아들로서 세리였던 마태오였습니다.
세리라는 직업은 동족으로부터 세금을 걷어서 로마 제국에 갖다 바치는 일을 했고,
입도선매(立稻先賣) 방식으로 특정 지역의 징세권을 따내면 그 다음에는
누구에게 얼마를 걷든 상관이 없었기 때문에 돈을 많이 모을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당연히 동족으로부터는 원성을 사다 못해 공적으로 기피하는 인물로 취급을 받았습니다.
오죽하면 창녀와 같은 부류로 취급을 받다 못해 죄인들의 대표격으로 멸시를 받았겠습니까?(마르 2,16; 마태 21,31).
그러던 그가 우연히 군중 속에 끼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제껏 살아온 인생에 대해
회의를 심하게 느끼며 갈등하던 중에 길을 지나가시던 그분과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심란해진 그의 심중을 예수님께서 알아차리기라도 하신 것처럼,
세관에 앉아 있다가 마주친 그에게 그분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라라”(마르 2,14ㄴ).
제자로 부르시는 그 한 말씀이 마태오의 심중을 갈라놓고 쪼개었습니다.
그리고 두말없이 “일어나 그분을 따랐습니다”(마르 2,14ㄷ).
재물을 모으느라 쏟았던 영민한 열정이 이제는 예수님께로 향해 바뀐 것입니다.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두 사람의 마음이 하나로 모아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이 순간에 마태오의 마음이 어떠했는지는 그가 자기 집에 예수님을 모시고 대접하면서,
동료 세리들과 당시 죄인 취급을 받던 사람들로서 군중 속에 섞여 그분 말씀을 듣고
제자들의 뒤를 따라 오던 이들까지 모두 불러 자리를 함께 하였던 것만 보아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죄인들의 잔치’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처하던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을 매우 불편하게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분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불평하였기 때문입니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마르 2,16).
당시 풍습으로 볼 때 음식을 함께 먹는다는 행위는 친구로 맞아들이는 것이었기 때문에,
중풍 병자의 죄를 용서한다는 사죄선언 못지않게 율법상 죄인이었던 이들과 친구를 하시겠다는
예수님의 처신은, 율법 학자들이 느끼기에, 율법에 대해 상당히 심각한 도전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건강한 이들에게야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마르 2,17ㄴ)는 말씀으로 대꾸하셨습니다.
이어서,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17ㄷ)고 덧붙이신 말씀은
그들의 위선을 쪼개시는 날카로운 힘으로 그 당시 상황의 본질을 드러내 주는 동시에
죄스러움과 의로움의 자리를 역전시켜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이 일화는 죄인으로 취급받던 이들에게는
위안과 희망을 안겨 주지만, 스스로 의롭다고 자처하던 의인들에게는 하느님 앞에
불경스러운 죄를 짓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과 경계심을 자아내는 묵상도 던져줍니다.
세리였던 레위 마태오에게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라.” 하고 던지신 말씀 한 마디는 그의 일생을
통째로 바꾸어 놓았으므로, 그는 그분의 제자가 되어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현장을 따라 다니며,
그분의 말씀을 귀 담아 들었다가 나중에 자신의 복음서에 모아서 소개하였습니다.
재물에 대한 영민함 대신 말씀에 대한 영민함이 발휘된 셈입니다. 마태오가 집대성해 놓은 이 설교모음은
후대의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통해 예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는 말씀이 되어 주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마태오를 거쳐서 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까지
하느님의 말씀이 살아 있음을 실감하도록 성령께서 역사(役事)하신 결과입니다.
이러한 창조의 과정은 악을 선으로 위장하고 거짓을 참으로 위장한 세력에 의해
둘러싸여 진행되지만, 언제나 이 위장된 상황을 날카롭게 쪼개시는 말씀의 힘에 의해서 이룩되곤 합니다.
이 말씀에서 병든 이들이 치유를 받고, 죄인들이 의로워지며, 새로운 아나빔들이 된 이들에 의해
새 하늘과 새 땅이 더욱 널리 퍼져 나갑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죄를 반대하기 때문에 오히려 죄인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는 예수님의 노선은 조심스럽게 계속되어야 하고 견지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를 부르시는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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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16. 연중 제1주간 토요일/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아침이면 밥을 차려먹습니다. 처음에는 이것저것 많이 준비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간단하게 먹기 시작했습니다. 귀찮기도 하고, 다 먹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어머니들도 그러셨습니다. 식구들을 위해서 식사를 준비할 때면 정성을 들여서 이것저것 반찬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식구들이 모두 나가고 혼자 남으면 밥에 물을 말아서 김치와 드시곤 했습니다. 식구들을 위한 정성과는 다른 식사였습니다. 식당 하는 분들도 그렇습니다. 손님을 위한 식사는 정성껏 준비하지만 본인이 먹는 밥은 적당이 먹기 마련입니다. 매일 같은 음식을 먹는 것도 그렇고, 시간도 없기 때문입니다. 조그만 식당을 하는 젊은이가 좋은 생각을 실천하였습니다. 식당 하는 사람끼리 음식을 ‘바꿔먹기’로 했습니다.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가입하는 식당의 주인들은 서로의 음식을 바꿔 먹을 수 있습니다. 다양한 음식과 정성이 들어간 음식을 먹을 수 있어서 좋았다고 합니다. 생각을 바꾸면 삶이 바뀌는 것을 보았습니다.
코로나19로 바뀐 신앙생활이 있습니다. 영상으로 미사를 보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어르신들은 점차 익숙해지는 것 같습니다. 방에 초를 켜놓고, 미리 말씀을 묵상하고 영상 미사를 시청합니다. 성당에 있으면 분심이 드는 것들이 있었는데 집에서는 오히려 집중이 잘 된다고 합니다. 본당에서는 본당 사제의 강론만 들었는데, 영상 미사에서는 여러 신부님들의 강론을 들을 수 있다고 합니다. 날씨가 추워도, 비가와도, 코로나19로 성당 문이 닫혀도 영상 미사는 아무런 제약이 없습니다. 본인이 마음만 먹으면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말씀의 식탁에서 강론을 듣고, 머물 수 있습니다. 대림특강도, 성서공부도, 인터넷이 연결되는 곳이면 쉽게 찾아서 볼 수 있습니다. 저도 밴쿠버의 한인 성당을 위해서 영상으로 대림특강을 하였습니다. 시차 때문에 늦은 시간에 강의를 하였지만 준비만 짜임새 있게 잘 하면 굳이 비행기를 타고 밴쿠버까지 가지 않아도, 추운 겨울에 성당까지 오지 않아도 안전하게 집에서 특강을 들을 수 있습니다.
중세에 있었던 흑사병은 유럽의 문화를 바꾸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르네상스가 꽃을 피웠고, 성모신심이 교회에 널리 전해졌습니다. 르네상스는 인본주의와 자본주의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성모신심은 성모님의 발현으로 드러났습니다. 성모신심은 성모님께 대한 교리가 되었습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셨고, 성모님은 원죄 없이 잉태되셨으며, 성모님은 승천하셨습니다. 성모님은 신앙인이 따라야 할 모범이 되셨습니다. 2020년 코로나19는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인식을 바꾸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바이러스 앞에서 우리의 무력함을 보았습니다. 소중한 생명을 잃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였습니다. 성지순례를 갈 수 없었습니다. 박해시대에도 멈추지 않았던 미사가 중단되었습니다. 마스크가 우리의 일상이 되었습니다. 코로나19 이후의 세상을 생각합니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바이러스와도 공존해야 합니다. 우리가 쌓아온 물질과 자본의 탑은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는 바벨탑과 같습니다. 개발과 발전의 패러다임에서 연대와 협력의 패러다임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우리가 코로나 이후에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말해 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우리에게는 하늘 위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사제가 계십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을 굳게 지켜 나아갑시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 삶의 중심에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연대하고 협력해야 하는 이유를 말씀해 주십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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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16. 연중 제1주간 토요일.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따름과 배움의 여정
- 무지에 대한 답은 말씀이신 그리스도 예수님뿐이다 -
배움을 권하는 글은 동서고금 공통적입니다. 고문진보古文眞寶에 나오는 글을 소개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면 행복해지고 욕심도 사라지듯 좋은 말씀을 읽으면 행복해지고 욕심도 사라집니다. 남자가 여자女子를 좋아하듯 배움을 좋아하라 호학好學입니다.
“힘써라, 후생들이여! 힘써 가르침을 구하라.
훌륭한 스승을 찾아 자신을 던져 결코 몽매蒙昧함에 머물러 있지 마라.
힘써 그대들은 어서 배움을 닦아 공연히 늙기만 기다렸다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중국 송나라의 재상, 사마광의 권학가勸學歌입니다. 배불리 먹고 따뜻이 입으며 안일하게 지내면서 가르침이, 배움이 없으면 금수禽獸에 가까워집니다. 송의 대유大儒 주희의 권학문勸學文에 이어 ‘우성偶成’이란 시입니다.
“말하지 말라. 오늘 배우지 않고 내일이 있다고
세월은 무심히 흐를뿐 결코 나를 기다리지 않는다.
아아, 늙었노라! 이 누구의 허물인가.”
“소년은 늙기 쉬운데 배움은 이루기 어려우니
짧은 시간일지라도 결코 가벼이 여길 수 없네
못가 봄품의 꿈에서 채 깨기도 전에
섬돌 앞 오동잎 떨어져 벌써 가을이네.”
올해는 신축년辛丑年 소해입니다. 소에게서 버릴 것은 '하품' 하나뿐이라 합니다. 우보천리牛步千里, 우행호시牛行虎視의 자세로 하루하루 한결같이 배움의 수행에 충실해야 되겠습니다. 구상 선생의 말씀처럼 진정 내세를 걱정한다면 하루하루 오늘서부터 내세를, 아니 영원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연한 만남은 없습니다. 특히 주님과의 만남은 그러합니다. 누구나 마음 속 깊이 간직된 진리이신 주님을 찾는 열정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갈망과 배움에 대한 사랑 역시 누구나 깊이 간직된 천성입니다. 진리이신 주님을 찾는 갈망이 우리를 깨어있게, 살아있게 합니다. 주님을 만나게 합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주인공 세리가 그 모범입니다. 주님은 세리의 갈망을 한눈에 알아챘음이 분명합니다. 참으로 주님을 찾는 갈망이 있을 때 주님을 만나는 천복의 은총입니다.
“나를 따라라!”
얼마나 감격적인 부르심입니까? 말씀의 빛이 무지의 어둠을 환히 비추는 순간입니다. 부르신 분은 누구입니까? 바로 언제 어디서나 살아계신 만고의 영원한 스승,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이제부터 레위는 예수님 제자 공동체에 합류하여 주님을 따라 배움의 여정에 올라 평생학인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말씀이자 진리이신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무지의 어둠에서, 속박에서 벗어나 주님을 따라 빛의 여정, 자유의 여정에 오르게 된 레위입니다. 부질없는 만약의 가정법 질문이지만, 만일 세리가, 우리가 주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 인생 어떻게 전개되었을까요? 주님과의 만남이 얼마나 큰 천복의 은총인지 깨닫습니다.
잘 들여다 보면 레위의 부르심에 이의를 제기하는 바리사이파 율법학자들이 진짜 무지의 죄인들이요 무지의 병자들임을 깨닫습니다.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 참 명쾌하고 통쾌합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알고 보면 우리 모두가 무지의 병자들이자 무지의 죄인들입니다. 한 두 번 부르심이 아니라 매일 평생 부르심에 응답하여 배움의 여정에 충실할 때 무지의 병도 치유되고 무지의 죄도 용서받습니다. 무지에 대한 근원적 처방은, 답은 말씀이신 그리스도 예수님뿐입니다. 이런 예수님을 배워 닮아가면서 비로소 무지의 어둠과 속박에서 벗어나 빛의 사람, 자유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빛이자 생명이신 말씀을 통해 살아계신 주님을 만납니다. 이런 말씀 공부가 진짜 평생 공부입니다. 말씀을 통해 주님을 깊이 배워가는 우리들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 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어떠한 피조물도 감추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그분 눈에는 모든 것이 벌거숭이로 드러납니다. 이런 하느님께 예외없이 우리는 셈을 해드려야 합니다.
오늘 제1독서 히브리서 말씀이 참 고맙습니다. 바로 이것이 말씀의 힘입니다. 인간의 본질은 욕심도 허무도 아닌 이런 말씀입니다. 말씀이신 주님과의 끊임없는 일치를 통해 무지로부터 벗어나 주님을 닮은 참나의 실현입니다. 평생 과정이요 세상에 태어난 우리의 보람이자 소명召命입니다. 그러니 평생 말씀 공부와 실천은 필수입니다. 평생을 살아도 말씀이신 주님을 만나지 못하고 무지의 어둠중에 인생 마친다면 얼마나 억울하고 허무하겠는지요!
우리가 평생 따르고 배우는 스승님은 하늘 위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사제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형제자매님들!
확신을 가지고 매일 우보천리, 뚜벅뚜벅 한걸음 한걸음, 주님을 따라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자비를 얻고 은총을 받아 필요할 때에 도움이 되게 합시다. 바로 은총의 어좌에서 주님을 만나 필요한 은총을 풍성히 받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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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16. 연중 1주간 토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죄인이어서 행복합니다
가능한 1개월에 한번 정도는 고해성사를 보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늘 성사를 보면서 들어갈 때 마음과 나올 때의 마음이 다르다는 것을 느낍니다. 성사를 보고 나서 그 거룩해진 마음을 잘 지켜야 하는데 작심삼일입니다. 허물을 벗은 기쁨이 큰 만큼 더 열심히 살아야 하지만 자유를 얻고는 곧 옛 모습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예수님과 깊이 만나지 못하고 그저 형식적이고 습관적인 신앙생활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남들에게는 열심 한 것처럼 위선을 떨면서 여전히 사랑을 받으려 합니다. 같은 잘못을 자꾸 반복하다 보니 성사보기를 꺼리게 됩니다. 정말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길을 가시다가 세관에 앉아있는 레위를 보시고 “나를 따라라”(마르2,14). 고 말씀하셨습니다. 레위는 마태오라는 세리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세리는 세금징수를 위임받은 사람입니다. 이들은 세무 당국과 계약을 맺어 세금을 징수했는데 정한 액수보다도 더 많이 거둬들여 차액을 착복하는 일도 많았고, 이들은 돈밖에 모르는 탐욕스러운 사람으로 따돌림을 받고 직책상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유다교를 올바로 믿으려면 세리 직을 떠나야 했습니다. 하필 그런 죄인인 세리를 예수님께서 부르셨습니다.
그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이기에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음식을 나누며 당신의 삶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는 죄인이어서 행복하였습니다. 의인을 자처하는 바리사이, 율법학자가 아니어서 행복했습니다. 오늘도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부르십니다. 내가 건강하지 않기 때문에 의사로서 오십니다. 허물로 누벼놓은 이 날을 주님의 자비가 감싸고 있습니다. “하느님께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우리입니다. 우리가 죄인이라 해도 우리는 하느님 마음에 가장 소중한 존재입니다”(프란치스코 교황).
레위가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듯이 내가 예수님을 따라나서면 인생이 바뀝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실천하면 행복을 차지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실 자기를 안전하게 지켜 주었고 모든 것을 보장해 주던 익숙한 자리를 버리고 따른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어쩌면 하나의 인생 도박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이 “네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줄 땅으로 가거라.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창세12,1). 고 말씀하셨을 때 그대로 행하였고 오늘 그를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릅니다.
그물을 손질하고 있던 어부를 부르시고 그들을 당신의 제자로 삼으셨고, 세관에 앉아있던 레위를 부르셔서 인생을 새롭게 하였듯이 오늘도 구체적 삶의 자리에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내 처지나 상황이 어떠하든 상관없이 다양한 방법으로 나를 부르시고 당신의 모든 것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그러므로 부르심에 응답하고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인생의 주관자이십니다. 그분의 부르심을 행복으로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소위 의인이라고 자처하는 자, 곧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보다는 자기 자신의 정의에 만족하는 자는 예수님을 거부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정의보다는 사랑을 갈망했으면 좋겠습니다. “정의는 사랑을 포용하지 못하지만 사랑은 정의를 포용”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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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16.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연중 제1주간 토요일.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이 드러납니다.
"나를 따라라."(마르 2,14)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다가 세리인 레위를 부르십니다. 레위는 복음사가 마태오로 알려진 인물이지요. 이 부르심 대목이 마태오복음에서는 있는 그대로 "마태오"라 표기되지만, 마르코복음과 루카복음에서는 "레위"라 불립니다.
"이런 이들이 예수님을 많이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마르 2,15)
레위 집에서 벌어진 잔치에 "많은 세리와 죄인도" 함께합니다. 말하자면 레위의 직업적 동료들이나, 서로 비슷한 평판을 받는 이들이 몰려온 겁니다. 그들도 소문으로만 듣던 예수님과 함께하고 싶었나 봅니다. 자신들을 소외시키거나 함부로 내치지 않으시리라는 믿음도 있었겠지요.
세리는 이스라엘 민족의 혈세를 과중히 받아내어 부당한 이득을 착복하고 나머지를 로마에 상납하는 이들이고, 공공연하게 죄인이라 불리는 이들이라면 아마 율법이 정한 여러 규정을 지킬 수 없었던 이들일 겁니다. 그들과의 접촉으로 불결하게 될까봐 바리사이나 율법 학자, 사제들은 상종하기조차 꺼리는 이들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벗이 되어 주십니다. 종교 기득권층의 눈에는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이며 먹보요 술꾼"인 예수님이 늘 불편했을 겁니다. 예수님 자신이 선한 의인이면서도 상종 못할 인간들 곁에 서서 그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시니까요.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17)
불평하는 이들에게 예수님께서 당신이 오신 목적을 밝히십니다. 그런데 오늘 제게는 이 말씀 안에서 예수님이 슬쩍 삼키신 말씀들이 들리는 듯합니다.
"나는 (스스로) 의인(이라 여기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이들)을 부르러 왔다."라고요.
구약 시대에는 율법을 기준으로 의인과 죄인이 갈렸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오신 뒤에는 믿음이 그 기준이 되었지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이는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됩니다. 끝까지 믿지 않는 이들은 스스로 구원의 자리를 박차고 나갈 것이고요.
제1독서에서는 죄인들을 품으시는 예수님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를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히브 4,15)
예수님은 인간의 모든 조건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나셨습니다. 잠시 가면을 쓰신 것도 아니고, 사람인 척 행세만 하신 것도 아니지요. 그분은 인간의 육을 취하심으로 보통의 사람이 겪는 약함과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셨습니다. 겟세마니에서의 고뇌와 십자가 위에서의 절규가 이를 생생히 증언하지요.
그렇기에 예수님은 인간의 약함을 동정하고 연민하십니다. 그분 마음에는 우리를 향한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 애잔히 흐릅니다. 다만 유혹에 넘어가거나 죄를 짓지는 않으셨습니다. 인간이 오히려 그분을 죄인으로 몰아 극형에 처했지요.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을 굳게 지켜 나아갑시다."(히브 4,14)
믿음이 우리를 의롭게 합니다. 믿는 이는 구원 안에 있습니다. 혹시 의혹과 불안을 안고 어정쩡하게 구원을 의심하고 있다면 스스로의 믿음부터 성찰해야 합니다.
주님은 나약한 우리의 믿음이 견고한 확신이 되도록 여러 모습으로 현존하십니다. 우리가 드리는 미사성제, 그분을 모시는 성체성사, 죄를 사해 주시는 고해성사, 그리고 말씀과 기도와 자선, 선행과 희생 등 다양하지요. 그중에서 "말씀"은 우리 영혼이 하느님을 깨닫고 그분의 뜻을 따르며 믿음을 견고히 하는데 탁월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고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히브 4,12)
말씀이 우리 믿음을 순수하게 해 주시고, 또 거룩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늘 부족하고 나약한 우리지만, 매일 다가오시는 말씀에 힘입어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나아갑시다. 매일 말씀에 머물러 그 빛에 영혼을 쬐이고, 그 손길에 의탁하는 이는 나날이 새롭고 견고해지는 영혼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그러니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히브 4,16) 이 말씀이 곧 죄인이며 의인인 우리에게 다가오신 진리입니다. 죄인인 벗님을 축복합니다!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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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16. 이병우 루카 신부님. <연중 제1주간 토요일>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2,17)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 오신 분명한 이유를 전하고 있습니다. 이는 '교회가 나아갈 분명한 방향'이며,
예수님의 직무대리자인 '성직자들의 구체적인 사목방향'이기도 합니다.
"나를 따라라."(마르2,14)
예수님께서 죄인을 부르십니다.
예수님께서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부르십니다.
마르코 복음사가가 전하고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는 세관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고, 열두 제자 중에서 '마태오'라고 불리는 사람입니다.
당시 죄인 취급을 받고 있었던 레위가 예수님 부르심에 응답합니다. 일어나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죄인을 부르시고,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드시면서 친교(코이노니아)를 나누신 예수님!
그래서 당신 주위에는 늘 죄인들로 가득했던 예수님!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에 끝까지 딴지를 걸었던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의 이런 모습을 보고,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마르2,16)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2,17)
"나는 죄인이 아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 완전한 사랑이신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사람이라면 결코 그렇게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 앞에서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기쁜소식 그 자체이신 분명한 이유이며, 왜 예수님의 성탄과 죽음이 기쁨인지에 대한 분명한 이유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죄인들을 바라봅시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낮은 곳을 바라봅시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어두운 곳을 바라봅시다!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히브4,16)
그래서 그곳이 복음이 되고,
그래서 그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기쁜소식)이 됩시다!
이병우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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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16. 전삼용 요셉 신부님. 연중 제1주간 토요일(마르코 2,13-17)
<자신들이 죄인인 줄 아는 공동체에 머물라>
어제 복음은 네 명의 믿음이 있는 공동체 안에 머무른 병자가 죄도 용서받고 병도 치유 받는 내용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세리 레위가 예수님께 부르심을 받는 내용입니다. 내용이 전혀 상관없는 것 같지만 마르코는 여기서 레위가 어떤 공동체에 머물렀는지를 알게 합니다. 바로 ‘죄인이며 병자임을 깨닫게 하는 공동체’에 머문 것입니다. 반면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자신들이 죄인이며 병자임을 인정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속한 공동체는 무엇이 죄인지 알게 할 수 있는 빛이 없기 때문입니다.
영화 ‘이끼’(2010)는 한 타락한 형사가 사람들을 따르게 만드는 힘이 있는 목사와 협력하여서 한 시골 마을을 만드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그 형사는 큰 죄를 지은 이들을 자기 마을에 살게 하며 자신은 이장으로 권력을 누립니다. 그러나 깐깐한 목사가 눈엣가시입니다. 목사가 죽자 그들에게 평화가 찾아옵니다. 그들이 아무리 나쁜 짓을 해도 그 마을에서는 그들에게 벌을 내릴 아무 사람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냥 그들과 어울리며 자신들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들을 몰아내면 그만입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이 세상 공동체는 모두가 다 자신들이 죄인임에도 그것을 감추고 의인인 것처럼 살아갑니다. 그런 분위기에서는 누가 들어와도 다 의인처럼 자신을 여깁니다. 그러면 죄를 용서해 주러 오신 분이 필요 없어집니다. 예수님은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라고 하십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미리내 천주성삼 수도회 임언기 신부가 임종 직전 한 냉담자에게 병자성사를 주러 갔었습니다. 본인이 청한 것은 아니고 주위 신자들이 청했던 것입니다. 병자는 이미 배에 복수가 차 있고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는 죽음을 목전에 둔 간암 말기 환자였습니다. 사실 당사자는 오랜 냉담을 하고도 병자성사를 거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신부님은 말을 할 수 없는 처지인 줄 알고 일일이 십계명을 읊어주며 해당하는 것에 고개만 끄떡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병자는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신부님은 고해성사와 병자성사를 거부하는 것에 대해 확신하고 방을 나섰습니다. 그때 신부님의 뒤에서 환자가 크게 외쳤습니다.
“나 죄 없어!”
물론 외적으로는 죄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서 의로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는 죄가 무엇인지 깨닫게 하는 공동체에 머물 줄 몰랐습니다. 구원을 위해 자신들이 죄인임을 아는 공동체가 절대적으로 요구됩니다.
모두가 눈 하나만으로 생활하는 마을에서는 오히려 눈 두 개를 사용하는 사람이 병든 것입니다. 눈을 고치려면 두 눈으로 정상적으로 사는 마을로 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라고 하십니다. 내가 죄인임을 인정하게 하지 못하는 공동체는 구원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2020)란 영화 제목이 있었습니다. 조직 보스인 형을 죽인 한 킬러를 동생 킬러가 복수하기 위해 쫓는다는 내용입니다. 그게 다입니다. 황정민, 이정재는 모두 킬러입니다. 황정민은 이정재의 형을 죽였고 이정재는 그래서 황정민에게 복수하기 위해 쫓습니다. 여기서는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인지 구별이 되지 않습니다. 도대체 어떤 악에서 구해달란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누구나 다 죄인이지만 서로 남의 탓을 하며 자신이 죄인인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황정민이 자신의 딸을 만났을 때는 상황이 달라집니다. 자신이 살아온 삶이 어린 딸의 순수한 눈에 죄인으로 비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도와주는 트렌스젠더도 있습니다. 세상에서 죄인으로 인정받는 사람입니다. 황정민은 그에게서 세상 사람들보다 더 나은 면을 발견합니다. 내가 그보다 나을 것이 없음을 깨닫게 합니다. 결국, 황정민은 딸을 위해 희생하고 그에게 딸을 맡깁니다.
죄로 물든 이 세상 공동체 안에서는 내가 죄인인 줄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서로 자신들의 죄를 눈감아주고 타인을 죄인이라 여기며 살기에 누가 들어가도 그곳에서는 의인이 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공동체는 모든 이들이 자신을 죄인으로 여기는 공동체입니다. 그 안에 들어와 혼자 의인인 체할 수 없습니다. 나로 사는 이상 죄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리서는 “완덕의 길은 십자가를 거쳐 가는 길이다. 자아 포기와 영적 싸움 없이는 성덕도 있을 수 없다.”(2015)라고 하고, “예수님께 마음을 기울이는 것은 ‘자아’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다.”(2745)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기를 버리는 길은 ‘기도’이기 때문에 “기도와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분리될 수 없다. 이 두 가지는 모두 같은 사랑의 문제이며, 그 사랑에 따른 자아 부정과 관련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2745)라고 말합니다.
자기가 죄인 줄 알아야 ‘자아 부정’이 가능해집니다. 예수님은 선이시고, 선을 받아들이려면 악인 나는 죽어야 합니다. 이 진리를 품은 공동체에 머물러야만 그리스도의 구원이 필요한 사람이 됩니다. ‘나’가 죄이고 ‘그리스도’만이 선인 줄 모르는 공동체에 머물면 결국, 내가 의인인 줄 착각하고 살다가 그 공동체와 같은 운명을 맞을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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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16.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1주간 토요일
<언제나 파격적이고 관대한 예수님의 선택 앞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언젠가 한 대기업 신입사원 연수 때, 인성교육 강사로 초대받아 간적이 있었습니다. 강의실에 앉아있는 신입사원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정말이지 깜짝 놀랐습니다.
어찌 그리 다들 깎아놓은 밥톨처럼 반듯하고 늠름한지? 어찌 그리고 예의바르고 늠름한지! 꿈에도 그리던 성소자들이 거기 우르르 앉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고스란히 단체로 성소의 길로 안내하고 싶었습니다.
생사고락은 물론이고 미래와 운명을 함께 할 인재를 모집하는 과정에서 누구나 꿈꿀 것입니다. 지적이고, 예의바르고, 성실하고, 열정이 넘치고, 균형이 잡히고, 능력도 탁월하고...
그런데 오늘 당신의 복음 선포 사명의 첫째가는 협조자인 제자를 부르시는 예수님의 선택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제가 예수님 같았으면 한점 흠없고 무죄한 청년, 세파에 물들지 않은 신앙심 깊은 젊은이를 제자로 선발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선택을 보십시오. 그분의 파격적인 선택, 말도 않되는 선택에 지켜보던 사람들은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아 입을 다물지 못한 지경이었습니다. 그분께서는 세관에 앉아 있던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제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레위는 세리였습니다. 이미 세상의 단맛 쓴맛을 다 맛본 사람, 갈데까지 간 사람이었습니다. 세파에 닳고 닳은 사람, 인간 세상의 잔혹함과 비정함을 온 몸으로 체험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로마 제국은 식민지 국가를 대상으로 한 세금징수권을 목돈을 받고 매도했습니다. 세금징수권을 매입한 개인이나 회사는 자신들이 투자한 목돈을 만회하기 위해 엄청난 세금을 부과했습니다. 이러한 세금 청부제의 악용은 가난한 백성들의 허리를 휘청거리게 만들었습니다.
당시 세리들이 저지른 악행이 얼마나 큰것이었는지를 추측케 하는 자료들이 있습니다. 세례를 받으러 찾아온 세리들을 향해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루카 복음 3장 13절)
아마도 세리들은 적정선의 세금이 아니라 두배, 세배로 세금을 후려쳤던 것 같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지독했던지, 그리스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세리는 더도 덜도 말고 그냥 도둑!” 키케로는 세리를 향해 “인간 군상들 가운에 가장 천한 족속!”이라고 외쳤습니다.
유다인들은 자신들이 바치는 세금이 결국 침략자인 로마 제국 호주머니로 들어가는 것이기에, 중간 다리 역할을 하는 세리들을 향해 매국노, 배신자, 배교자라 칭했습니다.
세리들은 법정에 증인으로 나설 수도 없었습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눈에 세리는 언제나 이방인들과 접촉하였기에, 상시적으로 율법을 어겼으므로, 쓰레기 중에 쓰레기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놀랍게도 그토록 세상 사람들로부터 증오와 멸시를 한 몸에 받고 있던 세리 레위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의 선택은 바리사이들이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던 의로움에 대한 도전장이었습니다.
그날 밤 레위의 집은 그야말로 가관이었습니다. 오랜 친구 레위가 떠난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동료 세리들, 죄인들, 나름 한 주먹 한다는 사람들, 어둠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죄다 모여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숱한 죄인들 사이에 태연히 앉으셔서 주거니 받거니 포도주 잔을 기울이고 계셨습니다.
자칭 의인들인 바리사이파 율법학자들은 잔뜩 화가 나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넌지시 묻습니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마르코 복음 2장 16절)
어깨 너머로 들려오는 쫌생이 찌질이들의 말을 들으신 예수님의 말씀이 참으로 은혜롭고, 오늘 우리 죄인들에게 너무나 큰 선물로 다가옵니다. 언제나 파격적이고 관대한 예수님의 선택 앞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코 복음 2장 1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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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월 16일 토요일 연중 제1주간 토요일 매일미사
_배수판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집전
https://youtu.be/yuFJXNog9H8 (32:19)
•2021. 1. 16.
cpbc TV_가톨릭콘텐츠의 모든것
배수판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도미니코 수도회 관구장 대리) 집전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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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16. 김 로마노 형제님. [연중 제1주간 토요일]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르2,13-17) 제1독서<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히브4,12-16) 형제 여러분, 12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13 하느님 앞에서는 어떠한 피조물도 감추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그분 눈에는 모든 것이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이러한 하느님께 우리는 셈을 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14 그런데 우리에게는 하늘 위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사제가 계십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을 굳게 지켜 나아갑시다. 15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 16 그러므로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자비를 얻고 은총을 받아 필요할 때에 도움이 되게 합시다. 화답송 시편 19(18),8.9.10.15(◎ 요한 6,63ㄷ 참조) ◎ 주님, 당신 말씀은 영이며 생명이시옵니다. ○ 주님의 법은 완전하여 생기 돋우고, 주님의 가르침은 참되어 어리석음 깨우치네. ◎ ○ 주님의 규정 올바르니 마음을 기쁘게 하고, 주님의 계명 밝으니 눈을 맑게 하네. ◎ ○ 주님을 경외함 순수하니 영원히 이어지고, 주님의 법규들 진실하니 모두 의롭네. ◎ ○ 저의 반석, 저의 구원자이신 주님, 제 입으로 드리는 말씀, 제 마음속 생각, 당신 마음에 들게 하소서. ◎ 복음<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2,13-17) 그때에 13 예수님께서 호숫가로 나가셨다. 군중이 모두 모여 오자 예수님께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14 그 뒤에 길을 지나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15 예수님께서 그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게 되었는데, 많은 세리와 죄인도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이런 이들이 예수님을 많이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16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17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연중 제1주간 토요일 제1독서 (히브4,12-16) "그런데 우리에게는 하늘 위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사제가 계십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을 굳게 지켜 나아갑시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 (14-15) 히브리서 전반부인 1장 1절에서 10장 18절까지는, 구약과 신약을 연결하시고 완성시키신 예수님께서 구약에 나오는 여러 신분들에 대한 우월성을 지니고 계심을 증거한다. 히브리서 1장 1절에서 4장 13절까지는 특히 예수님의 신분과 구원자로서의 우월성을 증거한다. 구체적으로 당시 유대출신 성도들이 능력의 존재로 섬기기까지 했던 천사들 보다 우월함을 증거한다. 또한 하느님의 율법을 수여받았으며, 가장 탁월한 민족의 영도자로 여김을 받았던 모세보다 더 뛰어난 그리스도의 우월성에 대해 진술하고 있다. 이어지는 히브리서 4장 14절에서 10장 18절까지는, 예수님의 대사제로서의 지위와 사명과 일의 우월성에 대하여 증거한다. 그 가운데서 히브리서 4장 14절에서 7장 28절은 예수님께서 레위계통 사제들보다 더 뛰어나신 대사제되심을 밝힌다. 히브리서 4장 14절에서 16절은 이러한 새로운 주제를 시작하는 서론 부분으로서 예수님께서는 위대한 대사제임을 밝힘과 동시에, 본 서간의 수신자들에게 성도의 연약함을 동정하시는 대사제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권면하는 부분이다. 히브리서 4장 14절에서 '우리에게는 ~ 계십니다'로 번역된 '에콘테스'(echontes)는 '가지다'(have),'취하다'(take)등을 뜻하는 동사 '에코'(echo)의 현재 분사 1인칭 복수이며, 문장 서두에 나와 특별히 강조되고 있다. 우리가 대사제 예수님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대사제되신 예수님이 우리 신앙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며, 우리가 그분의 완전한 제사로 하느님께 나아 갈 수 있음을 나타낸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미 3장 1절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대사제로 지칭한 바 있다. 히브리서 저자는 히브리서 전체에서 예수님의 사제직을 비중있게 다룬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는 단 한번에 영원한 효력을 나타낸 완전한 제사이기 때문에 더 이상 속죄를 위해 제사드릴 필요가 없음을 히브리서 곳곳에서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강조가 불가피했던 것은 히브리서의 일차 독자인 당시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구약적 제사, 즉 율법 중심의 유대교로 다시 돌아가려는 유혹을 크게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본서 저자는 예수님을 지칭하는 '대사제'라는 단어 앞에 '위대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여기서 '위대한'에 해당하는 '메간'(megan)의 원형 '메가스'(megas)는 지위 및 품위과 관련하여 인격적인 존재에 대해서 쓰일 때에 '높은', '위대한', '큰'등을 뜻한다. 저자는 본서에서 그리스도의 대사제직이 구약의 레위 계통의 대사제보다 훨씬 우월함을 나타내기 위해서 이 단어를 쓴 것이다. '대사제'로 번역된 '아르키에레아'(archierea)의 원형 '아르케이류스'(archiereus)는 '첫째', '시작', '우두머리' 를 뜻하는 '아르케'(arche)와 '사제'를 뜻하는 '히에류스'(hierues)의 합성어로서 '대사제'(우두머리 제사장)라는 의미이다. 고대 그리스 시인 Herodotus가 이집트의 주요한 사제를 나타낼 때, 그 사제는 왕 다음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유대 철학자 Philo는 유대 사회의 대사제란 백성을 대표하며, 속죄시에는 백성들과 자신을 동일시하고,또한 하느님과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의미들이 히브리서 저자에게 대사제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대사제는 자신의 직무를 온전히 수행하려고 하면, 하느님과 인간을 완전하게 아는 자여야 하며, 하느님의 말씀을 인간에게 전하고, 하느님의 임재하심을 인간에게 보이며, 인간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자이다.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로서의 이 역할을 완전하게 할 수 있는 위대한 대사제는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음을 저자는 본서에서 밝히고 있다. 이 위대한 대사제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레위 계층의 사제들과 확연히 구별되는 점이 히브리서 4장 14절에서 두 가지가 나온다. 하나는 그분이 '하늘 위로 올라가신'(승천하신) 분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해당하는 '디엘렐뤼토타 투스 우라누스'(eielelythota tus uranus)를 직역하면, '하늘들을 통과하여 지나간'(who has gone through the heavens)이 된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들을 지나가신, 즉 통과하신 위대한 대사제이시다. 저자가 '하늘'(uranus)을 복수형으로 표현한 것은, 하늘이 3층 혹은 7층으로 되어 있고, 그 하늘들의 정상에 하느님의 옥좌가 있다는 유대 사상과 관련이 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셔서 하늘로 올라가셨는데, 유대인들이 하느님의 옥좌가 있는 곳으로 믿는 하늘들의 정상에 올라가신 것이다(마르16,19; 사도1,10).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만이 행했던 일이요, 동시에 레위 계통의 사제들과 확실히 구별되는 놀라운 일이다. 두번째로 레위 계통의 사제들과 구별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다.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곧 하느님과 동일한 신성을 가지신 분이라는 사실을 말한다(요한14,9.10). 특히 본서의 저자는 그리스도라는 칭호를 쓰지 않고 역사적 인물인 예수님의 이름만을 기록함으로써, 그분이 우리를 위한 대사제의 직무를 수행하실 수 있는 완전한 인간임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완전한 신성을 지닌 하느님의 아들임과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시다. 예수님께서는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인물이다. 말씀으로 존재하시던 하느님께서 완전한 인간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것이다(요한1,14).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지으신 분으로서(요한1,3), 그 어떤 피조물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하느님이시다.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을 굳게 지켜 나아갑시다' 본문에서 '고백하는 신앙'으로 번역된 '호몰로기아스'(homollogias)의 원형 '호몰로기아'(homollogia)는 '신앙 고백'을 뜻한다. 이것은 내적으로는 마음에 품어지고, 외적으로는 사람들 앞에서 고백되는 신앙, 즉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께 대해서 믿는다고 공언하는 그 신앙을 말한다(로마10,9.10). '우리가 ~굳게 지켜 나아갑시다'로 번역된 '크라토멘'(kratomen)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굳게 붙들다'를 뜻하는 '크라테오'(krateo)의 현재 가정법이며 권유를 나타낸다. 이 동사 '크라테오'(krateo)는 '힘', '권능' 등을 의미하는 '크라토스'(kratos)에서 유래했으며, '강하다', '힘을 소유하다', '승리하다' 라는 의미외에도 우위를 점함으로써 붙잡는 행위를 나타내는 단어로서, 꽉 잡는 것, 간직하는 것 등의 다양한 의미로 쓰였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전통을 상당히 중요하게 여기고 고수했는데, 이러한 습관을 잘 아는 저자가 히브리 그리스도인(유대계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교 교회의 전승으로 신앙 고백을 하도록 권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여기서 '연약함'으로 번역된 '아스테네이아이스'(astheneiais)의 원형 '아스테네이아'(astheneia)는 '약함'(weak), '허약한'(infirm), '연약한'(feeble)을 의미하는 형용사 '아스테네스'(asthenes)에서 유래한 명사로서,신체와 영혼과 심령의 연약함을 나타내는 의학 및 종교적 용어이다(루카13,12; 요한11,4). 본문에서는 복수형으로 쓰였는데, 목마름 등을 느낀다든지 또 다른 육체적이나 정신적인 고통을 느끼는 이 모든 것들은 인간의 몸을 입으신 예수님께서도 경험하셨음을 나타낸다.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이중 부정문('우 ~메'; u ~ me)을 사용해서 저자는 예수님께 대해 동정심이 많은 분임을 의도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동정하지'로 번역된 '쉼파테사이'(sympathesai)의 원형 '쉼파테오' (sympatheo)는 '같은', '동일한'을 뜻하는 전치사 '쉰'(syn)과 '겪다', '고난을 당하다'를 뜻하는 동사 '파스코'(pascho)에서 유래한 합성어로서, '다른 이와 동일한 느낌을 받다' '공감하다', '동정하다' 라는 뜻이다. 이 동사의 어원이 나타내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동일한 감정을 가지셨으며, 우리에 대해 동료 의식을 가지고 계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분께서 우리와 동일한 감정을 지니셔서 우리의 연약함을 동일하게 느끼셨음을 나타낸다.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신 하느님께서 인간의 감정을 공유하신 분이라고 증거한다.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동일한 완전한 인간이었음을 다시 한번 더 강조해주는 내용이다. '유혹을 받으신'으로 번역된 '페페이라스메논'(pepeirasmenon)는 어떤 것을 입증하기 위해 '시험하다', 혹은 넘어뜨리기 위해 '유혹하다' 는 뜻을 가진 '페이라조'(peirazo)의 수동태 완료 분사이다. 저자는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이 현재 직면하고 있는 유혹과 똑같은 방식으로 예수님께서도 유혹을 당하셨음을 보여주기 위하여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였다. 예수님께서 당하신 유혹은 그분으로 하여금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불순종하게 하기 위한 사탄의 철저히 계산된 술책에서 나온 것이었다. 성도로서 우리가 당하는 것은 대부분 유혹(temptation)의 경향을 띠고 있어서(야고1,14), 아담처럼 단지 인간의 연약한 의지와 감정으로서 이에 대응한다면 실패할 수 밖에 없다. 모든 유혹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의탁함으로써 사탄의 세력에 대응하는 사람들만이 자신에게 달려드는 유혹을 이기고 하느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 '죄는 짓지 않으신' 예수님의 무죄성과 흠이 없음을 보여주는 경험적인 구절이다.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가셔서 세례를 받고자 하셨을 떄, 세례자 요한이 말린 것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무죄성을 감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마태3,11-14). 세례자 요한이 베푼 세례는 회개의 세례였기 때문에 죄인들만 그 대상이 되었는데,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는 죄인들과의 완전한 일치를 위해서, 그리고 인간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베풀도록 요청하셨던 것이다. 또한 예수님께서 받으신 격렬한 유혹들은 내적 욕망에서 비롯되지 않고, 단지 밖에서 온 것들일 뿐이다. 이 점이 인간이 당하는 유혹(야고1,14)과 다르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똑같은 어떤 경험을 하셨다 해도, 그것은 우리 인간이 자신의 욕심에 끌려 유혹을 받는 것과 달리 단지 밖에서 즉 사탄에게서 오는 것일 뿐이므로 그분께서는 죄를 범하는 일이 없었다. 예수님께서는 유혹을 받으면 촉발되는 잠재적인 본성도, 반드시 극복하지 않으면 안될 죄의 습성도 결코 없었기 때문이다. [연중 제1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흔들리지 맙시다. 세상과 함께 비틀거리지 맙시다. (마르 2,13-17) 13 예수님께서 호숫가로 나가셨다. 군중이 모두 모여 오자 예수님께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 다시 예수님께서 풍파의 세상으로 오셨다. 그러자 믿겠다고 찾아온 그들을 가르치셨다. 입니다. 성경은 세상에다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세상 속에서 믿겠다고 찾아온, 세례를 받은 그들에게 주시는 새로운 가르침 이라는 것을 알려주고자 하심입니다. 14 그 뒤에 길을 지나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 지나가시는~세상, 죄인들의 구원을 위한 시간 그동안을 뜻합니다. 또한 우리의 회개(하마트리아-돌아섬) 그 예수님에게 돌아가는 시간인 것입니다. 그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떠남, 버림을 위한 지금 일어남으로~입니다. 곧 땅(세상)의 삶에서 일어나 하늘의 삶을 위해 지금 따르는 것입니다. 세리가 죄인으로 판단 받을 수밖에 없는 지금의 자리 그 세상을 버리고~ 죄인을 의인으로 해 주시기 위해 자신의 목숨, 그 자신의 목숨으로 죄인들을 섬겨 주시는, 그분을 지금 따라 가는 것입니다. (죽어서는 못 받는 구원입니다.) (마르10, 45)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그래서~~ (로마3,24-25) 24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 25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속죄의 제물로 내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이루어진 속죄는 믿음으로 얻어집니다. 사람들이 이전에 지은 죄들을 용서하시어 당신의 의로움을 보여 주시려고 그리하신 것입니다. 15 예수님께서 그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게 되었는데, 많은 세리와 죄인도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이런 이들이 예수님을 많이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 세리, 그 죄인의 음식을 예수님께서 잡수신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죄인이 되신다는 겁니다. 그 죄인들을 살리시기 위해 스스로 죄인되심, 곧 죽음의 세례 받으시는 그 모습을 한번 더 보여 주심입니다. 그리고 그 죄인들의 죗값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다 이루어 졌다’하신(요한19,30)~ 그래서 ‘다 이루었다-테텔에스타일’이 ‘계약의 완성’ 그 영수증을 뜻하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은 자는 예수님을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분만이 판단하지 않으시며 그들의 마음, 심정을 위로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말씀이 그렇습니다. 성경을 도덕과 윤리 읽지 않으면~~ 그런데 윤리 도덕의 수준으로 읽으면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이를 판단하나요? 아니요 자신부터 해야지요. 선악의 그 뱀의 말을 먹은 아담 처럼 자신부터 판단합니다. (창세3,6) 그래서 스스로 자신의 수고, 종교 행위로 그 죄를 감추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는 죄가 없다고 만족해 합니다. 자신이 자신에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양심은 속지 않습니다. 그래서 감추려 더욱더 열심을 부리게 됩니다. 아담이 자신의 죄를 가리려고 무화나무 잎으로 옷을 만들어 입어보지만 그 행위의 옷으로는 죄를 가릴 수 없기에~ (창세3, 21)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과 그의 아내에게 가죽 옷을 만들어 입혀 주셨다. = 흠도 티도 없는 어린양이 죽어 남긴, 그 가죽 옷입니다. 대속의 죽음, 그 피의 옷입니다. 새 계약의 피 입니다. 인간의 선행, 그 의로움으로는 죄가 씻기지 않습니다. 인간의 의로움은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이사64,5참조) (마태23, 28) 이처럼 너희도 겉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 = 지도자들(나)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16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 죄인들을 위해 오신 그 예수님을 모르기에 하는 소리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 그리고 신안의 목적을 모르기에 하는 소리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들을 귀가 있거든 알아들어라’ 하시는 말씀입니다. 17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 예수님은 죄인을 불러 의인 으로 고쳐주시기 위해 구원자로 오셨습니다. 그 구원자를 만나기 위한 신앙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어제 묵상 했듯이 그 구원자를 만나는 길은 네 사람-4복음 안에 있습니다. (요한3,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속죄 제물)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요한14, 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 많은 이들이 세상과 함께 자신의 선행을 진리로 알고 살아갑니다. 그것이 그릇되다 말씀 하셨는데도(요한16,8), 착하게 살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구원의 진리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신앙의 목적지는 내 죗값을 ‘다 이루었다’하신 그 골고타입니다. 오늘 그 대속의 죽음 그 십자가의 의로움의 옷을 입읍시다. 내 행위의 속세 그 옷을 벗고 받아들입시다.(히브4,12) 그러면 오늘 내가, 나에게 속고 있는 그 양심까지 깨끗해져 자유 할 수 있습니다.(히브9,14~참조) (시편16,7-9) 7 저를 타일러 주시는 주님을 찬미하니 밤에도 제 양심이 저를 일깨웁니다. 8 언제나 주님을 제 앞에 모시어 당신께서 제 오른쪽에 계시니 저는 흔들리지 않으리이다. 9 그러기에 제 마음 기뻐하고 제 영혼이 뛰놀며 제 육신마저 편안히 쉬리이다. = 흔들리지 맙시다. ♡ 아멘 -*^ㅇ^*- 연중 제1주간 토요일 복음(마르2,13~17)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17) 마르코 복음 2장 17절은 바리사이파 율법학자들이 제기한 질문에 대한 답변이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과 이 땅에서 하실 일이 무엇인지 보여 주는 말씀이다. 여기서 '건강한 이들'에 해당하는 '호이 이스퀴온테스'(hoi ischyontes; the healthy)라는 표현은 은유적 표현인데, 자기식의 의(義)를 추구함으로써 스스로 의롭다고 자부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가리킨다. 또한 '의사'에 해당하는 '이아트루'(iatrou; a doctor)도 은유적 표현으로서 죄에 빠진 영혼을 치유하고 구원하시는 예수님 당신 자신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러한 표현 속에는 예수님께서 왜 죄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셔야 했는가에 대한 해답이 주어져 있다. 바리사이들은 율법의 외적 조항을 가지고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예수님을 단죄하려고 했다. 그러나 사실은 그들이야말로 이 세상의 구원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못 알아보고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이것은 그들이 얼마나 교만과 위선에 사로잡혀 있었는가를 명백히 보여 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건강한 척하면서 당신을 외면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위해 오시지 않고, 자신의 영적 건강을 걱정하던 죄인들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의사이셨다. 특히 마르코 복음 2장 17절의 전반부는 예수님 당시 팔레스티나에서 유행하던 속담으로 알려졌는데,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잘 알고 있던 속담을 이용해서 바리사이들의 교만과 위선을 지적했던 것이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여기서 '부르러'에 해당하는 '칼레사이'(kalesai; to call)의 원형 '칼레오' (kaleo)는 구원에로의 초대나 제자로의 부름(마태4,21; 1베드2,9)을 의미한다. 이 문장은 동사 하나에 두 개의 목적어 '의인'과 '죄인'이 동시에 사용되어서 서로 강한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의인은 진정한 의미의 의인이 아니고, 본인이 자신을 생각하는 관점에서의 자칭 의인이다. 왜냐하면 로마서 3장 10~23절에서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의인이 한 사람도 없으며 모두가 죄인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또한 '죄인'이라는 개념 역시 꼭 어떤 죄를 지은 사람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해 겸손한 자세로 응답할 수 있는, 스스로 죄인이라는 의식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루카5,8). 따라서 본문은 그리스도의 구원의 초대를 받을 자격은 겸손하게 자신이 죄인이라는 정확한 자기 의식이 있어야 함을 가르쳐 준다. 복음: 마르 2,13-17: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예수님께서는 돈벌이에 대한 탐욕으로 가득 찬 레위가 세관에 앉아있는 것을 보셨다. 그가 받은 새 이름은 마태오였다. ‘마태오’라는 이름은 ‘선물 받은 사람’이란 뜻으로 거룩한 은총의 위대한 선물을 받은 사람에게 어울리는 이름이다. 그는 탐욕에 젖은 세리 생활에서 떠나 주님을 따른 사람이다. “나를 따라라.”(14절) 이 말씀은 당신을 닮으라는 말씀이다. 발걸음으로 그분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생활방식을 따르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머문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도 그분께서 살아가신 것처럼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1요한 2,6) 이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다.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14절) 주님의 명령 한 마디에 마태오가 모든 것을 버리고 빈털터리이신 주님을 따랐다. 말씀을 통하여 그를 외적으로 부르시고 주님께서는 내적으로도 보이지 않는 선물을 주시어 당신을 따라다닐 수 있게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마태오를 부르시고 그와 함께 식사를 하시면서 많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하셨기 때문에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을 비난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어울리시는 것은 그들의 구원을 위한 것이다. 그래서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17절)하고 말씀하신다. 그분은 의로운 이들을 건강하다 하시고, 죄인들을 병들었다 하셨다. 그러기에 병든 사람들은 자기 힘을 자랑해서는 안 된다. 제 힘이 아무리 세다 하여도 스스로 구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제는 건강하지도 않으면서 스스로 건강하다고 생각하여, 의사를 찾지도 않을 뿐 아니라 성가시게 여기며 때리기까지 한다. 자기 병을 제대로 알고 고치기 위해서는 그만한 고통이 따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13) 우리는 누구도 완벽하게 의로운 사람은 없다. 모두가 죄인이기 때문에 “주님, 구원을 베푸소서. 의로운 이는 사라져 버렸습니다.”(시편 12,2)라고 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의인이 되도록 기도해야 한다. 우리가 간절히 바라고 그렇게 노력하면 그렇게 되어 갈 것이다. 여기서 필요한 것이 성령의 은총이다. 성령의 은총으로 치유되고 도움을 받지 않으면 그러한 일이 이루어지기는 힘들 것이다. 예술가가 투박한 돌을 아름답게 조각하여 멋진 예술작품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그 돌을 귀하게 다룬다.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까닭은 우리가 죄인인 채로 그냥 남아있게 하시려고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다. 조각가이신 주님께서는 우리를 투박한 돌을 보시듯 하신다. 투박한 돌이 아니라, 앞으로 만드실 작품을 생각하시며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온전히 그분의 말씀을 따르도록 하여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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