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말의 품격이 무너진다
... 드라마 ‘경성스캔들’을 본 딸아이는 말한다. “엄마, 일본 사람들도 모두 조선말 쓰
던데?” “아아, 그건 드라마고….” 21세기를 사는 한국인에게 모국어를 빼앗긴다는 것이 어떤 말인지 실감이 나질 않는다. 당연하다. 모국어로 말을 한다는 것은 숨구멍에서 숨이 들고 나는 것과 같다. 공기의 고마움은 공기가 사라질 때 비로소 각인된다. 이어령 선생님 인터뷰 갔다 들은 이야기 하나. 일제강점기 때 초등학교에서 한국말을 쓰면 바로 ‘후닥!(표 내!)’이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담임선생이 자신의 도장이 찍힌 종이를 학생에게 10장씩 나눠 준다. 학생은 누가 조선말을 쓰면 ‘후닥!(표 내!)’이라고 소리친다. 일주일 뒤에 검사를 한다. 표를 제일 많이 가진 사람은 노트를 상으로 받고 표를 제일 많이 뺏긴 사람은 변소 청소를 했다. 아이들 사이에는 빼앗고 안 빼앗기려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필사적인 언어전쟁이 벌어졌던 셈이다. 시골에서 온 어떤 아이는 조선말을 쓸까봐 처음부터 입을 다물어 버리다 벙어리처럼 되기도 했다. 어떤 아이가 화장실 문을 열고 나오면 놀래 준다. ‘아이고머니나’ 하고 깜짝 놀라 소리치면 표 내놓으라고 한다. “아이고머니나가 왜 한국말이냐” “선생님에게 가 보자”라고 하면 일본인 교사는 “그건 한국말이다” 해서 표를 빼앗는다. 조선이 해방되었다는 얘기는 언어가 해방됐다는 뜻이다. 언어가 해방되었다는 얘기는 숨구멍이 열리듯 몸이 해방됐다는 뜻이다. 인격이 해방된 것이다. 더는 언어 빼앗기 놀이를 하지 않아도 되는 시절, 자유롭게 모국어를 써도 되는 시절을 살고 있다.
- 김용희 '한국말의 품격이 무너진다'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