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RE ANCIENT INDIA PURI KUSHAN COPPER COIN.126 A.D.고대 인도 PURI KUSHAN COPPER COIN 기원전 200년대 인도의 최초의 통일 국가를 이루었던 아쇼카 대왕의 시대에 의하여 스리나가드의 인근이 개발되며 시작되는 이 지역은 큐산왕조로 이어지며 번창했던 나라다. RARE ANCIENT INDIA SKANDAGUPTA LEAD SQUARE COIN.455 A.D
쿠샨왕조는 대체로 바수데바 시기(3세기 후기)에 사산족인 샤풀 1세의 침략을 받아 쇠망하게 되는데, 이로부터 중인도의 제국 영토들은 거의 따로 나뉘어서 독립적인 소국가(小國家) 형태를 유지한다. 그 와중에 갠지스강 중류의 마가다국에서도 슈리굽타(Surigupta, 275-300년)라는 인물이 출현하여 굽타왕조를 세우고 주변 소국들과 경쟁하며 국세를 키워 나간다.
이러한 상태가 반세기 이상 지속되다가 그의 손자인 찬드라굽타 1세 (CandraguptaⅠ, 320~335년)가 점차 주변을 아우르기 시작하여 왕중왕인 전륜성왕(mahrjdhirja)의 칭호를 얻게 된다. 이로부터 그 아들인 사무드라굽타(Samudragupta, 335~375년)와 손자인 찬드라굽타 2세 (CandraguptaⅡ, 375~414년)의 양대에 걸친 천하통일 정책이 성공하여 곧 아쇼카왕 시대의 마우리아왕조가 차지했던 영토를 대부분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즉 인도반도 거의 전역을 차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시기 굽타제국의 국력은 인도 역사상 전무후무한 것으로 문화의 발전도 극치에 이르러 인도 문화사상 다시 볼 수 없는 황금기를 맞게 된다. 더구나 이제까지 이민족의 지배 아래 놓여 외래문화의 영향을 끊임없이 받아왔던 인도인들로서는 중인도 지역을 근거지로 하여 일어난 굽타왕조의 순인도적인 문화 성향에 긍지와 공감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것 같다. 그래서 이 왕조가 순인도적인 문화 성향으로 복귀하려는 움직임의 하나로 브라만교(婆羅門敎)를 숭상함으로써 비슈누나 시바 신앙을 중심으로 하는 힌두교가 이루어졌고, 이것이 민중 사회에 깊이 침투하게 되었다. 이는 이 시기 중국의 남북 분단과 로마제국의 동서 분열 및 해로의 개통 등으로 비단길 무역이 위축되어 인도에서도 상업세력이 쇠퇴해갔던 것과도 연관된다. 즉, 굽타제국이 중농정책을 표방한 결과 농업사회를 주도하는 데 알맞은 새로운 이념의 필요에 따라 나타난 현상이었다. 그 위에 굽타왕조의 절정기를 다스리던 찬드라굽타 1세와 찬드라굽타 2세 및 쿠마라굽타(Kum raguptaⅠ, 414~455년)스칸다굽타등의 세 대왕은 문예(文藝)에 정통한 임금들로 문예부흥 정책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 결과 힌두교 문화가 난만한 발전을 보이게 되고, 전시대 이래 융성해온 불교문화 역시 현란한 발전으로 이어지는데, 불상 조각사상 신비로운 이상미(理想美)의 극치를 이룩했다는 굽타양식의 출현이 바로 그것이다.
POTIN왕조가 주조한 옛날 인도 ERIKATCH.
RARE ANCIENT INDIA KARKOTA DYNASTY GOLD BASE COIN 히말라야산맥과 카라코람(Karakoram)산맥의 험준한 산악지대인 카슈미르(Kashmir)는 B.C 3세기 이후 힌두 문화의 중심지였다. 최초의 왕조 : 카르코타(Karkota) 왕조 (약 600년경)
RARE ANCIENT INDIA KUNINDA DYNASTY SILVER COIN.100 B.C/옛날 인도 KUNINDA 왕조
RARE ANCIENT ROMAN LARGE COIN- CONSTANTIUS I CAESAR Emperor Constantius I Chlorus (305-306 AD) 양면 얼굴이 있는 콘스탄틴 1세의 희귀한 동전이다
고대 로마 황제(재위 306∼337)로서 정식 명칭은 Flavius Valerius Constantinus이다. 그의 개종에 힘입어 로마 제국은 그리스도교 국가로 변모하기 시작했으며, 그의 추진력 덕분에 형성된 그리스도교 문화는 비잔틴 제국과 서유럽의 중세 문화가 발전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궁정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콘스탄티누스는 일련의 복잡한 내전을 거친 뒤 서로마 황제가 되었으며(312), 이어서 로마 제국 전체를 다스리는 단독 황제가 되었다(324).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의 성공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덕분이라고 평생 동안 믿었다. 그는 늦어도 313년까지는 개인적으로 그리스도교에 귀의했고, 그해에 밀라노 칙령을 발표해 그리스도교도에 대한 관용을 확대했으며, 신학 논쟁에 해결책을 마련하기 위해 니케아 공의회(325)를 열었다. 그는 콘스탄티노플(옛 이름은 비잔티움)을 재건하고 확장시켜 수도로 삼았는데, 이는 아마도 그가 거둔 마지막 군사적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 도시는 그후에도 1,000년이 넘도록 로마 제국 수도의 기능을 유지했다. 그의 개종은 그후 수세기 동안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영향을 미쳤다. 그는 자신이 하느님에게 선택받은 종복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자신의 교회를 잘 다스리는 것이 하느님에 대한 책무라고 생각했다. 일찍이 소수 종파였던 그리스도교는 로마의 국교가 되었고, 콘스탄티누스와 후계자들의 후원으로 큰 발전을 이룩했다. 교회는 재산을 늘렸고 교회의 수도 늘어났다. 덕분에 교회는 배교자인 율리아누스 황제 시대에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확고한 지위를 굳힐 수 있었다. 그리스 정교회에서는 콘스탄티누스를 성인으로 추앙하고 있다.
중동지역의 알려지지 않은 희귀한 동전
이란 SASANIA/사산조 페르시아 SASSANID PERSIA(AD 224 - 642)
persis의 지방군주 창시자 Ardashir (224-241)는 파르티아 제국 마지막 황제인 아르타바누스 5세를 공격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면서 파르티아를 멸망시켰고 파르티아의 서울이었던 테시폰을 사산조 페르시아의 서울로 삼으면서 나라를 통치, 아케메니드 왕조와 같이 이란 남서쪽에서 시작된 왕조이며 Fars의 조로아스트교의 사제(사산)후손이다. 전성기는 아르다시르의 아들인 샤푸르 1세(241∼272)때 이루어 졌는데 그는 페르시아 제국의 대부분의 영토를 회복하였고 로마식의 속주제를 확립하였으며 기병을 주력 부대로 하는 강력한 상비군을 두었다(238년 니시비스와 하란, 240년 Hatra, 253년 Antioch 함락, 260년 Valerian 황제를 Edessa에서 생포). 바람 2세(재위 277∼293)는 세이스탄을 정복하여 인도에까지 세력을 확장했으나 그의 사후 카루스와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지휘하는 로마군의 침입을 받아서, 한 때는 수도가 위협받기도 하였습니다(298년). 비잔틴 제국과 세력다툼 지속. 400년간 유지된 고도의 중앙집권 체제, 정교일치의 통치조직, 국가종교의 상징인 거룩한 불의 수호자(guardianship of the sacred fire)로서의 왕. 사산조 동전(Sasanian coin)는 왕의 앞 모습과 거룩한 불의 뒷면으로 불은 짜라투스트라의 계시 오래 전부터 있던 신성의 상징이다.
Aqueduct of Valens in Istanbul (old Constantinople - former capital of the Eastern Roman Empire).
Valens was born around AD 328, as the second son of a native of Cibalae in Pannonia called Gratianus.이스탄불에 있는 수로교다
요비아누스 황제가 죽은(364. 2. 17) 뒤에 제위를 차지한 발렌티니아누스 1세의 아우였다. 364년 3월 28일에 발렌티니아누스는 발렌스를 공동 황제로 임명해 자신은 제국의 서부지역을 맡아 다스리고 발렌스에게는 제국의 동부를 맡아 다스리게 했다. 이윽고 발렌스는 콘스탄티노플에서 황제를 자칭한(365. 9) 이교도 프로코피우스의 도전을 받게 되었다. 발렌스가 이 도전을 제압하기 위해 안티오크에서 진격하자, 프로코피우스의 군대는 대부분 달아났고 프로코피우스는 부하의 배신으로 포로가 되어 처형당했다(366. 5. 27).
발렌스는 이어서 서고트족과 전쟁을 시작했는데 서고트족은 프로코피우스를 지원했을 뿐 아니라 트라키아를 침략하겠다고 위협하고 있었다. 367년 5월 황제는 도나우 강을 건너 서고트족의 영토(지금의 루마니아)를 침략했다. 2년 뒤 그는 이 지역을 다시 침공해 서고트족을 결정적으로 무찔렀다.
발렌스는 371~372년 겨울에 안티오크에서 테오도루스의 음모를 진압한 뒤, 페르시아와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그는 메소포타미아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불리한 조건으로 평화조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376). 그해 서고트족이 훈족의 침략을 받아 쫓기자, 발렌스 휘하의 장군들은 서고트족의 황궁에서 그를 직접 살해했다. 이듬해 아이티우스의 밑에서 일하던 2명의 이방인 옵틸라와 트라우스틸라가 그들의 주인을 죽인 데 대한 보복으로 캄푸스마르티우스에서 그를 살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