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40) 루오꽝 (상)
신학과 중국 철학의 상통점 찾는 데 주력
루오꽝(羅光, 1911~2004) 대주교는 중국 후난(湖南)성 헝양(衡陽) 난샹 태생으로 자(字)는 달의(達義)인데 세례명인 스타니슬라오(Stani slaus)를 음역해 지었고, 호(號)는 '작조'인데 그 뜻은 '그리스도는 세계의 빛'이다.
집안이 대부분 천주교 신자였기에 루오 대주교도 자연스럽게 유아 세례를 받았다. 6세부터 천주교 위더(毓德) 소학교에 다녔는데 항상 수석을 했다. 13세에는 성심수도원 중등학교 과정을 수학했고, 19세에는 수도원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1931년 성심수도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탈리아 교황청 우르바노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22세라는 젊은 나이에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학위를 받은 후에도 계속 신학, 법학 등을 공부해 신학박사와 법학박사 학위도 받았다. 이렇게 세 가지 학문을 공부한 결과 자연스럽게 이 세 분야를 회통하게 돼 일가를 이루게 됐다.
루오 대주교는 우르바노대학에서 공부하던 중 26세 나이로 중국 문학, 철학 교수를 맡게 됐다. 그 기간 동안 문학, 철학 방면의 창작 활동도 멈추지 않아 35세에 교황을 알현할 기회가 있어 교황에게 「유가사상 대강」(儒家思想大綱), 「논중국 외유 법규」(論中國外儒法規)란 책을 바쳤다. 그 후에도 여러 작품을 저술했는데, 창작 활동 외 번역 활동도 열심히 해 중국 고전인 「중용」(中庸), 「대학」(大學), 「논어」(論語) 등을 이탈리아어로 번역했다.
1991년 루오 대주교는 자신의 인생을 헝양(衡陽)시절 19년, 로마 31년, 타이완 30년으로 나누었는데 헝양(衡陽) 19년 중 12년은 난샹(南鄕)의 고향에서 보냈고 7년은 황샤오완(黃沙灣)수도원에서 보냈다. 로마의 31년 중 9년은 공부를 했고, 25년은 교수 생활을 했으며, 18년은 주 교황청 대사 종교고문으로 지냈다. 타이완의 30년 중 5년은 타이난(臺南)교구 주교로, 12년은 타이베이(臺北)대교구 주교로 봉직했으며, 13년은 푸런대학교(輔仁大學) 총장으로 지냈다. 80세 이후는 일체의 세속적 직분을 마다하고 오로지 주님과 함께 하는 생활만 했다.
- 루오꽝 대주교가 13년간 총장으로 재직한 푸런대학교.
루오 대주교가 봉직했던 천주교 푸런대학교는 1925년에 베이징에 설립됐는데 1949년 베이징이 공산당에 함락되자 중국 교육부가 접수해 1952년 베이징사범대학과 병합함으로써 폐교됐다. 1956년 푸런대학교 재타이완 동창회가 설립돼 타이완에서의 모교 복교를 위한 서한을 교황에게 보냈다. 1961년에는 푸런대학교 철학연구소(철학 대학원)에서 형이상학을 강의하는 등 당시 총장이던 위빈(于斌) 대주교의 가장 큰 조력자였다. 1978년 8월 위빈 추기경이 서거하자 푸런대학교 총장직을 이어받아 타이완 복교 후 제2대 총장으로 1992년 1월까지 재임했다. 루오 대주교는 위빈 추기경의 이념을 계승하여 적극적으로 규모를 확충해 9개 학과 13개 대학원 과정을 증설해 푸런대학교를 7개 대학 42개 계열학과, 22개 대학원 과정의 종합 대학으로 만들었다. 이런 학교 구조적인 부분 외에 임기내 많은 건물을 완공해 푸런대학교 캠퍼스의 오늘날 모습을 만들었다.
루오 대주교의 교육에 대한 관심과 공헌은 비단 학교 건물 건립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학생들의 인격 도야에도 큰 관심을 가졌다. 푸런대학교 총장 재임 시 '인생철학'을 전교생이 반드시 수강해야 하는 필수 교과목으로 개설하고 직접 강의도 했다. 루오 대주교는 '인생철학' 강의에서 당대를 살아가는 젊은 엘리트로서 사회 문제를 어떻게 풀어가야 하는가? 라는 주제에 대해 유가와 천주교 사상을 융합한 관점에서 수업을 진행했다. 학생들이 이 수업을 통해 자신의 인격을 중시하고 스승을 받들며 부모에게 효도하는 심성을 배양하고, 또 유가 사상과 천주교 사상이 현실에서 언행일치가 되도록 해 장래 사회 지도자로서 갖춰야 할 덕목을 배양하는 데 밑거름이 되게 했다. 이런 분위기는 향후 푸런대학교 교학 특색 중 하나가 됐다.
루오 대주교는 중국 문화와 천주교 문화의 융합에도 관심을 많이 가졌다. 1971년 구정(春節) 교구청 대성전에서 조상에 대한 제사, 분향, 헌화, 헌과(獻果) 의식을 주재하고 단배(團拜)도 했다. 그 다음 해는 주교단 상임위원들과 제사 의식에 관해 토론을 하고 제사 의식을 행하면서 헌화, 분향, 제주(祭酒) 의식도 행하고 성경도 봉독했다. 당시 천주교 신자들은 중국인들이 행하는 조상 제사를 미신, 우상숭배 등으로 치부하고 교리에 어긋난다고 배척하며 금지해 조상 제사는 늘 논쟁의 발단이 됐다. 루오 대주교의 이런 행동은 중국인 천주교 신자들이 조상에 대한 예를 다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해결해주는 계기가 됐다.
루오 대주교는 1961년 41세에 타이난 신설 교구의 주교로 임명됐으며, 그 이듬해에는 삐유에 신철학원(碧岳神哲學院, 1992년 타이베이 성토마스 총원과 병합돼 천주교 타이완 연합 총수도원이 됐음)을 건립했다. 또 타이난 교구 교구청을 비롯해 삐유에수도원, 다륀(達義)수도원을 세웠으며, 성공대학교 인근에 학생 활동 센터를 건립하고 더광여중(德光女中), 승공여중(聖功女中), 츠요중학(慈幼中學), 리밍중학(黎明中學)을 설립했다. 루오 대주교는 타이난교구 주교로 재임한 지 5년에 불과하지만 수많은 업적을 이뤘다. 1966년 루오 대주교는 타이베이대교구 대주교로 임명됐고, 대주교 재임 중에 타이베이 교구청을 건립하고 교우 선교 사목회를 만들었으며 겅신(耕莘)간호학교도 세우고 산샤(三峽)에 천주교 공원묘지도 만들었다.
루오 대주교는 사목하는 틈틈이 여가 생활로 중국화(中國畵)에 심취했다. 특히 말, 대나무 등을 즐겨 그렸다. 화집도 발간할 정도로 아마추어 수준을 뛰어넘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1992년 루오 대주교는 푸런대학교 총장직을 내려놓았고, 건강이 비록 좋지 않았지만 열심히 저작활동을 하다 2002년에 병세가 악화돼 2004년 2월 28일 주님 품안에 안겼다.
루오 대주교 저작
루오 대주교의 저작물<사진>은 비교적 풍부한 편이다. 세상에 나온 저작 중 제일 유명한 것은 「루오꽝 전서」(羅光全書)다. 루오 대주교의 작품은 대부분 푸런대학교 신학원과 작조관에 소장돼 있다. 「루오꽝 전서」는 철학과 종교 두 가지 내용으로 이뤄져 있는데, 철학은 대부분 중국 철학이다. 서양 철학을 소개하는 책은 두 권에, 비교 철학도 세 권에 불과하다. 종교 부분은 전기(傳記), 영성에 관한 것, 교리 등이 있으며 그 외 문학과 시집도 이 유형에 속하는 것이 있고 루오 대주교 자신의 사진과 그림 작품도 들어있다.
루오 대주교는 「루오꽝 전서」에서 "…작품을 쓰는 데 있어 유일한 관심사는 '천주교가 중국 문화 속으로 어떻게 들어가느냐?' 하는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루오 대주교는 하느님과 중국 철학의 상통하는 점을 찾는 데 전력을 다했다.
푸런대학교는 「루오꽝 전서」로 총 42권, 66종 저작을 1996년에 펴냈는데, 루오 대주교의 1993년까지의 저작들을 수록했고 1994년부터 임종하기 전까지의 작품들은 아직 전서에 수록하지 못했다.
「루오꽝 전서」의 근본 골격을 이루는 저작은 역시 「생명철학」(生命哲學)이란 책이다.
* 박용모 교수(세바스티아노, 부경대) 타이완(臺灣) 푸런대학교(天主敎輔仁大學)에서 「주희 '이기' 철학사상 연구」(朱熹理氣哲學思想之硏究)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루오꽝 주교에게서 학위논문 지도를 받은 마지막 학생이다.
경성대학교, 동의대학교, 창원대학교, 부산 가톨릭대학교 강사를 역임했고, 현재는 부경대학교에서 재직 중이다.
주요 연구물로는 '맹자 심성철학 연구'(孟子心性哲學硏究), '노자의 지(知) 연구' '왕양명 공부론의 진로에 대한 성찰', '맹자의 성(性)에 대한 기본 태도' 등이 있다.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41) 루오꽝 (중)
중국 유가와 가톨릭의 인간관 관통한 '생명철학' 주창
생명철학(生命哲學)
루오 대주교의 「생명철학」(Metaphysical Philosophy of Life, 사진)은 모두 3번에 걸쳐 쓰였다. 이 책 초판은 1985년에 출판됐는데, 루오 대주교가 50여년 동안 전력을 다해 연구한 결정체로, 그는 자신의 철학을 「생명철학」이란 이름의 책으로 펴냈던 것이다.
초판 머리말에서 "철학으로서 생명을 말한 것이 아니고 생명으로서 철학을 이야기한 것이다"라고 밝힌 바와 같이 루오 대주교는 중국철학과 서양 사림철학(士林哲學, 스콜라학)을 관통하려고 했지만 이때까지는 전통적인 사림철학의 관점에서 저술했기에 사림철학의 전통 관념을 되풀이해서 얘기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인상을 줬었다. 그 후 1988년에 수정본을 출판해 생명을 해석하는 데 중점을 뒀다. 여기서 말하는 '생명'은 자연과학에서 말하는 생명뿐만 아니라 정신 생명까지도 포함한다.
생명은 인간 생활의 본체이고 인생의 중심이다. 중국철학의 유가 사상은 인류 생명의 의의와 생명의 가치에 대해 광범위하게 논하는데, 생명 철학은 유가 사상에 일찍부터 그 개념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유학에 '생명철학'이란 명칭은 없다. 루오 대주교는 이렇게 말한다. "생명철학이란 단어는 중국철학사 중에는 없었고, 서양철학에서도 현대에 와서 비로소 이런 철학 명칭이 생겼다. 그러나 중국의 유가 사상에는 생명철학 사상이 도처에 표현돼 있었다."
1990년에 재수정본을 출판하면서 보충하고자 한 것은 바로 '생명'의 근원과 발전의 문제였다. 생명의 근원은 절대자유 실체의 창조주인데 창조주는 '창조력'으로 우주를 창조했고, 우주 창조는 무(無)에서 유(有)를 만들었으며, 우주 즉 '창생력(創生力)'은 만유(萬有:만물)를 낳아 기르고 만유를 관통하며 만유를 지지한다. 생명의 발전은 주로 인간 생명의 발전을 말하는것으로, 인간 생명은 최고이며 최고로 복잡하며 최고 완성이다. 인간 생명은 만유의 생명과 서로 관련되는데, 태어나면 곧 가정이 생기게 되고 가정에서 사회로 진입하게 되고, 사회에서 국가와 인류에까지 확장된다. 동시에 인간 생명도 자연계와 상호 연관이 있는 불가분의 관계이기에 생명은 우주 중 인간에서 사물로, 사물에서 인간으로 주유(週遊)하게 된다. 인간 생명의 발전은 우주 안으로 국한되지 않고 생명은 결국 조물주 하느님께로 돌아간다.
- 1990년대 중반 김수환 추기경이 타이완을 방문했을 때 함께한 사진. 오른쪽 아래부터 시계방향으로 루오 대주교, 김 추기경, 티캉 대주교, 대전교구 이창덕 신부, 광주대교구 김권일 신부, 부산교구 박용조 신부, 서울대교구 최기섭 신부, 필자.
사상의 관점에서 보면 루오 대주교의 '창조력'과 '창생력'은 우주의 독립성 문제도 해결할 수가 있다. 동시에 또 창조주의 우주 개입 가능성을 확보할 수가 있다. 별도로 루오 대주교는 사림철학의 개념을 인용해 중국철학 사상을 해석한다. 그래서 사림철학의 '본체(本體: substantia,혹은 자립체(自立體)'를 '체(體)'로 해석하며 '부체(附體: accidente)' 혹은 '의부체(依附體)'를 '용(用)'으로 해석했다.
루오 대주교가 「생명철학」이란 책을 쓰고 수정한 시간을 살펴보면 제1판을 75세에, 수정판은 78세에, 그리고 재수정판은 79세에 저술했다.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생명의 잠재력이 루오 대주교의 몸에서 실현됐다. 더욱이 1991년 80세 때 「생명철학 속편」을, 1994년 83세때 「생명철학 재속편」을,1998년 88세의 고령에 「생명철학의 미학」을 저술해 「생명철학 재수정판」에서 충분히 밝히지 못한 문제를 보충 설명했다.
루오 대주교의 사상
루오 대주교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중국철학의 유가 사상과 그리스도교 사상이 융합해 있는데, 특별히 유가의 생명철학(儒家生命哲學)을 중시하고 있다. 루오 대주교는 유가 사상과 그리스도교 사상을 관통하는 것을 종지(宗旨)로 삼았다. 루오 대주교의 사상 중 핵심 개념은 생명철학인데 그는 생명철학에 대해 "생명으로 철학을 말하는 것이고, 철학으로 생명을 말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유가 사상은 인간 생활에서 소위 말하는 '인도(人道)'가 중심이다. 인도는 인간 생활의 도를 말한다.
가톨릭도 인간을 중요시한다. 천주교에서 말하는 인간은 ① 본체의 인간 ② 사회 속의 인간 ③ 영생의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중 본체의 인간은 인간의 형상학적 구조를 설명한 것으로, 인간은 육체와 영혼을 가지고 있고 그 영혼은 천주의 창조로 이루어진다.
또 인간의 본체는 마음과 물체(心物)가 합해져 이성(理性)을 지닌 동물을 만드는 것이다. 여기서 물체는 신체(身體)를 말하고 마음은 영혼(靈魂)을 말한다. 인간의 영혼은 생명의 근본이며 불멸하기에 영생을 말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당신 초상(肖像)에 따라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다. 하느님의 초상이 바로 인간의 영혼이다.
사회속의 인간은 혼인 가정, 국가, 자연계 공동으로 구성된 인간 사회 환경을 설명하는 것이다. 사람은 태어나면 바로 가정 속에서 '생(生)'한다. 가정은 혼인으로 인해 형성되며, 국가는 개인을 보호하기 위해 발전된 것이고, 인류는 하느님이 사물을 창조하신 것에서 권리와 사명을 획득해 만물을 관리하고 만물을 이용한다. 영생의 인간은 인간 영혼이 불멸하고 인간 사후에도 영혼은 여전히 활동한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생명철학에서는 천주교의 인간론에 기초해 '삼아론(三我論)'을 내놓았는데 '본체아(本體我)', '사회 속의 나(世間我)', '영생아(永生我)'다.
나(我)는 구체적 인간인데, 인간은 하나의 관념이다. 구체적 인간은 바로 한명 한명의 나(我)다. 나(我)도 하나의 관념인데 나(我)라는 관념은 인간이라는 관념에 재(在)라는 관념을 더한 것이다. 인간은 단지 본성이고 나(我)는 인간 본성과 '재(在)'가 결합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결국 나(我)라는 관념에는 완전한 인간이라는 관념이 들어 있다.
생명철학은 천주교 교의(敎義)와 서로 부합하는 철학인데 인간이라는 관념에서 생명철학은 천주교 사상을 대표한다고 말할 수 있다. 생명의 해석은 사림철학의 형상학의 연역이라고 할 수 있다.
'삼아론(三我論)', 즉 본체아(本體我), 사회속의 나(世間我), 영생아(永生我)를 대략적으로라도 좀 더 살펴본다면 생명 철학을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루오 대주교에 얽힌 일화
루오 대주교 본인은 유가 사상과 사림철학을 관통하는 생명철학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루오 대주교는 「생명철학」을 자신의 철학 사상을 대표하는 저서로 여겼다. 그러나 루오 대주교의 자조적 이야기가 의미를 던진다.
루오 대주교에 따르면, 어느 날 자신이 죽는 꿈을 꾸었는데 꿈 속에서 천당 문 입구에 도달했다.
대주교는 서슴지 않고 천당 문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베드로 사도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당신을 모릅니다. 당신은 일생 동안 공자, 맹자를 얘기하면서 지냈으니 공자가 있는 곳으로 가십시오." 이 말을 듣고 공자가 있는 곳으로 가서 공자를 만났더니 공자가 하는 말, "나는 당신을 모릅니다. 당신은 천주교 주교로서 일평생 그리스도의 복음을 말했으니 역시 예수님이 계시는 곳으로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래서 루오 대주교는 어디에도 가지 못하고 있었는데, 마침 천당 문 앞에서 노 부부 한 쌍을 만났다. 노 부부는 "루오 대주교님 아니십니까? 저희에게 세례를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어찌 천당에는 가시지 아니하고 여기서 방황하고 계시는지요?" 하고 물었다. 루오 대주교가 실상을 이야기하자 그 노부부는 그를 위해 베드로 사도에게 청했다. 그러자 베드로 사도가 말했다. "이 노부부 교우가 추천했으니 당신은 천당에 들어와도 좋습니다!"
이 우스개 이야기는 대학자인 루오꽝 대주교가 학술 생활과 실제 생활을 엄격히 구별했음을 보여준다.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대목이다.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42) 루오꽝 (하)
일곱성사와 기도 통해 주님 은총 얻고 신앙적 본성 키워
마지막으로 삼아론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먼저 본체아(本體我)에 대해 설명하면,
1. 본체
인간의 본체는 마음과 물체가 합쳐진 하나의 이성적 동물이다. 물체가 신체(身體)이고 마음이 영혼(靈魂)이다. 사림철학(스콜라 철학)의 견해에 따르면 영혼이 '원형'(元形)이고 신체가 '원질'(元質)이다. 마음과 물체가 합쳐진 본체는 곧 마음과 물체가 합일된 생명이고, 마음과 물체가 합일한 생활을 가지게 된다.
인간의 신체와 영혼은 분리될 수가 없으며 만약 한번 분리되면 인간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본체는 분리될 수가 없기 때문에 본체의 성분이 분리되면 본체는 곧 없어진다. 인간의 신체와 영혼은 하나의 생명을 이룬다. 영혼과 신체가 분리되면 사망, 곧 생명이 끝나게 된다.
모든 사람의 생활은 영혼과 신체의 생활인데 모든 활동은 모두 영혼과 신체가 서로 합해져서 움직이는 것이다. 인간 활동은 보통 생리적 활동과 감각 활동 및 이성의 활동으로 나누는데 생리적 활동과 감각 활동은 신체의 활동이고 이성의 활동은 영혼의 활동이다. 실제로 이 세 종류의 활동 모두 영혼과 신체를 가지고 있다. 생리 활동은 소화 작용, 혈액의 흐름 등과 같이 모두 생명의 활동이고, 생명이 없다면 당연히 소화 작용, 혈액의 흐름 같은 작용도 없다. 감각 활동은 말할 필요가 없이 영혼과 신체가 같이 동작한다. 이성 활동도 역시 영혼 신체가 같이 합해진 동작이다. 사고와 정서는 모두 뇌신경을 사용하는데 뇌신경이 작용을 잃어버리면 인간은 바로 식물인간이 되고 이성 생활과 감각 생활은 모두 정지돼 버린다.
2. 영혼
영혼은 인간 본체의 '원질'(元質)이고 인간 생명의 근원이며 정신체이다. 중국 철학에서는 심(心)을 영혼의 대표로 보고 그래서 인간은 심물(心物)의 합일체라 말한다. 또 중국 철학에서는 혼(魂)을 말하는데 혼은 생명의 근원이라 한다. 사림철학에서도 영혼을 말하는데 이때 영혼은 중국의 심과 혼을 포함한다.
영혼은 전신에 충만해 분열이 될 수가 없고 크고 작음도 없다. 태아의 영혼도 완전한 것이고 성인과 노인의 영혼도 동일하게 완전한 영혼이다.
영혼은 생명의 기초다. 인간의 일체 활동은 모두 영혼의 동작을 가지고 있는데 바로 생명력이다. 영혼은 자기 본유의 활동을 가지고 있는데 바로 이지(理智)와 의지(意志)의 활동이며 즉 지(知)와 주재(主宰)이다. 영혼과 신체 합성의 인간 본체인데 영혼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가 있기에 영혼은 영원히 불멸한다. 사람이 사후 영혼이 불멸하기에 영생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인간과 금수의 혼은 다르다. 금수의 혼은 정신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3. 창조
철학에서 우주의 기원 문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크게 자유설(自有設:우주 평형설)과 창조설(創造設)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노자는 "도(道)는 스스로 있고 스스로 생겼다. 만물은 도에서 생겨났다"고 주장하고, 「시경」(詩經), 「서경」(書經)에서는 우주를 하느님이 창조한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천주교는 우주 만물을 하느님이 창조하셨다고 깊이 믿고 있다.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도 신이 우주 만물을 창조했는데 그것이 최고의 제1원인이라고 한다.
인간의 기원도 철학과 생물학에서 중대 문제다. 다윈이 진화론을 발표한 후 인간은 원숭이에서 진화된 것으로 믿고 있는데 천주교는 인간을 하느님이 창조하셨다고 믿고 있다. 철학에서는 신체는 진화론에서 해석하고 있지만 영혼은 직접 하느님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인간 신체는 물질체이며 구체적으로 오장 육부를 가지고 있는데 현세 생활에 적합하다. 세상 생활 환경은 오래 전부터 큰 변화가 있었는데 원래 생명 활동에는 부적합한 것이었다. 그러나 점진적으로 변화해 부분적으로 적합하게 되고 생명에 적합한 부분이 계속 변화해 결국 여기에 적응한 생물이 나타나 '적자생존'이 생물의 생존 원칙이 됐다.
물질의 '원형'과 '원질'은 태어나면서 유전적 요소에 의해 스스로 주변 환경에 적응하기에 변화가 생기게 되고 긴 시간을 통해 진화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신체는 그 종(種)의 동물에서 진화했는데, 영혼은 직접 하느님의 창조로부터 시작됐다. 조물주가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을 때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셨고 창조한 '유'(有)가 항상 존재할 수가 없기에, 존재하려면 늘 창조주가 우주 만물을 창조한 능력으로 지속적으로 지지를 받아야 한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만물을 돌보는 것은 바로 지속적인 창조다"라고 말했다. 만물을 돌보는 '능'(能)은 바로 만물을 창조하는 능력이다. 하느님은 창조의 능력을 이용해 인간 영혼을 창조하셨다.
사회 속의 나(世間我)에 대해 설명하면,
1. 혼인 가정
인간은 사회 속에서 출생하는데 이때 고독한 한 사람이 아니고 많은 사회속의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으로 태어난다. 부모에게서 태어나서 양육을 받아 성년에 이르게 되는데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생'(生)의 관계다. 그러므로 가정의 관계도 '생'(生)의 관계다. 생이 있다면 반드시 가정이 있게 마련이다. 가정이 있으려면 먼저 혼인이 있어야 하기에 혼인의 의의는 매우 크다. 구약에서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아담이란 남자를 먼저 만드시고 남자의 갈빗대에서 여인을 만드셨다. 신약에서 예수님은 "남자와 여자는 한 몸이어서 영원히 분리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남녀의 결혼으로 두 사람의 생명은 완전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천주교의 혼인에 대한 사상과 규율은 일부일처제로서 분리될 수 없는 것이며 상대방이 죽음에 이를 때에만 비로소 재혼을 허락하는 것이다. 혼인하여 자녀를 양육할 의무가 있고 정조를 지킬 의무가 남녀 모두에게 있는 것이다.
2. 국가
인간의 생명은 가정 내에서 부모의 양육으로 생존할 수 있게 되고 장기적으로는 반드시 일종의 권력이 있어야 권리를 보호받고 각종 능력을 발전시키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이런 권력은 개인보다 높고 큰 것인데 국가라 칭한다. 국가의 권력은 하늘에서 나오는 권력이며 백성을 위해 사용돼야 한다.
3. 자연계
인간 생명이 자연계의 물체 속으로 들어가면 전체 우주는 하나의 생명을 구성한다. 인간은 하느님의 창조로 이루어진 것인데 권리와 사명을 부여받아 만물을 관리하고 이용한다. 우주 만물은 서로 관련이 있는데 한 종류의 사물이 해를 입으면 기타 사물도 간접적으로 해를 입는다. 인간이 만물을 이용해 생명을 유지하지만 만물을 남용하면 안 된다. 맹자는 "친친, 인민, 애물"(親親, 仁民,愛物)이라며 사랑하는 마음(愛心)을 비록 세 층으로 표현했지만, 다 같이 사랑하는 마음이다. 인간이 자신과 타인을 사랑하는 것처럼 사물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의 환경오염 문제도 인간의 사욕이 빚어낸 결과다. 그 결과로 인간이 해를 입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영생아(永生我)에 대해 설명하면,
인간 영혼은 불멸이고 인간 사후에도 영혼은 여전히 활동한다. '영혼의 생활은 도대체 어떠한 것인가' 하는 문제는 종교 신앙의 문제이다. 영생아(永生我)는 종교 신앙의 인간이고 곧 천주교 신앙의 인간이다.
1. 영생아(永生我)는 초성인(超性人)이다
위에서 말한 '본체인'은 인간 본성에 따라 이루어진 것으로 영혼과 육신을 지닌 사람이다. 영혼과 육신은 각각 본능을 가지고 있으며 활동할 때 서로 결합해 활동한다. 그러나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본능적 인간을 창조했을 뿐만이 아니라 본성을 초월하는 능력의 특성을 본성에 부여하셨다. 그러므로 천주교를 믿는 사람은 바로 초성(超性) 영생인이다.
2. 초성(超性) 생명
초성 생명은 신(信),망(望),애(愛) 삼덕이 융화된 본성의 생명이다. 세례를 받으면 신앙이 생활의 기초가 되고 그 신앙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대한 믿음(信)이다. 신앙생활은 인간 혼자 힘으로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반드시 천주의 도움이 있어야만 한다. 천주의 도움이 바로 은총이며 초성 행동의 역량이 되며 초성 생활의 기초가 된다. 인간 행위는 본성의 행동인데 초성계(超性界)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은총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초성 행동의 기초다. 이로 말미암아 인간의 행동은 초성의 성질과 가치를 가지게 된다. 은총을 얻으려면 두 가지 길을 가야 하는데 그 하나는 정식 길로 일곱 성사이며 또 다른 개인 길은 기도다. 그 중에서도 미사가 가장 중요하다. 미사 중에 신자들은 예수님의 성혈을 취하므로 초성의 생명을 실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초성적 영생을 경험하게 된다.
지금까지 루오 대주교의 사상을 생명철학을 중심으로 개략적으로 알아봤다. 루오 대주교 사후(死後) 아직까지 루오 대주교처럼 여러 분야에 걸쳐 다양한 업적을 남긴 철학자, 신학자를 찾아보기는 결코 쉽지 않다.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37)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상)
'가난한 이들'의 관점에서 시작된 '해방신학', 문을 열다
가난한 이들의 변호인
구스타보 구티에레스는 흔히 '해방신학의 선구자' 혹은 '해방신학의 아버지'로 일컬어진다. 그러나 그런 칭호들은 그의 신학적 일생과 지향에 비추어봤을 때 그저 부수적 수사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그의 신학적 근본관심사는 단순히 신학적 성취나 새로운 신학적 체계를 정립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의 빛 속에서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가난한 이들의 얼굴을 신학적 화폭에 그려내고자 하는데 있었기 때문이다. 가난한 이들의 삶과 해방실천에 기초한 관점이 구티에레스 신학의 근간을 이루고 있으며, 그의 저술들 역시 바로 이런 관점이 녹아들어 씌어졌다. 따라서 구티에레스의 해방신학을 통하여 가난한 이들을 향한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가난한 이들의 목소리를 귀여겨듣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그의 신학의 문턱을 넘어설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의 본질적인 의도와 무관하게 또 하나의 새로운 신학적 우상을 만들어내는 것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생애
구스타보 구티에레스는 1928년 6월 8일 페루의 리마에서 케추아족 혼혈(메스티조) 부모 사이에서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열두 살 때 걸린 골수염 때문에 수년간 병고에 시달렸으며 결국 한쪽 다리에 장애를 입어 절게 됐다. 1947년 정신과 의사가 되기 위해 리마의 산 마르코 대학교에 입학해 의학을 공부하면서 정치동아리에 참여해 정치현실에 눈뜨게 된다(1947-1950).
그러나 졸업 후 철학과 신학에 관심을 갖고 진로를 바꿔 사제로 살기로 결단해 페루 리마의 가톨릭 신학교와 칠레의 산티아고 신학교에 입학해 잠시 수학한 후, 유학길에 올라 벨기에 루뱅 가톨릭대학교에서 철학과 심리학을(1951-1955), 프랑스 리용 가톨릭대학교에서 신학을 연구했다(1955-1959). 1959년 사제로 수품한 후 1년간 교황청 그레고리오 대학에서 수학한 후(1959-1960) 귀국해 1960년부터 1965년까지 리마 가톨릭대학교에서 신학과 사회과학을 가르치면서 동시에 리마의 빈민지역 리막(Rimac)에서 사목생활을 병행해 가난한 이들이 처한 불평등한 현실과 구조적인 불의에 눈뜨게 된다. 1974년에는 리마에 가난한 이들을 위한 라스 카사스 센터를 설립했다.
1985년에는 학문적 업적을 인정받아 프랑스 리용 가톨릭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후에도 유럽의 여러 유수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다. 1993년에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헌신을 인정받아 프랑스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1998년에는 그의 해방신학에 큰 자극을 준 도미니코 수도회 회원 라스 카사스(Bartolome de Las Casas 1484-1566)를 비롯해 프랑스 유학 중에 교류했던 콩가르(Y. Congar), 세뉘(M.-D. Chenu), 쉴레벡스(E. Schillebeeckx) 같은 도미니코 수도회 소속 회원들의 영향으로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회했다. 구티에레스는 유럽 여러 대학교와 미국 노틀담 대학교에서 가르치기도 했으며, 노구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왕성하고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구티에레스 해방신학의 배경
구티에레스의 신학에 큰 자극을 주었던 교회적 사건으로는 특히 1962년부터 1965년까지 열린 제2차 바티칸공의회와 자신이 신학자문으로 참여했던 1968년 콜롬비아 메데인(Medellin)에서 열린 제2차 라틴 아메리카 주교회의(CELAM Ⅱ)를 언급할 수 있겠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교회의 쇄신과 적응(aggiornamento)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교회를 구원의 보편적 성사로 자리매김함으로써 교회와 세상의 관계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으며, 시대 안에서 인간들의 열망과 하느님 현존과 계획의 징표를 읽고 이를 복음의 빛으로 해석해 응답하고자 했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들은 남미의 구체적 현실에 대답하기에는 미흡했으며 일반론적 서술에 머물고 있다는 한계를 지녔다. 반면에 라틴 아메리카 교회를 그 이전과 이후로 구분할 만큼 새로운 전환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되는 메데인 회의(1968년)는 비참하고 불의로 가득 찬 라틴 아메리카 대륙에서 교회가 처한 현실을 바탕으로 교회 쇄신의 방향을 더욱 뚜렷하게 제시했다.
메데인 회의는 라틴 아메리카 대륙이 전면적인 해방, 온갖 예속으로부터의 해방, 인격적 성숙, 집단적 통합을 바라는 열망으로 가득 찬 새로운 역사적 시점에 들어 서 있다고 진단하면서(메데인 문헌: 서문 4항) 남미의 상황을 '제도화된 폭력이라고 부를 불의의 상황'(메데인 문헌: 평화, 16항)으로 규정한다. 특히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인 불평등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주님이 주시는 평화의 선물을 거부한다. 그런 곳에서는 주님 자신조차도 거부된다"(메데인 문헌: 평화, 14항)고 천명하였다. 아울러 메데인 회의는 인간을 온갖 노예상태에서 해방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의 빛 속에서(메데인 문헌: 정의, 3-5항 참조)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과 연대(메데인 문헌 : 교회의 가난, 9-11항 참조)를 강조하고 교회의 현실 참여에 새로운 계기를 마련했다.
구티에레스의 해방신학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와 메데인 회의의 구체적인 육화라고 할 수 있으나 그의 신학에 결정적 배경을 이루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구티에레스에게 가난한 사람들은 바로 남미의 불의한 현실을 이해하고 그리스도교 신앙을 새로이 숙고하게 한 결정적 동인이었고 해방신학의 일차적 산파였다.
구티에레스 해방신학의 일차적 대화자인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은 16세기까지 거슬러가는 해방 전통에 뿌리내리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특히 라스 카사스(Bartolome de Las Casas, 1484-1566)는 정복자의 관점을 극복하고 가난한 이들의 관점에서 복음을 증언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해방신학의 선구적인 역할을 한 사람으로 평가된다. 스페인 출신의 도미니코 수도회 선교사였던 라스 카사스 16세기 스페인의 라틴 아메리카 인디언 정복과 식민지 지배를 비판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시선에서 복음을 증언한 '가난한 인디언의 변호인'으로 일컬어진다. 16세기 당시 라틴 아메리카 상황을 지배했던 신학은 남미의 인디언 정복과 불의한 착취 그리고 식민지 지배를 이론적으로 정당화했던 억압과 정복의 신학에 다름 아니었다. 이에 따르면 라틴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인간의 자연성에 따라 애초부터 종의 처지로 태어났고, 이들의 주인으로 태어난 유럽인들보다 열등하다는 것이었다. 이 신학은 인디언들을 복종시키고 복음화하기 위해서는 전쟁도 불가피하다고 보고 인디언에 대한 억압과 착취, 노예화를 신학적으로 정당화했다.
이에 대항해 라스 카사스는 인디언들 역시 자유롭게 태어난 존재이며, 자신들의 자유를 존중받을 권리를 갖고 태어났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노예로 간주되고 있는 인디언들은 억압과 착취로부터 자유롭게 돼야 하며, 그렇지 않고서는 복음화도 불가능하다고 봤다. 진정한 복음화는 오로지 자유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구원은 정의와 불가분한 것으로 여겨 당시 사회경제 체제의 핵심을 이루고 있었던 엔코미엔다(라틴 아메리카에서 스페인 국왕이 하사한 토지)를 철폐하는 데 앞장섰다. 무엇보다도 라스 카사스의 신학 핵심을 이루고 있었던 것은 인디언들이 단순히 복음화의 대상이 아니라 복음화의 주체임을 간파한 것이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인디언들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고 보고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인디언들과 그리스도를 동일시했다는 점에 있다. 이런 맥락에서 구티에레스가 라스 카사스를 해방신학의 선구적 역할을 한 인물로 보고 자신의 신학적 작업의 여정에서 깊이 천착하고 있다는 점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구티에레스는 라스 카사스 대한 연구서들을 출간하기도 했다(특히 「라스 카사스: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서」, 1992).
주요저술
- 구티에레스 저서 「해방신학」 번역본(왼쪽)과 영어판 「우리의 우물에서 생수를 마시련다」.
구티에레스의 주요 저술로는 무엇보다도 해방신학의 선구적이고 기념비적인 저작이라고 할 수 있는 「해방신학」(1971: A Theology of Liberation: History, Politics and Salvation)이 있다. 본격적인 해방신학 역사의 첫 장을 열었다고 할 수 있는 구티에레스의 「해방신학」은 1968년 페루의 심보테(Simbote)에서 해방의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최초의 강연에서 비롯됐고, 남미 해방신학의 대헌장(Magna Carta)으로 여겨진다. 그 후에 전개된 남미 해방신학의 대부분은 이 책을 인용한 각주에 불과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는 유신정권 시절인 1977년에 성염의 번역으로 출간돼 교회 안팎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금서목록에 오르기도 했다. 그 이후의 저술들은 근본적으로 「해방신학」의 근본 관점을 다양한 맥락에서 심화한 것으로 읽을 수 있다. 저서로 「가난한 이들의 역사적 위력」(1979), 「우리의 우물에서 생수를 마시련다」(1983), 「욥에 관하여」(1986), 「생명의 하느님」(1989), 「라스 카사스 :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서」(1992: Las Casas: In Search of the Poor of Jesus Christ) 등을 언급할 수 있다. 그리고 구티에레스의 오랜 벗이요 현재 교황청 신앙교리성 장관이기도 한 게르하르트 루드비히 뮐러(Gerhard Ludwig Muller) 추기경과 2004년에 공동으로 출간한 「가난한 이들의 편에 서서: 해방신학」(On the Side of the Poor: The Theology of Liberation)이 있다.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38)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중)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인간 해방 위해 투신하도록 초대
구티에레스 신학의 핵심 관점과 지향
신학의 근본 문제는 각기 다른 인간 삶의 맥락에서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해방하고 구원하는 복음'을 선포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따라서 구티에레스에게 '사랑의 하느님을 남미 상황에서 어떻게 선포할 것인가?' 혹은 '가난하고 압제받는 사람들의 수난에 직면해 어떻게 우리는 하느님에 대해 말해야 하는가?' 하는 물음이 신학적 성찰의 출발점이 된 것은 지극히 마땅한 것이었다. 그의 해방신학에서 핵심을 이루는 관점과 지향은 다음 몇 가지로 요약된다.
우선 구티에레스의 해방신학은 가난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그들이 처한 불의한 상황, 그들이 제기하는 문제들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중남미 대륙과 대부분의 가난한 사람들이 처한 갖가지 형태(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ㆍ인종ㆍ종교)의 종속과 소외, 사회계급 사이의 극심한 양극화와 불평등, 지배집단의 억압과 가혹한 탄압, 경제적 신식민주의 등과 같은 '제도화된 폭력이라 부를 불의한 상황'(메데인 문헌: 평화, 16항)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해방실천 없이는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해방과 구원은 기대할 수도, 가능하지도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둘째, 구티에레스의 해방신학은 가난한 사람들의 역사적 해방실천(praxis)과 그 경험으로부터 신앙을 이해하고, 해방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빛으로 성찰하고 해석하고자 한다. 이런 점에서 그의 해방신학은 단순히 지적이고 신학적인 독창성을 구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억압의 세상 속에서 해방을 맛보려는 가난한 사람들의 해방실천에서 솟아나는 신앙체험과 신앙 감각을 겸허하게 수용하고 충실하게 성찰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구티에레스의 주저 「해방신학」은 이렇게 탄생한 것이다.
셋째, 이런 맥락에서 구티에레스는 신학적 성찰과 행위를 신앙실천에 뒤따르는 이차적인 것으로 본다. 신학의 일차적 행위는 해방의 역사적 실천에 참여하고, 그와 더불어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 구티에레스는 진정한 신학(자)의 기준은 해방의 역사적 실천에 동참했는가 그렇지 않았는가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곧 해방실천에 동참하여 숙고되고 반성된 신학이 올바른 신학이라는 것이다(「가난한 사람들의 역사적 위력」 109, 178 참조). 이런 관점에서 그의 해방신학은 그저 세상을 고찰하는 차원에 머물지 않고 하느님 나라의 전망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수호하기 위해 맞서 싸우며, 세상의 변혁과 인간 역사의 변혁의 과정에 참여하겠다는 의지와 전망을 담고 있는 신학이다. 이렇게 볼 때, 남미의 가난한 이들의 시선으로 복음을 재해석하는 구티에레스의 해방신학의 근본 지향은 인간을 향한 그리스도의 온전한 사랑 안에서 인간 해방을 위해 투신하도록 초대한다는 데 있다.
넷째, 구티에레스의 해방신학적 논의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다. 예수 그리스도가 무상으로 선사하는 해방의 복음이 신앙 이해와 해방실천을 위한 해석의 원리이다. 곧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과 하느님, 역사와 신앙, 인간의 말과 하느님의 말씀, 이웃 사랑과 하느님 사랑, 인간의 정의와 하느님의 정의의 상호관계를 순환적인 관계에서 바라보게 하는 해석의 원리라는 것이다.
다섯째, 구티에레스의 해방신학은 사목 활동과의 깊은 관계 속에서 비롯됐다. 그의 해방신학은 단순히 책과 책 사이를 오가는 사변적인 순례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사목적인 행위와 관련해 탄생했다. "나는 1960년대 유럽에서 공부를 마친 다음, 페루로 돌아와서 사목 일을 시작했지요. 제 일은 곧 남미적 문제와 부닥치게 되었습니다. 사목 일을 통해서 나는 새로운 의식으로 깨어났고, 그들의 상황을 새로운 방식으로 보고 있던 집단들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들과의 나눔과 공동체의 삶 그리고 우리나라 안에서나 밖에서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과의 인간적인 가까워짐, 이 모든 것들이 나를 각성시킨 것입니다.…나의 접근방식은 근본적으로 사목적이었습니다. 해방신학은 사목으로부터 발전했습니다”(페터 아이허, 「해방신학을 말한다」 27).
여섯째, 구티에레스의 해방신학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이 스스로 복음화와 해방의 주역이 돼 자신들의 목소리로 말하고, 역사 안에서 행한 해방실천에서 얻은 그들의 고유한 신앙체험과 가치들이 존중받는 것이다. "최후로 정말 올바른 해방신학이 정립되려면 피압제자들 스스로가 사회와 하느님의 백성 가운데서 발언권을 가지고 자유로이 의사를 표시할 수 있어야 하며, 자기네가 지니고 있는 '희망을 해설하며', 그들 스스로가 자기네 해방의 주역이 되어야 한다"(「해방신학」 339).
해방의 의미
해방(liberation)이 구티에레스 신학에서 중심 개념을 차지하게 된 배경에는 이른바 개발(development) 이데올로기가 지닌 허구와 그 폐해에 대한 깊은 성찰이 있었다. 1950년대 남미에 집중된 부강한 국가들의 개발원조는 큰 기대를 갖게 했으나 실상은 빈곤한 국가들이 처해있는 빈곤의 뿌리를 근절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저개발로부터의 해방에 실패했고, 개발정책은 오히려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예속과 종속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빈곤한 국가들의 종속적 상황에 대해서는 이미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큰 우려를 표명했다. 「사목헌장」에 따르면 "부유한 나라들과 개발도상국들의 격차는 날로 커져가고 흔히 경제적 예속도 심화되고"(9항) 있으며, "극심한 불평등과 온갖 형태의 부당한 종속에서 해방되고 심각한 내부 곤경의 위험에서 벗어나기에는 아직도 요원하다"(85항 참조)는 것이다. 이와 관련, 메데인 회의는 신식민주의의 위험성 또는 제국주의의 폐해와 경제적 독재로부터 빚어진 사회계급의 불평등, 소외 계층의 비참한 생활상태를 강조했다(메데인 문헌: 평화, 1항-10항 참조).
따라서 구티에레스에게 중남미 국민의 대다수를 사로잡고 있는 빈곤, 착취, 인간소외로부터의 해방, 곧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해방은 시급하고 요긴한 것이었다. 아울러 해방은 인간의 자기완성을 가로막는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달리 말하자면 역사 속에서 질적으로 다른 사회를 추구하고 모든 종류의 종속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할 수 있는 사회를 추구하는 인간, 곧 '새 인간'으로의 해방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 해방은 타인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자유 안에서 모든 불의와 압제의 근본 원인인 죄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뜻한다. 이는 곧 해방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로 말미암아 깨진 인간과 인간, 인간과 하느님 사이의 친교와 관계를 새롭게 회복하고, 타인을 위한 존재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을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시키시고 타인을 위한 존재가 되도록 자유를 선사하셨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구원은 인간의 개인적 죄로부터의 해방만이 아니라 '사회적이고 역사적 실재'인 죄로부터의 해방, 곧 인간 실존의 모든 영역을 사로잡고 있는 죄의 현실로부터의 해방을 포괄한다.
물론 이 세 가지 해방의 차원은 단순히 서로 분리되는 것도, 순차적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동시적 국면이고 상호의존적이며 총체적인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정치, 경제적 해방은 근원적으로 죄로부터의 해방을 지향하는 것이고 또 그래야 비로소 온전한 해방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티에레스의 해방 개념은 후에 1979년 푸에블라(Puebla)에서 열린 제3차 라틴 아메리카 주교회의에서 수용된다(푸에블라 문헌: 특히 321-339항 참조).
해방의 영성
구티에레스의 해방의 영성은 근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증언하는 이웃 사랑과 하느님 사랑으로 집약된다(마태 22,34-40 참조). "영성은 만인과 연대하여 '주님 앞에서 사는' 길이며, '주님을 모시고' 인간들의 눈앞에서 사는 길이다"(「해방신학」 232). 영성이 참으로 그리스도교적인 것으로 입증되는 것은 '이웃을 향한 회심', 특히 압제받고 착취당하고 차별받고 지배당하는 사람들과 민족들을 향한 회심이 이루어지고, 이들의 해방실천을 위한 투신을 통해서다. 이웃을 향한 회심은 구체적으로 불의에 고통당하고 가난한 사람들과 연대하고 그들을 둘러싼 정치적, 사회경제적, 문화적 구조와 상황을 변혁하는 일에 투신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기존의 사고방식, 자신이 속한 사회계층과 결별하고, 타인을 대하는 태도를 바꿔야 하고, 주님과 일치하는 방법을 달리해 새 인간이 돼야 한다. 구티에레스에 따르면, 이러한 해방의 영성은 '하느님 사랑과 은혜의 무상성'에 대한 깊은 체험 속에서만 비로소 온전히 꽃피울 수 있다.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의 무상성은 인간 개인과 공동체의 실존근거를 이루며,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자기 자신을 무상으로 건네주는 친교의 선물이다. 우리가 이를 깨닫고 체험하게 될 때 타인에 대한 무상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인간을 향한 사랑과 하느님을 향한 사랑에서 온전한 일치를 보여주신 분이다. 하느님과의 일치와 친교는 인간을 통해 이루어지고, 하느님과의 친교에 힘입어 인간 상호간의 친교가 진정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몸소 증언했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과 인간을 온전히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본 바와 같이 구티에레스의 해방의 영성은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영성과 남미의 가난한 이들의 경험과 현실에 기초해 생성된 것이며, 개인주의적인 내면의 차원에 갇힌 영성주의로부터 해방시켜 진정한 그리스도교 영성의 핵심에 이르도록 이끈다는 점에서 그리스도교 영성의 본령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구티에레스는 이러한 해방의 영성을 자신의 저서 「우리의 우물에서 생수를 마시련다」(1983)에서 매우 심도 있게 성찰하고 있다.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39)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하)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은 교회 사명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
구티에레스에 따르면 해방의 영성은 무엇보다도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과 연대를 통해 구체화되고 실현된다. 여기서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을 통해 구체화되는 이 해방의 영성이 하느님 중심적이고 그리스도론적인 관점에서 이해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가난한 사람들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불의한 상황이 빚어낸 실제 가난에 처한 이들이다. 이러한 가난한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해야 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유하면서도 가난해지셨고, 일생 동안 가난하게 사시면서 가난한 사람들이 처한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시고 해방의 복음을 선포하셨으며, 가난이 최고 형태로 표현된 십자가 죽음을 통해 가난한 이들과 연대하셨기 때문이다. 아울러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은 "그리스도께서 몸소 그 사실을 입증하신 것처럼, 하느님께서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궁핍한 처지에 빠져 있는 그 가난한 사람들을 그들의 도덕적 혹은 영신적 상태가 '그 어떤 것이든 간에' 특별히 사랑하신다는 사실에 기초를 두고 있다"(「가난한 사람들의 역사적 위력」 210). 이런 점에서 볼 때,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은 하느님의 사랑과 은혜의 무상성을 가장 깊은 의미에서 체험할 수 있는 길로 제시된다.
하느님 중심의 관점과 그리스도론에 기초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은 교회의 복음화 사명 수행의 진정성을 입증하는 핵심 표징이라는 점에서 교회론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와 관련,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은 제2차 라틴 아메리카 주교회의(「메데인 문헌」, 제14장 교회의 가난 참조)와 제3차 라틴 아메리카 주교회의(「푸에블라 문헌」, 1134-1165항 참조)에서도 강조되고 있으며, 이 정신은 후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회칙 「사회적 관심」(1987, 42항, 46항 참조)과 「백주년」(1991, 11항 참조)에서부터 최근 프란치스코 교황의 권고 「복음의 기쁨」(2013, 198-199항 참조)에 이르기까지 교회의 보편적 사명의 차원에서 일관되게 수용되고 있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은 배타성과 무관하며, 복음의 보편성과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분명하다. 오히려 가난한 이들에 대한 선택이야말로 하느님 나라 복음의 보편성을 충만하게 실현할 수 있는 가장 명백한 출발점이다. 인간 존엄성을 심대하게 훼손하는 반복음적 가난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하느님의 관계에 깊은 균열이 나 있다는 표시이기에 하느님의 나라와 양립할 수 없으며, 죄의 표징으로서 가난이 빚어내는 균열을 근본적으로 치유할 때 참으로 모두가 해방될 수 있기 때문이다.
- 구티에레스의 해방신학이 표방하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은 회칙 등 문헌에 교회의 보편적 사명 차원에서 일관되게 수용되고 있다. 사진은 왼쪽부터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사회적 관심」ㆍ「백주년」, 프란치스코 교황의 권고 「복음의 기쁨」.
가난한 사람들의 교회
구티에레스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선택이 '교회의 진정한 복음적 증거'라고 강조하면서(「가난한 사람들의 역사적 위력」 241 참조) 동시에 교회가 가난을 증언하는 것이 교회의 진정성을 입증해주는 척도요 "교회 사명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표징"이라고 말한다(「해방신학」 337). 따라서 교회는 기존 질서와 연루돼 있음으로 해서, 그 체제가 만들어내는 악에 대해 침묵을 지킴으로써 불의를 조장하지는 않았는지, 교회의 부동산, 주택과 부속건물, 생활양식 전체를 통해 오히려 가난한 교회를 거부하고 있지 않은지 겸허하게 고백하고 성찰할 필요가 있다(「해방신학」 125, 143). 교회가 가난을 증언하는 길은 가난한 이들에 대한 복음 선포, 부정과 불의에 대한 규탄, 검소한 생활, 봉사정신, 세속 권력과의 야합ㆍ특혜의 포기, 가난한 이들과의 연대에 있다. 이렇게 할 때 교회는 진정으로 가난한 교회가 될 수 있다.
해방신학을 둘러싼 갈등과 교황청 신앙교리성의 입장
구티에레스를 비롯한 해방신학자들은 이미 1970년대 초반부터 반공주의 내지는 국가안보주의를 내세운 미국을 비롯해 남미의 정치세력과 경제적 권력집단은 물론이고 교회의 다양한 해방신학 반대세력으로부터 조직적 반발에 부딪혔다. 그리고 1984년부터 이른바 해방신학을 둘러싼 갈등은 본격적으로 표면화됐다. 특히 마르크시즘 분석에 바탕을 둔 계급투쟁의 현실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 시대 안에서 교회의 구조와 직무 수행의 적절성에 대한 비판, 죄와 해방 그리고 구원의 관계,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의 정치적 귀결, 정통신학에 대한 이해 등과 같은 사회과학 방법론의 쟁점에서부터 신학적 쟁점에 이르기까지 격렬한 갈등이 표출됐다.
이와 관련, 특히 당시 라칭거 추기경이 장관으로 있던 교황청 신앙교리성은 '해방신학의 일부 측면에 관한 훈령'(1984)과 그 후속 문서인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해방에 관한 훈령'(1986)을 잇달아 발표했다. 특히 1984년 훈령은 "마르크스주의 사상의 여러 경향으로부터 빌어온 개념들을 충분한 비판 없이 사용하고 있는 일부 해방신학의 형태에 의하여 초래되는,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신앙을 손상시키는 일탈 또는 일탈의 위험"(서론)을 경고했다. 물론 1984년 훈령에는 해방신학자 그 누구도 명시적으로 거론되고 있지는 않지만, 구티에레스의 해방신학(특히 그의 「가난한 사람들의 역사적 위력」(1979)과 같은 저술)의 관점도 경고 대상이 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구티에레스는 마르크시즘의 분석 방법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지도 않았고, 결코 계급투쟁을 통한 해방을 지향하지도 않았다. 사실 해방신학을 반대하는 세력들이 비판하는 마르크시즘과 해방신학의 연루문제는 이론적 논쟁의 차원보다는 기득권 체제의 균열을 방어하려는 차원에서 이루어진 공격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결국 해방신학에 대한 비판이-설령 의도하지 않은 것이라 할지라도-반공주의 및 지배 세력의 논리에 호응하는 것으로 귀결됐다는 점은 매우 유감스러운 것이었다.
해방신학에 대한 당시 한국 천주교회 입장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성명서에 잘 나타나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해방신학'이라는 이름에 편승하는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을 경계하여야 한다. 성서와 교의를 순전히 정치적으로 해석하고, 성서의 가난한 사람들과 마르크스의 무산자들을 혼동하며, 폭력적인 계급투쟁으로써 진정한 개혁을 지체시키는 것은 교회의 정통 신앙에서 일탈하는 것이다. 그것은 다만 정신적인 파멸 위에 새로운 빈곤과 예속을 가져올 뿐이다"(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성명서, 1984). 이 성명서는 엄밀한 성찰을 거친 것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1984년 훈령의 입장을 그대로 되풀이하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해방신학에 대한 오독 내지는 무지가 아니면 표명될 수 없는 것이었다.
구티에레스 해방신학의 의의와 오늘의 의미
구티에레스의 해방신학이 가난한 사람들의 삶과 현실에서 출발해 그들의 시선으로 신학을 하는 새로운 전망을 열었다는 점은 언제나 유효한 것으로 남아 모든 신학적 행위를 성찰하도록 하는 시금석이 될 것이다. 이러한 전망은 무엇보다도 불의한 상황에 처한 가난한 사람들의 삶과 역사 속에 현존하시고 그들을 향해 무상성의 사랑을 베푸시는 하느님의 신비에 대한 깊은 천착으로부터 나왔다는 것을 간과할 수 없다. 따라서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사시는 하느님, 하느님의 무상성의 사랑을 드러내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깊은 실천적 관상 없이 우리는 결코 그의 신학에 다가설 수 없을 것이다. 해방신학에 대한 비판자들이 그의 신학의 문턱 앞에서 좌초한 이유는 바로 그런 까닭이다. 아무튼 교회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우선적인 선택을 교회의 사명실천의 중심으로 새롭게 수용하게 된 것은 해방신학이 선사한 귀중한 선물이 아닐 수 없다.
구티에레스 해방신학이 라틴 아메리카 상황에서 복음을 해석하고 실천하고자 했던 점은, 이른바 복음의 육화 내지 토착화라는 과제와 관련해 부차적이 아니라 본질적임을 재차 새롭게 깨닫게 해주는 것이었다. 사실 이런 신학의 관점은 교회의 신학 역사에서 언제나 보편적으로 행해진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 선포가 바로 그런 차원에서 이뤄졌다. 이런 점에서 그의 해방신학이 서구의 신학, 특히 정치신학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민중신학 및 사회변혁운동에 큰 영향과 자극을 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구티에레스의 해방신학이 하느님 나라의 전망 안에서 해방실천을 신학적 반성과 성찰의 출발점으로 삼은 것은 단순히 이론과 실천의 관계 문제에 대한 해명만을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이는 근본적으로 인간의 해방과 구원에 투신한 모든 이들의 삶에 대한 겸허한 헌화와 같은 것이며, 모든 인간이 진정으로 자유롭고 해방된 존재가 돼 인간과 하느님의 친교, 인간과 인간의 친교를 회복하도록 하는 초대다. 이런 점에서 신학은 해방실천의 각주에 불과하다는 그의 견해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구티에레스는 오늘날 변화된 인간상황과 세계상황 속에서도 해방신학은 여전히 유효한 것이냐는 물음에 직면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한결같이 말한다. 가난한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세상 끝까지 그들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계속될 것이라고.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