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자마
어제는 아침에 주말농장에 가서 열무를 뽑았다. 뽑는 거야 쉬웠지만 벌에 숭숭 뚫련 열무를 다듬는 늙은 어미는 고됐다. 며칠 내린 비로 자빠지고 헝클어진 밭을 정리하고 풀도 좀 뽑고 지주대도 새로 만들어 준 뒤, 샘에 가서 물병을 채웠다. 그리고 어머니와 헤어졌다. 마침 어제 내 파자마를 만들었다며 주시고 갔다.
오후에 집에 다시 전화가 왔다. 열무 김치를 담갔는데 맛이 좋다며 창동역에 7시에 나오라는 것이다. 나중에 내가 가던지 아버지가 차가지고 오실 때 가져오던지 하면 될 거라고 했더니, 열무는 막 담은 것이 맛 있다면 7시에 만나자는 것이었다. 그래 자전거 타고 창동역에 다녀왔다.
아침에 열무를 내어 먹으려니 풋내에 생김치 특유의 맛 때문에 두어젓가락 먹고 말았다. 어머니는 생김치를 좋아하고 나는 푸욱 익은 김치를 좋아하는데, 아무래도 익혀 먹어야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나저나 나는 파자마를 입었다. 언제부턴가 어머니가 만들어주는 것은 유품을 받듯 소중한 느낌으로 받는데, 내가 벌써 파자마를 입을 나이가 되었다니 웃기고 웃긴 일이다. 파자마의 추억은 7,80년대 한국 골목 풍경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나는 파자마를 입고 골목을 청소하거나 바람을 쐬는 아버지가 창피했다. 내 머릿속엔 파자마는 속옷인데, 또 한국 파자마라는 게 일반적으로 속옷의 분위기가 나는 디자인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아버지만 파자마 바람으로 골목을 어슬렁거리신 것은 아니다. 옆집 희철내 아버지도 파자마를 입고 어슬렁거릴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파자마 바람은 좀 가리기는 했지만 그렇게 관여의 대상은 아닌 듯 하였다. 하지만 민감한 나이였던 나는 그게 창피했다.
더구나 골목에서 파자마 앞섶에 손이라도 집어넣고 있는 포즈란 정말 낯뜨거운 것이었다. 그래 파자마란 어린 시절 참으로 웃기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파자마를 입고 짝다리로 개다리를 떨던가, 몸을 한쪽 가랑이에 통채로 넣는 것도 재미 있지만, 아무튼 파자마는 은연중 무서운 아버지에 대한 혼자만의 조롱이었다.
그런데 내게 파자마가 생긴 것이다. 인도 여행할 때 쿠르다(?)와 파자마를 만들어 입고 다닌 적은 있지만, 그것은 한국식 파자마가 아니었다. 봄에 자전거 타고 방학동 거리를 산책하다가 옷 가게 앞에 파자마가 몇 벌 걸려 있는 것을 보고 빙그레 웃음이 났던 적 있다. 역시 한국의 헐렁한 파자마는 속옷 스타일의 남성 실내복의 성체성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30년 전이나 똑같다. 달라진 건 파자마 입고 문밖으로 나오는 경우란 정말 공자가 말한 치외법권적 나이(종심소욕불유구의 7,80대)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버지는 평생 그럴 수 있는 세대이시지만, 아파트에 살아선지 통 그럴 기회를 잃고 말은 셈이다.
그런데 내게 파자마가 생겼다. 물론 나는 파자마를 입고 밖에 나갈 수 없을 만큼 소심하다. 그저 내겐 7부로 깡똥한 이 파자마가 한없이 편하고 좋다는 것이다. 웃기는 파자마를 입고 이걸 지인들에게 구경시켜주고 같이 깔깔깔 웃지 못해 아쉬울 뿐이다.
문화란 무엇인지 참으로 완고하다. 여행할 때는 룽기라고 해서 2미터 되는 천을 허리에 휘감고 다닌 적도 있다. 서툰 탓에 며칠 그렇게 입어보다 포기했지만 지금도 인도인들의 그냥 천을 휘둘러 입는 스타일의 나는 참 좋아하고 부러워한다. 그리고 내가 웃기는 파자마라고 하는 그 파자마가 또 그렇다. 내가 입은 파자마도 허리와 바짓부리만 바금질이 되어 있다. 허리는 까만 고무줄 하나가 들어 있다. 간단하면서도 시원하다. 앞도 없고 뒤도 없다. 인조화합섬유라 인체에는 좋지 않겠으나 질기긴 참 질기다. 이거면 여름옷으로 최고다. 더운 나라 사람들이 많이 입는 파자마가 바로 이것이다. 그런데 한국식 파자마는 유교분화의 내외관 때문인지 그만 실내복으로 편입되었다.
나는 아직 소원을 가지고 있다 밖에서 쉽게 입을 수 있는 제대로 된 파자마를 언젠가는 입고 말 것이다.
파자마 속에 들어가 뒹굴거리며, 아버지의 옷을 내가 입고 있다는 묘한 느낌에 꼼짝없이 걸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