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성사부모님께옵서 33세에 (개도 33년 1906년)에 득도하신 이후 강원도 통천군 답전면에서 계룡산 백암동으로 남천포덕하시어 도덕을 설파하시며 제자를 얻으시고 금강대도를 창도하시는 과정에서 교화하신 말씀을 수집 편집하여 성훈통고로 출간하여 인류중생 구제의 깨우침을 주신 글을 게재 함께 공유하고자 합니다.」
2-51 유파 오희서, 석산 오희성, 계산 오연창
갑인년(개도41년 1914년) 12월 26일에 오희서(호 유파)가 처음으로 성문에 들어와 성훈을 받자오니, 말슴하시기를 “효는 백행의 근원이 되니 만일 부모에게 효를 하지 아니하면 일찍이 나는 새 까마귀만 같지 못하다” 하시고 또 유불선 삼합의 진리를 말씀하시니, 도덕은 밖으로 드러나시고 위의威儀는 일에 베푸시는지라.
그 도를 말할진대 천지로 더불어 그 체를 같이하시고, 그 덕을 말할진대 일월로 더불어 그 묘한 것을 합하시니, 높고 높으신 그 덕을 능히 이름하여 말할 수 없도다.
그 후에 희서가 형 희성(호 석산)을 따라 사부님을 뵈오니, 성사께옵서 한 매화나무를 그려 말씀하시기를 “한 가지가 동쪽을 향하여 피었으니 내 인연이 동녘에 있다” 하시고 희성을 돌아보고 말씀하시기를 “나에게 한 개의 침통이 있어서 너에게 주노니, 혹 긴급한 때가 있거든 사용하라.”
석산이 명령을 받자온 후에 과연 신기한 묘술이 편작과 같은 고로 각처의 인사들이 풍문을 듣고 오니, 자연히 4개월간 각처 제자들이 인연하여 출입하니라.
그 후 사부님께서 중척(정골)에 행차하실 때에 오연창(호 계산)이 유.불.선 삼합의 조목을 여쭈옵건대, 말씀하시기를 “유가의 오륜과 불가의 계살과 선가의 심청이라” 하시고 또 말씀하시기를 “희성은 성질이 본래 돌 같으니 호를 석산이라 하노라.
몽수비장경(책이름)에 힘을 써서 가업을 닦으라”하시고 “취곡(오연성)은 심성배합 하기가 어렵고 어려우나 가히 이에 종사할 것이요, 유파는 본래 공부하는 사람이니 옛길을 잃지 말고 파리가 천리마에 붙음과 같이 하면 수고롭지 않고 천 리를 가리라” 하시고 미소를 지으시다.
경신년(개도47년 1920년) 가을에 사부님께서 불의의 변고가 있으시더니 하늘이 돕고 신명이 도우시사 하늘이 그 관리의 눈을 빼앗고 신명이 그 살 길을 보이시사, 처음에 중방리 임문철(호 청호) 집에 거하시고 다음에는 송옥동, 박노윤(호 화청) 집에 계시고 다음에 중척리에 거하시니, 석산의 흙집 두어 칸이 빛나니라.
그때 사부님께서 여러 제자를 돌아보고 말씀하시기를 “예전에 공자가 진나라 땅에서 7일간 양식이 떨어짐과 광나라 땅에서 포위당한 것이 내가 남산소에서 양식이 떨어짐과 녹동에서 액을 당한 것과 같다” 하시니, 그때 왜정의 가혹 행위가 극심하여 사부님의 종적이 다른 사람의 이목에 띌까 두려워하여 반 칸 흙집에서 12일을 괴롭게 머무르시니 죄송한 말씀을 어찌 다 하리오.
하루는 성사께옵서 희서를 돌아보시고 말씀하시기를 “나의 무릎을 용납하기 어려운 괴로움과 네가 곁에서 모신 정성이 내일이면 다 하리라” 하시더니, 이튿날 과연 일이 해결 되니라.
사부님께서 간혹 틈을 타서 갓과 망건을 벗으시고 나무꾼 모양으로 산에 오르시어 쇄풍洒風 하실 새, 혹 산의 재혈 하는 이치를 의논하시며 사부님 친산 권조할 곳을 결정하시고 석양을 보내고 밝은 달을 맞아 돌아오시다.
그 후에 성사께옵서 한 번 신도안에 행차하시어 구경하실 때에 김구암(명 연국)의 사는 집 건축이 성대함과 각 제자의 집이 초라한 것을 보시고 말씀하시기를 “다른 사람의 일이 곧 우리의 일이라.
도덕은 검소함을 숭상하나니, 오직 우리 도의 건물은 사치하고 화려하게 하지 말아라” 하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