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에 급급했을까. 문이 닫히며 엘리베이터가 순식간에 올라가 버렸다. 지하 주차장에서 나의 집이 있는 20층으로 이동하던 중, 함께 탄 여자에게 양해를 구했었다. 1층 우편함에 도착해 있을 우편물을 잠시 꺼내 가겠다고, 엷게 웃음 띤 그녀의 얼굴을 뒤로한 채 우편함에서 막 책을 꺼내 든 찰나였다. 엘레베이터는 냉정하게도 위를 향해 ‘고고싱’해 버린 게다. 멍하니 서서 한 층씩 올라가는 불 밝혀진 숫자를 쳐다본다.
딱히 모나게 보이지 않던 그 여자, 17층에 사나 보다. 동일한 주거지에서 같은 형태의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는 똑같은 사각 모양의 방. 아랫집 천장을 딛고 옆집과는 벽 하나를 사이에 두었다. 문패 대신 호수가 붙은 집이며 서로 언제 이사를 들고 났는지도 모르는 터수이다. 수직으로 오르내리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몇 초간씩 얼굴을 익히는, 조금은 데면데면하고 초면이기도 한 관계가 아파트 도시의 이웃이라 할까.
확 달라져 버린 생활 패턴만큼 사람들의 성격이 급해졌다. 전화 한 통이면 문 앞까지 먹거리가 배달되는 마당 아닌가. 필수품으로 가진 스마트폰에선 까딱까딱 손가락 운동만 하면 광대한 사이버 세상이 금방 로그인된다. 드론이 택배 노동을 대신하고, AI의사가 의료 빅 데이터를 통해 진료와 진단을 해 줄 거라는 예상은 너와 나의 현실이 되어 간다. 세상이 급변하면서 계절마저 조급해졌는지 뚜렷하던 사철도 이즈음엔 오락가락 엇박자를 친다, 봄이 피었다며, 단풍 들었다며, 첫눈 온다며, 펜으로 눌러 쓴 엽서를 추체국에서 부치던 시절은 기억에서조차 가물가물한 추억이 되었다..
“겉으론 차분해 보이는데 성격이 급한 편이네요.”
오래전 어느 내과 의사에게서 들은 말이 생각난다. 초조하게 기다린 환자에게 진단 결과와 별명부터 명쾌히 말해 주지 않던 그 의사보다 훨씬 젊었던 나는 ‘무슨 말씀을, 당신이 느리시면서….’라는 속말을 목젖에서 꿀꺽 삼켰었다. 그땐 몰랐으나 수긍이 간다. 성격이 급하면 대체로 걸음새나 말씨도 빠른 속도를 탄다. 화법도 우회로나 은유 같은 방법을 빌리지 않고 직설적인 편을 택한다. 노(老)의사 선생님이 그걸 간파하지 못했을 리 없다.
그럼 문명의 쾌거로 절약된 시간에 사람들은 무엇을 하였지. 뭐든 가능성의 시간이 될 줄 알았던 그것들이 나를, 때어 놓고, 대체 다 어디로 갔지 조금 더 서로를 사랑하고 가족과 화목하며, 더 따뜻이 이웃과 교류하고 조금 더 너볏해 졌는가, 시간 속을 건너는 하루하루를 짚어 봐도 왠지 모를 불안과 걱정을 안고 있다. 공중에 떠 있는 집을 기계로 오르내리며 일상과 추상의 숫자 놀음에서 놓여지지 못한다. 숫자는 갈등과 분란과 좌절을 낳기도 하는 터. 이래저래 삶은 아슬아슬하고 인생길이 던지는 시련과 시험은 늘 예측 불허다.
삶 앞에 나는 자주 초조하고 허기졌었다. 집집마다 삼시 세끼도 어려웠던 시절, 식구들의 먹거리와 사철 입을 거리 마련에 부모님은 늘 허리띠를 졸라매어야 했다. 받아 든 삶이 막막할수록 스스로를 닦달하고 다그칠 수밖에 없었다. 어딘가를 향해 애를 태우며 마냥 동동거렸다. 팍팍한 현실을 박차고 훌쩍 도약하고 싶어서, 갖고 싶고 되고 싶고 하고 싶고 가고 싶어서…. 까닭이야 우리 집 가난에게 덮어씌우며 제 나름의 비상을 꿈꾸었는지 모른다. 인간은 욕망하는 존재다. 지나치게 탐하여 염치조차 뭉개어 버린 욕심은 자칫 파멸로 몰아가고 영혼까지 황폐화하는 독이 되지만, 어쨌거나 욕망은 살아있는 사람의 것. 우리를 살게 하는 동력이다. 한사코 욕망할 수밖에 없는 것이 삶 자체이리라.
유년의 봄날 이후 숱한 계절을 내가 나에게 쫓기며 달려온 것 같다. 아니, 그랬다. 오늘은 어제의 열매이며 결실일지언정 삶을 좌지우지하는 무언가의 너머에는 어김없이 ‘나이 듦’의 이정표가 있다. 무게, 책임, 두려움이 포함된 것, 연륜은 지식처럼 베껴 먹거나 우려먹을 수도 없는, 반드시 밥그릇을 비워 내야만 온몸에 박히는 눈물겨운 것이다. 팽팽하던 시간을 통과하고 나니 어스름이 감돈다. 점점 고요해진다.
생의 고단함을 발아래로 내려놓는 시점, 빡빡하던 마음의 행간도 조금쯤 푼더분해지는가, 괜스레 눈시울이 더워 온다. 저 멀리 서산머리를 환상적으로 물들이며 다함 없이 피고 지는 노을의 삶에 대한 예의가 읽히기도 한다. 사람의 노경 또한 자신이 만들어 낸 애틋한 예술일 거라며 밑줄 하나 긋는다.
살아 보니 늙는다는 것은 기막히게 슬픈 일도, 그렇다고 호들갑 떨 만큼 아름다운 일도 아니라고 했던 사람은 수필가이자 영문학자로 살다 간 장영희 교수다. 초 스피드로 질주하는 세상에서 아무도 해결해 주지 못할 고독과 외로움을 건너뛸 노하우는 생기지 않았어도, 수 없는 반복이 가져다준 익숙함이 있다. 웬만큼은 스며들거나 흘려보낼 줄 안다. 이런 익숙함이 싫다가도 더러는 싫지 않다. 날마다 해가 떠오르는 것도 하루를 간절히 살라는 의미일지니 상실보다는 선의와 진심만 기억하기. 어떤 것에 쉽게 연연하지 않고 제 깜냥대로 삶에 열중하며 성숙해지기, 여태 그랬듯 내일을 의심하면서 또 믿으면서,
곧 들녘의 쓸쓸한 바람이 덮쳐 오고 이어 허허한 겨울이 문턱을 넘고 들이닥칠 테다. 한철 당당하던 기세와 번잡을 떠나보낼 즈음, 내면을 다잡는 겨울나무인 양 빈 가지로도 기품 있게 적요에 든다면 감히 꿈꿔 본 만경 이겠거늘. 때때로 사람은 생각이 많아서 불안할까. 불안해서 생각이 많을까.
“버튼을 잘못 눌러 올라가. 버렸는데 오해 하실까봐 다시 내려왔어요.”
문이 열린 엘리베이터 안에 17층의 그녀가 웃고 서 있다. 하아! 문명의 이기 앞에서 단순한 버튼 조작에도 미숙한 바로 우리 세대셨구나. 얼떨결에 혼자 올라가는 동안 잠시 잠깐 갈등도 했을 법한 구세대, 순간, 뜻밖의 친근감에 나는 화들짝 신통찮은 사유 속을 빠져나온다. 이리 가뿐할 수가….
마주한 그녀의 얼굴에 번지는 노을빛이 곱다.
첫댓글 아름다운 글 잘 읽었습니다. 이제 두 발을 묶어두던 겨울도 힘을 잃어가고 있군요. 새봄이 오면 이처럼 아름다운 작품 많이 풀어내시길 기대합니다. 선생님의 글을 읽으면 늘 마음이 푸근해 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