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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할렐루야 오늘도 거룩한 주의 날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저와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에 은혜의 단비가 내려 날마다 성령 충만하고 주님의 말씀에 인도에 따라 승리하며 살아가는 우리 복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 앞뒤 좌우 계신 분들과 사랑의 고백, 축복의 인사 나눕니다.
주님 안에서 사랑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 한 번만 더 인사하시죠.
여기가 하나님 나라입니다.
주님과 함께 동행하심으로 믿는 삶의 현장이 하나님의 나라가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해 봅니다. 여러분 배우다는 이 말을 들을 때 여러분들의 머릿속에서는 어떤 장면이 떠오릅니까? 어떤 분은 교단에서 선생님이 가르치고 책상에 앉아서 수업을 받는 그러한 장면이 떠오를 수도 있을 것이고, 또 어떤 분은 어떤 운동 선수가 새로운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 그것을 잘 습득하고 연마하는 모습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 어떤 분은 유튜브를 보면서 오늘은 어떤 음식을 배워서 먹을 것인가 하면서 요즘은 유튜브를 통해서도 보고 한다잖아요. 그래서 열심히 그 음식을 배워서 만들어 먹는 그러한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평생 배우면서 살아간다는 것이죠. 어떤 관계 속에서도 이 배움이 끊이지 않는다는 것이죠.
자녀와 부모의 관계를 한번 생각해 보실까요?
아이들은 부모를 통해서 걷는 것을 배우고 말하는 법을 배웁니다. 그러면 아이들만 배우는 것일까요? 아니죠. 이 아이들을 통해서 부모는 그동안 아이를 양육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는데 그 방법을 배우기 시작하는 거 아 자녀 양육이라는 것은 이렇게 하는 것이구나라는 것을 배워가는 것이죠.
성공과 실패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는 성공을 통해서 아 이렇게 하니 성공하게 되었구나라고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때로는 실패를 통해서 실패하지 않는 법 아 이렇게 해야 성공할 수 있겠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다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즉 실패를 통해 배우는 것이 인생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된다는 것이죠.
사실 우리가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나의 삶의 형편들을 면밀히 살펴다보면 모든 순간이 삶의 지혜를 배우는 시간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배움에는 반드시 유익이라는 것이 따라온다는 것이죠.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어떤 유익이 있습니까?
배움이라는 것은 적어도 우리의 삶을 성장시킵니다. 그렇죠 저도 어려서 자전거를 배웠어요. 처음에는 자전거 타는 게 너무나 쉽지가 않았어요.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지기도 하고 무릎팍이 깨지기도 하고 눌러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찾아온 것이 무엇입니까?
두려움 야 이거 잘못 넘어지면 크게 다치겠네. 그래서 타야 되나 말아야 되나 고민도 해봅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포기하면 탈 수가 없겠죠. 어느 순간 자전거를 네 발 자전거에서 세 발로 세 발에서 두 발로 바뀌는 그러한 나의 모습.
그리고 그 이후의 삶은 어떻습니까?
이제는 바람을 가르면서 전진해 나가는 나의 모습을 봅니다. 그러다가 조금 익숙해졌다고 한 발을 들고 타보기도 하고 그렇죠 두 손 놓고 타보기도 하고 묘기를 부린다고 젊을 때 그러한 것들을 해봤던 기억이 있어요. 그래서 교만하다가 한번 불러보기도 했죠. 두 손 놓고 타다가 또 불러봅니다. 아 그래서 또 배우는 거예요. 야 이거 위험한 것이구나 이렇게 우리는 성장하는 유익이 있다라는 것이죠.
또한 배움을 통해서 우리는요 자유를 얻습니다. 아는 것이 힘이다 그런 말이 있잖아요. 잘 알지 못할 때는 마치 어두운 방에 갇혀 있는 것과 같은 삶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두려워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가장 가깝게 사용하고 있는 핸드폰만 봐도 그렇지 않아요 이 핸드폰 안에 얼마나 많은 기능이 있는지 잘 모르시죠? 왜요? 내가 하는 것만 하기 때문에 하는 게 별로 없어요.
그런데 사실 그 핸드폰 안에는 정말 수백 개의 기능이 담겨져 있다는 것이죠. 사실 우리 어른들 같은 경우는 두려워서 못 누르잖아요. 뭐 잘못될까 봐 이거 눌렀다가 잘못되는 것 아니야라는 그 생각 때문에 아무거나 누르지 않습니다. 하던 것만 전화 걸고 받고 유튜브 좀 보고 그렇죠 카톡 좀 보내고 그런데 사실 배우고 나면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러한 것들이 우리 주변에는 굉장히 많다라는 것이죠.
그리고 알게 되었을 때는 어떻습니까?
자유를 얻습니다. 더 이상 그거에 대해서 염려하지 않아요. 지금 전화기를 들고 전화하는데 어떻게 해야 되지 고민하는 사람 단 사람도 없잖아요. 우리 어른들도 이제는 유튜브 보는 것쯤은 누구도 뒤지지 않게 할 수 있는 자신감이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어둠 속에 밝은 빛이 들어온 것과 같은 그러한 자유함을 얻게 되는 거죠.
그래서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진리가 우리에게 찾아왔을 때 주는 자유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배움이라는 것은 우리의 무지와 두려움을 자유롭게 하는 큰 능력이 있다는 겁니다.
또 생각해 보세요. 오늘의 핵심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배움이라는 것은 쉼을 준다. 따라 합시다.
배움은 쉼을 준다.
예수님께서 내게 배우라 말씀하시면서 주심을 주겠다 말씀하는 것이죠. 여러분 여기에서 말하는 배움이라는 것은 예수님을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죠. 예수 그분을 배우는 겁니다. 즉 예수를 닮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를 배우는 것이고, 그 예수를 닮아갈 때에 비로써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누렸던 참심을 우리도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는 은총이 임한다는 것이죠. 오늘 이 시간을 통해 저와 여러분들이 예수를 배워 참 쉼과 진정한 회복이 임하는 큰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예수님께서 그러면 무엇을 배우라고 하셨는가라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 보니까 두 가지 단어를 사용하고 있죠. 따라합니다.
온유 겸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배우라 요청하신 것 중에 이 두 단어 온유와 겸손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요청했다는 것이죠. 오늘은 시간상 모두 할 수 없어 온유라는 것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온유를 생각해 보면 먼저 민수기 12장 3절의 말씀이 떠오를 수 있어요.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으로 모세라는 인물을 평가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 모세가 얼마나 온유했길래 지면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라고 성경은 표현해 주었을까요?
모세의 삶을 한번 우리가 들여다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사명을 받고 나서 능력을 힘입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켰어요. 그리고 그들을 이끌고 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요. 출애굽을 통해서 감사와 감격과 기쁨으로 출애굽의 여정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그런데 이 감사와 감격과 기쁨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광야에서 이 백성들이 불평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합니다. 먼저 수루 광야에 이르렀을 때 사흘 길을 마실 것이 없어서 걸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물이 있어 그곳에서 물을 마셨는데 도저히 써서 마실 수가 없었던 거예요. 그래서 이 마라라는 곳에서 이 마시는 물이 씀으로 인해서 지도자였던 모세를 향해서 원망하게 됩니다. 마실 물이 없어 우리가 죽겠다고 하며 모세를 원망합니다.
그때 그 모세는 그 원망을 듣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거, 그리고 말씀에 따라서 나뭇가지를 하나 들어서 쓴물을 단물로 변케 하는 놀라운 기적과 같은 일을 행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방법으로 모세는 이들의 불평 불만에 자기 감정을 소모하지 않고 하나님의 방법을 찾았던 것이죠.
또 그들은 지나갑니다. 신광야에 이르렀을 때 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또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애굽에서는 고기를 먹었는데 이곳에서는 고기 한 점 먹을 수가 없고 굶어 죽게 생겼다며 원망하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모세는 이번에도 감정적 대응을 하지 않습니다. 이전과 동일하게 하나님 앞에 기도로 나아갑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엇을 주셨어요?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시며 그들의 불, 불평 불만을 해소시켜주었다는 것이죠. 이처럼 모세는 자신의 능력으로 그들을 이끌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의지하며 인내하면서 백성들을 이끌었다. 그 마음 가운데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온유함이 있었다는 것이죠. 그 그 온유함은요. 여러분 가까운 사람들에게서 동일하게 나타났다는 거예요.
여러분 사실 그렇잖아요. 우리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을 때 누구한테 상처받을 때가 가장 아픕니까? 가장 가까운 사람, 가장 가까운 사람이 나를 상처 줄 때 가장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보내게 되죠.
모세의 삶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어느 날 그의 형 아론과 누이 미리암은요. 모세를 향해서 비방하기 시작합니다. 여호와께서 모세 너에게만 말씀하시느냐 우리에게도 말씀하지 않느냐라면서 모세를 비방하게 됩니다.
그때 모세는 침묵합니다. 그 말 대응하지 않아 그때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미리암을 치시는데 문둥병이 되게 하셨다는 거예요. 모세가 그 현상을 보고 깜짝 놀라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죠. 하나님 제발 위대함을 고쳐주십시오.
이처럼 모세는 가족들의 비방을 통하여서 실제적으로 마음이 상할 법도 했었지만 그것으로 인해서 마음 상하는 것, 그것에 마음 두지 않고 미리암을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감정에 치우치지 않는 모습을 볼 수 있죠.
가족에 이어 이번에는 레위 증손이라고 하는 고라라는 사람과 무리가 모여서 반역을 일으키게 됩니다. 모세를 향해서 말하죠. 너 혼자만 거룩하니 우리도 하나님께 똑같이 택함 받은 백성이라고 하면서 모세의 지도력에 항거하게 된 것입니다. 모세는 이번에도 그들과 다투지 않습니다. 내일 하나님께서 누가 택하셨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판단하실 것입니다는 고백으로 그 상황을 종료시키죠.
이 일로 인해서 결국 어떻게 됩니까?
보라와 그 무리들은요. 땅이 갈라져 그곳에 삼킴 받으로 죽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어요. 그때 모세는요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하나님 저들로 인해서 이 백성들이 다 멸망당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고라와 함께했던 무리들의 잘못으로 인해서 백성들이 상함을 받을까 봐 백성들을 위해서 기도했던 모세의 모습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죠.
또한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요. 가데스바네에 도착했습니다. 이제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코앞입니다.
그런데 그때 이들이 하나님을 시험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진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제 막 급하게 임하게 될 다급한 상황에 그때 모세는 다시 한 번 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 백성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만약 그렇지 아니하시면 제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이 백성들 용서해 주셔야 됩니다.
자기의 생명을 걸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던 모세의 모습. 이렇게 여러분 모세의 이야기는 자신이 자신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구하고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아가는 누구나 있었다는 것이죠.
그런데 여러분 이 모세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누가 연상됩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연상이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모세의 온유함은 예수님을 예표한다는 거예요. 예수님의 모습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도 이 땅에 오셔서 수많은 비방을 받으셔야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요. 그 비방 가운데 어떻게 하셨어요?
침묵하셨다고 말씀합니다. 구약 성경 가운데서는 그렇게 표현하지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하는 어린 양처럼 침묵하셨다.
사실 비방할 때 누구나 대항할 수 있고 자기의 말을 할 수 있는 그러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침묵하셨다는 거예요.
또한 고난 가운데 어떻게 하셨습니까?
백성들을 위해서 저와 여러분들을 위해서 중보 기도하셨다는 거예요. 그래서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는 중에서도 무엇이라고 이야기합니까?
아버지요. 저들이 아는 것을 저들이 알지 못합니다. 저들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그렇게 기도했던 것입니다. 이렇듯 모세의 온유함 그리고 우리 예수님의 온유함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라는 것과 더불어서 사랑을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합쳐진 그러한 아름다운 온유함이었다라는 거예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이 땅 가운데 살면서 억울한 일을 당할 때가 있죠. 오해가 생기든지 어떤 문제가 생겨서 내가 듣지 않아도 될 이야기를 들을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가장 가까운 사람에 의해서 상처받을 때도 있습니다. 의도치 않았지만 의도해서 말한 것은 아닌데 나에게는 빛으로 꽂히는 이야기들이 있다는 것이죠.
그러할 때 저와 여러분들이 이 예수님의 말씀 이 온유를 배워서 모세처럼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고 예수님처럼 사랑으로 응대할 수 있는 이러한 온유한 삶이 우리의 삶 가운데 나타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모세의 이야기에서 이 온유함이 끝났을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우리의 삶의 영역 속에서도 저와 여러분들을 통한 새로운 온유함의 이야기들이 이 땅 가운데 펼쳐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그러기 위해서 이 온유라는 단어를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온유라는 이 단어를 한자로 보니까 따뜻할 온 부드러울 유 합쳐지면 무엇입니까?
따뜻하고 부드러운 마음이라고 우리는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온유한 사람들은 누구를 대하든지 모세와 예수님처럼 굉장히 부드럽고 포용력 있는 태도로 접근하게 된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 온유라는 단어를 헬라어로 보니까 여러분 단순히 부드러운 마음이 아니라는 거예요. 프라우테스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에는 힘과 권위를 갖고도 절제하고 통제하는 힘을 표현해 힘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능력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힘과 능력이 존재하지만 그것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바로 이 단어 가운데 들어가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당시 헬라 문화권에서는 이 단어를 길들여진 말에 표현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이냐 하면 여러분 말 하면 굉장히 빠르죠. 힘도 셉니다. 그 강하고 힘센 말이지만 그 말이 사람의 손에 길들여지면 어떻게 됩니까? 말 자체적으로 움직이지 않고 사람의 손에 의해서 움직여지게 된다는 것이죠.
이는 예수님께서 보여준 온유함도 동일했다는 거예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 본체 그분 자체이시죠. 또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서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였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자기의 힘을 스스로 절제하는 삶을 사셨다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이 단순한 온유 이 성품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에 따라서 내적 평안과 절제의 능력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온유의 삶이라는 그래서 온유는 자신의 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남용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용하는 절제된 힘을 가지고 온유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요. 자신의 권리나 자존심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 앞에 자신을 낮추고 겸손하게 나아가는 모습이죠.
이 표현이 맞을지 모르겠지만 제가 가만히 생각해 보면서 야 오후라는 것을 어떻게 정리하면 좋을까라고 해서 이렇게 결론을 내봤습니다.
세상에서는 갑으로 살 수 있지만 하나님의 을로 사는 인생 내가 세상에서 갑질을 할 수 있을 만큼의 능력이 있는 자이지만 그러나 갑질하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을이 되어서 말씀에 순종해서 이 세상을 다스리는 사람 그것이 바로 온유한 사람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온유는요. 분쟁과 갈등 해결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온유한 마음으로 대할 때 상대방의 마음을 열게 하시오. 화해를 이끌어 납니다. 그래서 화해의 매개체가 될 수가 있다는 것이죠.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요. 온유함으로 살아갈 때 굉장히 손해 본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야 내가 오묘하게 살아서 이거 세상에서 경쟁력이 떨어지고 지는 것 아니야 손해 보는 것 아니야
라는 마음을 갖는다는 것이지 그러나 여러분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온유한 자가 누리는 축복이 있다는 거예요. 저와 여러분들이 온유한 자로 살아 이 축복을 누리기를 소망하는데 첫 번째는요. 마태복음 5장에 보니까 우리 예수님께서 팔복을 말씀하시면서 온유한 자에게 이런 복이 있다 말씀하셨죠? 우리 같이 읽어보실까요? 마태복음 5장 5절 말씀 시작.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며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다. 땅이라는 것은 물리적 토지가 아니죠.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를 말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한 땅은 가나안 땅이었다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에게 약속한 땅,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축복의 땅이 되는 것이죠. 온유한 자는 하나님의 약속된 유업을 받게 된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이 세상에서 갖고 싶은 거 다 가졌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지 못한다면 어쩌면 그 사람이 가장 불쌍한 사람 아니겠어요. 이 세상에서는 가진 것 별로 없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고 있는 자가 진정한 복된 사람이라는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이 온유한 자가 되어서 하나님께서 예비하시고 허락하신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내 땅이 얼마나 있는지, 내 집은 몇 평이나 되는지 한번 생각해 보신 적 있어요. 이 땅에서는 내가 몇 평을 살아야 되나 어떤 땅을 가져야 되나 뭐 이렇게 고민하면서 부동산도 보고 아파트도 살펴보고 하지만 어떠세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한번 그런 고민해 보신 적 있으십니까?
바라고 소망하는 것은 내가 믿음으로 살다가 하나님의 나라에 갔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처소를 예비하겠다고 말씀하셨는데 내 처소는 방 한 칸짜리인지 아니면 수십 평, 수백 평짜린지 한번 고민해 보시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께서 나의 처소를 확장시키는 놀라운 은총의 삶이 저와 여러분 가운데 있기를 간절히 소망해 봅니다.
두 번째는요. 풍성한 평화 이 평화를 통해서 즐거움을 얻게 하시겠다. 여러분 땅만 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편 기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시편 37편 11절을 함께 읽어봅니다.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그렇습니다. 땅도 차지하지만 땅을 차지했음에도 불구하고 화평이 없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입니까?
하나님께서 화평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겠다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화평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뭐 하러 오셨어요? 화평케 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죠. 그래서 믿는 자들로 하여금 누구와 화평케 하신 거예요? 하나님과 화평케 하신 거죠. 예수님이 없으셨다면 하나님과 화평할 수 없는 존재인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자가 되었어요. 그래서 로마서 5장 1절은 말씀합니다. 우리 로마서 5장 1절 말씀을 함께 읽어봅니다. 시작.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그 믿음을 가진 자들이 하나님과 화평이다.
이 놀라운 은총이 우리에게 임한 것이죠. 또한 여러분 그 화평을 누리는 자가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한다고 5장 11절은 또 말씀합니다. 우리 11절 말씀도 읽어보십니다.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화평을 누릴 뿐만 아니라 즐거워하는 사람 뿐만 아니죠. 하나님께서는 화평한 자들에게 화평케 하는 직분을 주셨다고 성경은 가르쳐줍니다. 고린도후서 5장 18절입니다. 함께 읽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온유함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고 그리고 그 안에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뿐만 아니라 그 화평 안에서 즐거워하는 것이죠. 더 나아가 저와 여러분들이 화평의 직분을 얻어서 이 땅 가운데 화목케 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허락하신 축복입니다.
그러니 저와 여러분들의 삶의 현장이 나로 인해서 어떻게 해야 돼요?
화평해지고 화목해져야 된다. 이것이 온유한 자의 삶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온유한 자는 어떠한 복을 누리는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가르침의 복을 누린다.
시편 25편 9절을 말씀합니다. 우리 같이 읽어보실까요?
온유한 자를 정의로 지도하시며 온유한 자에게 그의 도를 가르치시리로다.
여러분 온유한 자는 자신의 뜻보다 누구의 뜻을 따릅니까? 하나님의 뜻을 따르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지도를 받는 거예요. 하나님의 가르침에 겸손하게 귀를 엿듣게 되는 것이죠.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시고 옳은 삶의 길을 가르치는 그 은총이 있어 우리의 삶 가운데 진리 안에서 거하고 살아가는 믿음의 권속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온유를 배워서 사는 것 이것이 우리가 예수님의 멍예를 대고 걸어가는 복된 인생입니다.
여러분 결론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 14절은 말씀합니다. 읽어보실까요?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내게 누구에게 배운 것을 알고 배우고 확실한 일에 가 성경은 배우라고 이야기, 예수 믿었으니까 끝이라고 말하지 않고요. 배워야 됩니다. 지속적으로 배우고 확신하는 일에 거해야 된다고 성경은 가르쳐줍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라면 배움과 훈련을 멈춰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배움과 훈련이라는 것은 자기 자신을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경비케 하는 유익이 있고요. 또한 다른 사람을 그리스도인으로 세우는 축복의 통로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참 아이러니한 것은요. 사실 이런 배움과 훈련을 위해서는 실제 우리에게 어떤 형편이 필요합니까?
온유함이 있어야 그래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 생겨 또한 무엇을 또 배워야 됩니까?
온유함 가운데 하나님 우리 주님의 온유함을 배우는 자들이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이번 수요일부터 사순절이 시작이 됩니다. 사순절은 주일을 제외한 40일을 계산해서 우리가 예수님의 고난과 아픔을 묵상하고 그분을 배우고 훈련하는 기간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시죠. 강단에서 목회자가 40일 우리 훈련할 것 이고 배울 것이니까 여러분 40일 동안 기도에 힘쓰십시오. 40일 동안 말씀을 펼쳐서 읽으십시오. 묵상하고 나가십시오라고 해서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따르는 거예요.
내가 이 사순절을 보냈는데 어떻게 보내는 것이 옳은 것인가 내가 그리스도인으로 부름 받아서 이 40일을 어떻게 보내야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인가 스스로 분별해 보고 기도해 보고 그리하여서 내가 이 40일을 정말 주님과 함께 동행하겠노라고 결정하고 나아가는 삶, 어떤 것이 더 훌륭한 말씀이시겠습니까?
바라고 소망하는 것은 이 40일 성경 읽기를 통하여서 또한 뷰티 생활을 통해서 기도 생활을 통해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잃어버렸던 신앙심을 회복시키시고 잃어버렸던 열정들이 회복되어지시고 하나님과 더 화목해지셔서 하나님 뜻 앞에 온유한 자로 이 땅을 살아가 저와 여러분들의 삶의 모습을 통해 누군가가 주님께로 돌아오는 축복의 통로의 자리로 나아가는 큰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