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장산 심원사를 찾아서...... 10 : 47 : 36
청화산 원적사를 찾아서..... 12 : 35 :36
원적사 서암대종사 부도탑을 참배하고..... 12 : 49 : 30
松崗의 수고로 도장산 심원사 주차장에 도착.... 09 : 12 : 28
심원사로 출발.... 전광판에 산불조심 경고가 흐른다...
검은 수직 암벽 아래로 길을 가는데 건너편에 암벽이 막혀 보인다..
앞을 막는 바위산 위에 소나무 분재가 자라고 있다...
가파른 돌길을 숨차게 오르다가 도장산 등산로 안내판에서 휴식... 09 : 53 : 55
올라 온 길을 보니 그늘진 매우 가파른 길이다...
휴식을 마치고 오르는 길가 바위에 정성을 모은 돌탑이 쌓여있다... 10 : 03 : 09
일주문 가까이 이정표 옆에 안내문.....
천년 고찰 심원사의 도장산 만년 숲을 지켜주세요.
버리는 순간 숲을 헤치는 쓰레기가 됩니다.
산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져온 것은 도로 담아가는(특히 담배꽁초!)
아름다운 마음의 멋진 산인이 되시기를..
오늘도 맑고 평화로운 도장산에서
행복하시기를 발원합니다.
* 도장산은 사유지입니다. 허락 없이 약초, 버섯 캐가지 마세요.
심원사의 지킴이 황구黃狗가 일주문 안에서 짖으며 꼬리를 흔든다....
그리고 차례로 방문객의 신발에 코를댄다... 떡, 빵을 주어도 먹지 않았다.. 10 : 15 : 27
개울 건너 들어선 심원사의 전경...
황구黃狗는 대웅전을 멋진 자세로 지키고 있다......
주지스님이 말씀에 따라 黃狗가 마루 위 자리에 앉았다...
스님의 배려로 얼음을 넣은 미서가루 차를 맛있게 먹었다....
신문지 위의 그릇에 산새들의 먹이를 놓아 두었다... 10 : 33 : 54
매우 단촐한 심원사 일주문에서...
오를 때 힘들었던 기억은 잊혀지고, 내리막 길은 매우 편안했다...
지옥의 첫 관문인 너북등을 바라보니 信心이 생긴다... 11 : 17 : 26
회장과 松崗이 쌍용계곡을 배경으로... 11 : 19 : 18
쌍룡폭포의 웅장한 전경...
주차장에 도착... 걸음수가 적어서 가까운 원적사로 다시 출발....
원적사 중턱의 주차장에 도착 후 .... 도보로 출발.... 11 : 58 : 55
오르는 포장길의 경사로 종아리가 당긴다...
포장길에 생긴 흰색 부분은 하산시는 브레이커를 계속 사용한 흔적.....
브레이크등을 켠 채로 천천히 내려가는 자동차....
앞을 가로 막는 엄청난 석축이 웅장하다.... 좌측 포장길은 차량으로 오르는길...
우측의 계단은 걸어서 오르는 길...
걸어서 오르는 높은 계단 앞에 안내판이 있다...
원효가 다녀간, 그 길 위에 서다
원효대사(617~686)
원효(元曉)대사는 신라시대의 고승으로, 속성은 설씨, 법명은 원효, 법호는 화정(和靜), 초명은 서당(誓幢)이다. 신라 진평왕39년 압량군 불지촌(현재 경북 경산시)에서 태어났다. 설총의 아버지다. 젊은 시절 의상과 함께 당나라에 가서 수학하고자 요동까지 갔지만, 고구려 군에게 첩자로 몰려 갇혀 있다가 겨우 풀려나 신라로 되돌아왔다. 십년 후 두 번째로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가기 위해 백제국 항구로 가던 도증 하루 밤을 지내게 된 토굴에서 갈증이 나 토굴 송에 고여 있는 물을 머셨는데 물맛이 매우 달고 시원하였다. 그러나 아침에 깨어보니 토굴이 아니고 오래된 공동 묘지였고 물을 마셨던 그릇은 바로 해골이었다. 이를 계기로 대오(大悟:번뇌에서 벗어나 진리를 크게 깨달음)한 원효대사는 발길을 되돌려 신라로 되돌아왔다. 신라로 돌아 온 원효대사는 미친 사람이나 거지행세를 하면서 거리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민중 포교에 들어갔다. 이후 요석공주와 인연을 맺어 설총(薛聰)을 낳았고 그 후 파계(破戒:계율을 어기고 지키지 않음)한 후 속복(俗服)을 갈아입고 스스로 소성거사(小性居士)라 허면서 천촌만락을 돌아다니면서 노래하고 춤추며 교화하였다. 이로 인하여 가난한 사람, 어린아이까지도 모두 부처님의 이름을 알고 염불을 할 수 있게 하였다. 교화한 사상으로는 인간의 본래의 본성인 일심(一心)으로 돌아가자는 일심사상(一心思想), 모두가 실제의 모습으로 돌아가면 하나로 만난다는 화쟁사상(和諍思想), 모든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무애사상(無碍思想)이 대표적이다. 말년에는 왕궁에서 <금강삼매경(金剛三昧境)>을 강의하였고,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을 찬술하였다. 분황사(芬皇寺)에서 화엄경<화엄경(華嚴經)>, <사십회향품소(四十廻向品疎)>를 지었다. 신라 신문왕 6년 70세의 나이로 혈사(穴寺)에 입적하였다. 입적 후 아들 설총이 원효대사의 유해로 소상(塑像:찰흙으로 만든 인물의 형상)을 조성하여 분황사에 봉안하였다. 원효대사의 대표적인 이야기로 무덤 속 대오설화(해골물 설화), 척반구중설화, 화엄신장웅호설화 등이 있다.
원적사
문경시 농암면 내서리 청화산에 위치한 원적사는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창건한 사찰로 전해진다. 다만 그간의 내력은 잘 알 수 없으나, 도량은 현존 법당을 중심으로 동서에 2동의 요사가 길게 뻗어 있으며, 모든 건물은 정비가 되어 있는 편이다. 대웅전은 정면 5컨 측면 3칸의 팔작지붕으로 총 33평이다. 동쪽에 위치한 요사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맛배지붕이며, 총 22평이다. 이와 대칭되는 서쪽에도 역시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맛배지붕, 총 20평의 요사가 위치해있다. 법당 내부의 존상은 석가여래좌상(82×52cm)과 후불탱(149×67cm) 및 석교선사영탱(101×67cm)을 비롯하여 소종(82×51cm)을 봉안하고 있다. 그 외 조선시대의 부도(92×51cm) 1기가 있으며 2003년 입적한 이 시대의 선승 서암스님의 부두와 부도비가 봉암사 외에 이곳에도 세워져 있다.
원효스님 창건 이래, 이름을 남기지 않은 수많은 수행자들의 향기로운 자취가 깃들어 왔고, 지금도 뜻 높은 수행자들과 신심있는 불자들의 발길이 이어지며 고요하고 청정한 산사의 면모를 지켜나가고 있다.
스님의 안내로 법당의 원효대사, 석교선사, 서암스님 영정을 참배하였다... 12 : 28 : 29
학바위 아래 원적사 마당에서....
절 마당에서 내려 본 원적사의 높은 돌 축대...
원적사 돌축대인 울타리에서 ....
서암스님 부도탑 가는길에 우뚝한 소나무는 스님의 기상처럼 보인다..
西岩堂 鴻根之塔 참배.... 12 : 44 : 05
청화산에 김이 스려 올라 가고, 학바위 우측 계곡으로 물길이 내려와 도랑을 파고 보수 중...
마당 끝에서 원적사를 배경으로...
지난날 청화산을 오르던 등산로가 학바위 우측으로 보인다...
마당에서 우측으로 내려가는 급경사의 차량 도로.....
원적사 차량저지선에 적힌 방일하지 마세요 ......
※ 방일( 放逸 : 멋대로 거리낌 없이 놂 ) 13 : 12 : 13
첫댓글 종일 흐린 날씨로 산행에는 도움이 되었고, 심원사 오르는 길이 평소 단련이 안되어 다리 근육이 당겼다, 반갑게 맞이하는黃狗는 심원사의 지킴이로 몫을 다하고, 스님의 정성이 담긴 얼음을 띄운 미서가루차는 시원하고 고마웠다. 제초작업도 조금하고, 회장님이 넘어진 나일락나무를 지주를 세워 묶어주는 답례를 하였다. 걸음수가 부족하여(6000보), 원적사를 찾은 선택은 보람있는 일로 중간 주차장에서 걸어서 오르는 경사길은 금방 지쳐서 쉬엄쉬엄 올라 법당의 원효대사, 석교선사, 서암대종사 영정을 참배하고, 西岩堂 鴻根之塔(부도)을 참배하며 경내를 천천히 걸으며 원적선원의 기운을 받고 하산하여 걸음도 알맞고(12000보), 늦은 중식은 할매손두부로 즐거운 산행이 되어 고맙습니다.
雙龍溪谷은 深山幽谷에 岩塊사이를 뚫고 泡沫을 이르키는 明鏡止水가 他의 追從을 不許한다.深源溪谷 너북등을 지나면서 서늘한 寒氣를 느끼는 陰散한 氣運을 받는다.잦은 장마에 씻겨나간 山行路는 잠시도 放心을 許諾하지 않는다.불과 1.5km의 距離를 里程標마다 다르게 表記하여 混亂이 苛重된다.主席하고 있는 女僧처럼 잘 정돈된 法堂에 들어서니 黃狗가 警戒한다.人情 많은 스님으로부터 미수가루 차 대접을 받고 울력이랍시고 除草를 돕는다.深源寺 開山祖인 元曉大師 痕跡은 찾을길 없으나 龍湫의 童子僧을 가르친 因緣으로 龍宮에 招待되어 월겸,병증,요령 등을 받아온 傳說은 잊혀져간다.餘裕時間이 充分하여 靑華山 圓寂寺를 찾는다.가파른 오름길을 몇차례 쉼을 거듭하여 境內에 들어서니 意外로 薄待하지 않아 多幸이다.法堂에 들어 西菴 大宗師,元曉,石橋大師께 參拜하고 寮舍채 건너 西菴 大宗師 부도탑 參拜를 하고보니 附近은 管理가 소홀하여 放置된듯 雜草만 茂盛하다.첨 靑華山을 오르던 登山路는 스님들의 嚴格한 統制탓에 草木에 묻혀 痕跡이 없다.靈驗스런 鶴바위를 縱橫으로 둘러보며 刻印시킨다.언제 다시 靑華山을 찾을 날이 있을지,가장 지름길인 駐車場 左側길을 유심히 눈에 담으나 너무 가파른 길이다.
西菴 大宗師는 1917년 安東에서 태어나 어릴 때 이름은 鴻根, 醴泉 서악사에서 出家하였고, 聞慶 金龍寺에서 금오스님으로부터 비구계를 받았다. 해방 후에도 참선과 포교 활동을 계속하였으며, 1972년에는 曦陽山 鳳巖寺에 들어가 정진하였다. 1975년에는 曹溪宗 總務院長이 되어 曹溪宗의 행정을 총괄하였고 1982년에는 鳳巖寺 祖室, 曦陽禪院을 宗立 特別禪院으로 만들었다. 1991년에는 曹溪宗 元老會議 議長, 1993년에는 曹溪宗 宗正이 되었다 그러나 1994년 總務院長 의현 스님의 專橫으로 인해 종단 분규가 발생하였고,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宗正에서 물러난다. 이 후 스님은 曹溪宗을 奪宗하여 홀로 정진하였으며, 2001년에야 鳳巖寺 祖室이 되어 다시 曹溪宗에 복귀하였다.西菴 大宗師는 수행에만 열중한 대표적인 禪僧이다. 그는 한국 불교계의 전통인 문중이나 法脈을 가지지 않은 현대 佛敎界의 큰 스님이었다. 서암은 2003년 3월 입적하면서 열반송을 요구하는 소장 스님들에게 ‘그런 거 없다’, ‘할 말 없다’는 말을 남기고 떠나갔다. 서암 大宗師는 마지막 남긴 말씀대로 ‘그렇게 살다가 간’ 정말 큰 스님이었다. 실제로 一生은 屈曲이 많은 波瀾萬丈한 삶이었다.
圓寂寺 法堂 株連
一念靜坐道場中 勝於恒沙七寶塔
傳佛心燈萬古微 淸華山圓寂禪院
寶塔畢竟碎爲塵 一念便是成正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