戊申二月初 七日 記下 魏鍾善. 옆으로 拜謝라고 쓰여있다.
前書未謝後書繼辱披玩之際益覺不遐之感況審新春靜候起居益膺蔓祉區區慰賀正副勞祝記下向作原行又經享事餘憊難振自悶奈何奈何就夾紙敎意謹悉而雖欲力圖勢無奈何如得參見之便權在主管則垂袖傍觀之外無他道此所謂愛莫助之者也貴宗成奎甫姑未承顔而若有斗護之道豈敢歇后也示中黑石今始初聞敎意如是丁寧第當求得而以幺麽郵力似難如意矣餘適擾不備謝禮戊申二月初七日記下魏鍾善拜謝
해제
1848년 위종선(魏鍾善, 1789~1862)이 심능규(沈能圭, 1790~1862)에게 보낸 간찰이다. 위종선은 자는 치성(稚性), 호는 수류(隨柳), 본관은 장흥(長興)이다. 함흥(咸興) 출신이다. 1838년에 함경도도과(咸鏡道道科)에 급제하여 예조좌랑, 상운찰방(祥雲察訪), 고산찰방(高山察訪) 등을 역임하였다.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이 편지를 작성할 당시에는 강원도 양양의 상운찰방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심능규는 강릉에 거주한 사족이다. 자는 사룡(士龍), 호는 호은(湖隱)ㆍ신천당(信天堂)ㆍ천청당(天聽堂)ㆍ월포(月圃), 본관은 삼척이다. 1859년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저서에 월포기(月圃記), 인경부주(仁經附註)가 있다. 이 간찰은 청탁받은 여러 사안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설명해 주기 위해 보낸 편지이다. 먼저 위종선은 지난번에 원주(原州)에 다녀오고 또 향사(享事)까지 치러서 그 여독을 떨쳐내기 어렵다며 자신의 근황을 전하였다. 본문에서는 먼저 심능규가 협지(夾紙)에서 언급한 내용에 대해 잘 파악하였으나 비록 힘써 도모하고자 해도 어찌할 수 없는 형편이라고 하였다. 참견할 기회를 얻는다고 해도 권한이 주관하는 사람에게 있으니 그저 옆에서 지켜볼 밖에 다른 방도가 없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시경(詩經) 「대아(大雅) 증민(烝民)」에 나오는 “사랑하나 도와줄 수가 없다.[愛莫助之]”는 구절을 인용하기도 하였다. 이어 심성세(沈成歲)는 자신이 아직 만나보지 못하였으나 신경 써서 두호(斗護)해 주겠다고 하였다. 끝으로 심능규가 편지에서 흑석(黑石)에 대해 언급한 것은 자신이 처음 듣는 얘기라고 하면서, 응당 구해 보기는 하겠으나 보잘것없는 일개 찰방의 힘으로는 여의치 않을 것 같다고 하였다. 강릉 창녕조씨 명숙공종가 고문서 중에는 삼척심씨 가문, 특히 심능규 관련 간찰이 다수 포함되어 있는데, 조옥현 가의 외가가 삼척심씨이므로 어느 시기에 다량의 삼척심씨 소장 문서가 조옥현 가로 옮겨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참고자료
· 최호, 수집사료해제집7, 국사편찬위원회,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