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同期인터뷰 5]토론토의 트럭 드라이버 임강식
드넓은 북미대륙, 어디든 달린다. 광야(曠野)도 이런 광야가 없다. 뉴욕도 좋고, 시애틀, 밴쿠버, 오타와도 좋다. 트럭회사의 오더만 있으면, 3000키로도 좋고, 5000키로도 좋다. 보통 60t에 길이가 20m가 넘는 대형 트레일러를 모는 트럭 드라이버. 그의 별명은 ‘헝그리 울프(hungry wolf)’이고, 그의 본명은 ‘임강식’이다. 그가 고국에 돌아왔다. 그것도 23년만에 3주의 일정으로, 못내 그리운 고등학교 친구들과 쌍육절 소풍을 함께 하기 위해서이다. 게다가 출판기념회까지 겸하게 되었으니, 행운이 겹쳤다. 눈치 챘겠지만, 그 유명한 6회 하고도 3학년 1반이었다는데, 이웃한 문과반(2개반)이었는데, 도무지 기억이 없다. 더구나 중학교(전주 남중)도 3년을 같이 다녔다는데. 형편없는 기억력에 내 자신이 한심하고 짜증이 더럭더럭 났다. 쌍육절 소풍은 이미 전국을 넘어 멀리 해외에까지 소문이 난 터이다. 얼마나 보고 싶었던 친구들이었는가. 쌍육절 100여명의 친구와 형수들은 형제처럼 반겨주었다. 여기저기서 이 친구, 저 친구 포옹(허그)하고 악수하기에 바빴다. 이름을 기억하느라 머리를 바삐 굴려야 했다.
한 친구는 원룸을 공짜로 언제까지나 빌려준다고 했다. 한 친구는 맛집으로 데려가 오랜만에 잊고 있었던 ‘전주의 미각(味覺)’을 돋워주기도 했다. 회장단은 그에게 압화(押花)로 만든 ‘우정패(友情牌)’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멀리 벗이 있어 친구가 찾아오니 그 아니 반가울손가(有朋自遠訪來 不亦悅乎)’. 감격스러웠다. 친구들이 눈물겹게 고마웠으리라. 옆지기 아내도 감동했는지 눈물을 글썽거렸다. 아, 이런 것이 사는 것이련만, 나는 타국객지에서 무엇을 하며 살았나, 어찌 이런 회한이 들지 않았으랴. 그는 떠나기 싫을 정도로 좋은 추억을 안고 토론토에 돌아가 생업에 열중하고 있다. ‘귀향’이라는 짤막한 글을 블로그에 남겼다. 우리는 그의 소회가 어떠했는지 그저 짐작을 할 뿐이다.
23년만에 돌아온 서울
나는 투명인간이다.
사람의 물결,
현란한 빌딩,
오가는 차량들,
분명이 나도 여기 어딘가에 있었다.
이제 나는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 투명인간처럼 서있다.
5천만의 사람들이 기억상실증에 걸렸다.
아무도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
전고아판의 시계는 2011년 5월 29일.
내 시계는 1988년 2월 5일.
나 홀로 시간의 멈춤 속에 서 있다.
고향은 그 어느 곳에도 없었다.
추억은 향기조차 남아 있지 않아,
미래로 돌아온 나는 영원한 이방인이 되어
여기에 홀로 서 있다.
23년을 잃어버린 5천만의 인파 속에 나 홀로 깨어 있다.
23년만에 돌아온 서울은
공상 속에 존재하는 타향일 뿐이었다.
사람의 물결을 따라 걷는다.
나 홀로 세월을 거꾸로 걷는다
그는 올림픽의 해인 1988년 2월 돈이라고는 주머니에 2달러, 짐이라고는 일기장 7권만 가지고 토론토로 향했다고 한다. 갓 결혼한 새각시를 고국에 놔둔 채.그들은 6개월만에 외국에서 신방을 꾸몄다. 이민 1세대의 삶은 환상이 아니고 고달픔, 바로 그것이었다고 한다. 비디오가게를 10년 정도 했다던가. 큰 재미도 못보고, 캐나다회사에 취직, 5년 정도 샐러리맨 생활을 했으나 부도가 나는 바람에 졸지에 백수가 되었다. 어떻게든 먹고 살아야 했다. 이민 2세대인 토끼같은 두 딸도 가르쳐야 했다. 그래서 찾은 직업이 트럭 드라이버였다. 일은 힘들고 몸은 고달팠어도 자기가 하는 운전만큼 페이가 두둑하기에 죽자살자 매달렸다. 짧은 출장은 2-3주, 길면 3개월도 걸렸다. 누구 하나 말 붙일 데가 없었다. 한없이 고독했다. 졸음과의 전쟁을 치르며 핸들을 잡고 24시간 내내 광활한 북미대륙을 질주해야 했다. 삶은 전쟁 그 자체였다. 상상해 보시라. 그게 고역이지 어찌 즐거운 일이겠는가. 모국어뿐만 아니라 영어도 잊어버릴 지경이 됐다. 그래서 틈만 나면 노트북을 열고 글을 썼다. 사진을 찍었다. 경치가 좋은 곳만 있으면 트럭을 세우고 한참을 어스렁거리기도 했다. 그의 블로그(http://blog.daum.net/truckerhungrywolf)를 보라. 주옥같은 콩트와 눈이 다 시원해지는 풍경사진들이 즐비하다. 10여편의 콩트는 구성도 탄탄하고 필력도 대단하다. 그러니 작품 ‘지옥의 문’이 캐나다문인협회 신춘문예에 당선되었을 것이다. 꼭 보시라. 즐감하시라.
그가 트럭 드라이버가 된 것은 아무래도 운명인 모양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흥미를 가진 것이 ‘자동차’였다고 한다. 전국의 대학을 다 뒤져 ‘자동차학과’가 있는 대학을 찾으니 인천공업전문대학이 유일했다고 한다. 그러나 교수도 교재도 마땅치 않아, 졸업 후 중앙대학교 기계공학과로 편입을 했다. 당시 왜 그렇게 자동차에 몰입을 했을까? 문명의 이기를 타고 세상 끝까지 달려보고 싶은 열망 때문이었을까? 오늘날 트럭 드라이버가 되려고 그랬던 것일까? 23년만의 귀국에 때맞춰 그동안 써온 글들을 한 권의 아담한 책으로 펴내준다는 출판사가 있었다. 그 징검다리를 고맙게도 우천이라는 친구가 놓아주었다. 그리하여 나온 처녀창작집이 ‘트럭 드라이버’이다. 책 속에서 펼쳐지는 그의 이야기들을 하나씩 들여다보면, 인생의 희로애락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자연의 경관에 대한 소소한 행복에서부터, 길을 가다 만난 우연한 사귐 속의 기쁨과 슬픔까지, 끝없이 펼쳐진 하이웨이에서 만나게 되는, 바로 우리 인생의 단면들이 아니겠는가. 인생은 끝없이 이어진 하이웨이이고, 우리는 그 하이웨이를 하염없이 달려가고 있을 뿐이다. 다양한 사람과 장소를 스쳐 지나고 만나는 것이 인생이다. <트럭 드라이버>는 바로 그 진솔한 인생을 보여주는 에세이에 다름 아니다.
그의 직업이 부러운신가? 공짜로 북미대륙을 횡단한다는 말에 솔깃하고, 아름다운 자연과 함께 하는 사진을 보며 부러움이 앞서기도 할 것이다. 돈도 벌고, 여행도 하고, 이 얼마나 좋으랴. 하지만 실상 그 속으로 깊이 들어가보면, 그의 인생은 너무도 고독하고 외롭고 힘들고 치사하다. 그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그는 책속에서 조곤조곤 들려준다. 우리로 치면 강원도 탄광 막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연상된다. 하지만, 그는 오늘도 달릴 것이다. ‘영원한 전라인’의 명예를 걸고, 고독과 친구가 되어 넓고도 넓은 북미대륙을 무시로 주름잡고 달린다. 그가 한 절창의 유머를 소개하며 글을 마친다.
고속도로를 달리다보면 ‘함정단속’하는 교통경찰관들을 간혹 볼 수 있다. 요즘에는 거의 없어졌지만, 후미진 곳에 숨어 있다가 과속이다 싶으면 불쑥 나타나 차를 세우는 것 말이다. 그렇게 한번 걸렸다고 한다. 경찰이 달려와 “오랫동안 여기에서 당신을 기다렸다”고 말했다 한다. 답변이 궁색한 우리의 헝그리 울프. ‘좀 싼 것으로 끊어달라’고 말하려다, 순간적으로 기지가 발동했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빨리 달려왔다”고 영어로 말하자, 그 경찰, 그 자리에서 뒤집어졌다고 한다. 딱지를 떼려다 말고 허리를 잡고 폭발적인 웃음을 터트리더니 “그냥 가라”고 했다던가. 위트도 이 정도면 고급수준이다.
*2011년 임강식 친구가 귀국한 직후 쓴 졸문이다. 그는 현재도 맹렬히 글을 쓰고 있고, 토론토에서 중견의 한인작가로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트럭 드라이버는 치아가 다 빠지고, 실명(失明)이 되는 등 극심한 ‘3D 직업’이라고 한다. 그 역시 그 전철을 다 밟아, 이제는 운전을 하지 못하고 눈도 거의 보이지 않는 상태라고 들었다. 그의 건강과 문운(文運)을 빌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