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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glossolalia)은 신앙생활에 유익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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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방언의 재출현
고린도교회의 방언 건 이후, 초대교회 400년 동안 자신들이 방언을 한다고 주장한 사람들은 몬타누스와 그를 추종하는 자들이었다. 이단으로 낙인찍힌 사람들이었다. 개혁신학의 대부 존 칼빈이 교회 안에 이상한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을 두고 하나님을 조롱하는 일이며 일종의 사악한 위선이라고 지적한 것을 보아 그 시대에도 방언 현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연구자들에 따르면, 17세기 말, 프랑스 남부 세벤(Cevennes) 지역에서 전투를 하던 한 무리가 예언을 하고 환상을 체험하고 방언을 말하기 시작했다. 18세기에 얀센주의자들(Jansenists)이 방언을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종교 개혁자들의 이신칭의 가르침에 반대한 로마가톨릭교회 지지자들이었다. 미국의 세이커 교도들은 무아지경과 비슷한 상태에서 춤추고 노래하면서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을 한 기독교계 종파였다. 로마가톨릭교회 안에도 이런 종류의 방언하는 신도들이 있다고 한다.
기독교 역사는 방언을 이단적이나 광신적이거나 비정통적인 집단의 현상과 동일시해 왔다. 정통적인 기독교는 방언하는 자들을 정상에서 벗어난 사람들로 보아 왔다. 사도 시대 이후 20세기 초까지 신약성경이 말하는 방언 은사가 나타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무엇 때문인가?
방언 지지자들이 방언은사가 지속되고 있다고 보는 반면, 방언 반대자들은 그것이 사도시대의 마감과 더불어 이미 그쳤고 사라졌다고 주장한다. 현대 방언을 사도행전의 방언의 재등장이 아니라 고린도 교회에 어지럽힌 이교적인 방언, 가짜 방언의 관행과 비슷한 하나의 일탈의 언어 현상으로 본다.
바울은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전 13:8)고 말한다. ‘그친다’의 헬라어 동사 '파우오'(pauo)는 ‘영원히 그치다’는 뜻이다. 무엇이 일단 그치면 다시 나타나지 않음을 의미한다.
사도행전의 방언은 기적이며 계시의 수단으로 주어진 은사였다. 사도행전의 방언은 예수를 믿지 않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표적 목적으로 주어진 특별한 은사였다. 방언은 하나님이 이방인을 포함하는 새로운 구원 역사를 시작하였음을 알리는 거대한 사건이었다.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막힌 담은 무너졌고, 하나님이 모든 민족에게 그리고 모든 언어로 말씀하기 원함을 알렸다. 방언은 바벨탑 사건 이후 하나님의 저주를 상징하는 것이었지만 교회가 출범하면서부터는 온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복 주심과 새 언약 시대의 징표였다.
초자연적 기적과 계시의 시대는 사도들과 더불어 끝났다. 신약성경에 기록된 마지막 사도적 기적은 약 58년경의 멜리데 섬에서 있어던 보불리오 아버지의 신유사건이다(행 28:7-20). 요한은 계시록을 완성한 96년까지 방언을 언급하지 않는다. 사도적 권위와 메시지는 더 이상 표적으로 확증될 필요가 없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사도 요한의 죽음과 함께 사도시대가 끝나자 사도적 표적들은 현실에서 사라졌다(고전 12:12 참고). 오순절 날 예수복음의 메시지가 선포되고 그리스도의 교회가 출범한 뒤 방언은 그쳤다.
마가복음, 사도행전, 고린도전서만 방언을 언급한다.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쓴 뒤 여러 편의 서신서들을 썼지만 방언을 또 다시 언급하지 않는다. 베드로는 방언을 한 번도 언급하지 않는다. 요한, 야고보, 유다도 언급하지 않는다. 방언이 기독인의 신앙생활에 그토록 유익하다면 사도들과 신약성경의 나머지 책들이 이를 언급하지 않음은 의아하다. 사도 시대가 종료되기 전, 방언의 은사를 언급하거나 암시하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는다. 사도 시대 이후의 교회 지도자 어느 누구도 방언을 긍정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방언이라는 은사와 표적이 중단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증명부담의 의무는 방언 지지자들에게 있다. 오늘날의 방언이 진실한 영적 은사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확실하게 설명한 의무를 지니고 있다. 거의 1,900년 동안 나타나지 않은 사도행전의 방언 또는 고린도전서의 영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방언 은사가 20세기 초에 이르러 재등장한 까닭 설명이 필요하다.
2. 방언의 긍정적인 면
하나님은 개인의 영적 유익이나 덕(edification)을 세우도록 할 목적으로 오늘날에도 방언 은사를 주실 수 있지 않은가? 현대 방언을 긍정적으로 수용할 여지가 전혀 없어보이지는 않는다. 방언이 하나님과 친밀한 영적 교제를 느끼게 하고, 영이 새로워짐을 경험하게 하고, 활기찬 신앙생활에 이바지하기 때문이다. 교회당에서 오래 동안 기도하고 열심히 봉사하고 지사충성하는 상당수 사람들이 방언하는 사람들이다. 영적인 신비를 체험하고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가지며 신의 거룩한 성품을 닮아가는 기독인들이다.
성령 하나님은 바람처럼 역사한다. 인간의 고착된 방식을 넘어선다. 하나님은 마른막대기를 사용할 수도 있다. 거룩한 구원의 역사에 이방국가 이집트, 바벨론, 앗시리아, 로마를 동원하고 사용한 하나님은 이상야릇한 방언을 사용할 수도 있으리라 생각된다. 방언은 인간의 예상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오늘날 우리 시대에 주어지는 성령의 기이한 은사일 가능성이 없지 않다.
어느 여인은 어릴 때 교회를 다녔지만 반세기 동안 하나님을 등졌다가 불행한 상황에서 예수를 주를 믿고 예배하는 개종 첫날부터 이상야릇한 방언을 경험했다. 눈을 감으면 무아지경의 황홀감에 도취되어 잠시나마 정신적 고통을 잊고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경험을 한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을 강하게 느끼고, 이제는 그리스도에게서 떠나지 않겠다는 각오를 다진다.
학교 교사인 어느 여인은 오랫동안 유명하다는 무속인과 불교 사찰을 전전하고 악령에게 이끌려 간질 증상과 같은 고통을 당해 왔다. 귀신에게 사로 잡혀 여러 가지 시련을 당했다. 어느 날 교회 예배에 참석했고, 첫날부터 방언을 했다.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하다가 약 7년 뒤 신학대학원 목회학 석사과정에 입학하여 3년 과정을 공부를 마무리하고 있다. 위 두 여인의 경우에 방언은 하나님의 특별한 위로와 사랑의 징표이며, 극심한 사탄 활동의 포로 상태에서 해방되는 경험이다.
왜 오늘날 방언이 폭발력 있게 확산되고 있을까?
차갑고 생기 없는 기독교에 대한 대안의 필요성 때문일 수 있다. 학문적이고 차갑고 영적이고 신비한 세계에 무관심한 지성적 기독교 현실에 대한 반작용으로 보인다. 방언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통로 삼아 초자연적인 세계와 직접 접촉하는 것 같은 느낌을 체험한다. 무미건조하지 않으며, 학문적인 냉정성에 사로잡혀 있지 않는 신의 임재를 직접 경험한다. 왜 그토록 많은 기독교인들이 방언을 말하고 새로운 신자들이 방언체험을 찾는가? 오랫동안 교회에 다녔지만 영적인 굶주림을 채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방언은 신비한 영적 체험을 하게하고 흥분과 온기와 사랑을 느끼게 한다. 방언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신의 삶에 실제로 개입하고 친히 역사한다고 믿는 듯하다.
현대 방언을 부정하거나 경계하는 개혁파 전통의 교회들과 기독인들은 지성주의적 경향을 보인다. 생기 없는 정통신앙을 앞세운다. 입술로는 성령 충만을 외치지만 실제 생활에는 영적인 활기가 없다. 지적 냉기가 감도는 신앙생활, 복음전도와 신앙생활의 열성이 식어 있는 교회의 현실은 현대인에게 만족을 주지 못한다. 성령의 특별한 역사와 신도들의 영적체험을 요청한다.
교회가 방언을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환영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지 않다. 다만 그것이 마귀로부터 오지 않고 성령이 주신 은사일 경우이다. 그렇지 않다면 최소한 신앙생활에서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일련의 심리 현상일 경우이다. 하나님은 심리현상을 긍정적으로 사용할 수도 있다.
우리의 질문은 이 지점에서 더 예리해 진다. 누가 오늘날 방언을 말하는 이들이 방언을 하지 않는 신자들보다 그리스도를 위해 더 거룩하고 더 일관된 삶을 산다고 진지하게 말할 수 있는가? 오순절주의, 은사주의, 신사도주의를 지향하는 교회들이 방언을 거부하면 모든 것을 성경에만 호소하는 교회들보다 전반적으로 더 강하고 더 건전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를 가지고 있는가? 은사주의 운동이 더 영적인 그리스도인이나 신학적으로 더 탁월한 지식인을 배출하는가?
놀람게도 수십년 동안 방언을 해 온 사람들 가운데 단호히 그것을 버린 기독인들이 적지 않다. 자신이 방언을 해도 진정한 평안, 만족, 능력, 기쁨을 체험하지 못했다고 증언하면서 방언퇴치운동을 펼치고 있다. 도대체 무슨 까닭일까? 왜 황홀한 체험이 주는 감정적 흥분을 되풀이하기가 점차 더 어려워지고, 결국 환멸로 끝나는 경우가 그토록 많은가? 이러한 질문들은 방언에 대한 우리의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 것이 바람직함을 강력히 시사한다.
3. 학습행동
방언은 일련의 심리적 학습행동일 수 있다. 방언 공동체는 방언을 가르치고 학습하기도 한다. 방언 학습자는 노골적으로 ‘의지적 통제에 대한 수동적 포기’ 상태로 들어가도록 교육을 받는다. 긴장을 풀고 자기의식에 대한 통제를 포기한다. 집회 참석자들이 모두 다 방언을 하므로 자기도 그것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느낀다. 방언을 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다.
방언 소리를 들어보고 약간의 훈련을 받으면 대부분 방언을 한다고 한다. “당신은 방언을 받았습니까?”라고 묻고 “일단 시작하세요, 할렐루야와 아멘을 반복적으로 되풀이 하면 방언이 터집니다”라고 말한다. 은사주의 공동체는 구성원들에게 방언을 하도록 무언의 집단적 압력을 준다. 방언을 못하면 왕따 당한다고 하는 느낌은 무언의 압력이다.
방언은 방언 공동체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기독교 신앙의 최대공약수이다. 영성과 정통성과 영적 성숙의 보편적 기준이다. 여기서 우리의 질문은 더 심각해 진다. 은사는 성령이 주시는 선물이다. 받는 사람의 노력, 연습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학습 결과로 방언을 한다면 그러한 현상은 성령이나 초자연성과 무관하다. 성령이 특정인에게 방언의 은사를 주시려 한다면, 왜 그것을 받는 사람이 방언을 시작하려고 애쓰고 노력해야 하는가?
무대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젊은 연예인들에게 매력을 느끼는 어린 십대 소년 소녀들을 보라. 흥분, 감격, 열정, 굉음 속에서 자신들의 성대와 근육에 대한 의지적 통제를 포기한다. 집단적 심리구조, 최면, 무아지경 경험, 기억자극, 정신적 카타르시스 해소 등 여러 가지 요인들의 영향을 받는다. 자신의 의지 통제를 포기하면 무의식적인 중언부언의 말이나 의미 없는 소리를 반복하거나 무아지경의 황홀감을 느끼는 행위를 지속 반복하며, 방언이라고 하는 '언어 이상 증세'가 타나날 수 있다.
방언에 대한 '종교적 매력'을 느끼는 사람을 주목해 보라. 낯설고 이상한 가르침에도 고개를 끄덕이며 아멘으로 화답한다. 눈을 감으면 즉각 방언을 하고 자기의지를 통제하지 못하는 상태에 쉽게 진입한다. 심리적 암시 능력에 가볍게 복종한다. 무슨 암시를 받든지 간에 그대로 행동에 옮긴다. 감정이 고조되고 정신적 압력이 올라간 상태에서는 어떤 일이든 벌어질 수 있다. 성령이나 초자연성과 무관한 언어현상을 경험할 수 있다.
실어증 환자들의 상태와 방언하는 사람들은 똑 같은 언어해체 현상을 보인다. 마귀적이든 심리적이든 간에 언어에 대한 자기의 의지적 통제 포기가 이루어진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언어 통제가 방해를 받을 때 의미 없는 말을 반복적으로 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이상야릇한 방언을 초래하는 자연스런 심리 기제들이 많다.
하나님이 개인에게 신앙생활에 이롭거나 영적 성숙에 도움을 주는 어떤 은사를 주신다고 가정해 보자.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가 그것을 받는 자신도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타인도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이상야릇한 발음 현상으로 나타날까?
바울은 일관되게 ‘자기 부정’을 강조한다. '자기의 덕(edification)을 세움(고전 14:4)은 그의 일관된 가르침에 역행한다. 바울은 자기를 세우려고 교회에서 방언하는 것을 칭찬하지 않는다(고전 14:4). 자기를 세우려는 목적의 은사 활용은 은사를 주시는 목적을 어기는 일이다. 사랑의 원칙을 무시하는 일이다(고전 13:5).
“자기의 덕을 세우다”라는 헬라어 단어의 뜻은 “자기를 세우다”이다. 문맥에 따라 긍정적인 뜻일 수도 있고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될 수도 있다. 이 본문은 이것을 부정적인 의도로 사용한다. 고린도 교인들이 방언에 치중하는 까닭이 이기적으로 자기를 세우려는 목적이었다는 것이다. 바울은 타인에게 신령한 신자로 보이려고 눈에 띄는 방언을 하는 자기중심적 욕망을 경계하라고 가르친다. 과시 동기의 행동으로 유익을 얻는 사람은 방언을 말하는 자 외에 아무도 없다. 방언에서 얻는 것은 결국 자기의 영광을 구하고 자기를 세우는 일이라는 것이다. 바울은 단호하게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전 10:24)고 가르친다.
4. 방언 수수께끼
방언은 개인의 영적 체험 영역에 국한된 수수께끼인가?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에서 교회적 차원에서 방언을 경계할 것을 가르친다. 통역 없이는 방언하지 말라고 한다.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알지 못하는 말을 하는 집단 방언을 금한다. 방언이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수단이 아니라는 뜻이다. 바울은 "각종 방언 말함”(고전 12:10)과 “방언들 통역”(고전 14:28)을 동시에 언급한다. 이 경우, 방언은 오늘날 개념의 외국어 말하기와 외국어 통역 능력으로 보인다. 언어의 통역은 의미를 지닌 단어들과 문법 체계를 가졌을 경우에만 가능하다.
방언이 성령이 주시는 은사라는 것을 배타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가? 없다. 방언 지지자들은 이 점에 매우 취약하다. 입증, 검증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음은 결정적 결함이다. 우리가 방언이라는 것을 가볍게 신뢰할 수 없는 가장 큰 까닭은 여기에 있다.
방언이 가짜라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방법은 있다. 바울 시대에는 없지만 우리는 쉽게 접할 수 있는 녹음기술이 있다. 녹음기로 방언을 녹음하여 방언 통역의 은사를 가졌다고 하는 자에게 통역을 의뢰해 보라. 통역자들의 정보를 차단한 상태에서 여러 명에게 통역을 부탁해 보라. 통역자 수만큼이나 각각 다른 내용을 내놓을 것이다. 오순절주의자, 은사주의자, 신사도주의자들이 실제로 확인 가능하고 통역 가능한 언어로 말을 한 사례는 없다. 확실히 입증된 경우는 없다.
모든 방언은 마귀 활동의 결과인가? 사탄은 매우 영리하고 교활하다. 하나님의 나라 백성들을 호시탐탐 유혹하고 넘어지게 한다. 사람이 자기의 마음과 생각을 비우면 얼씨구 좋다고 하면서 그 빈 마음에 들어온다. 그곳을 자기의 집으로 삼고 왕성하게 역사한다. 자기를 천사나 성령으로 가장하고서 방언으로 그리스도를 저주(anathema Jesu)할 수도 있다. 방언을 하게 하여 성도들이 하나님께 올바른 기도를 하지 못하게 한다.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 교제를 방해한다.
사탄은 진리를 흉내 내는 전문가이다(고후 11:12-15). 모든 거짓 종교의 배후에 있다(고전 10:20). 바울은 디모데에게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딤전 4:1)고 말했다. 우리에게는 방언이 마귀와 무관하다고 단정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동시에 모든 방언 현상이 성령과 무관하다고 판단할 근거가 없다. 하나님은 정상적이지 않은 방법을 수단 삼아 자신의 백성을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오고 영적인 체험들을 하게 할 수도 있다. 방언이 신자 개인의 신앙증진에 유익하고 영적 삶의 풍요로움에 이바지하는 경우, 우리의 판단은 중립적이다.
5. 이교적 방언현상
‘방언’은 기독교-교회의 전유(專有) 현상이 아니다. 세계 여러 지역과 종교들이 방언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방언은 이교 주술 숭배자들 사이에서 장구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다. 무아지경의 언어는 거짓 종교에서 일어나는 일반적인 현상이다.
방언을 하는 종교 그룹은 대략 다음과 같다. 불교 일련종(남묘효량게쿄), 티베트의 승려들, 회교도, 에스키모인, 인도의 힌두교, 일부다처제를 가진 미국의 몰몬교 신자들이다. 로마가톨릭교회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아프리카 서부 해안의 컬트 샹고교, 에티오피아의 컬트 조르교, 아이티의 컬트 부두교, 남미와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주민 샤먼(shaman)들에게서 발견된다고 한다.
명확하게 마귀의 역사로 나타나는 방언들도 있다. 아프리카 동부에 귀신에 사로잡혀 스와힐리어나 영어로 유창하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아프리카의 통가(Thonga)족은 줄루(Zulu)어를 전혀 모르는데도 그들 사이에서 귀신을 쫓아 낼 때 보통 줄루어로 노래를 부른다고 한다. 귀신을 쫓아내는 사람은 ‘방언의 기적’으로 줄루어를 말할 수 있게 된다고 한다. 이 사례들은 방언이 사탄의 영향을 받아 나타나는 것이라는 판단을 가능하게 한다.
6. 품위와 질서
현대 방언은 교회의 무질서를 부추긴다. 교만, 영적 우월감 과시의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는 정도를 넘어 속임수, 심리적-사회적-언어적 '트릭'(trick)으로 이용되고 있다. 방언은 교회의 무질서를 초래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직통계시, 예언, 투시, 입신, 환상보기, 하나님의 음성 듣기, 귀신들림 등 불건전한 신비주의를 조장한다.
바울은 방언에 대한 가르침을 마치면서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고전 14:40)고 한다. 교회의 질서와 품위와 관련하여 방언을 경계하라고 가르친다. 교회 회중 앞에서 하거나 마이크 붙잡고 하거나 학습으로 유도하여 하게 하는 방언은 성경의 방언과 아주 다르다. 고성의 시끄러운 악기연주나 심리적인 수단들을 동원하는 이상야릇한 현대 방언은 사탄과 무관하지 않다는 판단을 가능하게 한다.
기도는 자기의 맑은 정신으로, 언어체계에 따라 의미를 지닌 단어들로 구성된 자기의 언어로 함이 마땅하다. 바울은 "너희 구할 것을... 하나님께 아뢰라"(빌 4:6)고 한다. 자기의 지식과 감정과 의지를 담은 맑은 정신으로 성 삼위일체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 올바른 기도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기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는 자기의 온전한 정신 상태에서 기도하는 것을 원한다. 기도는 혼잣말 또는 독백(獨白)이 아니다. 자기도 알 지 못하는 소리로 하나님과 인격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은 불가능하다. 통역할 수 없는 의미 없는 소리는 불분명한 나팔소리이다. 전장의 나팔은 분명한 소리를 낸다. 바울은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써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고전 14:9)고 말한다.
사탄은 영리하고 교활하다. 하나님의 나라 백성들을 호시탐탐 유혹하고 넘어지게 한다. 오늘날의 방언이 성도의 기도 곧 맑은 정신으로 하나님께 올리는 영적인 일을 훼방하려는 마귀가 수단이 아니기를 바란다. 개인의 신앙향상과 영적 활기 증진에 유익하다고 생각하여 기어이 방언을 하려 한다면 혼자 조용히 골방이나 산속에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방언 지지자들은 대부분 방언을 성령세례와 동일시한다. 개혁신학은 성령세례를 중생과 동일시한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음으로써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회개하고 죄 용서를 받고 거룩한 삶을 시작한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신앙 자체가 성령세례를 받은 증거이다.
방언 은사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예수 안에 있는 우리의 형제자매들이다. 성경을 권위 있는 책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인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희생적인 죽음과 육체적 부활을 믿고 고백한다. 이신득구, 순종과 성화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뜨겁게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며, 열심히 구원의 복음을 전하고 선포한다. 우리는 현대 방언을 하는 기독교인들이 성경의 가르침에 부합한 신앙을 가지고 "사랑 가운데 진리"를 믿고 행동하기를 바란다(엡 4:15).
(이 글은 "성경은 방언(glossolalia)을 지지하는가?"후편 글입니다) ->성경은 방언(glossolalia)을 지지하는가?/최덕성
최덕성 박사/ 브니엘신학교 총장, 교의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