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이같이 하여 생명을 보전하라
(창세기 42장 26-38절)『그들이 곡식을 나귀에 싣고 그 곳을 떠났더니 …… 재난이 그에게 미치면 너희가 내 흰 머리를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 되리라』
『그들이 곡식을 나귀에 싣고 그 곳을 떠났더니(얄라크)』
곡식은 부셔져야 하는 양식(쉐베르)을 의미한다. 싣는다라는 말은 들어올리다(나사) 라는 것이다. 나귀(하마르)는 짐을 싣는 가축이고 되새김을 한다. 발굽이 갈라지지 않아서 부정한 동물이고 율법을 지키는 자를 의미한다. 하마르는 울타리에서 말씀을 행하려고 세상에서 분리된 자를 뜻한다.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셨다. 나귀가 싣고 다니는 것은 율법의 짐이다. 나귀를 탄 예수 그리스도는 멍에가 되는 것이다. 얄라크는 권능의 말씀으로 분리되려고 가는 것이다.
『한 사람이 여관(말론)에서 나귀에게 먹이를 주려고 자루(암타하트)를 풀고(파타흐) 본즉 그 돈이 자루 아귀에 있는지라』
말론은 룬 앞에 맴이 붙어서 말론이 된다. 룬은 밤을 보낸다는 것이다. 그래서 말론은 말씀 안에서 밤을 보내는 것이다. 나귀가 먹어야 할 양식이 그 안에 있는 것이다. 사료가 자루에 있는 것은 사람이 먹는 양식을 의미한다. 요셉이 창고를 열고 저장된 곡식을 내는 것과 같은 의미다. 그 안에는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 먹어야 할 양식(돈)이 있는 것이다. 자루의 돈은 은(율법)과 베옷이 있는 것이다. 야곱이 자기의 옷을 찢고 베를 허리에 두르는 것에서 베옷이다. 야곱이 옷을 찟고 베옷을 입고 음부에 내려간다라는 말은 하나님 나라를 떠나 세상으로 내려간다는 것이다. 음부, 지옥은 세상을 의미한다. 은과 베옷은 깨어져야 할 양식인 것이다. 율법 속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가 그 형제에게 말하되 내 돈을 도로 넣었도다 보라 자루 속에 있도다 이에 그들이 혼이 나서(야차브) 떨며 서로 돌아보며 말하되』
그들은 베옷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돈만 보인다. 율법을 지키는 자의 눈은 땅(재물)을 바라보는 눈이다. 야차브는 나간다는 의미를 갖는다. 혼이 나간다라는 말은 정신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떠나 세상으로 들어온 자들은 떨게 되어 있다.
『하나님이 어찌하여 이런 일을 우리에게 행하셨는가 하고 그들이 가나안 땅에 돌아와 그들의 아버지 야곱에게 이르러 그들이 당한 일을 자세히 알리어 아뢰되』
요셉이 한 일에 대해서 형제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탄식하며 하는 말이다. 가나안은 기근의 땅이며,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온 그 땅이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에서 기근이 있으므로 애굽으로 내려간 것 같이 야곱도 같은 방식으로 애굽으로 내려가게 된다.
『그 땅의 주인인 그 사람이 엄하게 우리에게 말씀하고』
엄하게 라는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이 곧은 것을 의미한다.
『우리를 그 땅에 대한 정탐꾼으로 여기기로 우리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는 확실한 자들이요 정탐꾼이 아니니이다 우리(하야)는 한 아버지의 아들 열두 형제로서』
정탐꾼은 벌거벗은 것을 정탐하러 왔다는 것이다. 그들은 벌거벗었다는 말은 기억하지 않고 정탐하는 것만 기억한다. 하야는 첫사람 아담 안에서 이 세상에 와서 살다가 죽는 것을 하야라고 한다. 즉 우리는 정탐이 아니라 하야다 라고 말을 하는 것이다.
『하나는 없어지고 막내는 오늘 우리 아버지와 함께 가나안 땅에 있나이다 하였더니』
하나는 땅에 온 그리스도이시고, 하나는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야 할 자인데, 열명은 이 땅에서 벌거벗은 것을 깨달아야만 하는 것이다.
『그 땅의 주인(아돈:그리스도)인 그 사람이 우리에게 이르되 내가 이같이 하여 너희가 확실한 자들임을 알리니(조트)』
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이다.
『너희 형제 중의 하나를 내게 두고(야나흐)』
깨어지는 양식을 취하여(하나가 되고) 돌아가서 집의 기근을 벗어나라는 것이다. 집은 율법을 행하는 이스라엘을 의미한다. 요셉이『이스라엘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베냐민이 된다는 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다. 요셉이 직접 말한 것과 이들이 야곱에게 전달한 요셉의 말은 차이가 있다. 요셉은 작은 형제 안으로 들어가라고 했는데, 이 형제들은 작은 형제가 누구인지 모른다. 이들은 작은 형제를 베냐민으로 받아드린다.
『양식을 가지고 가서 너희 집안의 굶주림을 구하고 너희 막내 아우(베냐민)를 내게로 데려 오라』
작은 형제 베냐민은 영적으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라는 것이다.
한 사람을 묶어두고 너희가 양식을 취하여 가서 기근을 면하게 하기 위하여 떠나라는 것이다. 깨어지는 양식을 취하여 하나가 되라는 것이다. 깨어지는 양식은 자루 안에 있는 은과 베옷이다. 그것으로 너희들이 역시 깨어지라는 것이다. 작은 형제(베냐민) 안으로 들어가라는 것이다. 작은(카툰)의 카툰의 어근은 쿠트다. 쿠트는 베어내다, 미워하다 라는 의미를 갖는다. 베어냄을 당하는 자는 카탄이다. 처음에 베어냄을 당한 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 다음에 베어냄을 당하는 자는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자들이 된다. 베냐민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자를 상징하는 것이다. 카탄은 율법을 이루기 위하여 세상에 내려와 베어냄을 당한 자를 의미한다.
『그러면 너희가 정탐꾼이 아니요 확실한 자들임을 내가 알고 너희 형제를 너희에게 돌리리니 너희가 이 나라에서 무역하리라(싸하르) 하더이다 하고』
요셉의 이야기는 깨어지는 양식을 먹고, 작은 형제(그리스도 안) 안으로 들어가면 더 이상 정탐(벌거벗는)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싸하르는 두루다니며 장사를 하는 것이다. 달란트나 므나의 비유에서도 장사(영적인 장사)를 하는 비유가 있다.
『각기 자루를 쏟고 본즉 각 사람의 돈뭉치(체로르)가 그 자루 속에 있는지라』
그들이 하야를 쏟아내었다. 은과 베옷이다. 하야는 보이지 않는 것이 물질세계에 보이는 것으로 나타낸 것이 하야다. 하나님 나라의 영이 세상에 나타난 것이다. 체로르는 짜라르에서 유래되었는데, 짜라르는 괴롭히다라는 말이다. 돈뭉치는 나를 괴롭히는 말씀(율법)을 의미한다. 고통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베옷을 입고, 율법을 지켜 나갈려고 할 것이다.
『그들과 그들의 아버지가 돈뭉치를 보고 다 두려워하더니』
두려워한다는 말은 경외한다는 의미다. 돈뭉치의 의를 알고 있는 야곱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경외하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 위에 오직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만 있는 것이다. 야곱은 자루 안에 있는 것들의 의미를 알고 있다. 그래서 야곱이 직접 음부(세상)에 냐려가려고 하는 것이다.
『르우벤이 그의 아버지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오지 아니하거든 내 두 아들을 죽이소서 그를 내 손에 맡기소서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리이다』
요셉은 그리스도, 베냐민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 자를 상징한다. 르우벤은 율법을 상징한다. 두 아들은 큰 이스라엘(유대인)과 작은 이스라엘(이방인)을 상징하는 것이다. 두 아들이 죽는다는 것은 베냐민(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이 된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두 아들을 죽인다는 표현은 논리에 맞지 않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자신의 뜻이 관철되지 않으면, 손자를 죽이라는 말이 되는 것이다.
『야곱이 이르되 내 아들은 너희와 함께 내려가지 못하리니 그의 형은 죽고 그만 남았음이라 만일 너희가 가는 길에서 재난이 그에게 미치면 너희가 내 흰 머리를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 되리라』
베냐민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 자가 되는데, 다시 세상으로 갈 수는 없는 것이다. 야곱이 스올(음부)로 내려가는 것은 곧 하나님이 세상으로 간다는 의미를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