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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또 상제께서 “이제 서양 사람의 세력을 물리치고 동양을 붙잡음이 옳으니 대신문(大神門)을 열어 사십구일을 한 도수로 하여 동남풍을 불어 일으켜 서양 세력을 꺾으리라”고 말씀하시고 공사를 행하셨다.
8. 상제께서 최창조의 집에서 종도 수십명을 둘러 앉히고 각기 세 글자씩을 부르게 하시니라. 종도들은 천자문의 첫 글자부터 불러오다가 최덕겸(崔德兼)이 일(日)자를 부를 때 상제께서 말씀하시니라. “덕겸은 일본왕(日本王)도 좋아 보이는가 보다” 하시며 “남을 따라 부르지 말고 각기 제 생각대로 부르라”고 이르시니라. 이튿날 밤에 상제께서 덕겸으로 하여금 담뱃대의 진을 쑤셔 내되 한번 잡아 놓치지 말고 뽑아서 문밖으로 버리게 하시니 그는 말씀하신 대로 진을 바깥에 버리자 온 마을의 개가 일시에 짖는도다. 덕겸이 신기하게 느껴 “어찌 개가 일제히 짖나이까”라고 여쭈니 상제께서 가라사대 “대신명(大神明)이 오는 까닭이니라.” 그가 “무슨 신명이니까”고 여쭈니 상제께서 “시두 손님이니 천자국(天子國)이라야 이 신명이 들어 오나니라”고 일러주셨도다.
5. 상제께서 대신명(大神明)이 들어설 때마다 손을 머리 위에 올려 예를 갖추셨도다.
6. 상제께서 “청주(淸州) 만동묘(萬東廟)에 가서 청국 공사를 행하려 하나 길이 멀고 왕래하기 어렵고 불편하므로 청도원(淸道院)에서 공사를 행하리라” 하시고 청도원 류찬명의 집에 이르러 천지 대신문을 열고 공사를 행하셨도다. 그 때에 김송환이 그 시종을 들었느니라.
26. 어떤 대신(大臣)이 어명(御命)을 받고 그 첫 정사(政事)로써 장안(長安)에 있는 청루(靑樓)의 물정(物情)을 물었도다. 이것을 옳은 공사라고 상제께서 말씀하셨도다.
18. 상제께서 깊은 밤중에 태인읍에서 종도들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서 공사를 행하신 후에 그들에게 “이 공사에 천지 대신명이 모였으니 그들이 해산할 때에 반드시 참혹한 응징이 있으리라”고 말씀을 마치시자 뜻밖에 태인읍으로부터 군중의 고함소리가 일어나는지라. 종도들이 상제를 모시고 산에서 내려와 이를 살피니 군중이 신 경현(辛敬玄)의 주막에 뛰어들어가서 세간살이와 술항아리를 모두 부쉈도다. 원래 신 경현은 술 장사를 시작한 이후 읍내 청년들의 호감을 얻어서 돈을 모았으나 그 청년들이 궁핍하면 냉대하므로 그들이 그의 몰인정에 분개하여 습격한 것이었도다. 그 이튿날 상제께서 경현의 주막에 가시니 그 부부가 서로 울면서 다른 곳으로 이사하려 하거늘 상제께서 아무 말씀을 않고 경현의 부인에게 술을 청하였으나 그 여인이“술 항아리를 모두 깨었으니 무슨 술이 있으리까”고 말하거늘 가라사대“저 궤속에 감추어 둔 소주를 가져오라” 하시니라. 그 여인은 당황하여 “선생님 앞에서는 조금도 숨길 수 없나이다”고 말하면서 적은 병에 담겨있는 소주를 따라 올리니 상제께서 경현 부부에게 “모든 일에 옳고 그름이 다 나에게 있는 것이지 위치에 의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후로 모든 일을 잘 생각하여 할지어다. 그렇게 하면 앞 길이 다시 열리고 영업이 흥성하리라”고 타이르시니라. 이 부부는 타이르신 대로 이사를 중지하고 허물을 고치고 장사를 계속하더니 얼마 안 되어 영업이 다시 흥성하여지니라.
55. 상제께서 앞뒤에 친히 쓰신 병풍 한 벌을 재종숙이 되는 강성회(姜聖會)에게 주신 것을 그 후 석환의 종형인 강계형(姜烓馨)이 간수하고 있다가 상제께서 화천(化天)하신 십일 년 후에 입양한 강석환(姜石幻)에게 전하였느니라.
그 글귀는 이러하였다.
其略曰
戒爾學立身 莫若先孝悌 怡怡奉親長 不敢生驕易
戒爾學于祿 莫若勤道藝 嘗聞諸格言 學而優則仕
戒而遠恥辱 恭則近乎禮 自卑而尊人 先彼而後己
擧世好承奉 昻昻增意氣 不知承奉者 以爾爲玩戱
表面(표면) 한 폭에
萬事己黃髮 殘生隨白鷗 安危大臣在 何必淚長流
또 한 폭에는 고전체(古篆體)로
靈源出
綿空早移 浮邑梧弦 枇緣足柰 新兒大琴 杷晩笑谷 阮背帶代
라고 쓰여 있고 또 석환(石幻)이 병풍 속을 뜯어보니
吾家養白鶴 飛去月蘆夜
라 쓰여 있다 하니라.
..................................................
전경에 나와 있는 大神 과 관련되어 있는 글이다.
이 중 大神 과 관련되어 있는 숫자는 49 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보면 될 듯 싶다. 大神 도 大神 나름이라는 뜻이다.
숫자 49와 관련된 대신은 무극/태극/황극 과 관련없다는 점은 이야기해두고 가자.
이 부분을 도주님께서는 언급하신 적이 있다.
아래에 있다.
(아래)
2월에 청주에서 안상익 포감방면 임원들의 옥사(獄事)가 일어나니라. 당초에 지난 몇 년간 충주방면 안상익 · 박한경 · 유철규 등 임원들은 관하 도인들을 경쟁하듯 매월 수십 호씩 중부로 이주시키니라. 이로써 조치원역(鳥致院驛)은 도인들의 이삿짐 수송에 몹시 바빠 다른 일을 처리 못 할 정도였으며, 도인들이 많이 살던 동네에서는 그들의 재산정리에 따른 이상한 소문이 파다하니라. 개중에는 도인들이 "부산에 가야만 도를 믿을 수 있다."느니 "도만 믿으면 되지 재산은 무엇하느냐?" 하더라는 등 사실무근한 소문이 유포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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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소문이 와전(訛傳)되어 마침내는 도인들이 재산을 정리하고 부산으로 이주하는 행위가 휴전 직후 불안한 시국에 혹세무민하는 유언비어 또는 용공분자의 소행과 비슷하다는 혐의를 받게 되니라. 충북도경에서는 소문의 근거를 찾으려고 형사들이 수개월 간 임원들을 미행하며 내사(內査)하였으나 지목된 안상익 · 박한경 · 유철규 · 김영하와 이갑성(李甲性) · 오득표(吳得杓) · 안영국(安永國) 등은 이를 눈치채지 못하니라. 이달 정기집회일인 18일 밤에 청주 서운동(瑞雲洞) 소재 포덕연락소에 모여 회의하고 영하가 상제님께서 하교하신 풍랑시(風浪時)의 항해법을 교화하던 중 한경 · 철규 · 영하 · 갑성 등 임원들이 도인 20여 명과 함께 형사들에게 체포 압송되어 도경에서 국가보안법 위반 등 혐의로 고문 · 취조를 당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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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갑성은 혹독한 고문으로 장시간 기절하였다가 다음 날 겨우 깨어나 기동을 못하면서도 그러한 사실이 없음을 극구 주장하여 3일 만에 다른 도인들과 함께 석방되니라. 그러나 한경 등은 고문에 못 이겨 자신들의 혐의를 시인하고 상제님의 행재까지 진술함으로써 도경의 형사주임(刑事主任) 송달헌(宋達憲)과 형사 여러 명이 부산도장에 급파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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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아침에 상제님께서 평일처럼 산정 공부실에서 도수를 보시고 잠시 쉬실 때 형사들이 급습하여 방자하게 추궁하였으나 상제님께서 하시는 말씀과 며칠간 수십 명의 중부도인이 진술한 바로는 아무런 혐의사실이 없으니라. 다만, 이미 입건 구속된 한경 철규 등의 혐의를 소명하자면 상제님께서 친히 충북도경 근처 사관까지라도 거둥하셔야 함을 말씀드리니 윤허하시고 청봉 등 세 자제분과 도인 정운교(鄭雲敎) 등의 시위를 받으시며 25일 청주 북문로(北門路) 북일여관(北一旅館)에 임어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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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경에서 한경 등이 고문에 못이겨 분별없이 시인한 내용은 개인적인 사기 · 횡령 등 혐의와 함께 유언비어 유포, 용공단체 조직 등 국가보안법 위반의 혐의이며 또 이 모두가 상제님의 명으로 범행한 사실처럼 인정되어 있었으나 조사 결과 그 실제가 아님을 판명되니라. 그러나 한경 등의 개별적인 혐의가 완결되지 않아 상제님께서는 환어하지 않으시고 1개월간을 북일여관에 설석하시고 공부하시며 간간이 수사에 응하시니라. 이때 도경 사찰분실장(査察分室長) 김두길(金斗吉)의 집요한 추궁에도 사건은 더 확대되지 않았으나 한경 등 3인은 법원에 구속 · 기소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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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7일, 양력 4월 29일에 상제님께서 도장으로 환어하시는 길에 청주 화양동(華陽洞)으로 행행하셔서 도수를 보기로 하시니라. 화양동은 본시 백두대간에 속한 소백산맥(小白山脈)의 중간 산골인 괴산군 청천면(靑川面) 화양리의 계곡으로서 사적과 명소가 많고, 중국 무이구곡(武夷九曲)과 흡사한 절경지지(絶景之地)라 하여 예로부터 화양구곡(華陽九曲)으로 유명하니라. 그 제3곡에 송우암(宋尤庵)이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를 도와준 명나라 신종(神宗) · 의종(毅宗)에 대한 보은으로 제자들로 하여금 만동묘(萬東廟)를 짓게 제향을 드리게 하였는데, 흥선대원군이 철폐한 것을 유생들이 중창하였더니, 왜가 다시 철거하여 훼손한 묘지(廟趾)와 묘비(廟碑)만 남아 있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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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곡에는 우암이 은거하며 학구(學究)와 교도(敎導)에 힘쓰던 암서재(岩棲齋)가 있고, 제5곡에는 우암이 문인(門人)들을 시켜 명나라 의종의 친필인 "비례부동(非禮不動)"이라는 큰 문자를 "숭정황제어필(崇禎皇帝御筆)"이라는 작은 문자와 함께 첨성대(瞻星臺) 아래 석벽에 새기니라. 그 좌측에 "배신 민정중(陪臣閔鼎重) 봉지(奉至) 여송시열등(與宋時烈等) 근배수계수(謹拜手稽首) 모륵(摸勒) 시사십칠년(時四十七年) 갑인 사월 일야(甲寅 四月 日也)"라는 작은 문자를 새겼으며, 우측에는 암벽에 세로로 석함(石函)을 파서 석개(石蓋)를 하고 이를 "석문(石門)"이라 이름하니라. 석문 아래에는 "대명천지(大明天地) 숭정일월(崇禎日月)"이라는 큰 문자와 "차팔자(此八字) 배신 송시열(陪臣宋時烈) 상서(嘗書) 여인자야(與人者也) 정의어차산중(正宜於此山中) 근모이륵(謹摸以勒)"이라는 작은 문자를 새겨 놓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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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하오에 상제님께서 청봉과 정운교 · 안상익 · 윤금현 등 시종을 거느리시고 승용차로 화양동에 거둥하셔서 만동묘(萬東廟)의 묘지와 묘비를 친감하시며 말씀하시기를 "이곳 청주 화양동은 명·청 양국(明淸 兩國)이 공존하는 곳이라, 내가 이곳에 온 것은 '황극신도수(皇極神度數)'와 '대신문도수(大神門度數)'를 보려 함이니라." 하시니라. 다시 암서재(岩棲齋)를 친감하시는 동안 해가 저물므로 "화양구곡을 다 볼 것은 없지마는 온 김에 제5곡까지 보고 가려 하였으나 해가 저물었으니 신도(神道)로써 공사하리라." 하시고 환어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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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행 중로인 청천(靑川) · 미원(米院) · 주성(朱城) 등지는 해가 지면 공비(共匪)의 출몰이 잦은 곳으로서 야간 통행금지와 군경의 경비가 삼엄하고 검문 · 검색도 심할뿐더러 도로 사정 또한 불편하기 그지없으니라. 시종들이 야간행행을 만류하였으나 계속 차를 타시고 보은 남일여관(南一旅館)에 임어하시니 자정(子正)이 가까우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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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원이 고향인 금현은 상제님을 자기 집으로 모시고 싶었으나 감히 상고하지 못하고 시종만 하면서 행로의 검문 대응에 많은 시간을 지체하였을 뿐 아니라, 여관을 잡고 때늦은 수라 준비 등에 애를 쓰니라. 자정이 되어서야 수라상을 올리고 시좌하였는데 상제님께서 수저를 상머리에 한번 정저(整箸)하시자 그 순간 갑자기 뇌우전벽(雷雨電霹)이 천지를 진동하므로 시종들과 여관 사람들이 모두 무섭고 두려워서 몸 둘 바를 모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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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님께서는 이러한 상황에서도 태연히 수라를 진어하시므로 금현과 운교는 물러날 수도 없어 묵묵히 시측(侍側)하고 있으니라. 뇌전은 한동안 계속되다가 마침내 벼락 치는 소리가 그 부근 일대를 때려 부수듯 한번 진동하더니 이내 그치고 소나기만 내리는데 상제님께서 상을 물리시며 혼자 말씀으로 "이제야 신문공사(神門公事)를 마쳤으니 다시 오지 않아도 되겠구나. 과시 보은지지(報恩之地)로다." 하셨으나 시종들은 어의를 깨닫지 못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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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에서 유어하시고 시종들에게 "내가 이번 길에 속리산(俗離山) 법주사(法住寺)를 보고 가려 하였으나 다음으로 미루고 그대로 돌아가니 금현은 다음 치성에 올라오되, 그전에 이곳 일을 살펴서 포감을 통하여 나에게 자세히 고하라." 하시며 청봉과 운교를 승용차에 동승시키시고 부산도장으로 환궁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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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청주 일대에 "화양동 제5곡의 석문이 열렸다."라는 소문이 자자하니라. 금현도 소문을 듣고 그 사실을 확인하고자 인근 도인 윤석현(尹錫鉉) · 오병하(吳炳夏) · 박동한(朴東漢) · 김진협(金鎭協) 등과 화양동으로 가니 마침 상제님께서 파견하신 박종순을 만나 함께 그곳에 사는 빈재로(賓在老)를 만나니라. 재로는 본래 만동묘 창건 시에 청국에서 파송된 묘지기의 9대손으로서 대대로 봉직하다가 묘가 철거된 후에는 묘지 옆에서 농사와 주점으로 생계하는 사람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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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로가 일행에게 말하기를 "우암이 석문을 만들며 그 속에 무엇을 어찌하였는지는 아무도 모르나, 그 후 비전(秘傳)되는 전설로는 '석문이 열리면 천지가 개벽되고 진인(眞人)이 세상을 구제하리라.' 하더이다. 만동묘를 철거한 왜경이 그러한 전설을 말살하려고 석수를 시켜 석문을 정으로 쪼아 열려고 하였으나 그때마다 갑자기 청천벽력이 일어나므로 혼비백산하여 중지하고 그 흔적을 양회로 때우는 것을 내가 직접 목격하였나이다. 또 지난 3월 27일 밤 자정에는 번개와 함께 뇌성이 울리며 비가 쏟아지더니 석문 쪽에서 벽력이 크게 일어 첨성대가 무너지듯 진동하므로 전율경악(戰慄驚愕)하고 이튿날 아침에 가 보니 석개가 열려 암벽 아래에 깨진 채 떨어져 있고 글자가 새겨져 있었으며 석문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나이다."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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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현 일행이 신기하게 여기며 그곳에 가 보니 과연 그 말과 같이 세로 3척 1촌, 가로 1척 9촌, 두께 5촌쯤의 석개가 두 동강으로 갈라져서 떨어져 있으므로 맞추어 보니 "옥조빙호(玉藻氷壺)"라는 큰 문자와 "만력어필(萬曆御筆)"이라는 작은 문자의 음각(陰刻)이 완연하니라. 금현 등은 그제야 이 일이 증산 상제님께서 청도원에서 대신문(大神門)을 여시는 도수를 짜신 공사와 부합되며, 또 상제님께서 "신도로써 공사하리라." 하시고 석문이 열릴 그 시각에는 "이제 신문공사를 마쳤으니 다시 오지 않아도 되리로다." 하신 비의(秘意)를 깨달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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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초에 임규오가 도장에 올라가 상제님께 배알하고 금현으로부터 들은 "화양동 석문 열린 일"을 상고하니 용안에 미소를 띄우시고 침묵하시니라. 규오가 다시 "이는 필시 증산 상제님께서 청도원(淸道院)에서 짜 놓으신 황극신도수와 대신문도수가 풀림이 아니오니까?" 하고 아뢰니 "오직 결자(結者)와 해자(解者)는 동체니라." 하시고 더 말씀이 없으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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