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 함께 이난향의 ‘명월관’
12살 소녀는 기생이 되었다…전설의 이난향, 그가 겪은 시대
카드 발행 일시2025.01.03
에디터
이경희
이난향의 ‘명월관’
관심
춤 잘 추고, 노래 잘하고, 양금 잘 띄우기로 그 당시 장안의 남자들은 어느 누구 모르는 이가 없었다. 이난향(李蘭香)은 얼굴 잘나고, 거동 곱고, 말소리가 맑을뿐더러 하나 물으면 열을 아는 재주덩어리였으니 그것은 난향의 맑은 두 눈동자와 넓적한 이마에 그 재주가 들었다고나 할 것이다. 글 잘하는 사람들도 난향이요 돈 잘 쓰는 궐자*들도 난향이었다.
-‘명기영화사, 조선권번’, 『삼천리』 제8권 제6호, 1936년 6월 1일자.
*궐자(厥者): ‘그’를 낮잡아 이르는 말
해어화(解語花) - 말을 알아듣는 꽃, 기생(妓生).
이난향. 국립민속박물관.
이난향(1901~79)은 일제강점기 조선 최고의 기생으로 손꼽혔다. 평양 출신인 난향은 열셋에 서울에 와 스물다섯에 조선권번의 취체 자리에 오른다. 명기를 많이 배출하기로 유명한 기생조합 조선권번, 요즘으로 치면 하이브나 YG에서 일종의 교장 역할을 맡은 것이다. 30대 초반에 신문기자 남상일과 결혼하면서 은퇴하지만 가곡과 가사 등 유성기 음반을 취입하는 등의 예술활동은 이어간다.
70대에 접어든 이난향은 1970년 12월 25일부터 이듬해 1월 21일까지 중앙일보에 ‘남기고 싶은 이야기-명월관’을 연재한다. 비록 말을 알아듣고 글 쓸 줄 알았으나, 기생임을 자랑스레 드러내기는 쉽지 않은 사회적 분위기였다. 이난향의 글은 흔치 않은, 기생이 직접 남긴 기생의 역사다. 조선왕조·대한제국의 몰락으로 궁중 나인과 관기가 내몰리면서 급격히 변화한 저잣거리의 풍속사이자, 독립투사부터 친일파까지 명월관을 드나들던 유력 인사들이 뒤얽힌 구한말 격동의 기록이기도 하다.
더중앙플러스는 ‘남기고 싶은 이야기- 명월관’의 디지털 에디션을 연재합니다. 이난향이 쓴 내용 중 팩트가 명확지 않아 후대에 입증되거나 반박된 부분, 여러 등장 인물과 사건에 대한 설명을 추가하고 재구성해 더욱 풍부한 스토리로 다듬었습니다.
제1화. 기생이 되자, 아버지는 일평생 외면했다
안개가 자욱이 낀 1913년 여름 이른 아침이었다. 나는 삼촌과 함께 어머니의 전송을 받으며 평양역에서 서울행 기차에 올랐다.
평양역 전경이 담긴 사진엽서. 국립민속박물관
어머님 말씀은 임금님 앞에서 춤과 노래를 보여드리는 진연(進宴)이 곧 열리며 이 진연에 내가 뽑혀 꼭 참석해야만 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진연이란 것이 무엇인지도 잘 몰랐다. 다만 처음 타 보는 기차와 차창에 비치는 낯선 고을에 눈이 서려 신기하고 즐겁기만 했을 뿐, 내가 지금 가는 길이 무한한 고비를 앞에 놓고 있다는 것은 과연 짐작도 못 했다.
그때 나이 겨우 열세 살이었다. 어린 탓으로 어른의 반밖에 안 되는 1원55전을 내고 기차를 탔다.
지금 생각해도 내가 어떻게 진연에 뽑히게 됐는지는 잘 모른다. 어머니는 나에게 끝내 내가 진연에 뽑히게 된 경위를 밝혀 주시지 않았다. 나는 그때 이미 평양 기적(妓籍·기생등록대장)에 올라 난향이란 기명을 갖고 있었다.
나는 평양에서 1남3녀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아주 어릴 때는 아버님이 좌수(座首·지방자치기구의 우두머리)였기 때문에 집안 살림이 넉넉했으나 아버님께서 물산 객주업을 하시다 실패함으로써 집안이 기울었고, 오빠와 언니들이 모두 결혼한 다음 어머님께서는 나를 의지해 살기 위해 열두 살인 나를 기생양성소라고 볼 수 있는 평양의 이름난 노래 서재에 보냈다. 이것이 내가 기생으로서 첫발을 디디게 된 동기였다. 이때 평양에서는 여염집에서 딸을 기생으로 만드는 것이 그렇게 큰 허물이 되지는 않았지만, 좋은 일이 아니었던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내가 노래 서재에 다니기 시작한 지 13일이 지났을 때였다. 동네 사람들의 입을 통해 내가 노래 서재에 나간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된 아버지와 오빠는 크게 노하시어 나를 불러다 꿇어 앉히고 야단이셨다. 그러나 이미 13일 동안이나마 기적(妓籍·기생등록대장)에 올라진 몸, 엎질러진 물을 다시 담을 수는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문에 발을 드리운 채 일평생 나를 면대해 주지 않으셨다.
청맹과니 여선생은 “경소용”이라 했다
기생양성소 사진 엽서. 오늘날 엔터테인먼트사의 아이돌 연습생 훈련 시스템의 뿌리격이다.
내가 노래 서재에 나가던 첫날 청맹관(靑盲觀·겉으론 멀쩡하나 보지 못하는 사람)인 여선생은 처음 보는 나의 손을 잡고 “경소용(亰所用)”이라고 알쏭달쏭한 말을 했다.
아마 그 말은 “서울에서 쓸모 있는 몸”이란 뜻으로 어렴풋이 짐작했지만, 그 후 나는 서울에 와서 풍파를 용케 이겨 말년을 가정에서 유복하게 지내게 되니 이 선생님의 말씀이 들어맞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때 평양에는 내가 다닌 노래 서재 외에 남자 선생이 가르치는 노래 서재도 한곳이 있었다. 두 곳 모두 배우는 여자아이들이 40∼50명 정도였다. 나는 이곳에서 1년 남짓 우조·계면·가사·시조 등을 배우다가 어머님 말씀에 따라 서울에 오게 된 것이다.
서울에 도착한 나는 인력거를 타고 청진동 어떤 큰집에 머무르게 되었다. 이곳에서 주산월, 명옥, 취홍 등 10여 명의 서도(西道·황해도와 평안도) 선배들을 만나 처음으로 고향 사람의 따듯함을 피부로 느끼게 됐다.
나이 많은 선배들은 손님이 부르면 돈벌이 나갔지만 제일 어렸던 나는 당분간 하루종일 노는 것이 일과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선배 기생을 만나러 온 고종의 외육촌이 된다는 조남승씨가 나타나 지나는 말로 “몇 살이냐?”고 나에게 물어왔다. 열세 살이라고 대답했더니 조씨는 버럭 화를 내면서 “정말 열세 살이면 혀를 꺼내 코에 붙여 보아라 닿지 못하면 거짓말한 죄를 묻겠다”고 호통을 쳤다. 코끝에 혀가 닿지 않는 것을 뻔히 알고 있는 내가 당황해하고 있을 때 주산월 선배가 “소나 말 같은 짐승이나 혀끝이 코에 닿지 사람의 혀가 어찌 코에 닿느냐”고 받아넘겨 처음 당한 서울 양반의 호통을 막아줬다.
친일파 송병준 집 연회에서 전깃불에 놀라고
며칠 후 우리 일행은 친일파로 이름난 송병준 백작 집을 향해 인력거를 타고 가다가 진고개 근방에서 갑자기 머리를 숙이라는 소리를 듣고 놀랐다. 얼떨결에 나는 처음으로 임금님의 행차가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송 백작 집 응접실에 점잖게 앉아 있던 우리는 송씨 집 하인이 벽에 붙은 단추 하나를 누르자 갑자기 환해지는 바람에 처음 보는 전깃불에 기겁을 했고, 같이 갔던 취홍은 의자에서 마룻바닥에 떨어지는 정도였다.
첫 연회석에 나가는 기분은 설레기만 했다. 나는 바른손을 왼쪽 겨드랑이에 대고 왼손을 땅에 짚고 앉으면서 “안녕합쇼” 하고 길게 문안 인사를 드리고 앉았다. 이날 송 백작 집 연석에서 나는 그동안 다듬은 노래와 춤을 보여줬고, 끝났을 때 송 백작이 수고했다면서 과자 상자를 주었다. 나는 송 백작에게 “고맙습니다”라고 했는데 주 선배는 “황송합니다”로 해야 한다고 일러줘 조그마한 실수를 기록했다.
진연 소식이 캄캄한 채 우리는 다동에 있는 큰 기와집(이 집도 송병준의 소유였다)에 옮겨 기생조합 권번 등에 소속하면서 정악전습소에 나가 노래와 춤을 배우기 시작했다.
정악전습소는 지금 중앙청 앞 정부종합청사 자리에 있었다. 그때에는 낮은 기와집들이 경복궁 앞에 즐비하게 늘어 있어 거리가 어둠침침했지만 나는 요즘 고층 건물로 밝아진 이 길을 걸을 때마다 파란 고비를 용케도 넘겼다고 회상해 보곤 한다.
그럭저럭 한 해를 넘겼을 때 진연이 곧 열린다는 소식이 다시 전해져 나는 봉상시에 나가 정자춤, 선유가 등 진연 준비에 열중했다. 이때 나라에서 화관 몽두리와 연두색 치마저고리 등 의복 일습을 우리에게 내려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이처럼 맹연습을 3개월 동안 했으나 진연으로 순종이 옛일을 다시 되새길 것을 두려워한 왜놈들의 반대로 중지되었다. 그런데….
등장인물
조남승(미상~1933) : 독립운동가. 부친이 흥선대원군의 둘째 사위 조정구다. 봉상사제조(奉常司提調)‧주전원경(主殿院卿) 등 고위 관직을 역임하며 고종을 가까이에서 보필했다. 고종이 내린 만국평화회의 밀지를 우당 이회영(1867~1932)에게 전달하는 등 항일세력과 소통하는 역할을 맡았다. 1926년 순종황제 사망 후 중국 북경으로 넘어가 독립운동을 하다가 1932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검거됐다. 일제의 주 감찰 대상으로 지정돼 감시를 받다 이듬해 사망했다.
송병준(1857~1925) : 일제강점기 일진회 총재, 중추원 고문 등을 역임한 관료이자 정치인. 기업가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 개화파 정치인에서 친일파로 변절해 한·일 강제병합에 적극 가담했다. 일제로부터 그 공로를 인정받아 자작 작위를 받고, 1920년 백작으로 승급한다. 중추원 고문, 『조선일보』·조선농업㈜·고려요업㈜ 사장 등을 지냈다. 이완용과 함께 친일파, 매국노의 수괴로 대표되는 인물. 일제 강점기 초기까지 권력을 앞세워 재산을 강탈해 많은 부를 축적한다. 여러 번 피습당하기도 했으나, 자택에서 뇌일혈로 갑자기 사망한다. 그가 죽자 일본 천황이 애도했고, 도쿄 야스쿠니신사에서도 성대한 추도식이 거행되었다고 한다.
주산월(1894~1982) : 기명은 산월, 본명은 주옥경(朱鈺卿)이다. 불우한 가정 형편 탓에 기생이 됐다. 열아홉 나이에 기생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조선권번의 전신인 다동기생조합을 만들었다. 그때 독립운동가이자 천도교 지도자인 의암 손병희(1861~1922)와 인연을 맺고 후에 부부가 된다. 결혼 4년여 만에 3·1운동이 일어난다.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 거사를 주도한 의암은 투옥중 뇌일혈로 반신불수가 됐고, 주옥경의 헌신적 간호에도 세상을 등졌다. 주옥경은 의암 사후 천도교 조직 내 흩어져 있던 여성단체를 통합해 여성운동에 뛰어들었다. 여성계몽운동과 의복개량사업, 미신타파 사업을 벌였다. 기생 조직을 활용해 정보를 캐내고 독립운동 자금을 대기도 했다. 그의 당호 ‘수의당(守義堂)’은 의암의 정신과 명예를 지키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1971년 천도교 최고의 예우직인 종법사로 추대된다.
에디터
이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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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P디렉터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3046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