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제가 걸어온 길이 은총이었습니다
주님,
돌아보니
제가 걸어온 길은
제가 선택한 길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제야 압니다.
제가 길을 만든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먼저 길을 내셨고
저는 그 길을
한 걸음씩 따라왔을 뿐이라는 것을.
젊은 날의 방황도
견디기 힘들었던 시간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눈물도
지나고 보니
모두 주님께서 저를
당신 곁으로 부르시던
조용한 목소리였습니다.
주님,
어릴 적
죽음의 문턱을 스쳐 지나던 순간에도
저를 놓지 않으셨고,
삶의 방향을 잃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던 순간에도
제 앞에 작은 빛 하나를 켜 주셨습니다.
저는 그것을
우연이라 불렀지만
지금 돌아보니
그것은 은총이었습니다.
제가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살려 주셨습니다.
제가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여기까지 데려오셨습니다.
주님,
어느 날
제게 가진 것을 내려놓으라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처음에는
제가 누군가를 돕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알았습니다.
제가 그들을 살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저를 살리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 많지 않은 그들의 눈빛 속에서
저는 복음을 보았고,
작은 미소 하나에서
주님의 얼굴을 보았으며,
함께 먹는 한 끼의 식탁에서
성체성사의 따뜻함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 집의 이름을
착한목자의 집이라 부르고 싶었습니다.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기꺼이 어깨에 메고 돌아오시는
주님의 마음을
그곳에서 조금이라도 닮고 싶었습니다.
주님,
저는 가진 것을
봉헌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보니
봉헌한 것은
돈만이 아니었습니다.
제 젊음이었고
제 시간이었고
제 삶이었습니다.
때로는
“왜 나만 이렇게 살아야 하나”
생각했던 날도 있었습니다.
힘이 빠지고
마음이 지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었던 날도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주님께서는
저에게 큰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그 한마디로
다시 하루를 살게 하셨습니다.
주님,
이제 제게도
황혼의 시간이 다가옵니다.
앞으로 남은 날이
얼마인지 저는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는
남은 날의 숫자보다
남은 날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하고 싶습니다.
더 많이 가지기보다
더 많이 감사하고,
더 많은 일을 하기보다
더 깊이 사랑하고,
사람들에게 인정받기보다
주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사람으로
살고 싶습니다.
그리고 주님,
가끔은
길을 떠나게 해주십시오.
낯선 나라의 작은 성당에서
조용히 기도하게 하시고,
바다가 보이는 길을 걸으며
주님의 창조하심을 바라보게 하시고,
작은 온천에 몸을 담그고
“참 좋다” 하며 웃게 하소서.
그 시간이
사명을 잊는 시간이 아니라
주님께서 제게 허락하신
쉼의 은총임을 알게 하소서.
평생 다른 이의 삶을 돌보았던 제가
이제는 제 영혼도 돌볼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소서.
주님,
언젠가
제가 이 세상의 마지막 길을 걸을 때
사람들이
제가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를
기억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다만
제가 한 사람에게라도
따뜻한 사람이었는지,
한 사람에게라도
희망을 주었는지,
그리고
주님께서 제게 맡기신 삶을
끝까지 충실히 살아냈는지를
주님께서 알아주시면 됩니다.
마지막 순간에는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으니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다시 주님께 돌려드리겠습니다.
돈도,
명예도,
수고도,
눈물도,
그리고
제가 가장 사랑했던 사람들도.
마지막에는
오직 하나만 남기겠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
제가 살아온 길이
때로는 십자가였지만
그 십자가 위에서도
주님은 저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제 십자가를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십자가 너머에
부활이 있음을 믿겠습니다.
오늘도
저의 작은 삶을
주님의 손에 봉헌합니다.
제가 더 이상
큰일을 하지 못하더라도
한 사람에게 웃어주고
한 사람의 손을 잡아주며
한 끼의 식사를 함께 나누고
한 번 더 기도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게 하소서.
주님,
저는 이제 압니다.
제가 사는 이유는
제가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께 받은 생명을
사랑으로 다시 봉헌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제 삶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길 때
이 한마디를
조용히 남기고 싶습니다.
“주님,
제가 잘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주님께서 이끌어 주시는 대로
한 걸음씩 걸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웃으시며 말씀해 주신다면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착하고 충실한 종아,
잘하였다.
이제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뻐하여라.”
그 말씀 하나면
제 삶은 충분합니다.
주님,
제가 걸어온 길이
은총이었습니다.
제가 만난 사람들이
은총이었습니다.
제가 흘린 눈물도
은총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다시 눈을 뜨고
살아 있는 이 하루가
가장 큰 은총입니다.
아멘.
— 안태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