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제가 되어서는 안 됐던 황제
송나라는 문운(文運)이 극성한 나라였다. 건국 이래 문인정치를 표방하여 우수한 학자, 문인들이 대량 배출되어 한학(漢學)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송학(宋學)을 형성하게 된다. 이렇게 된 배경에는 송나라의 건국 과정을 간과할 수 없다.
당나라가 망하고 오대십국(五代十國) 50여년의 혼란기를 수습하던 후주(後周)의 명군 세종이 갑자기 사망하자 황제의 자리는 7세 아들에게 넘어갔다.
이틈을 타 주변 국가들이 공격하려 한다는 소식에 후주의 정예부대인 금군(禁軍)이 출전하게 됐다. 그러자 어린 임금을 불안히 여기던 장병들은 전공이 뛰어나고 인망이 두터운 조광윤(趙匡胤)을 받들어 제위에 올렸다. 그가 바로 송나라 태조이다.
그러나 조광윤 입장에서는 이렇게 황제를 추대할 수 있는 막강한 군부가 경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으므로 지방에서 할거하던 군사 조직인 번진을 축소하고, 중앙에 정예병을 집중하려 했다.
번진은 실질적으로 독립된 권력을 행사하며 세습되었고, 그 결과 중앙의 통제를 받지 않아 정치 혼란의 원인이 됐기 때문이었다.
태조 이후 황제들도 충실히 이 정책을 따르면서 번진들은 문신으로 수장이 교체되었다. 결과적으로 군이 사유화되거나 지방 군벌화 되는 경향은 자취를 감추었다.
다만 지자(智者)의 천려일실(千慮一失)이랄까. 한 가지 폐해를 고치려다 조금이라도 지나치면 반드시 그 반작용이 나타나는 것이 세상 이치인가 보다.
예상치 못했던 여러 폐단이 생겨났다. 그 중 하나가 각 분야에서 문신 우위 현상이 지나치게 되어, 군사 방면에는 무능, 무지한 문신들이 전략을 결정하게 된 것이다. 역사가들은 이를 송나라가 잦은 외침에 시달리게 된 주요 원인으로 꼽는다.
게다가 매년 문과를 보는 사람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문관의 높은 봉급과 여러 우대조치는 막대한 재원을 필요로 하였기에 다시 군사력 약화를 초래하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이런 군사력의 약화가 부른 대참사가 1127년의 '정강의 변(靖康之變)'이다.
금나라의 공격으로 수도 개봉이 함락되고 휘종(徽宗), 흠종(欽宗) 두 황제와 황후, 태자 등 3,000여 명이 포로가 되어 금나라로 끌려간 사건이다. 중국 역사에 없던 한족(漢族)의 치욕이었다.
이 참극을 만든 장본인이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는 자가 휘종 조길(趙佶)이다. 그의 황제로서의 무능을 기술한다면 지면이 모자랄 정도이다.
탐관오리와 수탈당하는 백성, 도적과 민란이 일상이던 '수호전(水滸傳)'의 배경이 바로 휘종의 시대이다. '수호전'의 주지는 '관핍민반(官逼民反)'으로, 즉 '관리가 횡포가 심하면 백성은 반발한다'인데, 겉은 화려한데 속은 곪은 것이 휘종 시대의 암울한 사회상이었다.
신기하게도 휘종은 정치력을 제외한 다른 모든 것이 뛰어났다. 시서화(詩書畵)는 기본이고 음악, 조경까지 못하는 분야가 없었다. 지금도 전해지는 그의 글씨나 그림을 보면 황제가 취미 생활로 한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는다. 이와 관련된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어느 날 원나라 황제가 휘종의 그림을 구경하며 감탄하였다. 그러자 옆에 있던 신하가 말한다. "휘종은 다재다능한 사람이었지만 한 가지 일만은 무능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대답하였다. "임금 노릇만 못했습니다(獨不能爲君). 임금이 임금 노릇을 잘해야지 다른 일을 잘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人君貴能爲君, 它非所尙也)."
금나라로 끌려간 휘종은 혼덕공(昏德公)으로 불리는 치욕을 당하며 노역에 시달리다 객사한다. 정강의 변 이후, 송나라는 지금의 항저우로 수도를 옮긴다. 그후 송나라는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다 결국 1279년 원나라의 침략에 망한다.
외침에 시달렸지만 송나라는 최고의 경제 번영을 이루었다. 화폐 사용이 정착되었고, 공업과 상업 또한 번영하여 각지에 대도시가 출현했고, 불야성을 이루었다고 했다. 북송의 수도 개봉의 영화를 회고한 '동경몽화록'과 시민생활을 그린 '청명상하도'는 지금 보아도 대단하다.
그러나 도시의 번영과 달리 농민들의 삶은 처참하였다. 황제의 기호를 만족시키는 비용, 늘어나는 관리들에 대한 급여 지출, 끊임없는 외침을 막는 데 드는 군비 및 패전에 따른 배상 등, 그 모든 부담은 민중들의 몫이었다.
후세의 역사가는 이렇게 개탄하였다. "관리들에게는 나라의 은혜가 넘쳐났으나 백성에게는 남김없이 뜯어냈다. 이것이 송나라를 본받아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설상가상, 문인 우대 정책 때문에 지식인들은 넘쳐났다. 그들은 저마다 무리를 짓더니 우리는 군자당이네 저들은 소인당이네 다투며 소일하였다. 그러나 모두 외적 앞에서는 쩔쩔 맸으니, 백면서생들이 입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다.
송사(宋史)는 당시를 이렇게 압축했다. "민궁(民窮) 병약(兵弱) 재궤(財匱) 사대부무치(士大夫無恥)." 요새말로 풀면 이런 뜻이다. "국민은 곤궁, 군대는 약체, 경제는 바닥, 지도층은 뻔뻔."
우리가 사는 지금 시대는 어떤 말로 기록하게 될까?
⏹ 宋史 卷一 本紀第一 太祖一
조광윤(趙匡胤, 927 ~ 976)은 낙양(洛陽) 협마영(夾馬營) 사람으로 자는 원랑(元朗)이고, 아이 때 이름은 향해아(香孩兒), 조구중(趙九重)이다.
송(宋)나라의 개국황제(開國皇帝)로 송태조(宋太祖)로 불린다. 조상의 본적은 탁군(涿郡)이고, 부친은 조홍은(趙弘殷)이며, 모친은 두씨(杜氏)이다.
○ 진교 회군으로 새 왕조를 세우다
907년, 당나라의 절도사 주전충은 기울어질 대로 기울어진 당왕조를 무너뜨리고 후량(後梁)을 세웠다.
그러나 그의 왕조는 겨우 17년 만에 후당(後唐)으로 교체되었고, 다시 후당은 14년 만에 후진(後晋)으로, 후진은 11년 만에 후한(後漢)으로, 후한은 불과 4년 만에 후주(後周)로 바뀌었다.
모두가 지방행정권과 군권을 가진 절도사가 힘을 얻자마자 창을 거꾸로 잡고 제위를 찬탈하는 식이었다.
이렇게 다섯 왕조가 뻔질나게 교체되었으나 이들은 사실 화북 일대를 대략 장악했을 뿐, 변방에서는 오(吳), 오월(吳越), 민(閩), 초(楚), 형남(荊南), 남당(南唐), 남한(南漢), 북한(北漢), 전촉(前蜀), 후촉(後蜀)의 10개 소왕국들이 잇달아 나타났다 사라지고 있었다. 이 시대를 '오대십국' 시대라고 한다.
한편 북방에서는 거란족이 요나라라는 이름으로 강력한 왕조를 세우고, 후진의 고조에게서 만리장성 이남의 연운 16주를 빼앗는 등 중국을 위협하고 있었다. 실로 위진남북조 시대 이후 3백여 년 만에 찾아온 중국의 분열기요 혼란기였다.
조광윤은 927년, 후당의 수도 낙양에서 근위장교 조홍은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3백여 년 전 위진남북조의 분열을 해결했던 수문제 양견의 경우 태어날 때부터 유력한 가문이었으나, 가난한 군인의 아들인 조광윤은 집안 덕을 거의 보지 못하고 21세 때 집을 나와 천하를 떠돌아 다녔다.
그러다가 곽위라는 절도사의 부하가 되었는데, 곽위는 950년에 후한을 무너뜨리고 후주의 태조가 되었다. 이때부터 조광윤의 출세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2년 뒤 근위대장의 신분으로 수도 개봉에서 근무하다가 태자 시영(柴榮)의 눈에 들어 그의 친구이자 오른팔이 된다. 그리고 시영이 954년에 즉위하면서(후주 세종) 가장 유력한 장군으로 떠오른다.
조광윤은 북한과 후주가 고평에서 충돌했을 때 죽을 위기에 처한 세종을 구하고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명성을 날렸으며, 그 뒤에도 다섯 번 전쟁에 나가 모두 승리를 거둠으로써 마침내 절도사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이 지긋지긋한 난세를 내 손으로 끝장내겠다"며 천하통일의 뜻을 품고 영토를 넓혔으며, 내정에도 충실하여 민생과 재정을 안정시켰던 '오대십국 최고의 명군' 세종이 그만 959년의 거란 원정길에 병사하고 만다.
황제의 자리는 졸지에 일곱 살에 불과했던 시종훈(공제)에게 돌아갔다. 어린 황제와 강력한 절도사. 오대십국 시대의 정변 조건은 완벽하게 갖춰졌다.
마침내 960년, 거란군의 침공을 물리치기 위해 출정했던 조광윤은 '진교의 변'을 만난다. 개봉 북쪽의 진교역에서 머물다가 술에 취해 잠든 그에게 부하 장수들이 억지로 황제의 옷을 입히고는 황제로 추대했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후대의 역사학자들은 조광윤이 계획적으로 쿠데타를 해 놓고 꾸며낸 이야기일 것이라고 여기는 수가 많다. 하지만 거란군의 침공은 분명히 있었으며, 당시 그가 출정하면서 인질이 될 수 있는 가족들에게 아무런 대비도 없이 출정했다는 점 등을 들어 실제로 얼떨결에 황제가 된 것이리라고 보기도 한다.
아무튼 조광윤의 군대는 진교에서 회군하여 황궁을 점령했다. 그리고 공제의 양위를 받아 황제에 즉위하고, 국호를 송이라고 했다. 스무 살 때만 해도 당장 어떻게 하루를 살아갈지 기약이 없던 그가 3백 년 송왕조의 태조가 된 것이다.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나라의 근심을 없애다 뜻밖에 전 황제가 죽고 어린 황제가 즉위하는 행운을 맞이한 것도, 그 기회를 활용해 역성혁명을 벌인 것도 수문제나 송태조나 똑같았다.
하지만 송태조는 즉위 후 자신에게 제위를 넘겨준 어린 황제를 비롯한 전 왕조의 황족을 살육했던 수문제와 달리, 시종훈과 그 친인척들을 정중히 대접했다.
또한 한고조나 명태조 같은 창업황제들과 달리, 자신을 황제로 이끌어 준 공신들을 '토사구팽' 시키지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했다고도 할 수 있지만, 적어도 그 과정에 피비린내는 전혀 없었다.
황제가 된 몇 달 후, 송태조는 진교에서 자신을 황제로 받든 석수신, 왕심기, 고희덕, 장령탁, 조언휘 5대 공신을 불러 술자리를 가졌다.
그리고 거나하게 취했을 무렵 이렇게 말을 꺼냈다. "경들이 없었더라면 어찌 지금 짐이 이 자리에 있었겠소? 진심으로 감사하오.
(…)
하지만 한편으로 불안하기 짝이 없소. 물론 짐은 경들을 전적으로 믿지만, 경들 중 누군가의 부하들이 언젠가 딴 마음을 먹고 술 취한 주군에게 황제의 옷을 입힐지 알 수 없지 않소?"
그런 말을 듣고 "그것도 그렇군요"라고 말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다섯 공신은 혼비백산하며 그 자리에 엎드릴 수밖에 없었다.
송태조는 그들에게 계속 술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아, 인생이란 무엇이오? 절벽 틈을 달리는 말처럼 순식간에 지나가는 것을. 모두들 하나같이 부귀를 원하지만, 얼마 안 되는 삶을 편안히 살다가 후손에게 물려주는 것, 그것뿐인데, 그나마 지키기 힘드니 말이오.
(…)
그러니 경들은 각자의 병권과 지위를 포기하고 고향으로 내려가면 어떻겠소? 그러면 여생은 아무 염려 없이 평안할 수 있을 것이오."
또한 송태조는공신들의 자녀와 자신의 자녀를 혼인시켜 서로 딴 마음을 먹지 않도록 하자고 권했다. 결국 석수신 등은 황제의 뜻에 따라 모든 직위에서 물러나 지방으로 내려갔다.
이 일을 두고 "술잔을 들면서 공신들의 병권을 없앴다"고 하여 '배주석병권(杯酒釋兵權)'이라 하는데, 오대십국 내내 정권을 불안케 했던 절도사들의 병권을 술자리 한 번으로 해결해 버렸다는 말이라, 곧이 듣기 힘들기도 하다.
하지만 당시 다섯 명의 공신 중에는 한신이나 조광윤처럼 두드러지는 인물이 없었다는 점, 그리고 당시 오대십국의 혼란에 지긋지긋해 하던 민심 등을 고려하면 아주 어이없는 이야기도 아니다.
송태조는 절도사들에게서 독자적 군지휘권, 행정권, 재정권 등을 순차적으로 빼앗아서 그들의 독자세력화를 막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을 중앙에서 파견되었다가 일정한 임기를 마치면 교체되는 문관 출신으로 교체하여, 지방의 반란 가능성에 쐐기를 박았다.
그뿐이 아니었다. 오대십국 때에는 고려 무신정권 시대처럼 유력한 문무 귀족들이 모여 국정을 좌우하는 추밀원이 정치의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송태조는 이 추밀원에서 무관과 대귀족을 배제하고는 종래의 재상부를 강화했다. 이로써 군사 문제는 황제 직속의 비서관들이 추밀원에서 담당하고, 그 외의 국정은 재상부에서 담당함으로써, 무관들은 권력을 직접 행사할 수 없게 되며 문관이라도 재상부의 범위를 넘어 군사지휘권까지 손에 쥘 수 없게 되었다. 그만큼 황제의 권력이 강화된 것이다.
왕권을 튼튼히 하는 한편, 통일 사업에도 열을 올렸다. 963년에 형남을, 965년에 후촉을, 971년에 남한을 멸망시켜 송나라의 영역을 넓혔다.
이들 소왕국들은 방만하고 부패한 정치운영으로 질서가 무너진 상태였기에 병합이 쉬웠다. 다만 오월 지역을 뺀 강남 일대를 차지하고 있던 남당은 간단치가 않았는데,오월과 남당을 이간질하여 서로 싸우게 한 뒤 모두멸망시켰다(975년).
당시 남당의 후주(後主) 이욱은 서현을 사신으로 보내 "우리는 후주(後周) 시대부터 대국을 섬겨 신하의 도리를 다해왔다. 무슨 명분으로 우리를 공격하느냐?"고 물었는데,
송태조는 화를 내며 "천하는 하나의 집이다! 그대는 자기 집안에서 남이 코를 골며 자고 있다면 참을 수 있느냐?"고 외쳤다고 한다.
이로써 오대십국의 잔재는 남쪽의 오월과 북쪽의 북한만이 남았는데, 이는 송태조의 사후인 978년과 979년에 각각 병합되었다. 한편 최대의 안보 불안 요인인 북방의 거란에 대해서는 무력으로 맞서기보다 많은 공물을 주면서 회유하는 식으로 대응했다.
○ 사대부의 제국, 그 빛과 그림자
송태조는 괄괄한 무인 출신답게 곧잘 버럭 성을 내기도 했는데, 곧바로 자신이 지나쳤다고 반성하며 잘못을 바로 잡았다고 한다.
또한 옷 한 벌을 빨고 또 빨아가며 입고, 생일 같은 잔칫날에도 일반 가정 수준으로 상을 차리게 하는 등 죽을 때까지 검소함을 실천했다. 그래서 바야흐로 사회의 주축으로 떠오르고 있던 사대부 들에게도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더구나 송태조는 이들 사대부를 적극적으로 조정에 받아들이는 정책을 취했다. 바로 과거 제도의 강화였다. 황제가 직접 시험 문제를 내고 합격자를 뽑는 전시(殿試) 제도를 처음 도입하고, 과거의 규모와 횟수를 크게 늘려 여기서 뽑은 관리들을 종래 세습 귀족들이 차지하고 있던 관직에 충원했다.
또한 태묘 안에 '맹서비'를 세워 두 가지 유훈을 후손에게 남겼다. 하나는 "후주의 시씨 자손들을 죽이지 말고 우대하라"였고, 또 하나는 "사대부와 상소를 올린 사람을 죽이지 마라. 아무리 불쾌한 말을 하더라도 죽여서는 안 된다"였다. "이를 어긴 자는 천벌을 받으리라"는 경고도 덧붙였다.
이로써 송나라는 중국 사상 최초의 '사대부의 나라'가 됐으며, 당시 사대부의 위상은 뒤를 이은 원, 명, 청에서 보다도 훨씬 높았다.
송태조는 생전에 비빈이나 자녀 문제를 둘러싼 잡음을 남기지 않았으나, 사후에는 약간의 의문이 남았다.
976년, 그가 갑작스레 50세로 숨을 거두자 송황후는 자신의 아들인 진강혜왕 조덕방에게 제위를 물려주려고 급히 입궐하라 했다. 그러나 정작 나타난 것은 송태조의 동생인 조광의(趙光義)였다.
그는 놀란 황후에게 이른바 송태조의 비밀 유언이라는 것을 내밀었는데, 거기에는 동생 조광의를 차기 황제로 삼는다는 내용이 있었다.
이를 재상 조보를 비롯한 대신들도 추인함으로써 조광의가 2대 황제, 송태종으로 즉위했다. 이를 두고 과연 그런 비밀 유언이 있었을까, 조광의의 조작이 아닐까, 아니 송태조의 죽음 자체가 조광의의 음모의 결과가 아닐까 하는 추측들이 있다.
한편 당시 송태조의 세 번째 황후로서 권력욕이 강했던 송황후를 배제하기 위해 송태조가 결단을 내린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이런 쑥덕공론이 일고 있음을 모를리 없던 송태종은 형의 문치주의 정책을 더욱 강화시켜 사대부를 우대하고 무신들을 억눌렀다.
이는 빛과 어둠을 함께 남겼다. 역대 최고의 문치주의 결과 소식, 구양수, 황정견, 매요신 등 천재 문인들이 나타나고, 왕안석, 사마광 같은 대정치가 겸 문필가도 나왔다.
또한 범중엄, 장재, 주돈이와 남송 시대의 주희, 정이, 정호, 육구연 같은 사상가들이 나와 성리학이라는 새로운 유학을 창시하기도 했다.
과학기술도 발달해서 심괄 같은 '르네상스적 천재'가 활약하는가 하면 '중국의 4대 발명'이라는 종이, 나침반, 화약, 인쇄술 중 종이를 제외한 세 가지가 송나라 때 확립되었다. 행정체제 개선과 농업기술 발달에 힘입어 경제적 풍요 또한 이루어졌다.
이후 원나라가 남송을 멸망시킬 때, 쿠빌라이의 조정에서 지내던 마르코 폴로는 "내가 본 세상의 어떤 나라도, 그 절반만한 부를 지닌 나라가 없었다"고 감탄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지나치게 문을 앞세우고 무를 억누르는 정책은 만성적인 국방 불안과 정치 갈등을 가져왔다.
요나라(거란)의 위세에 송나라는 제대로 대응할 힘이 없었으며, 결국 1004년에는 '전연의 맹약'을 맺어 요에게 사실상 굴복하고서 평화를 허락 받았다.
하지만 얼마 뒤에는 다시 여진족의 금나라가 일어나면서 화북 지방을 빼앗기고 남송이 되었으며(1127년), 북벌의 꿈도 헛되이 다시 원나라에게 유린된다(1279년). 중국의 통일왕조 치고 송나라만큼 이민족의 침입에 무력했던 왕조는 없다.
또한 온 천하 사람이 사대부 되기를 바라고, 사대부는 과거 급제를 바라고, 급제자는 고위직을 바라다 보니 시험 지옥과 당리당략에 따른 당쟁을 면하지 못했다.
송태조는 오랜 분열과 혼란을 극복하고 통일왕조를 세운다는 사명을 수문제와 같이 훌륭히 완수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거의 피를 흘리지 않았고, 백성을 위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새로운 문명의 기반을 이룩한 점은 수문제보다 훌륭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지나치게 피 흘리기를 회피하는 자는, 언젠가 크게 피를 흘리게 될 위험이 있다.
⏹ 중국 역사에서 싸움 실력이 가장 좋았던 황제
중국 역사의 황제 중 누가 가장 잘 싸웠냐고 한다면 사람들의 머리속엔 여러 명의 후보자들이 떠오를 것입니다.
중국인의 치우(蚩尤)와 싸워서 이긴 황제(黄帝), 무예(牧野)의 전투에서 천하를 가진 주무왕, 여섯 나라를 제패한 진시황, 흉노를 제패한 한무제, 술잔으로 병권을 가져온 송태조 등등 입니다.
중국의 역사에서 잘 싸우는 황제는 많았지만, 개인 전투력으로 봤을 때 가장 잘 싸우는 황제는 누구였을까요?
개인의 전투력만 따지고 본다면 후보들의 범위가 확 줄어듭니다.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황제는 직업군인 출신인 송태조 조광윤입니다.
조광윤은 군대에 들어가기 전부터 강한 무예를 선보였었습니다.
송사(宋史) 태조본기(太祖本纪)의 기재에 따르면, 조광윤은 맨손으로 성질이 사나운 말을 다뤘었는데, 한번은 말을 다루다가 실수하여 말이 성벽의 가파로운 곳으로 달려갔습니다.
말에 타고 있던 조광윤은 성벽에 머리를 크게 부딪혔는데 그 장면을 목격했던 사람들은 조광윤이 틀림없이 죽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조광윤은 아무런 일이 없듯이 먼지를 털고 일어나 다시 말을 다스렸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물론, 머리가 단단하다는 이야기 하나만으로 싸움을 잘한다는 판단 기준이 될 수 없지요. 조광윤의 무력치는 그가 군대에 들어가서 전장을 전전할 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현덕 원년(기원 954년), 주세종이 즉위하고 나서 조광윤에게 금군을 거느리게 하였습니다. 그해, 북한과 갈단의 연합군은 침략을 해왔고 주세종이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쌍방이 택주 고평에서 전장을 배열했습니다.
전쟁이 시작되자 영강군 절도사 번애능(樊爱能) 등은 먼저 도망쳤고 후주의 군대는 상당히 위험한 상황에 처했습니다.
생사존망의 관건적인 시각에 조광윤과 금군대장 장역덕은 사수들을 거느리고 왼쪽에 있는 고지를 선점했습니다. 두 사람은 각각 정예군 2천 여명을 거느리고 좌우로 협공하여 목숨을 걸고 싸워 결국 북한 군대를 물리치게 됩니다.
현덕 3년(기원 956년) 봄, 조광윤은 주세종과 함께 회남을 토벌하러 갔습니다. 남당 봉화군 절도사 황포휘(皇甫晖), 상주 단련사 요봉(姚凤)은 15만 권대를 이끌고 청류관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조광윤은 군대를 거느리고 이들을 다 물리쳤습니다.
조광윤은 잔여 군대들을 쫓아 성 아래까지 갔고 막다른 골목에 이르자 황포휘는 진을 치고 결승을 하자고 청했습니다.
이에 조광윤을 승낙했고, 황포휘가 진지를 치고 있는 가운데로 조광윤이 말을 타고 들어가 황포휘의 머리를 땄습니다. 후에 요봉까지 잡으면서 '백만 대군 사이에서 수뇌를 잡는' 풍채를 보여줬습니다.
수년간의 전쟁을 거쳐 조광윤은 혁혁한 공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전기적인 경력도 남겼습니다. 백가지 권법의 어머니라 불리는 '태조장권(太祖长拳)'은 조광윤이 발명했다는 소문도 있지요. 권법도 만들었으니 그의 무공실력이 어느정도인지 가늠을 해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고, 역사상 황제 중에 조광윤보다 더 싸움을 잘 하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는 바로 남조 송나라(刘宋)의 개국황제 송무제 유유(刘裕)입니다. 신기질의 시에서도 유유에 대한 언급을 한적이 있었는데 그의 기세가 호랑이와 같았다고 표현했습니다.
'자치통감'에도 유유가 압도적인 싸움에 참여한 이야기를 기재했습니다. 진안제 융안 3년(기원 399년)에 손은이 회계(会稽)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진나라(晋)에 반란을 일으킬 때, 동남 8군이 함께 호응하면서 조정은 많이 놀랐습니다.
진나라 조정은 급히 호위장군 사담(谢琰), 전선장군 유뇌지(刘牢之)를 보내어 진압하게 하였는데, 이때 유유는 유뇌지의 밑에서 참군을 했습니다.
유뇌지가 군대를 거느리고 오나라 지역에 도착한 후, 유유에게 명하면서 수십명을 거느리고 반란군의 동정을 살피라고 했습니다. 정찰을 하는 도중에 유유는 수천명의 반란군을 만났고, 유유 일행은 수천명의 포위공격을 당했습니다.
그때 유유와 함께 있었던 병사들은 다 살해당했고 유유도 강변의 낭떨이지에 떨어졌는데요, 반란군들이 강변에 와서 내려갈 준비를 하자 유유는 용감하게 대도를 휘두르며 정면에서달려드는 병사 수명을 베어 버리면서 다시 강변으로 올라왔습니다. 유유는 강변에 올라온 후 도망가지 않고 여전히 굉음을내지르며 적을 무찔렀습니다.
오래동안 정찰을 간 유유가 돌아오지 않자, 유뇌지는 이상하게 생각하여 병사를 거느리고 유유를 찾으러 갔다가 말도 안되는 광경을 목격하게 됩니다.
유유는 혼자서 수천명의 반란군 병사들을 쫓고 있었으며 병사들은 정신이 없이 이리저리 도망쳤다고 합니다. 이 광경에 놀란 동진의 부대는 정신을 차리고 적을 무찔렀고 그 전역에서 죽이거나 포로한 반군만 일 천여명이었다고 합니다.
이는 유유가 휘황찬란한 군사생애의 서두에 불과합니다. 그 후의 수십년의 전투에서 그는 거의 전국을 돌아다니며 싸우면서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5대 10국 시대에 많은 정권이 수립됐고 황제도 많았습니다. 그때 유유 한명이 4명의 황제를 죽이고 3개의 나라를 멸망시켰습니다.
혼자서 천명의 병사와 싸우고 '각월진(却月阵)'을 세워 2000명의 전차병으로 위나라의 3만명의 기마병을 물리쳤으며 두번이나 북벌하여 낙양, 장안을 수복했습니다.
싸울줄도 알고 모략도 잘 세웠으니 유유는 '황제킬러'라고 평가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중국의 역사상에서 가장 잘 싸우는 황제는 조광윤이 아닌 유유라고 보면 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