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조(여행가. 르네상스 여행사 대표
모습을 드러낸 대암굴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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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대신전 전경 |
요한나 루드비히 부르크하르트(Johanna Ludwig Burkhardt 1786∼1817)는 요르단에서 우연히 고대 유적지 페트라(Petra)를 발견한 후 본래의 임무였던 아프리카
내륙지방 탐사를 위하여 곧바로 출발했다. 부르크하르트는 이집트에 도착하여 나일 강 탐사를 위해 배를 구하는 등 필요한 준비를 하였다. 준비가 완료되자 그는
상류를 향하여 출발했다. 나일 강은 남쪽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흐르는 강이기
때문에 부르크하르트는 옛 이집트의 수도였던 룩소르(Luxor), 테베(Thebe)를 거쳐
아스완(Aswan)에 도착했다.
아스완은 옛날부터 아프리카 대륙 전체에서 가장 큰 시장이었다. 이곳에서 다양한
종류의 생산물이 교환되었고, 다양한 인종들이 서로 얽혀 살고 있었다. 금을 비롯한 지하자원뿐만 아니라 자단, 흑단, 마호가니 등 고급 목재와 상아, 심지어 노예까지 구매가 가능한 곳이었다. 이렇듯 아스완은 각지의 산물이 집산하는 물류센터로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나일 강은 우간다 지역에서 흐르는 백(白) 나일과 에티오피아 지역에서 흐르는 청(靑) 나일이 북쪽으로 흘러 내려가다가 카르툼(Khartoum)에서 서로 만나 3천여㎞를 흘러 지중해로 들어가는 세계 최장(6,671㎞)의 강이다. 이 아스완에서 남쪽
300㎞ 지점에 아부 심벨(Abu Simbel : ‘라 신의 우주적 조화는 힘차도다’라는
의미)도 역시 옛날에는 각종 목재와 광석의 산지로 번성하였던 곳이었지만 부르크하르트가 발굴에 나섰던 1813년 훨씬 이전부터 사하라 사막의 모래가 날아와 이
지역은 인적이 끊어진 사막에 불과했다.
나일 강변의 깎아지른 듯한 바위산에는 자체의 중력을 이기지 못해 쌓인 모래가
흘러 내려서 람세스 2세(RamsesⅡ)의 4구의 동상 조각 중 일부가 노출되어 있었다. 당시는 비록 샹폴리옹(Jean Francois Champollion : 1790∼1831)이 이집트 상형문자를 완전히 해독하지 않은 때였지만 여러 가지 상황으로 비추어 볼 때 람세스 2세의 대암굴신전임을 알게 된 부르크하르트는 이를 스케치하여 카이로로 돌아갔다. 그는 이것을 유럽의 일간지에 발표함으로 페트라에 이어 다시 고고학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부르크하르트는 마치 모래에 덮힌 거대한 4구의 조각상 윗부분만 보았고, 이것을 글과 스케치로써 유럽 유명 일간지에 소개했을 뿐이었다.
그 후 1817년 8월 1일, 이탈리아 고고학자 지오반니 벨조니(Giovanni Battista
Belzoni : 1778~1823)에 의해 입구가 발견되고, 이에 따라 신전 내부가 있다는 것을 확실히 밝혔다. 투탄카멘의 무덤을 발굴한 영국의 고고학자 카터는 벨조니를
“이집트학의 전체 역사상 가장 뛰어난 사람 중의 하나”라고 극찬을 했는데, 벨조니는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고고학 공부를 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이탈리아
파도바에서 태어나 성직에 들어갈 공부를 했다. 그러나 임명받기 직전 정치적 음모에 말려들어 감옥에 들어갈 수 밖에 없자 영국으로 줄행랑을 쳤다. 벨조니는 이곳에서 고고학과 관계가 없는 온갖 궂은 일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다. 벨조니는
우연히 주 이집트 영국 영사 쏠트에게 소개가 되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이집트에서 닥치는 대로 골동품 수집을 했다. 처음에는 쏠트 영사를 위해, 다음에는 자신을
위해 그는 무엇이든 수집했다.
이 시기가 이집트 유물이 마구 약탈당하던 때였다. 마침 미국에서 캘리포니아 금광열기가 일어났던 것처럼 골동품을 무차별하게 수집했다. 고고학적으로 골동품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도 없이 파괴가 우선되는 그런 상황이 이집트 전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던 때였다. 벨조니도 예외가 아니어서 이러한 방법으로 기제의 두 번째 피라밋 체프렌 무덤을 파 들어갔고, 원시적 방법으로 마구잡이식 발굴을 했다.
아부 심벨의 람세스 2세의 석굴은 모래가 바람에 날려와 쌓였던 것이었기 때문에
너무나 쉽게 모래를 걷어낼 수 있었다. 모래가 치워지자 드러난 신전내부의 벽화나 조각품은 잘 보존되어 있었다. 벨조니의 뒤를 이어 고고학자, 역사학자 등이 줄을 이었다.
천문학까지 동원한 과학적 건축물
아부 심벨의 람세스 2세의 대암굴신전(The Great Cave Temple of RamsesⅡ,
Abusimbel : B.C. 130)은 람세스 2세의 아버지 세티 1세가 이곳에 암굴신전을 건축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운명하자 아들인 람세스 2세가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건설했다. 이 신전은 왕권 과시의 상징물로 건설된 대표적 건축물인데, 이것이 일체식 구조의 암굴형식을 선택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이 지역 일대는 홍색의 사석(砂石)으로 이루어져 있어 평지에 신전을 건축할 경우 아스완의 채석장까지 석재운반 도로 개설 및 이에 따른 노예 확보가 쉽지 않았고, 채석장과 공사장과의 긴밀한 연락이 어려웠으며, 이와 연계한 근로자의 주택 건설 및 식량 확보 등의
문제가 무척 어려웠다. 또한 학자들은 나일 강의 범람시기를 맞춰 수량이 많을 때
강을 이용하여 수송을 하려면 1년 중 공사할 시기가 3~4개월밖에 되지 않으므로
공기(工期)가 한없이 늘어날 염려도 있었기 때문에 일체식구조의 암굴형식을 채택하지 않았나 하고 일반적으로 추측하고 있다.
신전은 정면에다 거석자상(巨石自像) 4구를 산 절벽을 깎아 만든 후 그 뒷부분 암석절벽을 마스타바(Mastaba : 탁묘(卓墓))처럼 70도 경사지도록 비스듬이 깎아내어 탑문형태를 만든 후, 중앙출입문, 다주실(多柱室), 성물 보관실, 성소의 순서로
파들어 가면서 완성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람세스 2세의 거석자상의 규모는 탑문의 높이와 폭이 33m×38m의 배경으로 높이 19m요, 얼굴만의 크기는 무려 4.7m나 되는 거상이다. 이 모습은 람세스 2세가
공식 석상에 나설 때의 정장한 차림으로서, 보좌에 앉아 두 손을 무릎 위에다 얹은
자세다. 2중 왕관은 상·하 이집트의 통치자임을 나타내었고, 가발 턱수염은 왕의
위엄성을 상징한 것이다. 4구의 거석자상 사이에는 부인 네페르타리(Nefertari)의
입상을 배치하였고, 좌대는 누비아 정복 때 잡은 포로행렬을 음각으로 처리하여
정복자로서의 면모를 부각시켰다.
입구를 따라 들어가면 처음 나오는 방이 가장 중요한 다주실(多柱室)로서 17m×18m 넓이에 높이 10m의 방이 나타난다. 4개의 기둥이 2줄로 늘어서 있고, 그 기둥에는 일일이 이시스 신상이 조각되어 있다. 오른쪽 벽에는 람세스 2세가 가장
자랑으로 여기는 카데쉬 전투장면을 승리로 이끄는 톤으로 새겨져 있다.
이 방을 지나면, 중소실이 나타나는데 중소실은 넓이가 13m×13m이고 가운데 4개의 기둥에는 람세스 2세 자신의 상을 조각해 놓았다. 이것은 다주실의 이시스신과 중소실의 람세스 2세를 동일시한 것으로 신권과 왕권이 동격임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맨 안쪽에는 성소실(聖所室)이 있는데 입구에서 60m 안쪽에 건설했다. 성소 안에는 오른쪽에 겝(Geb : 대지의 신) 신상, 람세스 2세상, 암몬 신상, 프타(Putah : 암흑의 신) 신상을 새겨놓았다. 이 성소의 상들은 암흑의 신 프타를 제외하고 3신상은 2월 21일과 10월 19일 전후에 햇빛이 이곳까지 비취게 하였고, 특히 람세스 2세의 상에는 10월 21일과 22일 양일간 햇빛이 더 비취도록 설계한 것이 특징이다.
10월 22일은 람세스 2세가 취임한 날이며 이날 태양의 해뜨는 방위와 람세스 2세의 상과 일치하는 천문학을 건축에 도입한 케이스에 해당된다.
람세스 2세의 대암굴신전은 람세스 2세의 왕권과 개성을 투영하였으며, 건축과 천문학을 접합시킨 위대한 건축물이다.
아스완 하이 댐 건설로 수몰 위기
‘이집트는 나일 강의 선물’이라는 그리스의 역사학자 헤로도터스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나일 강은 이집트의 생명수로서 이집트의 경제와 문화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쳐 왔다.
군사혁명으로 집권한 낫셀(Nassel : 1958∼1970) 대통령은 나일 강에 댐건설을 계획했다. 나일 강에 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강 중류에 아시우드 댐(1902), 영국이
건설하여 준 아스완 댐(1934) 등이 있었다. 이 가운데 아스완 댐은 원래 밑폭 47m,
높이 41.5m, 댐 길이 2,000m의 대규모로 건설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건설되면 필라에 섬의 이시스 신전, 하토르 신전 등이 물에 잠기게 되어 세계 각국의 반대로 높이 41.5m를 30.5m로 줄여서 총 저수량 50억㎥의 댐을 건설함으로
필라에 섬의 신전들이 보존될 수 있었다.
낫셀 대통령은 미·소 냉전체제의 국제정치의 흐름을 이용하여 비동맹주의로 일관하였다. 이집트의 국익을 위하여 소련에 붙었다가 미국에 붙었다가 하면서 교묘히 비동맹국가를 리드해 나갔다. 이때 낫셀 대통령은 아스완 댐 남쪽 7㎞ 상류에
아스완 하이 댐(Aswan High Dam) 건설계획을 발표하여 미·소에 협조를 요청하였다. 당시 낫셀 대통령이 이끄는 비동맹 국가의 협조가 절실히 필요한 소련에서
선뜻 기술과 차관 제공을 제의해 왔다.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인 쿠푸왕의 피라미드보다 17배나 큰 댐 건설이 발표되었다. 밑폭 130m, 높이 110m, 길이 4,000m, 저수량 1,800억㎥의 인공 ‘낫셀
호(湖)’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것이 완공되면 약 7만㎞의 대지가 관계농토로 변하고 100억㎾/h의 전기에다 경제적인 이익은 35%나 증가하는 엄청난 국익이 제공되는 셈이었다.
그러나 호사다마라 할까, 이 아스완 하이 댐이 완공되고 저수량 1,800억㎥의 물이
차게 되면 낫셀 호의 길이 500㎞, 폭 30㎞가 물에 잠기게 되고 따라서 람세스 2세의 대암굴신전과 그 부인 네페르타리 신전이 물에 잠기게 되었다. 이에 낫셀 대통령은 이것마저도 소련에서 원조해 주기를 바랐지만, 너무나 엄청난 재원이 들므로
소련은 거절했다. 낫셀은 세계은행의 차관으로 신전을 보존하려고 하였으나 미국이 주도하고 있는 세계은행에서 또한 거절하였다.
마지막으로 낫셀 대통령은 1959년 4월에 유네스코에 호소하였고, 유네스코는 조사단을 동년 10월에 파견하였다. 현지 조사단은 “지구상의 가장 위대한 역사적
건축 예술이 소멸될 위기에 놓여 있다. 이것은 어느 한 국가의 문화재가 아니다.
이 지구상의 모든 인류의 문화재이므로 모든 인류가 이것을 보호하고 간직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세계가 함께 한 문화유산 구제 프로젝트
모든 국가들이 공감을 표시하고 경제적인 원조를 하기 시작했다. 문화국가를 자처하는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이 전 공사비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1천 2백만 달러라는 거금을 성금으로 내놓자 세계 각국의 지도자들이 뒤따라 성금을 내놓았다.
우리나라도 이 때 1천 달러를 성금으로 내놓음으로써 이 계획에 참가하였다.
이 구제 계획을 전세계에 공모하였다. 기발한 아이디어가 많았지만 현실성과 경제성의 결여로 모두 탈락하고 2개의 안이 최종적으로 남게 되었다.
첫째 프랑스의 안은 대암굴신전을 유리로 제방을 쌓아 보존하고 관람객은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여 물속으로 들어가서 물속 유리를 통해서 신전을 들여다 보는 계획이었고, 두번째의 이탈리아 안은 대암굴신전과 소암굴신전(람세스 부인 네페르타리의 신전)을 작게 잘라서 하이 댐 수위보다 높은 곳에 이전, 재조립하는 것이었다. 1961년 6월의 최종 심의에서는 이탈리아의 안이 채택되었다.
이탈리아의 안에 따르면 람세스 2세의 신전과 그 부인 네페르타리 신전의 총중량은 11,600톤이 되는데 개당 최대 무게를 300톤으로 하고 크레인의 최대 인장력을
이용하려고 하였다. 람세스 2세 신전의 석괴는 580개, 네페르타리 신전은 180개의 석괴를 당시 위치보다 높이 170m, 200m 뒤로 이동시켜 인공절벽을 만들어 설치하기로 하였다. 이 공사는 1963년 11월에 착공하여 1968년 4월에 완공했다. 약
5년에 걸쳐 공사를 마무리했다.
지금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원래 위치에서 옮겨진 것이다. 신전 뒤쪽으로
가보면 콘크리트 구조물이 받치고 있지만 신전 내부는 예전의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고 있다. 이집트에서는 이때 공사장면을 비디오에 담아 보여주고 있다. 람세스
2세의 거구자상을 톱으로 잘라 일정한 크기의 석괴로 만들어 크레인으로 뒷편에
운반하였고, 톱으로 자를 때 생긴 톱가루를 최대한 모아서 이것을 다시 접합시킬
때 재사용하였다. 따라서 옮겨진 대신전과 소신전을 가까이서 보더라도 원래의 모습과 한 점의 차이도 없을 정도로 감쪽같이 옮겨 놓았다. 그 기술적인 완벽성은 찬탄을 금치 못하게 한다.
특히 현재 위치로 옮겨진 람세스 2세의 대신전은 예전에 비해 위치가 70m 더 높아지고, 200m 뒤로 바뀌었지만, 신전 제일 안쪽에 위치한 성소의 람세스상에 태양이 10월 21일과 22일에 비추도록 한 점은 동일하다. 또한 태양의 일출범위와 람세스 2세의 상이 일치하도록 한 점 또한 원래의 것과 동일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