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모르는 게 나았다. 이름이 꽤 알려진 미국식 레스토랑에서 선배 한 분과 모처럼의 저녁을 보내고 나서였다. 한식집으로 향하던
길이었으나 마침 간판이 눈에 띄기에 방향을 틀어 들어간 곳이었다. 앉은 자리에서 식사와 차까지 들며 밀렸던 이야기를 나누기에 더 좋을 것
같았다. 레스토랑의 손님들은 대부분 젊은 층이었다. 우리도 짐짓 젊은이가 된 듯 분위기도, 음식도, 그래서 선배와의 대화도 더욱 즐거웠다. 아들
생각이 나기에 한번 데려와야지 싶었다.
다음 날 아들의 의사를 타진해 봤다. “니들이 많이 찾는 레스토랑을 갔는데 괜찮더라.
언제 함께 가자.” 그랬더니 대뜸 묻는 것이었다. “할인은 하고 드셨어요?” “무슨 할인? 계산은 다른 분이 했지만, 할인 해당 사항은 없어
뵈던데?” 아들이 씨익 웃으며 잘라 말했다.
“호갱 되셨네요.” ‘호갱’이라니? 아들 말인즉슨 호구와 고객을 합한 말로 ‘객’은
“고객님”을 되풀이하다 보면 ㄱ이 ㅇ으로 굴려지면서 ‘갱’으로 들려 호갱이란다. 호구란 어수룩하여 이용하기 좋은 사람을 일컫는 말이고 보면
호갱은 봉에 다름 아니잖은가.
‘제값 다 주고 거길 이용하는 애들은 없다’는 것이었다. 갖가지 할인을 절묘하게 조합하면 그
레스토랑 음식을 절반 가격에 먹을 수 있다는 얘기였다. 적립 포인트를 비롯해 사용하는 카드사별, 통신사별, 요일별, 시간대별 할인은
기본이다.
트위터니 페이스북 같은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를 통한 전자상거래인 소셜 커머스 사이트에서 저렴하게 매입한
이용권도 빼놓을 수 없다. 이런 ‘무기’로 가격을 내리칠 만반의 준비를 하지 않은 채 지나다가 기분 내켜 들려서는 안 되는 곳이었던가
보다.
어쩐지 젊은이들이 많다고 했다. 할인 무기에 대한 정보가 빠른 젊은이들만 제값을 찾아 먹는 곳에서 선배와 나는 졸지에
호갱이 된 것이었다. 그것도 아들에게 들었으니 알았지만 안 들으니 만 못했다. 소셜 커머스에서 맥도널드의 빅맥 1+1 행사를 했을 때가 떠오른
까닭이었다.
아들이 핸드폰에 쿠폰을 다운 받아줬기에 동네 맥도널드 점을 찾았다. 한 개 가격에 두 개를 사는 줄에 끼어있는데 어떤
노인이 제값 다 주고 한 개를 사 가는 게 아닌가. 다들 그분을 쳐다보았다. 레스토랑에서 우리는 바로 그 노인이 되었던 것이다.
딴에는 영리하게 소비활동을 하고 있다고 여겨 온 터였다. 마트에서는 포인트 적립을 했다가 써먹었고, 피자나 빵 가게에서는 통신사
카드를 내밀어 10~20% 싸게 샀다. 인터넷의 오픈마켓에서 물건을 구입할 때는 할인쿠폰도 곧잘 활용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최고의 할인율,
최저가, 한정판매 등을 내건 소위 ‘낚시’를 제대로 피할 도리는 없었다.
이것저것 세심하게 비교분석을 하며 교묘한 상술을
간파하기에는 순발력도 떨어지거니와 머리부터 아파오니 어쩌랴. 나이를 먹으면서 주름만 늘어나는 줄 알았더니 그렇게 지갑이 열려버리는 때도 늘어나고
있었다.
척 보면 알아?
그래도 오픈마켓은 가격비교 사이트도 있으니 나은 편인지
모른다. 정찰제를 시행하지 않는 대형 시장에서는 머리뿐 아니라 심신이 피곤해지기 일쑤다. 사람에 따라 값을 달리 부르고, 깎아주는 정도도
다를뿐더러 기 싸움까지 하지 않고서야 어디 제대로 깎을 수나 있던가.
그렇다고 뒤돌아서는 것도 쉽지 않아서 ‘강단’과
‘배짱’이야말로 큰 장에 갈 때 지갑과 더불어 또 다른 필수 무기임을 절감하곤 한다. 그럼에도 척 보면 호갱인지 아닌지 알아채는 상인들이 많다니
여차하면 그 손바닥 위에 놓이지나 않을까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젊을 때는 온·오프로 손품과 발품을 팔면서 이런 긴장을 즐기고,
돈을 썼으면서도 오히려 번듯한 뿌듯함을 만끽할 수 있다. 그러나 나이 들수록 웬만하면 긴장은 피하고 싶어지는 데다 손해 보지 않으려고 기를 쓰는
게 피곤하고 기력도 달린다. 그러면서도 ‘혹시 봉이 된 게 아닌가?’ 의심스러울 때가 있기는 하다.
이번처럼 봉이 됐다 싶으면
다시는 그곳을 찾고자 하지 않게 된다. 맥도널드 점에서의 그 노인이 생각나면서 나이에 대한 자격지심일까, 나이 차별을 당한 듯한 기분마저 드니
말이다. 무엇보다 제값도 찾지 못하는 바보가 되는 것 같아서다.
슈퍼프로급
상술
그런데 아들의 말로는 ‘호갱에 남녀노소가 따로 없다’니 그나마 위로가 된다고나 할까. 특히 핸드폰 판매에서
그렇다고 한다. 노인들이 핸드폰 기기 가격이나 요금제에 바가지를 쓰는 경우가 비일비재한 건 말할 것도 없지만, 젊은이들도 예외가
아니란다.
아들이 스마트폰에서 ‘호갱 인증’을 찾아 그 실례들을 보여줬다. “나 이렇게 호갱 됐어요.”하는 사연들과
“그러네요.”하는 식의 댓글들이 줄을 잇고 있었다. “아니, 호갱된 게 뭐 자랑이라고 이렇게 올린다니?” 내 질문에 아들의 대답은 의외였다.
“이왕 그렇게 된거 재미죠, 뭐.”
그래도 당했다는 기분을 느낀 이들의 속은 쓰릴 것이다. 언젠가 ‘팔리지 않아도 되는 물건’이란
글을 본 기억이 난다. 그 물건은 명품점에 진열된 1억 원 가까운 가방이었던 것 같다. 옆에 놓인 4~5백만 원짜리 가방을 아주 싸게 보이도록
하면서 잘 팔려나가게 하는 판촉공신이기도 했다.
동네 마트에서도 그렇다. 수박 1통에 1만 원인데, 반으로 잘라 놓은 것은 7천
원쯤이라면 한 통짜리 판매에 속도가 붙기 마련이다. 이렇듯 갖가지 슈퍼프로급 상술에 알게 모르게 넘어간다 할지라도 호갱만은 되지 말았으면 하는
건 나만의 바람일까.
며칠 전 ‘국민가격’이란 걸 내세운 레스토랑에 가보게 됐다. 할인의 여지를 없애 메뉴판의 가격이 비교적
저렴했고, 호갱 걱정을 덜어 좋았다. 그렇지만 자주 이용하게끔 코를 꿰는 또 다른 상술이 걸쳐져 있었다. 3천 원 안팎의 커피며 음료를 1년간
무료 제공받는 카드를 1만 원에 신청하란 권유가 그랬다.
차후 현금처럼 쓸 수 있는 5천 원 쿠폰을 바로 주니 5천 원만 드는
셈이라나. 몰라서 호갱이 되는 것보단 나을 듯해 카드를 만들었다. ‘이제 할인 신경 쓸 것 없이 마음 편히 즐거운 시간을 갖자고 해야지.’
선배에게 청하려는 순간 깨달았다. 호갱은 아니더라도 나는 이미 그 레스토랑의 ‘호객’에 걸려들었음을….
첫댓글 ..
감사합니다.^~^
누구나 호갱이 되기가 쉽겠군요.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모르면 약이고 알면 신경쓰이는 호갱이네요.
이 불안감.. 나이드는 것도 서러운데,
대접은 못 받아도 호갱은 되고 싶지 않으네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