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부자절 봉은사에
금년 겨울은 유난히 춥다. 일요일이 되어도 방에서 웅크리고 지내느라 절집 답사는 포기하고 있다. 겨울날씨라도 웬만하면 옷을 두텁게 걸치고 나설 수 있는데, 지금 추위는 지나치다. 노인이니 조심하는 게 좋을게다.
서울의 아들네가 자기 집에 들리라는 초대가 왔다. 아들네 집에 들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 서울에 가는 날도 몹시 추웠다. 날씨가 너무 추워서 기차가 연발착을 한다는 안내 방송이다. 아들네 집에서 봉은사가 멀지 않으므로, 이번 서울 길에는 봉은사나 다녀오자고 마음 먹었다. 봉은사는 우리나라 절 중에 제일 부자절이라고 하였다. 이전부터 다녀오고 싶은 절이었는데, 아직까지 가지를 못했다.
이날 아침은 금년 겨울 들어 제일 추운 날씨라고 방송했으나. 아들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다녀오기로 했다. 옷을 여러 겹 걸쳤다. 그저께 내린 눈이 녹지 않아서 길가의 담벼락 아래에는 흰눈이 남아 있다. 이상하게도 아들네 집의 부근인데도, 서울길에는 절에 가는 시간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저께 내린 눈이 절의 경내에는 녹지 않아서 여기저기가 흰색이다.
대구에서 멀리 떨어진 절을 찾아왔다는 기분에 젖어 추위 따위는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깨끗이 빗질을 해 둔 길이지만 군데군데에 흔적으로 남은 눈이 얼어서 번들거린다. 나는 미끄러지지 않으려 조심하여 발을 옮겼다. 아내와 집 밖을 나설 때 늘상 하는 말이 ‘노인은 넘어지면 약도 없다 하더라.’이다. 넘어지지 않으려 조심조심 하면서 경내를 돌아 다녔다.
절의 안내판을 들여다 보고는 ‘역시 ---’하면서 감탄했다. 시주를 안내하는 글이었다. 상량에는 3억을, 18개의 대들보에는 2억을, 그리고 기둥에는 1억씩 시주금을 받는다는 안내문이었다.
예전에 신문에 났던 일이 생각난다. 불교의 본산은 조계사이다. 봉은사를 조계사가 직영으로 관리하겠다고 했고, 봉은사는 강력히 반발한다는 내용이었다. 서로가 이런저런 이유를 갖다대지만 진짜 이유는 돈 이리라 하였다. 시주 금액을 안내하는 글을 보니 그런 생각이 더 굳어진다.
이 절도 창건은 신라 원성왕 때 견성사(見性寺)를 창건한 것이 뿌리라고 하였다. 더 이상의 설명이 멊으니 여뉘 절처럼 창건 년대를 뻥 튀기기 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조선 시대의 역사와 어우려져서 전해오는 이야기가 많다.
본래는 이 절이 지금의 정릉 곁에 있었다. 성종의 왕비인 정현왕후가 연산군 4년에 봉은사를 지금의 靖陵(정릉)자리로 옮겼다. 중종 25년인 1530년에 정현왕후가 죽자, 그를 모시는 신정릉이 들어서자 견성사는 절 이름을 봉은사로 바꾸고 선릉의 원찰이 되었다. 원찰이 됨으로 불교 탄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로서 봉은사는 광릉의 원찰인 봉선사. 태조의 원찰인 양주 화암사와 더불어 조선 왕실의 3대 원찰이 되었다. 그러나 나라가 숭유억불 정책을 지속하고 있었으므로 그냥 원찰이었을 뿐, 사찰의 교세가 확장한 것은 아니었다.
어린 명종이 12세에 왕위에 올랐다. 모후인 문정황후가 수렴청정했다. 독실한 불교신자인 문정황후는 불교 중흥 정책을 펴면서 도첩제를 부활하여 과거시험에 승과를 두어, 3년마다 치루도록 했다. 보우를 봉은사 주지로 임명하고 조선 불교의 종장으로서 조선 불교를 관장하도록 했다.
1560년에는 문정왕후는 왕명을 빌려서 선종과 교종을 통합하였다. 보우가 주지인 봉은사는 조선 불교의 근본 도량이 되었다. 성리학 이념으로 무장한 성균관 유생들이 이에 저항하여 수업을 거부하고, 불교를 성토하는 상소문을 올리는 등 시끌시끌 했다.
1565년에 문정황후가 죽으면서, 불교계에는 또다시 거센 회오리가 일었다. 불교중흥 정책도 막을 내렸다. 유생들이 벌떼처럼 일어나서 보우를 제주도로 유배보냈다. 제주 목사 변협은 유배온 보우를 형틀에 묶어 장살하였다. 불교는 다시 천대받는 옛날로 되돌아 가서 도루묵 신세가 되었다.
봉은사의 이야기에서 뻴 수 없는 왕실의 이야기를 조금 더 하자.
문정왕후는 인종의 둘째 비이다. 첫째 비는 인종의 친모인 장경왕후이다. 중종은 장경왕후와 같은 묘역에 묻혀 있었다. 문정왕후는 장경왕후를 중종과 떼어놓고 자신이 중종의 곁에 묻히고 싶어서, 중종을 이장했다. 이장한 중종의 능묘는 지대가 낮아서 비만 오면 물길에 잠겼다. 묘터를 잘못 잡은 것이다. 중종을 이장한 장소가 옛 봉은사 터였고, 봉은사는 지금의 자리로 자리를 옮겼던 것이다. 봉은사의 자리가 오늘에는 강남의 한 가운데로서, 땅 값을 계산할 수 없을 만큼 부자절이 되었다. 중종 릉의 이장에 제일 덕을 본 자는 봉은사 절이니, 세상살이라는 것은 이래서 공평하다고 하는지 모르겠다.
중종의 능묘 자리가 좋은 터가 아니라고 말이 많던 때에 문정왕후가 죽자 태릉의 선수촌 인근인 태릉에 문정왕후를 모셨다. 그래서 왕과 두 왕후는 따로 따로 묻혀 있다.
임진왜란 때는 왜군이 성종의 능묘와 중종의 능묘를 파헤쳐버렸다. 겨우 왕의 의복만 수습하여 왕릉을 새로 만들었다고 한다.
왜란이 끝나고, 조선 정부는 일본의 막부에 능묘를 파헤친 범인을 보내라고 강력하게 요구했다. 일본은 대마도 종주를 범인이라면서, 조선으로 보내 처형받게 했다. 사실은 대마도 종주는 범인이 아니라고 한다. 힘이 없으니 억울한 죽음을 당하면서, 엉뚱한 역사를 만들어 낸 것이다. 힘이 없으면------.
봉은사를 들린 김에 역사도 들춰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