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도감 / 안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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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씨 한 알 묻었다
나는 대지의 곳간을 열기 위해
가까스로 땅에 열쇠를 꽂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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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유 가지에 새가 앉았다가
골똘히 무슨 생각 하더니 날아간다
꽃 이름을 몰라서 갸웃거렸을까
새야,
다음에 올 때는 식물도감 들고 오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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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죽은 친구야,
벚나무 아래 놀던 사진 속에서는 빠져나가지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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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두가 초록으로 넘어가기 전에,
연두의 눈에 푸르게 불이 들어오기 전에,
연두가 연두일 때,
연두가 연두였다는 것을 잊어버리기 전에,
모과꽃이 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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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박꽃 열리기 세 시간 전쯤의
꽃봉오리 주워 와서
빈 참이슬 병에 꽂아두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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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국(山水菊) 헛꽃 들여다보면
누군가 남기고 싶지 않은 발자국 남겨 놓은 거 같아서
발소리 가벼워질 때까지 가는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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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가 도랑 풀숲에 처박힌 트럭 바퀴 하나
물봉선이 귀를 대고
엿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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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으로 감고 오르는지
오른쪽으로 감고 오르는지
다투다가 능소화는 폭염을 맞닥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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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꽃이 지고 나서
꽃자리 동그랗게 배가 부풀어 오르고 있다
요놈들 첫날밤을 다들 잘 보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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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누대 잎사귀는 빗방울 튕겨내는 솜씨가 다들 달라서
어스름이면 그리하여 잎사귀 아래로 다스리는 어둠의 농도도 제각각 달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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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기 위해
끈질기게 붙어 있다
강아지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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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디 깎다가
방아깨비 두어 마리 허리도 잘랐다
그러고도 나 저녁밥 잘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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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암사 뒷산 단풍 나 혼자 못 보겠다
당신도 여기 와서 같이 죽자
[출처] 안도현 시인 14|작성자 동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