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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7월 16일 연중 제15주일
제1독서 : 이사 55,10-11
제2독서 : 로마 8,18-23
복 음 : 마태 13,1-23
1 그날 예수님께서는 집에서 나와 호숫가에 앉으셨다.
2 그러자 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예수님께서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군중은 물가에 그대로 서 있었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비유로 말씀해 주셨다.
“자,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4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
5 어떤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6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
7 또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
8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9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10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왜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1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12 사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13 내가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14 이렇게 하여 이사야의 예언이 저 사람들에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15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내가 그들을 고쳐 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16 그러나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고자 갈망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듣고자 갈망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18 그러니 너희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새겨들어라.
19 누구든지 하늘 나라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
길에 뿌려진 씨는 바로 그러한 사람이다.
20 돌밭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21 그러나 그 사람 안에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그는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
22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
23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신학교 입학을 하자마자 본당의 보좌신부님께서는
“이제 신학생이 되었으니 본당 행사도 함께 해야지. 이번에 중고등부 캠프에 가도록 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아직 입학도 하지 않았지만, 신학생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강원도의 설악산에 갔습니다.
솔직히 난생 처음 겨울 산에 간 것입니다.
어떤 장비를 갖춰야 하는지도 몰랐기 때문에, 그냥 편한 청바지에 평상시에 신던 운동화를 차림으로 설악산에 갔습니다.
이렇게 힘든 시간은 처음 경험하는 것 같았습니다.
운동화가 이렇게 미끄러운 신발인지 처음 알았고, 청바지는 산을 오르는데 많은 불편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더군다나 산은 왜 이렇게 험한지 혹시라도 미끄러져서 사고가 나지 않을까 싶더군요.
힘들었지만 합격 통지서를 받았으니 이제 신학생이라고 하는데, 차마 힘들다는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도대체 정상이 어디야? 다시 내려올 산을 꼭 올라가야 하나?
아이들도 힘들어 하는 것 같은데 그냥 내려오면 안 되나?’
이런 생각을 멈추지 않고 계속했었지요.
그리고 산 정상에 오를 때 즈음에는 입에서 단내가 풍길 정도로 완전히 지치고 말았습니다.
드디어 산 정상에 올랐지만, 힘들어서 무엇을 볼 힘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어서 빨리 내려가서 푹 쉬었으면 하는 마음뿐이었지요.
등반을 모두 마치고 다시 산 아래 저희의 숙소에 도착했습니다.
바로 그때 신부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산이 정말 아름답지 않니?”
산을 오르는 순간부터 다시 숙소로 돌아올 때까지 한 번도 산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힘들다, 짜증난다, 두렵다’ 등의 마음만 간직했지, 여기에 어떤 긍정적인 생각을 했던 적이 없었습니다.
신부님의 말씀을 듣고서 다시 생각해보니 정말로 아름다운 경관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 아름다운 경관에 취해서 기쁘고 행복한 시간을 갖는 사람이 있는 반면,
아름다운 경관을 전혀 보지 못하고 부정적인 생각으로 힘들다고만 외쳤던 저 같은 사람도 있다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말씀을 해주십니다. 뿌려진 씨는 최고의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이 씨가 어떤 곳에 뿌려지느냐는 것입니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가 당연히 훨씬 더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그 모든 것은 당연히 최고의 씨입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마음은 좋은 땅일까요? 아니면 나쁜 땅일까요?
많은 열매를 맺을까요? 아니면 아무런 결실도 맺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하느님께서 좋은 것을 주시지 않는다고 불평 불만할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내 마음을 옥토로 만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 마음의 밭에서 많은 열매를 거두어들일 수 있습니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시인 정호승은 ‘꽃씨’라는 글에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한 아이가 엄마에게 물었습니다. 꽃은 어디에서 태어났어요?
엄마가 대답합니다. 꽃씨에서 태어났단다.
꽃씨를 잘라본 아이가 이야기 합니다. 여기에는 꽃이 없는데요?
엄마가 대답합니다. 꽃씨 안에 꽃은 분명 있단다.
그러나 바람, 햇살, 비, 구름이 도와주어야 한단다.
아이는 엄마의 말을 이해했습니다.
가족들의 사랑을 받고, 책을 읽고, 음식을 먹으면서 자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씨 뿌리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여기에는 3가지의 주제가 있습니다. 씨 뿌리는 사람, 씨, 토양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씨를 이야기하는 사람은 능력과 재능을 강조할 것 같습니다.
건강한 사람, 예술적인 감각이 있는 사람, 말을 잘 하는 사람, 외모가 준수한 사람,
장애가 있는 사람, 지적인 능력이 부족한 사람, 유전적인 문제가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변을 보면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토양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환경을 이야기할 것 같습니다.
가난한 집에 태어난 사람, 화목한 가정에 태어난 사람, 부유한 집에 태어난 사람,
부모가 늘 다투는 집에 태어난 사람, 가풍이 있는 집에 태어난 사람,
태어나면서 고아가 된 사람이 있습니다. 환경에 따라서 삶의 방향이 바뀌기도 합니다.
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씨 뿌리는 사람’입니다.
씨를 뿌리는 사람이 없다면 씨는 싹이 나지 못할 것입니다.
씨를 뿌리는 사람이 없다면 좋은 환경에서도 열매를 맺을 수 없을 것입니다.
씨 뿌리는 사람이 일부러 나쁜 토양에 씨를 뿌릴 이유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좋은 결실을 맺기 어렵고,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도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말을 할 때는 좋은 말을 해야 합니다.
사람을 살리고, 이해하고, 사랑하는 말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우리는 나쁜 마음으로, 상처를 주는 말을 하곤 합니다.
씨 뿌리는 사람은 좋은 결실을 기대하기 때문에 씨를 뿌릴 것입니다.
땅 속에 묻혀서 보이지 않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어둠 속에서 싹이 트고, 바람이 불며, 비가 내릴 것입니다.
적당한 햇빛이 씨앗을 자라게 하리라 믿습니다.
그러기에 씨 뿌리는 사람은 인내를 가지고, 수양을 쌓으며 희망으로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비록 지금 당장은 희망이 보이지 않더라도, 어려움과 시련이 있더라도 우리 믿음의 씨를 뿌려야 합니다.
어려움 때문에 포기하고 씨를 뿌리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면 결코 열매를 맺을 수 없을 것입니다.
씨 뿌리는 사람은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감기약을 파는 사람이 감기에 걸려서 기침을 심하게 하면 그 약을 사려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강론을 하는 사제는 본인이 하는 강론을 삶으로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신자들은 사제의 강론을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변을 보면 말은 그럴싸하지만 삶은 전혀 다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의 위선과 허영을 나무라셨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면 확신이 있어야 할 것이고,
우리가 걸어가는 발자취에 그리스도의 향기가 느껴져야 할 것입니다.
씨는 하느님의 말씀이고, 우리들의 말과 행동입니다.
그것이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우리가 좋은 토양이 되어야 합니다.
‘적선지가필유여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면서 세상의 유혹에 흔들린다면,
시련과 고통 앞에 무릎을 꿇는다면 우리가 전한 말씀이 열매 맺기 힘들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늘 기도하고, 확신에 차서 성실하게 살아간다면
비록 척박한 토양이라도 하느님께서는 열매를 맺어 주실 것입니다.
순교의 시대에도 교회는 찬란한 꽃을 피웠습니다.
그러나 풍요로운 시대에도 교회는 활력을 잃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못했고,
열매를 맺지 못하기도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토양이 아닙니다.
그 토양을 만들어가는 사람의 마음과 결심입니다.
사목의 장소와 조건을 따지는 것은 토양을 먼저 생각하려는 것이고,
이것은 세상 사람들의 기준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내가 말씀으로 무장하면 아프리카에서도, 먼 남미에서도 복음의 씨앗은 꽃이 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형제 여러분 장차 우리에게 계시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다 함께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우리의 몸이 속량되기를 기다리며 속으로 탄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눈에 보이는 땅이 가물고, 채소가 병이 들면 양수기를 가지고 물을 대기도 하고,
약을 치기도 하고, 우리들의 정성을 다 기울여 농작물을 키우고 많은 소출을 얻도록 노력을 기울입니다.
지금 우리 마음의 밭은 어떤지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내 마음에 기도의 거름은 충분히 주고 있는지,
내 마음에 이웃에 대한 사랑과 배려의 열매는 잘 자라고 있는지,
지금 내 마음에 하느님 은총의 비가 촉촉이 내리는지
아니면 욕심과 이기심의 비가 시기와 질투의 바람과 함께 내리고 있는지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마태 13. 3)
한상우 바오로 신부
농부에게는 씨앗이 있습니다.
농부의 간절한 기도로
씨앗은 뿌려집니다.
가장 낮은 곳에
씨앗은 뿌려집니다.
농부는 결코
씨앗을 소외시키지 않습니다.
씨앗의 일생이
시작된 것입니다.
씨앗이 깨어나게 된 것입니다.
씨앗은 자신의 뿌리가
들어갈 곳을 찾아야합니다.
씨앗의 고유한
몫이기 때문입니다.
씨앗을 사랑하는
농부의 마음을
기억하는
씨앗의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또한
농부의 마음과 마주하는 시간이
되길 기도드립니다.
그냥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농민들의 정성과
노력의 열매들입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노고의 댓가로
정당한 혜택이
수고한 농민들에게
돌아가길 기도드립니다.
씨앗과 농부는 서로를 향합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우리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의 결론처럼 마지막 구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 13,8-9)
분명, 나에게도 말씀의 씨앗이 뿌려졌을 터인데, 지금 나에는 몇 배의 열매가 맺혀 있는가?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의 열매를 맺고 있는가?
아니면, 혹 마이너스 서른 배, 마이너스 예순 배, 마이너스 백배는 아닌가?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 13,9)
그렇습니다.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사실, 내가 몇 배의 열매를 맺고 있는가? 라는 질문은 내가 좋은 땅인가 아닌가를 묻는 질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실 씨앗이 떨어질 때 좋은 땅 이었는가 아니었는가 보다도 씨앗이 뿌려지면,
그 땅은 그 씨앗으로 말미암아 좋아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땅은 씨앗과 함께 일구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나는 씨앗이 뿌려진 땅을 얼마나 일구고 있는가? 라는 질문인 것입니다.
곧 말씀으로 나 자신의 밭과 세상의 밭을 얼마나 일구고 있는가? 라는 물음입니다.
그렇습니다. 좋은 땅의 사람은 땅을 지배하지 않고, 뿌려진 씨앗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밭에서 일할 줄 알며 하늘을 쳐다보고, 함께 땅의 노래를 부르는 사람입니다.
땅을 윽박지르지 않고 갈라놓거나 파헤치지 않으며, 땅을 매만지며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바로 씨앗을 품은 농심입니다.
곧 뿌려진 씨와 함께 열매를 맺어야 하는 소명을 짊어진 사람일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마음 안에 그분의 사랑, 그 씨앗이 뿌려졌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어느 누구에게도 사랑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여쭈었습니다.
“왜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까?”(마태 13,10)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셨습니다.
“너희에게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마태 13,11)
만약, 이 말씀대로라면 하느님께서 저들에게는 하늘나라를 주시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정말 그런 것일까요?
그런데, 먼저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먼저, “하늘나라”가 신비라는 사실입니다.
곧 “하늘나라”는 인간 스스로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열어 보여주시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나라라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이를 믿고 받아들이는 이들에게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에게는 그 신비가 허락되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하늘나라의 신비가 허락되지 않은 것은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하늘나라의 은혜를 베풀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들이 그 은혜를 거역한 까닭일 것입니다.
곧 그들이 하느님의 은혜에 응답하지 않은 까닭일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태 13,12)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똑같이 하늘나라를 가르쳐 주셨고, 똑같이 기적을 보여주셨지만,
그들이 하늘나라의 선물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차별대우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받아들이는 자는 더 받아들여 넉넉하게 되고,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겨버리는 결과를 낳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마태 13,13)
분명, 그들에게 먼저 보여주고 들려주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보여주는 것을 보았고, 들려주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했음은
그들의 눈과 귀와 마음이 어둠에 가려져 있었기 때문이라 할 것입니다.
곧 당신이 초래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어둠이 초래한 결과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 구절도 참으로 이상합니다.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내가 그들을 고쳐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마태 13,15; 이사 6,10)
사실, 예수님께서 메시아로 오셨지만,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분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은 그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인간의 논리로는 풀 수 없는 수수께끼였을 것입니다.
이 문장을 주의 깊게 보면, 주어가 “그들”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그들을 고쳐주시기를 원하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자신들이 그렇게 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그들이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고침을 받게 되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가 자신들의 눈을 감고 귀를 닫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를 <요한복음> 사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요한 1,5)
이는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빛을 비추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 눈을 감고서 빛이신 진리 보기를 거부하고,
알아들으려 하지 않은 그들의 완고한 마음 때문에 깨닫지 못하였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는 복음을 들으면서, 이처럼 ‘완고한 마음’이
얼마나 처참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지를 알아들어야 합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를 받아들인 제자들에게는 행복을 선언하십니다.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마태13,16)
이는 ‘하늘나라가 이미 왔다’는 것을 듣고 받아들이며,
이미 온 ‘하늘나라’를 믿음으로 볼 수 있으니, 행복하다는 말씀입니다.
이들이 바로 백 배, 예순 배의 열매를 맺는 이들인 것입니다. 아멘.
'씨'의 역할
전삼용 요셉 신부
개그콘서트에서 ‘나쁜 사람’이란 코너가 인기를 끌었었습니다.
우리는 이 ‘나쁜 사람’이 결국 도둑이 아니고 그를 취조하는 형사들이
더 나쁜 사람들이 되어가는 것을 보며 재밌어합니다.
그러나 우리 마지막 날에도 이와 똑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과연 웃을 수 있을까요?
한 도둑이 잡혀옵니다.
그리고 죄를 지은 놈은 죗값을 치러야 한다고 전화기에 대고 소리치며 무서운 형사가 들어옵니다.
그리고 빈집털이범의 멱살을 잡으며 그 집에서 무엇을 훔쳤느냐고 소리 지릅니다.
도둑은 떨면서 잘못했다고 하며, 그 집이 얼마 전까지 자신이 살던 집이었는데,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쫓겨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충격으로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병저 누우셨다고 합니다.
여동생에게는 아버지가 열 밤만 자면 돌아오신다고 했는데, 오늘이 아홉 밤 째라고 말합니다.
판잣집에서 사는데 지붕까지 바람에 날아가 비를 맞으며 잤는데,
동생이 자꾸 아빠를 찾아서 그 집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너무 불쌍해서 놓아주려고 하는데, 더 무서운 형사가 또 소리를 지르며 들어옵니다.
그리고 그가 훔친 토끼인형을 마구 찢습니다. 그것만 훔치러 들어갔을 리가 만무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도둑은 그 토끼 인형이 동생의 것이라고 말합니다. 형사는 미안해하며 그것을 물어주겠다고 합니다.
도둑은 그것은 어머니가 만들어주신 것이라 살 수 없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옆에 있는 형사들이 모두 자신들이 한 일을 뉘우치며 ‘나쁜 사람, 나쁜 사람!’이라고 하며 끝나는 것입니다.
도둑은 나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도둑은 나쁜 사람이 됨으로써
그 도둑을 나쁜 사람으로 몰고 있는 사람들의 감추어져 있는 진짜 나쁜 면을 들추어냅니다.
사실 그 도둑을 판단하는 형사들이 나쁜 사람들이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이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당신이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땅에 떨어져 죽지만 많은 경우에 그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 열매를 맺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우리 안에 있는 ‘자아’ 때문임을 압니다.
자아는 그리스도께서 주인이 되셔야 하는 우리 마음을 자신이 주인이라고
처음부터 또아리를 틀고 나가려고 하지 않는 자기 자신입니다.
자신의 뜻을 따라 하느님의 뜻을 저버리게 만드는 뱀이고 바알이고 우상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자아가 강한 사람, 즉 자아가 강해서 자신은 의인이고
다른 사람을 나쁜 사람으로 여기는 그런 사람을 개요 돼지라고 하시며
거룩한 것을 개에게, 진주를 돼지에게 주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자신 안에 있는 들보, 즉 죄의 원천은 보지 못하면서 남의 눈의 티끌을 빼내어 주겠다고
말하는 이가 바로 개요 돼지이며, 말씀의 씨가 뿌려져봐야 소용이 없고,
오히려 그것을 짓밟고 달려드는 이들이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스테파노가 순교하기 직전 하늘나라의 신비를 유다 지도자들에게 말을 할 때,
그들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았고, 일제히 스테파노에게 달려들었다(사도 7,57)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귀 있는 자는 들어라!”라고 하실 때와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개요 돼지인 이들이 자아가 너무 커 그것의 영향으로 귀가 먹은 이들로 나오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목이 뻣뻣하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여,
여러분은 줄곧 성령을 거역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의 조상들과 똑같습니다.”(사도 7,51)
목이 뻣뻣하다는 것은 교만하다는 것이고,
자신을 신으로 여겨 하느님의 뜻을 저버리는 이들이 바로 교만한 이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는 이들에게 항상 “네 자신을 버리고”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에서는 자아가 아주 강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가 길과 같은 사람이고,
조금 약해지기는 해서 말씀을 들을 때는 기쁘지만 그 기쁨이 지속되지 못하는 이들이 돌밭과 같은 이들이고,
자아를 많이 죽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직 남아있어 자신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보려고 세상 걱정을 하며
자신 안에 찾아온 평화를 스스로 숨 막히게 만드는 이들이 가시밭과 같은 이들인 것입니다.
만약 씨가 땅에 떨어지지 않았다면 어쩌면 자신이 어떤 처지의 땅인지 모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씨의 역할은 자신을 죽임으로써 그 땅이 좋은 땅인지 나쁜 땅인지 스스로 깨닫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많은 땅에 뿌려졌지만 실제로 그들이 예수님께 달려들어
그분을 살해함으로써 자신들이 어떤 땅인지 스스로 알게 되었습니다.
즉, 자아가 강한 사람들의 특징은 아예 하느님의 말씀이 이해되지 않거나,
기쁘게 받아들이지만 그 기쁨이 오래가지 않거나, 평화가 오기는 하지만 그것이 지속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가장 큰 특징은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심판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며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이들은 뽑힌 이들이 아닙니다.
만약 뽑힌 이들 대열에 들고 싶다면 빨리 자신을 버리고 매일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 스스로 자아를 죽을 수 있을까요?
자아를 없애주시는 분도 하느님임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의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 말씀을 통해 우리를 정화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제자들처럼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오래 머무르려는 ‘의지’를 보여야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비유말씀의 풀이를 당신 제자들에게만 해 주십니다.
이는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를 의지가 있는 이들에게만
당신을 더 드러내 보이시고 더 좋은 밭으로 만들어주시겠다는 뜻입니다.
결국 이 복음말씀은 심판에 관한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좋은 밭으로 만들어주시기를 바라며
그분을 받아들이기 위해 나를 죽여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섬기던 바알이 바로 나 자신, 곧 자아인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도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그분이 위험에 처했을 때는
그분을 버리고 달아났습니다.
아직까지는 완전히 자아를 버리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선택받은 이도 바알의 우상, 즉 자아를 죽인 정도만큼 열매를 다르게 맺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분은 바로 깊은 깨달음으로써, 마치 베드로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다고 착각했지만
결국 자신을 섬기고 있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배반한 것처럼,
우리 자신의 처지를 알게 하심으로써 자아를 깨부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그 자아가 깨어지기 위해서는 우리 자아 때문에 희생당하는 분이 있어야합니다.
그 희생을 통해서만 자아가 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 제자가 분노하며 상기된 얼굴로 찾아와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동네 청년들이 대낮 거리에서 여자들을 희롱하는데 어찌 그럴 수가 있습니까?”
“내 탓이네!”
“아랫마을 푸줏간 일꾼이 저울을 속여 파는데 그런 도둑놈이 어디 있겠습니까?”
“내 탓이네!”
“윗마을에 사는 세리가 돈을 떼어 먹는데 그런 인간이 어디 있겠습니까?”
“내 탓이네!”
“선생님, 어찌 선생님 탓이라고만 말씀하시는지 저는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내 탓이지. 자네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어찌 내 탓이 아니겠는가!”
이 마지막 말에야 제자는 크게 깨달았습니다.
“나의 탓이었구나!”
결국 예수님의 성체와 성혈, 빵과 포도주는 우리 자아의 돌로 그분을 깨어버려서
그분이 그렇게 부서지고 으깨져서 죽으시고 피를 흘리셨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게 만듭니다.
내 안에 있는 자아가 그분을 죽였음을 베드로처럼 탕을 치며 깨우치고 뉘우쳐야 합니다.
그런 밭이 참으로 좋은 밭인 것입니다. 그런 밭만이 선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성체와 성혈이 바로 우리 밭에 뿌려지는 씨인데,
그 열매는 바로 그 씨를 통해 내 자아가 부서지는 것입니다.
만약 성체를 영하면서도 다른 이들을 계속 판단하고 있다면
아직은 선택받지 못한 상태인 것입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돌은 그리스도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간음한 여자를 앞에 놓고 우리는 각자 자아의 돌을 들고 있습니다.
그 돌을 내려놓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손가락이 우리 죄를 지워지지 않는 책에 기록할 것입니다.
우리가 들고 있는, 혹은 오늘 복음에서의 딱딱한 길이나 돌들은 우리 자아를 나타냅니다.
돌은 나의 주인인데 참 주인이 그분이 되게 하는 사람만이 비유의 의미를 깨닫고 선택된 백성이 되게 되는 것입니다.
버려진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고 하시는 것처럼,
그리스도는 끊임없이 모든 것이 당신 탓이라고 하시며 결국 우리의 탓임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기 위해 끊임없이 씨앗이 되어 우리 마음 안에서 죽으시는 것입니다.
그 죽는 역할을 통해 결국 그분을 죽인 것이 나의 탓이었음을 깨닫게 되면 내 자아가 죽어
그분이 나의 참 모퉁이 돌이 되시는 것입니다.
내가 돌을 든 사람이 아니라 만인 앞에 가장 큰 죄인으로 무릎 꿇려지지 않는다면
그분은 이미 돌을 들고 있는 우리를 지켜주시는 참다운 모퉁잇돌, 성채가 되어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를 내 안에서 또 죽게 만들어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한 장본인,
나쁜 사람임을 절대 잊지 않도록 합시다.
마태 13,1-23 연중 제15주일 복음묵상
김 조안 수녀
길에 뿌려진 씨,
돌밭에 뿌려진 씨,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
좋은 땅에 뿌려진 씨.
지난해 여름 해바라기가 자라난 곳에 씨가 떨어졌는지
엄청나게 많은 해바라기 싹이 돋아서
한 포기씩 건물 한쪽 벽에 옮겨 심었다.
올 여름 노랗게 핀 해바라기꽃이 무리를 이루며 필 것이라는 기대를 하며
흐뭇하게 바라보았는데,
나의 기대와는 달리 몇 주가 지나도 볼품이 없었다.
아주 더디게 자라는 듯했으나, 가는 줄기에 잎들도 누렇게 되고,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 상태로 혹독한 가뭄을 겪으며 결국 거의 말라버렸다.
물을 주어도 소용이 없었다.
원인은 딱딱한 땅과 들지 않는 햇빛,
결정적인 것은 해바라기가 자랄 수 있는 환경을 생각하기보다
좋은 결과만 바란 나의 욕심 때문이었다.
예수님께서 하늘 나라의 신비를 말씀하신다.
내 마음이 딱딱하게 굳어 있을 때, 그 말씀은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내 마음이 어두울 때 그 빛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내 욕심으로 가득 채울 때 스스로를 지치게 만든다.
길, 돌밭, 가시덤불이 다 나인 것이다.
하늘 나라에 있지만 하늘 나라인 줄 모르는 것...
길가에 떨어진 씨앗을,
돌밭에 떨어진 씨앗을,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앗을
다시 좋은 땅으로 옮겨 심어야겠다.
나의 수고와 희생에
사랑과 기쁨, 평화와 희망의 거름으로
내가 지금 하늘 나라에 있음을 느끼는 것,
내 마음의 밭을 그렇게 가꾸어야겠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