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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들과 세상 권세
롬 13:1-7
1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2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3 다스리는 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4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
5 그러므로 복종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진노 때문에 할 것이 아니라 양심을 따라 할 것이라
6 너희가 조세를 바치는 것도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들이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7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받을 자에게 관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롬 13:1-7 / [권위에 대한 복종] 국가의 권위에 복종하십시오. 하나님께서 그 권위를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께서 세우시지 않은 권위는 하나도 없습니다. 2) 그러므로 나라의 법률을 거역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복종할 것을 거부하는 자입니다. 그에게는 형벌이 따라옵니다. 3) 정당한 일을 하는 사람은 지배자를 무서워하지 않으나 악한 일을 하는 사람은 언제나 두려워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겁을 먹지 않으려거든 법을 지키십시오. 그렇게 하면 안심하고 지낼 수 있습니다. 4) 지배자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돕기 위해 보내신 사람들이니 만일 여러분이 나쁜 짓을 하면 두려움에 떠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는 공연히 칼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죄를 저지르는 자에게 하나님을 대신하여 벌을 내리는 것입니다. 5) 그러므로 하나님의 노여움을 받지 않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여러분의 양심에 따르기 위해서도 법을 지켜야 합니다. 6) 여러분이 세금을 내야 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정부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계속해 나가려면 돈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7) 납세의 의무를 다하십시오. 자진해서 모든 공과금을 내고 두려워해야 할 사람은 두려워하고 존경해야 할 사람은 존경하십시오.
성도가 맺는 기본관계인 하나님과 나의 관계(1-2),성도와 성도의 관계(3-13), 성도와 사회의 관계(14-21)를 말한 바울은 더 나아가 성도와 국가의 관계를 다룹니다. 세상 안에 살고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은 이중국적과 신분을 가진 성도의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천국 시민이면서 이 땅에서는 성숙하고 성실한 시민으로 살아야 할 존재입니다. 성도는 자신의 두 신분에서 오는 긴장을 유지하면서 두 신분의 조화와 균형을 성취해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1-2) 권세의 기원은 모든 권세 위에 계시며 인간 나라들 위에 뛰어난 주권자이신 하나님이십니다(단 4:17, 25, 32). 지상의 모든 권세는 자신의 선하고 온전한 뜻대로 권세를 주시는 하나님에게서 나왔습니다. 권세의 기원이 하나님이므로, 권세에 대한 복종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한 복종입니다. 이 복종이 국가에 대한 성도의 의무가 지닌 성격을 규정합니다.
양심을 따라 행할 것이니라(3-5) 하나님과 국가는 반(反)하지 않습니다. 국가는 자신을 권세로 세우신 하나님의 뜻을 위해 일합니다. 국가는 하나님이 주신 공권력인 칼을 가졌습니다. 국가는 하나님께서 선을 행하고 악을 벌하시기 위해 세우신 권세이자 기관입니다. 국가는 하나님의 선을 행하는 사역자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권세에 복종하고 국가에 협력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권세에 대한 복종이 하나님께 권세를 위임받은 위정자들의 악행에 대한 방관과 그들에 대한 무비판적인 협력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의무와 권력자에 대한 의무가 어긋날 때, 성도는 세상 권세에 불복종하는 것으로 하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행 5:29). 권세에 대한 복종은 성도의 의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복종이라는 큰 틀 안에서 행해져야 합니다.
너희가 조세를 바치는 것도(6-7) 당시 로마제국에는 크게 두 종류의 세금이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바쳐야 하는 직접세의 성격을 가진 공세와 관세, 유통세와 같은 간접세의 성격을 지닌 국세가 그것입니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사역자인 국가에 조세와 관세를 바침으로써 국민의 책임을 다하라고 가르칩니다(마 17:24, 27; 22:21; 막 12:13-17). 이 책임을 다하는 것은 하나님께 복종하는 일입니다.
적용: 당신은 하나님의 사역자인 나라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까? 당신은 국민의 의무와 책임을 다함으로써 하나님께 순종하고 있습니까?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a)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님께 속하여 있고 주님께 돌아감을 압니다. 나에게 맡겨진 청지기의 삶을 잘 감당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지혜와 힘을 더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호크마 주석
=====13:1
각 사람 - 이에 해당하는 원어는 '파사 프쉬케'(* )로 직역하면 '모든 영혼'(every soul)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바울이 '모든 사람'(every man)이나 '모든 성도'(every believer)라고 표현하지 않고 '모든 영혼'으로 표현한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인가 ? 혹 여기서 전개되는 이야기는 이 세상에서의 권력에 대해 성도가 취해야 할 태도가 아니라 영적인 세계에서의 질서에 관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그러나 '각 사람'(* )이라는 표현이 모든 사람 개개인을 표시하는 구약적 용법이라는 것을 안다면 그런 의문은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본문의 '각 사람'(* , every soul)은 몸(body)과 다른 것으로 구분되는 영혼(soul)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person)을 말하는 것이다. 결국 본문은 소위 '이 세상'에 살아있는 사람 모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바울의 이 서신을 읽게 되는 로마의 기독교인 각각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위에 있는 권세들 - '위에 있는 권세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가에 대해서 대체로는 국가의 정치적 권세, 인간 통치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당시의 상황을 고려할 때 로마의 권력(權力)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디벧리우스(Dibelius)에 의해 제기되어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에 의해 결정적으로 주장된 다른 견해도 있다. 쿨만에 의하면 본문의 '권세들'(* , 여수시아이)은 인간의 권세와 천사적 권세 모두를 가리킨다고 한다. 이 주장의 근거는 바울이 '권세'(* , 여수시아)의 복수형을 사용했을 때 그것이 악한 천사나 선한 천사를 가리키는 용법으로 사용됐던 사례가 있다는 데 있다(8:38;엡 1:21;3:10;4:12;골 1:16). 이 주장이 어느정도의 근거를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1-7절의 맥락에서 볼 때 '권세'라는 말에 인간적인 것 외에 천사적인 존재가 내포된다고 볼 수는 없다. 특히 '세금'에 관한 언급은 이것이 세상의 인간적인 통치 권세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굴복하라 - 굴복(subjection)이라는 말은 순종(obedience)이라는 말보다 더 범위가 넓고 엄격한 관계를 표현해준다. 머레이(John Murray)는 이 굴복의 의미가 정부 관리들의 재판권과의 관계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고 한다. 즉 독자들은 그들 각자가 정부관리들의 재판권에 예속되어 있다는 것을 인식하여 그들의 권위에 순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브루스(Bruce)는 본문으로 부터 쿨만(Cullmann)의 견해 즉 '권세들'(* , 여수시아이)이 천사적 세력(특히 악한 천사)을 가리킨다고 하는 주장을 반박한다. 브루스의 주장의 요지는 바울이 천사적인 세력에 대해서 말할 때 그들에게 굴복해야 한다고 말한 적은 한번도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바울은 기독교인들이 천사적 세력의 지배로부터 해방되어 있으며 창조주이자 모든 악한 세력을 이기신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어 있다고 말한다는 것이다(골 1:16;2:10, 15). 권세는...
모든 권세는 - 전자는 대표 단수형이고 후자는 복수형이다. 따라서 전자는 세상에 인간적 질서를 세우고 질서를 유지하는 것은 하나님이 세운 일반 원칙임을 말하는 것이고 후자는 개개의 구체적인 권력이 다 하나님의 경륜에 의한 것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본문은 모든 사람들이 세상의 정치 권력에 대해 굴복하는 태도를 가져야 하는 이유를 말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 따라서 하나님께 복종하는 자는 세상의 권세에 대해서도 복종해야 한다. 너무나도 단순하면서도 자명한 원리이다. 그러나 이 말은 문자적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보편화하여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적용시키려고 하거나, 신앙인과 국가 권력과의 관계를 규정(規定)짓는 말로 확립하고자 할 때는 논란이 생길 수 있다. 만약 어떤 권세가 악을 징벌하고 선을 장려하며, 선한 양심에 반(反)하는 방식으로 그 권세를 행사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국가의 권세가 '사랑과 정의'라고 하는 하나님의 계율에 위배되는 방식으로 행사되고 불의를 조장하며 악을 도모한다면 그때에는 그 권세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인가 ? 이에 대하여는 본장 1-7절 주제강해 '시민 복종과 불복종의 한계'와 '사회 참여에 관하여'를 참조하기 바라며 여기서는 '모든 권세에 복종하라'고 한 바울 당시의 사회적 상황을 살펴보기로 하자. (1) 바울은 후자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으며 전자의 가능성 즉 이상적인 국가 권력과 그것의 집행에 대해서만 원칙적인 언급을 하는 것이다. 바울이 국가의 권세에 대해서 (실제로는 로마의 권력) 그와 같이 긍정적인 태도를 가질 수 있었던 데에는 사도행전에서 볼 수 있는 대로 법치주의에 근거한 로마의 권력이 그의 선교에 오히려 도움이 되었던 것이 작용했을 수 있다(행 28:16-28). (2) 모든 국가의 권력이 하나님의 결정에 의한다는 것은 구약 성경적 배경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바로'라는 애굽의 왕은 적어도 유대인들에게는 매우 악명높은 인물이었다. 그러나 바로를 왕좌에 오르게 한 것이 하나님의 섭리였다는 것이 구약의 증거이고 또한 바울이 취한 신앙이었다(9:17). 이런 의미에서 모든 국가의 권력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고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사적 섭리라는 안목으로 헤아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권력 그 자체의 정당성 보다는 모든 권력 위에서 결정권을 의미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바울은 기독교인들에게 로마 권력에 복종하라고 가르침으로써 불필요한 경계와 오해를 불식(拂拭)시킬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4) 기독교 자체에서 생겨난 문제로 열광주의자에 관한 것이 있는데 이들은 하늘의 시민권 사상과 그리스도의 왕되심에 대한 열광 때문에 지상의 권력들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멸시하고 무시하는 태도를 가졌다. 이런 신앙은 그 자체로도 문제려니와 로마인들에게도 좋지 않은 반작용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이었다. 이런 것을 배경에 두고 볼 때,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고 한 바울의 진술은 열광주의자들에 대한 공격이라고 볼 수 있다.
=====13:2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심판을 자취하리라 - 논리는 매우 간단하다. 모든 권세는 하나님이 주셨다. 그러므로 그 권세를 거스리는 것은 곧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니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적어도 권세자들이 하나님의 선한 사자들로서 선과 악을 구분하여 상과 벌을 준다면(3, 4절) 이 말은 수긍할 수 있는 말이 될 것이다. 그러나 브루스(F.F. Bruce)가 제기한 질문처럼 만일 가이사가 자기 권세의 한계를 넘어 하나님의 영역을 주장한다면 그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 어떠한 권력이나 위정자가 하나님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경우, 가령 가이사가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이 부여해준 권세의 범위를 넘어 하나님의 자리에서 경배받기를 원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 이런 경우 우리는, 즉 사람과 하나님이 대립되는 경우, 그리고 반드시 양자 택일을 해야하는 경우에는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선택해야 한다(행 4:19, 20;5:29). 만약 그렇지 않고 이 본문이 시간과 공간, 조건을 초월하여 적용되는 불변의 원리라면 이것은 공의와 정의에 반(反)하는 각종 전제 정치 체재와 독재체재를 정당화해주는 구실을 할 수 있게 된다. 이에 대해 혹자는 넓은 의미 즉 하나님의 섭리의 면에서 본문을 이해하려 한다. 이들의 주장은 이런 것이다. '바로'라고 하는 악한 왕도 결국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세워졌던 것처럼 사람은 하나님의 높으신 뜻과 경륜을 다 이해할 수 없다. 어떤 권력은 하나님의 정의에 합당하지 않으나 그것은 세상을 통치하는 하나님의 질서의 한 부분을 이룬다는 것이다(Lenski). 반면 혹자는 본문을 사도들의 서신 전체 문맥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그럴 경우 어떠한 권력도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권세의 목적과(3, 4) 범위 내에서만 복종을 요구할 수 있고 기독교인 역시 그러한 범위 안에서만 복종의 의무를 질 뿐, 정도를 벗어나 하나님께 돌려야 할 충성마저도 권력이 요구할 때는 저항할 수 있고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고 본다(Bruce). 어떠한 개인이나 국가가 정권이나 권력을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았을 때 거기에는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의 기대하는 바와 상관없는 방식으로 자신의 권세를 오용(誤用)하거나 남용할 수도 있다. 이런 것을 감안할 때 후자의 견해가, 권력에 대한 성도들의 태도를 바로 세우는데 타당한 견해라고 여겨진다. 한편 본문에서 언급하는 '심판'은 더이상 구체적인 언급이 없어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그러한 것은 인간의 심판을 받는 것이 낫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는 없다는 구약의 선지자적 정신의 구현이라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행 4:19;5:29)는 사도들의 신앙정신과 "몸은 죽여도 영혼을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 10:28)는 예수의 가르침에 근거해서 신앙의 정조를 지키다가 당하는 숭고한 믿음의 결과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권세를 거스려 '심판'을 자취하는 자는 정당한 신앙적 이유를 떠나서 권세자들에 대한 그릇된 이해 속에서 하나님이 세원 권위에 반항하여 불순종하는 자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13:3
관원들은 - 공동번역은 본문을 '통치자들'로 번역하고 있다. 이 복수형은 특정한 대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통치 세력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즉 '통치자들'로 표현되는 대상은 권력의 상충부 즉 최고 통지권자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로마의 관리들을 다 포괄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표현 속에서 바울은 아마 자기가 겪었던 로마의 관리들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것이다(행 19:35-41;21:31-40;22:24-30;24:10).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 공동번역은 '악한 일', '선한 일'을 '악을 행하는 자', '선을 행하는 사람들'이라고 번역하였는데 이것이 정확한 번역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본문의 '악한일...선한일'은 추상적인 개념으로서의 행위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행하는 자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한편 통치자들은 악을 행하는 자에게나 두려운 존재이지 선을 행하는 사람들에게는 두려운 대상이 아니라는 것은 1, 2절에 나오는 권세의 개념이 어떤 전제를 가지고 있음을 말해준다. 즉 권세는 선을 보장하고 악을 규제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전제이다. 만약 어떤 권세가 이 전제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선을 담보하거나 악을 제어하는 기능에서 이탈하여 애초의 전제에 반(反)하는 방식으로 권세가 행사될 때 그 권세는 권세의 수여자(授與者)인 하나님께 심판을 받아야 할 것이다(2절). 그런데 바울은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 아마 이것은 바울의 경험때문일 것이다. 그에게는 로마법에 의한 통치 또는 법에 의한 질서 유지가 여러차례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네가...
아니하려느냐 - 공동번역은 본문을 의문문으로 보지 않고 서술문으로 보아 "통치자를 두려워하지 않으려거든 선을 행하십시오"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의문문으로 표현한 개역성경의 번역이 바울이 강조한 바를 더욱 강하게 나타내 보여준다고 본다. 바울은 복수를 사용하지 않고 '너'라는 2인칭 대표단수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복수를 써서 표현하는 것보다 강한 인상을 주는 표현법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는 표현은 매우 간결하면서도 대단히 강한 인상을 남기는 수사적 표현이다. 사실 권력은 사람들에게 두려운 대상이다. 왜냐하면 권력은 막강한 힘으로 사람의 정신과 육체에 타격을 주거나 제한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악을 행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조금도 두려울 것이 없다. 여기서의 '악'은 세속적인 의미에서의 악, 즉 법에 위반되는 행위를 의미한다. 이것은 통치자들의 권한이, 궁극적인 죄를 심판하는 하나님의 권한을 위임받은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허락된 권력과 그 권력의 효력이 미치는 영역 내에서의 질서를 깨뜨리는 행위 즉 실정법(實定法)을 위반하는 행위만을 처벌하는 것으로 한정됨을 의미한다. 선을 행하라...
칭찬을 받으리라 - 본문에서 '그에게'는 물론 통치자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칭찬을 받는다'는 말은 어떤 보상을 받는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확실히 여기에는 보상의 개념이 없으며 단지 인정을 받는다는 정도의 의미가 있을 뿐이다. 따라서 여기서 선을 행해야 하는 동기는 적극적인 의미에서 보상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권세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으며 이것은 상당히 현실적인 동기이다.
=====13:4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 공동번역은 본문을 "통치자는 결국 여러분의 이익을 위해서 일하는 하나님의 심부름꾼입니다"로 번역하고 있다. '선을 이루는 자'라는 표현보다는 '이익을 위해서 일하는 심부름꾼'이 더 적절한 번역이라고 보여진다. 왜냐하면 권세라고 하는 것은 적극적으로 선을 추구하는 성향을 가진 것으로 보기는 어려우며 다만 악을 제거하고 질서를 유지함으로써 대다수의 선량한 국민들을 유익하게 하는 것을 그 본질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역사적, 현상적 고찰에서부터 얻어진 결론일 뿐 권세를 세우신 하나님의 원칙이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들 위에 모든 제도, 특히 통치 권력 제도를 세우신 하나님의 원래 목적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 다음 두 가지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1) 천지 창조에서도 나타나듯 질서와 조직은 하나님의 근본 속성이다. (2) 또한 그 질서와 조직을 통하여서만이 교회와 성도가 이 땅 위에서 보호받으며 원래의 사명을 잘 감당해 나갈 수 있다(딤전 2:1, 2). 실로 모든 권위와 통치의 모체이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러한 뜻을 이 땅위에서 실제로 구현시키기 위하여 파생적으로 그 권력의 일부를 국가의 통치자들에게 주었던 것이다. 따라서 국가의 통치자는 그 통치권이 하나님의 법이라는 범위(category)내에 있을 때 그 권세의 신적인 기원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 법을 월권할 때는 이미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아니며 단지 성도를 단련시키는 하나의 악한 도구로 전락될 뿐이다. 따라서 성도는 원(源) 권력이자 모법(母法)인 하나님의 뜻과 법을 따라 마음으로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면서 선지자적 경고를 부단히 해야 한다. 이러한 통치자와 성도간의 관계성은 '주 안에서 부모를 순종하라'(엡 6:1)는 사도 바울의 또 다른 메시지와 일맥 상통한다.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 여기서는 '두려움'의 동기가 강조되고 있다. 본문에서 '공연히'는 '근거없이', '목적없이'의 뜻이다. 그리고 '칼'은 헬라어 '마카이라'(* )를 번역한 것인데 이는 로마의 단검을 가리키는 말로 시민을 사형시킬 때 사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본문의 '칼'이 구체적으로 사형을 집행할 수 있는 권세의 힘만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되며 사소한 잘못에서부터 극형에 이르기까지 그 형벌을 부과하고 집행할 수 있는 권세의 총체적인 힘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칼'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합법적인 권세이며, 목적없이 임의대로 사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악을 행하는 자를 징벌한다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진노하심 - 여기서의 '진노'는 헬라어 '오르게'(* )의 번역인데 이 말이 신적 진노 곧 하나님의 진노를 가리키는지 아니면 세속적 진노 곧 통치자의 진노를 가리키는지 분명치 않다. 혹자는 '진노'(* , 오르게)라는 말이 본서에서 사용될 때 그 의미는 하나님의 진노를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되었던 것을 근거로 하여(1:18;4:15) 전자, 즉 하나님의 진노를 말하는 것이라고 본다(Lenski, Morrison). 그러나 다른 학자는 3-5절의 문맥상 후자, 즉 지상적 통치자의 진노를 가리킨다고 본다(Kasemann). 원칙적인 면에서 보면 지상의 권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기능, 즉 선을 도모하고 악을 징벌하는 기능에 충실하다고 할 때 이 권세에 의한 진노는 곧 하나님의 진노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어떤 통치자가 선을 금하는 법을 만들고 악을 도모한다고 할 때 그 법에 저항하다가 당하는 진노는 하나님의 진노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본문의 진노는 하나님의 진노이자 그것의 대행자인 지상적 통치자의 진노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통치자는 막중한 책임을 느끼게 된다. 그는 하나님의 진노를 대행(代行)하는 자로서 선을 추구하고 악을 제거해야 하는 본연의 책임을 충실히 수행하는 한계 안에서 그에게 주어진 '칼'을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13:5
굴복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 국가의 권세에 굴복해야만 하는 이유는 그 '권세'가 칼을 휘두를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어서 그 처벌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더 본질적인 이유는 권세자가 하나님의 사자 즉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선을 장려하며 악을 징계한다는 대의 명분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 권력이 이를 충실하게 수행한다면 성도는 그 권한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다. 노를 인하여만...
양심을 인하여 - 본문의 '노를 인하여'는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기 위하여'(to avoid God's Wrath)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RSV). 권세를 세우신 분이 하나님이므로 권세에 굴복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권세에 복종하지 않는 것이 되어 하나님의 진노가 뒤따른다고 볼 수 있고, 국가 권력은 이를 대행하는 역할을 한다. 한편 바울은 '양심'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했는데(행 23:1;24:16;고후 1:12;4:2;딤전 1:5) 이 양심으로 하나님의 기준을 따라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고 악에 대해서는 죄의식을 느끼며 또한 하나님께 대해서는 일종의 의무감을 가지는 것이다. 기독교인은 이 양심을 따라 정당한 권세에 굴복해야 한다. 결국 본문을 통해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기독교인이 권세에 복종해야 하는 것이 자명한 당위성(當爲性)을 갖는 것이라고 할진대 소극적인 의미에서는 진노를 피하기 위해서도 권세에 굴복해야 하지만 적극적인 의미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의무감과 충성을 위해서 굴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권력에 복종하는 동기는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양심의 준수에서 나타나야 한다. 한편 '양심을 인하여' 즉 '양심을 따르기 위해서'(공동번역)라는 표현은 기독교인이 지상의 권력에 대하여 지녀야 할 태도의 기준이 융통성 있다는 것을 제시해주는 것으로 해석하게 한다. 여기서의 양심은 분명히 하나님 말씀의 법에 근거한 양심이다. 따라서 어떤 지상의 권력이 '권선징악'에 합당하게 그 권위를 행사한다면 마땅히 모든 기독교인들은 그 권력에 복종해야 하겠지만 혹 하나님의 말씀의 법을 따르고자 하는 양심에 어긋나는 방식으로 칼을 휘두른다면(4절) 지상의 권력에 의한 핍박을 받더라도 하나님의 진노를 받지 않도록 행동해야 한다(행 4:19, 20). 또한 우리의 순종은 하나님께 대한 의무감이므로 모든 제도에 대해 순종함에 있어서 주를 위한다는 조건이 있어야 한다(벧전 2:13).
=====13:6
공세를 바치는 것 - 바울은 국가에 대한 의무 이행 즉 복종의 구체적인 예로 납세(納稅)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본문은 로마의 기독교인들이 이미 로마 국가가 부과한 세금을 내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것은 로마의 기독교인들이 납세를 거부하거나 납세에 대한 저항을 하고 있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혹 로마의 기독교인들 가운데는 이교도의 국가인 로마 정부에 세금을 내는 것을 못마땅해 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수 있다. 그러면서도 징벌이 두려워서 억지로 세금을 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바울이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은, 비록 이교 국가라 하더라도 로마 정부가 가진 권위를 부여하신 분이 하나님이므로 세금을 바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적 양심에 거리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혹자는 세속적인 권력에 대한 납세의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는 바울의 납세관이 복음서에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마 22:21)는 예수의 가르침에 의해 영향받았다고 본다(Lenski). 한편 일부 영지주의자들은 이 구절을 해석하기를, 여기에 나온 권세에의 복종은 지상의 권세에 대한 복종이 아니라 천사나 보이지 않는 권세자들에 대한 복종이라고 했는데, 이레니우스(Irenaeus)는 그의 저서 '이단 논박'(Against Heresies, V. 24)에서 본 구절에 대하여 이 문맥에서 말하는 권세에의 복종을 보이지 않는 영적 세력이 아니라 지상의 통치 세력에 대한 복종임을 증거했다.
하나님의 일군 - 본문의 '일군'에 해당하는 헬라어 '레이투르고이'(* )는 여러 가지 의미를 갖는다. 이 말은 본래 제정 일치(祭政一致) 사회의 왕적 제사장직에서 온 말로 70인역에서는 '제사장'을 가리키는 것으로 되어 있다. 한편 코이네(Koine) 헬라어 개념에서는 일반적인 국가의 관리들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또한 신약성경과 초대교회의 문헌들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고귀한 봉사를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기도 했다(15:16, 27;눅 1:23;행 13:2;고후 9:12 등). 대개의 학자들은 이 말이 4절의 '사자'(* , 디아코노스)보다 높은 권위를 가진 말이라고 본다(Murray, Bruce).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 여기서 '이 일'이 세금을 징수하는 일을 가리킨다고 볼 경우 이는 관원들의 직무를 부분적으로만 표현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관원들이 오직 세금을 징수하는 일만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 일'이 하나님의 일꾼으로서의 직무를 가리킨다고 보는데(Lenski) 이렇게 보는 것이 본문의 의미를 좀더 명확히 드러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관원들이 세금 징수의 일을 하는데 그 일은 바로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통치자들에게도 깊은 의미를 제공한다. 즉 통치자들은 그들이 일상적으로 하는 일이 바로 하나님께서 위임해준 일이라는 사실을 자각해야 하며 그들의 직무가 갖는 이러한 성격을 잘 인식하고 행함으로써 하나님의 섭리 안에 머물러야 한다. 한편 '항상 힘쓰느니라'는 말은 적어도 통치자들이 공공의 일을 충실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13:7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 '공세'(* , 포론)는 피정복민이 지배 국가에 바치는 '조공'(朝貢)을 의미하며 '국세'(* , 텔로스)는 국가에 내는 세금을 가리킨다. 6절에서는 독자들이 세금을 바쳐야 하는 근거와 세금을 부과하는 정당서을 묘사한 것이고 본절에서는 마땅히 납세를 해야 할 것임을 언급한다. 만약 당시의 모든 성도들이 다 세금내는 일을 잘 준수하였다면 바울이 본절을 말해야 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이로 보아 당시에 세금내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혹자는 이들이 세상의 일상적인 질서, 현세의 정치 질서를 부정하는 열광주의자들이었을 것이라고 본다(Kasemann). 따라서 바울은 본절을 통해 그들에게 현세의 질서는 하나님에 의한 것이며 따라서 모든 사람은 이 질서 안에 머물러 있어야함을 말하는 것이다.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 여기서 두려움과 존경은 실제적으로 권력 또는 권력을 가진 자에 대한 내면적인 태도라고 봐야 한다. 그러나 성도들은 권력에 대해서 절대적인 두려움을 가져서는 안되며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秩序)에 순종하는 의미에서 정당한 두려움과 존경을 품어야 한다.
< 설 교 >
기독교와 국가
이필재 목사 / 롬 13:1~7
이번 주간에는 우리가 6·25를 기념하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과 이번 주간에 제게 약속된 모든 설교 요청 받은 곳에서 이 말씀을 전하려고 준비하였습니다. 이제는 6·25같은 날은 국민의 마음에서 멀어져 가고 있다고 봅니다. 그 이유는 6·25를 기억하는 사람이 소수가 되었다는 점과 6·25를 부각시키는 것이 남북평화 모두의 손해가 된다는 판단 때문에 그렇습니다. 6·25 이후에 남북 관계는 두 가지 길을 걸어왔습니다. 하나는 초긴장 상태고 하나는 평화 협력 분위기였습니다. 이러한 관계는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성이라는 것이 더욱 긴장을 준다고 봅니다. 어떤 때는 당장 내일이라도 전쟁이 터질 듯 한 험악한 관계가 오고 갑니다. 반대로 금방 통일이라고 될 듯 한 희망을 주기도 하는 이런 관계의 불확실성 정치 관계입니다. 7·4 공동성명이 처음 발표되었을 때 국민들은 ‘아! 이제 통일이 되는구나!’ 눈앞에 통일이 왔다는 감정을 가졌습니다. 30년이 지났는데도 변화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유는 지금까지 가장 인간다운 삶의 가치가 무엇인가? 또, 그렇게 하기 위해서 어떤 국가 건설을 해야 하는가 연구해 왔고 또 노력해 왔습니다. 그 결과 세 가지 목표를 정했습니다. 그 하나가 생명의 존엄성 가치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사람의 생명이 천하보다도 귀하다는 진리에 기초해서 생명 존중의 철학을 국가 정책 1순위에 놓은 것이 선진국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의 형상이 되므로 하나님의 형상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중하자는 철학입니다. 그 다음에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최대 선물이 하나 있는데 자유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유 민주주의 국가 건설을 하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는 인간이 사는 이유는 행복의 추구라고 해서 모든 사람이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데 최대한 노력하는 국민 철학, 이 세 가지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이러한 조건들을 무시하는 국가들은 나쁜 나라라고 규정하고 비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인가? 인간이 만든 모든 제도는 절대 완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철학과 제도를 만들었다 해도 그것을 실행하는 사람들에 따라서 세상은 좋아지고 나빠집니다. 여러분이 보시면 선진국일수록 범죄율이 높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무식하고 머리 나쁜 사람이 망치는 확률보다 많이 배우고 머리가 우수한 사람들에 의해 망한 역사가 훨씬 높습니다. 그렇다면 교육은 필요한 것인가? 또 선진국의 모든 제도는 잘 된 것인가? 어떠한 제도도 완전하지 않습니다.
제 주변에 매우 절친한 목사님 한분이 북한통입니다. 북한 주민들 돕기 운동을 수십 년 하셨습니다. 또, 그런 것을 하시니까 제가 주변에서 좀 도와드리기도 했고 협조도 해드린 일 있습니다. 또 하도 북한에 가서 무엇을 갖다가 많이 주니까 북한에서도 고위층이 알아주는 그런 인물입니다. 거기 가서 자기는 대우 받으니까 자유스럽게 다니고 청년들과 이야기하시는데 어느 날 북한 청년들이 좌담회를 한번 하자고 해서 응했답니다. 청년들이 하는 말이 “남한과 북한의 비교로 남한이 북한보다 훨씬 잘 살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합니다. 그러나 도덕적으로는 북한이 더 깨끗합니다.” 북한 청년들이 그렇게 말을 하더랍니다. 맞는 말이잖아요? 그러면 북한의 제도는 도덕적으로 깨끗하니까 훌륭한 것인가? 그래서 목사님이 대답을 하셨답니다. “북한은 도덕적으로 더러워질 분위기와 자유가 없다. 너희들이 남한의 유흥가에 가서 살면서도 깨끗해야 그게 깨끗한 것이지 더러워질 곳도 없는 곳에서는 깨끗해질 수밖에 없다. 마라톤도 혼자 뛰면 일등이다.” 여러분들 가운데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중동에 많이 다니셨을 것입니다. 거기서는 도둑질 하는 사람은 무조건 손을 잘라버립니다. 볼 것도 없습니다. 도둑질한 것만 발견하면 끌어다가 손목을 끊어버립니다. 그래서 도둑놈이 없습니다. 있어도 아주 극소수가 있거나 말거나입니다. 길바닥에 돈이 떨어져있어도 그것을 주워가면 안 됩니다. 주워가면 손목이 잘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도둑놈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그 제도는 훌륭한가? 아니면 도둑놈이 좀 있다 해도 손목이 자르지 않는 사회 제도가 더 좋은가?
저는 초등학교 시절에 담임선생님께서 환상적인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려주셨는데 “서구 사회는 얼마나 사회가 정직하고 훌륭한가?” 이런 이야기를 가끔 하셨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선생님들은 서구 사회를 한 번도 안가보고 말씀하신 거 같습니다. 도둑놈이 없다고 하시고 공중화장실에 들어가서 볼 일을 보고 손을 닦으려고 손에 시계를 풀어서 옆에다 놓고 손을 닦고 깜박하고 그냥 나왔는데 그 이튿날 가보니까 아무도 안가지고 가고 그 시계가 그냥 있었다고 하셨습니다. 이게 서구사회라는 겁니다. 나는 사실 그 선생님이 항상 그렇게 말씀을 화려하게 해주셔서 거기에 대한 동경이 제가 서구사회를 가보는 이유가 되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나는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러고 이제 제가 미국에 가게 되었는데, 그 선생님이 구라를 치신건지 전혀 다른 세상인 겁니다. 아주 험악한 우범지대에서 오후 3시부터 밤 12시까지 밤일을 하면서 아주 간단한 단순노동을 하면서 학문의 길을 가려고 피나는 노력을 하는데 내가 있는 그 우범지대에 내가 있는 그 가게를 찾아오는 사람들 다 도둑놈입니다. 셀프 서비스 주유소에서 조그만 스낵 가게를 겸하고 있었는데 아무도 없이 나 혼자서 오후 3시부터 밤 12시까지 혼자 앉아서 돈을 받는데 그곳에 들어오는 사람이 한 50퍼센트 이상은 하다못해 껌 한통이라도 집어넣어야 나가지 그냥 나가는 사람이 없을 만큼 눈만 돌리면 뭐 하나 없어지는 겁니다. 내가 그때 시간당 2.75달러를 받고 일을 할 때인데 휘발유를 넣었으면 와서 돈을 내고 가게 되어 있는데 그냥 도망가 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나는 혼자서 쫒아갈 수도 없고 황당했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부터 미국이 변한 게 뭐냐 하면 선불제 영어로 하면 Pay first라고 하는, 돈 먼저 내지 않으면 주유할 수 없는 문화가 되어버렸습니다. 하도 도망가 버리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인과 나와의 약속! 도둑을 맞던지 도망갔던지 내 월급에서 다 빼는 겁니다. 그래서 하루 종일 열심히 일했는데 도둑놈들 뒷바라지하면 아무것도 없는 겁니다. 그 뿐입니까? 총을 갖다 대고서 돈을 빼앗는 사람이 없나, 칼을 든 사람이 들어오지 않나, 몽둥이를 들고 들어오지 않나?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여기 와서 죽나보다.’ 그때 나는 얼마나 화가 나는지 제 옆에 가게 하시는 아저씨가 계셨습니다. 그분과 둘이 한참 만나서 서로 피차 넋두리를 하는 겁니다. 그 아저씨는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오전 10시가 되었는데 어떤 강도가 들어와서 총을 들이대고 돈 내라고 했습니다. 이 아저씨가 침착하십니다. “야! 이 가게를 9시에 문을 열었다. 지금 10시인데 9시부터 한 시간 동안 손님 한 사람도 안 들어왔는데 돈이 있겠느냐?” 그랬더니 강도가 생각을 하더니 “아! 그렇겠구나. 그러면 내가 이따가 오후 5시에 오겠다.” 정말 5시에 다시 온 겁니다. 총을 가지고 있으니 잘못하면 죽잖아요? 그래서 500달러를 주었더니 고맙다고 하면서 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는데 6~7명의 가족사진인 겁니다. “이 아이들을 내가 아빠로서 먹여 살려야 되는데 내가 직업이 없다. 할 수 없이 나쁜 일인 줄 알지만 이러며 다니니까 미안하다. 또 오겠다.” 그러면 가셨답니다. 제가 교인들에게는 광고를 한 적이 있습니다. “강도 한번이라도 당한 사람 모이십시오.” 최고 강도 많이 당한 사람이 30대 초반의 여집사님인데 13번 당했습니다. 13번 가슴에 총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것을 발표했습니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ABC TV방송에 내 말이 다 나갔습니다. 기자들이 나에게 다 왔습니다. “이게 뭐냐? 생명 존엄을 국가 정책의 제1순위로 정하고 교육을 시키는 나라가 돈 몇 푼 때문에 생명을 죽여야 되는 이 사회는 잘된 사회인가? 이게 뭐냐?”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떠한 제도도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좋아지고 나빠집니다. 이 관리책임은 사람 자신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을 하나님이 축복해 주셨잖아요? 관리는 우리가 해야 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이 나라 운명이 달려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달려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권투 선수 무하마드 알리는 그의 이름이 본래 카시우스 클레이였습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종교의 정신으로 무하마드 알리라고 개명을 했는데 그는 자신의 신앙과 미국 국법의 차이 때문에 그의 인생에 가장 화려했어야 되는 전성기 기간 3년 6개월을 출전 금지를 당해서 꼼짝 못하고 살았습니다.
우리 역사에는 순교자들이 수없이 많이 나왔습니다. 순교자란 무엇인가? 자신의 신앙과 국가 이념이 맞지 않았을 때 신앙을 지키기 위해 국가 이념을 버린 사람들이요 그로 인해서 국가의 물리적 힘에 의해 처벌된 그런 사람들을 말합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소속하고 있는 민족을 사랑하고 소속한 국가의 시민으로서 복종할 수 있는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이 부분은 통치적인 질서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혼란의 하나님이 아니요 질서의 하나님이시라.” 창조의 순서부터가 통치적 질서 속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지상의 국가와 사회 질서를 위해서 어떤 특정인에게 고난을 주셨다고 오늘 말씀이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지상의 권세자는 하나님의 권세를 대행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통치의 사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 사회 질서를 위해서 하나님이 세우신 통치자의 통치에 순종하여야 행복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 여기의 말씀인데 선진국이란 뭐냐? 법의 정신이 훌륭한 나라입니다. 그리고 시민들이 그 법을 질서 있게 지키는 나라가 선진국이고, 법을 만든 사람들이 법을 가장 안 지키는 나라가 후진국입니다. 세상에는 선한 법도 있지만 악법도 존재합니다. 그래서 이 순서를 따지면 이 세상은 법이 있어야 지상의 질서가 유지되고 법 위에 정치가 있어서 법이 잘못 되었을 경우에는 정치로 인해서 법을 뜯어 고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정치 위에는 뭐가 있냐? 철학이 있습니다. 무엇을 위한 법인가? 이 문제가 해결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기본적인 문제가 잘 되었을 때 국가의 모든 시민들은 통치자의 지도를 잘 따라야 국민 행복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 우리 기독교인들의 국가관이란 말입니다. 모든 사람을 불행하게 만드는 어려움이 국가에 찾아올 수가 있는데 무정부 상태라는 것입니다. 질서가 없는 혼란은 그 국가를 망하게 합니다. 창세기에는 하나님의 나라 창조의 질서가 나타나는데 모든 우주 만물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 그 질서가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만약 우주 천체가 그 어떤 하나라도 하나님의 명령권을 이탈해서 마음대로 행동한다면 그 사건은 인류의 소멸을 가져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절대 순종하여 이 우주가 마치 톱니바퀴와 같이 맞아 돌아가기 때문에 이때가 되면 항상 장마철이 되고 겨울이 되면 눈이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큰 문제가 발생합니다. 창세기에 나타난 이 하나님의 질서를 깨뜨리는 유일한 존재가 나타납니다. 인간입니다. 인간은 이 질서를 깨뜨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질서를 깨뜨림이 인간을 죄 아래로 떨어지게 했고 출애굽기에 나타난 히브리 민족의 국가 형성에 있어서 하나님은 모세라는 특정인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모든 민중들로 하여금 그에게 복종하게 하심으로 그 제도 안에서 인간 행복이 창조되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는 희망의 땅 저 가나안을 보면서 갑니다. 모두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움직이십시다. 그 질서를 깨뜨리는 사람은 처벌하면서 하나님의 질서를 유지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사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참여하고 계신가를 보여준 성경이 바로 출애굽기이며 바로 그것의 질서를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을 우리는 애국자라고 명칭을 줍니다. 내가 개인적으로 큰 성공을 했다고 합시다. 나라가 망하면 그 성공이 행복하겠습니까? 국가라고 하는 전체 공동체의 질서가 그대로 유지된 상태에서만 개인의 행복이 보장을 받는 것이지 나라가 혼란스러워 다 망했는데 내 성공한 것이 무슨 행복에 도움이 되겠습니까? 이런 국가관을 우리가 가져야 됩니다. 교회는 국가를 사랑하여 애국의 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하며 국가는 교회의 발전과 번영을 위해 협조하는 상생의 관계를 갖지 아니하면 불행해 집니다. 모든 국가의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 속한 국가가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유지하고 인간 구원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이 사역을 도와줘야 하며 지상에 세우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성장시켜서 하나님의 나라가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 위해서 노력해야 되는 것이 기독교인의 국가관입니다.
구약 성경에 많은 예언자들이 활동을 했습니다. 예언자들의 활동에 공통점이 있습니다.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통치의 입장에서 세상의 역사를 평가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정치는 하나님의 우주 통치권 아래 존재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으라는 그런 소리를 계속 발한 사람들입니다. 인간의 정치는 하나님의 정치에 관련이 되고 그 주권 아래서 정치 행동이 진행되어질 때 인간 역사에 참 평화와 번영이 올 것이며 그와 반대로 인간의 정치 역사가 하나님의 정치를 이탈하거나 반역했을 때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한 인간 불행이 찾아온다는 이 말을 계속 한 사람들이 구약의 예언자들입니다. 지금 이 예배당 안에 우리와 직접 관계된 두 깃발이 양쪽에 놓여 있습니다. 여러분 보시기에 왼쪽에 태극기가 있고 오른쪽에 갈보리 깃발이 있습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국가의 권세나 교회의 권세는 하나님의 우주 통치권 안에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또, 이 나라와 이 교회가 그러한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공동체가 되라는 소원을 저렇게 표시한 것입니다. 어떤 경우 지상의 국가나 통치자가 하나님의 우주 통치권을 부인하거나 반역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주의 창조자는 역사의 주인이시요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의 구세주가 되심을 믿지 아니하고 거절할 때도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그렇게 믿고 있는 기독교인들을 박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역사는 얼마든지 있어왔습니다. 국가의 이데올로기가 기독교의 신앙과 반대의 입장을 취했을 때 그런 일이 벌어집니다. 거기에 나타난 사건이 순교의 발자취입니다. 이럴 때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죽어야 합니다. 순교 당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이 허락하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항거해야 됩니다. 일제시대, 혹은 공산당 시절에 우리나라의 기독교계를 그런 것들이 슬프게 만들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우상숭배를 반대하지 않습니까? 일본 정부는 신사참배라고 하는 것은 일본의 정신적 기초라고 해서 살아있는 현인신 천황숭배를 강요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할 수 없다.” 국가 이념과 맞지 않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수없이 순교당하고 주기철 목사 같은 사람은 그래서 그렇게 죽은 거란 말입니다. 시편에 보면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다 여호와의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무슨 소리입니까? 하나님의 권세 밑에 다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권세도 하나님의 통치권 밑에 있다는 소리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권세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이 자신의 통치 국가에 실현되도록 노력하라는 뜻입니다. 우리들은 세계 역사에 그렇게 무식하지 않습니다. 절대 권력을 주장한 국가나 통치자들은 모두 망하고 슬픈 말로를 겪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우주 통치권이 살아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국가관에 있어서 이중국적의소유자가 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상 나라의 국적과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3장 20절에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국적은 서로 배타하거나 적대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입니다. 협력 관계를 유지해야 됩니다. 중요한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이 지상 나라의 국적은 개인의 형편과 사정에 따라 변경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나라 시민권은 어떤 형편에도 변경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 대한민국도 이제 다인종 문화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베트남의 며느리들이 수없이 들어오고 중국 조선족이 끝없이 오며 세계 모든 동남아의 젊은이들이 꿈을 안고 코리아 드림을 이루기 위해서 이 땅을 찾아와서 한국 국적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지상 나라에서는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가 있습니다. 괜찮습니다. 그토록 내셔널리즘이 강한 유대 민족도 지상의 국적은 현재 살고 있는 나라의 국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늘나라 시민권은 출생국가가 어디가 되었든지 성공을 했던지 전쟁을 했던지 어디에 가서 살던지 아무 상관이 없이 영원한 국적입니다. 어떤 경우 이 지상의 나라가 내 하늘나라의 국적을 포기하라고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는 지상 나라의 국적을 버리는 것입니다. 아예 미련을 두지 않고 쓰레기통에 집어던져 버려야 합니다. 그러면 그 국가가 나를 핍박할 거 아닙니까? 핍박을 당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하늘나라 시민권을 끝까지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국가관입니다. 하나님 백성의 국가관이란 말입니다. 어떤 기독교 국가도 전쟁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국가 부름에 나가서 전쟁터에 가서 수없이 살인을 해야 되는데 잘하는 것인가? “성경에는 하나님은 전쟁에 능한 하나님이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니라.” 이런 말들이 무수하게 많이 나와 있습니다. 기독교인은 전쟁을 해야 하되 불의와 싸우는 것입니다. 오늘의 세상은 절대 선과 절대 악이 있어서 내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그런 문화는 아닙니다. 선한 일도 큰 것이 있고 작은 것이 있고 악도 작은 악과 큰 악이 존재하는 그런 문화이고 비극도 적은 것이 있고 더 큰 비극이 존재하는 그런 문화입니다. 전쟁은 분명히 악입니다. 사람을 죽여야 합니다. 전쟁은 안하면 더 큰 악이 생기니까, 마귀와 같은 침략자의 그 흉악한 불의에 대해 충실한 협조자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더 큰 악을 방지하기 위해 작은 악을 선택해 싸우는 것이 전쟁의 합리성이란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건강하면 의사는 필요 없잖아요? 어떤 때는 의사가 사람의 다리를 뚝 잘라버릴 때가 있습니다. 얼마나 큰 비극입니까? 왜 잘라버리는 것입니까? 더 큰 비극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그때 의사는 병균이라고 하는 이 악의 존재를 막기 위해서 작은 악을 선택하는데 그 작은 악은 의가 될 수 있다는 것이 기독교의 진리입니다. 이 전쟁은 하나님의 공의의 모순되는 존재인가를 항상 검토해서 불의의 세력을 막기 위한 것일 때는 목숨을 바쳐 순교자적으로 전쟁을 해야 되는 것이 기독교의 진리 아닙니까?
이제 대한민국은 뚜렷해진 희망과 갈등이 확실해졌습니다. 선진국 문턱에 와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나라들도 이런 경우를 많이 거쳐 갔습니다. 이때 잘하면 한층 업그레이드된 국가가 건설될 것입니다. 이때 잘못하면 아르헨티나이나 필리핀 같은 결과로 분명하게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한때 세계 4대 강국이라고까지 말하던 아르헨티나가 급격한 빈민국가로 타락했고 동양의 흑진주라고 불리던 필리핀이 빈민굴이 되지 않았습니까? 까딱 잘못하면 그렇게 됩니다. 국민 각자가 이성적 판단을 하여 국민 모두가 함께 살 수 있는 길을 선택하는 지혜가 가장 필요한 때입니다. 무정부 상태, 무질서인 혼란의 상태, 이성적 판단 없이 그렇게 나간다면 이 나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제가 텍사스에서 개척교회를 할 때 미국 교회를 빌렸습니다. 그 교회 담임목사는 존 크레그 목사였습니다. 그때 미국 사회의 제일 큰 문제는 크라이슬러 자동차 회사가 문을 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거 어떡하나? 우리에게 그렇게 좋은 차를 만들어주던 회사가 문을 닫게 되다니!’ 목사님이 그 주간에 자기 자동차를 클라이슬러 자동차로 바꾸셨습니다. 그리고 교인들에게 “여러분 중에 지금 차를 바꿀 시기가 된 분이 계시다면 망해가는 클라이슬러를 살려주기 위해서 클라이슬러 자동차로 바꾸면 어떻겠습니까? 그것이 우리 기독교인이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광고를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그 담임 목사님의 광고를 듣고 감동을 받아서 많은 교인들이 클라이슬러로 자동차를 바꿨습니다. 클라이슬러 회사 망하지 않았잖아요? 국민 각자의 의식이 분명하다면 우리나라는 선진국 문턱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대한민국을 축복하셨습니다. 축복받은 한국을 관리하고 지키는 사람은 우리 자신입니다. 국민 모두가 지혜로운 판단을 하면서 우리가 늘 부르는 “대한민국 만세”가 이루어지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사랑과 나라사랑
이수영 목사 / 롬 13:1-7
오늘 본문 바로 앞에 있는 12장에서는 사랑과 용서와 원수 갚기를 하나님께 맡겨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습니다. 9-10절에서는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라.” 했고, 14절에서는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했습니다. 또 17-20절에서는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했으며 마지막으로 21절에서는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하는 말로 끝을 맺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절 바로 다음의 8절에서 사도 바울은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하는 말로 다시 사랑의 권면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로마서 12장은 13장 8절에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말은 오늘 본문인 13장의 1-7절은 그 전후의 문장 사이에 갑자기 끼어든 낯선 내용이라는 생각이 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오늘 본문이 바로 앞선 12장의 내용에 뒤따라야 하는 꼭 필요한 권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앞에서 개인적인 복수를 금하는 권면을 한 후 사도 바울은 그 권면이 국가가 범죄에 대해 처벌하는 것까지 금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님을 분명히 할 필요를 느꼈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게다가 비기독교 세상에서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정권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대하여야 할 것인지에 관해 뭔가를 말해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더군다나 “아무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12:17)는 말이나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12:17)는 말을 오해하거나 악용하여 사회적 범죄를 쉽게 저지르는 일이 없도록 신앙에 입각한 바른 사회생활의 자세를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리라는 판단에서 쓴 글이 오늘 본문이라고 보며 그러기에 그것은 낯선 내용도 아니고 갑자기 끼어든 글도 아니라는 견해입니다. 아무튼 오늘 본문은 하나님나라 백성이 이 세상에서의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데 관해 가장 기본적인 사고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과 더불어 살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으므로 하나님나라의 삶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다시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될 사람들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택하신 백성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주시고 믿는 이들을 의롭다 여기시며, 의롭다 하신 이들을 계속해서 말씀과 성령을 통하여 거룩한 존재로 변화시켜 가시면서 하나님나라의 완성을 향해 당신의 계획을 실현시켜 가십니다. 믿는 이들은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복된 삶을 살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삶에로 택하심을 받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본래 죄인인 사람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영원한 생명과 복된 삶에로 구원하시는 은혜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베푸시는 일반적인 은혜도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든지 안 믿든지 차별 없이 누구나 누리게 하시는 은혜입니다. 햇빛의 유익을 누리고 잠시도 쉬지 않고 공기를 마실 수 있다는 것만 해도 죄 지은 모든 사람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비가 내릴 때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만 골라서 내리지 않는 것도 하나님의 일반 은혜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또 하나님께 죄 지은 사람이라고 해서 인간세계가 하루아침에 짐승들의 세계나 마귀의 세상처럼 되게 내버려두시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고 비록 그들이 죄를 범한 인간이지만 본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은 존재답게 살 수 있도록 다양한 재능을 남겨두셨고 그것들을 잘 활용하여 인간세계의 삶이 가능한 한 편안하며 평화롭고 윤택하게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그 재능을 가지고 사람들은 기술과 학문을 발전시키고 예술을 발전시키며 인간의 삶이 다른 피조물들의 삶과는 차원이 다른 삶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죄인인 인간의 세계가 무질서하고 혼돈스러우며 불안하고 살기 끔찍한 지옥 같은 세상으로 돌변하지 않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일반 은혜의 하나가 정치적인 능력입니다. 즉 법을 만들고 질서를 유지하며 사회적 약속을 존중하여 서로 신뢰할 수 있고 편리하며 평안한 삶이 보장되는 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 지혜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런 목적으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이 국가권력이며 정부이고 공권력을 위임 받은 통치자입니다. 하나님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만의 창주이시며 주권자이신 것이 아니고 모든 인간, 모든 민족, 모든 나라의 창조주이시고 주권자이십니다. 따라서 그 어느 집단, 어느 국가의 통치자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지 않은 통치자가 없으며 모든 권력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모든 불법 집단이나 모든 포악한 통치자도 다 하나님께서 직접 세우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 어떤 공동체나 사회나 국가도 공권력과 그 공권력을 위임받은 통치자에 의해 다스려지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거슬려 권력을 탈취하고 포악함으로 다스리는 군주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만 그들도 지혜롭고 공의로우시며 언제나 결국은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주권을 벗어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비록 군주나 통치자가 하나님을 믿는 신자가 아니라 할지라도 모든 권력은 그 근원이 하나님이시고 근본적으로 그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국가 권력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이 국가에 대한 국민의 의무를 부인하게 하는 것 아닙니다. 따라서 국가 권력에 불복종하는 것은 그 근원이신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1-2절에서 쓰기를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빌라도가 말하기를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했을 때 대답하시기를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라.” 하셨습니다(요19:10-11).
물론 신자들이 복종할 수 없는 일을 정부나 통치자가 요구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신앙의 자유를 억압하거나 보편적 가치와 일치하는 신앙인의 양심으로 행할 수 없는 일을 강요할 때입니다. 그럴 때 그리스도인은 궁극적으로 순종할 이는 오직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행전에서 우리는 사도들이 권력의 명령에 불복종한 명백한 두 차례의 사례를 봅니다. 먼저 행4:1-20이 전하는 사례입니다. 사도들이 백성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전하며 가르치자 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과 사두개인들이 사도들을 잡아 가두고 심문도 한 끝에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때 베드로와 요한은 대답하기를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며 그들의 명령을 따르기를 거부한 것입니다.
그 후 사도들이 많은 이적기사를 행하고 백성이 그들을 칭송하며 남녀의 큰 무리가 믿고 주께로 나아오자 대제사장과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또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러나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어주어 밖에 나온 사도들은 다시 성전에 서서 백성을 가르쳤으며 다시 잡혀가 공회 앞에 섰을 때 대제사장이 예수의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는데도 말을 듣지 않음을 추궁하자 베드로와 사도들은 대답하기를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했던 것입니다(행5:12-29).
이렇게 그 어떤 권력이든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명백하게 범하는 일을 요구할 때 우리는 그것을 따를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이때의 저항은 폭력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 되며 우리의 손해와 순교까지도 각오하는 저항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국가 권력이나 통치자의 요구나 명령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신앙과 충돌하지 않으며 예배와 신앙생활을 억압하는 것이 아닐 때 우리는 기꺼이 존중하고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정부는 사회의 유익을 위한 하나님의 도구의 역할을 하는 것이며 악을 행하는 자들을 벌주기 위한 하나님의 대리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부나 국가권력이나 통치자는 따라서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선을 행하며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렇습니다. 다만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는 두려운 존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 3-4절에서 사도 바울의 말을 들어봅니다: “다스리는 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사도 바울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소유여부를 떠나서 통치자는 “하나님의 사역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역자들에게 악을 행하는 자들을 징치할 칼을 주셨다고 합니다. 본문 4절 중간 이하를 봅니다: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 칼은 권력의 상징입니다. 이것은 법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정부가 힘을 사용할 수 있다는 성경적 근거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통치자에게 벌할 자를 벌하기 위하여 공권력을 사용할 권리를 위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명백한 의지에 거스르지 않는 한 나라 법에 불복종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목적을 침해하는 일입니다.
모든 권력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라는 사고는 이에 복종하는 것을 하나님께 순종하는 일 가운데 하나로 여기게 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나라 법과 공권력에도 복종해야 합니다. 나라사랑은 곧 하나님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궁극적 주권자이신 나라도 사랑해야 마땅한 것입니다. 나라사랑이 하나님사랑이라면 나라의 법을 지키고 질서를 지키되 마지못해서나 처벌이 두려워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양심을 따라 지키며 지키는 것이 옳은 일이기 때문에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본문 5절에서 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복종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진노 때문에 할 것이 아니라 양심을 따라 할 것이라.”
나라를 사랑하며 나라의 법을 지키는 일 중에 중요한 것이 나라에 세금을 제대로 내는 것입니다. 본문 6-7절을 봅니다: “너희가 조세를 바치는 것도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들이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받을 자에게 관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모든 종류의 세금이나 공과금을 빠짐없이 정확히 내야 한다는 말입니다. 조세당국자뿐 아니라 모든 공직자들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쓴 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나라사랑이 무엇인지와 국민으로서 지켜야 할 기본적인 의무가 무엇인지를 잘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나라도 사랑해야 합니다. 이 나라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은 나라의 공권력에도 복종해야 합니다. 모든 권력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는 사람은 나라 법과 질서도 잘 지켜야 합니다. 모든 나라가 법과 질서를 따라 다스려지기를 원하신 이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세금 잘 내야 합니다. 병역의 의무를 기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위장전입 하지 말아야 합니다. 불법 투기로 재산증식 하지 말아야 합니다. 경찰에게 함부로 화염병 던지고 쇠파이프 휘두르는 일도 해서는 안 됩니다. 공공기물을 파괴하고 시내교통을 마비시키며 무법천지로 만드는 시위행태도 사라져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국가권력과 통치자를 향한 국민의 의무와 도리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국가권력과 통치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행하며 국민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도 가르치는 것입니다. 국가권력이나 통치자들은 모든 권력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명심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정직하고 성실하며 공평무사하게 권력을 행사해야 합니다. 국민에게 공포를 주어서는 안 됩니다. 공포 대신 신뢰와 친밀감을 주어야 합니다. 법을 어기는 자들에게는 준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쥐어 주신 칼을 써야 할 데는 안 쓰고 휘두르지 말아야 할 때 휘두르지 않아야 합니다. 가난한 계층에게서는 세금을 쥐어짜고 부자들에게는 요리조리 다 빠져나가도록 눈감아주어서는 안 됩니다. 국민 앞에 솔선수범하여 탈세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위공직자들이 자기 자식들 병역의 의무 기피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자녀교육을 위해서랍시며 위장전입 하지 말아야 합니다. 불법 투기로 재산증식 하지 말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신앙과 선교의 자유를 억압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권력의 근원이시고 주인이신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며 또한 누구보다도 우리나라를 사랑해야합니다. 하나님이 세우시고 지키시며 주인 되신 이 나라를 우리가 사랑할 때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사랑하시며 이 나라와 늘 함께하실 것입니다.
세상법과 하나님의 법
롬 13:1-7 / 조재호 목사
이 세상에는 우리 눈으로 보이는 것이 있고 보이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건네주는 선물은 눈에 보이지만 선물에 담긴 존경과 축하와 사랑은 보이지 않습니다.
아파트와 집은 눈에 보이지만 그 집안에 자리 잡고 있는 가정의 행복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학생의 성적표는 눈으로 보이지만 그 사람의 실력은 눈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교회당은 현실적으로 눈에 보이지만 성도의 믿음과 은혜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이 중요하지만 때로는 보이지 않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할 때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보이는 나라와 보이지 않는 두 개의 나라가 있습니다.
보이는 나라는 세상 나라이고 보이지 않는 나라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대한 민국은 눈으로 보이는 나라이고 하나님 나라는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나라이다.
대한 민국의 땅이 다르고 대한민국의 말이 다르고 사람이 다르고 산이 다릅니다.
보이는 일본 땅과 우리 땅이 다르고, 보이는 일본 사람과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릅니다.
유럽을 여행하다 보면 국경선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쪽과 저쪽이 확연히 다른 것을 보게 됩니다
사람 얼굴이 다르고 말이 다르고 땅 색깔이 다르고 집 모양이 다릅니다.
얼마 전 조선족교회 박전도사가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일년에도 수 십 번 북한을 방문한다고 합니다. 두만강이라는 선만 넘으면 냄새도 다르며 서울에 오면 안 먹어도 배가 부른데 북한에 가면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프다고 고백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동시에 두 나라에서 삽니다. 하나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이고 다른 하나는 천국이라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사도 바울은 두 개의 시민권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천부장이 바울을 신문하면서 바울이 로마 시민권자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는 돈을 많이 들여 이 시민권을 얻었노라. 바울이 가로되 나는 나면서부터로라”(행22:28)
로마 시민권은 보이는 나라의 시민권입니다. 바울은 대제국 로마의 당당한 시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한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빌 3:20)
로마는 보이는 나라이고 하늘 나라는 보이지 않는 나라입니다. 사도 바울은 현실적으로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로마 시민이었고 신앙적으로는 하늘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천국 시민이었습니다.
우리도 두 나라에서 삽니다. 하나는 보이는 대한민국이고 다른 하나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나라를 이끌고 다스리는 데에 법이 존재합니다.
이 나라에는 대한민국의 국법이 있고 하나님 나라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법 중에서 최고의 법은 헌법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법 중 최고의 법은 십자가의 법입니다.
오는 17일 수요일은 제헌절입니다. 제헌절은 1948년 대한민국 헌법을 제정 공포한 것은 기념하는 날인데 조선왕조의 건국일인 7월 17일에 맞추어 공포하였습니다.
당시 제정된 헌법 전문(前文)을 보면,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 정의(正義)인도(人道)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며 모든 사회적 폐습을 타파하고 민주주의 제도를 수립하여 ...(중략)...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결의하고 우리들의 정당(正當) 또 자유로 이 선거된 대표로써 구성된 국회에서 단기 4281년 7월 12일 이 헌법을 제정한다. 단기 4281년 7월 12일 대한민국 국회의장 이승만]
지금 현재 헌법의 총강 [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2장 국민의 권리와 의무, 10조,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11조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12조 모든 국민은 신체의 자유를 가진다] .. 그 외 거주 이전의 자유, 직업 선택의 자유, 주거의 자유, 사생활 비밀의 자유, 양심의 자유, 종교의 자유, 언론출판의 자유 등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대한민국의 백성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무엇이 이 나라와 하나님을 위하여 바람직한 삶입니까?
1. 그리스도인은 합당하게 권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귄위를 인정하고 따라야 합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1)
권세하면 주어진 권력을 자꾸 남용하여 개인의 유익을 챙기는 세도가, 탐관오리 생각이 나기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권세라는 말을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권세를 번역하면 권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나 직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나라 이 사회에는 권위가 필요합니다. 권위주의가 아닌 진정한 권위가 필요합니다.
대통령의 권위나 장관의 권위가 잘 세워져야 하고 직장 상사의 권위가 잘 세워져야 합니다.
교회에도 가정에도 권위가 살아 있어야 하고 잘 세워져야 합니다. 가정에서 아버지의 권위가, 학교에서 선생님의 권위가 살아 있어야 합니다. 책임자에게 권위가 있습니다. 오케스트라 지휘자에게 권위가 있습니다. 문을 지키는 경비에게도 권위가 있습니다.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굴복하라는 것은 그 앞에 무릎을 꿇어라가 아니라 잘 따르라는 것입니다.
사거리 교통신호등이 고장나자 차량들이 엉키기 시작합니다. 조금 후에 아주 젊은 교통경찰이 나타났습니다. 이내 빨간 봉을 꺼내들어 수신호를 시작하기 시작하자 모든 차들이 젊은 교통경찰의 수신호에 따라 움직여 나가기 시작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합당하게 부여된 권위를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따라야 합니다. 더 나아가 공직자들 대표자들을 위해서 기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공동체와 자신의 발전과 평안을 가져 올 수 있습니다.
2. 그리스도인은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나라의 백성으로서 나라의 법과 질서를 잘 지켜야 합니다.
몇 년 전 1천명의 남녀에게 설문조사를 했었습니다. 93.5%가 법은 지켜야 한다고 응답했는데 72.2%가 법을 지켜 손해를 보는 경우가 많다고 응답하였습니다. 우리에게 법은 지킬수록 손해라는 생각이 들어 있습니다.
이 나라의 법과 질서가 무너지면 어떻게 될까요? 쓰레기장 같이 엉망이 될 것입니다.
법을 지키지 않으면 무법천지가 됩니다. 흩뜨려 놓은 지저분한 쓰레기통 같이 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사회가 비닐봉지가 터져 지저분하게 흐트러진 쓰레기통같이 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어서 혼란과 혼동을 거두워내시기 원하십니다.
“형제들아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 (고전 14:40)
나라의 기틀을 마련했던 제헌절을 생각하며 법과 질서를 준수하는 선진 국민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3. 그리스도인은 나라에 대하여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바리세인과 헤롯 당원들이 예수님을 책잡으려고 질문을 합니다. “가이사에게 세금 바쳐야 합니까 아니면 하나님께 받쳐야 합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데나리온을 가져 와라. 누구의 그림이냐?“ ”가이사으,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 것은 하나님께드려라“
예수님은 십자가와 사랑이라는 하나님 나라의 법을 선포하시기 위해서 오셨지만 세상에서 백성으로서 지켜야 하는 법도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에 대한 하나님 백성의 행함도 말씀하셨지만 국가에 대한 의무도 말씀하셨습니다.
나라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기 이름내려고 하는 정치인이 아니라 이름없는 백성들입니다.
나라를 건강하게 만드는 사람은 자기 욕심만 챙기는 사람들이 아니라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사람들입니다.
6월의 월드컵을 지내면서 우리는 대한민국의 백성 됨을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태극기가 자랑스러웠고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이 나라를 사랑하시는 좋으신 하나님의 법 아래서 대한민국의 평안과 발전과 축복을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질서와 권위의 하나님
김홍도 목사 / 롬 13:1-7
<1.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신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요,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고전 14:33, 40). 하나님은 온 우주를 질서정연하게 운영하고 계십니다. 만일 하늘을 운행하고 있는 유성들이 조금만 자기 궤도를 벗어나거나 속도가 틀려진다면 별과 별이 부딪쳐서 질서가 깨지고 온 우주는 뒤죽박죽이 되고 말 것입니다.
즉 코스모스(cosmos 우주질서)는 카오스(chaos 무질서, 혼돈)가 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사는 이 세상도 혼돈과 무질서를 원치 않으시고 질서있는 세상이 되기를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이 세상 여러 가지 제도와 권위 혹은 권세 (authority)를 주시고 권위에 복종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처음 하나님께서 세상만물과 인생을 창조하시고 모든 피조물을 아담의 지배아래 두셨고 아담은 하나님 앞에 복종하도록 만들어 두셨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남편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하여 제 멋대로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말미암아 이중적 권위를 무시했고 질서를 파괴했습니다. 이 결과로 인간에게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왔습니다.
땀을 흘려야만 먹고 살게 됐고 여자들은 해산의 고통을 당해야만 됐고 그외에도 여러 가지 고통이 세상에 온 것은 질서를 파괴하고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하고 불순종한 까닭입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신 고로 이 세상에 질서를 위해서 사람을 따라 권위와 권세를 주셨습니다.
예를 들면 가정에서도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라(엡 5:2) 했고, 자녀들은 부모에게 복종하라(로마서 13:l, 벧전 2:13)고 했습니다. 또 세상에서 백성들은 집권자들에게 순종하라고 오늘 본문에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나 간섭하시지 이 세상 정치 같은거야 무슨 상관 있을라구? 목사나 하나님께서 세우셨으면 됐지 세상 임금이나 집권자들도 하나님이 세우셨을까?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사람이 선거해서 뽑은 대통령이지만 배후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어서 세운 것입니다. 직장이나 기관에서도 아랫사람은 윗사람에 순종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요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또 교회에서는 말씀을 배우는 자들은 하나님의 종들에게 혹은 위에 있는 직분에 순종하라(히 13:17)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권위에 순종하여 질서를 지키는 것을 원하시고 또 권위에 순종하는 그 사람을 권위자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에서든지 직장에서든지 교회에서든지 어디서든지 질서있는 것을 우리 하나님께서는 원하십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질서의 하나님이시요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신 것입니다.
<2. 모든 권위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권세와 권위는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며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로마서 13:l 말씀에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authority)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이 정하신 바라"고 말씀했습니다. 어떠한 권세든지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왔고 하나님이 정하신 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정에서나 세상에서나 교회에서나 모든 권위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시고 위임하신 것이지 하나님께 로부터 나오지 않은 권위란 없다는 것을 우리 성도들은 잘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위임한 권위자에게 도전하는 것은 그 사람 속에 계신 하나님께 도전하는 것이며 권위자에게 범죄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 모든 권위가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알면 순종은 쉬운 것입니다.
예를 들면 가정에서 아내는 남편에게 단순히 내 남편으로만 알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의 남편에게 남편의 권위를 주셔서 나로 하여금 순종하게 하셨음을 알아야 하고 또 순종해야 합니다. 그래야 가정이 화평하고 그 아내는 복을 받습니다. 또 자녀들은 부모가 잘났든 못났든 하나님의 권위를 가진 부모임을 알고 순종해야 합니다. 오늘의 많은 사람들이 부모님의 권위를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을 믿고 순종할 때 그 사람이 그 자녀가 복을 받는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에베소서 5:22-24에 보면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했습니다. 교회가 그리스도께 하듯이 아내들도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하셨는데 "내가 더 똑똑한데, 공부도 내가 더 많이 했는데" 하면 그것은 하나님 권위를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제 아무리 똑똑한 것 같아도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합니다.
에베소서 6:1에 보면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식이 아무리 훌륭한 것 같아도 무식하고 술주정뱅이 부모님이라도 부모님께 순종해야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십니다. 부모가 잘났든 못났든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부모님은 하나님께서 주신 권위자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세상에서도 "예수 믿지 않는 대통령,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 그까짓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 천만에 올시다. 왕이나 집권자들은 질서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맡겨준 권위자임을 알고 주 안에서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13 이하에 보면 "인간에게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챙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그의 보낸 방백에게 하라"고 했습니다. 단 부모나 국가의 명령이 하나님의 뜻에 배치될 때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부모님이나 국가가 주는 벌을 받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되고 부모나 국가에 대해서는 벌을 받음으로써 복종하게 되니 둘 다 순종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22에 "종들아 모든 일에 육친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간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 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직장에서도 아랫사람은 윗사람에게 순종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믿는 사람인고로 그 누구보다도 순종을 잘 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교회에서는 더욱이 하나님의 종들과 위에 있는 직분들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3:17에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개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고 했습니다.
순종은 자원해서 기쁨으로 듣는 것이고 복종은 싫어도 억지로라도 듣는 것입니다. 순종을 못하겠거든 복종이라도 하십시오. 교회에서나 가정에서나 세계에서나 우리는 모든 권위있는 자들에게 그 권위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알고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3. 권위에 순종함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권위에 불순종하고 범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함이요 하나님을 범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성경 최대의 요구입니다. 이사야 14:12-15, 에스겔 28:13-17에 보면 사탄의 기원은 하나님의 권위에 반역한 데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범죄는 곧 하나님의 권위에 반역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슨 일을 하기에 앞서 하나님의 권위에 순종하는 법을 먼저 배워 야 됩니다. 사무엘상 15:23에 보면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우상 숭배나 다른 신 섬기는 것이 무서운 죄지만 하나님의 권위에 거역하고 또 제 고집대로 하는 것도 우상 숭배나 점치는 죄와 같습니다.
창세기 9:20 이하에 보면 노아가 홍수가 지난 다음에 포도주를 마시고 취해서 옷을 다 벗어버리고 하체를 드러내 놓은 채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이 때 세 아들중 함이 이 광경을 보고 나와 셈과 야벳에게 비방을 했습니다. 그러나 셈과 야벳은 옷을 찾아 눈을 감고 뒷걸음질 쳐서 아버지를 덮어 드렸습니다. 노아가 잠이 깨어 이 사실을 모두 알았습니다. 그래서 셈을 축복하기를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했고 야벳은 "창대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함에게는 "형제들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셈족은 우리 황인종인데 영적 축복을 받아서 모든 영적 지도자가 대체로 셈족에서 나왔습니다. 야벳족은 백인들인데 창대케 되리라는 말씀대로 물질적 축복을 받았습니다. 함족은 흑인인데 말씀대로 되고 말았습니다. 실수는 노아가 했는데 왜 함을 저주해 이렇게 의문을 가지기 쉬우나 노아가 지은 도덕적 행위의 잘못보다는 함이 아버지 족장 노아를 비방한 것은 하나님의 권위를 비방한 것이요, 하나님께 도전하고 죄를 범한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이것은 노아가 벌거벗은 수치에 비할 바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함이 종의 종이 되리라 한 것은 무엇인가 하면 권위에 순종하는 사람은 점점 더 권위가 높아지는 것이고 권위에 불복종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노릇하고 밟히게 된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민수기 12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 모세가 구스 여인을 얻었습니다. 그랬더니 모세의 형 아론과 누이 미리암이 비방을 하며 또 여호와께서도 자기들에게도 말씀했다고 하며 도전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주범자 미리암을 쳐 문둥병에 걸리게 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가정에서는 모세가 아론과 미리암의 권위에 따라야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일하는 데서는 모세가 권위자입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노하신 것입니다.
미리암과 아론은 자기 동생을 다스릴 수는 있지만 하나님의 권위자에게 도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또 모세의 태도 가운데서 훌륭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누님과 형에게 말대답도 화도 내지 않고 자기의 권위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알기 때문에 방어나 변명치 않고 조용히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 권위를 지키시며 미리암을 치셨습니다. 권위(authority)는 능력(power)보다 월등하게 높은 위치에 있습니다. 능력은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지만 권위는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상 24장 이하에 보면 사울왕이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버림받은 후에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택하여 기름을 부어 왕을 삼았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사울도 왕으로 있고 다윗도 잠정적이지만 왕으로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하나님 앞에 버린 바 된 것을 회개하지 않고 다윗을 죽이려 했습니다.
그 때에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한 번은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굴속에 숨어 있는데 사울왕과 그의 부하들이 다윗을 찾다 못찾고 피로하여 그 굴에 들어와 잠을 자게 됐습니다. 이 때에 다윗의 신하가 "다윗왕이여 명령만 내리십시오. 단칼에 처치하겠습니다" 할 때에 신하를 말리면서 "하나님께 기름받은 자를 어찌 사람이 손을 대겠느냐" 하고 그의 옷자락만 베어 가졌습니다. 후에 다윗은 사울 왕에게 "내 주 왕이여!" 하며 부르고 절한 후 "왜 나를 죽이려 합니까?
하나님께서는 왕을 내 손에 붙혔지만 기름부은 자인고로 손대지 아니하였습니다 " 했습니다. 이 때 사울은 약간 회개하는 것 같았으나 또 죽이려고 쫓아 다녔습니다. 얼마후 황무지에서 또 쫓아 다니다가 군사들을 다 포위하고서 사울왕이 잠을 잤습니다.
다윗이 또 부하들을 데리고 가서 사울왕이 잠자는 곁에 갔을 때 신하가 창으로 찌를 것을 종용했으나 사무엘상 26:9에 보면 "누구든지 손을 들어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하며 창과 물병만 가지고 왔습니다. 자기가 왕이 되는 것을 연기할지언정 하나님께서 기름부은 자를 죽이고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자기도 기름부음 받은 왕입니다. 그러나 비록 시들어가는 사울왕이지마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자임을 알고 절대로 손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실을 끝까지 지켜 보셨습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순종한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하나님께서 "내가 다윗을 보니 내 마음에 합한 자라" 하신 것입니다.
사도행전 23:1 이하에 보면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을 데려다 심문하면서 바울의 입을 치라고 했습니다. 이 때 바울이 화가 나서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께서 너를 치리로다. 네가 나를 울법대로 판단한다고 하면서 나를 치라 하느냐" 하며 대항하자 옆에 있던 사람이 "네가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욕하고 그러느냐" 하고 일러주니까 그 때 사도 바울은 얼른 사과하면서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 기록하였으되 너의 백성의 관원을 훼방치 말라"고 하였습니다.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를 못 박아 죽이기까지 하는 대제사장들이지만 사울은 권위를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성자 예수님께서는 죽기까지 하나님의 권위에 복종하였으므로 모든 무릎을 예수님의 이름 앞에 꿇게 하셨습니다. 권위에 순종한 자만이 권위자가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권위자가 지녀야 할 필수조건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① 모든 권위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나의 공적에 의해서 권위가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서 권위가 맡겨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서 족장들의 지팡이를 하나씩 가져다 성전에 갖다 놓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룻밤이 지난후 유일하게 아론의 지팡이에서만 싹이 나고 잎이 돋아 열매가 맺혔습니다. 아론의 지팡이도 바싹 마르고 아래 위를 자른 나무인데 이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부활의 능력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지팡이가 특별한 것도 아니요 아론이 잘나서 그런 것도 아닙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권위란 말씀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들도 남달리 무슨 권위가 있다든지 남의 지도자가 되었다든지 목사가 되고 또 교회가 부흥되었다 하는 것이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권위를 맡겨 주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권위는 집행하는 것 뿐이오 내가 권위를 만들 수도 지킬 수도 없는 것입니다. 내가 권위있게 할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잘 알고 그 뜻을 순종만 하면 하나님께서 계속 권위자가 되게 하십니다. 자기가 먼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다른 사람도 그에게 순종합니다.
[② 권위자는 자기 자신을 부인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 전에는 자기 생각대로 함부로 입을 열고 권위를 행사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인간적인 생각을 소중하게 알아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권위자가 되려면 자아가 완전히 부서지고 녹아져야 합니다. 자기 고집을 내세우는 자는 영적 권위를 소유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권위는 점점 떨어집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음성을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③ 항상 주님과 교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할려면 하나님과 깊이 영교하는 기도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영교해 보지 않고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함부로 말하고 행동하면 문제가 생기고 또 확대됩니다. 대개 교회의 문제는 어디서 오는가 하면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함부로 말하고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도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교회의 난문제들은 하나님의 종들이 제 마음대로 하는 데서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늘 살면서 하나님과 계속 기도를 해야 하며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온전하고 선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그 뜻대로만 따르면 다른 재주가 없어도 다른 지식이 좀 부족해도 하나님 께서는 하나님의 권위자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권위자가 조심해야 될 일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첫째로 인간 자신이 자신의 권위를 세우려 들지 말고 자기 스스로 권위를 방어하려고도 말아야 합니다.
순종 안 한다고 강요하지도 말고 결코 다투어서도 안 됩니다. 내 말을 안듣는 것은 하나님께 불복종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타인이 반대해도 꾹 참고 자기를 반성할 줄 알고 나가면 되는 것입니다. 내 권위가 위태롭게 도전을 받고 있을 때에도 하나님께 맡기고 아무 변명도 투쟁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로 비방의 말에 신경을 쓰지 말아야 합니다.
미리암이 비방할 때 모세는 변명도 약간의 요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비방의 말을 들으셨다고 했습니다. 내가 가만히 있을 때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시는 것입니다.
셋째로 자기 방어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방어를 해 주셔야지 내가 방어를 하려 하면 권위는 점점 떨어지고 맙니다. 변호는 시간이 되면 해주시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넷째로 지극히 온유해야 합니다.
민수기 12장에 보면 "모세는 지상의 모든 사람들보다 그 온유함이 승하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목이 곧은 사람, 강퍅한 사람에게는 권위를 주시지 않습니다. 도리어 사도 바울처럼 신체적으로 약하고 구변이 대단치 않은 사람에게 권위를 주십니다. 그것은 그런 사람이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강력한 결단력과 현명한 사상 능란한 웅변이 있어야 지도자가 되는 줄 압니다.
또 한 가지는 권위의식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아론의 싹난 지팡이에서 알 수 있듯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권위입니다. 권위를 많이 가질수록 권위위식을 갖지 마십시오. 자기가 권세자이지만 권위자인 줄 모르는 복스러운 어리석음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주여 저에게 이 어리석음을 영원히 가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것이 저의 소원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책임
김태영 목사 / 롬 13:1-7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셨던 날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고난과 죽음을 아시면서도 그 길을 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오늘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가 닮아야 할 모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천국의 시민이며 동시에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천국 시민으로서의 의무와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성실히 감당해야 하는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질서 속에서 어떻게 의무를 다해야 하는가?를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권세에 순종해야 합니다.
세상의 질서 속에 있는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께서는 부여하신 모든 권위에 순종하라고 하십니다. 인간평등 사상이 편만한 오늘날 통치자들에게 굴복하라는 말씀은 우리가 실행하기에는 부적합한 듯이 보입니다. 하지만 이는 무조건적인 복종을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도 현존하는 통치체제를 통해 안정된 사회를 가꾸어 가는 데 동참해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권세자들은 하나님의 사자라고 합니다. 이는 그들이 사리사욕이나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만을 추구한는 것이 아니라 우선 자신들이 하나님의 종임을 기억해야 하고 통치 받는 사람들로 하여금 선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고, 악을 행하는 자를 제지하는 일도 해야 할 일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세상의 질서를 부인하고 세상과 분리된 삶을 사신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질서 속에서 세상의 통치자들의 권위를 인정하며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세상의 질서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하는 모습은 순종함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순종함으로 세상의 질서를 바로 세우고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드러내는 삼락가족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 양심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이 하나님의 조화로운 품성과 걸맞게 평화와 안정 속에 풍요로워지도록 힘써야 합니다. 우리를 다스리는 권력자들이 도덕적으로 선하지 못할 때에도 우리는 양심에 따라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깨끗한 양심이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는 무오한 인도자는 아닙니다. 고전4:4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지 못하노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의의 길을 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양심을 따라 사는 것이 의의 길로 가는 출발점입니다. 법은 질서를 바로 잡기 위해 세워진 것입니다. 반면에 양심은 우리 안에 있는 선함의 기준입니다. 악을 막기 위한 법의 테두리 보다는 선을 추구하고자 하는 깨끗한 양심의 길이 더욱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삶으로 인도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법에 따라 살아도 되지만, 세상에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깨끗한 양심을 따라 더욱 바르고 더욱 정직하게 살아서 큰 영향력을 끼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똑같은 환경과 상황 속에 있지만 깨끗한 양심에 따라 바르고 정직함으로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삼락가족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3) 사회적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바울은 세금의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유대인들의 상황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사회적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들보다 더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의무와 세상 시민으로서의 사회적 의무를 다해야 하기에 그들과 똑같은 삶을 살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짐을 지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마11:28-29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온유함과 겸손함을 배우고 그 예수님을 따라가면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의무와 사회적인 의무를 다함으로 세상에서는 맛볼 수 없는 평강을 누리는 삼락가족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이제 우리가 바르게 서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세상의 질서 속에서 권세자들에게 순종하며, 법이 아닌 깨끗한 양심을 따라 더욱 정직하고 바른 삶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회적인 의무를 다하심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처럼 세상의 질서 속에서도 왕의 위엄과 제사장의 거룩함과 선지자의 정의로움으로 살아가는 삼락가족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권세자들에게 복종해야 할 이유
민병석 목사 / 롬 13:1-7
성경에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분에 대하여 세상에 속하지 않고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않음같이 너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나라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영적인 신분을 말한 것이지 우리들의 육신적인 삶까지를 의미해 주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분명 아니지만 그러면서도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후에도 여전히 이 사회의 한 구성원어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사회생활이나 사회법규의 치외법권 자가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인들과 국가 또는 권세 자들과의 관계가 설정되는 것입니다.
1.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바울은 13장 초두에서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씀해 주고 있는 권세란 국가권세를 의미해 주는 말입니다.
(1)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다고 했습니다. 국가와 교회는 별개의 것이지만 이 모두를 세우신 분은 한 하나님이십니다.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열방의 대 주재 심이로다”고 말씀했습니다(신22:28). 모든 권세란 표현은 선악의 구별을 둔 것이 아닙니다. 선정을 베푸는 권세이든 폭정을 베푸는 권세이든 이 땅 위에서 세워진 권세는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지 않음이 없는 것입니다. 애굽, 바벨론, 헬라, 로마 같은 나라의 존립도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진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의 주관자들도 오직 하나님에 의하여 세워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에게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아시리이다”고 말해 주었습니다(단4:25).
(2) 권세 자들에게 굴복해야 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바를 거역하는 일은 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재판한 빌라도는 분명 악한 통치자였습니다. 물론 예수를 빌라도에게 넘겨준 자들도 악한 무리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판결에 따라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권세가 위로부터 주어진 것이었기 때문입니다(요9:11). 2절을 보면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지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라”고 정죄하고 있는 것입니다.
(3) 바울이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권세 자들의 권위는 주로 도덕적인 차원의 법을 의미해 주는 것입니다. “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된다”고 한 말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아무리 포악한 권세자라 할지라도 사회생활의 안정과 평안을 위한 선한 법규는 시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누구든지 이것을 파괴하려고 한다면 사회질서가 무너지고 모든 인류의 안정된 생활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2. 양심을 인하여 굴복하라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권세 자들에 대하여 굴복하는 일에 대하여 “노를 인하여만 할 것이 아니요 도한 양심을 인하여 할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같은 표현에는 다음 몇 가지 뜻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1)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선한 양심이 있습니다. “선한 양심을 가지라”고 하였고 세례의 뜻은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벧전3:16,21). 그리스도인의 양심은 하나님께서 세상 권세 자들에게 이 같은 통치권을 주신 사실을 인정하고 따르는 것입니다. 아무리 독재 정권 하에 있는 국가라 하더라도 인간의 양심에 의한 도덕적 규범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2) 그러나 종교적인 문제가 야기될 경우가 있습니다. 어느 권세자가 기독교를 법령으로 금지시키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하는 경우에 있어서 우리의 취할 태도는 명백합니다. 예수님이 친히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마22:21). 가이사의 권세는 일반적인 세상적 권세를 상징합니다. 가이사의 권세는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역이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거역하는 어떤 권세 자들의 명령에도 굴복할 수 없습니다. 인류의 마지막 시대에는 적그리스도가 등장하여 온 인류로 우상 앞에 경배케 한다고 했습니다. “저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고 했습니다(계13:15). 이런 경우의 해답을 다니엘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 아니 하실 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3:17,18). 이 같은 대답은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이 두라 평지에 세운 왕의 신상에 경배하지 않는다고 극렬히 타는 풀무 불에 던져 넣음을 당하게 되었을 때 다니엘의 세 친구인 사드락, 메삭, 아뱃느고가 왕에게 대답한 말입니다. 사람의 양심보다 우선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명입니다. 양심은 도덕적 선을 추구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그 보다 더욱 차원이 높은 절대적인 선을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3) 공세와 국세에 대해서도 마땅히 바쳐야 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이 사회에 살아가고 있는 이상, 사회인으로서의 의무에 속한 일입니다. 공세나 국세가 없이는 국가 권세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라고 하신 말씀은 국가기관이나 지방 자치기관이나 일반 국민으로서 바쳐야할 공과금에 대하여 그 의무를 이행하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이런 것들은 가이사의 것들이기 때문에 가이사에게 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결 론
이 세상 모든 나라의 존망은 오직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렘18:5-10). 이 사회는 하나님에 의하여 섭리되면서 마지막 심판의 날까지 지속되어 나갈 것입니다. 이 세상의 존속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나님의 구원을 받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원을 완성하면 그때 인류의 종말이 올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인간사회에 안녕 질서와 평강을 기뻐하시는 이유는 그 안에서 생활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평안한 생활을 위해서입니다(딤전2:2).
신앙인의 정치참여
김상복목사 / 롬 13:1~7
이번 주에 있을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한 신문사에서 제게 인터뷰를 청했습니다.
첫 질문은 정교분리원칙에 따라 기독교가 정치에 무관심해왔는데 이번 선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종교와 정치의 분리란 교회가 정부가 아니고 정부가 교회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기독교가 정치에 무관심하다는 말은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정치 또는 정부를 하나님의 통치권 아래에서 면제해준 적이 없습니다. 하늘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정치입니다. 따라서 기독교는 절대로 정치에 무관심하지 않습니다.”
초대 이승만 대통령이 100년 전에 쓰신 [한국교회핍박]이란 책이 최근에야 발간되었습니다. 그 내용 중에 “한국에서 조직이 가장 잘 되어 있는 단체가 교회”라는 언급이 있습니다. 기독교가 들어온 지 30여 년 만에 전국 방방곡곡의 교회들에 사람들이 가득 차고, 선천의 어느 교회에서는 수요저녁예배에 무려 일천 명이 모였고 평양에서는 1,500명이 모이는 교회가 있고 합니다. 미국에도 수요밤에 그렇게 많이 모이는 교회가 없는데 한국이라는 조그만 나라의 교회가 그렇게 왕성한 것을 보고 전 세계가 부러워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모이면 반드시 공론이 있게 됩니다. 서로 대화와 토론을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합의되는 의견이 생기는데 그 의견이 교회를 통해서 사방으로 번져나갑니다. 당시 젊은이들과 민족운동의 지도자들이 대거 교회로 모였습니다. 당시 한국의 가장 강력한 조직과 운동이 기독교 안에서 생기게 된 것입니다. 3.1운동 때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33명 가운데 16명이 기독교인입니다. 기독교인이 0.5%밖에 되지 않을 때입니다.
둘째 질문은 할렐루야 교회의 투표율이 80%가 넘는다는 소문이 있는데 그것이 사실이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대한민국에서 할렐루야 교회만큼 높은 투표율을 자랑하는 공동체는 아마 없을 것입니다. 제가 1990년에 이 교회에 부임하고 그 다음 해에 지자체 선거가 있었습니다. 저는 우리 기독교인들이 모두 투표에 참여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목사이기에 얌전하게 말했지요. 그 결과 강남의 투표율은 37%였고 할렐루야 교회는 71.2%였습니다. 상대적으로 아주 높은 투표율이었지만 제 마음에는 차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 해 광역선거였던 ’92년 선거 때는 성도들이 투표에 더 참여하시도록 격려했습니다. 그 결과 강남과 서울이 40%였는데 할렐루야 교회는 86%였습니다. 그 다음 여러 차례의 선거에서 각각 91.3%, 91.6%, 95.6%를 기록했습니다.
95.6%였을 당시, 교회 내에서 제일 투표율이 낮은 연령대가 20-30대와 50대였습니다. 그래서 다음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주일 예배 때 20대와 50대 교인들을 다 일어나게 했습니다. 여러분들 때문에 투표율이 낮아졌으니 회개하고 투표하라고 촉구했습니다. 그 해 투표율은 97.2%가 되었습니다. 세계 어디서 이런 투표율을 보겠습니까? 할렐루야 교인들은 세계 최고의 시민들입니다. 이제 투표율을 다시 조사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90%까지 올라갔다가 추락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이번 수요일에 있을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할렐루야 교회는 18년째 지키고 있는 최고 투표율의 아름다운 전통을 유지하기를 바랍니다.
투표는 나라의 법으로 정한 것입니다. 본문에도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1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부를 세우셨으면 그들을 따르라는 것이 사도바울의 가르침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나라를 섬기는 것은 정부나 통치자들이 이끄는 대로 선을 위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국회의원들이 만든 법을 행정부와 국민이 지키는 것이 마땅한 일이요, 법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7절)고 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마음에 들지 않는 대통령이라도 그분을 위해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20여 년 전 제가 중국에 처음 가서 ‘사회과학원’이라는 곳을 방문했습니다. 그곳 종교담당 교수와 대화하는데 그 분이 기독교를 심하게 비판했습니다. 저는 다 듣고 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앞으로 서양 문명이 중국에 들어오면 서양세계가 타락한 것처럼 중국도 타락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오면 중국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기고 신실하고 부지런하고 정직해질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중국 최고의 시민이 될 것입니다. 서양의 문명과 습관은 두려워하더라도 기독교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퍼지면 퍼질수록 나라가 잘 되고 윤리적, 학문적, 문화적, 경제적으로 부강하게 됩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지금 경제적으로 부강한 나라들은 유럽에 가장 많습니다. 유럽은 기독교 문화를 가진 곳이지요. 기독교가 발달하면 그 나라 경제도 살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기독교가 가장 왕성하던 시대에 경제가 급속히 성장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것을 순종하는 것, 투표하라고 할 때 투표하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목사를 영어로 "minister"라고 하는데, 정부의 관리는 "minister of God" 즉 하나님의 사역자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분들을 세워 나라를 대신 다스리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악을 행하라고 할 때는 절대로 따르지 않지만 선을 행하라고 할 때에는 언제나 순종합니다.
구약 사사시대에 기드온이라는 사사가 있었습니다. 백성들이 기드온에게 와서 말합니다. “당신과 당신의 아들들이 우리의 왕이 되어 주십시오. 우리 주위의 모든 나라에는 다 왕이 있는데 이스라엘만 왕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도 왕이 필요합니다”(삿 8:22-23). 그 말을 들은 기드온은 “나와 내 아들들은 절대로 왕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께서 여러분의 마음과 삶과 언어를 다스려야 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왕으로서 여러분의 언행심사를 다스리신다면 법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우리말에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 교회에도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분들이 많이 계세요.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실수는 할 수 있어도 법을 일부러 어기지는 않습니다. 어린이들에게 사랑을 베풀지언정 의도적으로 납치해서 죽이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국민의 왕이면 나라가 편안합니다. 윤리적으로 더 나아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없으면 각자 이기적 목표만 추구합니다.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을 통치자로 모시고 살기를 원합니다. 우리나라 국민 모두가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면 이 나라는 행복이 충만한 나라가 될 수 있습니다.
사사시대가 끝나고 사무엘시대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무엘에게 왕을 세워달라고 졸랐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왕정의 문제’에 대해 경고하셨습니다. 인간을 왕으로 세우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경고하였습니다(삼상8:9-18).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야 되는데, 너희와 똑같은 인간이 너희를 지배하고 통치하도록 왕으로 세우기를 원한다는 것이냐? 사람은 모두 평등하게 서로 존중하며 살아야 하는데 왜 한 사람은 지배하고 나머지 사람은 지배를 받는 관계를 원하느냐?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 그러나 너희가 그렇게 왕을 원하니까 왕을 줄 텐데 왕의 맛은 이런 것이다.”
첫째로, “인간 왕은 너희 아들들을 취하여 자기 병거와 말을 돌보게 하고 병거 앞에서 뛰어다니는 호위병을 만들 것이다.” 귀한 아들들이 자기와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고 왕의 행복을 위해서 쓴다는 것이지요. 왜 귀한 아들들에게 왕의 종살이를 시켜야 합니까?
둘째로, “인간 왕은 자기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큰 군대를 만들 것이다. 그 때 너희 가운데 제일 건장한 아들들을 데리고 갈 것이다. 이웃나라를 탐내서 전쟁을 일으킬 것인데 너희 아들들이 죽을 것이다.” 저는 가끔 전쟁영화를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픕니다. 전쟁이 나면 전쟁을 일으킨 통치자들은 편안히 앉아있고 젊은 아들들은 전쟁터에 나가 죽습니다.
셋째로, “인간 왕은 너희 딸들을 데려다가 자기 향료 만드는 사람으로, 비서로, 빵 굽는 사람으로 만들어 종살이시킬 것이다. 농사를 지으면 소출의 10분의 1을 가지고 갈 것이다.” 10%면 감사하지요. 지금 여러분은 30-40%를 나라에 내지 않습니까? 지금 국회의원 후보들이 정책을 발표하는데, 그대로만 된다면 참 좋은 세상 되겠더라고요. 하지만 그렇게 엄청난 일을 누구 돈으로 하겠다는 것입니까? 세금을 올려서 여러분의 주머니에 있는 돈을 빼내서 법을 만들고 자기들 마음대로 하겠다는 것입니다. 정부가 뭔가 큰일을 하겠다는 것이 별로 반가운 일이 아닙니다. 비효과적인고 낭비가 얼마나 많습니까?
지난 번 대통령 선거 때 어느 잡지사에서 저에게 ‘우리가 바라는 대통령상’에 대한 글을 써달라고 했습니다. 그 글을 대통령 후보자에게도 보냈습니다. 저는 “앞으로 대통령이 되면 정부와 국가가 아니라 국민을 부자로 만들어 달라”는 부탁을 했습니다.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2-3배 잘 사는 나라인데, 나라는 부자지만 국민은 부자가 아닙니다. 일본 사람들이 한국에 와서 ‘한국은 우리보다 못 사는 나라인데 사는 집은 왜 이렇게 크고 좋은가?’하고 놀라지요. 나라가 부자가 아니라 국민이 부자가 되어야 합니다. 앞으로 우리나라가 정치를 잘 해서 정부는 돈을 조금 쓰고 일을 해서 돈을 번 사람들이 마음껏 쓸 수 있는, 국민이 부자인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넷째로, “인간 왕은 자기 부하들을 먹여 살리는데 세금을 사용할 것이며 백성이 양떼를 키우면 양과 가축 가운데 10분의 1을 가지고 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3천 년 전의 이야기이지만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권력을 쥔 자가 내놓으라고 하면 안 내놓을 수가 없습니다. 결국 백성은 왕의 종이 될 것이며 왕이 하라는 대로 하지 않으면 죽이거나 감옥에 보냅니다. 우리의 과거와 오늘의 세계를 둘러보십시오. 죄성을 가진 인간이 왕이 되면 이런 문제가 있다고 경고하셨습니다. 또한 인간 왕은 “자기 재산을 늘리고 처첩을 많이 두려고 할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좋은 예가 솔로몬입니다. 솔로몬은 1천 명의 처첩을 두었습니다. 백성의 돈으로 이런 짓을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인간 왕 때문에 국민이 고생을 하고 못살겠다고 소리를 질러도 여호와께서 응답하지 아니하리라”고 경고했습니다. 하나님이 왕이면 법 없이도 살 수 있을 텐데 너희가 다른 나라처럼 왕을 달라고 했으니 어디 왕을 가져 봐라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민주주의 국가의 국민으로서 정부나 통치자가 이런 짓을 못하도록 감시하고 막아야 합니다. 국민에게는 법을 지키고 세금을 낼 의무가 있듯이 정치인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비판할 권리도 있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주일 아침에 나라를 위해 기도합니다. 기도를 하면서 우리의 마음이 하나가 됩니다.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원하는 것을 위해 기도하고 함께 ‘아멘!’함으로써 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나라가 잘 되려면 좋은 기도가 계속 되어야 합니다.
또한 설교를 통해서 정치적 관심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지난 번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설교시간에 처음으로 정치 이야기를 했더니, 교인들이 우리 목사님이 정치 이야기를 한다고 의아해 하는 분들도 계셨어요. 정치 이야기도 할 때는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결정하고 투표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말, 글, 전화, 노래, 팩스, 행동, 시위, 조직, 투표, 후보 나가기, 항의, 서명운동, 이것은 나라의 법이 우리에게 준 권리들 입니다. 정부에 대한 반항이 아니고 법을 어기는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이 항의를 해도 법적으로 잘못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기독교인도 합법적인 시위는 할 수 있습니다. 정부가 잘못하고 나라가 잘못된 방향으로 갈 때는 할 수 있고, 또 해야 합니다. 그러나 불법적인 행동, 불법적인 시위는 안 됩니다. 몽둥이를 들고 화염병을 들고 나가는 것은 절대로 안 됩니다.
투표는 또한 선한 양심을 위해서 하라고 했습니다. 한국은 투표일을 공휴일로 삼습니다. 투표하라고 휴일로 정했는데 투표는 안 하고 골프장에 가 있다면 양심에 가책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선한 양심, 깨끗한 양심을 가지고 삽니다. “선한 양심을 위하여 순종하라”는 말씀대로 여러분도 여러분의 양심을 위해 이번 투표에 꼭 참여하시길 바랍니다.
정부는 권선징악(勸善懲惡)을 하는 하나님의 대리인이라고 했습니다. 선을 도모하고 악을 억제하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선을 행하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선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고 죽기까지 하는 것이 기독교 아닙니까? 만약 정부가 선을 억제하고 악을 도모한다면 항거해야 하겠지만 정부가 선을 권장할 때는 그 선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이번 투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사람을 뽑아야 그 사람들이 더 좋은 법을 만들어서 이 나라를 더 좋은 나라로 만들 것 아닙니까!
그런데 어떤 후보들은 20-30년 전에 하던 짓을 또 하려고 합니다. 돈을 주고 표를 얻어 보려는 것이지요. 이런 사람들은 반드시 밝혀서 떨어뜨려야 합니다. 당선이 되더라도 무효화 시켜야 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런 국회의원을 절대로 용납할 수 없습니다.
국민에게는 국법에 따른 정당한 의무가 있습니다. 본문 말씀에도 “너희가 공세를 바칠 것은 바치고 세금 낼 것은 다 내라. 존경할 사람을 존경하고 두려워 할 사람을 두려워하라”고 했습니다. 투표든지, 세금이든지, 군복무든지, 심지어 정부가 잘못하면 항의하는 것도 국민의 의무입니다.
우리나라가 살기 좋은 나라, 부강한 나라, 존경받는 나라가 되려면 지도자들이 좋아야 합니다. 투표하지 않으면 비판할 권리가 없습니다. 투표한 사람만 비판할 권리가 있습니다. 후보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그 중에 나은 사람을 선택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여러분의 통치자로, 왕으로 여러분의 가슴에 모시고 사시길 바랍니다. 그분을 통치를 받고 그 분을 섬기며 사시기 바랍니다. 그분을 잘 섬기고 살면 아무리 정부가 작아도 국민이 뛰어나기 때문에 그 나라는 좋은 나라가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훌륭한 나라를 만드십시다.
권위와 권위주의
김동호목사(높은뜻연합선교회) / 롬 13:1-7
지난 10월 25일 서울에 있는 어느 교회에서 몇 몇 교회가 연합하여 제 1회 박정희 대통령 추모예배가 열렸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어안이 벙벙해 졌습니다.
고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으니 그를 좋게 보고 좋은 평가를 할 수는 있다고 생각하나 그 분의 딸이 현직 대통령이 된 상황에서 그것도 34년 만에 느닷없이 교회가 앞장서서 그분의 추모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이해가 가질 않았습니다.
설교자는 어렸을 적 가난하게 산 경험을 이야기하며, 하나님이 박정희 전 대통령을 통해 우리나라에 큰 축복을 내려 준 것이라고 말했답니다. 그리고 그 목사는 박 전 대통령을 독재자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도 무조건 순종하라며 독재했다는 이야기를 했답니다. 그리고 하나 걸음 더 나아가 우리나라도 독재해야 한다"고 훈계했답니다.
그리고 그는 한국교회가 흔들리는 이유가 목회자들이 박 전 대통령처럼 소신 있게 교회를 운영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으며, 자신은 원로목사지만 아직도 교회에서 내준 사무실을 사용하고 교회가 차 기름을 다 넣어 준다고 말했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 한국교회는 당분간 더 추락을 하게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참 마음이 아프고 슬펐습니다. 누가 봐도 권력에 아부하는 것으로 보이는 우스꽝스러운 예배를 드리고, 거기서 독재까지 합리화하는 것도 모자라 찬양하는 설교를 하는 기독교를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볼까 싶어서 참으로 속이 많이 상했습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을 독재자로 묘사한 대목에서는 정말 할 말은 잃게합니다. 그건 정말 하나님에 대한 사탄적인 모독입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인 우리들에게 자유를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백성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십자가에 다시는 분이십니다.
독재자는 자신의 생명과 권력을 위하여 백성을 십자가에 달아 처형하는 사람이며 백성들의 자유를 억압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에 다른 사람도 아닌 기독교의 목사가 하나님을 독재라고 말을 합니까? 이게 어떻게 제 성신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설교입니까?
이게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의 현실이고 수준이라면 우리 한국 교회는 아직도 과대평가된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 한국의 기독교는 앞으로 더 추락하게 될 겁니다. 그리고 그래야 정신을 차리게 될 것입니다.
1999년 '생사를 건 교회개혁'이라는 책을 썼었습니다. 그 책의 핵심은 어떻게 하면 사람이 주인노릇하는 교회를 하나님이 주인이신 교회로 개혁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다룬 내용은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독재를 막자는 것이었습니다.
목회자인 제 눈으로 볼 때 우리 한국교회의 교회 정치는 비민주적이었습니다. 당회가 삼권을 다 장악하고 교인들 위에 군림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당회가 교회의 행정, 사법, 입법의 기능을 다 장악하고 행사하는 구조였습니다. 권력의 집중이 바로 독재인 겁니다. 그래서 완전한 삼권의 분립까지는 아니더라도 당회의 권력을 제직회와 나누어야 한다는 안을 내 놓았습니다.
정책을 결정과 그것의 감사는 당회가 하고 그 정책의 시행은 제직회가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제안한 안은 당회원은 제직회의 부장이 되지 못하게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당회원이 예산결제를 하지 못하게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목사들도 잘못하면 교인들 위에 군림하고 독재자가 되기 쉬운 면이 있으니 6년에 한 번 씩 교인들의 신임을 받자는 안도 내어 놓았습니다.
이 책이 제법 많은 교회 교인들을 의식화(?)하게 되어 제법 많은 교회에서 문제가 제기 되었습니다. 그러자 세계에서 제일 크다고 하는 어느 교회에서 일간 신문에 제 주장을 반박하고 광고성 기사를 지면의 1/3정도를 할애하여 냈습니다.
그 내용은 기독교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신주주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당신의 권위를 위임목사에게 부여하셨으니 위임목사를 반대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반대하는 것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광고를 보고 제가 신주주의를 가장한 인본주의라고 반박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신본주의가 되기 위하여 우리 사람들끼리는 민주주의를 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었습니다.
높은 뜻 숭의교회를 개척하면서 내 세운 것은 단 하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인이 되시는 교회'였습니다.
하나님이 주인이 되시는 교회가 되게 하기 위하여 우리는 사람이 주인이 될만한 위험을 미리 제거하는 정관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위험을 제거하기 위하여 앞에서 말씀드린 당회와 제직회의 역할 분립 그리고 장로와 안수집사 그리고 권사의 6년 단임 그리고 담임목사와 전임목사의 재신임 투표와 원로제도 폐지등을 정관에 넣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신 교회를 하기 위하여 교회 안에서 교인들끼리는 민주화 되어야 한다는 것이 제 평생의 목회신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목사와 장로 그리고 집사와 권사가 교회의 계급화되는 것에 대한 위험성과 문제성을 지적하며 그것을 구별이어야하지 차별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지금까지 다른 교회에 집회를 갈 때마다 설교하고 있습니다.
독재에 반대하여 목숨을 걸고 투쟁한 민주화 인사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이 있었습니다. 물론 개인적인 생각이었습니다. 그것은 민주화를 위하여 생명을 건 민주화 인사들이 민주를 잘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남이 독재를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지적하고 투쟁할 수 있었지만 정작 어떻게 하는 것이 민주적인 것인가는 자신들도 잘 모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80년대 초 한 참 대학교에서 민주화 데모가 극렬했을 때 어느 대학교에서 기독교과목을 강의하고 있었습니다.
중간시험때가 되어 시험을 치려고 문제지를 들고 교실로 올라 갔더니 운동권 학생 하나가 시험 보이콧에 대한 선동을 학생들 앞에서 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올라가니 그 학생이 저에게 10분간만 시간을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그 학생이 왜 시험을 보이콧 해야 하는지를 설명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아니 선동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저는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뒤의 어떤 학생 하나가 시험 보이콧에 대하여 반대의견을 내 놓았습니다. 그러자 같은 운동권 학생 하나가 이렇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저 매국노 잡아라!>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화가 나서 누군지 모르는 그 원동권 학생에게 '나쁜 놈의 새끼'라고 욕을 해 주었습니다. 아마 제 입에서 공개적으로 튀어나간 첫 번째 욕이었을 겁니다. 저는 욕을 사람에 대한 폭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제 기억에 욕을 해댄 기억이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참지 않고 그렇게 욕을 해 대었습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전 아무개보다 더 나쁜 놈이라고 욕해 주었습니다. 운동권 아이들에게는 참으로 모욕적인 언사였습니다. 독재를 반대하고 민주화를 이루겠다고 하는 놈들이 독재를 하는 놈과 다른게 하나도 없다고 흥분해서 야단을 쳐 주었습니다.
민주주의란 여러 의견을 종합하여 다수의 의견을 좇아 행동하는 것인데 자기의 생각과 주장과 다르다고 그 사람을 매국노라고 하는 놈들이 어떻게 민주화를 이룰 수 있게냐고 호통을 쳤습니다. 그날 정말 제가 많이 흥분했었습니다. 민주화를 위하여 생명을 건 아이들에게 민주적인 의식이 없다는 것에 대한 절망감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요즘 그런 절망감을 교회 안에서도 느끼고 있습니다. 그것은 목사와 장로만이 교회의 민주주의를 잘 모르는 것만 아니라 목사와 장로들의 잘못된 교회 운영에 대하여 반발하는 교인들과 제직들도 정작 교회의 민주주의를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민주주의를 주장하지만, 제가 보기엔 그것이 교회의 민주주의는 아닙니다. 목사와 장로의 지나친 자기 권리주장이 교회 민주화의 장애가 되는 것과 같이 집사와 교인들의 지나친 자기 권리주장이 역시 교회 민주화의 장애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 결론은 목사든 장로든 집사든 교인이든 우리는 모두가 다 민주주의를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에 우리 교회가 세우는 높은 뜻 씨앗스쿨에서 우리 아이들에게 민주시민교육에 대한 커리큘럼을 넣고 싶습니다.
그리고 높은 뜻 연합선교회에 속한 모든 교회 목회자들에게 교회의 민주주의에 대한 교육을 필수적으로 교회 안에서 교인들에게 시키라고 권면하려고 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높은 뜻 교회의 높은 뜻 정신은 하나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인이신 교회입니다. 우리 높은 뜻 교회는 그 정신을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하여 6가지 구체적인 목표를 설정하였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1.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교회.
2. 하나님의 식과 법을 고집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는 교회.
3.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 즉 사역에 힘쓰는 교회.
4. 올바른 장로정치를 통하여 민주적인 교회가 되기를 힘쓰는 교회.
5. 십일조 정신과 희년정신을 실천하는 교회.
6. 교인들을 세상의 왕 같은 제사장으로 키우는 교회.
저는 하나님이 주인이신 교회가 되게 하기 위하여 무엇보다도 앞에서 말쓰드린 바와 같이 교회의 민주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올바른 장로정치를 통하여 민주적인 교회가 되기를 힘쓰는 교회'라는 실천 목표를 정한 것이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장로교회입니다. 장로교회의 정신은 민주주의입니다. 교회가 민주주의를 내세우는 것은 그래야만 진정으로 하나님이 주인이신 신본주의를 실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장로교가 선택한 민주주의는 대의 민주주의 입니다. 대부분의 민주주의 국가가 선택하고 있는 민주주의도 다 대의 민주주의입니다.
그것은 국민의 대표를 뽑아 저들에게 적절한 권한과 권위를 위임해 주고 저들에게 자신들을 대신하여 국가를 통치해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안을 모든 국민들이 다 나서서 의논하고 결정한다는 일이 불가능하고 오히려 그것이 국가의 혼란과 정체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라고 해서 모든 사안은 모든 국민들이 다 모여서 의논하고 토론하여 결정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대표를 자신들의 손으로 뽑아 국가의 운영을 위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국민들이 자신들이 권력을 다 빼앗긴 것은 아닙니다. 몇 년에 한 번씩 자신들이 위임해 준 대표들을 평가하고 심판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국민들은 그 권한을 가지고 민주주의의 균형을 잡아가고 있습니다. 백성들은 그 권한이 침해 받을 때에는 데모도 하고 저항도 하여 그것을 바로 잡아가곤 합니다.
권력과 권위는 부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정당한 권력과 권위를 인정하지 않게 되면 조직은 부패 못지 않은 혼란에 않게 됩니다. 우리 옛말에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이 있는데 그게 바로 그 뜻입니다.
이번에 높은 뜻 하늘교회의 담임목사 청빙 과정이 있었습니다. 조금 혼란이 있었습니다. 저는 혼란의 핵심이 교회 민주주의에 대한 오해 때문이라고 지금까지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오해의 책임은 목회자인 저에게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교인들에게 그러한 교육을 제대로 시킨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교회에서 담임목사의 청빙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임목사의 청빙을 민주적으로 한다고해서 그 모든 청빙프로세스와 심사와 평가와 결정을 전체교인들이 하지 않습니다.
그 모든 과정을 교인들이 자신들의 대표로 뽑아 준 당회에서 추진합니다. 그리고 결정합니다. 결정과정과 방법은 당회가 결정합니다. 모든 과정을 당회에서 처리할 수도 있고, 청빙위원회를 결성하여 당회원 아닌 교인들을 참여시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엄밀히 이야기하자면 당회를 교인들의 대표가 아닌 교인위에 군림하는 조직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당회에 대한 교인들의 불신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공동의회에서 모든 교인들이 청빙의 과정과 프로세스를 밞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민주주의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장로교회가 아닙니다. 그런 정치를 민주적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프로세스를 주장하고 고집하는 교단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교회를 회중교회라고 합니다.
그러나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매우 이상적인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깊은 혼란과 분쟁의 소지가 많기 때문에 회중정치를 하는 교단은 장로교회에 비하여 비교도 되지 않게 적습니다.
당회에 권한을 위임하였다고 하여도 모든 결정을 당회에서 끝내지는 않습니다. 담임목사 청빙이나 예산과 결산 같은 큰 문제는 공동의회를 열어 교인들의 비준을 받습니다.
공동의회는 회의하거나 토론하는 장소가 아닙니다. 엄밀히 말하면 공동의회는 당회의 중요한 결정을 비준하는 곳입니다. 당회의 월권이나 실수에 대한 안전장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는 국민들이나 교인들이 자신을 대신하여 교회나 나라를 통치해 달라고 맡겨 준 권위를 남용하여 권위주의화 할 때 무너집니다. 그러면 민주적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그 권위주위를 무너트리기 위하여 투쟁합니다.
그런데 그 민주화 투쟁을 하는 사람들이 자주 범하는 보편적인 오류가 있습니다. 그것은 부패한 권위주의를 배격하다가 정당한 권위와 권력까지 부정한다는 것입니다.
정당한 목회자의 역할과 당회의 역할까지도 부정하고 독재와 권위주의로 매도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평생 설교를 해 오면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가지고 설교를 하는 것이 이번이 처음입니다. 오늘 본문은 독재자들이 제일 좋아하는 본문중에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부패하고 타락한 독재자의 권력과 권세까지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권세까지 거스리는 권세와 권력이 세상에는 있는데 그 권세는 당연히 하나님이 주신 권세라고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권세와 권력만이 오늘 본문이 말씀하시는 권세와 권력입니다.
민주주의는 지도자가 백성을 지배하려고 하지 않고 섬기려고 할 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또한 민주주의는 백성들이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를 존경하고 복종하려고 할 때 또한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모든 권세와 권위를 다 부정하고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교회의 비민주화의 위험은 아무래도 목사와 장로들에게 많습니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교인들에게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조심스럽게 경청하실 수 있어야 하실 겁니다.
우리 높은 뜻 씨앗이 되어 교회는 아직 미조직교회입니다. 한시 바삐 정당한 절차를 밟아 당회도 구성되고 안수집사와 권사도 세워져 조직 교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교인 여러분들은 신중히 여러분들의 대표를 뽑아 주시고, 그리고 여러분들의 권리를 위임해 주십시오. 그리고 신뢰해 주시고 따라주십시오. 그러나 목회자나 여러분들의 대표가 옳지 않다면 재신임 투표때나 공동의회를 통하여 여러분의 의견을 주장해 주십시오. 그러나 여러분의 대표나 목회자를 신뢰할 수 있다면 하나님이 세우신 권세로 인정하시고 존경하고 따라 주십시오.
그래서 정말 우리 교회가 추구하는 올바른 장로정치를 통하여 민주적인 교회가 되기를 힘쓰는 교회가 되게 해 주십시오. 저는 이제 은퇴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이 설교를 한 이후로 높은 뜻 어떤 교회의 일에도 권세로 작용하는 일에 개입하지 않을 작정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오늘이라도 당장 은퇴를 하고 깨끗하게 높은 뜻 교회를 떠나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러니 오늘 설교를 제 자리나 권세를 차지하기 위한 사심있는 설교로 오해하지 말아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올바른 장로정치가 우리 교회에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공부하고 기도하고 노력하여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리하여 정말 우리가 추구하는 하나님이 주인이 되시는 교회를 세워나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어둠을 탓하지 말고 세상의 빛이 되라
유기성목사 / 롬 13:1-7
여러분 중에 오늘 말씀을 읽고 마음에 반감이 일어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롬 13:1 사람은 누구나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해야 합니다.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며, 이미 있는 권세들도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독재권력, 부패한 권력, 부당한 권력을 옹호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래서 이 본문은 세상의 독재자들이 제일 좋아하는 성경 본문입니다
실제로 독재와 부정부패에 항의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성경을 인용하면서 복종하라고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독재정권 때, 데모하고 반정부 투쟁을 하던 많은 젊은이들이 이 성경 구절을 가지고 독재정권을 옹호하는 것처럼 보이는 교회에 등을 돌리고 교회를 떠나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세상 권력자들도 성경 말씀을 오해하였고, 교회 목회자들과 교인들도 복음의 능력이 무엇인지 믿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결코 히틀러나 김일성 같은 악한 사람들도 하나님께서 세우셨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씀의 핵심은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이 되었다고 해서 세상 국가 권력을 무시하거나 부인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4. :6에서는 이 세상 정부나 국가 혹은 관원에 대하여 하나님의 일꾼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기독교에 비우호적이었고 심지어 적대적이었던 당시 로마 정부를 향하여 하는 말씀이기에 좀 당황스럽습니다. 당시에도 로마 제국에 대항하는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로마 권력을 하나님의 일꾼이라는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제국이 사단의 도구가 되었던 것에 대해선 분명 비판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세상 정부가 선한 사람에게는 상을 내리고, 악한 사람에게는 벌을 내리는 역할을 하고 도둑을 잡고 질서를 유지하는 일을 한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일꾼이라는 것입니다. 무정부 상태가 더 악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로마의 통치자들에게 세금을 내라고 했습니다. 협력할 것은 협력하고 복종할 것은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그 점에서 예수님께서 마 22:21에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말씀하신 것과 같은 맥락의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실 때, 빌라도가 말했습니다.
요 19:10 내가 너를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세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그 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요 19:11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
예수님을 잡아 십자가에 매다는 권세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주신 권세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권세에 의하여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대항하는 권력, 김일성이나 나치 정부 같은 악한 권세에도 굴복(屈服)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들이 악을 벌하고 선을 장려하고 도둑을 잡고 질서를 유지하는 데는 복종하지만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에 대하여는 당연히 불복종(不服從)하여야만 할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불복종함으로 치러야 할 고난을 각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약에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금 신상 앞에 절할 것을 강요받았습니다. 그런데 세 사람은 우상에게 절하지 않아야 했기에 왕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아 풀무불에 던짐을 받았습니다. 그 때, 그들은 왕을 모욕하고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절하지 않음으로 받아야 할 처벌을 달게 받았을 뿐입니다.
초대교회 시절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로마 황제를 경배하라는 요구에 불복종하여 순교(殉敎)했습니다. 일제 시대 일본 정부는 신사참배라고 하는 것은 일본의 정신적 기초라고 해서 살아있는 현인신 천황숭배를 강요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그것은 우상숭배이기에 우리가 할 수 없다.” 고 해서 수없이 투옥되고 순교 당하였습니다.
이것이 악한 권력에 대한 기독교인의 자세입니다.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롬 12: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
지난 한국 역사를 돌아보며 교회가 뼈저리게 반성해야 하는 것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었고 정부 요직 곳곳에 들어가 있었지만 독재와 부정부패에 대하여 불복종함으로 고난당하는 이들이 너무나 적었다는 점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절망합니다. 세상은 너무나 악합니다. 그에 반해 우리는 너무나 약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선으로 악을 이기란 말입니까?
그래서 예수님을 잘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제 다시 복음 앞에 집회 중에 임석순 목사님이 놀라운 진리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옛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의 생명으로 살게 될 때, 우리는 이미 하늘에 옮겨졌다는 것입니다.
엡 2: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우리는 앞으로 죽어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을 때 부활 승천하신 주님과 함께 이미 하늘나라에 간다는 것입니다.
골 1: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진 사람이고 하늘에 가서 시민권을 받은 사람입니다.
빌 3: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바로 믿게 되면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게 됩니다. 그것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태도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이 하나님 나라에서 온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에겐 이 세상이 외국입니다.
히 11:13 –16 /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14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왔고 다시 거기로 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본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잘 믿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영상] (아주 작은 세포 하나에서 상상할 수 없이 큰 천체까지 비교해주는 영상)
우리는 너무나도 작은 곳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 속에 있는 내 문제는 또 얼마나 작은 것이겠습니까? 또 하나님의 나라가 얼마나 영광스럽고 놀라운지 감이 잡히십니까?
이것이 보이면 어떤 문제도 달리 보입니다. 두려울 것도 낙심할 것도 없습니다.
고난, 아무 문제가 아닙니다. 따돌림, 아무 문제가 아닙니다.
한국 사람은 미국가도 한국 사람처럼 사는 것과 같이 성도는 이 땅에서 천국 백성으로 사는 것입니다.
행 2장 초대교회 모습이 이해가 됩니다.
행 2: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하나님의 나라 시민이기에 이렇게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원수도 사랑하는 사람,
하나님 뜻대로 살려다 고난을 받는 것을 오히려 감사하는 사람,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
은밀한 죄도 지을 수 없는 사람,
두려움과 염려가 없는 사람,
1,000만 그리스도인들이 이 사회 곳곳에 존재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이것이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독재정권 때 무엇을 잘못한 것입니까? 데모를 안 한 것입니까? 그것도 역사를 보지 못한 잘못이지만 더 큰 잘못은 진짜 예수 믿는 사람을 길러내지 못한 것입니다.
일찍 태어났다면 고종 대신 왕이 되었을 이재형이란 왕손이 있었습니다.
그가 26세 되던 해 경상도 풍기군수가 되었는데,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기울어져가는 나라의 운명에 통탄하며 왕손의 특혜를 포기하고 평민이 되어, 가지고 있던 땅문서는 아내에게 주고 방랑길을 떠났습니다. 그러다가 1904년 선영에 성묘를 하러가다가 엄귀현이라는 마부꾼을 만났는데 “나으리, 나으리”하며 정성으로 모셨습니다. 그런데 친숙해진 어느 날 이 마부가 자기에게 전도를 하는 것입니다. “나으리, 황송하오나 예수 믿으시지요!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영생을 얻으리라 했습니다. 나으리도 예수를 믿으면 죄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재형은 마부꾼의 태도가 괘씸하였습니다 “건방진 소리 하지말고 말이나 잘 몰거라”하고 핀잔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마부꾼의 진정한 호소와 용기에 내심 놀랐습니다. 그래서 빈정대는 투로 물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마부꾼이 양반이라도 된단 말이냐?”그러자 마부꾼 엄귀현은 잠시 생각을 하고는 대답했습니다.“나리, 예수 믿는 도리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제가 양반되기 위해 예수 믿는 것이 아니라 마부 노릇을 잘하기 위해 예수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리께서 예수를 믿으시면 제가 평생을 마부꾼으로 나으리를 모시겠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이재형은 이 말에 놀랐습니다. 그리고 예수에 관한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기독교가 그렇게 좋은 것인가?”
이재형은 이 방랑 생활을 청산하고 집으로 돌아왔더니 부인 정씨는 부자가 되었을 뿐 아니라 승동교회의 교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1903년 원산에서 시작된 부흥운동이 전국적으로 번져가던 때였는데, 승동교회에서 부흥사경회가 열렸습니다. 부인 정씨를 따라 부흥회에 참석한 이재형은 자신에게 전도해주었던 마부 엄귀현을 만났습니다. 그는 교회의 영수였습니다. 영수는 요즘으로 말하면 장로에 해당하는데 손수 교회를 짖고 교회를 내 집처럼 돌보며 교회를 위해 일생 수고하는 사람입니다. 이재형은 “내가 교회 밖에서는 왕손이지만, 교회 안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일 뿐이다”라고 하면서 엄영수를 ‘형님’이라고 부르며 깎듯이 모셨습니다. 이렇게 이재형은 왕손으로서 예수를 믿은 최초의 인물이 되었는데 1914년 승동교회의 장로가 되었고 1918년에는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안수를 받고 현 남대문 교회의 2대 목사로 나중에는 승동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하였습니다.
왕손 이재형이 이렇게 된 것은 마부였던 엄영수가 진짜 예수쟁이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왜 사람들이 예수를 믿으면 학교가 바뀌고 직장이 바뀌고 군이 바뀌고 사회가 바뀔 것이라는 확신을 갖지 못하는 것입니까? 예수믿는 가정, 예수믿는 교회가 천국 같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믿는 나 자신이 변화되었다고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세상이 악하다고 탄식하지 말고 우리가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 세상의 빛이 되면 세상을 변화시킬 힘이 일어납니다. 빛을 이길 어둠이 없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윌리엄 윌버포스’(1759~1833)는 영국의 정치가로 회심 후, 한때 타락한 영국의 정치현실을 보고 정치인으로 살 것을 포기할 것인가? 심각한 고민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영국 국회가 당신의 사역지다” 라는 뉴턴 목사(찬송가 405장)의 조언을 따라, 마음을 가다듬고 영국의‘노예제도를 폐지’하였고, ‘영국 사회의 악습을 개혁’에 헌신했습니다. 당시 노예 제도는 영국 국가 수입원의 3분의 1을 차지할 정도였고 노예제도 지지파들은 상인, 재벌, 군인, 왕족, 귀족들을 망라한 거대한 세력이었습니다. 그러나 왜소한 체격의 윌버포스는 150번이나 되는 對국회 논쟁을 하였습니다.“영국이 진정으로 위대한 나라가 되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법을 지켜야 하는데, 노예 제도는 분명 하나님의 분노를 자극하는 일이다. 기독교 국가를 자처하는 영국이 황금에 눈이 멀어 노예 제도를 갖고 있다니... 이러고도 오래 살아남은 제국은 역사에 없었다.” 라고 외쳤습니다. 결국 영국 국회는 노예 제도를 영원히 폐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윌리엄 윌버포스가 이 일을 할 수 잇었던 것은 그가 빛이 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그를 ‘영국의 양심’이라 불렀고, 그의 영향으로 영국의 젊은 국회의원 3분의 1이 복음주의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나는 세상을 변화시킬 아무힘이 없습니다. 할지 모릅니다.
아닙니다. 우리에겐 정말 큰 힘이 있습니다. 기도입니다.
롬 13:1에서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세상 권세를 운명론적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대통령과 국회의원, 시장, 시의원들을 주관하시고 세우기도 하고 폐하기도 하심을 믿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투표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하면 세상은 바뀌게 됩니다.
한 때는 독재 정권이 문제였지만 지금은 탐심이 우리를 옭죄고 있습니다.
세금 문제가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문제가 됩니다.
회사를 경영하는 한 집사님이 은혜의 눈이 뜨인 후 신앙적인 원칙으로 회사 경영 결심하였습니다. 그래서 사원들을 모아놓고 정직한 세금과 정직한 영업을 하기로 선포하였습니다. 그런데 핵심 중역들이 줄줄이 사표를 썼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영업을 할 자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때 자기가 창업했지만 자신의 회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회사의 진짜 주인이 따로 있음을 알았습니다. 세상입니다. 자신이 사장이라고 회사를 마음대로 할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영국은 더 했습니다. 그 때 웨슬리의 신앙부흥이 일어났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거룩한 무리들로 일어났습니다. 영국은 피흘리는 혁명없이 근대화의 길로 들어설수 있었습니다.
남북 통일을 앞두고 지금 거룩한 무리들이 일어나야 할 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터, 박람회가 열리는 것입니다. 돈이면 제일이라는 세상에 살지만 하나님의 경영원리 대로 기업하는 자가 그리스도인입니다. 주 예수님을 알면, 하나님 나라를 알면 그렇게 하지 않을 자가 없을 것입니다.
한 남자집사님, 세금문제, 약간 억울한 세금, 그러나 다 내면 집 사라짐, 다 미리 처분하라! 어떻게? 정직하게 반응하세요! 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믿습니까? 눈물을 흘렸습니다, 답은 알겠는데, 자아는 순종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승리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세상이 악하다고 한탄만 하면 안됩니다. 주 예수님을 바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 세상에서 하나님의 부흥을 일으킬 거룩한 무리에 동참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좋은 시민으로 사세요
롬 13장 1~7절 / 곽창대목사(한밭교회)
롬 12장부터 바울 사도는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다룹니다. 대전제로 언제 어디서든지 하나님께 예배하라고 권합니다. 그 기초 위에서 적극적인 교회생활을 하라고 말씀합니다. 더 나아가서 불신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성도가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를 말씀합니다. 불신자들 가운데 성도를 핍박하는 원수들이 있지만 그 원수들을 사랑으로 용납하고 결국 친구로 만드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선하고 아름답다고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은 세상나라에서 모범적인 시민으로 살아야 함을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 1절에서 바울 사도는 모범적인 시민생활의 원칙을 선언합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각 사람’은 일차적으로 로마교회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오늘 이 글을 읽고 있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입니다.
‘위에 있는 권세들’이란 정치(국가)권력을 뜻합니다. 정치권력을 행사하는 자들이 다스리는 자들입니다(3절). 국가행정관들을 뜻합니다. 바울 당시에는 로마 황제와 원로원의 귀족들과 지방행정관들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대통령을 비롯하여 정부각료, 공무원, 판사와 검사, 경찰들입니다.
‘복종하라’: 국가행정관들에게 복종하라는 말씀입니다. 바울 당시로는 로마정권에 복종하라는 뜻입니다.
바울 당시에 왜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정권에 복종해야 할까요? 로마나라에 권세를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1절 하반절을 보세요. 바울은 모든 권세가 하나님에게서 나온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최고 통치자라는 뜻입니다. 최고 통치자이신 하나님께서 시대를 따라 그 권세를 세상나라의 통치자들에게 위임하시는데 바울 당시에는 하나님께서 로마 황제와 행정관들에게 그 당시의 세계를 통치하도록 권세를 위임하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시각으로 로마정권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권위를 로마정권에 부여하셨음을 겸손히 인정한 것입니다.
2절에서는 하나님이 주신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르는 것이며 그래서 심판을 자초하는 어리석은 자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왕과 행정관들이 하나님의 사역자(4절에 두 번이나 반복함) 혹은 하나님의 일꾼(6절, 봉사자, 제사장이라는 뜻임)이라고까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왕과 행정관들에게 복종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는 자와 같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명을 어기는 자요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을 자라는 뜻입니다. 바울의 진술은 대단히 엄중합니다.
바울이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국가의 지도자들에게 성도들에게 복종하라고 권면한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로마교회는 로마제국의 수도에 세워진 교회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정치적 영향을 가장 민감하게 받을 수밖에 없었던 교회였습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천의 국가관과 정치관이 올바르게 정립되어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시민의 책임에 관한 일반적인 원칙을 바울이 간략하게라도 언급한 것입니다.
역사를 살펴보면 바울 당시 로마에 거주하고 있던 유대인들 가운데 반로마주의자들이 제법 있었습니다. 글라우디오 황제가 제국을 통치하던 때 로마에서 유대인들의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주후 49년경이었습니다. 이때 황제는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추방하는 칙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다가 이 칙령이 더 이상 효력이 없게 되자 추방된 유대인들이 다시 로마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유대인들도 세계의 중심지 로마로 들어와 정착했습니다. 이들 가운데 기독교로 개종한 무리가 적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때가 주후 57년경이므로 글라우디오 황제가 유대인 추방 칙령을 반포한 지 8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로마정부에 반감을 가진 유대인들이 로마에 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더구나 교회 성도들 중에서도 그 같은 생각을 가진 자들이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정권에 대항하는 그들의 태도가 어리석은 일임을 경고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로마교회 성도들 가운데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혹 이렇게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므로 더 이상 이 세상나라의 시민이 아니다. 그러므로 로마의 법을 구태여 지킬 필요가 없으며 세금도 낼 필요가 없지 않은가?” 이 또한 그릇된 시각임을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물론 바울의 이 권면이 모든 정권에 다 복종해야 한다는 무제한적인 명령은 아닙니다. 성도와 교회를 잔인하게 박해하는 사탄의 하수인 노릇을 하는 포학한 정권에 성도와 교회가 복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기 본문에서 바울이 성도들에게 권면한 것은 정상적인 기능을 하고 있는 정부의 권세에 복종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정부의 정상적인 기능이 무엇일까요? 그 첫째는 질서유지입니다. 좀 더 부연하면, 선을 장려하고 악을 제재하는 역할입니다. 3-4절이 그것을 말씀합니다.
베드로 사도도 동일한 말씀을 했습니다.
(벧전 2:13-14) 『[13]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14] 혹은 그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보낸 총독에게 하라』
정상적인 정부는 나라의 안녕과 백성들의 행복을 추구합니다. 하나님께서도 그걸 원하십니다. 모든 세상나라가 당신의 공의와 사랑을 반영함으로써 평안하고 질서가 잡힌 행복한 나라가 되기를 하나님은 바라십니다.
하나님께서 공의의 실현을 위하여 국가에 부여하신 최고의 사명은 이미 말씀드린 대로 질서유지입니다. 질서를 유지하는 도구가 법입니다. 그래서 나라마다 법을 제정합니다. 그리고 법을 집행하는 자들을 세우는데 그들이 행정관들입니다. 즉 행정관들이 사회의 질서유지를 위해 법을 집행하는 자들입니다. 법을 집행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주신 권세를 오늘 본문 4절에서는 칼이라고 했는데 이는 악을 통제하는 권세를 일컫습니다.
성경은 개인이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사적으로 보복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부당한 처사를 도저히 참을 수 없으면 국가의 공권력에 호소하라고 말씀합니다. 국가에 정식 재판을 요청함으로써 악의 재발을 막고 악의 횡포를 제재하는 것이 합당한 절차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사회의 질서가 유지되고 기강이 바로 세워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무정부상태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사회가 반드시 무질서하게 됩니다. 악인들이 날뛰고 선인들은 피해를 봅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생들이 만드는 세상입니다. 성경은 사람을 미화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자유롭게 내버려두면 방종하게 되고 그러한 사람들이 만드는 세상은 무질서한 세상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질서보다는 무질서 쪽으로 기우는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타락한 사람들의 무질서로 기우는 성향을 통제하는 장치들을 만드셨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국가입니다. 이미 우리가 살펴본 대로 하나님은 선을 장려하고 악을 억제하는 수단으로 국가를 세우셨습니다. 그 국가에 통치자와 행정관을 세우셔서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도록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국가와 정부제도는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생들에게 주신 일반은총적인 제도입니다. 그러므로 국가의 정당한 통치행위(위에 있는 권세)를 존중하고 순복하는 자가 좋은 시민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솔선수범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의 진솔한 권면입니다.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국가의 사명이 질서유지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실현하는 것도 국가의 부차적인 사명입니다. 물론 정부가 주도하는 사랑의 실천은 그리 크게 기대할 것은 못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랑의 실천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정부가 그래도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사랑의 실천은 “세금제도를 통한 부의 재분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국민들이 내는 세금은 일차적으로 질서유지비에 쓰입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부유한 자들로 하여금 세금과 기부금을 많이 내도록 해서 가난한 자들을 돌보게 하는 일을 정부가 주도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6-7절이 그것을 말합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나라는 복지국가를 지향합니다. 함께 잘 사는 나라를 만드는 것이 국가의 목표입니다. 우선은 질서가 유지되어야 하지만 한걸음 더 나아가서 국민들의 경제생활이 윤택해져야 합니다. 이 두 가지는 정부가 추구해야 할 중요한 과제입니다. 이 일에 모든 국민과 정부가 공동으로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국민들은 세금을 잘 내야 합니다. 국세와 지방세, 직접세와 간접세 등 모든 세금을 정직하고 성실하게 납부해야 합니다. 세금을 잘 내지 않고는 복지국가의 꿈을 이룰 수 없습니다.
여러분, 누가 좋은 시민입니까? 세금을 많이 내는 시민이 좋은 시민입니다. 세금을 가장 많이 내는 기업이 최고의 기업입니다. 그렇다면 크리스천이 가장 먼저 세금을 잘 내어야 합니다. 그래야 좋은 크리스천입니다. 기업하는 성도들은 세금을 정직하게 납부해야 합니다. 할 수만 있으면 많이 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중간 결론을 이렇게 내릴 수 있습니다. 모든 교회와 성도는 정부의 정상적인 통치행위를 존중하고 정부가 하는 일에 최대한으로 협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정권을 정상적인 정권으로 인정했는가라는 의문입니다. 바울은 그 당시 로마정권이 하나님을 정면으로 대항하는 사탄의 하수인 노릇을 하는 포학한 정권은 아니라고 본 것이 분명합니다. 세계질서의 유지를 위해 하나님께서 사용하고 계시는 나라임을 바울이 인정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실제로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로마정권에 의해 방해받은 적은 별로 없었습니다. 오히려 유대 민족주의자들이 바울의 전도를 방해했고 더 나아가서 사회의 질서를 파괴하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 로마정부의 관원들은 법으로 유대인들의 횡포를 막고 사회의 질서를 지키는 일에 나섬으로써 바울의 전도를 간접적으로 지원했습니다.
물론 바울이 국가권력으로부터 부당하게 취급을 받은 때도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빌립보에서 그런 일을 당했습니다. 잘 못한 일도 없는데 정당한 재판절차도 거치지 않은 채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정부당국 전체를 불의의 집단으로 매도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부당한 처사에 대해 바울은 규모 있게 대응했습니다. 빌립보 행정관의 권위를 최대한의 예의를 갖춰 존중했습니다. 겉으로가 아니라 실제로 그리했습니다. 몇 년 후에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의 고소로 당국에 체포되었을 때 정당한 재판을 받고자 로마의 황제(최고법정)에게 상소를 한 것도 로마정권을 긍정적으로 본 증거가 됩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1세기 말이 되었습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쓴 후 약 30년의 세월이 흘렀을 때 로마정권이 달라졌습니다. 사도들 가운데 요한만 남았을 때, 로마정권은 포학한 정권이 되었습니다.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권력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를 박해하는데 썼습니다. 황제숭배를 강요하며 기독교 신자들을 핍박하는데 권력을 남용했습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 쓴 편지가 요한계시록입니다. 그 편지에서 사도 요한은 소아시아의 교회들에게 로마정권에 복종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짐승의 표를 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짐승은 로마의 포악한 권력을 뜻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로마정권의 전복을 위해 혁명이나 전쟁에 나서야 한다고 선동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기도하면서 고난을 감내하라고 권고했습니다. 그러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로마정권을 심판하시고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실 것이라고 소망의 메시지를 선포했습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의 주된 내용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두 나라의 시민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면서 이 세상나라의 시민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은 이 세상나라에서도 좋은 시민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이 세상나라에서 좋은 시민으로 사는 것일까요?
말씀드린 대로 정부의 정상적인 통치행위를 존중하고 적극적으로 협력해야 합니다. 정부의 정상적인 통치행위란 질서유지와 부의 재분배를 위해 세금을 거두는 일입니다. 이 일에 모든 교회와 성도는 적극적으로 협력해야 합니다.
시민의 책임 중에 또 한 가지는 대통령과 정부의 행정관들이 위임받은 일들을 잘 하고 있는지 감시하는 일도 해야 합니다. 그 중에 하나가 믿을 만한 자들을 정부의 행정관으로 파송하는 일입니다. 가능한 많은 크리스천들이 정부의 각 기관에 들어가서 유능하고 정직하게 하나님의 사역자로 일할 때 정부가 제대로 정상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교회는 부정부패로 얼룩져 있는 오늘의 정국에 무거운 책임이 있습니다. 정부 기관과 사법부와 국회 안에 크리스천의 비율이 30%는 된다고 하는데 이들이 제대로 하나님의 사역자로 바르게 일했다면 지금보다도 훨씬 좋은 나라가 되었을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솔선수범하여 자기 자리에서 맡은 역할에 충성해야 합니다. 행정관으로 일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사역자임을 항상 의식하고 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소명에 충실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크리스천 공직자들에게 바라시는 것은 질서유지입니다. 질서유지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대행하는 권세를 위임받았음을 알고 국민들의 선행을 장려하고 악행을 제재하는 역할에 솔선해야 합니다. 부의 공정한 획득과 분배를 장려하고, 부의 부당한 획득과 착복을 제재하는 일에 사명감을 갖고 나서야 합니다. 이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크리스천 공직자들이 먼저 정직하고 성실해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대통령을 비롯하여 공직자들에게 교회와 성도들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요?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한국의 정부와 공직자들이 정상적인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판단기준에 따라 다르게 평가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이 제시하는 바와 같이 정부의 정상적인 통치행위인 질서유지와 부의 재분배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우리나라의 정부와 공직자들은 정상적인 통치행위를 수행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인정해야 합니다.
물론 정치 지도자들과 공무원들의 부정부패와 사리사욕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공직자들을 신뢰하기가 무척 어렵지만 대통령이나 공직자들만 공신력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권위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기업가들도 존경과 신뢰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정에서 아버지도 존경을 받기는커녕 심히 위축되고 있습니다. 학교에서 선생님들의 권위가 인정되지 않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목회자들의 권위도 추락했습니다. 정말로 우리나라는 권위 부재의 시대를 맞았습니다. 이 사회에서 어디를 보아도 존경할 만한 어른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나라의 가장 큰 문제입니다. 권위 부재의 시대는 구약의 사사시대처럼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시대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무질서의 시대입니다. 그래서 집단 이기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난국입니다.
이런 때에 교회가 제 역할을 해야 합니다. 교회가 대안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대로 사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사도 바울의 권면대로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에 순복함으로써 세상나라에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구현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소명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한 가지 질문이 남습니다. 정부가 정상적인 통치행위를 하지 않을 때 교회와 성도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더 나아가서 국가가 교회와 성도들에게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핍박할 때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사악한 정부를 전복시키고 새로운 정부를 세우는 일에 적극적으로 가담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먼저 시민불복종의 원리를 이해해야 합니다. 국가나 위정자들이 정당하게 권세를 사용하지 않을 경우, 시민들은 국가에 복종하지 않을 자유가 있습니다. 이것이 시민불복종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시민불복종의 자유가 방종으로 흘러서는 안 됩니다. 시민으로서 국가의 부당한 처사에 불복하더라고 철저히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야 합니다. 시민불복종이 사회의 질서를 파괴하는데 오용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비폭력과 평화의 시위만 인정됩니다. 피의 혁명은 철저히 거부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오히려 역사를 퇴보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을 가로채는 행위입니다. 이런 점에서 지금으로부터 39년 전, 1979년 10월 26일에 있었던 김재규 씨의 박정희 시해사건은 성경적으로 볼 때 의로운 처사가 아니라 어리석은 처사였습니다. 그것으로 한국사회가 민주화되는 데 일조를 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교회와 성도가 국가의 공직자들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경우 지혜롭게 항변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부당함을 막을 수 없을 때에는 그냥 감내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대응입니다.
성경적인 예를 얼마든지 댈 수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운 사울 왕을 자기 손으로 해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울 왕을 끝까지 선대했습니다. 심판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도 바벨론의 국법에 불복했습니다. 그 국법이 하나님 나라의 법에 저촉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바벨론의 국법에 불복했지만 그 국법을 따라 순순히 풀무불과 사자 굴을 택했습니다. 일제 때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선배들도 같은 태도를 보였습니다. 무력으로 대항하지 않았습니다. 사회의 질서를 파괴하지 않았습니다. 순순히 감옥을 택했습니다. 순교까지 했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거룩한 항변입니다.
베드로전서 2:18-21는 그 당시 종의 신분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베드로 사도의 권면입니다.
(벧전 2:18-21) 『[18]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19]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주인의 횡포에 시달리고 있는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보시는 사람이 누구인지, 베드로 사도가 분명하게 가르쳤습니다. 고난 중에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참는 종입니다. 그 이유는 그가 예수님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잡히실 때에 베드로가 휘두른 칼에 말고의 한쪽 귀가 잘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말고의 귀를 붙여주시면서 베드로에게 말씀했습니다. 지금 즉시 열두 영 되는 천사들을 동원할 수 있지만 그러나 그 권세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을 때에 빌라도와 이런 대화를 나누셨습니다(요 19:10-11). 빌라도가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내가 너를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박을 권세도 있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 무슨 말씀입니까? “빌라도야, 네가 하나님께로부터 총독의 권세를 받지 않았다면 나를 이렇게 다룰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대답이었습니다. 비록 불법재판이었지만 빌라도가 가진 권세가 하나님에게서 온 것임을 예수님께서 인정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순순히 그 재판을 받으셨습니다. 물론 그 불법재판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심판에 맡기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국가의 불의한 명령에 불복할 자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서 국가의 명령에 불복하는 것은 성도의 마땅한 권리요 자유입니다. 하지만 국가의 질서를 파괴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지혜롭고 정당하게 시민불복종의 권리를 행사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권리까지 무시되고 박탈될 때에는 고난을 달게 받으면서 최고의 재판장이신 하나님께 공의로운 심판을 부탁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가장 적절한 때에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불의한 지도자를 폐하시고 새로운 지도자를 세우실 것입니다. 이것이 국가를 바르게 세우는 길입니다. 교회와 성도는 모든 권세를 세우실 뿐 아니라 폐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한 국가의 공직자들을 욕하지 마십시오. 그들의 권위를 존중하십시오. 그들에게 문제가 있으면 교회는 공적으로 최대한의 예의를 갖춰 충언을 해야 합니다. 박정희 대통령 때부터 시작된 군사정권시절 우리 개신교회는 바른 소리를 했어야 했습니다. 그때 그리하지 못했던 것을 반성하면서 지금은 바른 소리를 모아 현 정부에게 성실하고 지혜롭고 겸손하게 전해야 합니다(노회와 총회가 해야 할 일).
구약성경 가운데 예레미야 애가가 있습니다. 예레미야 애가는 예레미야 선지자가 쓴 슬픔과 비탄의 시입니다. 이 시에서 예레미야는 자신이 의인인양 비판자로 나서지 않았습니다. 지도자들의 부정에 자신도 함께 연루된 공범자임을 인정하고 참회했습니다. 백성들의 한을 자기 가슴에 묻고 울었습니다. 그 울분과 한탄을 시로 썼습니다. 그것이 예레미야 애가입니다. 그 애가를 살펴보면, 시어(詩語) 하나하나에 절절이 고통이 베여있습니다. 그래서 그 시는 천박하지 않습니다. 그 시는 푸념이 아닙니다. 불평이나 원망이 아닙니다. 그 시는 고통의 원인을 알지만 그 고통을 해결할 수 없는 무력함에 대한 진지한 고백이요 철저한 참회입니다. 그 시는 인생과 역사를 이해한 자만이 쓸 수 있는 신앙의 시입니다. 참 선지자가 누굽니까? 백성들의 고통을 자기의 몸에 깊이 새기는 자, 그래서 시인이 되어 우는 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예루살렘의 장래를 보시고 우셨습니다. 십자가를 향해 오르시면서 내뱉으신 말씀 한 마디 한 마디, 십자가상에서 외치셨던 일곱 마디의 압축된 말씀들은 모두 절규하는 시였습니다. 우리도 조국의 현실을 보며 절규하고 아파하는 시인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은 나라를 위해 시를 쓸 때입니다. 눈물로 기도할 때입니다.
그리고 눈물로 기도한 우리부터 솔선하여 국민의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대통령과 공직자들의 권위를 존중하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국민들의 복지를 위해 잘 섬기도록 세금을 잘 내십시오. 그래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한민국의 시민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은 이 세상나라에서도 좋은 시민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 때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집니다. 하나님 나라와 대한민국의 일등 시민으로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권세들을 향한 신자들의 자세
롬 13장 1~7절 / 이훈구목사(금천양문교회)
서 론
신자들이 천국의 백성이 되었지만 육을 입고 땅에서 사는 동안은 불신자와 같이 국민의 한 사람에 불과하기 때문에 여러 종류의 국법을 지키면서 권세자들에게 복종을 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과 교회를 통치하시지만 직접 통치하시기보다는 권세자를 세워서 간접적으로 통치하시기 때문에 신자들은 세상의 권세자들에게 복종을 하여야 합니다.
또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의 질서를 위하여 교회 안에 있는 영적인 권위(권세) 앞에서도 복종을 하여야 합니다.
오늘 아침에는 신자들이 권세자들에게 복종하여야 할 이유와 권세자들이 취하여야 할 자세와 신자들의 의무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신자들이 권세에 복종하여야 할 이유
1)권세자를 하나님께서 세우시기 때문입니다.
롬13:1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통치 하시되 간접적으로 통치를 하시기 때문에 권세자를 세워 통치를 하십니다.
국가의 질서와 백성들의 재산과 신변과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권세자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세 앞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기 때문에 권세 앞에 복종을 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권세가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것이라면 복종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2)권세자를 거스르는 것은 하나님의 명을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롬13:2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하나님이 세우신 권세자를 거스르는 것은 하나님을 거스르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심판을 스스로 취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권세자에게 복종을 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서 목회자에게 영적 권세를 주셨으므로 목회자에게 거스르는 것은 하나님을 거스르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심판을 자취하게 되므로 복종을 하여야 합니다.
3)권세자는 하나님의 사역자이기 때문입니다.
롬13:4-5에 보면, 권세자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보응하는 자이기 때문에 복종을 하여야 하며 양심을 따라 하여야 한다 고 하였습니다.
롬13:6 “그들이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신데 권세자들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상을 줄 자에게 상을 주고 벌을 줄자에게 벌을 주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대신 하는 것이므로 권세자들은 하나님의 사역자 인 것입니다.
특별히 교회 안에서는 목회자들이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시간 시간 대언하고 돌보고 심방하고 축복하고 임명을 하는데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사역을 하는 것입니다.
4)권세자들에게 순종한 사례와 불순종한 사례
*미리암의 경우
민12장에 보면, 선민 이스라엘의 첫 번째 지도자인 모세가 구스여자(십보라)를 아내로 취하였는데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였습니다. 그들이 모세에게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라고 비방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말을 들으시고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회막으로 부르시고 구름가운데 강림하셔서 그들에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환상으로나 꿈으로 알리기도 하고 말하기도 하지만 내 종 모세는 내 온 집에 충성자인데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하지 아니한다. 모세는 여호와의 형상을 보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를 비방하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냐 여호와께서 아론과 미리암을 향하여 진노하시고 떠나시니 미리암은 나병에 걸렸습니다.
하나님의 종인 모세를 비방한 미리암은 하나님의 무서운 형벌을 받았습니다.
*가나안 땅 정탐군 10명과 선동당한 백성들의 경우
민13-14에 보면 부정적인 정탐군 10명이 백성들을 선동하여 함께 모세를 비방하다가 20세 이상 된 자들이 다 광야에서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종 모세를 비방한 정탐군과 선동당한 백성들은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받았습니다.
*고라와 다단과 온과 선동된 대표 250명의 경우
민16에 보면 레위 지파중 고라와 다단과 온이 당을 짓고 총회에서 지휘관으로 택함을 받은 250명과 함께 모세를 비방하다가 땅이 갈라져 주동자들과 그의 가족들과 재물이 삼켜 버렸고 합세한 250명은 여호와께서 불로 태워 죽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종 모세를 비방한 주동자와 선동당해 합세한 자들은 하나님의 무서운 형벌을 받았습니다.
*여호수아의 경우
여호수아는 40년간 단 한 번도 불평 없이 모세의 시종으로 충성을 하였으므로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천국에 간 후에 모세 뒤를 이어서 두 번째 선민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수1:1)
민14:6-9에 보면 여호수아와 갈렙은 옷을 찟고 우리가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땅으로 인도하시리라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떠낫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온 회중들이 그들을 돌로 치려 하는데 그 때에 여호와의 영광이 회막에서 나타나셨습니다.
*갈렙의 경우
갈렙은 10명의 정탐군이 모세를 비방하고 백성을 선동하여 모세를 비방할 때 끝까지 모세 편에 서서 모세를 지지하였는데 하나님께서 20세 이상을 죽여 버리실 때에 그의 가족과 함께 죽지 않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큰 복을 받았습니다.
민13:30에 보면 갈렙은 모세 앞에서 백성을 조용하게 하고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고 하였습니다.
민14:24 “그러나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따랐은즉 그가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리니 들이리니 그의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
*다윗왕의 경우
삼상18장-31장 까지 보면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수없이 전략을 세워 괴롭힌 철천지 원수였지만 다윗은 하나님께서 기름을 부어 세우신 종을 내가 죽일 수 없다고 수없이 쫓겨 다니며 고생을 하였습니다.
삼상24:1-6에 보면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하여 쫓겨 다니다가 엔게디 광야에 있는 굴 깊숙이 숨어 있었는데 3,000명 군사를 이끌고 다윗을 쫓던 사울 왕이 용변을 보기 위하여 들어왔습니다.
다윗을 따르는 자들이 하나님께서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주셨다고 죽이자고 건의 하였지만 다윗이 사울 왕의 겉옷자락을 가만히 베고서도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옷을 베었다고 마음이 찔림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따르는 자들에게 사울 왕을 해치지 말라고 지령을 내렸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도 사울 왕은 또 다윗을 죽이려고 쫓았습니다.
삼상26장에 보면, 사울 왕이 3,000명을 이끌고 십 광야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사울 왕은 진영 가운데 누워 자고 군인들은 사울 왕을 둘러 자고 있을 때 아비새가 다윗에게 하나님이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넘기셨으니 그를 찔러 단번에 땅에 꽃게 하소서 라고 요청을 하였습니다.
다윗은 아비새에게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전장에 나가서 망하리라 하고 사울 왕의 머리 곁에 있는 금창과 물병만을 가지고 오게 하였습니다.
삼상31장에 보면, 다윗의 말대로 사울 왕과 세 아들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전사를 하였고 다윗은 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2대 왕이 되었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과 세 아들을 위해 조가를 지었고 사울 왕의 손자 절룸발이 므비보셋을 왕자처럼 대우를 하여 주었고 사울 왕에게 속한 재산을 므비보셋을 위하여 사울의 시종 시바를 시켜 관리하게 하였습니다.
*여로보암 왕의 경우
왕상13장에 보면, 선지자(하나님의 사람)가 벧엘 제단 곁에 서서 분향을 하고 있는 여로보암 왕을 향하여 책망을 하였는데 그 책망을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대신 왕이 손을 펴며 선자를 잡으라고 소리를 치자 손을 편채로 말라버려 다시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왕이 선지자에게 애원하여 하나님께 기도할 때 왕의 손이 치료를 받게 되었습니다.
2. 권세자들이 가져야 할 자세
1)항상 하나님을 의식하여야 합니다.
롬13:1하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권세자들은 나를 권세자로 세우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의식하고 신중하고 성실하게 직분을 감당하여야 합니다.
권세자들이 횡포하거나 남용해서는 안 되며 그 권세로 범죄를 범하고 자기의 이권을 채워서도 안 됩니다.
권세자들이 바르게 감당을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자취하게 됩니다.
2)선을 행한 자를 칭찬하여야 합니다.
롬13:3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권세자들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선을 행한 자에게 아낌없이 칭찬을 하여야 합니다.
칭찬은 최고의 격려이며 힘을 더해주는 보약과도 같겠다고 하겠습니다
3)악을 행한 자에게는 두려움이 되어야 합니다.
권세자들은 백성들이 범법행위를 할 경우에 반드시 징계를 하여 권세자들을 두려워하게 하여야 합니다. 공권력이 약해지거나 법이 약해지면 거기에 비례하여 사회는 무질서하여 지고 범죄는 더 성행하고 국민들은 불안에 떨게 됩니다.
롬13:3 “다스리는 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롬13:4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
3. 신자들의 의무
신자들에게는 국가와 사회 앞에 지켜야 할 의무가 있고 또 교회안에서 지켜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1)국가와 사회 앞에 지켜야 할 의무
(1)납세의 의무
모든 국민이 국가 유지와 나라의 살림을 튼튼히 하기 위하여 세금을 내야 하는 의무를 말합니다.
롬13:7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받을 자에게 관세를 바치고”
조세(공세)는 국가나 자치 단체가 필요한 경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국민으로부터 강제로 거두어들이는 세금을 의미함.
관세는 한 나라의 세관을 통과하는 상품에 대하여 부과 하는 세금이나 통관세를 의미함.
(2)국방(병력)의 의무
국민들이 안심하고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국민으로서 나라를 지켜야 하는 의무를 말합니다.
(3)교육의 의무
개인이 성장하고 나라의 발전에 이바지하기 위해서 모든 국민이 법으로 정해진 기간 동안 모든 국민이 법으로 정해진 기간 동안 교육을 받을 의무를 말합니다.
(4)노동(근로)의 의무
개인의 행복과 나라의 발전과 경쟁력을 높이기 위하여 모든 국민이 일을 하여야 할 의무를 말합니다.
2)교회 안에서 지켜야 할 의무
(1)예배출석의 의무
주일예배와 각종 예배(수, 금, 새벽, 쎌 모임)
(2)헌금의 의무(십일조, 감사, 선교, 각종헌금)
(3)봉사와 섬김의 의무(직분 맡아 봉사하고, 서로 섬김)
(4)전도의 의무(선교의 의무) 주님의 지상 명령.
결 론
신자들은 매사에 본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국가와 권세자들에게 복종하는 자세로 본을 보이고 국법이나 세금을 내는 데도 본이 되어야 합니다. 신자들은 범법자가 되어 벌을 받는 대신 법을 잘 지키고 의무를 잘 감당하여 칭찬을 받고 상급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또 교회 안에서도 신자들은 영적권위 앞에 복종을 하여 하나님의 징계대신 복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기독교와 정치
롬 13장 1~7절 / 한경직목사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롬 十三·일)
『의는 나라를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하느니라』(잠 十四·三十四)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마 二十二·二十一)
이 말씀은 우리 기독신자에게 국가에 대한, 권세에 대한, 정치에 대한 태도를 가르쳐 준 말씀입니다. 우리가 三十여 년간을 일본의 포악한 정치 밑에 종이 되었을 때에는 정치는 우리가 운위할 바가 아니었던 것이지만, 해방된 오늘날 나라를 다시 찾아 나라의 주인공이 된 우리로서는 누구나 다 정치에 관여하여 국가의 흥륭(興隆)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늘 나라의 백성이면서 동시에 이 나라의 국민이 된 우리 기독교도들은 하늘 나라와 이 나라와의 관계를 어떻게 인식할 것이며, 우리 신도로서 이 나라에 대하여 어떠한 책임이 있는가를 분명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이 문제에 관하여 기독교의 정치 철학을 간단히 소개하고 다음에 실제 문제를 생각하고자 합니다. 지금 이 지구상에는 二十여 억이라는 인류가 생을 영위하고 있는데 각각 국가를 형성하고 있어서 방금 UN에 가입된 국가만 해도 五十여 국가나 됩니다.
그러면 이러한 국가가 우리 인간 생활에 필요하냐 필요치 아니하냐에 대해서 계몽 철학과 十九세기의 자연과학의 영향을 받은 무정부주의자 프루돈과 크로포트킨 등은 국가의 필요성을 부인하였습니다. 그들은 현존 사회의 모든 해악의 원인을 국가의 강제 권력에 있다고 하여 이러한 강제 권력을 배제한다면 본래 인간성은 선한 까닭에 본래의 선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그네들은 강제가 악을 낳는다는 것을 강조하는 나머지 모든 인간성을 미화한 데 오산(誤算)이 있었습니다. 악은 먼저 사람의 마음에 있습니다. 만약 이 악이 없으면 무정부주의의 실현이 가능하겠습니다. 그러나 인간성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산상보훈의 말씀대로 누구나 다 할 수 있다면 정부는 필요치 않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든지 우리의 이상이요 현실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정부는 성경 말씀대로『악을 행하는 자를 벌하기 위하여』세운 것입니다. 즉 죄가 있으므로 관헌을 임명하여 인간 생활에 필요한 질서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강제 권력 곧 주권의 소재를 어떠한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는, 제왕은 신을 대신하여 모든 권력을 가진다는 중세기의 제왕신성설(帝王神聖說)이 있고, 국가적 자아 의식 의지를 주창하는 독일 철학에 의한 범신론적(汎神論的) 국가 주권 설이 있으며, 근세에 와서는 주권은 인민에게 있다는 인민 주권 설을 보게 되었습니다. 十八세기에 인민 주권으로 공화국을 세운 나라로는 一七七六년에 독립한 미국과 一七八九년에 이루어진 불란서 공화국 두 나라가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인민 주권이지만 불란서는 무신론적 인민 주권이었으므로 테러의 성행, 반(反)혁명 운동의 봉기, 나폴레옹 제국의 건설, 왕정의 복구, 나폴레옹 三세의 제국 재건 등으로 十九세기 중 불란서는 가장 수난한 민족이었습니다. 그 간에 단두대에 아침 이슬로 사라진 청년의 수가 그 얼마이었습니까? 반면에 미국은 기독교적 민주주의에 의한 국가로서 그 헌법에『감사하리로다 전능하신 하나님, 그는 우리에게 자신의 관헌을 택하는 권(權)을 주셨도다』라고 하였고 그 독립 선언서에는『아메리카 국민은 자연법과 하나님의 율법에 의하여 그 권리를 주창하고 버릴 수 없는 권리는 창조주인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고로 일어나노라』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미국은 건국이래 오늘날까지 세계에서 제일 축복 받는 평화의 나라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주권의 근본은 다 신에게 있다는 것의 증좌(證左)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습니다.』그러므로 어떤 방법으로 권세를 얻었든지 다 하나님께 대하여 책임이 있습니다.
즉『그 권세가 있는 자는 하나님의 일꾼 됨을』(롬 十三·六) 기억하여야 합니다. 고래로 모든 위대한 정치가는 다윗 이래로 글래드스톤, 링컨까지 이런 의식을 가지고 정치를 하였습니다. 만약 이 책임을 잘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주권을 옮기시기도 하고 나라를 망하게도 하십니다. 고로 모든 정치가는 하나님을 경외할 줄 알아야 합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벨사살 왕이 그 관원 一천 명을 불러서 큰 잔치를 배설하고 술을 마시며 금, 은, 동, 철, 목석으로 만든 우상들을 찬양할 때에 돌연히 한 손가락이 나타나 벽에 글을 쓴 것을 당시의 참된 정치가 다니엘에게 물었을 때, 다니엘은 담대히 그리고 서슴지 않고 왕 앞에서『와이여,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나라와 권세와 영광과 존귀를 왕의 조부 느부갓네살에게 주셨으니 그 주신 권세를 인하여 모든 백성과 나라와 각 방언 하는 자들이 그 앞에서 떨며 두려워하였으며 저가 임의로 죽이고 살리며 임의로 높이고 낮추더니 저가 마음이 높아지며 뜻이 강퍅하여 교만을 행하니 왕위를 폐하고 그 영광을 빼앗기고 인생 중에서 쫓겨나 그 마음이 변하여 야수(野獸)의 마음과 같아지고 또한 들 나귀와 동거하고 또 소와 같이 풀을 먹고 그 몸이 하늘 이슬에 젖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사람의 나라를 주관하시고 또한 그 뜻대로 나라를 사람에게 주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게 하셨으니 벨사살 왕이여, 왕은 그의 손자가 되어 이것을 다 알고도 오히려 마음을 겸비하지 아니하고 오직 스스로 높여 하늘의 대 주재를 거역하고 우리가 그 성전 기명을 왕 앞에 가져다가 왕과 관원들과 왕후와 빈궁들이 다 그것으로 술을 마시고 또한 금, 은, 동, 철과 목, 석으로 만든 우상 곧 듣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자를 찬양하고 도리어 생명 호흡을 주시고 왕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아니한지라, 이에 하나님이 손가락을 보내 사 이 글을 기록하게 하셨으니 그 글은 이것이니「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 하였으니 그 뜻을 해석하건대「메네」는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마치게 함이요「데겔」은 하나님이 왕을 달아보사 부족하다 하심이요「베레」는 하나님이 왕의 나라는 나누어「메데」와「파사」사람에게 주었다 하심이라』고 사실대로 조금도 숨김없이 말하였고 또 사실 그렇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이는 다니엘의 정치 철학인 동시에 우리 성경이 국가 주권에 대하여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오늘날 패망 당한 일본을 보세요. 주권의 근본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 자들의 말로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대저 하나님은 우리가 사는 자연계에 자연 법칙을 주셨으며 도덕 계에는 도덕적 법칙을 주시듯 이 정치에도 일관한 원리를 주셔서 그 원리에 의하여 정부를 세워 모든 백성으로 복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의는 나라를 영화롭게 하고』라는 말씀과 같이 의를 정치의 원리로 주신 것입니다. 국가 내에도 개인 개인간의 관계가 있고 계급과 계급과의 관계,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과의 관계가 있는데 이러한 중에 있어 인간의 인격을 성장시킴에 절대 필요한 자유와 평등을 q장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꼭 공의로 정치를 실행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정치를 실행하는 사람에게 칼 곧 권세를 주신 것은 악한 사람을 징계하라고 형별의 칼로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칼을 이러한 데는 쓰지 않고, 오히려 선한 사람을 핍박하고 선지자를 죽이고 주기철(朱基徹)목사 같은 이를 옥사케 하면 이는 법대로 쓰는 공의가 아닙니다. 의인이 피를 흘리고 옥중에서 죽게 하는 이러한 정치가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멸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한 이 칼은 시비를 온전히 분간하여 민사 소송 등에 있어서 공의로 판단하여 지도하라고 주셨거늘, 공평이 없고 안면과 지위와 뇌물로 허가를 주고 안 주며 매관매직을 한다면 어찌 이를 공의라 하겠습니까? 또한 이 칼은 외적의 침입 시에 방비하라고 주셨는데 육 해군과 공군을 가지지 아니한 약소국가를 침략하고 모략하고 자기의 야심과 야망을 채우기 위하여 약소민족을 유린하면 어찌 이것이 공의이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구약 시대의 관원들에게 말씀하시기를『너희는 마땅히 스스로 씻어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의 악한 일을 버리며 행악(行惡)을 그치고 선생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여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고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사 一·十六-十七)고 하셨고, 또 말씀하시기를『너희의 공의는 물 흐르는 것 같이 하고 의는 큰 강 같이 할지니라』(암 五·二十四)고 하셨고, 또『사람아, 주 선한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여호와 네게 청구하는 것이 무엇이냐. 의를 행하며 긍휼히 여기기를 좋아하고 겸손으로 네 하나님께 행함이 아니냐』(미 六·八)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상으로 국가의 필요성과 주권의 소재와 정치 원리에 대하여 대략 말씀을 드렸는데 이제부터는 국가와 교회의 관계를 말하려고 합니다. 역사적으로 교회와 국가는 三종의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중세기를 보면 교회가 정치를 지배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국가가 교회에 예속되었던 것입니다. 十一세기에 독일 황제 하인리히가 알프스 산을 넘어 법황이 유하는 카노사 성밖에서 맨발로 눈 위에서 三일 간을 빌어서야 비로소 받았다는 사실은 국가가 교회의 구속 아래 있었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형편은 종교 개혁 이후 사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둘째로는 콘스탄틴 이후의 국가와 교회의 관계인데, 이 때에는 국교가 설립되어 현재가지도 독일(전쟁 전), 스웨덴, 노르웨이 제국은 국교를 가지고 영국도 성공회를 국교로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국교 관계에 있어서는 좋은 점도 물론 있으나, 세속의 권세가 교회를 간섭하는 정치적 모략이 있기 쉬운, 원만치 못한 점도 있습니다.
셋째로는 교회와 국가를 완전히 분리하는 미국과 화란 같은 칼빈주의 제국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도『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로』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이, 이 완전 분리주의는 그리스도의 교훈에도 적합하며 따라서 교회는 영적 범위 안에서 완전 자유일 것이며 간접적으로 국가의 정신적 기초가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개인 신자와 국가의 관계는 어떠하여야 하겠습니까? 이상에 말한 바와 같이, 국가와 교회는 완전히 분리해야만 되겠지만 개인은 신자인 동시에 또한 국민인 고로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국가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해 나갈 때 신자는 충성을 다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첫째로 우리는 주군이 하나님께 있는 줄 알아 영광을 돌리는 경건한 명령에 순복하는 나라를 만들 의무가 있으며, 둘째로 공의에 기(基)하여 기독교의 국가적 이상인 자유, 평등, 박애가 실현되는 국가를 만들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빛과 소금의 직책을 감당하여야 할 것입니다. 十八세기에 북미 대륙의 청교도들은 독립 전쟁을 하여 아메리카 독립을 완성했고 十七세기 화란인은 스페인과 용감히 싸워 독립을 획득했습니다.
그러면 특히 이 시대에 처한 우리들은 국가에 대하여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 대한은 아직까지 완전한 독립을 차지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선 이 기회에 독립을 완수할 책임이 있습니다. 정치적 자유가 없이는 신앙의 자유와 기타 모든 자유는 없는 것입니다. 고로 우선 독립입니다. 이것은 우리 겨레의 지상 명령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독립은 하되 기독교적 이상에 의하여 건국케 할 의무가 있습니다. 건국을 하되 유물론적 독재 국이 되면 어찌하겠습니까? 지금은 참으로 천재일우의 기회입니다. 우리의 행동 여하가 자손 만대에 큰 관계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자각하여 우리의 의무를 수행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 신자가 어떻게 이 천부의 사명을 다할 수 있습니까? 최선의 의무 이행의 방법은 여하한 것입니까?
첫째로, 우리는 조선의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참으로 지금은 각 방면이 혼돈한 상태에 빠져있습니다. 그 근본 이유는 사상이 혼돈해진 까닭입니다. 유신론이냐 무신론이냐 독재주의냐, 기독교 사회주의냐 공산주의냐, 건설이냐 파괴냐, 문명이냐 야만이냐-이러한 사상적 기로에서 청년과 학생과 노동자, 농민, 소시민, 일반 대중들은 갈팡질팡하고 있습니다.
어느 노선이 우리가 취할 진실한 노선인가를 알고자 대중은 갈망하고 있습니다.
신자의 사명이 여기 있습니다. 천고에 빛나는 진리를 파악한 우리가 철저한 사상으로 교회 운동에 나서야 되겠습니다. 이것이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강연회나 토론회를 개최함으로써, 잡지나 소책자를 발간함으로써, 기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적극적으로 이 운동을 추진시켜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기독교인은 잠잠합니다. 최선의 정치 이념이 우리에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다지도 퇴영적(退 的)입니까? 좀 더 주도성(主導性)을 가집시다. 십자가를 지고서 노동 운동도 좋고, 청치 운동도 좋습니다.
전후에 있어서 각국에는 기독교 민주당이 일어나 주도성을 가지고 활발히 움직이는 것을 보세요. 일어나 일하세요.
어떤 친구가 일전에 내게 말하기를『대한의 기독신자로서 정치 운동이나 사회 운동을 하게 되면 으레 술과 담배를 먹게 된다』도 합디다. 여러분, 대한에는 묵공(默公) 월리암과 워싱턴과 같은 기독교 애국자는 없겠습니까? 참 신앙을 가지고 정치 운동, 사회 운동을 일으켜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일반 교우들은 무엇을 하여야 하겠습니까? 전도를 해야 하겠습니다.
전도는 최대의 정치 운동이요,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가 기독교적 이상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이 전도 운동을 개시하여 전 대한 민족의 사상을 기독교 사상으로 순화(醇化)한다면 공의의 나라, 독립된 기독교 대한이 속히 이루어질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국가관
롬 13장 1~7절 / 김홍도목사
우리는 역사적으로나, 성서적으로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 문제가 되어 왔는가 하는 것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역사적인 면에서의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와 따라서 성서적인 국가관은 어떤 것이며 우리에게 있어서의 참다운 애국의 길이 무엇이며 이 민족의 살길이 무엇인가를 잠시 말씀드리면 서 서로 은혜를 나누고자 하는 것입니다.
<1. 역사적으로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초대 교회 시대에는 교회와 국가는 서로 대립하는 관계였습니다. 그래서 국가는 어떻게 해서든지 교회를 탄압하고 핍박해 왔고, 동시에 교회는 국가를 향해 대항하는 입장에 섰던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중세기에 와서는 초대 교회 시대와는 정반대로 교회와 국가는 대단히 친밀해져서 교회가 국가를 명령하기도 했고, 때로는 국가가 교회를 명령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또 어떤 때는 교회의 권위가 인정되고 높아져서 교황이 세상 왕에게 왕관을 씌워 주는 대관식까지도 거행할 수 있는 위치에까지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때는 비유적으로 교황을 가리켜 태양과 같다고 했고, 세상 나라의 왕은 달과 같다고 하면서 달은 태양의 열과 빛을 받아서 반사하듯이 왕권은 교황에게서 받아야 한다고까지 생각하여 교회가 인정을 받고 권위가 높아졌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에는 완전히 교회가 국가를 손에 쥐고 지배하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토록 교회의 권위가 올라가서 국가를 기구적으로 지배하는 것이 좋을 것 같고 하나님의 뜻인 줄 알았는데 실상은 교회가 가장 부패했으며, 어느 시대보다도 암흑시대를 이루었던 것입니다. 현대에 와서는 또다시 교회와 국가는 완전히 분리되는 듯한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세상 나라에 대해서는 관심을 둘 바가 아니라는 생각에서 타계주의(他界主義)적이고도 현실도피주의적으로 나가려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고, 반대로 사회복음을 주장하면서 부패한 현실을 개혁해야 한다고 하며 현실참여니 해서 지나칠 정도로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를 대립시켜 놓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개인의 구령 사업, 복음 전도보다는 사회적으로 개혁이 일어나고 지상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데모를 하다가 형무소에 드나드는 것을 최상의 선으로 알고 자위하는 신학생이나 목사들까지도 봅니다. 물론 예수님과 같이 독선적이고도 위선적인 당시의 지도자들을 책망하시듯이, 혹은 세례 요한이나 사도 베드로와 같이 불의와 부정을 볼 때에 신앙을 굽히지 말고 규탄해야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쳐서 반감을 사게 되고, 사회의 불의와 부정을 규탄하는 것이 한낱 개인 영웅주의로 전락해 버린다고 하면 그것은 아무런 반응도, 효과도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2. 성서적인 국가관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성서적으로 볼 때 교회와 국가가 너무 가까워져서 서로 지배하려고 하는 것도 안 되고, 교회와 국가가 서로 분리되어서 대립하여 박해하고 대항하는 것도 결코 성서적인 것이 아닙니다. 마치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는 바닷물 위에 떠 있는 배와 같은 것입니다. 배가 물 없이는 가치가 없지만, 지나치게 물과 가까워진다고 해서 물이 배 위에 넘어 들어가도 배는 파선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언제나 자기의 위치와 서로의 관계를 유지할 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을 향해서 빛의 역할을 할 때는 해야 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어거스틴같은 사람도 다 훌륭하지만 한 가지 잘못된 사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가 쓴 "하나님의 도성"이라는 저서에 보면, 그는 하나님의 뜻이 잘 실현된 국가는 영원한 하나님의 도성이 될 줄로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분명히 알야야 할 사실은 이 세상의 나라에 하나님의 완전한 도성이 이루어지거나 지상 천국이 이루어진다고 성서는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성서적으로 볼 때 이 세상의 나라들은 점점 죄악으로 물들다가 최후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해 없어지고 전혀 새로운 신천신지(新川新地)의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구약의 묵시록이라고 하는 다니엘서에도 보면 이 세상의 나라를 상징하는 큰 우상은 하늘에서 내려온 돌에 의하여 다 부서져서 여름 타작 마당의 겨가 날아가듯 다 날아가고 그 우상을 친 돌이 점점 커져서 우주에 가득하더라고 다니엘서 2장 31절 이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큰 우상이 라 함은 세상의 나라들을 의미하는 것이요, 큰 돌이라 함은 산돌 곧 예수님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신약 요한계시록의 전체적인 사상도 이 세상의 나라는 최후에 가서는 다 심판을 받아 멸망하여 없어지고 전혀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것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나라들은 제 아무리 과학이 발달하고 또 정치를 잘하고 복음화가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보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어느 나라도 영원한 지상 천국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통일교나, 여호와의 증인같은 이단 종교에서는 이 세상이 점점 향상 발전해서 지상 천국이 이루어진다고 잘못된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통일교에서는 한국에 예수님이 재림하고 이 한국이야말로 영원한 지상 천국이 이루어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다 성경과는 정반대가 되는 말들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상대적인 의미에서 어느 정도 복음화가 잘 이루어지고, 어느 시대에 어느 나라가 하나님의 큰 뜻을 이루어 드리는 사명을 맡은 나라는 될 수 있으나, 최후의 구원은 개인적이요, 모든 세상 나라들은 다 없어지고 전혀 새로운 신천신지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이 성서적인 국가관이라는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따라서 어느 민족만이 우월하다거나 또는 내 민족만이 제일이라는 민족주의(Nationalism) 은 성서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기가 태어나고 자기가 몸 담아 사는 나의 조국이 잘 되기를 위해 기도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민족주의(Nationalism)는 반대해도 애국심(Patriotism)은 찬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마가복음 12장 13절 이하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냐고 물을 때에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고 말씀하신 것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중 국적을 가지고 있고, 이중 시민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첫째는 하나님의 나라에도 충성하고 다음으로 세상 나라에도 충성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도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시고 40년 후에 멸망당하고 많은 사람이 무참하게 학살당할 것을 내다보시고 우셨던 사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법에 위배되지 않는 한도내에서 우리의 국가를 사랑하고 누구보다도 충성하는 애국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오늘 본문에 사도 바울도 "각 가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의 다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되지 않는 한, 나라의 법을 지키고 해야 될 의무도 다하고 세금도 잘 내고 나라를 사랑해야 된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들은 애국이니 애족이니 하는 것은 편협한 생각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우리 "기독교에는 국경은 없으나 그리스도인에게는 조국이 있다"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국가만이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내가 살고 있는 가정 내가 속한 직장, 내가 속한 어느 단체이던지 잘 되기를 위해 기도하고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인물들을 볼 때 위대한 인물들은 경신애족(敬神愛族)했던 사람들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영도자 모세도 출애굽기 32장 31절에 보면 자기 백성이 금신상을 만들어 범죄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되었을 때에 그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기를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상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주옵소서"하고 간절한 애국 애족의 중보적인 기도를 드렸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 9장 3절에 말씀하시기를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고 했습니다.
디모데전서 2장 1절 이하에 보면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고 사도 바울이 권면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월남을 보십시요! 월남 정부가 아무리 부패했다 하더라도 나라가 있을 때 예배도 드렸고, 불평도, 데모도 했지, 나라가 망하고 나니 그 데모한 자들이나 그 나라의 신앙인들은 어떻게 된 지 아십니까?
만의 하나라도 만일 대한민국 정부가 망하고 악독스런 북괴가 남침하여 공산화가 된다고 가정해 보십시요. 이 남한의 자유는 없어질 것이요, 교회들은 파괴되고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순교를 당하고야 말 것입니다.
아인슈타인 박사는 말하기를 "자기의 인생과 자기의 종족의 인생을 무의미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일 뿐 아니라 생활을 영위할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아무쪼록 우리 성도들은 누구보다도 우리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3. 참다운 애국의 길이 무엇이며 이 민족의 살길이 무엇인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① 힘써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국내에나 국외적으로 복음을 힘써 전파하는 것이 이 민족의 참 살길이요, 애국하는 길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저 간악한 공산주의를 참으로 이기는 길도 기독교 신앙이며, 이 백성이 새로워지는 길도 복음의 능력이며, 따라서 주님이 명하신 선교의 사명을 다 하는 국가나 민족이 될 때에 하나님께선 보장해 주시고 축복해 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18세기 영국에선 낮에는 실업자와 거지들이 거리를 메웠고, 밤에는 절도와 강도들이 거리를 메웠고, 몇 집 건너 한 집씩 술집이었던 멸망 직전의 나라가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레 형제의 복음 전파로 나라를 구원했던 것을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죤 녹스(J. Knox) 한 사람의 힘이 스코틀랜드를 구원했던 사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서 이 땅에 어둠이 오기 전에 복음 전파하는 자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② 회개의 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소돔과 고모라성은 하나님이 구원하시려고 예정하신 땅이지만 의인 열 사람이 없어서 멸망했습니다. 그러나 니느웨성은 멸망시키려고 예정했지만 백성이 애통하여 금식하며 회개하게 될 때에 구원받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의로운 백성이 많으면 그 백성은 망하지 않습니다. 아모스 5장 14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모스 선지를 통해서 "너희는 살기 위하여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잠언 14장 34절에서도 "의는 나라로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레미야 5장 1절에도 보면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를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 고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 회개의 운동은 우리 자신부터 일어나야 할 것입니다. 예언자나 선지자들처럼 남의 죄와 잘못만을 지적하는 일이 우리가 할 일이 아니라, 예레미야와 같이 이 민족의 죄가 곧 나의 죄요, 이 민족이 패역한 까닭은 내 까닭이라고 생각하면서 제사장적인 입장에서 사죄함을 얻기 위해 눈물을 흘리는 회개의 운동이 있어지게 될 때 이 민족의 살길은 있어지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③ 기도의 운동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기도하는 개인이나, 가정이나, 국가는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구약의 에스더 왕후는 자기 민족의 구원을 위해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를 하고 3일을 온 백성과 함께 금식하며 기도를 한 후에 왕에게 담대히 나가 말하게 될 때 구원받았던 것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6·25 때에 공산군에게 밀려 낙동강까지 내려갔을 때에 유엔군이 비행기로 공격하려고 했으나 그때가 심한 장마철인고로 비행기 한대 움직이지 못하고 있을 때, 이승만 대통령은 부산에 피난온 목사님들을 불러모아 놓고 장마를 그치게 하기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합니다. 그때 대통령과 모인 수많은 목사님들이 하나님께 매어달려 기도하게 될 때 억수같이 퍼붓던 장마가 맑게 개어서 유엔군이 상륙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33장 2절과 3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민족의 마지막 남은 길은 이 기도의 길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의 힘센 나라를 의지하거나 세상적인 그 어떤 것을 바라보다가는 실망하고 맙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운명을 주관하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에게 약속해 주고 계십니다. 우리의 자신이나, 가정이나, 교회나, 이 민족을 위해 날마다 쉬지 말고 기도의 운동이 있어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특히 6·25 25주년 기념주일을 당해 우리 기독교인이 가져야 할 신앙적인 국가관을 말씀드렸습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뜻에 맞는 애국 애족하는 성도가 되고 이 민족이 되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멘-
모든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롬 13장 1~7절 / 조상호목사
요즈음 386세대라는 단어가 유행입니다. 현재 30대의 나이로서 80년대에 대학교를 다녔고 60년대에 출생한 사람들을 386세대라고 합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저도 늙은 386세대입니다. 80년에 대학에 입학하여 80학번이고, 현재 만38살 나이이기 때문에 저 또한 386세대입니다.
그런데 이 386세대들이 다른 세대의 사람들과 차이점이 있습니다. 특별한 것을 먹고 학교를 다녔습니다. 최류탄입니다. 최류탄 가스를 배가 터지도록 먹고 마시며 학교를 다녔습니다.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많은 수의 386세대들은 부마사태, 박대통령 시해사건, 5.18 광주사태 등의 정치적 격변기 속에서 데모라는 통과의례를 치루었습니다. 데모는 거의 필수과목처럼 되어있었습니다. 한번쯤은 데모대에 속해 목이 터지도록 '독재정군 타파'와 '민주화'를 외치다가, 취류탄 가스에 눈물, 콧물을 흘리며 혼비백산하여 도망간 기억들이 있습니다. 당시에 학생들은 모였다 하면, 일반 학과 공부보다는 정치적인 논쟁과 토론으로 밤을 지새우기 일수였습니다. 이것은 학교에서 뿐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교회 안에서의 논쟁의 큰 이슈는 정의와 순종 두가지였습니다. 많은 크리스챤 청년들은 신앙의 혼돈기를 보내야 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도 1학년에 입학한 후, 얼마 있지 않아 터진 5.18사태 때에는 '정의'에 대한 확신도 없으면서 데모를 했습니다. 1학년 내내 신앙과 정치문제 사이에서 방황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2학년이 되었을 때, 당시 대학부 지도목사님으로부터 로마서 말씀을 1년 내내 들었습니다. 정말 귀가 따갑도록 들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서서히 제가 변해 갔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때 말씀의 능력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죄우에 날이 선 검보다 예리하여 우리의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한다"는 히브리서 13장12절 말씀이 체험되었습니다. 이슬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고 1주일에 한번 듣는 말씀인데 시간이 가면 갈수록 저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1) 모든 권세를 인정해야
특별히 본문 로마13장을 대하면서 정의와 순종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기준을 세울 수가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1절의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라는 이 말씀이 저에게 큰 도전으로 다가왔습니다. 저는 그 동안 (딤후3:16)의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라는 이 말씀을 통해, 내게 주어진 이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또한 (요한 계시록22:18,19)의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거룩한 성에 참예 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라는 말씀을 통해 내게 주어진 이 성경은 어느 것 하나 뺄 수도 없고, 어느 것 하나 더할 수 없는 100% 있는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본문 말씀 1절이 저에게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1절하반절을 다같이 보겠습니다. "....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여러분! 이 말씀에 의하면 권세는 어디로부터 났다고 합니까? 하나님께로부터 났습니다. 하나님께로 나지 않는 권세가 없습니다.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입니다. 믿으십니까? 물론 이 자리에 이 말씀에 반감을 품는 분들도 있습니다. '선하신 하나님, 정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히틀러나 스탈린, 김일성 같은 악한 지도자에게 권세를 주셨는가? 그러면 히틀러나 김일성 같은 악한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세우셨다는 말인가?'라고 질문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질문입니다.
그러한 분들에게 하나님의 두가지 섭리를 설명하면 이해가 쉬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계획을 통해 섭리하십니다. 또한 허용을 통해 섭리하십니다. 어려운 신학적 용어입니다만,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계획하시고 그 계획대로 세상을 통치하십니다. 더 나아가 비록 계획하신 것은 아니지만, 때때로 인간에게 허용하셔서 세상을 통치하십니다. 저는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히틀러와 김일성을 계획하시고 세우신 것은 아니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계획하시지는 않았지만,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나아가는 것을 그대로 허용하실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통해 여러 가지를 배우게 하십니다. 악을 통해 선을 깨닫게 하십니다. 억압을 통해 자유의 중요성을 배우게 하십니다. 외부의 핍박을 통해 심령에 불을 붙입니다.
EX)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북해 바다에서 청어를 잡아 먼 거리에 있는 런던으로 가져와 판매하던 한 수산업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수산업자가 가져 온 청어는 싱싱하여 런던의 수산시장에서 비싼 값에 팔리는 것이었습니다. 하루는 다른 동료 수산업자들이 이상해서 그 사람에게 물어 보았으나 그는 비밀이라고 이유를 가르쳐 주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계속해서 이유를 묻자, 그 사람은 하는 수없이 비결을 알려 주었습니다. "여보게들, 나는 청어를 잡아서 넣은 통에 메기 한 마리씩을 집어넣는다네" 그러자 모든 동료들은 눈이 둥그래지면서 "그러면 그 메기가 청어를 다 잡아 먹지 않나?"라고 이구동성으로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웃으면서 "자네들 말도 조금은 일리가 있는 말이지, 그러나 여보게들, 한 마리 메기가 청어 몇 마리 잡아먹을 수 있겠나? 한 두세마리 정도밖에 잡아먹지 못하지. 그러나 메기라는 놈이 함께 있으면 수백마리의 청어들은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계속 도망다니며 헤엄을 치게 되지. 결국 런던에 올 때까지 모든 청어들은 열심히 헤엄을 치고 도망 다니다 보니 살아서 여전히 싱싱하다네"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악한 권세를 허용하셔서 사람들로 하여금 각성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북한이 공산화가 된 것은 놀라운 하나님의 허용적 섭리라고 말합니다. 북쪽으로부터 전쟁의 위협이 주어지면 주어질수록 교회로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간첩이 출몰했다고 하자, 철야기도에 사람들이 가득 찼습니다. 북한에서 핵미사일을 시험 발사한다고 하자, 새벽기도에서 구국기도회를 한다, 조국수호 기도회를 한다 하면서 기도의 불이 붙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세계 기독교 역사상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일이 한국 땅에서 일어났습니다. 개신교가 한국 땅에 전파된 지 100년이 채 못되어 전국민의 25%나 되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역사에서도 이 원리는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로마 황제의 엄청난 핍박이 있었습니다. 네로라는 무시무시한 악한 황제는 기독교에 관련된 서적을 몽땅 불살랐습니다. 기독교인들을 무섭게 핍박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핍박이 심하면 심할수록 복음은 사방팔방으로 퍼져 나갔다는 사실입니다. (행8;1) "....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핍박을 통해서 교회는 부흥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로마 황제에게 권세를 허용하시고, 그 악한 권세를 통해 복음이 세계로 퍼지게 한 것입니다. 결국 로마의 악한 권세까지도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았습니다.
우리가 이미 (롬11:36)에서 살펴 본 것처럼,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갑니다. 이 '만물'이라는 단어에 세상의 권세도 포함됩니다. 선한 권세나, 악한 권세나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왔습니다. 또 모든 권세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습니다. 모든 권세는 하나님에게로 돌아갑니다. 아멘?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권세에게 순복해야 합니다.
2) 모든 권세에 순복해야
선한 권세든, 악한 권세든 하나님께서 허용하시고, 하나님께서 세우셨기 때문에 우리는 위에 있는 권세에게 순복해야 합니다. 1절상반절을 보겠습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여기에서 말하는 '위에 있는 권세들'이라는 단어는 국가의 최고 통치자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국가의 권력자들 뿐 아니라, 경찰, 공무원 등의 법을 집행하는 관리들을 포함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국가의 최고 통치권자에게 뿐 아니라 국가 공무원, 경찰에게도 순종해야 합니다. 세상의 질서에 순종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질서를 지켜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적 원리입니다. (고전14:33)에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또 조금 건너 뛰어 40절에는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질서를 좋아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손해를 보는 한이 있더라도 법을 지켜야 합니다. 억울함을 당해도 법을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정 억울하면 법대로 재판정에 가서 잘잘못을 가리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훌륭한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당시 로마 총독인 빌라도 앞에 나아가셔서 재판을 받으셨습니다. 그 재판은 분명한 불법 재판이었습니다. 죄 없는 사람을 처형하려고 했기 때문에 분명한 불법재판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요19:11)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현대인의 성경으로 보겠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이렇게 대답하셨다. 하나님이 주시지 않았다면 나를 해할 권한이 너에게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를 너에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다" '하나님이 주시지 않았다면'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 당신을 해할 권한을 하나님께서 이미 빌라도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구약성경에서 예언하신 말씀을 이루시려고 빌라도와 같은 악한 사람에게 악행을 허용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비록 불법재판을 진행하고 있지만, 빌라도가 가진 권한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인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은 빌라도를 인정한 것이 아니라, 빌라도에게 권세를 주신 하나님을 인정한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위에 있는 권세에 순복해야 합니다. 그들에게 순복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권세에 순복하지 않는 것이 되기 때문에 어려움을 당합니다. 2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여기에서 '심판을 받는다'는 것은 하늘나라에 가서 심판을 받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 상응하는 법적 제재 조치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EX) 제가 더니든에 사역할 때, 신모라는 유학생의 어머니가 계셨습니다. 그 어머니는 뉴질랜드에 도착한지 2일인가 3일만에 자동차를 샀습니다. 그 분이 교통법규를 모르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감하게 운전하고 다녔습니다. 반대 차선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신호위반도 밥먹듯이 하면서 무법천지를 누비듯이 다녔습니다. 어느 날 그 어머니는 저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전도사님! 얼마나 운전하기 좋은지 몰라요. 뉴질랜드에는 교통경찰이 없나봐요. 교통경찰을 한 명도 못 봤어요. 마음대로 도로에서 U-turn해도 딱지 끊는 사람도 없고, 70Km, 80Km를 달려도 벌과금 하나 물지 않고, 너무 좋은 세상에서 운전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글쎄요! 이곳에도 경찰이 많지는 않아도 때때로 단속합니다. 조심하세요"라고 점잖게 충고해 주었습니다. 그 후 약6개월 후에 법원에서 날라 온 편지를 들고 울상이 되어 저를 찾아 왔습니다. 내미는 편지에는 6백몇십불의 벌금액수가 적혀있고, 21일 이내로 법원에 납부하지 않으면 자동차를 차압한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자초지종을 알고 보니 열심히 운전하다가, 스피드 초과를 2번, 주차위반을 한번인가 두 번하여 벌금 통고를 받았는데, 받은 편지를 읽어보지도 않고 버리고, 또 독촉장이 날라 왔는데 또 버렸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급기야는 6개월이 되어서 벌금에 이자까지 합산되어 최종 독촉장이 날라 온 것입니다. 나중에 제가 그 어머니에게 말했습니다. "뉴질랜드는 결코 만만은 나라가 아닙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살면서 이 나라의 법을 어기면, 그에 따른 법적 심판을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위법에 따른 법적 제재가 무서워서 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땅의 질서 유지를 위해서 허용하신 법이기 때문에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권세이기 때문에 순복해야 합니다. 아멘?
3) 납세 의무를 다해야
우리가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여러 가지 의무가 있습니다. 한국 같으면 국방의무, 교육의무, 납세의무 등이 있는데, 본문에서는 납세의무를 다하라고 말씀합니다. 6~7절을 보겠습니다. "너희가 공세를 바치는 것도 이를 인함이라 저희가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한 마디로 세금을 내라는 것입니다. 국가에 내야 할 세금은 정직하게 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의 의무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의 의무이기도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탈세하면 안됩니다. 내야 할 세금을 내야 합니다. 세금을 많이 낸다는 것은 그 만큼 많은 축복을 받았기 때문 아닙니까? 축복을 받은 만큼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드리고 또한 사회에도 환원하는 것이 성경적 원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사실을 (마22:21)에서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가라사대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받치라 하시니"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날 동안은 하나님의 법도 지킬 뿐만 아니라, 이 땅의 법도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께 감사를 잘 할 뿐 아니라, 세금도 잘 내시기를 바랍니다.
4) 모든 것은 신앙 양심을 기준으로
우리가 세상 권세를 인정하고 그 권세에 순복하고, 국가에 세금을 내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항상 신앙 양심에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일제시대 때에 신사에 절하기를 강요했습니다. 또 북한에서는 지금도 죽은 아바이 김일성 수령동지를 신처럼 숭배하며 동상에 절을 하도록 강요하고, 기독교를 탄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를 맞이했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제까지의 말씀대로라면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국가의 명령에 순복해야 합니다. 신사에 절을 해야 하고 김일성 동상에 절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법에 어긋나는 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결코 세상의 법을 따라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법이 세상의 법 보다 우선하기 때문에, 세상 법과 하나님의 법이 충돌하면 먼저 하나님이 법대로 따라야 합니다.
5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굴복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노를 인하여만 할 것이 아니요. 또한 양심을 인하여 할 것이라" 이 말씀은 우리가 세상의 권세와 하나님의 권세에 순복할 수 있는 좋은 기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5절에서의 '양심을 인하여'라는 것은 '신앙양심을 인하여', 즉 '하나님의 말씀을 위해서'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 위해서 세상권세에 굴복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우리는 주의 깊게 보아야 합니다. 가장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법을 생각하고 그 다음에 세상의 권세를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가령 예를 들어 직장상사가 '세금을 탈세하라'고 명령해도 신앙양심상 그 명령에 따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덩치 큰형들이 '저기 가서 물건을 훔쳐 오라'고 해도 신앙양심상 그 명령에 따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부정 투표를 국가에서 요구해도, 신앙양심상 그 명령을 따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모든 일을 하기에 앞서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지, 어긋나지 않는지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모든 행위에 앞서 그 일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인지, 아니면 영광을 가리는 일인지 먼저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시민권이 두 개입니다. 이 땅에서 사는 육적인 시민권과 하늘나라의 영적인 시민권 두 개를 가졌습니다. 그러므로 하늘나라의 시민으로써 하늘의 법을 잘 지키시기 바랍니다. 또한 이 땅의 국민으로써 세상의 법도 잘 지키시기 바랍니다. 세금 떼어 드시지 말고 세금도 잘 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어긋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 아니라면, 세상의 법을 잘 지키시고 세금도 잘 냄으로 인하여, Korean Christian들은 준법정신이 뛰어나다는 칭찬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요구하시는 국가에 대한 의무이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나라사랑
롬 13장 1~7절 / 박봉수목사
독일의 한국 대사관 문화홍보원이 운영하는 웹사이트(www.Koreaheute.de)에 쉬테판 뮐러라는 독일 사람이 기고한 글이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킨 일이 있습니다. 이 글의 주요 내용을 발췌해 보면 이렇습니다.
나는 어느 여름날 우연히 사진 한 장 때문에 한국, 아니 한민족에 얽힌 엄청난 이야기를 접하게 되었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경기에서 두 명의 일본인이 1등과 3등을 차지한다. 하지만 시상대에 오른 두 일본인의 표정은 인간이 지을 수 있는 가장 슬픈 표정이다. 왜 두 사람은 슬픈 표정으로 시상대에 서있는 것일까?
그들은 바로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받고 있던 코리아의 ‘손’과 ‘남’이라는 젊은이었다. 시상대에 오른 그들의 가슴에는 일장기의 붉은 원이 붙어있었다. 그리고 일본 국기가 게양되었다. 두 사람은 얼굴을 푹 숙이고 있었다. 그들은 부끄러움과 슬픈 얼굴을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왜 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딴 손기정 선수와 동메달을 딴 남승룡 선수가 저렇게 고개를 숙여야 하며, 슬픈 표정으로 눈물을 흘려야 했습니까? 이 사진 한 장은 우리에게 나라의 소중함을 깊이 생각하게 해 줍니다.
나라는 마치 울타리와 같습니다. 양이 울타리 안에 있을 때 보호를 받고 평안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나라 안에 있을 때 보호를 받고 평안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지금 지구상에는 나라를 잃어버린 민족들이 셀 수 없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저 중국에만도 57개나 되는 민족들이 나라를 잃어버린 채 중국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갑니다. 대표적으로 티벳족, 만주족, 회족, 위글족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이들은 마음 놓고 자기들의 뜻을 펼칠 수가 없습니다. 비전을 잃어버린 채 남의 눈치만 살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심지어 종교마저도 자기들 뜻대로 지켜갈 수가 없습니다. 울타리를 잃어버린 양들처럼 불안한 나날들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개인의 성공과 출세도 나라가 있고 나서입니다. 가정과 가문의 번창도 나라가 있고 나서입니다. 기업의 부흥과 발전 역시 나라가 있고 나서입니다. 나라가 없다면 그 모든 것이 바람 앞의 등불과 같기 때문입니다.
슈테판 뮐러는 이어서 또 다른 사진 하나를 소개하면서 글을 이어갑니다.
52년 후 88서울 올림픽. 개회식 세레모니에서 백발이 성성한 손기정씨가 세 살배기 아이처럼 덩실덩실 춤을 추며 손에 성화를 들고 달린다. 그 당시 모든 한국인들은 이 노인에게 그동안 말로 표현할 수 없었던 빚을 갚을 수 있었던 것이다.
왜 손기정 옹이 올림픽 성화를 들고 달리면서 그렇게 춤을 추었을까요? 이 사진은 우리가 나라를 지켜야 할 이유를 깊이 생각하게 해 줍니다.
저는 중국선교 여행을 하면서 우리 국력 신장을 실감합니다. 지난 5000년 동안 우리는 계속 중국의 지배를 받거나 중국의 도움을 받아왔습니다. 복음도 저 중국 땅을 통해서 들어왔습니다. 토마스 목사가 중국을 통해 들어왔고, 번역 성경도 중국을 통해서 들어왔고, 최초의 교회인 소래 교회도 중국을 통해서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중국에 가서 선교를 합니다. 신학교를 세웁니다. 교회를 세웁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우리나라의 국력이 과거와 달리 신장됐기 때문입니다. 앞으로도 우리가 계속 중국에 선교를 하려면 우리 국력이 중국이 무시하지 못할 수준을 유지해야 합니다. 만약 방글라데시나 저 아프리카 콩고 같은 나라에서 선교한다고 선교사가 왔다면 우리가 그 선교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가 전 세계에 선교하려면 우리 국력이 선진국으로 더욱 발돋움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국가는 선교나 개인의 삶을 위한 후견인입니다. 후견인이 든든하면 정말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처럼 국가가 힘이 있어야 우리가 정말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나라가 부강한 나라가 되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최근의 한 앙케이트 조사를 보고 큰 충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선우’라는 결혼정보회사에서 미혼 남녀를 대상으로 한 앙케이트 조사를 했습니다. 결혼 조건으로 이민 가능여부를 내 건 사람이 무려 56%나 됐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혼 후에 이민 의향을 내 비친 사람이 무려 71%나 됐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젊은이들이 할 수만 있으면 이민을 가 보려는 풍조가 만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거 일제 하에 우리 선조들은 나라를 잃어버려 어쩔 수 없이 이 땅을 떠나 저 만주로 하와이로 이민 길을 떠났습니다. 외국으로 나가 나라를 되찾으리라는 결심을 하고 이민 길을 떠났습니다. 나라를 되찾고 나면 반드시 돌아오리라 굳게 마음 먹고 이 땅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오늘 젊은 사람들은 나라에 대한 불만 때문에 이민 길에 오릅니다. 나라가 자기들의 미래를 위해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이 땅을 떠나고 있는 것입니다. 나라가 자기 삶에 거추장스럽고 걸림돌이 된다고 나라를 버리고 이 땅을 떠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런 우리나라의 현실을 바라보며 우리가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가 바로 나라사랑입니다. 우리가 나라를 사랑하지 않으면 이 나라 대한민국을 누가 사랑할 것입니까? 자신의 희망찬 미래를 위해 나라를 버린다면 이 나라 대한민국을 누가 지킬 것입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이 나라 사랑에 대한 귀중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그 메시지를 정리해 보면 이렇습니다. 우선 나라는 하나님께서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비록 위정자들 지도자들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어서 때로는 그리스도인들이 마음을 다해서 따를 수 없는 점도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 저들을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존경하며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처한 위치에서 자기가 맡은 일을 선하게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오늘의 우리 조국 대한민국도 여러 가지 면에서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대외적으로 북한의 핵문제로 안보상황이 여간 위태로운 것이 아닙니다. 경제적인 상황도 여간 심각한 것이 아닙니다. 10년 째 성장을 위한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허덕이고 있습니다.
대외적으로 이렇게 어려운 때 대내적으로 갈등과 대립이 더욱 심화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망국적인 지역 갈등 문제는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거기다가 세대간의 갈등이 첨예하게 부각되고 있습니다. 386세대라는 새로운 세대가 참여의 정부에 들어와 힘을 얻으면서 이런 세대간의 갈등은 점점 권력 다툼으로 비화되고 있습니다. 진보와 보수 사이의 갈등, 노와 사의 갈등 온통 나라 안이 대립과 갈등으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이런 대내외적인 위기 상황 속에서 국가 리더십 심각하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대통령의 지지도가 10%대로 추락하고 있고, 대통령의 리더십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통령이 안정적인 리더십을 펼쳐 보이지 못하고 있고, 여기저기서 대통령의 리더십을 흔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먼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미우나 고우나 하나님께서 대통령을 세우셨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를 믿고 따라주어야 합니다.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의 문제를 누구 탓으로 돌리고, 그를 비방하고 그에 대한 적대감을 키우면 일단 속은 후련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만 더욱 키우게 됩니다.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해결할 수 없게 만듭니다.
청와대가 언론에 대해, 코드가 다른 사람들에 대해 적대감을 버려야 합니다. 언론도 국민도 청와대에 대한 원망과 적대감을 버려야 합니다. 보수와 진보 진영 사이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적대감을 버려야 합니다. 모두가 이길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합니다. 그래야 나라를 이 위기에서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이제 보다 차분하게 그리스도인의 나라사랑의 문제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보다도 애국자여야 합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믿음의 조상들은 한결같이 애국자들이었습니다.
구약을 보면 모세는 진정한 애국자였습니다. 나라 없이 애굽에 종살이하던 민족을 위해 자기 한 목숨을 던졌습니다.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보장된 희망찬 미래를 나라를 위해 포기했습니다. 출 32:32을 보면 심지어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용서해 주시지 않으려면 차라리 생명책에서 자기 이름을 지워달라고 청하고 있습니다.
신약을 보면 바울도 진정한 애국자였습니다. 바울은 이방인들을 위해 사도로 세움을 받았습니다. 자신의 사명은 목숨을 다해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롬 9장을 보면 이방인을 위한 사명을 감당하면서도 나라와 민족을 위한 마음이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고 실토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9:3에 보면 자기 민족이 구원을 받을 수만 있다면 자기가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 지라도 원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느 1:4를 보면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고국에 다녀온 사람들로부터 고국 소식을 들었습니다. 안타까운 소식을 듣고 저가 나라를 위해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입니다.
프랑스의 한 병사가 가슴에 총탄이 박혀서 그것을 빼내는 수술을 받는 중에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좀 더 깊이 째 보십시오. 내 가슴 속 깊이 조국이 들어있습니다”
시인 브라우닝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내 마음을 열어보면 마음 깊이 새겨진 한 이름이 있는데 그 이름은 바로 조국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 가슴 속에 조국이 들어있어야 합니다. “아! 대한민국” 이 소중한 이름이 우리 마음속에 들어있어야 합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나라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시 79편은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의 시입니다. 이 기도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진정한 이 나라와이 민족의 왕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13절을 보면 “우리는 주의 백성이요 주의 기르시는 양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짐은 국가다”라는 말로 유명한 프랑스의 독재자 로이 14세 장례식 때 이런 일이 있었답니다. 유언에 따라 시신은 황금으로 만든 관에 누워 대성당 중앙 앞에 안치되었습니다. 대성당 내부의 등불은 다 꺼진 채 오직 한 자루의 큰 초만이 황금관을 비추고 있었습니다. 루이 14세야 말로 가장 위대한 왕이었음을 나타내고자 함이었습니다.
드디어 유럽의 각국에서 왕들과 귀족들이 모여들었고 장례 의식은 시작되었습니다. 이 때 돌연 집례 하던 사제가 그 초를 끄고는 이렇게 외쳤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영광에 빛나는 위대한 왕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섬길 때만 우리에게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점을 철저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 주변 열강들이 우리 민족의 장래를 책임져 주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의 위정자들 지도자들 저들이 이 나라를 책임지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도구로 잠시 쓰일 뿐입니다. 이 나라의 오늘과 내일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이런 철저한 신앙고백 위에 우리가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시 79:9을 보면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스러운 행사를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우리를 건시지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바로 이런 기도가 나라를 지키는 것입니다.
1980년 가나안 농군학교를 설립하셨던 일가 김용기 장로님이 책 한권을 출판하여 주목을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이 책에서 어려운 나라를 바로 세울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이 책의 제목입니다. “조국이여 안심하라!”입니다.
이 책의 제목은 실제로 김용기 장로님께서 자기 기도실에 친필로 써 붙였던 휘호였습니다. 이 분은 매일 나라를 위해 4시간씩 기도했습니다. 나라를 위해 기도하면서 이분은 자기가 나라의 파숫군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달았던 것입니다. 자기가 기도하는 한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외면하시지 않으실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나라를 위해 기도하며 이렇게 외쳐야 합니다. “조국이여 안심하라!” 바로 이것이야 말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최고의 애국인 것입니다.
나라를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나라 꼴이 말이 아니라”고 불평을 늘어놓는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나라에 대한 걱정을 한다고 대통령을 욕하고, 정치 지도자들을 욕하고, 우리 현실을 원망하는 소리로 시끄럽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나라를 위해 한 평생 헌신하셨던 김구 선생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할 일을 찾는 백성은 흥하고, 원망할 것을 찾는 백성은 망한다”
우리가 이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말보다 묵묵히 나라를 위해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헌신하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를 위해 앞장 서야하겠습니다.
1967년 이스라엘과 이집트 사이에 벌어진 제 3차 중동전쟁을 ‘7일 전쟁’이라고 부릅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인구는 300만이었고, 이집트는 1억이 넘는 대국입니다. 놀랍게도 300만의 이스라엘이 1억의 이집트를 불과 7일 만에 항복을 시키고 만 세계 전쟁사에 유래가 없는 전과였습니다.
한번은 이집트의 대공포가 이스라엘의 전투기 한 대를 격추시켰습니다. 추락한 비행기에 가보니 놀랍게도 조종사가 만삭된 임산부였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노인과 어린 아이만을 제외하고는 만삭된 임산부까지도 전투에 참가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나라에도 이런 임산부들이 필요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사람들이 돼야 합니다.
광복절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시기에 진심으로 나라를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나라 없이 진정한 나 개인의 성공도 행복도 없습니다. 나라 없이 가문의 번창도 영광도 없습니다. 특별히 나라 없이 교회도 없습니다. 일제시대 나라를 잃어버리자 교회도 문을 닫았던 기억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가 나라를 사랑해야 합니다. 마음 속에 나라 사랑이 가득해야 합니다. 나라를 위해 기도하고 나라를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