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량번호판에서 거주지역이 사라지고부터는 탐방객들이 사는 곳을 가늠하긴 어렵다. 그래서 옆을 지날 때 그들이 나누는 대화에서 나오는 말씨로 짐작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유추하더라도 이 고장 외의 사람들이 절반은 될 것 같았다. 외국인 여행객을 전혀 만날 수 없었던 것 역시 교통이 불편한 때문이지 싶다. 그런 생각에 잠겼을 때 갑자기 방한복에 싸락싸락 소리를 내며 눈이 내리는가 싶더니 금세 또 비로 바뀌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우산을 펴들었다. 오늘 간절곶에선 여느 여행지보다 사진촬영에 매달리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부자도시로 소문난 울산이 간절곶공원에다 그동안 많은 돈을 들여 만든 조형물들이 카메라를 꺼내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입이 딱 벌어질 정도로 덩치가 큰 우체통으로부터 풍차와 등대 드라마하우스 새천년기념탑이 바다를 배경으로 아름답게 들어선 때문이다. 사진 찍는 사람들을 무심코 바라보다가 웃음이 나왔다. 필시 그들은 귀가하면 사진 속 우산을 타박할 것이 뻔했다. 사진을 찍는 사람도 찍히는 사람도 배경을 거의 다 가린 우산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사람이 답답해서 우산을 접으라는 귀띔을 해주었다.
아버지가 우산을 접자 중학생쯤으로 보이는 아들 녀석 얼굴이 갑자기 우거지상으로 변했다. 귀하게 자란 아이들은 아들딸 모두 여행지에 와서도 부모에게 얼굴을 찡그리는 장면이 자주 목격되었다. 장성한 자녀들이 부모를 홀대하면서 사회적인 문제를 일으키는 것도 어려서부터 이렇게 키운 때문일 것이다. 우산을 접고 찍어야 제대로 사진이 나온다고 만나는 팀마다 알려주었지만 선뜻 알아듣지 못하는지 빠끔하게 바라보기만 했다. 어차피 오늘은 일기 때문에 사진이 잘나오긴 글러먹은 날인데도 애가 쓰였다.
광학예술 즉 빛이 만드는 예술인지라 날씨가 이 모양이니 멀리서 찾은 사람들은 그만큼 운이 따르지 않았다고 이해해야 한다. 개인적으로 운영하는 인터넷카페에 포스팅을 목적으로 촬영하는 나 역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으나 별 뾰족한 수는 없었다. 새천년을 맞으면서 이곳에 대규모 공원까지 조성하여 간절곶은 새롭게 태어났다. 산업도시 울산의 재정자립도가 높은 때문에 가능했을 터이다. 그러고 10여 년 동안 후속 시설이 하나하나 추가로 들어섰다. 2010년 간절곶을 다시 방문하고선 상전벽해로 변한 풍경에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35년 일한 직장퇴직자단체를 맡아 6년간 봉사하면서 이곳 인근에 위치한 원자력발전소를 단체로 방문할 때마다 몇 차례 더 간절곶을 찾았고 그때마다 추가 시설물이 들어선 걸 발견할 수 있었다. 알다시피 삼면이 바다인 한반도는 일출과 일몰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지형을 고루 갖추고 있다. 새해를 맞을 때마다 정동진을 비롯한 호미곶 간절곶 해운대 등 일출명소 해돋이를 찾는 사람들은 더욱 국토의 지형을 실감할 터이다. 그들은 한 해를 보내며 석별의 아쉬움과 함께했던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을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태양을 바라보며 되새기는 것이 습관으로 굳어진 듯하다.
그러고는 연이어 바다를 붉게 물들이며 떠오르는 태양에 새해 소망을 비는 의식을 요란스러운 대열 속에서 치룬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줄여서 ‘소확행’이라 한다니 이들은 누가 뭐래도 소확행의 주인공들이 아닐까 싶다. 오늘 배달된 신문은 ‘여확행’이란 말을 기사제목으로 뽑았다. 여행으로 확실한 행복을 맛보는 걸 그렇게 줄였는데 이렇게 억지스러운 축약어를 계속 만들어낸다면 국어파괴에 대한 책임은 누가 질는지 모르겠다. 연말연시 일몰일출 이벤트를 통해 개인적으로 행복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권장할 일이 아닐 수 없으리라.
그들로 인해 관광지도 흥하고 지역경기도 그만큼 살아날 수 있을 터이기 때문이다. 간절곶은 동해안에서 맨 먼저 떠오르는 해를 볼 수 있는 곳으로 널리 알려졌다. 울릉도와 독도를 빼고 한반도 본토에선 영일만 호미곶이 최동단이다. 그런데도 겨울철에는 해가 비슷한 경도 상에서는 동쪽보다 동남쪽이 더 빨리 뜨기 때문에 호미곶보다 1분, 정동진보다 5분 빨리 간절곶 해돋이가 시작된다. 지구 자전축이 기울어져 여름철에는 이와 정반대로 북쪽에서부터 아침을 맞는다. 이 때문에 해맞이 축제로선 전국에서 가장 많은 관광객이 간절곶에 몰려들어 매년 10만 명 이상 관람기록을 세우면서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다.
북쪽 서생포와 남쪽 신암리만 사이에 돌출된 간절곶은 대부분 암석해안으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지형적으론 길목 모퉁이라 해류가 급하고 풍랑이 거세어 사람이 살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곳인데도 일출과 명품공원으로 대박을 터뜨리고 있다. 1970년대 중반 농어촌전화사업 설계를 위해 처음 이 지역에 발 디뎠을 때 지명에 우리가 잘 쓰지 않는 한자 간艮과 곶串이 들어있어 고개를 갸우뚱했던 기억이 난다. ‘간절’이란 말은 먼 바다에서 바라보면 과일을 따기 위해 대나무로 만든 뾰족하고 긴 장대를 가리키는 간짓대처럼 보인다고 붙여진 이름이란다.
곶은 육지가 바다로 돌출해 있는 부분이므로 두 말이 붙어 간절곶이 되었다. 그 무렵 이곳 오지 어촌에도 전기가 들어오고 가까운 곳에 원자력발전소까지 준공되면서 오늘처럼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간절곶이 될 수 있었다. 이곳 드라마세트장은 울주군이 2010년 원자력발전지원금 40억 원을 들여서 세웠다. 영화《한반도》와 드라마《욕망의 불꽃》《메이퀸》의 촬영세트장으로 사용됐던 곳이다. 현재 1층은 갤러리 2층은 카페로 개조해 운영하고 있다. 마치 지중해식 별장처럼 꾸며진 안으로 들어가면 간절곶에서 촬영된 작품들의 포스터가 걸려있다.
그러고 바다가 보이는 정원에는 드라마 속 주인공의 전신사진이 세워져 포토존 역할을 하고 있다. 포스터 외에도 드라마 장면들과 등장인물들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으니 간절곶에 사람을 불러들이는데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는 셈이다. 해맞이행사장 뒤편으로는 1920년 3월 처음 불을 밝힌 이래 80여 년 동안 울산을 드나드는 선박들을 인도해주던 등대가 있다. 2000년 간절곶이 해맞이로 유명해지기 전까지 이곳엔 등대밖에 없었다. 등대 아래쪽이 바위절벽으로 이루어져 태풍 등으로 파도가 거셀 때 바위절벽에 부서지는 파도가 장관을 이룬다.
등대는 두 차례 등탑개량을 거쳐 17미터 높이로 완만한 언덕에 위치한다. 백색 8각형 본체에 10각형으로 된 전통한옥 모양의 구리로 만든 기와지붕을 얹어 전망대가 되었고 조형미가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명품반열에 올랐다. 등대 주변으로는 항로표지관리소가 붙어있고 각종 조형물들도 모여 있어 포토존으로 이용된다. 그 중 '사랑의 등대'는 커플의 프로포즈를 위한 조형물로 마련되었다. 여자가 등대 위의 작은 하트에 서고 남자는 등대 아래 큰 하트에 서면 3초 후 프러포즈 노래가 나오는 것이다. 남녀가 함께 큰 하트 위에 올라서도 축하노래가 나오도록 만들어졌다.
등대 앞 솔숲은 울창하진 않지만 꼬불꼬불하여 정겨움을 안겨준다. 탐방객들은 바다를 배경으로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다 싫증이라도 나면 짙푸른 송림을 찾아든다. 우체통 밑 바다 쪽으론 종래엔 못보던 탑이 하늘을 향해 버티고 섰다. 탑 옆으로 젊은이들 예닐곱이 안내판에 붙어서서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작년 1월 1일 동북아 첫 일출지역 간절곶과 유럽대륙의 마지막 일몰지역인 포르투갈 호카곶이 맺은 문화교류협약을 기념하여 건립한 상징탑이었다. 간절곶등대 앞 상징탑이 지구촌이란 말을 더욱 실감나도록 해주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