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오래전 찾아와 희미해진, 새의 기억, 그 너머를 찾아 떠난다. 맨발에 닿는 버석거림으로 삐꺽거리는 기억의 수레를 끌며.
흩어지는 현기증과, 섞여드는 매화꽃 일렁이는 공간을, 부피도 무게도 벗어가며 걷는 듯 흐른다.
(물소리가 들렸나? 물이 흐르고 있었나?)
이끌리듯 당도한 물가에서 만난 새 한 마리.
수천 년 흐르는 노래를 무표정한 눈에 담고, 시간의 화석이 되어버린 빗살무늬 토기에 남겨진 새,
깊이 없는 기다림으로 새의 노래는 끝이 없어
꼭꼭 찍힌 발자국 위에 떨어진 햇살 한 줌 쥐고 돌아온다.
-『내외일보/최형심의 시 읽는 아침』2024.07.16. -
누군가 대체 시는 어떻게 쓰는 거냐고 물으면 내 안의 노래를 받아 적으면 된다고 웃으며 이야기하곤 합니다. 만약 그 노래는 어디에서 오는 거냐고 물었다면 내 안에 새가 한 마리가 살고 있다고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작가 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슬럼프를 경험하게 됩니다. 바싹 마른 언어를 쥐어짜듯 짜내다 보면 내 안의 새는 더는 노래하지 않게 되지요. 새도 지쳐서 그럴 것입니다.
그럴 땐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그동안 목이 쉬도록 노래한 새에게도 휴식이 필요하니까요. 욕심 때문에 그럴 여유조차 허락하지 않는다면 발자국만 남긴 채 새는 영영 떠나 버릴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