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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韓中日近現代史(since2011) 원문보기 글쓴이: 정암
만주국은 한족, 조선족, 만족(여진족),몽골족, 일족(일본족)등 5종족이 1932년 3월 1일 세운 연합정부이다. 만주국은 지금의 중국 동북3성 지역 영토이며 인구 3,693만명수준이었다[1937년 자료]
만주국(滿洲國, 중국어 정체: 滿洲國, 병음: Mǎnzhōu Guó, 영어: Manchukuo, Manchu State)은 일본 제국이 만주 사변(1931년 9월 18일 ~ 1932년 2월 18일) 직후부터 만주 지역에 세운 괴뢰국이였다.
만주국 국기
1931년 일본 제국 관동군은 만주 사변을 일으켜 만주 지역을 점령하였다. 1932년 3월 1일 일본은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다가 퇴위한 선통제(푸이)를 황제로 내세웠다(강덕제). 일본 제국에 철저히 종속된 괴뢰국가였던 만주국은 1945년 8월 18일 붕괴되었다. 소련군은 1945년 8월 19일 선양공항에서 일본으로 도주하려던 푸이를 체포한 뒤 만주 전역을 점령하였고, 같은 해 11월 중화민국이 이 지역들을 넘겨받았다.
만주국의 영역은 한반도 및 중화민국, 소련, 몽골인민공화국, 내몽골자치연합정부(일본의 괴뢰정권)와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
만주국은 강덕제(푸이)를 원수로 하는 국가로서, 만주족과 한족, 몽골족, 조선인, 일본인의 오족협화로 이루어진 “만주인”에 의한 민족자결의 원칙에 기초에 둔 국민국가를 표방했다. 그러나 실제 통치는 1931년의 만주사변에 의해서 이 지역을 점령한 일본제국 육군의 주력부대 중 하나였던 관동군이 행함으로써 사실상 일본 제국의 식민지였다.
1932년 국제 연맹의 리튼 조사단은 “만주국은 일본의 괴뢰정권이며, 만주 지역은 중화민국의 주권 아래 있어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중화민국의 입장을 지지해 일본정부를 비난했다. 이로 인해 일본은 1933년 국제 연맹에서 탈퇴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결 직후, 소비에트 연방의 공격으로 인한 일본의 패전과 함께 만주국은 소멸했다.
(1)Northeast China [traditional Chinese: 中國東北=滿州(만주)] Ruler
Gojoseon[B.C 2333-B.C 108, Korea People:고조선]->Han[B.C 108-A.D 313, Han China People:漢(한)-한나라의 청천강 이북지역 점령과 한사군 설치 그리고 청천강 이남 고조선 유민으로 진국등장]->Goguryea[A.D 313-668, Korea People:고구려]->Tang[A.D 668-698, Han China People:唐(당)나라]->Balhae[A.D 698-926, Korea People:조선족과 여진족 연합정부]->Liao[A.D916-1125, Khitan China People:遼(요)나라-거란족:(다우르족:達斡爾族(달알이족))]->Jin[A.D 1115-1234, Jurchens China People or Manchu China People:金(금)나라-여진족 또는 만주족]->Mongol[A.D1234-1368, Mongol People:蒙古(몽고)나라-몽고족]->Ming[A.D 1368-1644, Han China People:明(명)나라]->Qing[A.D 1616-1912, Jurchens China People or Manchu China People:淸(청)나라-만주족]->Republic of China[A.D 1912-1932, Han China People:중화민국-중국 국민당]->Manchukuo[A.D 1932-1945, Jurchens China People or Manchu China People:滿州國(만주국)-만주족=여진족]->소련 극동군 만주국 점령[1945년 8월 18일,8월 폭풍작전]->중국연합군 반환[1945년 11월, 소련극동군과 인민해방군이 점령 이후 소련군이 중국 연합군 동북3성 인민해방군 총사령관 임표에게 넘겨 줌]->People's Republic of China[1949년 10월 1일~ Han China People:중화인민공화국-중국 공산당]
(2)국호
만주국 외에 대만주국(大滿洲國), 만주제국, 대만주제국(大滿洲帝國) 등으로 만주국의 공문서에서도 일정하게 쓰이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것이 국호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만주국'이 가장 일반적인 호칭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에서는 만주국이 일본 제국의 괴뢰정부였다는 뜻에서 위만주국(僞滿洲國), 약칭 위만(僞滿)이라고 낮추어 부르기도 한다.
(3)건국과 멸망
만주 사변을 일으킨 일본은 1932년 1월에 장쉐량의 군대를 패퇴시키고, 진저우를 점령한 후 만주국 구상을 계획했다. 국제연맹에서는 중화민국에 리튼 조사단을 파견하였으나 리튼 조사단이 도착하기도 전에 1932년 3월 1일 만주국의 수립을 선포했다. 만주국의 수도는 지금의 창춘인 신징을, 연호는 대동이라 했으며, 황제는 이전 청나라의 황제였던 푸이로 옹립했다. 1932년 9월에 일만의정서를 조인해 일본이 만주국을 정식으로 승인했으며, 이어 독일, 이탈리아, 교황청, 스페인, 헝가리 등 8개국이 정식으로 만주국을 승인했다. 1934년 9월 제정 수립으로 연호를 강덕으로 고쳤다. 만주국의 실세는 관동군 사령관, 경제는 일본의 남만주철도주식회사가 맡았다. 만주국에는 군대도 있었으나 할힌골 전투 등에서 소련군에게 패하는 등 무능력했다. 만주국은 일본의 꼭두각시 나라가 되어 제2차 세계대전 중에도 명맥을 유지하다가 1945년 8월 8일 소련군이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를 하고 만주지역을 공격(8월 폭풍 작전)함으로써 8월 18일 망하였고, 만주 지역을 점령한 소련은 같은 해 11월 해당 지역을 중화민국에 반환하였다
(4)건국의 배경
20세기 초 일본에서는 만주를 영향력 하에 두려는 제정 러시아의 남하정책이 일본의 국가 안전보장의 최대 위협으로 간주되고 있었다. 1900년 러시아는 요시카즈단 사변으로 만주를 점령하고, 권익을 독점했다. 이것에 대항하여 일본은 미국 등과 함께 만주를 각국에 개방할 것을 주장하며, 영국과 동맹을 맺었다(영일 동맹). 마침내 일본은 1904년부터 그 이듬해에 걸쳐 한반도와 만주에 대한 패권을 놓고 러시아와 싸워 승리하였고(러일전쟁), 포츠머스 조약으로 한반도에 대한 배타적 지배권을 확보하고 요동 반도와 동청철도 남부의 조차권을 확보했다. 그 후 일본은 종래의 입장과 달리 러시아와 공동으로 만주에 대한 이익 확보에 나서 미국이나 프랑스 등의 반발을 불렀다.
(5)멸망
1945년 8월 6일,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였고, 8월 8일 소련군이 일본에 선전 포고를 하고 8월 폭풍 작전을 전개하였다. 8월 15일 일본이 패망한 직후 8월 18일 푸이가 퇴위함으로써 망하였고, 8월 말 소련군은 만주 전역을 점령하였다. 같은 해 11월 소련은 만주 지역을 중화민국에 반환하였고, 1949년 이후부터는 중화인민공화국이 통치하고 있다.
(1)정치
만주국은 한족, 조선족,만주족(만족, 여진족),몽골족, 일본족등 오족협화(五族協和)의 왕도낙토(王道樂土)를 이념으로 미국을 모델로 건설된 아시아의 다민족 공생의 실험국가였다. 공화제 국가인 미국을 모델로 하고 있었지만 실상은 황제를 국가원수로 하는 입헌군주제 국가였다. 오족협화란 만주족과 몽고족·한족·일본인·조선인의 다섯 민족이 협력해서 평화로운 국가를 만드는 것이다. 왕도낙토란 서양의 패도에 반대되는 아시아의 이상적인 정치 체제를 왕도라고 해서 만주국 황제를 중심으로 이상 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의미한다. 만주에는 오족 이외에도 러시아 혁명 이후에 소비에트 연방에서 피해 온 백계 러시아인 등도 거주하고 있었다.
볼셰비키와의 전쟁에서 패망한 녹색 우크라이나(Green Ukraine·Zeleny Klyn)의 우크라이나인 세력은 만주국과 접촉하여 제2차 세계대전 전에 일본·만주국·우크라이나의 삼국 동맹으로 소비에트 연방과의 전쟁을 개시할 계획을 협의하고 있었다. 그러나 1937년 일본은 러시아인의 파시스트 조직을 지원할 방침으로 변경하고 러시아인 조직과 대립이 있는 우크라이나인 조직과는 단교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다시 우크라이나인 조직과 손잡으려고 했지만 태평양 방면에서의 고전도 있어서 극동에서의 반소 무력 항쟁은 실현되지 않았다.
만주국은 일본의 계획적 지원 아래 극히 단기간에 발전했다. 내전이 계속되는 중국으로부터 한인의 이주, 새로운 환경을 찾는 조선인의 이주, 특히 일본 정부의 정책에 따라 만주국의 준비된 농지로 이주하는 일본 국내인의 이민이 많았다. 이러한 이주에 의해서 만주국의 인구도 급격한 기세로 증가했다. 이민 정책의 성공은 풍부한 자원을 가진 만주국이 일본에 있어서 개척지였음을 나타낸다.
-북한 제3공화국 先軍정치 헌법이 공화국 모델이면서 세습제 군정(국가원수는 김일성 직계 혈통주의 군주국)이 만주국 모델이다
(2)국가기관
만주국 정부는 국가원수로서 집정(執政, 후에 황제), 자문 기관으로서 참의부(参議府), 행정 기관으로서 국무원(国務院), 사법 기관으로서 법원(法院), 입법 기관으로서 입법원(立法院), 감찰 기관으로서 감찰원(監察院)을 두었다. 국무원에는 총무청(総務廳)이 설치되어 관제상으로 국무원 총리의 보좌 기관이었지만 실상은 일본인 관리의한 만주국 행정의 실질적인 핵심으로서 기능했다(총무청 중심주의). 그에 대한 국무원 회의의 의결이나 참의부의 자문은 형식적인 것에 머물렀고 입법원은 정식으로 개설조차 되지 않았다.
만주국 국무원
(3)국가원수
만주국의 국가원수(집정, 후에 황제)로 푸이가 취임했고 1937년(강덕 4년) 3월 1일 제위계승법 제정 이후에는 푸이의 남계 자손이 제위를 계승해야할 것로 여겨졌다. 또한 제위계승법이 상정한 상황 외의 사태에 대비하여 만주국 주차 일본 제국 특명전권대사 겸 관동군 사령관과의 회담에서, 청조복벽파의 책모를 억제하고 관동군에게 황제 지명권을 확보시키기 위해서 남계 자손이 없을 때에는 일본 천황에 의해서 제위 계승자를 정하는 칙지를 황제의 선언으로 하는 등을 내용으로 한 각서에 서명하였다.
황궁으로 건립된 동덕전(同徳殿)
만주국 초대내각
(4)역대 지도자
ㄱ.황제: 푸이 (임기: 1932년 ~ 1945년)
푸이는 1934년 3월 1일에 만주국 황제에 즉위하여 강덕제(康德帝)가 되었다. 푸이의 황제 즉위에 아울러 국명도 만주 제국으로 불리는 것이 많아졌다. 연호도 '강덕(康德)'으로 변경되었다. 만주국 측에야는 당초는 '계운(啓運)'으로 예정하고 있었지만, 관동군의 간섭에 의해서 변경하였다. 동시에 자금성 시절부터의 내무부 대신이었으며 푸이와 일본 관동군과의 사이를 주선한 정샤오쉬가 국무원 총리로 취임했다. 같은 날 신징 시내에서 행해진 황제 즉위식에서 푸이는 만주국의 슬로건의 하나인 '오족협화'를 내거는데 있어서 만주족의 민족색을 내는 것을 싫어한 관동군으로부터의 강한 권유로 만주국군의 군복을 착용하였지만, 푸이의 강한 의지로 신징 시내의 순천(順天) 광장에 놓여진 특설 회장에서 즉위식에 앞서 즉위를 청조의 선조에게 보고하는 의식인 <고천례>(告天禮)를 행할 때에 푸이는 만주족의 용포를 착용했다. 그러나 동시에 만주국 정부에서는 이것은 청조의 복벽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취지의 성명이 나와 있었다.
푸이의 황궁은 집정 당시와 같이 만주국의 수도의 신징 중심부에 있었다. 당초 푸이 부부는 집정부의 집희루(緝煕樓)에서 살고 있었지만, 황궁으로의 위엄이 부족하다고 생각한 만주국 정부에 의해서 1938년 새롭게 동덕전(同德殿)이 황궁으로서 지어졌다. 그러나 관동군에 의한 도청을 경계해 푸이 자신은 한번도 황궁으로서 이용하지 않았다.
관동군의 주도에 의해서 만들어진 만주국의 헌법상에서는 황제는 국무원 총리를 시작으로 대신들을 임명할 수 있었지만, 차관 이하의 관료에 대해서는 1932년 조인한 <일만의정서>(日滿議定書)에 의해서 관동군이 일본인을 만주국의 관리에게 임명 혹은 파면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어서 관동군의 동의가 없으면 임면 할 수 없었다. 실제로 관동군 장교인 요시오카 야스나오(吉岡安直)나 쿠도 타다시(工藤忠)가 항상 푸이와 함께 행동해서 푸이의 행동이나 발언에 대해 조언하여 황제의 칭호는 허울 뿐이었고 일본의 괴뢰라고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국체에 관련되는 중요 사항의 결정에는 푸이 뿐만이 아니라 관동군의 인증이 필요하였고 만주국 관직의 약 절반을 일본인이 차지하였으며 건국 당초 만주국 독자적인 군대나 국적법이 존재하지 않는 등, 관동군의 영향력은 매우 컸다.
1937년 2월 푸이와 관동군 사령관 우에다 겐키치(植田謙吉)의 사이에 만주국 황제에게 남자 자손이 없는 경우에는 일본 천황이 후사를 정한다는 각서를 교환하였는데 사실상 푸이의 후계자를 일본이 정하게 되었다. 이후 푸이는 이전에 비해 관동군에 의한 암살과 친일적인 성향을 가지는 황제로의 교체를 경계했다고 한다. 푸이는 1937년 만주 기인 타타라씨(他他拉氏)인 탄위링(譚玉齡)을 측실로서 맞아 상귀인(祥貴人)으로 삼았지만, 1942년 사망하였다. 푸이는 관동군에 의한 독살이라고 의심하였으며 도쿄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도 그와 같이 증언하였다. 하지만 실제로 단순한 병사였다고 증명되었다. 한편 푸이는 1943년 한족(漢族) 리위친(李玉琴)을 측실로서 맞아 복귀인(福貴人)으로 삼았다.
만주국의 초대 국무원 총리로서 푸이를 지지한 정샤오쉬는 만주국의 실권을 잡은 관동군을 비판하는 발언을 하였고 푸이의 황제 즉위 불과 1년 후인 1935년 5월 사임하였다. 관동군이 과도하게 개입하는 형태로의 만주국의 운영과 실권을 수반하지 않은 형태의 푸이의 황제 취임에 대해서는 일본 내로부터의 반발도 있었다. 당시 정계에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아시아주의자의 거두로 겐요샤(玄洋社)의 총수인 도야마 미쓰루(頭山滿)는 만주국의 건국 당시부터 일본 정부와 관동군의 과잉 개입에 우려를 나타내었으며 1935년 푸이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에 초대를 받았지만 거절하였다.
일만 우호를 촉진하는 목적과 만주국 및 푸이의 위신을 국내외에 높이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1935년 4월 푸이는 천황 히로히토의 초대에 의해 일본을 국빈으로서 공식 방문한다. 푸이는 일본 제국 해군의 연습 전함 히에이(比叡)를 타고 일본에 도착하였고 히로히토가 도쿄역까지 푸이를 맞이하러 나왔다. 1940년 6월 황기(皇紀) 2600년 기념 행사가 도쿄에서 행해졌을 때에 다시 일본을 방문하여 히로히토와 회견하였다. 푸이의 제2차 일본 방문에서 이세 신궁(伊勢神宮)을 다녀간 후에 만주국에 건국신묘(建國神廟)가 만들어져 신체로서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天照大神)가 모셔졌고 만주국 국민은 궁성요배(宮城遙拜)와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의 숭배를 강제당하였다. 푸이는 두차례의 일본 방문에서 완룽을 동반하지 않고 단독으로 방일을 하였다.
1937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치바 현(千葉県)에 살고 있던 푸이의 동생 푸제와 일본 사가 후작의 딸이자 천황가의 친척에 해당되는 사가 히로시(嵯峨浩)의 혼담이 관동군의 주도로 진행되었다. 1938년 2월 6일 주일 만주국 대사관에서 결혼을 발표하였고, 같은 해 4월 3일 도쿄에서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당초 푸이는 사가 히로시를 관동군의 스파이로 의심했지만, 이후 2명의 아이가 태어나고 푸제와 사가 히로시의 관계가 양호하자 사가 히로시에 대한 경계를 풀었다.
푸이가 황제로 즉위한 4년 후인 1937년 7월 7일 베이징의 루거우차오(盧溝橋)에서 일어난 발포 사건을 계기로서 일본군과 중국군 사이에서 중일 전쟁이 발발했다. 내전 상태에 있던 국민당과 공산당은 일본군에 대항하기 위한 항일 민족 통일 전선인 국공 합작(제2차 국공합작)을 구축했다. 1941년 12월 7일 태평양 전쟁의 개전에 의해서 일본이 연합국과 교전 상태에 들어가면서 만주국도 일본과 아울러 연합국 각국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여 사실상 추축국의 일원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전투 지역으로부터 떨어져 있었고 만주국의 종주국인 일본과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공화국과의 사이에 <일소중립조약>이 존재하여 만주국은 국민당과 공산당에 의한 게릴라 공격이 자주 행해지고 있었지만 평정이 계속 되었다. 일본군은 1944년 가을에 들어가면서 각 전선에서 점차 패퇴하기 시작하였다.
1945년 8월 9일 소련은 일본에게 선전포고를 하는 동시에 만주국 국경선을 돌파하였다. 소련군은 동·북·서쪽 세 방향에서 만주국의 수도 신징을 노리고 침공을 시작하였다. 관동군은 <일소중립조약>에 의지해 1942년 이후 증강을 중지하고 주력 부대가 남방 전선에 있었다. 관동군은 1945년 5월 독일의 패배 이후 대일 참전에 대비해 전진 배치된 소련군에게 결정적 반격도 하지 못하고 일본인 만주 거류민을 버려둔 채 패주한다.
일본은 8월 15일 연합국에 대해 항복을 선언한다. 8월 17일 총리대신 장징휘의 주재로 열린 국무원 회의에서 만주국의 해체를 결정하고, 8월 18일 푸이는 퇴위의 조칙을 읽어내려 만주국은 탄생한지 13년 만에 멸망한다. 8월 20일 푸이의 퇴위조서를 공포할 예정이었지만 할 수 없었다.
-1964년 다민족국가가 된 중화인민공화국에서 만주족과 한족 사이의 조화를 목적으로 저우언라이에 의해서 만주족을 대표하여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으로 선출되었다.
ㄴ.총리 목록
1대: 정샤오쉬 (임기: 1932년 ~ 1935년)
정샤오쉬(정효서)(鄭孝胥, Zhèng Xiàoxū, 1860년 4월 2일 ~ 1938년 3월 28일)는 만주국의 정치인이자 외교관이자 서예가이다.
2대: 장징휘 (임기: 1935년 ~ 1945년)
징휘 (张景惠, 장경혜, 1871년~ 1956년 1월 11일) 는 일본 제국의 괴뢰정부인 만주국의 총리대신을 지낸 정치가이다. 이후에는 중화인민공화국에 의해 수용소에 감금되어 있었다. 자는 쉬우(叙五,서오)이다.
랴오닝 성 타이안 현의 농가에서 태어났다. 청년시절 두부를 만들어 팔았으며, 친구사귀기에 능했고, 도박을 좋아하였다. 청일 전쟁 이후, 청나라는 만주지역의 통치력을 상실했고, 각지에서 기회를 틈타 무장세력이 발호하였다.
장징휘도 마을의 상무회장(商務會長)을 맡아서 자신의 사병격인 자위단을 조직하여 마을의 상인들과 부자들을 보호하였다. 당시 장쭤린이 토비인 진슈찬의 습격을 받자, 바자오타이(八角台)로 와서 펑더린에게 몸을 의탁하였다. 장쭤린과 장징휘는 만나자마자 의기가 투합하였다. 장징혜는 장쭤린을 자위단의 우두머리가 되기를 청했고, 스스로는 그의 부하가 되기를 원했다. 이때부터 장징휘는 장줘린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랐다.
1902년 장쭤린은 청나라 조정에 출사하기로 결정했고, 장징휘도 그것을 따랐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초관(哨官, 하급장교계급)이 되었고, 1903년에는 방대(帮带)로 승진하여 청나라의 정식 군인이 되었다.
1906년, 장쭤린은 후로순방영총령(後路巡防營統令)에 임명되었고, 장징휘도 같이 승진하여 관대(冠帶)에 임명되었다. 1910년 장쭤린은 장징휘, 탕위린, 장쭤샹 등에게 지시하여 현역 군관으로서 펑톈강무당(奉天講武堂, 봉천군사학교)에서 군사학을 공부할 것을 권유하였다. 또한 장징휘에게는 수시로 펑톈의 군사, 정치 동향을 보고하라고 지시하였다. 장쭤린은 그리하여 봉계 군벌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장쭤린의 군대를 봉군(奉軍)이라고도 한다.
신해혁명이 발발하고 중화민국이 들어서자, 장쭤린은 제27사단장에 임명되었고, 장징휘는 그 휘하의 연대장이 되었다. 1917년 펑위린이 장쭤린과 사이가 벌어지자, 장징휘는 장쭤린편에 섰고, 제53여단장으로 승진하였다. 1918년 2월 장징휘는 53으로 이끌고 직계 군벌을 압박하였다. 또한 일본으로부터 무기를 사들여서 7개 혼성여단을 조직했다. 장쭤린은 장징휘를 임시 편성의 봉군(奉軍) 제1사단장에 임명하였고, 그를 봉군의 지역 사령관에 임명하였다. 같은해 8월 장징휘는 양위팅과 쉬수정과 연합하여 봉군의 명의로 4개 여단을 더 모집하였고, 세력을 강화하고 장쭤린에게 비밀리에 알렸다. 장징휘는 봉군 부사령관에 임명하였고, 장쭤린의 대리역을 맡아 북경에 주재하였다. 1920년 9월 중화민국 베이징 정부(쑨원의 중화민국 광둥 정부와 다름)는 장징휘를 차하얼 도통(都統)겸 육군제 16사단장으로 임명하였다.
제2차 직봉전쟁중, 장징휘는 다시 봉군 서로총사령관의 중임을 맡았다. 그러나 그는 결단력이 없고, 행동이 느려서 서로군은 참패했다. 그는 베이징에서 잠시 머물었는데, 직계 군벌인 차오쿤이 부정선거로 대총통이 된 후, 전국국도국(全國國道局)을 신설하자, 장징휘를 이곳의 책임자로 임명하였다. 장쭤린은 이런 장징휘의 배신을 매우 불쾌하게 생각했다. 1925년 겨울, 장징휘의 모친이 위중하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들었지만, 감히 장쭤린이 지배하는 고향에 들릴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장쭤린의 부하들에게 부탁하여, 장쭤린에게 용서를 빌었고, 장쭤린은 그를 용서하고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허가하였다.
장징휘는 이때 펑톈(선양)에 먼저 가서, 장쭤린을 먼저 찾아가서 통곡하면서 고두사죄를 했다고 전해진다. 장쭤린은 옛 동지였던 그를 용서하고 다시 봉군 독군서참의(督軍署參議)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장쭤린을 대리하여 베이징과 톈진을 오가며 바쁘게 일했다.
1926년 이후, 장쭤린이 베이징을 장악하자, 장징휘도 육군총장과 실업총장에 임명되었다. 1928년 6월 4일, 장쭤린이 펑톈으로 돌아가면서 일본의 음모로 철도가 폭파되어 암살되었고, 장징휘도 크게 다쳤다.
1928년 말, 장쭤린의 뒤를 이어 봉군의 우두머리가 된 장쉐량은 그를 동성특별장관(東省特別長官)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장쉐량은 그와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고, 장쉐량이 장제스에게 항복한 후에 그는 난징으로 가서 군사참의원 원장을 맡았다.
만주 사변이 발발하여 1931년 만주 전역이 관동군에 점령되자, 장은 만주 하얼빈으로 돌아와 1931년 9월 27일에 "특별구 비상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이는 만주를 중국에서 분리하려던 일본의 의도에 동조한 것이다. 일본군에 끝까지 저항하던 동북군의 잔존세력인 마잔산이 치치하얼에서 패주하자, 장징휘는 만주가 자치령이라고 선언했다. 장은 일본인과 타협하여 만주국의 헤이룽장 성 성장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본거지인 하얼빈을 떠나 치치하얼에서 거주하라는 일본의 요구를 거부하였고, 이것때문에 관동군 인사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1932년 2월마잔산이 일본과 강화를 맺고, 그 조건으로 헤이룽장 성장으로 취임하여 장징휘는 잠시 그 자리를 잃었다. 그러나 마가 1932년 4월 일본에 반란을 일으키자, 장징휘는 다시 헤이룽장 성장이 되었고, 만주국의 국정부 총장(국방장관)이 되었다.
1935년 5월 21일 장징휘는 관동군의 입김으로 정샤오쉬를 이어 만주국 총리대신에 올랐다. 이에 대해서 푸이는 반대했다고 한다.
만주국 총리로서 그는 수동적이고 상징적인 위치에 있었다. 그리하여 관동군에 의해 임명된 일본인 고문들이 만주국의 행정을 실제로 책임졌고, 그는 불경을 베끼는 것으로 소일하였다. 그의 과거 전력때문에 그는 "두부총리대신"으로 경멸스럽게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장징휘는 한번은 땅을 강제로 일본인에게 불하시키려는 의도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비난하기도 하였다.
장은 일본의 항복이후 만주국이 붕괴할 때까지 10여년간 총리대신으로 남아 있었다. 도조 히데키가 주도한 대동아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만주국 대표로 일본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일본이 항복한 이후, 그는 소련군에 체포되어 시베리아에 끌려갔다가, 후에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자 그에 넘겨져 푸순전범관리소에 수용되었다. 1957년 그곳에서 86세로 사망하였다.
가족으로는 제6남인 장멍스는 베이징국제관계학원의 일본학부 주임으로 일했고, 2004년에 중화인민공화국의 제7기 전국정협위원으로 선출되었다.
(5)행정
1932년(대동 원년)의 건국 시에는 수상(집정제하에서는 국무원 총리, 제정 이행 후는 국무총리대신)으로 정샤오쉬가 취임했고, 1935년(강덕 2년)에는 만주의 독립선언을 발표한 둥베이행정위원회 위원장 장징휘가 수상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실제 정치 운영은 만주 제국 주차 일본 제국 특명전권대사 겸 관동군 사령관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원수는 수상과 각료를 비롯해 관리를 임명하여 관제를 정하는 권한이 주어졌지만, 관동군이 실질적으로 만주국 고급 관리, 특히 일본인이 주로 취임하는 총무청장이나 각부 차장(차관) 등의 고급 관리의 임명이나 파면을 결정하는 권한을 갖고 있었으므로 관동군의 동의가 없으면 임면할 수 없었다. 또한 공무원의 약 절반을 일본인이 차지하고 있었다. 관동군은 일본인을 만주국 정부의 각 행정관청의 장·차장으로 임명시켜 실권을 잡게 했다. 이것을 내면 지도라고 불렀다(2키 3스케, 일본어: 二キ三スケ). 즉 만주국은 정치, 경재적으로도 실질적으로 일본인이 운영하는 껍데기뿐인 일본의 괴뢰 국가였다
(6)주요 도시
신징(新京·현재 창춘, 중국어 간체: 长春)
펑톈(奉天·현재 선양, 중국어 간체: 沈阳)
만저우리(중국어 간체: 满洲里)
지린(중국어 간체: 吉林)
퉁화(중국어 간체: 通化)
하얼빈(중국어 간체: 哈尔滨)
치치하얼(중국어 간체: 齐齐哈尔)
잉커우(중국어 간체: 营口)
단둥(중국어 간체: 丹东)
둔화(중국어 간체: 敦化)
하이라얼(중국어 간체: 海拉尔区)
(7)행정구역
신징 특별시(新京特別市)
지린 성(중국어 간체: 吉林省)
쓰핑 성(중국어 간체: 四平省)
퉁화 성(중국어 간체: 通化省)
젠다오 성(중국어 간체: 间岛省)
룽장 성(중국어 간체: 龙江省)
→ 현재 지린 성(吉林省) 일대
빈장 성(중국어 간체: 浜江省)
무단장 성(중국어 간체: 牡丹江省)
둥안 성(중국어 간체: 東安省)
싼장 성(중국어 간체: 三江省)
베이안 성(중국어 간체: 北安省)
헤이허 성(중국어 간체: 黒河省)
→ 현재 헤이룽장 성(중국어 간체: 黑龙江省) 일대
안둥 성(중국어 간체: 安東省)
펑톈 성(중국어 간체: 奉天省)
진저우 성(중국어 간체: 錦州省)
관동주(중국어 간체: 关东州) : 일본의 중국 조차지(1898년 ~ 1945년)
→ 현재 랴오닝 성(중국어 간체: 辽宁省) 일대
싱안 총성(중국어 간체: 兴安総省)
러허 성(중국어 간체: 热河省)
→ 현재 내몽골 자치구(중국어 간체: 内蒙古自治区) 일대
→ 현재 허베이 성(중국어 간체: 河北省) 일대
(8)2키 3스케(일본어: 二キ三スケ)
2키 3스케(일본어: 二キ三スケ)는 당시 만주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5명의 일본인 실력자들에 대한 별명이다. 각자의 이름이 “키”또는 “스케”로 끝나는 것에 유래하고 있다. 그 중에도 도조 히데키는 나중에 총리의 자리까지 올랐다. 기시 노부스케도 일본 패전 후 총리에 올랐다. 아이카와 요시스케는 닛산의 전신인 닛산 콘체른을 만들었다.
도조 히데키: 관동군 헌병대 사령관
호시노 나오키: 만주국 국무원 총무장관
기시 노부스케: 만주국 총무청 차장
아이카와 요시스케: 만주중공업개발주식회사 사장
마쓰오카 요스케: 남만주철도 총재
특히, 기시 노부스케, 아이카와 요시스케, 마쓰오카 요스케의 3명을, "만주 삼각 동맹"이라고도 부른다.
(9)선거와 정당
헌법에 상응하는 조직법에 따르면 만주국은 일원제(단원제) 의회인 입법원의 설치를 규정했지만 선거는 단 한 차례도 실시되지 않았다. 정치 결사의 조직도 금지되었기 때문에 협화회라고 하는 관민 일치의 유일한 정치 단체만이 존재하였고 정책의 국민에게의 침투나 국정의 지도를 수행했다.
(10)사법제도
헌법에 상응하는 조직법이나 인권보호법을 시작으로 하여 일본을 모방한 법 제도가 정비된다. 당시의 일본 법과 다른 점은 인권보호법에서 법 아래 평등이 보증된 것, 조직법에서는 각 각료나 합의체로서의 내각이 아니고 수상 개인이 황제의 보필 기관으로 여겨진 것, 형법의 구성 요건은 거의 같지만 법정형이 일본 형법보다 약간 무겁게 규정되어 있는 것, 검찰 기구가 재판소로부터 분리된 독자적인 기관으로 여겨진 것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만주국 형법은 한국 전쟁 직후에 제정(1953년 9월 18일)된 대한민국 형법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11)외교
만주국을 승인한 국가
중국은 만주국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무역, 교통, 통신을 위해서 공식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1933년 국제연맹이 리튼 보고서(Lytton Report)를 채택하여 만주가 중국의 일부임을 선언하자 일본은 연맹에서 탈퇴한다. 미국은 만주국이 건립하자 무력에 의해 만들어진 국제 관계의 변화를 거부하는 스팀슨 독트린(Stimson Doctrine)을 선언한다.
국제 연맹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만주국은 엘살바도르(1934년 3월 3일)와 도미니카 공화국(1934년), 소비에트 연방(사실상 1935년 3월 23일, 법률상 1941년 4월 13일), 이탈리아(1937년 11월 29일), 스페인(1937년 12월 2일), 독일(1938년 5월 12일), 헝가리 (1939년 1월 9일)에 승인되었다.
흔히 바티칸 시국이 1934년 만주국과 외교 관계를 맺은 것으로 믿지만 사실이 아니다. 이것은 바티칸 시국이 만주국을 승인했다는 영화 《마지막 황제》(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 1987년 작품)를 참고한 잘못이다. 지린의 주교 가오더후이(高德惠, Auguste-Ernest-Désiré-Marie Gaspais)는 바티칸 시국의 외교 관계를 담당하는 국무성성(國務聖省)이 아닌 포교성에 의해서 만주국의 가톨릭 선교를 위한 바티칸의 임시 대표로 임명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개전 이후, 만주국은 일본의 동맹국 독일의 지배를 받거나 영향하에 있던 국가인 슬로바키아(1940년 6월 1일), 프랑스(1940년 7월 12일), 루마니아(1940년 12월 1일), 불가리아(1941년 5월 10일), 핀란드(1941년 7월 18일), 덴마크(1941년 8월), 크로아티아 독립국(1941년 8월 2일)으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또한 일본의 영향하에 있던 중국 왕징웨이 정권(1940년 11월 30일), 타이(1941년 8월 5일), 필리핀도 만주국을 승인했다.
(12)군사
만주국 기병대 모습
만주국에는 일만의정서에 의해서 관동군이 주둔하였다. 1932년부터 만주군을 시작으로 군대가 창설되어, 황제 호위부대인 금위대과 해군, 비행대가 창설되었다. 만주국의 성격상 군대 역시 관동군과의 제휴를 전제로 하여, 관동군 지원 부대로서의 성격이 컸다.
남만주철도주식회사(南滿州鐵道株式會社, 일본어: 南満州鉄道株式会社 (みなみまんしゅうてつどうかぶしきかいしゃ) 미나미만쥬우테츠도우카부시키카이샤[*], 영어: South Manchuria Railways Corporation) 또는 단순히 만철(滿鐵)은 러일전쟁의 강화 조약인 포츠머스 조약(1905년)에 의하여[1] 일본이 러시아로부터 양도받은 철도 및 부속지를 기반으로 1906년에 설립되어, 1945년에 제2차 세계대전 종전까지 중국 동북지방(만주)에 존재한 일본의 국책회사이다. 철도사업을 중심으로 하였으나, 광업, 제조업 등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사업을 전개한 복합기업의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만주 식민화의 중핵기관으로서 역할을 하였다. 초기엔 다롄(大連), 이후 신징(新京) - 현재의 창춘(長春)에 본사를 두었다. 1945년에 소련에 의해 점령되어 실질적 기능을 상실하였고, 이후 연합군 최고사령부(GHQ)에 의해서 해산되었다.
다른 의미로는 만철선(滿鐵線)으로 통칭하는 다롄~창춘~하얼빈 간의 철도 노선(남만주 본선 구간) 및 여기에 부속된 남만주철도 주식회사의 각 지선을 의미하기도 한다.
세계 대공황(1929년~39년)의 여파가 만주에도 세차게 밀려왔다. 만철의 주요 거래품목이었던 대두의 수요가 감소하고 수송량도 급격히 줄어들어 수송운임 수입이 격감했다. [2] 게다가 푸순탄의 판매도 부진했다. [2]당시 중국 본토에서 들어오는 수출 석탄의 가격에 비해 푸순탄의 가격이 비쌌기 때문이다.
만주국 수도 신킹(Hsinking) 철도역
(1)인구
1908년 만주의 인구는 1,583만명이었지만, 만주국 건국 이전인 1931년 4,300만명이 되어 있었다. 1941년 인구는 5,000만명으로 증가했다. 1934년 만주국의 인구는 3,088만명, 1가구당 평균 인원은 6.1명, 남녀 성비는 122:100로 추정되었다. 남성 인구가 많은 이민 국가의 측면이 강했다. 일본 식민지의 조선인이 많이 이주하였고, 대만인도 5,000명이 이주했다.
일본 측의 자료에 따르면, 1940년 만주국(헤이룽장·러허·지린·룽장·안둥)의 전체 인구는 43,233,954명이었다. 인구 구성은 아래와 같다. 통계의 만주인 가운데에는 68만명의 조선족도 포함한다. 또한 도시 지역의 주민은 전체 인구의 20% 정도였다.
만주국이 아편을 재배하여 수확하는 모습[아편(마약)을 전쟁물자로 이용했다]
민족 인구 수 비율
만주인(한족·만주족·조선족) 30,190,000명 97.8%
일본인 590,760명 1.9%
타인종(러시아인·몽골인 등) 98,431명 0.3%
1940년 주요 도시의 인구는 아래와 같다. 통계의 주체에 따라서 수치에 차이가 있는 것은 만주국의 행정권이 미치지 않았던 주요 도시의 만철 부속지 인구를 포함하거나 포함하지 않는가 따라서 통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도시 인구 수 연도
잉커우 119,000명 또는 180,871명 1940년
펑톈 339,000명 또는 1,135,801명 1940년
신징 126,000명 또는 544,202명 1940년
하얼빈 405,000명 또는 661,948명 1940년
다롄 400,000명 또는 555,562명 1939년
안둥 92,000명 또는 315,242명 1940년
지린 119,000명 또는 173,624명 1940년
치치하얼 75,000명 1940년
(2)민족과 언어
만주국 시대의 공식이념인 "민족협화", "오족협화"(五族協和)는 역사적인 만주의 이질성, 즉 만주족·한족·조선인·러시아인·몽고인뿐 아니라, 어룬춘족, 골디(Golie), 나나이족 등 십여 민족집단의 혼재를 반영한 면이 있었다. 하얼빈에는 50개 이상의 민족집단, 45개의 언어가 혼재했다. 만어(滿語)라고 불리던 표준 중국어와 일본어가 사실상의 공용어로서 사용된다. 군·관공청에서는 일본어가 제1 공용어였으며 거의 대부분의 교육기관에서 일본어가 교수 언어로 여겨졌다. 몽골어·러시아어 등을 모국어로 하는 주민도 존재했다.
1940년대 초 만주국 쇼와 제철소
(3)민주국의 조선인
만주국에는 많은 조선인들이 참여했으며,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한국 독립 이후 정부와 학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만주국 연합정부 5종족 중 하나의 종족 조선인이 만주군관학교에 많이 참여했다]
백선엽
박정희
박창암
박승환
이선근
정일권
최규하
김석범
(4)일본인 이민자
1931년부터 1932년까지 만주에는 59만명의 일본인이 있었으며 그중 10만명은 농민이었다. 잉커우의 인구의 25%가 일본인이었다. 일본 정부는 1936년부터 1956년 사이에 500만명의 일본인 이주를 계획하고 있었으며, 1938년부터 1942년 사이에 20만명의 청년 농민을, 1936년에는 2만명의 가족 이민자를 각각 보냈다.
이같은 이주는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5년에 일본군이 동해와 황해의 제공권과 제해권을 잃자 중지된다. 종전 후 소련이 만주를 침공했을 때, 85만명의 일본인 이주자가 포로가 되었다. 공무원과 군인을 제외하고 1946년부터 1947년에 걸쳐 단계적으로 일본에 귀환한다.
공무원과 군인은 소련군의 포로로서 시베리아로 끌려가 포로생활을 하고 포로교환협정이후 모두 석방시켰다. 그러나 돌아온 사람은 극히 적었으며 매서운 시베리아의 툰드라지대에서 대부분은 동사하였다.
(5)유대인 자치구
1930년대 일본 정부는 유대인 난민을 만주국으로 이주시키려던 계획을 추진한다(복어 계획, 일본어: 河豚計画 (ふぐけいかく)). 1934년에 아유카와 요시스케가 처음 제안한 계획에서 시작되어 1938년의 5부장관 회의에서 정부의 방침으로 정해졌다. 육군대좌 야스에 노리히로, 해군대좌 이누즈카 고레시게 등이 실무를 주도하였다. 박해를 피해 유럽에서 이탈한 유대인들을 만주국에 정착시켜 자치구를 건설하려던 계획이었으나, 유대인 적대정책을 추진해가던 나치 독일과의 우호관계 손상을 우려하여 계획이 점차 흐지부지되었으며, 삼국 군사 동맹의 결성,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이 연합국과의 전쟁을 개시하면서 실현 가능성이 사라져 결국 계획은 무산되었다
(5)국적법의 부존재
만주국은 패망까지 국적법이 제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법적 의미의 만주 "국민"은 존재하지 않았다. 국적법이 제정되지 않은 배경으로 이중 국적을 인정하지 않는 일본의 국적법상 일본인 정착민들은 "일본계 만주인"이 되어 일본 국적을 포기하게 되므로 만주로 유입되는 일본인 이주민이 감소할 우려가 있었다. 일본의 식민지하에 있던 조선인을 일본 국민으로 취급하고 있던 조선 정책과의 일관성 문제 등이 있었다.
(1)영화
1928년 남만주 철도가 홍보부 홍보계 영화반, 통칭 〈만주철도 영화부〉를 마련해 홍보(선전)용 기록 영화를 제작하고 있었다. 1937년 설립된 국책 영화 회사인 〈만주영화협회〉가 영화의 제작이나 배급·영사 업무도 행해 각지에서 영화관의 설립·순회 영사 등도 행했다
(2)잡지
징의 예문사(藝文社)가 1942년 1월부터 만주국에서 처음으로 유일한 일본어 종합 문화 잡지 《예문》(藝文)을 발행했다. 1943년 11월 《만주 공론》(滿州公論)으로 제목을 고쳤다.
(3)스포츠
1932년 만주국 체육협회가 설립되었다. 만주국의 국기는 축구이며, 만주국 축구협회와 만주 축구 대표팀도 결성되었다. 야구에 있어서는 일본의 도시 대항 야구 대회에 참가한 팀이 있었고 일본 프로 야구 첫 해외 공식전으로서 1940년 만주 리그전을 하였다. 또한 만주국은 건국 당초 올림픽의 참가도 계획하여 1932년 5월 21일 만주국 체육협회는 올림픽 조직위원회에게 로스앤젤레스 올림픽(1932년 7월 개최)에 선수 파견을 정식으로 신청하였지만 참가는 할 수 없었다
(4)국화(國花)
국화는 난(蘭)이다.
*만국(만주국) 정치 슬로건
오족협화(五族協和)는 만주국의 나라 표어이자 건국 이념, 정치 슬로건이다. 중화민국 성립 초기의 정치 슬로건이었던 오족공화(五族共和)에서 유래된 것이지만 오족공화의 '오족'(五族)이 한족, 만주족, 후이족(회족), 몽골족, 티베트족을 가리키는 것과는 달리 오족협화는 일본 민족(야마토 민족), 만주족, 조선인(한민족), 한족, 몽골족의 협력을 뜻한다.
만주국의 국기에는 노란색(만주족) 바탕 왼쪽 상단에 네 가지 색(빨간색(일본 민족), 파란색(한족), 하얀색(몽골족), 검정색(조선인))의 가로 줄무늬가 그려져 있는데 이는 오족협화의 이념을 뜻한다.
만국(만주국)은 한족, 만주족, 조선족, 몽골족, 일족(일본족, 야마토민족) 등 5개 종족 연합국이다
*내몽골자치연합정부(일본 괴뢰정권)
몽강연합자치정부(蒙疆聯合自治政府, Měngjiāng Liánhé Zìzhì Zhèngfǔ) 또는 몽강국은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 내몽골 자치구 일대에 있던 나라이다. 몽강국은 당시 만주국 챠하 주와 수이유엔 주를 통치 범위로 했으며, 수도는 장자커우였다
내몽골 독립 운동가인 뎀치그돈로프(德穆楚克棟魯普, 덕왕)에 의해 1936년 5월 12일 몽골군 정부(蒙古軍政府)로써 수립되었고, 1937년 10월에 몽골연합자치정부(蒙古聯盟自治政府)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뒤에 1939년 9월 1일에 다시 몽강연합자치정부(蒙疆聯合自治政府)로 개칭한다. 그러나 뎀치그돈로프(덕왕)는 일본 제국에 협력하던 인물로, 몽강국은 만주국의 영향 아래 있던 일본 괴뢰국이였다.
그 결과, 이 지역은 일본의 괴뢰정권으로 전락하였으며, 결국 덕왕은 만주국의 푸이처럼 단지 꼭두각시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1945년 8월, 몽골군과 소련군의 합동작전인 8월의 폭풍 작전으로 멸망, 현재 내몽골 자치구로 이어지고 있다.
몽강연합자치정부는, 약간의 대포와 군대를 갖추고 있었지만, 전차나 비행기는 단 한 대도 없었고 소총 등의 총류만 소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기마민족인 만큼 기병대가 많이 있었다.
-임표는 동북항일연군이 개편된 동북 인민해방군 총사령관을 맡아 1948년 11월 만주지역에서 수적으로 우세한 국민당군을 격파하였다. 임표의 승리를 기점으로 전세는 공산당쪽으로 기울었고, 임표는 제4야전군으로 개편된 자신의 부대(총병력 백만)를 이끌고 계속 남하하여 1949년 2월에는 베이징을 함락시켰고, 창 강을 도하하여 1950년까지 중국의 최남단인 광시 성까지 도달하였다.
-동북3성(東北三省)은 중국의 6대 중국영토지역의 하나로서 동북부 지역을 말하며 과거에는 만주(滿洲)로 불렸던 지역이다. 행정구역상으로는 랴오닝 성(遼寧省, 요녕성), 지린 성(길림省(성), 길림성), 헤이룽장 성(黑龍江省, 흑룡강성)의 3개 성(省)이 포함된다. 이 지역 최대의 도시는 선양(瀋陽)이며, 그 외에 하얼빈(哈爾濱), 창춘(長春), 다롄(大連), 치치하얼(齊齊哈爾), 지린(吉林) 등의 도시가 있다.
동북 3성(만주지역)은 200만 명 이상의 조선족(한국인)이 거주하고 있고 고조선, 고구려와 발해의 유적이 많이 남아있어 한민족(조선족)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동북 3성(만주지역) 역사적 지배세력은 조선족(한민족)과 만주족(여진족), 거란족, 몽골족 그리고 한족(漢族, 한나라 후손)이다
동북 3성(만주지역)의 인구는 현재 약 1억 명으로, 이는 중국 전체 인구의 8%에 해당한다.
동북 3성(만주지역) 지방의 민족 구성은 한족(漢族)이 92.4%를 차지하는데, 그 대부분은 청조(淸朝) 300년 간, 특히 19세기 말 이후에 이주하여 왔다. 19세기 말의 동북 3성 인구는 300만 미만이었으나, 그 후 1년에 50∼100만의 인구가 주로 산둥성[山東省] ·허베이성으로부터 유입하였다. 소수민족은 787만인데, 그 중 210만이 만주족(滿洲族)으로 주로 랴오닝성(요녕성)에 살고, 113만이 한족(韓族)으로 지린성(길림성) 동부 국경지대에 옌볜[延邊] 한족(조선족)자치주를 형성하고 있다. 또 몽골족 32만은 네이멍구 지역에 살고, 후이족[回族] 23만은 대도시에 분산거주하며, 그 밖에 퉁구스계(系)의 다구르족 ·오로촌족 ·시보족 ·오웽크족 및 러시아인 등이 살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까지 약 100만의 일본인이 살고 있었으나, 종전 후 거의 전부 일본으로 철수하였다.
동북3성(만주)지역에는 자치구로 만주족(만족)과 거란족, 조선족 등이 있다
-연변조선족자치주에 거주하는 조선족 36.7% : 약 80만명으로, 이 중 84%가 연길, 용정, 화룡, 도문, 훈춘에 거주한다.
연변에 거주하는 조선족들 가운데 가장 많은 성은 김(金)씨이다 청나라 왕조 성씨를 김씨(金氏)를 많이 사용했다
-만주족(滿洲族)이 건국한 국가(國家)
숙신. 읍루족(부여)--말갈족(발해)--->여진족(金)--->만주족(淸)--->만족(중국 56개 민족 중 한개 소수민족으로 편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