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어머니를 살려 주세요,하느님!' 그 날, 중학교 3년인 저와 형, 누나는 신림동 집 마당에서 두 눈을 감고 기도하며, 안에서 울려 퍼지는 순복음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의 안수 기도와 찬송가를 듣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집에서 나온 사람들 중에 한 분이 이제 걱정 말라며, 어머니는 병이 나을 거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로부터 6개월이 채 안되어 저의 모친은 사망하였습니다. "하느님을 믿으면 산다고 하였는데 .... 그래서 어려서부터 다니던 절에도 발길을 끊고 불교 서적과 관련된 모든 용품들을 다 우리 집 앞마당에 태우지 않았던가?" 처음으로 종교적 믿음을 갖게 되었던 저로선 너무나 어이없고 어처구니가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죽었다"는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이체’의 말은 저에게 확신을 주었고, 청소년기에 그 경험은 종교에 대한 저의 믿음을 크게 손상시켰습니다. 그 이후로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없어진 저는, 대외적으로 모든 종교를 다 믿는다고 말하였습니다. 그것은 바꾸어 말하면 제 마음 속의 절대적인 종교는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2. 다시 찾게 된 신앙 결혼 후에 부친의 사망과 더불어 또 다른 시련이 닥쳤습니다. 부친 사업에 대한 연대 보증으로 인한 채무의 이행으로 저와 제 아내는 집까지 빼앗기고 쫓겨나야 하는 수모를 겪어야만 했습니다. 뿐만 마니라 그 후로는 6년 동안 모든 수입을 빚 갚는데 써야 하는 생활고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 때문에 다시금 영적 필요를 느끼게 된 저희 부부는 여러 종교들을 찾아 다녀볼 생각을 하게 되었고, 친족의 소개로 알게 된 절도 가게 되었습니다. 첫 아이를 출생하기 100일 전부터 날마다 108번씩 불상을 항해 절을 했고 부처에게 우리 가정의 행복과 안녕과 첫 아이의 건강을 기원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부모의 묘를 이장하라는 주지승의 권고를 받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개업한 납골당으로 옮기면. 기도도 더 잘해주고 제 일도 더 잘될 거라는 거였습니다. 이미 연등이나,위패(?), 축일 기도 등으로 적잖게 그 절에 돈이 들어간 상태였는데 또 돈을 요구하는 주지승의 행동에 모든 신은 돈을 요구하는가? 과연 이것이 참 종교일까? 하는 의혹을 품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명령을 교리(마 5:9)로 가르치며 경건한 정성을 상업적 이득의 수단(디첫 6:5)으로 삼는 사람들에게 적잖게 실망하였고, 결국 청소년기에 종교에 대한 부정적 견해에 이어 성인이 되어 다시 찾게 된 신앙마저 저의 영적 필요를 충족시키지 못하였습니다. 이제는 결코 종교를 갖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3. 여호와의 증인을 만나다 쇼핑을 하던 어느 날 우연히 아내의 눈길을 끄는 주방 그릇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릇을 구입고자 제품을 확인하던 중에 어릴 적부터 아내를 예뻐해주던 사촌 언니의 회사 물품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결국 20년 만에 연락된 아내의 사촌 언니 부부와 저녁 식사를 같이 하게 되었습니다. 식사를 하던 중 처형은 자신이 ‘여호와의 증인’임을 밝히셨고 너무도 놀란 우리는 내색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너무 일찍 돌아가신 시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아내에게, 온화함과 인자함이 있는 그 처형 부부가 시부모의 사랑을 대신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는데, 그런 처형이 여호와의 증인이라니요. 지하실에서 사람들을 쇠사슬에 묶어 놓고 채찍질하며 그 피를 받아 마시며 주문을 외우는 것이 제가 알고 있는 "여호와의 증인"이었습니다. 만년 관심자였던 형님조차도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저의 극단적인 견해에 조금 격앙되셨고, 저는 연기 생활을 오래한 공인으로서의 미소를 지으며, 성서를 읽는 사람은 성공한다면서요?'라는 가식적 답변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와는 달리 아내는 마음을 잘 이해해주는 처형과의 만남 이후 전보다 더 밝아졌고 그런 긍정적 모습은 저의 가정에게도 좋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몇 달간 ‘주몽’이라는 드라마의 지방 촬영으로 일주일에 한 번씩 집에 들어오게 된 저는, 어느 날 새벽에 집에 들어와서 경악을 금치 못하게 되었습니다. 거실과 안방 바닥에 「여호와의 왕국 선포, 파수대」와 「깨어라」 잡지가 펼쳐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저는, 자고 있는 아내를 깨워 당당이라도 따져 묻고 싶었지만 설마 지혜로운 내 아내가 이런 사이비 종교 하나를 구별하지 못하겠나 싶은 생각에 조용히 잡지들을 거둬서 한쪽에 얹어 놓았습니다. 한데 시간이 흐를수록 잡지는 쌓여만 갔고 아내는 배우는 진리들을 점차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딸 둘에게 성서를 가르치겠다고 저의 허락까지 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친구 가족과 함께 남산 타워를 구경갔을 때 도저히 눈뜨고 봐주지 못할 만큼의 상황을 보게 되었습니다. 공공장소를 가리지 않는 청소년들의 방탕한 모습에, 네 명의 어린 자녀를 동반한 저희들은 도중에 남산 타워를 내려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내려갈 땐 케이블카를 타지 않고 산책로로 걸어갔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산책로 구석구석에서도 차마 눈 뜨고 보지 못할, 진한 스킨쉽의 모습들을 보게 된 것입니다. “내 두 딸들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저렇게 방치하진 말자”고 다짐한 저는, "하느님의 높은 도덕 표준에 고착하며 생활하는 것이 현 세상에서의 살 길이다"라는 아내의 말에 동의하고, 자녀에게 성서 연구를 허락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큰 딸 수빈이의 성경적 질문들과, 아빠도 성서 연구를 하게 해 달라는 딸의 기도에 힘입어 자녀를 사랑하는 아빠로서, 저 역시 아이들이 연구하는 내용을 알아봐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4. 베델을 방문하다 5월 5일은 세속 휴일이자 저희 부부의 결혼 기념일입니다 식사할 만한 근사한 곳이 있다며 아내는 나를 안내하였고, 그곳에서 아내와 미리 약속되어 있던 형제 자매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조금 당황스러운 만남이었지만, 방송계의 선배이신 오미연 자매가 하느님의 집인 베델을 가보라고 제안해 주셔서, 내심 부담 반, 기대 반의 심정으로 가보겠다고 약속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5월 8일에 베델을 방문했을 때, 제 첫 인상은 저희를 반겨주는 베델 성원들의 외모가 매우 단정했고 피부 상태조차 매우 좋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느낄 수 없는, 뭔가 모르는 깨끗하고 정돈된 모습들이 제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반면에, 마치 텔레비전에서 가끔 보는 평양 사람들처럼 꼭 어떤 시나리오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들 같다는 느낌도 섞여 있는 것이 솔직한 저의 심정이었습니다! 베델 견학을 마치고 한 형제의 숙소에서 교제를 하면서 마침내 저의 걱정은 변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만약 이 종교 단체가 거짓이면'"우리 식구는 어쩌나?'라는 걱정에서 '이 조직이 정말 하느님의 참 조직이라면 ... 나는 어쩌나?'라는 염려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30년 동안 연기만 했던 저에게 '안정훈, 여호와의 증인이 되다’라는 소식은 저의 연기 생활에 치명적이 될 수 있다는 불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5. "저도 ‥‥ 형제예요" 2007년 5월 20일 상암동 월드컵 경기장에서 지구 감독자의 특별 방문이 있었습니다. 연예인 축구단 단장으로 그 곳에 자주 가 보았던 저는 경기장 입구에서 좌석까지 최소한 30-40분이 소요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날은 10-15분만에 자리에 앉게 되었으며, 나올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곳에 모인 형제 자매들의 세상과 구별되는 품위있고 정숙한 옷차림과 질서있는 행동, 사랑의 친절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뭔가 달랐으며 저는 방송계 선배 증인들과의 인사를 위해 경기장을 한 바퀴를 돌면서 본이 아니게 약 7만명의 청중에게 일일이 신고식(?) 아닌 신고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유 탤런트 아니세요? 언제 형제 되셨어요? 낙원에서 만나요!'라는 청중들의 관심과 격려에 대해 저는 처음엔, ‘형제는 아니고요. 관심자예요’ 하고 답변을 하다가 나중엔 일일이 대답하기 힘들어서 그냥 “네 ... 형제예요” 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많은 청중들이 저를 껴안아 주고 환영해 주고 등을 두드려 주었습니다. 그렇게 진심어린 마음으로 반갑게 맞아 준 환대는 과거 공인으로서 받았던 그 어떤 대중의 사랑을 뛰어 넘는 제 평생 잊지 못할 경험이었습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마가 10:30에서 "지금 이 시기에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밭을 백배나 받는"다는 말씀을 피부로 실감한 저의 첫 집회였습니다. 또한 요한 6:44에서 “아버지께서 이끌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로 올 수 없습니다.”라는 예수의 말씀처럼 저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세상의 영이 가장 가득한 연예계에서 저를 선택해 주신 아버지, 여호와께 진정 감사를 드립니다. 6. 자랑할 것입니다 저는 지난 2007년 12월 8일에, 아내가 처형을 처음 만난 지 1년 6개월만에, 그리고 제가 성서 연구를 시작한지는 6개월만에,제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여호와께 헌신의 상징으로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 달부터 보조 파이오니아를 수행하였고 2008년 7월 1 일자로 정규 파이오니아로 임명되어 지금까지 봉사의 직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또, 2009년 2월에는 봉사의 종으로 임명되어 여호와와 회중을 섬기는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이 그늘진 골짜기와 같은 마지막 때에 여호와의 이름과 과분한 친절로 인해 제 가족은 진정한 행복과 축복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낙원에서 돌아가신 제 부모님과 재회하는 희망을 가지며, 오직 여호와께서만이 사랑의 친절과 공의의 의를 땅에서 행하시는 분임을 모든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자랑할 것입니다.
첫댓글벧엘 방문하였을때 : ‘북한처럼 뭔가 시나리오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들 같았다’ 정확한 관찰입니다... 조직에 몸 담근후... 아마도 이런 점들이 맘에 들지 않아서 탈퇴 하지 않았을까 생각 됩니다. 사실 공산당이나 마찬가지지요. 조직내에서 순종하고 자기개성 죽이고 살아야 인정 받으니.
첫댓글 벧엘 방문하였을때 :
‘북한처럼 뭔가 시나리오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들 같았다’
정확한 관찰입니다... 조직에 몸 담근후...
아마도 이런 점들이 맘에 들지 않아서 탈퇴 하지 않았을까 생각 됩니다.
사실 공산당이나 마찬가지지요.
조직내에서 순종하고 자기개성 죽이고 살아야 인정 받으니.
현재는 증인을 왜 나왔는지 참 궁금하네요
의정부에서 중국집을 한다 하던데.
@류비 ^^
전 순회대회때 직접 안정훈 아니.. 안정훈형제 경험담을 들었던 한 순회구 형제였답니다ㅎ 당시 그분의 영적 발전에 공감하며 기뻐했던 바보같던 1인 입니다ㅋ
저도 잠실 지역대회에서 안정훈형제 연설듣고 직업이 탈렌트라 그런지 연설이 물흐르듯 유창하다구 생각했지요 그러면서도 얼마되지 않은 형제를 벌써 대회연단에 연설이라!! 내심 속으로 키워주나보나 ㅋ 생각들었지요
안정훈, 신윤정 주연의 영화 '지금 우리는 사랑하고 싶다'를 재밌게 봤던 게 기억나네요. 순수한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서정적인 영화입니다.
돌아보면 자기 감을 믿어야 해요.
맞아요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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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가방가 입니다~^^
앗~
류비형님이닷~^^
잘지내시죠
@류비
그렇군요 우리 회중 형제 말로는 회중내의 형제 한테 사기를 당해서 실족했다고 하더라구요
조직자체에 대한 탈관념은 못하고 그냥 인간 장로들에 대한 실망으로 무활이 된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