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의 여백이 주는 교훈
울창한 숲 한가운데 서서 고개를 젖히고 위를 올려다보면 조금 이상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나뭇가지와 잎이 하늘을 빈틈없이 덮고 있는 것 같은데, 자세히 보면 그 사이사이로 가느다란 틈이 나 있습니다. 우연히 생긴 틈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정연합니다. 누군가 자를 대고 그어 놓은 것처럼, 나무와 나무의 우듬지(꼭대기 줄기)가 서로 닿기 직전에 나란히 멈춰 서 있습니다.
이것을 ‘수관기피(樹冠忌避)현상’이라고 부릅니다. 영어로는 ‘크라운 샤이니스’(crown shyness), 나무의 꼭대기가 겹치지 않고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서로 수줍어한다는 뜻입니다. 그 표현이 재미있습니다. 인도네시아나 말레이시아의 열대림에서 자주 보고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제주의 곶자왈 숲에서도 관찰됩니다. 그러나 정작 눈여겨볼 것은 그 틈의 모양이 아니라, 그 틈이 하는 일입니다.
학자들은 1920년대부터 이 현상을 연구해 왔지만,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는 아직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몇 가지 설이 있습니다. 바람이 불면 이웃한 가지 끝끼리 부딪혀 상처가 나기 때문에 그쪽 방향으로는 더 자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 잎에 있는 광수용체가 옆 나무의 그늘을 미리 감지하고 성장을 멈춘다는 설명도 있습니다. 잎을 갉아먹는 애벌레가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건너가지 못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는 연구도 있습니다. 수종에 따라 서로 다른 기작이 작동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원인은 아직 논쟁 중이지만 눈에 보이는 사실 하나는 분명합니다. 나무는 더 뻗을 수 있는데도 멈춥니다. 햇빛을 조금이라도 더 받으려면 이웃의 머리 위로 가지를 밀어 넣는 편이 유리할 텐데,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자기 몫의 하늘을 다 쓰지 않고 남겨 둡니다. 그리고 그 남겨 둔 자리가 무엇을 하는지는 숲 바닥에 서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위에서 갈라진 그 가느다란 틈을 따라 햇빛이 아래까지 내려옵니다. 그 빛으로 발밑의 이끼가 살고, 언젠가 큰 나무가 될 어린나무가 자랍니다.
만일 수관이 서로 빈틈없이 맞물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위쪽의 큰 나무들은 당분간 잘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아래는 캄캄해집니다. 어린것들이 자라지 못하고, 그 숲은 지금 서 있는 나무들이 다 늙어 쓰러지는 날 함께 끝납니다. 사실 숲을 이어 가는 힘은 위에서 얼마나 무성하게 덮느냐가 아니라, 아래로 얼마나 내려보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사람 사이도 그렇습니다. 빈틈없이 채워진 관계는 촘촘해서 좋아 보이지만, 그 아래에서는 아무것도 자라지 못합니다. 모든 결정을 대신해 주는 부모 밑에서 아이는 스스로 결정해 볼 기회를 얻지 못합니다. 모든 자리를 자기가 채우는 지도자 아래에서는 다음 사람이 서지 못합니다.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지나치게 부지런해서 남겨 두어야 할 자리까지 덮어 버리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런 일에 대한 원칙을 아예 법으로 정해 놓았습니다. 레위기는 곡식을 벨 때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떨어진 이삭도 도로 줍지 말라고 명합니다. 포도원도 마찬가지여서, 열매를 남김없이 따지 말고 떨어진 것은 그대로 두라고 했습니다. 가난한 사람과 나그네를 위해서였습니다. 효율만 따지면 이해하기 어려운 규정입니다. 내 땅에서 내 손으로 지은 것을 왜 남겨야 하는지, 남긴 만큼은 그대로 손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손해를 명령하셨습니다.
훗날 모압 여인 룻이 굶주린 시어머니를 봉양하려고 들어간 곳이 바로 그 남겨진 자리였습니다. 보아스의 밭 모퉁이, 추수하던 일꾼들이 흘리고 간 이삭. 그 여백에서 한 여인이 목숨을 이었고, 그 집안에서 다윗이 나왔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여백은 누군가 쓰고 남은 자리가 아닙니다. 처음부터 남겨 두기로 한 자리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는 언제나 나 아닌 누군가의 몫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땅에도 여백을 주라고 하셨습니다. 일곱째 해에는 밭에 씨를 뿌리지 말고 땅을 쉬게 하라는 안식년의 규정입니다. 사람도 이레마다 하루를 비워 두어야 했습니다. 사람은 여섯째 날에 지음받았습니다. 그러니 사람이 온전하게 맞이한 첫 번째 하루는 일하는 날이 아니라 쉬는 날이었습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이루고 나서 쉼을 얻은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이루지 않은 채로 쉼을 먼저 선물처럼 받았습니다.
예수께서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사역을 마치고 돌아와 보고할 때, 오가는 사람이 너무 많아 음식 먹을 겨를조차 없던 그때에 예수께서는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가서 잠깐 쉬라고 하셨습니다. 할 일이 없어서가 아니었습니다. 할 일이 산더미인데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안식은 일을 다 끝낸 다음에 오지 않습니다. 일이 남아 있는 채로 옵니다. 교회를 개척한 이후 저에게 쉼은 부담이었습니다. ‘쉬면 게으르다’ 생각했습니다. 잠시의 빈틈도 아까웠습니다. 그러다 무너졌습니다. 이제는 쉼이 제게 큰 위안입니다. 일을 다 마치지 못한 채로 잠깐 멈춰도 되는 모범이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는 여백이나 빈틈을 잘 견디지 못합니다. 일정표에 빈 시간이 보이면 무언가를 밀어 넣어야 마음이 놓입니다. 대화 중에 잠시 말이 끊기면 서둘러 아무 말이나 꺼냅니다. 자녀가 방에서 가만히 앉아 있으면 시간을 낭비한다고 느낍니다. 교회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빈 시간이 있으면 프로그램으로 채우고, 조용한 순서가 있으면 무엇이라도 넣어 메웁니다. 부지런한 것과 조급한 것은 겉으로 잘 구분되지 않습니다. 저 역시 오랫동안 그 둘을 혼동했습니다.
여백을 낭비로 여기는 마음 밑에는 대개 같은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내가 채우지 않으면 아무것도 채워지지 않으리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밭 모퉁이를 남겨 두라고 하신 분은 그 모퉁이를 통해 한 사람의 생계를 이으셨고, 일곱째 해에 씨를 뿌리지 말라고 하신 분은 여섯째 해의 소출로 그 해를 채우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여백은 하나님이 일하실 자리를 비워 두는 일이기도 합니다.
숲에 난 그 가느다란 틈은 나무의 우연한 실수가 아닙니다. 더 뻗지 못해 생긴 자리도 아닙니다. 나무가 여기까지만 하겠다고 멈춰 선 자리입니다. 그리고 빛은 언제나 그 틈을 통해 내려옵니다. 그 빛이 있기에 숲이 지속될 수 있습니다. 교회도 사람도 그러한 듯합니다.
고훈 목사
첫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