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대와 박승희의 이름은 늘 함께 불리어진다. 남매지간도 아니고 출신학교나 살았던 곳이 같았던 것도 아니다. 그러나 박승희는 강경대를 살리면서 죽어갔다.
1991년 5월 17일 날밤을 새워가며 5·18진상규명과 故강경대 학생 살인을 규탄하는 시위를 전개하였다. 나는 도청 주변과 불로동 다리를 오가면서 시위를 계속하고 있었다. 뿌연 동이 터오르는 새벽 4시에 강경대 장례 행렬을 마중 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대열을 끌고 운암동 고속도로 톨게이트로 나갔다.
첫 출근 시내버스에 무임승차로 운암동에 도착한 우리들의 맨 앞에는 내가 늘 자랑스러워 하는 새날청년회의 푸른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새날청년회는 항상 우리의 희망이었다. 깃발을 따라 도착한 운암동은 드문드문 지나가는 차 외에 인적이 드문 상태였다. 날을 샌 새날 깃발은 지치고 졸립고 배고프다 못해 도로가에 그냥 누워지내고 있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르자 사람들의 왕래가 시작되면서 고속도로 입구는 어느 사이에 경찰의 저지선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후 강경대 학생의 운구행렬이 경찰의 저지선까지 들어와 있다는 소식이 전해져 왔다.
사람들은 강경대 학생의 운구가 광주로 들어와 금남로에서 노제가 치루어지기를 간절히 비는 마음에 한 사람 두 사람 몰려들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모여들 때쯤 이미 날을 샌 새날청년회 회원들과 대학생들의 대열은 강경대 학생의 운구를 광주에서 맞아들여야 한다는 일념으로 경찰 저지선을 뚫기 위한 싸움을 시작하였다. 완강했다. 경찰도 우리도 한치의 물러섬이 없었다. 당시 주변에는 언덕 위에 광주 문예예술회관을 짓는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시위에 필요한 합판이며 각목은 많았다. 시위대열은 합판을 양옆에 들고 최루탄을 쏘는 경찰을 향해 안간힘을 쓰며 다가섰으나 경찰의 저지선을 뚫지는 못했다. 무박2일 동안의 밀고 밀리는 지난한 싸움이 계속되었다.
지친 시위대는 오전 10시가 되어서 도로변에 누워 휴식을 취하거나 쓰러져서 잠이 들었다. 그리나 얼마 후 다시 전투는 시작되었다. 계속된 전투는 광주시민이 5·18 민중항쟁때도 그랬듯이 거리 솥 단지를 걸고 주먹밥과 김밥을 말게 하였다. 이미 단순한 시위를 넘어선 5·18 대동단결의 장으로 전화되고 있었다.
당시 나는 강경대 학생 장례위원회와 故강경대 열사 폭력살인 규탄과 박승희 학생분신 광주·전남 대책회의의 연락자이자 조정자로서의 역할을 맡고 있었다. 당시 상황은 강경대 학생 장례 대책위원회가 서울에서 이미 1박2일 동안 장례를 치르지 못한 체 노제싸움을 전개해오던 터라 광주에서마저 날을 지새면 큰일이다 싶었다. 그러다 보니 장례위원장을 맡으셨던 故문익환 목사님마저 그대로 고속도로를 통해 망월동 장지로 가자고 하셨다. 나는 대책위원들이 타고 있는 버스에 올라 '여러분! 여기서 물러나면 안됩니다. 광주시민들은 반드시 도청노제를 성사시킬 것입니다. 피곤하고 지친 마음은 알겠으나 조금만 투쟁하면서 길을 찾아보십시다' 는 말을 하였다.
광주시민투쟁지도부가 있는 운암동 입구 주유소에 다다르니 대책회의 관계자가 다가오더니 박승희 학생이 끝내 숨을 거두었다는 말을 전해주었다. 그때가 12시 34분이었다. 우리는 박승희 학생이 고통을 참아내고 기어이 회생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던 터라 그 소식은 실로 큰 충격이었다. 강경대 학생은 싸늘한 시신이 되었음에도 광주에 들어오지도 못하고 있는 상황인데 박승희 학생마저 우리 곁을 떠나게 되다니!
나는 큰길을 달리며 외쳤다. "박승희가 죽었답니다. 박승희가 조금 전에 전대병원에서 숨을 거두었어요!" 라고.... 순간 그 말을 들은 시민과 학생들의 눈에서 나는 번쩍하는 강렬한 빛을 보았다.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일제히 쏟아지는 돌과 최루탄을 맞아가며 경찰이 지키는 산 위 언덕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누구도 저지하지 못했다. 부상자가 속출함에도...... 드디어 산 위에서 저지하던 경찰은 투항하고 도망가고 길거리를 막고 있던 페퍼포그는 불에 타고...... 모두가 환호성을 질렀다. 그 광경은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경찰이 물러가고 부상당한 시위대는 길거리에 누워 치료를 받고, 시민들은 모두를 위해 밥을 하고 길거리에는 아무렇게나 누워 휴식을 취하는 시위대열로 꽉 차고, 불탄 페퍼포그와 경찰시위 진압용 옷들과 물품들은 소각되고 있었다.
후퇴한 체 여전히 길을 막고 있는 경찰과 한차례의 전투에서 승리한 시위대열은 다시금 소강상태로 접어들고 있었다. 광주시민들은 더욱 많이 몰려들었고 어떻게 해서라도 도청 앞 노제를 성사시켜 광주의 자존심을 지켜내자는 결의는 높았으나 난마처럼 얽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한참의 소강 국면이 게속되는가 싶더니 갑자기 고속도로를 차단한 체 서있던 경찰이 뒤를 돌아 막 달리며 최루탄을 쏘아대기 시작하였다. 강경대 학생의 운구차가 고속도로 옆길을 빠져나온 것이다.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돌발적인 사건이었다. 고속도로 길옆의 깊은 도랑을 축대에서 내린 돌로 메우고 저수지 옆으로 해서 광주로 들어오고 있었다. 모두가 달렸다. 운구차를 뒤따라 운암동에서 도청 앞까지 달렸다. 이틀 동안의 피곤함도 잊고 달리고 또 달렸다. 나는 하루종일 먹지도 못한 체 시위대열에 합류하다보니 너무 허기가 밀려왔다. 금남로 사거리에 있는 추어탕집 일명 뽐뿌집 문을 열고 들어섰다. "아저씨 저는 조금 있다 강경대 학생 노제의 사회를 보게될 사람인데 밥 좀 주십시오" 한그릇의 밥으로 허기를 모면하고 노제를 마치고 망월동 묘지로 강경대 학생을 떠나 보냈다. 그리고 급히 박승희가 잠들어 있는 전남대 병원으로 달렸다.
도착하여 나는 대책회의 선전국장으로 소식지를 만들기 위하여 운암대첩을 급히 쓰고 있었다. '박승희는 죽어가며 강경대를 살려냈다'라고.
그때 경황없는 와중에 시민 박창수씨가 故강경대 학생을 망월동으로 보낸 후 시위도중 경찰에 맞아 중태라는 소식이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