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낌(受, 웨다나)에 대해 배우고 생각하며
동영상 법문 등을 들으며 느낌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그것을 저는 이렇게 대화 형식으로 한번 조금 정리해 보았습니다.
어느 날 동호회 회장님이 말했습니다. : 여러분, 오늘은 느낌(受, 웨다나)에 대해 한 말씀씩 나누어 주십시오.
회원1이 말했습니다. : 왜 느낌이라고 합니까?: 경에 나오듯이, ‘느낀다고 해서(느끼기 때문에) 느낌이라 한다 합니다. 즐거움도 느끼고, 괴로움도 느끼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것도 느낀다’고 합니다. (또는 동영상 법문 등에서는 ‘대상의 여러 가지 맛을 느낀다고 해서 느낌이라 한다’고 합니다. (좋은 맛, 싫은 맛, 무덤덤한 맛을 느낀다고 해서) 경에서는 또 느낌을 여섯 가지 느낌의 무리로도 설하십니다. ‘눈의 감각접촉에서 생긴 느낌, 귀의 감각접촉에서 생긴 느낌, 코의 감각접촉에서 생긴 느낌, 혀의 감각접촉에서 생긴 느낌, 몸의 감각접촉에서 생긴 느낌, 마노의 감각접촉에서 생긴 느낌’입니다. 눈•귀•코•혀•몸 중에서는 일반적으로 : 눈의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하여 생긴 느낌보다는 귀의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하여 생긴 느낌이 더 강하고, 귀보다는 코의, 코보다는 혀의, 혀보다는 몸의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하여 생긴 느낌이 더 강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중병에 걸려 극심한 고통을 겪을 때에는 그 괴로움을 이루 말할 수가 없겠습니다.
회원2가 말했습니다. : 동영상 법문을 들으니, 느낌의 특징은 ‘대상의 맛을 느낀다’는 것이라네요. 그런데 여기서 “대상과 대상의 맛이 서로 다른 두 종류가 아니다. 대상이 바로 맛이다.”고 하네요. 그리고 여기서 ‘느낀다’는 말은: 대상과 마음이 만났을 때 각각의 대상에 따라서 몸과 마음에는 : 좋은 것이거나 나쁜 것이거나 마음에 들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거나 하는, 이런 성품이 생겨난다는 말이라고 합니다. 즉, 마음이 만나게 된 대상이: 좋은 대상도 있고, 좋지 않은 대상도 있고, 나쁘지도 좋지도 않은 무덤덤한 대상도 있는데, 이렇게 대상에 따라서 : 좋은 대상(마음에 드는 대상)을 만나면 즐거운 느낌이 일어나고, / 나쁜 대상, 좋지 않은 대상(마음에 들지 않는 대상)을 만나면 괴로운 느낌이 일어나고, /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대상(무덤덤한 대상)을 만나면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이렇게 마음에 들고 좋아하는 것으로 치면 대상에는 3종류가 있어서 느낌도 3가지로 나눈다고 하네요. 그런데 이 느낌은 물질적인 법이 아니고 정신적인 법이라고 분명히 알아야 한다고 합니다. 즉, 이 느낌은 뼈•살•힘줄 같은 것도 아니고 / 땅의 요소 같은 것도 아니고, ...바로 ‘촉을 조건으로 하여 일어난 다른 성품의 법’이라고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고 합니다.
회원3이 말했습니다. : 경에서는 느낌을 세 가지로 설하시는 경우가 많고, 여섯 가지로 설하시는 경우도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경에서 느낌을 근(根, 인드리야)으로 구분할 때에는 5가지로 나눈다고 합니다. 즉, 즐거움도 몸에서 느끼는 것과 마음에서 느끼는 것(수카와 소마낫사)으로 나누고 / 괴로움도 몸에서 느끼는 것과 마음에서 느끼는 것(둑카와 도마낫사)으로 나누고 /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것(우뻭카)은 그대로 두어, 이렇게 느낌을 5가지 근(根)으로 설하신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여기에 대해 동영상 법문을 들으니: ‘즐거운 느낌을 육체적 즐거움과 정신적 즐거움으로 구분하자면 이렇다고 합니다. 몹시 추운 날에 따뜻한 난로를 쬡니다. 그러면 ’‘몸의 감성물질’에 ‘불의 요소’가 닿아 ‘몸의 알음알이’가 일어나고, ’이 셋의 화합인 감각접촉‘도 동시에 일어나고, ‘이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하여 따뜻함이라는 즐거운 느낌(육체적 즐거움)’이 일어납니다. 마음의 문에서도 감각접촉이 일어나 마음에 들어하고 행복해하고 좋아하는 즐거운 느낌(정신적 즐거움, 기쁨)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회원4가 말했습니다. : 저는 동영상 법문에서 들은 근(根)에 따른 분류에서 괴로운 느낌에 대해 말해보겠습니다. 제가 들으니, ‘몸에서 느끼는 괴로움(둑카)과 마음에서 느끼는 괴로움(도마낫사)이 일어나는 모습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가 잘못 필기했을 수도 있으니 널리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좋지 않은 몸의 대상인 감촉(폿탑바)이 - 겨울에 매서운 바람, 여름에 뙤약볕, 겨울에 쇠봍이 따위가 몸의 감성물질에 닿았을 때(조건이 되었을 때) 身識이 일어나는 데, 이때 동시에 삼사화합인 촉(觸, 팟사)이 발생하고 이것을 조건으로 몸에서는 따가움, 차가움 등의 고통스러운 느낌이 일어납니다. : 한편, 마음의 문에서도 촉(팟사)이 발생하여 (몸에서 아픔, 저림, 차가움, 가려움 등의 고통스러운 느낌이 생겨나는 것처럼) 마음적으로도 편하지 않고 고통스럽고 좋지 않이 하는 성품(정신적 괴로움, 불만족)이 생겨나게 됩니다.’
한편, 몸 내부에서는 다음과 같다고 합니다. ‘몹시 뜨거운 것이 몸의 특정부위(예를 들어 팔)의 감성물질에 닿았을 때(조건이 되었을 때) : 몸 내부의 불의 요소가 무너집니다. 불의 요소가 무너지면 그 무너진 불의 요소가 바람의 요소를 무너지게 합니다. 이런 무너진 불의 요소, 바람의 요소 때문에 내부에서 (다른? 새로운?) 대상물질인 감촉(폿탑바)이 생겨납니다. 이 무너진 요소들이 또 다른 四大 요소들을 무너지게 합니다. 이렇게 무너진 요소들이(무너진 사대 요소들 때문에 생겨난 새로운(?) 대상물질인 감촉(폿탑바)가) 몸의 감성물질과 닿아서(조건이 되어) 몸(여기서는 팔)이 아프게 됩니다. 팔이 아프고 쓰리고 하는 고통을 느낍니다(육체적 괴로움, 둑카). 그리고 마음에서도 좋지 않고 싫어하고 괴로운, 그런 느낌이 생겨납니다(도마낫사, 정신적 괴로움, 불만족)’.
회원 5가 말했습니다. : 보통 우리는 마음에 들고 좋아하는 대상을 만나면 즐거운 느낌이 일어납니다. 아기가 엄마 오는 것을 보고서 / 학생이 선생님의 칭찬하시는 말을 듣고 / 등산객이 향긋한 꽃 냄새를 맡고 / 배고픈 사람이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 더운 날 시원한 물에 세수하면서 /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 활약하는 상상을 하면서 : 대체로 사람들은 즐거운 느낌을 느낍니다. 한편, 다음과 같은 상황에서는 대체로 괴로운 느낌을 느낍니다. 싸우는 모습을 보았을 때 / 날카로운 쇳소리를 들었을 때 / 고약한 냄새를 맡았을 때 / 김치가 너무 짜서 먹을 수가 없을 때 / 무더운 여름에 뙤약볕 아래를 걸을 때 / 어제 모욕당한 일이 생각날 때에는 : 대체로 괴로운 느낌을 느낍니다.
사실 우리는 ‘볼 때마다’ ‘들을 때마다’ ‘냄새 맡을 때마다’ ‘음식을 맛보며 먹을 때마다’ ‘몸에 감촉이 닿을 때마다’ ‘마음에서 법을 인식할 때마다’ 느낌이 발생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보통 일반인은 자신에게 중요할 때에만 느낌을 알아차리고, 그렇지 않은 대부분의 느낌은 일어나도 일어난 줄도 모른 채로 지나쳐버린다고 합니다.
회원 6이 말했습니다. : 저는 느낌을 이렇게 접근해보겠습니다. 사람들이 심심할 때에는 주로 무엇을 할까요? 책을 보거나 친구를 만나거나 텔레비전을 보거나 음악을 듣거나 물건을 사거나 산책을 하거나 잠을 자거나 어떤 오락거리를 합니다. 왜 이렇게 할까요? 아마도 그런 행위들을 하면 즐거움이 생기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 즐거움이 바로 자신이 원하고 바라고 마음에 들어하고 좋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일어난다.”는 말씀이 바로 여기에도 적용될 것 같습니다. 참으로 우리들 대부분(?)은 행복을 위해서 노력하는데, 그 행복은 바로 즐거운 느낌에 해당하는 것 같습니다. 緣起에서 ••• ‘애 – 취 – 유’ - ••• 로 진행하게 하는 앞 단계가 바로 ‘수(受, 느낌)’라는 것을 보면, 정말로 우리는 일생의 많은 부분을 느낌을 위해(구하면서)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경에서는 느낌을 물거품(?)에 비유하셨다고 하는데, 저는 언제쯤에야 이 물거품과 같은 느낌을, 손에 넣었다고 생각하면 곧 사라져버리고 마는 이 느낌을 그만 쫓아가고 단념할 수 있을까요? 정말로 정신차리고 공부해야 하겠습니다.
회원7이 말했습니다. : 동영상 법문에서 이런 취지로 말씀을 들었습니다. 촉(觸, 팟사)을 조건으로 즐겁거나 괴롭거나 괴롧지도 즐겁지도 않은 성품의 법이 발생하는데, 보통 사람들은 그렇게 발생한 느낌을 내가 느낀다고 여긴다 합니다. 어릴 때의 그 '나'가 젊었을 때의 그 '나'가 노년에 접어드는 이 '나'가 동일한 '나'로서 과거의 느낌이나 미래의 느낌이나 현재의 느낌을 느끼고 있다고 여긴다 합니다. 그래서 조건에 따라 일어난 성품의 법일 뿐인 이 느낌을 ‘나의 것’이라고, ‘나’라고, ‘나의 자아’라고 여기면서 살아간다고 합니다. 그래서 괴로움을 겪습니다. ...
그렇지만 많이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눈, 귀, 코, 혀, 몸, 마노’를 잘 알고, 그 대상인 ‘형색, 소리, 냄새, 맛, 감촉, 법’도 잘 알고, ‘눈의 알음알이, ... 마노의 알음알이’가 일어나는 것도 잘 알고, 이 셋의 화합인 ‘촉(觸, 팟사)’도 잘 알고, 이 촉을 조건으로 하여 일어나는 ‘느낌’도 잘 알아서, 이 느낌을 ‘나의 것이 아니다.’ ‘나가 아니다’,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바르게 관찰한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많이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여기 몸에 퍼져 있는 몸의 감성 물질과 몸에 닿는 땅의 요소와 이 둘을 조건으로 하여 일어나는 몸의 알음알이와 이 셋의 화합인 몸의 감각접촉과 이 몸의 감각접촉에서 생긴 느낌을 각각의 성품대로 구분해서 관찰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괴로움에서 (점점) 벗어나게 될 것 같습니다.’
(참고: 여기서 저는 '어떤 성품의 법이 생겨난다.'고 할 때, ‘성품’의 낱말 뜻을 : 여기에 어떤 물질이 있어서, ‘이 물질은 탄소, 수소, 산소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할 때, 그런 탄소, 수소, 산소 등이 가진 고유한 성질에 대비시켜서 이해했습니다. 만약 그 물질에 탄소가 없어지면 그 물질에는 탄소의 고유한 성질은 사라지듯이, 우리에게 생겨나는 法들도 생겨나면 그 법의 고유한 특징을 띠고 그 법이 사라지면 그 법의 고유한 특징을 잃어버린다고, 이런 방식으로 ‘성품’이라는 용어를 이해하려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