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남해해역 패류군집에서 나타나는 시간평균화 현상과 최종 빙하기 이후 해수면 변동
........................................................................................................................................
» 공중에서 바라본 풍납토성 일대. 점선 안이 사적 지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지난 1997년 풍납동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발견된 백제의 유물은 이제까지 좀처럼 발굴 할 수 없었던 백제초기의 유물이었다. 시굴 조사한 결과 단 한 곳도 예외 없이 모두 백제 유물층임이 확인됐다. 그 중에 기와의 발견이 가장 학계의 관심을 끌었는데 그 문양으로 보아 불교가 들어오기 전의 백제초기의 기와였기 때문이다. 당시 기와는 오직 왕궁과 관청, 절에서만 사용되는 것이었다. 이는 풍납토성이 한성백제의 중심성이었음을 말해준다.
발견된 유물 중 당시로서는 상당히 고급스러운 토기가 발견되었는데 그 유물에는 대부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백제에는 대부가 없다. 그것은 고구려나 신라, 중국에서 쓰던 관직의 명칭이었다. 이 백제토기편의 발견은 기록에서 누락된 백제의 실체에 한발 더 다가가는 단서를 제공해 주었다.
풍납토성은 석성이 아니라 토성으로 지어졌는데 그 의문에 대한 단서는 중국 하북성에는 기원전 3세기 무렵 지어진 연나라 토성을 근거로 중국토성의 영향을 받았다는 논리를 펴는 학자들이 있는데, 온조백제의 남하이후 한반도 남부지역은 마한인들의 쌓은 많은 토성들이 있었고, 그러한 토성에서 많은 마한인들의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기에 모순된 논리이고 문명발전의 흐름상 중국토성도 한반도에서 북으로 이동한 고대 마한인들에 의해 축성된 성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역사적 유적으로는 중국 은나라의 수도 유적이다. 9.9m이상의 성벽을 가진 9km의 유적은 1만 여명이 일년에 330일씩 18년 이상을 작업해 축조한 것이라고 한다. 이에 비추어 봤을때 풍납토성도 그만한 인력을 동원하여 장기간에 걸쳐 축조할 수 있는 국가가 존재한 것임을 반증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고대 중국문헌에 따르면 은나라 왕들의 조상들이 모두 한반도에서 온 사람들이다.
풍납토성 백제우물서 토기 215 점 나와
서울 송파구 풍납 토성 경당 지구의 한성 백제 시대 우물 한 곳에서만 무려 215 점의 완형 토기가 출토돼 화제다. 한신대 박물관에 따르면, 이 우물은 백제 시대 지표면을 기준으로 밑바닥까지 깊이가 4 m다.
위에서 내려다 본 평면은 위쪽은 타원형에 가까운 네모 반듯한 모양, 그 아래쪽은 각 변의 길이가 1.2 m인 정사각형이다. 이 안에서 토기는 차곡차곡 빼곡히 4 겹으로 포개서 쌓인 모습으로 발견됐다. 항아리(호)와 병이 대부분인 이들 토기가 만들어진 때는 한성 백제 말기인 5세기 초반으로 보인다. |
▲ 풍납토성은 전체 길이가 지금은 홍수 등으로 유실되어 볼 수 없는 서벽을 포함해 자그마치 3.5km(현재 남아 있는 것은 2.2km 정도)에 이르는 총 면적 26만여 평의 국내 최대 규모이자, 아시아 최대 규모의 판축토성이다.
마한 사람들은 주로 흙을 잘 이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고고학적 증거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예컨대,경기도 안성에서 대규모 토성과 건물터가 발견됐는데, 유적의 핵심은 높이 4, 5m, 폭 80m의 건물터로 길이가 150m에 이르는 초대형 규모로 볼 때 왕성으로 추정된다는 의미다
인공위성으로 본 대한민국 서울의 한강변 풍납토성
▲ 선문대 이형구 교수 등에 의해 풍납토성의 중요성이 부각된 이후 국립문화재연구소와 한신대 박물관 등에 의해 송파구 풍납동 일대의 경당연립주택 신축공사부지와 풍납현대연합주택조합부지, 남양연립 재건축조합부지, 삼화연립 재건축사업부지, 외환은행직장조합아파트 신축부지, 미래마을 재건축조합부지 등에서 발굴 조사가 진행되었다. | ||||||||||
ⓒ 국립문화재연구소
|
[풍납토성]거대한 토성의 비밀은?
풍납토성과 같은 규모는 일찍이 중국 본토의 전국시대 각 수도의 도성급에 비견되는
상당한 규모의 토성이요. 여기서 일일이 다 열거할 수는 없거니와,
중국 초기 상고시대 중국 정주에서 발굴된 은나라의 수도 유적은 9.9m 이상의 토성 성벽으로
둘러쌓인 2평방 마일 면적의 거대한 구역을 가졌다고 하오. 그 성 하나를 축조하는데 1만명이
일년의 330일을 작업하여 18년 이상이 걸렸다고 하니 토성을 쌓는데 얼마나 많은 노동력과
시간이 소요되는지 알 수가 있겠소이다. (브라이언 페이건. 이희준 옮김, 2000. 307p~308p)
혹자는 풍납토성의 최대높이가 9m에 이르고 폭이 40m에 이르는 등 그 규모를 보면
通典의 守拒法(수거법)에 의거 하루에 한사람이 2尺(척)을 축조하는 것으로 계산하였을 때
축성에 동원된 연인원만 총 446만명이 소요된다 하더이다.
전통적인 판축식 토성이니 이 인원에 플러스 알파가 되겠소.
이 정도의 거대한 토목공사를 할만한 역량이 초기 한성백제에 있었느냐.
현재까지 전해지는 기록으로는 상당히 회의적이오.
백제는 초기에 마한등 부족국가연맹들을 아우르면서 위로는 낙랑과 말갈의 침입에 맞서야 했소.
정권이 안정되면서는 신라와 고구려는 물론이고 낙랑, 대방 등 중국세려과의 영토전쟁에
여념이 없었고 그 와중에 백제왕들이 전사하기도 하고 수도를 천도하는 등 위기가 잇따랐소.
수백만명을 동원해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일만한 여유가 전혀 없었다고 보오.
허나, 전해지는 기록상으로는 풍납토성의 축조가 의심되는 기록이 딱 하나 있긴 하오.
바로 삼국사기의 백제본기 개로왕때의 기사요.
"개로왕때 만년(왕 21년, 475)에 이르러 나라 사람들을 모두 징발하여 흙을 쪄서 성을 쌓고(烝土築城)
곧, 그 안에 궁실과 樓閣과 臺榭를 건축하였는데 장엄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또한 큰 돌을 마을과 하천에서 가져다가 곽을 만들어 부왕의 해골을 묻고 강변을 따라 목책을
쌓는데 사성의 동쪽으로부터 崇山(숭산)의 북쪽에 이르렀다. 이렇듯 거대한 역사를 일으키어
國庫가 마르고 백성들이 곤궁에 빠져 형세가 급박함을 累卵(누란)과 같았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고구려의 침공을 받아 국왕은 죽고 왕자 문주왕이 웅진으로 도읍을 옮기게 되었던 것이다."
백제본기를 총틀어 개로왕때의 이 기사가 가장 큰 토목공사요. 엄청난 노동력이 소요되는 토성을
쌓는 공사임에도 흙을 쪄서 성을 쌓고라는 烝土築城(증토축성)법을 시도했다는 점에 더욱
유의해야 할 필요가 있소. 이러한 증토축성법은 개로왕 이후에나 사서에 등장한다는 것은 의미있다고 보오.
흙을 찌는 이유는 벽돌처럼 딱딱 규격에 맞춰 대량 생산할 수 있고 공기가 단축되며
굳은 후에는 더 견고해지는 장점이 있소이다. 풍납토성의 성벽을 절개해 보면 판축을 시도했는데
토사에 자갈 한점 없이 채로 거른 듯 고운 흙들로 만들어져 있소. 이것은 곧 흙을 쪘다는 의미요.
개로왕때 도림의 견해를 좇아 공기를 단축시키면서 엄청난 규모의 대역사를 벌일 수 있었던 가장
큰 비결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증토법이라 할 수 있겠소이다.
그리고 두번째가 비결이 기원전 3~2세기에 토착민들에 의해 만들어진 거대한 환호(環壕)요.
환호(環壕)라는 것은 원시적인 해자같은 것인데, 취락지구를 빙둘러 만든 거대한 웅덩이나
연못이라 생각하면 되겠소이다. 물론 웅덩이를 물로 채우지 않고 장애물로 채우는 경우도 있소.
일반적으로 전통적인 판축식 토성을 쌓는게 가장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부분이 기초 기반의
굴착이라 할 수 있겠소. 그러나 이미 이러한 환호(環壕)가 시설되어 있는 경우 어느정도 기본적인
기초가 되어있는 상태로..
예컨대 높이가 2m짜리 환호(環壕)가 있다면 이 파낸 흙으로 토루를 쌓아 전체 높이가 4m에 이르는 토성을 만들 수 있는 여건이 형성되오이다. 수학을 배운 햏들이라면 잘 아실것이오만 S자를 눕힌 모양의 3차곡선을 생각하시면 쉽게 연상이 될 듯도 하오. 즉, 풍납토성의 평균높이 9M중 4M는 이미 만들어져 있는 거나 마찬가지인 상태요.
여기다가 환호(環壕)의 폭이 1.5m짜리가 5m간격으로 3중으로 설치되었다면 (1.5M × 3개) + 10M 해서 총 40M의 폭 중 14.5M의 폭은 그냥 날로 먹는다고 보면 되오.
이상과 같은 고고학적 유물 조사 결과와 문헌 기록에 비춰볼 때 풍납토성을 축성한 시기는
개로왕 21년(475)년이라 생각되오. 현재 발굴되는 상당수의 유물들은 이 시기의 것이고
기원전후의 초기 유물들은 환호(環壕)취락이 형성되었던 백제 이전의 유물들이 짬봉되어
나오는 것이므로 풍납토성=백제=기원전 2세기 건국 내지 원삼국설 폐기 같은 성급한 결론에
도달하지 않기를 바라오.
<세줄 요약>
1. 풍납토성의 본격적인 토목공사는 개로왕 21년(475년)에 이루어졌다.
2. 축성이 효율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기원전에 이미 형성된 환호(環壕)를 증축했기 때문이며
3. 도림의 견해에 따라 최초로 증토법을 실시했기 때문이다.
http://korim.egloos.com/122555[출처]
▲ 상하수도관이나 배수관 등에 쓰였을 것으로 보이는 토관(土管)으로, 레고(LEGO) 블록과 비슷한 형식이다. 즉 양쪽이 '凸'과 '凹' 모양이어서 서로의 홈에 끼울 수 있게 되어 있다. 길이는 16~17cm이며 구멍의 직경 2cm 내외로 규격화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풍납토성 내에 로마와 같은 규격화된 상·하수 시설이 있었을 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해본다. |
ⓒ 권기봉 |
▲ <풍납토성, 잃어버린 '왕도(王都)'를 찾아서> 특별전에 전시되어 있는 토기들로, 수많은 토기들이 안정적이고 연속적인 층위를 가진 문화층에서 출토되어 토기 제작기술의 특징과 변천상을 밝히는 데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특히 발굴된 토기들로 볼 때 풍납토성은 군사적 용도 못지 않게 주민들의 주거지 역할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
ⓒ 권기봉 |
첫댓글 전문을 프린트하여 대충 훑어보았는데요, 전문가가 아나라서 이해가 가는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네요. 일단 해수면이 상승하고 있다는 증거로 이 자료를 올리신 것 같은데 맞나요?
한가지 제가 위 논문을 보면서 느낀점은,,,,,,,,,,, 제가 조사하려고 하는 포구지명조사와 연계하여 참조할 연관성이 전혀 없습니다. 당 논문에서는 대륙붕에서 발견되는 패류군집 지역의 연도를 나름대로 분석, 비정하여 언제부터 언제까지는 물이 내려갔고 어느 시점에서는 물이 상승했다는 주장을 하는 것으로 보이는데요.
한반도는 물론 전세계 어느지역도 언제부터 언제까지가 반드시 빙하기였다라고 비정하기 어려운게 현재 학계의 솔직한 심정일 것입니다. 지각운동에 대한 가설이 주목을 받은 지도 40여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세차운동과 지각움직임의 상관관계도 모르면서 빙하기 어쩌고 하는 것은 그냥 아이들 가르치기 좋게 정리해서 잡지나 매체를 통해 떠드는 것 뿐입니다. 실제 많은 사학자, 고대생물학자, 기후학자들은 통념적인 기후변화 등에 대한 상식에 여전히 고개를 젓고 있습니다.
그것도 확실하지도 않은 연대측정법을 들이대면서 반드시 언제부터 언제까지 물이 내려갔다느니 올라갔다느니 하는 것은 말그대로 글쓴이의 주장일 뿐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모든 과학적인 정설을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과거 수천년전 혹은 몇백년전에 물이 올라가든 내려가든 제 조사와는 별개입니다.
제 관심은 인간이 면해 살고 있는 포구가 최고 500년 전부터 어떤 변화를 겪고 있는지 현재진행형의 조사일 뿐입니다.
과연 우리가 배운대로 사실과 일치하는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 검증하고 싶을 뿐입니다.
다시 한번 정리하면, 대륙붕 바닥에 산재하는 조개무더기를 조사하는 연구와 포구의 이름을 조사하는 연구는 그 연대기의 범위상 서로 약간의 참조는 할 수는 있습니다만, 아직은 아무런 관련성을 주장 할 수 없는 조사라는 것입니다. 해안선이 올라오든 내려오든 결국 인간이 포구에서 살아온 얘기와 합치하는 결론만이 진실로 남을 수 있을 것입니다.
큰 강의 하구나 그 연안 해변은...당연히 고지대들에서 꾸준히 밀려 내려온 토사로 메꾸어져...평야가 생성됩니다..이는 초등 교과서의 삼각주 평야 생성 원리입니다...그 삼각주 형성은 작은 규모는 몇십년...큰 홍수가 나면 1년 내에도 형성 됩니다...누천년의 세월동안 황하강 같은 엄청난 규모의 강 주변과 하구..당연히 토사로 매립이 되어...육지가 늘어났을 겁니다...그러나 세계 오대양의 평균 해수면 높이는...여러 과학자들 공히...마지막 빙하기 이훈...150m이상 상승함 것으로 나옵니다...그러니 여타 해안은...모두 물에 잠긴 것이니...그 이전엔... 현재의 황해는 대부분 평원 육지였단 겁니다.
빙하기 이후...고원 지대들의 빙하가 녹는때에 비례로 한반도 지각이 태평양 판을 타고 계속 상승했다해도...그 속도보다 해수면 상승속도가 훨 빨랐다는 증거같습니다...연안 대륙봉의 해수면 고도 연구가 중요한 것도...강 하구의 연안 해수면 측정은...쌓이는 토사로 인한 지형 변하로 평균치가 않 나와서일 겁니다.
큰 강의 하구와 그에 연접한 해안은...상류에서 폭우때마다 지속적으로 내려온 토사로...항상 자연 매립지형이 만들어지는 겁니다...강 하구들의 해안 평야지대 증가가 평균 해수면 상승 표본에서 빠지는 이유입니다...이에 자유로우려면...매립토양의 영향을 않 받는 연안 대륙봉들의 해수면 변화 지표가 표준이라 하겠습니다...현 한강도...강의 토사들을 퍼 건축용으로 쓰기 전가진...매립되어 비가 않 오면...실강만 흘렀던 강입니다...그 땅 속에...풍남토성,몽촌토성의 거대 유적지가 나옴은...한강 주변이 토사에 매립되 육지가 된 지역이란 반증입니다.
현재의 일산 신도시도...노태우가 일불러 폭파했다나..?...는 속설이 있을 정도로....하여간 그때에 뚝이 터지면서 강물과 토사가 쌓여...한 번에 반 매립지가 됐고...아주 쉽게 개발 보상이 이뤄지고...이후 정식 매립이 완성되며 형성된 신도시랍니다.
알겠습니다. 토사매립은 포구연구에 가장 주의해야 할 점인 것 같군요. 꼭 유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