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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평책(蕩平策)
조선 후기 영조와 정조대에 당쟁을 막기 위해 당파간의 정치세력에 균형을 꾀하려한 정책이다.
蕩 : 방탕할 탕(艹/12)
平 : 평평할 평(干/2)
策 : 꾀 책(竹/6)
탕평(蕩平)이란 '상서(尙書)'의 홍범구주(洪範九疇) 가운데 제5조인 '황극설(皇極說)'의 '無偏無黨 王道蕩蕩 無黨無偏 王道平平(무편무당 왕도탕탕 무당무편 왕도평평)'에서 나온 말로서, 본래는 인군(人君)의 정치가 편사(偏私)가 없고 아당(阿黨)이 없는 대공지정(大公至正)의 지경(皇極)에 이른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송대(宋代)의 주자(朱子) 또한 그의 붕당관(朋黨觀)을 피력한 '여유승상서(與留丞相書)'에서 붕당간 논쟁의 시비(是非)를 명변(明辨)함에 의한 조정의 탕평을 말하였다.
따라서 탕평이라는 말은 특정 시대에만 사용된 것이 아니라 인군정치의 지공무사(至公無私)를 강조하는 보편적인 의미로 쓰여왔다고 할 수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시대에 처음 사용되는 용어로 이것이 나오게 된 배경은 다음과 같다.
선조말 동서분당 이후부터 시작된 당쟁은 왜란이 수습되면서 더욱 어지럽게 전개되어 갔다. 파당간의 싸움에서 당론은 국가의 안위(安危)나 민생의 휴척(休戚)에 관계되는 정강(政綱)이나 정책이 아니었다.
이들 주장의 대부분은 왕실의 복상제(服喪制)와 같은 의례적인 문제 또는 세자책봉, 왕비책립과 같은 궁중의 변동을 계기로 삼아 다른 정파(政派)를 배제해 정권만 장악하려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따라서 대립하는 파당간의 싸움은 격렬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파당간의 싸움에서 성공하면 권세를 누리고 실패하면 찬축(竄逐; 귀양보냄)과 주륙(誅戮)이 뒤따르는 것을 알면서도 당쟁은 계속되었다.
군주전제(君主專制)가 확립된 왕조시대는 궁중(宮中)과 부중(府中)의 구별이 명확하지 않고 군주의 자의(恣意)가 정국의 변동에 결정적인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그리고 당인(黨人)은 이러한 면을 틈타 그 감정을 격동시킴으로써 정국의 변동을 가져오는 예가 적지 않았다. 그것은 당쟁의 폐습이 원인이기도 하지만 군주의 태도 역시 당쟁을 조성하는 데 큰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더욱이 조선 후기로 오면서 당파의 세력이 서로 강화되면서 일당의 전제(專制)로 진행되는 정국현상도 일어나 왕권을 약화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정국하에 '탕평'이라는 용어를 정치무대에 처음 제기한 사람은 1683년(숙종 9) 박세채(朴世采)다. 그는 1694년에 영의정으로 또다시 탕평을 제기하였다. 그는 격렬해져 가는 노론과 소론간의 당쟁을 조정하려는 목적에서 파당(派黨)의 타파를 주장하였다.
그는 파당타파에 대한 이념을 '황극설'의 탕평에서 구하고 실천 방법으로 동서분당 초기 이이(李珥)가 주장했던 시비(是非)의 조정과 인물의 등용방법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그가 곧 병사하자 당쟁조정을 위한 하나의 이념과 원칙으로 탕평을 처음 제기했다는 의미만 남겨놓았다.
그 뒤 소론의 재상 최석정(崔錫鼎)이 한 때 남인들을 조정에 등용시키려는 구실로 탕평을 표방했고, 또 숙종 자신도 비망기(備忘記)를 통해 여러 차례 탕평을 펼쳐보고자 하였다.
그러나 숙종은 구호에만 그쳤으며, 그나마 1714년(숙종 40) 가례원류시말(家禮源流始末)로 노론과 소론간의 당쟁이 극대화된 이후는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 때는 탕평하려는 의지는 있었으나 그것을 하나의 이념이나 정책으로 실천할 수 있는 정치적인 기반은 조성되지 못한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탕평이 다시 강조되고 그 이념을 하나의 정책으로까지 추진하는 정치집단이 형성되어서 탕평이 하나의 역사적인 용어로 확립된 것은 영조대였다.
영조는 당쟁의 폐해가 국가에 미치는 해악을 실감하였다. 그리고 세제책립과 대리청정(代理聽政)의 시비로 노론과 소론간의 분쟁이 격심해 신임사화라는 당화(黨禍)를 몰고 온 폐해를 직접 경험한 장본인이다. 따라서 탕평책은 이것을 반성하는 입장에서 나온 정치이념이요, 예방책이었다.
1724년 영조가 즉위한 때는 자신의 세제책립과 대리청정을 바라지 않던 소론의 영수 이광좌(李光佐)가 정권을 잡고 있었다. 영조는 즉위하자마자 바로 탕평책의 서곡인 당쟁의 폐해를 하교하였다.
이어 소론의 영수 김일경(金一鏡), 남인의 목호룡(睦虎龍) 등 신임옥사를 일으킨 자들을 숙청하였다. 그리고 1725년(영조 1) 을사처분(乙巳處分)으로 노론을 다시 조정에 불러 들였다.
그러나 영조 자신이 의도한 탕평정국(蕩平政局)의 바람과는 달리 노론의 강경파들이 소론을 공격하는 등 노론과 소론의 파쟁이 다시 고개를 들자 1727년에는 노론의 강경파들을 축출하였다.
곧 이어 1729년에는 기유처분(己酉處分)으로 노·소론내 온건론자들을 고르게 등용해 초기의 탕평책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이 때 인사정책으로 타당을 견제시키는 쌍거호대(雙擧互對)의 방식을 취하였다.
즉, 노론을 영의정에 앉히면 좌의정은 소론으로 하여 이를 상대하게 하면서 그 밑의 청요직도 이와 같은 인사정책을 써서 서로를 견제하였다. 그리고 이들 인물의 기용도 각 파당내의 강경론자들을 배제하고 탕평론자들로 구성시켰다.
그 뒤 영조 자신의 의도대로 조정국면이 수습되자 이제는 쌍거호대의 인사방식을 지양하였다. 즉, 격렬해지는 당론을 수습하고자 인물의 현능(賢能)에 관계없이 파당에 따라 고르게 인물을 등용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완화된 정국을 이끌어갈 수 있었다.
이러한 정국기반을 바탕으로 이제는 재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는 유재시용(惟才是用)의 인사정책을 단행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정국이 전개되자 노론, 소론, 남인, 소북 등 사색을 고루 등용했고, 이제 영조대 중반에 탕평국면은 확고하게 자리를 잡아갔다.
1742년(영조 18)에는 '붕당이 대개 홍문관의 관원을 뽑는 데 한 원인이 있다'고 하여 그 전선(銓選)의 방법을 고치기도 하였다. 이것을 처음 주장한 자는 조현명(趙顯命)의 추천으로 경연에 들어간 실학자 유수원(柳壽垣)이었다.
그는 이조(吏曹)의 관원 가운데 승문원에 들어갈 만한 자를 뽑아 시험을 보여 성적대로 차례로 홍문관정자에서부터 요직에 등용시키고, 모든 관제는 3년마다 차례로 승계시킨다는 관제서승도설(官制序陞圖說)을 주장하였다.
주장대로라면 홍문관의 이름 있는 관직에 대한 각 파당간의 경쟁도 없어지고 이조전랑의 통청권(通淸權)도 스스로 무너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탕평론자 조현명은 이러한 서승법을 일반 관직보다는 이조의 홍문록(弘文錄; 홍문관의 제학이나 교리를 선발하기 위한 제1차 인사기록)과 대간(臺諫)의 통청에 특히 적용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이 받아들여져 종래 이조전랑이 행사하던 언관의 통청권은 이조판서에게 돌아가고, 한천법(翰薦法)은 회권(會圈)으로 변해 재상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와 같은 이조전랑 통청권의 폐지와 한천법의 개혁은 결과적으로 선조대 이래 지속되어온 파당정치의 사실상의 붕괴를 의미하였다.
1742년 영조는, '원만해 편벽되지 않음은 곧 군자의 공정한 마음이고, 편벽해 원만하지 않음은 바로 소인의 사사로운 마음이다(周而弗比, 乃君子之公心. 比而弗周, 寔小人之私意)'는 문구를 친히 지어 비(碑)에 새겨 성균관 반수교(泮水橋) 위에 세워 '탕평비(蕩平碑)'라 하였다.
한편으로는 성균관 유생들에게 당론을 금하도록 계책하여 자신의 탕평정책에 대한 열의를 보여주었다.
영조는 초·중반기에는 완론탕평으로 파당간의 병진을 기본 바탕으로 하였다. 그러나 탕평정책기반의 확보과정에서 노론의 우위를 피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탕평책은 노론과 소론간에 청류(淸流)를 자처하는 강경파들의 반대에 부딪혔으며, 영조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혼인관계를 통해, 특히 온건한 노론계 대신들과 유대를 맺어 지지세력을 삼게 되었다.
영조는 파당간의 격심한 대립을 일단 수습했으나, 수습의 직접적인 수단을 혼인관계에서 찾았기 때문에 정국 운영에 척신(戚臣)의 비중을 높이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척신들은 영조대 중반에 '남당(南黨)'이라 불리면서 청류 세력인 '동당(東黨)'과 대립하였다.
한편, 장헌세자(莊獻世子; 思悼世子)가 죽은 뒤 영조대 후반에 세손(世孫; 뒤의 정조)의 보필 임무를 맡은 홍봉한(洪鳳漢) 등도 척신으로 '북당(北黨)'이라 하여 남당과 대립하였다.
북당은 세손 보필의 임무를 명분으로 삼았지만 남당으로부터는 노론 우위를 방기하고 시세에 편승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리하여 탕평정국을 다져온 가운데서도 내면으로는 당쟁의 파란이 계속되었다. 일례로 영조는 즉위하자마자 노론을 정계에 등장시켜 탕평정국을 급히 서두르다가 1728년에 정계에서 밀려난 소론·남인들의 반발세력이 주동이 된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겪었다.
1755년에는 을사처분 때 귀양을 가서 20여 년 동안이나 한을 품어온 소론 윤지(尹志) 등이 주동이 되어 나주괘서 사건을 일으켰다.
또, 이듬 해 토역과(討逆科)를 시행할 때 답안지에 소론계 인물들이 조정을 비방하는 글을 써서 물의를 일으켰다.
그 뒤 1762년에는 탕평책에 따라 다시 조정에 들어온 남인과 노론정권 위에 미약한 자리를 차지해온 소론 등이 장헌세자를 등에 업고 정권을 잡으려다가 이를 간파한 노론의 계교로 뒤주 속에 세자를 가두어 죽이는 참사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영조대 중반부터 후반까지 척신으로 당을 이룬 남당과 북당, 그리고 청류를 자처하는 동당이 정국 구도를 이룬 가운데 즉위한 정조는 노론의 우위 여부를 문제삼는 기존의 두 척신당의 틈바구니에서 왕정체제확립의 한계를 직시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을 인식한 정조는 그 동안 두 척신당에 비판을 가해온 청류를 조정의 중심부로 끌어들여 이른바 청류 탕평을 펼쳤다.
청류는 영조말에 동당을 이루어 척신당을 비판하던 노론계인사, 즉 김종수(金鍾秀), 김치인(金致仁), 유언조(兪彦造), 윤시동(尹蓍東), 송인명(宋仁明), 정존겸(鄭存謙) 등이 주축이었다.
그러나 다른 당색도 배제하지 않은 채 정조 스스로 규장각 및 초계문신제도(抄啓文臣制度)를 통해 비노론계의 진출을 활성화시켜갔다.
1788년(정조 12)에는 채제공(蔡濟恭)을 비롯한 남인세력을 본격적으로 등용해 노론과 남인의 보합(保合)을 도모하였다.
그리고 이에 호응한 영남 남인들이 1792년에 그간 노론의 우위 아래 금기시해 온 임오의리문제(壬午義理問題)를 제기해 노론을 크게 당혹시키는 형세 변동이 일어났다. 노론내부의 시파(時派), 벽파(僻派)의 분열은 이러한 형세 변화를 배경으로 한 것이다.
이와 같이 정조는 조제(調制)·보합의 인재 등용을 골자로 하는 탕평책을 계승하면서 사대부의 의리와 명절(名節)을 중시해온 청류들을 대폭 기용했던 것이다.
이것은 바로 노론과 소론 중에 온건론자들이 함께 지지하는 완론 탕평을 이끌어온 영조가 파당간의 병진을 기본 바탕으로 한 것과는 차이를 보인다.
한편, 1788년에서 1795년 사이에 시·벽파가 표면화된 뒤 사색은 명색만 남고 정국이 완전히 이 두 파로 재편된 것처럼 보일 정도로 그 분립이 공공연해졌다. 특히 정조의 정책을 지지하는 시파의 부각에 위기를 느낀 벽파의 결집 및 공세가 두드러지는 경향이었다.
위와 같이 정조는 선왕의 뜻을 이어 받아 탕평의 조화에 힘썼으며, 그의 침실을 '탕탕평평실'이라 명명하고 사색을 고르게 등용해 당론의 융화에 심혈을 기울였던 것이다.
영조와 정조대에 꾀해진 탕평정책은 전제왕조대에 격렬한 파당간의 갈등을 어느 정도 해소시켜 정국을 이끌어 나갔다는 점에서 전대보다는 발전된 정책운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척족 세력을 한 수단으로 했고, 또 그로 말미암아 왕 자신이 철저히 정치적 중립을 지키지 못하였다.
더욱이 사색등용정책에 따라 배제된 구 정치세력을 다시 불러들여 새로운 정쟁(政爭)을 낳게 하였다. 즉, 한 파당의 대립된 갈등을 근절하지 못했기에 후대에 세도정치(勢道政治)의 빌미를 마련해준 것이었다.
탕평책(蕩平策)
개요
탕평책(蕩平策)은 조선후기 붕당간의 대립과 갈등을 극복하기 위해 추구한 정치 이념이다. 이것은 붕당 간의 갈등을 조정하여 정치적 공공성과 책임성을 촉구함으로써 점차 보수화되어 가던 정치세력의 내적 모순을 극복하고 사회적 갈등과 모순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것이었다.
탕평책은 숙종 대에 탕평론(蕩平論)이 제시되고, 영조와 정조 대에 본격적으로 추진되면서 전개되었다. 영조와 정조에 의한 탕평책은 불편부당(不偏不黨)의 인재등용이었다. 영조와 정조가 탕평책을 천명하면서 제시한 원칙은 관직을 위해 사람을 선택한다는 적재적소(適材適所)의 원칙이었다. 즉 그가 속한 당파가 아닌 그가 지닌 능력에 따른 인재 중용을 내세웠다.
영조와 정조는 탕평정치를 통해 특정 당파의 집권으로 초래될 수 있는 국정혼란과 갈등을 완화시키고 백성들을 위한 위민정치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사료
(1) 영조실록(英祖實錄) 권55, 영조 18년 3월 26일.
命將命以下諸執事入侍, 以勿事黨習之意, 諄諄面飭, 以御筆書一紙授儒生, 使歸傳大司成曰: 使後世, 當知予心也.
영조가 장명(將命) 이하 모든 집사에게 입시(入侍)를 명하고 당습(黨習)을 일삼지 말라는 뜻으로 순순(諄諄)히 면칙(面飭)하고 어필(御筆)로 쓴 한 장의 종이를 유생에게 주어 돌아가 대사성에게 전하도록 하면서 말하기를, '후세로 하여금 마땅히 나의 마음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고 하였다.
其文曰: 周而不比, 乃君子之公心, 比而不周, 寔小人之私意.
그 글에 쓰기를, '원만하고 편벽되지 않음은 곧 군자의 공심(公心)이요, 편벽되고 원만하지 않음은 바로 소인의 사의(私意)이다'고 하였다.
其下書年月, 仍命刻碑, 立之泮水橋上.
그 아래에 연월(年月)을 쓰고 비(碑)에 새겨 반수교(泮水橋) 위에 세웠다.
(2) 정조실록(正祖實錄) 권2, 정조 즉위년 9월 22일.
噫. 蕩平卽祛偏黨, 無物我之名, (…) 自上視之, 均是一室之人同胞中物.
정조가 말했다. '아! 탕평이란 곧 편당(偏黨)을 버리고 남과 나를 구분하지 않는 이름인데, (…) 위에서 본다면 다 같은 한 집안의 사람들이고 다 같은 동포이다.
善則賞之, 罪則罰之, 有何愛憎之別.
착한 사람은 상을 주고 죄가 있으면 벌을 주는 것에 어찌 좋아하고 미워하는 구별이 있겠는가?
(…)
昔諸葛亮猶曰, 宮中府中, 俱爲一體.
옛날 제갈량은 궁중과 부중(府中)이 모두 일체가 되어야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況一天之下, 一國之內, 共尊一人, 同事一君者乎.
하물며 한 하늘 아래 한 나라 안에서 한 사람을 높이며 함께 한 임금을 섬기는 자들의 경우는 더욱 그렇지 아니한가?
(…)
從今以後, 凡玆事我廷臣, 無曰老論少論, 偕底大道.
지금 이후로 나를 섬기는 조정의 신하는 노론이나 소론 할 것 없이 모두 대도(大道)에 나오도록 하라.
(…)
惟其人是視, 用賢而捨不肖.
오직 그 사람을 보아 어진 이를 등용하고 불초한 이를 버릴 것이다.
(3) 정조실록(正祖實錄) 권36, 정조 16년 11월 6일.
肆予導箕聖斂時敷福之範, 承先王聖功神化之緖, 特書燕寢之扁曰, 蕩蕩平平室, 而庭衢八荒四大字, 遍題八牕之楣 昕夕顧諟, 作我息壤. 於是乎蓽路藍縷 披自草萊.
정조가 말했다. '드디어 내가 기자(箕子)께서 복을 모아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신 홍범(洪範)을 길잡이로 하고, 선왕께서 남기신 거룩한 공적과 신비로운 교화를 계승하게 되자, 침전의 편액에 특별히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이라 크게 쓰고 '정구팔황(庭衢八荒)' 네 대자(大字)를 여덟 개의 창문 위에다 두루 써 붙이고, 아침저녁으로 이를 돌아보며 나의 식양(息壤; 굳게 맹세한 약속)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한미한 집안의 누더기를 걸친 자들을 초야에서 뽑아 올렸다.'
성격과 운영
조선의 정치이념은 백성의 공공복리를 최대화하려는 위민(爲民)의 정치였고, 봉공멸사(奉公滅私)를 추구하는 소통과 공감의 정치였다. 조선의 국왕은 전제적이고 소유적인 독점적 지배자라기보다 공공성의 실현이라는 천명을 수행하는 최고의 역할자로 기능했다.
조선의 공론정치는 공론을 중시하는 정치 또는 공론화 과정을 통한 신중한 정책 결정, 국가의 원기(元氣)인 공정한 다수의 의견을 따르는 정치, 지식인 관리와 유생들로 이루어진 양반들이 형성한 공론이 국왕과 언관을 주축으로 하여 조정에서 공식적이고도 공개적으로 소통되는 정치를 말한다.
그러나 조선의 정치는 선조 대 이후 사림들의 붕당이 생겨나면서 당론이 공론보다 우위에 서게 되었다. 붕당 간의 극단적인 적대와 분열 속에서 백성의 공공복리는 설 자리가 없었다. 영조와 정조의 탕평책은 이런 배경 속에서 등장하였다. 영조는 일찍이 '군자와 소인의 구별은 논할 것도 없고, 붕당이 나라를 망칠 것'이라는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영조는 즉위 초부터 탕평을 표방하고, 국왕의 정치 원칙에 부합하는 온건한 인재들을 골라 탕평정치를 운영했다. 영조는 당파에 관계없이 실무에 밝은 사람을 추천하되 반드시 당파별로 안배해서 올리게 하고 다른 당파의 인물들이 서로 한 조를 이루어 업무를 관장하도록 하는 인사원칙, 이른바 호대쌍거론(互對雙擧論)에 따라 관리를 선발했다.
즉, 정국운영의 규칙을 유연화하고 그 과정에서 다양한 파당을 참여시킴으로써 붕당 간의 공조체제를 구축하려 한 것이다. 정조는 자신만의 원칙을 적용한 탕평정치를 구사했다. 정조는 각 당파의 강경파를 기용하여 참된 탕평을 성공시키겠다고 선언했다.
정조는 당파를 가리지 않고 '청명한 견해를 고집하며, 준엄한 정치원칙을 지키는 인물'에게 권력을 주어 정국을 주도하게 하였다. 정조는 붕당 간의 의리와 인재를 혼합하되 정당성을 중시하는 것으로서 '의리탕평(義理蕩平), 준론탕평(峻論蕩平)'이라 불린다.
1776년(정조 즉위년) 9월에 정조는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탕평윤음을 발표하였다. 그는 탕평이란 편당을 제거하고 남과 나를 구분하지 않는 것이라 규정하였다.
국왕의 입장에서 보면 모든 신민(臣民)이 한 가족 한 동포이므로 갈등이나 분쟁 국면에서 어느 쪽도 편들지 않은 채 대도(大道)의 차원에서 공정하게 시비를 가리고 중재하겠다는 뜻을 표명하였다.
또한 정조는 분열과 대결의 정치를 종식하고자 하였다. 그는 '오직 그 사람을 보아 어진 이를 등용하고 불초한 이를 버릴 것'을 인사기준으로 내세웠다. 그가 속한 문벌이나 당파가 아닌 그가 지닌 능력에 따른 인재 중용을 천명한 것이다.
실제로 정조는 지역 간 계층 간 소통을 극대화하기 위해 여러 정책을 실시했다. 소외되고 배제된 지방의 인재가 등용될 수 있는 길을 열어 최대한 고르게 사람을 씀으로써 정치적 주체를 확대하였다.
정조가 탕평을 펼쳤던 이유는 각 붕당의 명분과 개인의 명예를 회복하고 존중해 줄 때 비로소 인재들의 국정 참여가 가능해지고 참된 통합의 정치도 이룩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거듭된 당쟁과 환국정치의 여파로 정치 일선에서 배제되고 처벌된 각 당파의 영수들과 후손들이 많았기에 다양한 인재들을 공적 영역으로 흡수할 수 있는 명분이 필요했다.
정조는 정치적 수적이었던 노론 벽파 중에서도 의리가 철저하고 정밀한 인물이라면 오래도록 중용하였으며, 의리를 가리기 위해 그 누구와의 공적 토론도 마다하지 않았다.
영조와 정조의 탕평책은 문벌이나 당파 같은 출신 성분이나 지역을 가리지 않고 오직 그가 지닌 능력에 따라 사람을 쓰는 공정한 인사정책, 지역 간 소통 및 계층 간 소통을 극대화하는 정치행보를 보여주고 있다.
탕평책과 민주주의
영조와 정조는 탕평정치를 통해 여론의 경청, 민의의 수렴, 회의의 활성화 등과 같은 공론 중시를 통해 시행착오를 최소화하고 결정의 정당성을 획득하고자 했다.
함께 모여 토론하고 지혜를 모으는 것이 공공성을 확인하고 실현하는 최선의 길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신하들을 비롯하여 일반 백성들과 늘 소통하고자 하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여론 수렴은 백성의 대표 의사이자 정의로운 공적 의견을 수렴하기 위해서였으며, 이는 곧 백성의 공공복리를 위한 위민의 정치라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탕평책은 백성을 위한 소통과 협력이라는 민주주의의 기본 정신을 잘 보여준다.
영조와 정조의 공정한 인사정책은 오늘날 정부의 주요 보직 인사에 시사점을 준다. 오늘날 정부의 인사정책은 코드인사 혹은 낙하산 인사라는 비판을 받으며, 지역 차별과 학벌로 인한 논란도 나타난다.
영조와 정조가 탕평정치를 통해 능력 위주의 인재등용을 추진했던 것처럼, 오늘날 정부 고위직 인사에서도 인재의 발탁, 정책의 이념적 계층적 갈등 조정, 추진동력의 배가를 위해 당색에 따른 인재의 안배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정조가 자신의 침전에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이라고 적힌 편액을 걸어놓고 아침·저녁으로 보면서 자신의 정치기조로 삼은 것처럼 오늘날 최고인사권자는 자신의 국정철학에 적합한 인물을 공정하게 발탁하고, 국정 수행과정에서 능력과 자질이 부적격으로 판단될 경우 과감한 인사 개편을 단행하여 정당한 인사권을 행사해야 할 것이다.
탕평비(蕩平碑) 단상
서울 명륜동에 있는 성균관에 가면 탕평비(蕩平碑)가 있다. 그 앞에 간단한 안내문이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1742년(영조18년) 3월 26일 왕세자가 성균관에 입교한 즈음에 영조의 어명으로 성균관 반수교(泮水橋) 위에 세워진 비석.
탕평(蕩平)이란 '서경(書經)' 홍범(洪範)편의 '편벽됨이 없고 편당함이 없으면 왕의 도가 광대하며(無偏無黨, 王道蕩蕩), 편당함이 없고 편벽됨이 없으면 왕의 도가 평평하다(無黨無偏 王道平平)'에서 온 것으로, 공정한 정치를 해야 통치자의 입지가 평탄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비에 새겨져 있는, '남과 두루 친하되 편당 짓지 않는 것은 군자의 공정한 마음이고(周而不比, 乃君子之公心), 편당만 짓고 남과 두루 친하지 못하는 것은 소인의 사사로운 생각이다(比而不周, 寔小人之私意)'는 '논어' 위정편(爲政篇) 14장을 활용하여 영조가 지은 것이다.
子曰 君子는 周而不比하고 小人은 比而不周니라.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두루 사귀되 파벌을 만들지 않으며, 소인은 파벌을 만들되 두루 사귀지 못한다.'
(논어/위정 14)
성균관의 안내문이 일반적인 견해지만, 시대에 따라 아주 다르게 해석되기도 했다.
중국사에는 이런 장면이 적지 않다. 특정 시대를 장악했던 어떤 지식 권력은 의도성이 다분한 창의적(?)인 해석을 내놓기도 했는데 반감을 사기 십상이었다.
그러나 이런 낯설고 거북한 해석들도 해당 시대가 가진 원전에 대한 수용 태도 및 사유 방법을 분석하는데 필요할 수 있으므로 잠깐 보기로 하자.
일례로 문화대혁명 시기에 출판된 '논어비주(論語批注)'를 들 수 있다. 북경대학 철학과에서 펴낸 이 책은 당시 중국의 학술 경향을 여실히 보여준다. 여기서는 군자와 소인을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으로 상정하고 풀이한다.
'논어비주'의 주석에 따르면 공자, 책에서는 실명을 써서 공구(孔丘)가 노동 인민을 무시해 사용한 칭호가 '소인'인데, 때로는 신흥 지주 계급으로 대표되는 정치 세력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리고 어떤 때는 노예주 계급의 도덕을 어기는 사람으로 보기도 한다.
'논어비주'의 주석에 따르면, 공자가 이 구절에서 사용한 군자와 소인은 정치적 용어로 쓴 것이다.
따라서 '君子周而不比'는 군자가 노예의 반란을 진압하고, 신흥 지주 계급의 개혁에 반대해야 한다는 내용이며, '小人比而不周'는 노예들이 단결해 반란을 일으키는 일과 신흥 지주 계급이 결사(結社)하여 개혁 하는 것을 비난한 말이라고 한다. 문화대혁명이라는 당시의 정치 상황이 고전 해석에도 개입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애초 춘추시기 '군자', '소인'이란 말은 신분에 따른 구별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공자는 인품의 고하에 따라 사람을 구분하는 말로 쓰기 시작한다. 요새말로 젠틀맨과 소인배 정도로 사용한 것이다.
논어를 보면 공자는 두 개념을 혼용하여 썼다. 그렇다면 해당 구절의 속뜻은 무엇일까. 전후 사정이 없는 발언이라 추측하기 어렵지만, 다행히 논어에 다른 단서가 보인다.
역시 공자의 말로 유명한 '군자화이부동 소인동이불화(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이다. 풀이하면 '군자는 조화롭게 어울리지만 부화뇌동 않고, 소인은 맞장구만 치지 조화롭게 어우러지지 못한다'이다. 얼핏 보아도 요지는 ‘주이불비 비이불주(周而不比, 比而不周)’와 같다.
공자 시대에 화(和)와 동(同)이 무엇을 뜻하는지 감지할 수 있는 문헌이 적지 않은데, 그중 '좌씨전(左氏傳)'에 보이는 안자(晏子)의 언설이 가장 탁월하다.
춘추시대 제나라 경공에게 양구거라는 신하가 있었다. 경공은 그가 자기와 화(和)한다고 말한다. 그러자 재상 안자가 그것은 동(同)이지 화(和)가 아니라고 한다.
안자의 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和는 국의 간을 맞추는 일과 같다. 갖은 재료를 물과 불로 끓이면서 조리사가 맛을 맞추는데 간을 보고 모자라는 것은 더 넣고 많은 것은 덜어낸다.
임금과 신하의 관계가 이래야 和라고 할 수 있다. 임금이 찬성하더라도 잘못된 것이라면 신하는 바로 잡아야 하고, 임금이 반대하더라도 그것이 옳다면 신하는 할 말을 해야 한다. 이래야 정치가 공평해져 서로 충돌이 없고 백성들도 다투는 마음이 없어진다.
그러나 양구거는 임금이 옳다고 하면 옳다고 하고, 임금이 틀렸다고 하면 틀렸다고 한다. 만약 물에다 물을 탄다면 누가 그것을 먹겠는가. 이래서야 국 맛이 나겠는가.
합주하는데 악기마다 동일한 음만 낸다면 누가 그런 음악을 듣겠는가. 이런 상황을 동(同)이라고 한다. 오미(五味)와 오성(五聲)이 어우러져야만 맛도 멋도 난다. 그래서 임금과 신하가 동(同)하면 곤란하다.
그런데 안자의 말을 곱씹어보면 '탕평'은 아무래도 임금의 자세에 달린 것 같다. 임금 자신의 입맛이 한 쪽에 치우쳐 있으면 국의 간을 맞추기는 힘들 테고 음감이 없어도 또한 난감하다.
그럼에도 군자는 균형을 잡으려 애쓰며 소임을 다했겠고, 소인이야 늘 맞장구를 치면서 명철보신 했으리라 생각이 든다.
영조의 즉위와 탕평책
어찌해 같은당파 사람을 다 죽인단 말인가
조선 21대 왕 영조(英祖)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중 하나가 정조와 더불어 조선 후기 정치, 문화의 중흥을 이룩한 군주라는 점이다.
영조(英祖)는 1694년 아버지 숙종과 무수리(궁중에서 청소 일을 맡는 여자종) 출신 후궁인 어머니 숙빈 최씨 사이에서 출생했다. 늘 신분적 콤플렉스에 시달렸던 영조는 왕세제 시절부터 당쟁의 중심에 있었다.
숙종 후반은 노론과 소론, 남인 간의 치열한 당쟁이 전개됐던 만큼 영조가 왕위에 오르는 과정 역시 순탄하지 못했다. 장희빈 소생의 이복형인 경종이 소론의 지원에 의해 왕위에 오른 후, 영조는 노론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았지만 왕세제 위치는 살얼음판 같았다.
경종이 즉위한 후 신임옥사가 발생하고 노론 4인방이 희생되면서 영조에게도 정치적 위기가 왔다. 한순간만 방심하면 차기 후계자에서 역모의 중심으로 목숨까지 날아갈 수 있는 상황에 몰리기도 했다.
하지만 경종이 갑자기 서거하면서 영조는 1724년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영조는 즉위 과정에서 당쟁의 참상을 뼈저리게 느꼈고, 왕위에 오른 후 취임 일성으로 강조한 것이 바로 탕평(蕩平)이다.
탕평은 국정의 기본 방향을 모든 당파가 고르게 참여하는 정책을 가리킨다. 사실 탕평에 대한 논의는 영조 이전인 숙종대 후반에도 박세채 등에 의해 제기됐다.
당파 사이 대립으로 정국이 어수선 해지면서 해결책으로 탕평론이 제시된 것이다. 하지만 숙종이 시도한 탕평책은 명목에만 그쳤고 노론 중심으로 정국이 운영되면서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게다가 숙종은 왕권 강화 차원에서 정국 상황에 따라 한 당파를 일거에 내몰고 반대당에 정권을 모두 위임하는 편당적인 조처를 취했다. 숙종 말년에는 외척에 의존하는 경향이 두드러지면서 노론 중심의 독주가 계속됐다.
경종 시절에도 소론 온건파인 조문명 등은 왕세제인 영조를 보좌하면서 탕평의 필요성을 얘기했지만, 경종이 강력한 왕권을 행사할 수 없었기에 탕평책은 빛을 잃었다.
두 대에 걸쳐 제대로 실현되지 못했던 탕평책은 영조가 즉위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된다. 영조는 즉위하자 마자 탕평을 국시(國是)로 내세우고 이를 널리 선언했다.
탕평에 대한 영조의 강한 의지는 1727년(영조 3년) 7월 4일 내린 하교에 잘 나타나 있다. '아! 모든 신민은 모두 내 가르침을 들으라. 붕당(朋黨)의 폐해가 '가례원류(家禮源流; 조선 현종 때 유계가 가례에 대한 글을 분류 정리한 책)'가 나온 뒤부터 점점 더해졌다.
아! 마음 아프다. 지난 신축년(1721년)과 임인년(1722년)의 일은 그 가운데 반역할 마음을 품은 자가 있기는 하나 다만 그 사람을 죽여야 할 뿐이지, 어찌해 한편의 사람을 다 죽인 뒤에야 왕법을 펼 수 있겠는가?
옥석을 가리지 않고 경중을 가리지 않아 한쪽 사람들이 점점 불평하게 하는 것은 이 또한 당습(黨習)이다. (중략) 이미 반포하고 알렸어도 전만 못하면 조정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죄로 다스릴 것이다.'
영조는 당쟁의 폐단을 강력히 지적한 뒤 '마땅한 인재를 취해 쓸 것이니, 당습에 관계된 자를 내 앞에 천거하면 내치고 귀양을 보내 국도(國都)에 함께 있게 하지 않을 것'이라며 '나의 마음이 이런데도 따르지 않는다면 나의 신하가 아니다'고 탕평에 적극 호응할 것을 독려했다.
탕평이란 용어는 원래 유교 경전인 '서경'의 홍범 황극설에 나온 '무편무당 왕도탕탕(無偏無黨 王道蕩蕩) 무당무편 왕도평평(無黨無偏 王道平平)'에서 비롯됐다. 그 연원은 오래됐지만 우리 역사에서 본격적으로 이를 정책화한 왕은 영조였다.
영조는 탕평책을 효과적으로 실시하기 위한 방안으로 당파를 가리지 않고 온건하고 타협적인 인물을 등용했다. 노론 강경파 준로(峻老)와 소론 강경파 준소(峻少)를 권력에서 배제하고, 온건파인 완로(緩老)와 완소(緩少)를 중용했다.
한편으로는 자신과 호흡을 맞출 수 있는 신하, 즉 탕평파 대신을 양성해 정국의 중심에 나서게 했다. 송인명, 조문명, 조현명 등이 대표적인 탕평파 대신으로 이들은 영조가 추진하는 탕평책의 든든한 후원군이 됐다.
영조의 탕평책은 1727년 탕평교서를 반포하고, 1742년 성균관에 탕평비를 건립하는 것으로 구체화됐다. 성균관에 탕평비를 세운 것은 앞으로 관료가 될 성균관 유생부터 당습에 물들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현재 성균관대 교정에 남아 있는 탕평비에는 '주이불비 내군자지공심(周而不比, 乃君子之公心) 비이불주 식소인지사의(比而不周, 寔小人之私意)'라 해 '편당을 짓지 않고 두루 화합함은 군자의 공평한 마음이요, 두루 화합하지 아니하고 편당을 하는 것은 소인의 사심이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군자와 소인의 구분을 탕평과 편당에 두면서 '탕평'이 공(公)이자 바른 것임을 선언한 영조의 의지가 엿보인다.
영조 초반 의욕적으로 추진됐던 탕평책은 영조 4년인 1728년 이인좌, 정희량, 박필몽 등 소론과 남인 급진파 등이 일으킨 무신란으로 위기를 맞았다.
반란의 주도층은 선왕 경종의 억울한 죽음을 천명하면서 '의거(義擧; 정의를 위해 큰일을 일으키다)'임을 선전했다.
탕평책을 추진했지만 여전히 노론 중심 정국 운영에 불만을 품은 정치 세력과 일부 백성이 동조하면서 반란군 규모는 커졌다.
반군 지도자 이인좌는 한때 청주성을 점령하면서 위세를 떨쳤으나 소론 출신 오명항이 이끄는 정부 토벌군에 의해 진압됐다.
무신란은 소론과 남인 급진파가 주도해 일으켰기에 영조는 반란 토벌 후 노론 중심의 정치체제를 끌고 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영조는 반란의 원인을 '조정에서 붕당만을 일삼아 재능 있는 자를 등용하지 않은 데 있다'고 파악하고 무신란을 탕평책을 더욱 공고히 추진할 계기로 삼았다.
아래의 기록은 영조의 이런 입장을 잘 보여준다. '내가 덕이 부족한 탓으로 국가가 판탕(板蕩·국가가 어지러움)한 때를 당해 안으로는 조정의 모습을 평화롭게 하지 못하고, 밖으로는 우리 백성들을 구제하지 못해 간신이 흉악한 뜻을 함부로 행해 호남과 경기에서 창궐하게 만들었으니, 통탄함을 금할 수 없다.
(중략)
그 하나는 조정에서 오직 붕당만을 일삼아 재능 있는 자의 등용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색목(色目)만을 추중하고 권장하는 데 있다.
(중략)
또 하나는 해마다 연달아 기근이 들어 백성들은 죽을 지경에 처해 있는데도 구제해 살릴 생각을 하지 않고 오직 당벌(黨伐)만을 일삼는 것으로 불쌍한 우리 백성들이 조정이 있음을 모른 지 오래됐다.
백성이 적도(賊徒)에게 합류한 것은 그들의 죄가 아니요, 실로 조정의 허물이니 이 역시 당의(黨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이른바 하나도 붕당이요, 둘도 붕당이라는 것이다.'
영조는 백성들이 반란 세력에 합류한 일차적인 원인을 당쟁으로 판단하고 앞으로는 당(黨)과 사(私)를 옹호하는 마음 대신, 모두가 한마음으로 협력해 중흥의 기틀을 삼자고 호소했다. 무신란을 당파를 없애는 계기로 삼고자 하는 영조의 정치적 승부수가 보이는 장면이다.
무신란 이듬해인 1729년 영조는 기유처분(己酉處分; 당파 간 의리를 가리지 않고 인재를 쓰겠다)을 통한 탕평을 반포했다. '오늘의 역변은 당론에서 비롯된 것이니, 지금 당론을 말하는 자는 누구든 역적으로 처단하겠다'고 강경한 선언을 한 것 역시 탕평에 대한 영조의 확고한 의지를 잘 보여준다.
영조는 당쟁의 뿌리를 제거하기 위해 사림(士林) 등 유학자 집단의 정치 관여를 계속 견제했다. 은둔한 산림(山林)의 공론(公論)을 인정하지 않았고, 사림 세력의 본거지인 서원을 대폭 정리했다.
1741년 4월 8일 영조는 하교를 내려 팔도의 서원과 사묘(祠廟) 가운데 사사로이 건립한 것을 모두 없애고 이를 어길 경우 수령과 유생에게 엄한 처벌을 가하도록 했다.
52년 재위기간 동안 영조의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이 바로 '탕평'이다. '조선왕조실록'에서 '탕평'이란 용어가 총 477회 검색이 되는데, 이 중 영조대에만 343회 등장하는 것은 이 시대 대표 이념이 '탕평'이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영조가 탕평책을 적극 실천한 것은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각 분야에서 시대가 요구하는 다양한 정책을 수행하기 위함이었다.
영조 시대는 각 분야에서 이전 시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여러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게 가능했던 것은 정치적 안정을 추구한 탕평책이 밑바탕이 된 덕분이다.
주이불비(周而不比)
두루 사귀되 파벌을 만들지 않는다
子曰: 君子는 周而不比하고, 小人은 比而不周니라.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두루 사귀되 파벌을 만들지 않으며, 소인은 파벌을 만들되 두루 사귀지 못한다.'
(위정 14)
사람을 사귀는 일은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인생은 사람의 관계로 이어지기 때문에 신중하지 않을 수 없다. 공자는 여러 곳에서 사람 사귀는 방법에 대해 말했는데, 특히 군자와 소인을 대비시켜 쉽게 이해하도록 설명했다.
군자와 소인은 공사(公私)를 처리하는 데서 구분된다. 군자는 공사(公私)를 분명히 하는 사람이고, 소인은 공(公)보다 사(私)를 앞세우는 사람이다.
따라서 군자는 공평무사하게 일을 처리하고 사람을 사귀지만 소인은 자기 이익을 중심으로 처리하고 편을 갈라서 사귄다.
주이불비(周而不比)는 군자의 행위를 보여주며, 비이부주(比而不周)는 소인의 행위를 나타낸다. 여기서 주(周)는 보편적이라는 뜻이고, 비(比)는 편을 가른다는 뜻이다.
성균관대학교 정문 바로 앞에는 탕평비가 있다. 영조(英祖)는 정사(政事)의 시비를 논하는 상소를 금하고 노론, 소론을 고루 등용하여 불편부당의 탕평책을 수립하고 1742년 성균관 입구에 이 비를 건립했다.
국가의 동량(棟梁)이 되는 성균관 유생(儒生)에게 편당을 짓지 말고 군자의 도를 닦게 하기 위하여 그 앞에 세운 것이다. 이 비문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周而不比, 乃君子之公心.
比而不周, 寔小人之私意.
두루 사귀되 편당을 짓지 않는 것은 군자의 공적인 마음이고, 편당을 지으며 두루 사귀지 못하는 것은 소인의 사적인 마음이다.
당시 조정에는 동서남북의 붕당(朋黨)이 세분화되어 많은 수의 붕당이 존재했다. 붕당이란 뜻이나 이익을 같이하는 사람들의 모임인데, 언제부턴가 우리민족을 나타내는 부정적 이미지로 자리 잡았다.
이것은 일제(日帝) 때문이다. 일제는 붕당이란 말보다 당쟁(黨爭)이란 용어를 정착시켰다. 우리민족 스스로 자신의 역사를 부정하도록 말이다.
편을 가르는 문화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존재한다. 그런데 편을 가르더라도 공적인 마음에서 편을 가르면 문제가 되지 않지만 사적인 감정이나 호오(好惡)에 따라 편을 가르는 것은 사라져야 한다.
'고소영 내각'이니, '문고리 삼인방' 등이 바로 대표적인 편 가르기 문화다. 그밖에 호남향우회, 고대 동문회, 해병대 전우회는 우리 사회에서 깨뜨릴 수 없는 집단으로 유명하다. 좁은 땅에 살면서 서로 화합하지 못하고 배척하는 문화는 사라져야 한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언제나 편을 가르는 문화가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문제는 편을 가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심(私心)을 가지고 편을 가르는 데 있다.
세치 혀로 이간질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조화롭고 화합하는 세상은 오지 않는다. 소인들의 교언영색을 물리치고 군자의 공평한 마음으로 사람을 사귀어야 한다.
▶️ 蕩(방탕할 탕)은 형성문자로 荡(탕)은 간자(簡字), 偒(탕)은 고자(古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초두머리(艹=艸; 풀, 풀의 싹)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湯(탕)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그래서 蕩(탕)은 ①방탕하다 ②방종하다 ③흔들다 ④움직이다 ⑤방자하다 ⑥광대하다, 넓고 크다 ⑦헌걸차다(매우 풍채가 좋고 의기가 당당한 듯하다) ⑧용서하다 ⑨씻다, 씻어내다 ⑩허물어뜨리다, 찌르다 ⑪호리다, 유혹하다 ⑫흘리다 ⑬흐르게 하다 ⑭큰 대나무 ⑮늪(땅바닥이 우묵하게 뭉떵 빠지고 늘 물이 괴어 있는 곳)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방탕할 질(佚)이다. 용례로는 세금이나 요금이나 진 빚을 온통 삭쳐 줌을 탕감(蕩減), 재물 따위를 죄다 써서 없애 버리는 것을 탕진(蕩盡), 재물을 남김 없이 다 써 버림을 탕갈(蕩竭), 방탕한 사람을 탕객(蕩客), 온통 죄다 없어짐을 탕결(蕩缺), 남김 없이 죄다 멸함을 탕멸(蕩滅), 온통 죄다 잔폐함을 탕잔(蕩殘), 빚을 죄다 삭쳐 줌을 탕채(蕩債), 키질을 하듯이 마구 들까붊을 탕파(蕩簸), 방탕한 여자를 탕부(蕩婦), 방탕한 사내를 탕자(蕩子), 방탕한 마음을 탕심(蕩心), 헛된 모양을 탕연(蕩然), 난을 평정함을 탕정(蕩定), 방탕한 마음을 탕정(蕩情), 크고 넓은 뜻이나 방탕한 마음을 탕지(蕩志), 죄다 망하여 뿔뿔이 흩어져 없어짐을 탕산(蕩産), 행동이 음란하고 방탕함을 음탕(淫蕩), 휩쓸어 모조리 없애 버림을 소탕(掃蕩), 주색잡기에 빠져서 행실이 좋지 못한 것을 방탕(放蕩), 아주 넓어서 끝이 없음을 호탕(浩蕩), 마음이 편하고 제멋대로 함을 염탕(恬蕩), 집안의 재산을 다 없애 버리는 것을 분탕(焚蕩), 더러운 것이나 부정적인 것을 말끔히 없앰을 척탕(滌蕩), 높고 넓음을 외탕(巍蕩), 광망하고 방탕함을 광탕(狂蕩), 죄수를 너그럽게 처결하여 죄다 놓아 줌을 소탕(疏蕩), 더러운 것을 씻어 내기 위하여 물을 부어서 세차게 흔듦을 충탕(衝蕩), 음탕하게 놂을 유탕(遊蕩), 집안의 재산을 모두 써서 없애 버림을 일컫는 말을 탕진가산(蕩盡家産), 흔들려 움직이는 모양이나 정처 없이 헤매는 모양을 일컫는 말을 탕탕유유(蕩蕩悠悠), 싸움이나 논쟁 따위에서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음을 일컫는 말을 탕탕평평(蕩蕩平平), 방탕함으로써 예의 범절을 무시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을 광탕지인(狂蕩之人), 술과 여자에 빠져 일은 하지 아니하고 불량한 짓만 함을 이르는 말을 방탕무뢰(放蕩無賴), 봄바람이 온화하게 분다는 뜻으로 인품이나 성격이 온화하고 여유가 있음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춘풍태탕(春風駘蕩) 등에 쓰인다.
▶️ 平(평평할 평, 다스릴 편)은 ❶상형문자로 물 위에 뜬 물풀의 모양을 본뜬 글자로 수면이 고르고 평평(平平)하다는 뜻이다. ❷지사문자로 平자는 '평평하다'나 '고르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平자는 干(방패 간)자와 八(여덟 팔)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그러나 平자는 '방패'와는 아무 관계가 없고 또 사물의 모습을 본뜬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平자는 악기 소리의 울림이 고르게 퍼져나간다는 뜻을 형상화한 것이기 때문이다. 平자는 소리가 고르게 퍼져나간다는 의미에서 고르거나 평평하다는 뜻을 가지게 되었고 후에 '안정되다'나 '화목하다'라는 뜻도 파생되었다. 그래서 平(평, 편)은 (1)일정한 명사(名詞) 앞에 붙이어 평범(平凡)한, 평평(平平)한의 뜻을 나타냄 (2)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평평하다, 바닥이 고르고 판판하다 ②고르다, 고르게 하다 ③정리되다, 가지런하게 되다 ④편안하다, 무사하다 ⑤평정하다 ⑥정하다, 제정하다 ⑦이루어지다 ⑧바르다 ⑨갖추어지다 ⑩사사로움이 없다 ⑪화목하다, 화친하다 ⑫쉽다, 손쉽다 ⑬표준(標準) ⑭들판, 평원(平原) ⑮산제(山祭: 산에 지내는 제사) ⑯보통(普通) 때, 평상시(平常時) ⑰보통, 보통의 수준 ⑱평성(平聲), 사성(四聲)의 하나 그리고 ⓐ다스리다, 관리하다(편) ⓑ나누다, 골고루 다스려지다(편)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평탄할 탄(坦), 편안할 녕(寧), 편안 강(康), 클 태(泰)이다. 용례로는 어떤 가정 밑에서 많은 수나 같은 종류의 양의 중간의 값을 갖는 수를 평균(平均), 평온하고 화목함을 평화(平和), 평상시를 평소(平素), 뛰어난 점이 없이 보통임을 평범(平凡), 평상시의 소식을 평신(平信), 차별이 없이 동등한 등급을 평등(平等), 바닥이 평평한 땅을 평지(平地), 사람이 삶을 사는 내내의 동안을 평생(平生), 지표면이 평평한 넓은 들을 평야(平野), 무사히 잘 있음을 평안(平安), 벼슬이 없는 일반민을 평민(平民), 평평한 표면을 평면(平面), 평탄한 들판 평야를 평원(平原), 난리를 평온하게 진정시킴을 평정(平定), 까다롭지 않고 쉬움을 평이(平易), 어느 한 쪽에 기울이지 않고 공정함을 공평(公平), 마음에 들거나 차지 않아 못마땅히 여김을 불평(不平), 균형이 잡혀 있는 일을 형평(衡平), 대지의 평면을 지평(地平), 마음이 기쁘고 평안함을 화평(和平), 넓고 평평함을 편평(扁平), 인간의 욕심은 한이 없음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평롱망촉(平隴望蜀), 깨끗하며 욕심이 없는 마음을 일컫는 말을 평이담백(平易淡白), 엎드려 땅에 머리를 댄다는 뜻으로 공경하여 두려워하는 모습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평신저두(平身低頭), 고요한 땅에 바람과 물결을 일으킨다는 뜻으로 공연한 일을 만들어서 뜻밖에 분쟁을 일으키거나 사태를 어렵고 시끄럽게 만드는 경우를 가리키는 말을 평지풍파(平地風波), 모래톱에 내려앉는 기러기라는 뜻으로 글씨를 예쁘게 잘 쓰는 것을 비유해 이르는 말 또는 아름다운 여인의 맵시 따위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을 평사낙안(平沙落雁), 마음을 평온하고 순화롭게 함 또는 그런 마음으로 줄여서 평심이라고 하는 말을 평심서기(平心舒氣), 평지에 산이 우뚝 솟음으로 변변치 못한 집안에서 뛰어난 인물이 나옴을 비유하는 말을 평지돌출(平地突出), 심기를 조용하게 가져 잡념을 없앤다는 뜻으로 마음이 평온하고 걸리는 것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평기허심(平氣虛心), 뛰어난 점이 없이 보통을 일컫는 말을 평평범범(平平凡凡), 이른 새벽에 다른 사물과 접촉하기 전의 맑은 정신을 이르는 말을 평단지기(平旦之氣), 안온하며 아무것도 변한 일이 없음을 일컫는 말을 평온무사(平穩無事) 등에 쓰인다.
▶️ 策(꾀 책/채찍 책)은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대 죽(竹; 대나무)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朿(자, 책)로 이루어졌다. 말을 때리는 대나무 말채찍을 말한다. 음(音)을 빌어 계략(計略)의 뜻에 쓰인다. ❷회의문자로 策자는 '채찍'이나 '계책'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策자는 竹(대나무 죽)자와 朿(가시 자)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朿자는 가시가 있는 나무를 그린 것으로 '가시'라는 뜻이 있다. 策자는 가시를 뜻하는 朿자에 竹자를 결합한 것으로 '대나무로 만든 채찍'을 뜻했었다. 策자는 후에 말을 달려 승리하기 위해서는 계책이 필요하다는 의미가 확대되어 '꾀하다'나 '기획하다'는 뜻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策(책)은 책문(策問)의 뜻으로 ①꾀, 계책(計策) ②제비(기호 등에 따라 승부 따위를 결정하는 방법) ③대쪽(댓조각), 댓조각(대를 쪼갠 조각) ④책, 서적(書籍), 장부(帳簿) ⑤채찍 ⑥점대(점을 치는 데에 쓰는 댓가지) ⑦산가지(수효를 셈하는 데에 쓰던 막대기) ⑧수효(數爻), 숫자(數字) ⑨지팡이 ⑩임금의 명령서(命令書) ⑪별의 이름 ⑫낙엽 소리 ⑬과거를 보이다 ⑭상을 주다, 포상하다 ⑮헤아리다, 예측하다 ⑯기록하다 ⑰꾀하다, 기획하다 ⑱독촉하다 ⑲채찍질하다 ⑳지팡이를 짚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채찍질할 책(敇), 셈 수(數), 셈 산(算)이다. 용례로는 계책을 세워서 결정함을 책정(策定), 책략을 잘 쓰는 사람을 책사(策士), 획책하여 행동함을 책동(策動), 채찍질하여 독려함을 책려(策勵), 쌍방이 계책을 통하여 서로 돕는 일을 책응(策應),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이 알맞게 헤아려서 씀을 책용(策用), 국리민복을 증진하려고 하는 시정의 방법을 정책(政策), 어떤 사건 또는 시국에 대한 방책을 대책(對策), 어떤 일을 하려고 꾸미거나 꾀함을 획책(劃策), 잘못된 계책을 실책(失策), 가장 좋은 대책을 상책(上策), 어떤 일을 꾸미는 꾀나 방법을 술책(術策), 일에 대한 꾀를 드림을 헌책(獻策), 아무도 모르게 숨긴 계책을 비책(祕策), 계책이 없음을 무책(無策), 뛰어난 책략을 명책(名策), 계책을 내어 발휘함을 분책(奮策), 꿰매어 깁는 계책이란 뜻의 미봉책(彌縫策), 당장 편한 것만을 택하는 꾀나 방법을 고식책(姑息策), 공을 꾀함에 무성하고 충실함을 일컫는 말을 책공무실(策功茂實), 손을 묶인 듯이 어찌 할 방책이 없어 꼼짝 못하게 된다는 뜻으로 뻔히 보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꼼짝 못함을 이르는 말을 속수무책(束手無策), 입에 풀칠하다는 뜻으로 겨우 먹고 살아가는 방책을 일컫는 말을 호구지책(糊口之策), 적을 속이는 수단으로서 제 몸 괴롭히는 것을 돌보지 않고 쓰는 계책을 일컫는 말을 고육지책(苦肉之策), 궁한 끝에 나는 한 꾀 또는 막다른 골목에서 그 국면을 타개하려고 생각다 못해 짜낸 꾀를 일컫는 말을 궁여지책(窮餘之策), 막다른 처지에서 짜내는 한 가지 계책을 일컫는 말을 궁여일책(窮餘一策), 어떤 어려운 일을 당해 아무리 생각해도 풀 만한 계교가 없음을 일컫는 말을 백계무책(百計無策), 아주 안전하거나 완전한 계책을 일컫는 말을 만전지책(萬全之策),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인정이나 도덕을 가리지 않고 권세와 모략 중상 등 갖은 방법과 수단을 쓰는 술책을 일컫는 말을 권모술책(權謀術策), 적을 막을 계책을 일컫는 말을 방적지책(防敵之策), 단단한 수레를 타고 살진 말을 채찍질 함을 이르는 말을 승견책비(乘堅策肥), 세상을 다스려 나가는 방책을 일컫는 말을 경세지책(經世之策), 가장 훌륭하고 안전한 계책을 일컫는 말을 금석지책(金石之策), 어찌할 수도 없고 할 방법도 없음을 일컫는 말을 무위무책(無爲無策), 일신을 보전해 가는 꾀를 일컫는 말을 보신지책(保身之策), 북쪽으로 나라의 세력을 뻗쳐 나가려는 대외 정책을 일컫는 말을 북진정책(北進政策), 계책에 빈틈이 조금도 없음을 일컫는 말을 산무유책(算無遺策), 뒷 갈망을 잘 하여야 하는 계획이나 뒤처리 방법을 일컫는 말을 선후지책(善後之策), 자기 한 몸의 생활을 꾀해 나갈 계책을 일컫는 말을 자신지책(自身之策), 살아나아 갈 방도가 없음을 일컫는 말을 생계무책(生計無策), 화를 피하려면 달아남이 상책임을 일컫는 말을 주위상책(走爲上策)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