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접기
출판사 서평
나약한 조국을 사랑한 법술지사의 해법
한나라는 중원에 위치한 나라다. 중원은 중국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황허강黃河江 중류, 즉 지금의 허난성河南省 일대를 말한다. 일찍이 문명이 발생한 곳이자 은殷나라로 대표되는 중국 역사가 시작된 곳이다.
한나라는 열강에 둘러싸인 약소국에 불과했다. 이런 까닭에 한비자는 중원의 다른 지식인들처럼 한가한 생각이나 추상적 사고와 담론으로 시간을 낭비할 여유가 없었다. 그는 반드시 나라를 부유하고 강하게 만들어 전국시대의 격전지 중원에서 살아남아야 했기에, 필연적인 정치의 방법과 행마의 기술을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일까 그의 텍스트 《한비자》에는 유독 ‘반드시 필必’이 많이 등장한다. ‘반드시’ 살아남을 수 있게, ‘반드시’ 주권을 지킬 수 있게, ‘반드시’ 정치권력이 안정될 수 있게 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결론으로 한비자는 ‘법法, 술術, 세勢’로 대변되는 사상을 설파했다. 나라에 법을 세우고, 잘 운영하여, 나라가 발전할 수 있는 필연적인 조건과 환경을 다지고자 했다.
그의 이러한 사상 뒤에는 조국 한나라의 생존과 부국강병을 염원하는 절박함과 조국에 대한 무한한 애정이 담겨 있다. 마키아벨리가 말했던가, “나는 내 영혼보다 내 조국을 더 사랑한다”고. 한비자 역시 그러했다. 그 역시 자신의 영혼보다 조국 한나라를 더 사랑했다.
불확실한 환경과 ‘조선화’된 우리 현실의 대안
오늘날 우리나라의 대외적 환경 역시 불확실성과 복잡성이 커져가고 있다. 안으로 내정의 난맥상 말고도 대외적으로도 변화와 압력의 파도가 거세다. 우리가 사는 이 땅이 다시 열강의 각축장이 되어가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과 의구심이 증폭되는 상황이다. 혹자는 탈냉전 시대에서 신냉전 시대로 간다고도 한다. 한비자가 살았던 전국시대의 중원이라는 시공간과 너무도 유사한 셈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한비자》는 늘 소환되어야 하는 고전이다. 추상적 사고나 담론을 위한 담론이 아니라 실사구시의 눈으로 세계를 보고, 관념적 정의가 아니라 입체적 상황 분석을 통해 사고하기 위해서는 《한비자》가 반드시 필요하다. 더불어 우리가 완전히 달성하지 못한 ‘근대’라는 과제를 위해서도 그러하다.
세간에 산업화 다음에 민주화, 민주화 다음에 조선화라는 말이 나돈다. 권위주의 정권과 세력을 권좌에서 내렸지만 여전히 유교적 사고방식과 문화는 권세를 잃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이를 해체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그 수단이 되고 새로운 세계관에 토대가 될 사상이 필요하다.
세대교체가 아니라 세계관의 교체로
새로운 세계관을 위해, 조선 그리고 유교로 대변되는 전근대성과 중세적 의식을 청산하기 위해, 반드시 서구 사상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동양의 고전에서 유교 사상을 해체하고 청산할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다. 유교와 싸우면서 유교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해부했던 사상, 즉 한비자의 사상으로 유교의 인습을 타파하고 법가의 사상으로 한국 사회의 전근대성을 극복할 수 있다.
한비자는 동방의 마키아벨리다. 곧 정치를 도덕과 윤리에서 분리 독립시켰다. 그는 또한 동방의 애덤 스미스이기도 하다. 바로 인간의 이기심과 욕망을 긍정했으며, 그것이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고 역설했다. 잘살고 싶은 인간이 본능적으로 만들어낸 민간 경제의 분업 체제도 긍정했고, 작은 정부와 정부의 최소 개입도 말했다. 정치를 도덕에서 분리시키고 경제를 정치와 도덕에게서도 분리시켰다. 마키아벨리와 애덤 스미스, 서구 근대화의 두 아버지가가 한 작업을 모두 해낸 셈이다.
여기저기서 세대교체 이야기가 터져 나온다. 하지만 지금은 세대보다는 시대가 교체가 되어야 하는 때다. 시대가 교체되려면 세계관이 바뀌어야 한다. 세계관의 교체에 한비자와 법가가 대안이 될 수 있음을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보여준다. 한비자를 통해야 유교의 때를 벗겨내고 전근대성에서 벗어나 더 잘사는 길이 열린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