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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거후공(前倨後恭)
처음에는 거만하다가 나중에는 공손하다는 뜻으로, 상대의 입지에 따라 태도가 변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前 : 앞 전(刂/7)
倨 : 거만할 거(亻/8)
後 : 뒤 후(彳/6)
恭 : 공손할 손(心/6)
출전 : 사기(史記) 소진열전(蘇秦列傳)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나 평소 말하는 대로 행동하면 지행합일(知行合一)이고 언행일치(言行一致)가 된다. 겉과 속이 같아야 도리를 다한 사람이라 우러름 받는다.
하지만 이러한 사람보다 겉 다르고 속 다른 속물이 더 많았기에 이에 관한 말이 압도적이다. 겉으로 꿀 바른 소리를 하고선 돌아서서 남을 해친다고 구밀복검(口蜜腹劍)이나 면리장침(綿裏藏針), 소리장도(笑裏藏刀) 등이 있다.
뱀의 마음에 부처의 입 사심불구(蛇心佛口)도 같다. 이보다는 덜해도 뒤에서는 돌아서는 면종복배(面從腹背)나 양두구육(羊頭狗肉)도 표리부동(表裏不同)하기는 마찬가지다.
이전에는 거만하게 우쭐거리다가(前倨) 나중에는 공손하다(後恭)는 이 말은 상대의 입지에 따라 대하는 태도가 백팔십도 바뀌는 것을 말한다.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소진(蘇秦)은 장의(張儀)와 함께 말 잘 하는 사람의 대명사였다. 소진은 당시의 강국 진(秦)에 맞서려면 작은 나라가 연합해야 한다는 합종책(合縱策)을 주장하여 초연제한위조(楚燕齊韓魏趙)의 6국에서 재상이 되었다.
이런 소진도 출세하기 전에는 형편이 말이 아니었다. 처음 실패한 뒤 집에 돌아왔을 때 식구들은 냉대하기만 했고 형수는 밥상을 차려주는 것을 거부했다.
분발한 소진은 집에 틀어박힌 채 책과 씨름하여 독심술을 통달했다. 이후 육국의 왕을 찾아 세 치 혀로 유세한 결과 모두에게 뜻이 받아져 여섯 나라의 재상이 됐다.
한 나라를 방문하는 길에 고향을 지나게 됐는데 일행이 임금에 비길 만큼 성대했다. 집에 들어오자 식구들은 감히 쳐다보지도 못했다.
소진이 웃으면서 형수에게 '전에는 그렇게 야박하더니 어찌 이렇게 공손한가요(何前倨而後恭也)?'라고 말했다. 형수는 넙죽 엎드리며 사과했다.
지위가 높아지고 재물이 많아졌기 때문이라 대답한 데서 위고금다(位高金多)란 성어도 나왔다. 사기(史記) 소진(蘇秦)열전에 실려 있다.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돈과 지위가 보잘 것 없으면 같은 식구에게도 업신여김을 당하는데 사회서의 인간관계는 훨씬 더하다.
권세가 많은 세력가의 집이나 부자가 된 집에 줄을 대기 위해 문전성시(門前成市)를 이룬다. 그 사람이 별 볼 일없이 되면 문밖에 참새 그물을 칠 정도로 인적이 끊기는 문전작라(門前雀羅) 상태가 된다.
자주 찾아가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고 사람의 처지가 어떠하든 대하는 태도는 다름이 없어야 한다는 말이다.
사기(史記) 소진열전(蘇秦列傳)
소진의 출신과 유세의 실패
소진(蘇秦)은 동주(東周)의 낙양(雒陽) 사람이다. 동쪽 제(齊)에서 스승을 모셨는데 귀곡(鬼谷)에게 배웠다.
여러 해를 떠돌았으나 큰 곤란만 겪고 집으로 돌아왔다. 형제, 형수, 누이, 아내, 첩이 모두 그를 비웃으며, '주나라 사람의 풍속은 농사를 짓든 상공업에 힘을 쓰든 2할의 이익을 올리는데 지금 너는 근본을 버리고 입과 혀를 놀리는 것을 일삼았으니 곤궁해진 것도 당연하지 않겠는가?'고 했다.
소진이 이를 듣고는 부끄러워 스스로 상심하여 방을 잠그고 나오지 않으면서 읽었던 책들을 꺼내 훓어보더니, '내가 머리를 처박고 이 책들을 읽었지만 존중과 영예를 얻을 수 없다면 아무리 많이 읽었어도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고 했다.
이에 주나라 책 '음부(陰符)'를 꺼내 엎드려 그것을 읽었다. 1년 뒤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는 방법을 깨닫고는, '이것이면 지금 군주들에게 유세할 수 있겠다'고 하고는 주나라 현왕(顯王)을 만나 유세하려고 했다. 평소를 그를 잘 알고 있던 현왕의 측근들은 그를 얕잡아 보고 믿지 않았다.
이에 서쪽 진(秦)으로 갔는데 진 효공(孝公)은 죽었고 혜왕(惠王)에게, '진은 사방이 요새인 나라로서 산이 에워싸고 위수를 띠처럼 두르고 있습니다.
동쪽으로는 함곡관(函谷關)과 황하(黃河)가 있고, 서쪽으로는 한중(漢中)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파군(巴郡)과 촉군(蜀郡)이 있으며, 북쪽으로는 대군(代郡)과 마읍(馬邑)이 있습니다.
이는 하늘이 내리신 창고와 같습니다. 또 진의 많은 백성들과 익숙한 병법이면 천하를 삼켜 제왕으로 칭하면서 다스릴 수 있을 것입니다'고 유세했다.
진왕은, '새의 깃털이 다 자라지 않으면 높이 날 수 없고, 법령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으면 천하를 아우를 수 없소'라 했다. 당시는 상앙(商鞅)을 죽이고 변사(辯士)들을 미워하던 터라 소진을 기용하지 않았다.
이에 동쪽 조(趙)나라로 갔다. 조 숙후(肅侯)는 그 동생 성(成)을 상(相)으로 삼고 봉양군(奉陽君)이라고 불렀는데, 봉양군이 소진을 좋아하지 않았다.
연(燕)나라 유세
연(燕)나라로 가서 떠돌다 1년이 지나서야 만날 수 있었는데 연(燕) 문후(文侯)에게 이렇게 유세했다. '연나라는 동쪽으로 조선(朝鮮)과 요동(遼東)이, 북쪽으로는 임호(林胡)와 누번(樓煩)이, 서쪽으로는 운중(雲中)과 구원(九原)이, 남쪽으로는 호타하(嘑沱河)와 역수(易水)가 있습니다.
땅은 사방 2천여 리에 갑옷을 두른 병사가 수십 만, 전차가 600승, 전투마가 6,000필, 비축된 식량은 몇 년을 먹을 수 있습니다. 남으로 갈석(碣石)과 안문(雁門)의 풍요로움이 있고, 북으로는 대추와 밤이 풍족합니다. 이것이 이른바 하늘이 내려준 창고라는 것이지요.
편안하게 아무 일 없고, 군대가 엎어지거나 장수가 죽지 않는 걸로 보자면 연나라보다 나은 나라는 없습니다. 대왕께서는 왜 그런 지 아십니까? 연나라가 침범을 당하지 않고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는 것은 조나라가 남쪽을 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진(秦)과 조가 다섯 번 싸우면 진이 두 번, 조는 세 번을 이깁니다. 진과 조가 서로 피폐해지면 왕께서는 연나라를 온전하게 보존한 채 그 후방을 통제할 수 있습니다. 연나라가 침범을 당하지 않는 까닭이 바로 이것입니다.
또 진이 연을 공격하려면 운중과 구원을 넘고 대군(代郡)과 상곡(上谷)을 지나는 수 천 리 땅을 뚫고 지나야 합니다. 연의 성을 얻는다 하더라도 진은 어떤 계책으로도 지킬 수 없습니다. 진이 연을 해칠 수 없음이 이렇게 분명합니다.
지금 조나라가 연을 공격한다면 출병의 호령이 떨어져 열흘이 안 되어 수십 만 대군이 동원(東垣)에 주둔하게 될 것입니다. 호타하를 건너고 역수를 건너면 4, 5일이 안에 도성에 이를 것입니다.
그래서 진이 연을 공격하면 천 리 밖에서 싸우고, 조가 연을 공격하면 백 리 안에서 싸운다고 하는 것입니다.
대저 백 리 안의 근심을 걱정하지 않고 천 리 밖을 중시한다면 계책으로 이보다 잘못된 계책은 없습니다. 따라서 대왕께서는 조나라와 연합하여 천하가 하나가 되면 연나라는 아무런 근심이 없을 것입니다.'
문후는, '그대의 말이 옳긴 하지만 우리나라는 작은데다가 서쪽의 강력한 조나라가 압박하고 남쪽은 제나라와 가깝소. 제와 조는 강한 나라요. 그대가 합종(合縱)으로 연나라를 안정시키겠다 하니 과인이 나라를 들어 따르겠소'라 했다.
이에 소진에게 수레와 말, 돈과 비단 따위를 대주며 조나라로 가게 했다.
조나라 유세
한편 봉양군이 죽었으므로 바로 조 숙후에게 다음과 같이 유세했다. '천하의 경상(卿相)과 신하 및 벼슬없는 인재들 모두 현명한 군주의 의로운 행동을 우러러 보고 가르침을 받들어 그 앞에서 충성을 다하겠다고 원한지 오래 되었습니다.
그러나 봉양군이 시기하고 군주께서 일을 맡지 못하셨기 때문에 빈객과 유세가들이 그 앞에서 자신의 힘을 감히 다 펼치지 못했습니다.
지금 봉양군께서 돌아가시고 군주께서는 이제 다시 사람들과 서로 친할 수 있게 되셨으므로 신이 감이 어리석으나마 생각한 바를 아뢰고자 합니다.
가만히 군주를 위해 생각해보니 일 없이 백성을 안정시키고 백성들에게 불필요한 일을 만들지 않는 것보다 나은 것은 없습니다. 백성을 안정시키는 근본은 외교를 선택하는, 즉 우방을 선택하는 일에 달려 있습니다.
우방을 잘 선택하면 백성은 평안하고 그렇지 못하면 백성은 끝까지 불안해 합니다. 밖으로부터 오는 근심에 대해 말씀드리게 해주십시오.
따라서 남의 군주를 도모하거나 남의 나라를 정벌하고자 할 때는 늘 그 나라와의 외교를 단절하자는 말을 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니 군주께서도 신중하게 생각하시어 입밖에 내시지 않길 바라옵니다.
이제 흑백의 구별과 음양의 차이를 가지고 말씀드릴까 합니다. 군주께서 진실로 신의 말씀을 들으신다면 연나라는 틀림없이 모직물, 갖옷, 개, 말이 나는 땅을 바칠 것이고, 제나라는 틀림없이 물고기와 소금이 나는 바닷가 땅을 바칠 것이며, 초(楚)나라는 틀림없이 귤과 유자가 나는 땅을 바칠 것이고, 한(韓), 위(魏), 중산(中山) 은 탕목읍(湯沐邑)을 바칠 것이니 군주의 귀한 인척과 부형들이 모두 땅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대저 땅을 떼어 이익을 취한 것은 오백(五伯, 춘추오패)들이 군을 엎고 장수를 잡기 위해 추구했던 것입니다. 인척을 제후로 봉한 것은 탕왕(湯王)이나 무왕(武王)이 군주를 내쫓거나 죽이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이제 군주께서 팔짱을 낀 채 두 가지를 다 얻을 수 있기에 신이 군주를 위해 그렇게 하려는 것입니다.
지금 대왕께서 진(秦)나라 편을 든다면 진은 틀림없이 한나라와 위나라를 약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고, 제나라 편을 든다면 제나라는 틀림없이 초나라와 위나라를 쇠약하게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위나라가 약해지면 하외(河外)를 떼어 (진에) 줄 것이고, 한나라가 약해지면 의양(宜陽)을 (진에) 내놓을 것입니다. 의양을 내놓으면 상군(上郡)에 이르는 길이 끊어질 것이고, 하외를 떼어주면 (상군으로) 가는 길이 통하지 않게 됩니다. 또 초나라가 약해지면 (조나라는) 지원을 잃게 될 것입니다. 이 세 계책을 잘 따지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또 진(秦)이 지도(軹道)를 취하면 남양(南陽)이 위험에 처하고, 한을 겁박하여 주(周)를 포위하면 조는 알아서 군대를 동원해야 할 것입니다. 위(衛)를 점거하여 권성(卷城)을 취하면 제나라는 틀림없이 진에 조회를 드리러 갈 것입니다.
진의 욕심은 산동을 얻고나면 틀림없이 군대를 일으켜 조를 향할 것입니다. 진의 군대가 황하를 건너고 장수(漳水)를 넘어 번오(番吾)를 점거하면 군대는 (조의 도성인) 한단(邯鄲) 아래에서 싸우게 될 것입니다. 군주를 위해 신이 걱정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지금 산동에 세워진 나라로서 조나라보다 강한 나라는 없습니다. 조나라 땅이 사방 2천 여리에 무장한 군대가 수십 만이며, 전차는 1천 승에 전투마가 1만 필이고, 식량은 몇 년을 버틸 수 있을 정도입니다.
서쪽으로 상산(常山)이, 남쪽으로 장수가, 동쪽으로 청하(淸河)가, 북쪽으로 연나라가 있습니다. 연나라는 본디 약한 나라이므로 두려울 것 없습니다. 천하에서 진이 두려워할 존재로는 조나라만한 나라가 없습니다.
그런데 진이 군을 일으켜 감히 조를 치지 못하는 것은 왜 그렇겠습니까? 한과 위가 배후에서 치지 않을까 겁이 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위는 조의 남쪽 방패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이 한, 위를 공격할 경우 큰 산이나 강이라는 장애가 없기 때문에 누에가 뽕잎을 갉아먹듯 서서히 나라의 도성에까지 이르게 될 것입니다.
한, 위는 진에 버티지 못하고 틀림없이 진의 신하로 굴복할 것입니다. 진에게 한, 위의 제약이 없다면 그 화는 틀림없이 조에게 몰릴 것입니다. 군주를 위해 신이 걱정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신이 듣기에 요 임금이나 순 임금은 땅도 제대로 갖고 있지 못했지만 천하를 가졌고, 우 임금은 100사람이 모여 사는 마을 하나 없었지만 제후들의 왕이 되었으며, 탕 임금과 무왕은 병사는 3천을 넘지 못했고 전차는 300승에 불과했으며 군대는 3만을 넘지 못했지만 천자로 올라섰습니다. 참으로 그 방법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현명은 군주는 밖으로 적의 강약을 헤아리고 안으로 자기 병사들의 소질을 가늠하여 두 군대가 서로 맞부딪치지 않고도 승패와 존망의 기미를 진작에 가슴 속에 그려둡니다. 그러니 어찌 여러 사람의 말에 좌우되어 어리석게 일을 결단하겠습니까?
신이 천하의 지도를 놓고 가만히 살펴보니, 제후들의 땅은 진의 다섯배이고, 병력을 헤아려 보니 진의 열 배입니다. 여섯 나라가 하나가 되어 힘을 합쳐 서쪽으로 진을 공격한다면 진은 틀림없이 격파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서쪽을 향해 진을 섬기며 진의 신하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무릇 상대를 격파하는 것과 상대에게 격파당하는 것, 상대를 신하로 삼는 것과 상대의 신하가 되는 것을 어찌 한 날 한 시에 놓고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연횡(連橫)을 주장하는 자들은 죄다 제후들의 땅을 떼어서 진에게 주라고 합니다. 진과의 동맹이 성사되면 누대를 높이 짓고 궁실을 아름답게 꾸며서는 음악 소리를 들을 것입니다.
앞에는 누각과 궁궐이, 뒤에는 늘씬하고 아름다운 미인들로 들어 찰 것입니다. 나라가 진에 의해 피해를 입어도 이 자들은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연횡 주장자들은 낮밤으로 진의 권세를 가지고 제후들에게 공갈쳐서 땅 떼어낼 일에만 힘을 씁니다.
그러니 대왕께서는 이에 대해 깊게 생각하시길 바라옵니다. 신이 듣기에 현명한 군주는 의심을 끊고 헛소리를 없애며 유언비어의 길과 붕당의 문을 막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신은 이 자리에서 군주를 높이고 땅을 넓히며 군대를 강하게 만들 계책을 충심으로 펼치려는 것입니다.
이에 가만히 대왕을 위해 계책을 내봅니다. 한, 위, 제, 초, 연, 조가 하나가 되어 합종하여 진에 맞서는 것보다 나은 것은 없습니다. 지금 천하의 장상들을 원수(洹水)로 모이게 하여 인질을 교환하고 백마를 죽여 맹서해야 합니다. 맹약은 이렇습니다.
'진이 초를 공격하면 제와 위가 정예병을 내어 초를 돕고, 한은 진의 식량 보급로를 끊고, 조는 장수를 건너며, 연은 상산의 북쪽을 지킨다.
진이 한과 위를 공격하면 초는 그 후방을 끊고, 제는 정예병을 내어 이를 돕고, 조는 장수를 건너며, 연은 운중을 지킨다.
진이 제를 공격하면 초는 그 후방을 끊고, 한은 성고(城皐)를 지키고, 위는 그 공격로를 막으며, 조는 장하와 박관(博關)을 넘고, 연은 정예병을 내어 이를 돕는다.
진이 연을 공격하면 조는 상산을 지키고, 초는 무관(武關)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제는 발해(渤海)를 건너며, 한과 위는 모두 정예병을 내어 이를 돕는다.
진이 조를 공격하면 한과 초는 의양과 무관에 군을 주둔시키며, 위는 하외에 군을 주둔시키고, 제는 청하를 건너며, 연은 정예병을 내어 이를 돕는다. 제후들 중 맹약에 따르지 않는 자가 있으면 5국의 군대가 함께 그를 토벌할 것이다.'
이렇게 6국이 합종하여 진을 물리치면 진의 군대는 감히 함곡관을 나와 산동을 해치지 못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패왕의 업이 성취될 것입니다.'
조왕은, '과인은 나이가 어리고 나라를 세운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사직을 위한 장기 계책을 들어 보지 못했소이다. 지금 상객께서 천하를 보존하고 제후들을 안정시키는 뜻을 갖고 계시니 과인이 삼가 나라를 들어 따르겠소이다'고 했다.
이에 장식된 100승의 수레, 황금 1천일, 백옥 100쌍, 비단 1천 필을 가지고 제후들과 맹약하게 했다.
한(韓)나라 유세
이 때 주 천자가 문왕과 무왕에게 제사지낸 고기를 진(秦) 혜왕(惠王)에게 보냈다. 혜왕은 서수(犀首)에게 위(魏)나라를 공격하게 하여 장수 용고(龍賈)를 사로잡고, 위나라의 조음(雕陰)을 취하고는 동쪽으로 진군하려고 했다.
소진은 진의 군대가 조나라에 이를 것이 두려워 장의(張儀)를 자극하여 진으로 들어가게 했다.
이에 (소진은) 한(韓)나라 선왕(宣王)에게 이렇게 유세했다. '한은 북쪽으로 공읍(鞏邑)과 성고의 견고함이 있고, 서쪽으로 의양과 상판(商阪) 같은 요새가 있으며, 동쪽으로 완읍(宛邑)과 양읍(穰邑)과 유수(洧水)가 있고, 남쪽으로 형산(陘山)이 있습니다.
땅은 사방 9백여 리에 무장 병력이 수십만 명이며, 천하의 강력한 활과 쇠뇌는 모두 한에서 나옵니다. 계자(谿子), 소부시력(少府時力), 거래(距來)는 모두 6백보 밖까지 쏠 수 있습니다.
한나라의 병사들이 발로 당겨 쏘면 100발이 쉴 새 없이 나갑니다. 멀리 있는 자는 화살 끝이 가슴에 가서 박히고, 가까이 있는 자는 화살 끝이 심장을 뚫습니다. 한나라 병사들의 칼과 창은 모두 명산(冥山), 당계(棠谿), 묵양(墨陽), 합부(合賻), 등사(鄧師), 원풍(宛馮), 용연(龍淵), 태아(太阿)에서 납니다.
모두 땅에서는 소나 말을 자르고, 물에서는 고니나 기러기를 베고, 적을 맞이해서 싸우면 단단한 갑옷, 쇠 방패, 가죽 덧옷을 뚫어내는데 이런 것들을 전부 갖추고 있습니다. 용감한 한나라 병사들이 단단한 갑옷을 입고 강한 쇠뇌를 밟고 날카로운 검을 차면 1당 100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대저 한의 강력함과 대왕의 현명함이 있는데도 서쪽으로 진을 받들어 손을 모아 복종한다면 사직의 수치와 천하의 웃음거리로 이보다 더한 것도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대왕께서는 깊이 헤아리시길 바라옵니다.
대왕께서 진을 섬긴다면 진은 틀림없이 의양과 성고를 요구할 것입니다. 지금 그렇게 한다면 다음 해에도 다시 땅을 떼어달라고 요구할 것입니다. 그렇게 줘버리면 줄 땅이 없을 것이고, 주지 않으면 이전의 공은 다 사라지고 바로 화가 닥칠 것입니다.
게다가 대왕의 땅은 그 끝이 있지만 진의 요구는 끝이 없습니다. 끝이 있는 땅으로 끝이 없는 요구에 맞서는 것, 이것이 이른바 원한을 사서 화근을 심는다는 것으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땅은 다 빼앗기지요. 신은 속담에 '닭의 주둥이가 될지언정 소의 꼬리는 되지 말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지금 서쪽으로 공손히 손을 모으고 신하가 되어 진을 섬긴다면 소의 꼬리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대왕의 현명함과 강력한 한의 군대를 끼고도 소 꼬리라는 명성을 얻게 된다면 신은 참으로 대왕을 대신하여 수치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에 한왕은 바로 안색이 바뀌더니 팔을 휘두르며 눈을 부릅 뜨고 검을 꽉 눌러 잡고는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며, '과인이 못났지만 분명 진나라를 섬기지는 않을 것이오. 지금 그대가 조왕의 가르침을 전했으니 삼가 사직을 받들어 따르겠소이다'고 했다.
위(魏)나라 유세
또 위(魏) 양왕(襄王)에게 이렇게 유세했다. '대왕의 땅은 남쪽으로 홍구(鴻溝), 진(陳), 여남(汝南), 허(許), 언(郾), 곤양(昆陽), 소릉(召陵), 무양(舞陽), 신도(新都), 신처(新郪)가 있고, 동쪽으로 회하(淮河), 영수(潁水), 자조(煮棗), 무서(無胥)가 있으며, 서쪽으로 장성(長城)을 경계로 하고, 북쪽으로 하외(河外), 권(卷), 연(衍), 산조(酸棗)가 있는 사방 천 리입니다.
땅은 보기에는 작지만 거주민과 집들이 빼곡이 들어 차있어 목축할 땅조차 없습니다. 인구가 많고, 수레와 말이 많아 낮밤으로 끊없이 오가는 소리가 마치 삼군의 무리가 지나다니는 것 같습니다.
신이 가만히 헤아려 보니 대왕의 나라는 초나라 못지 않습니다. 그러나 연횡을 내세우는 자들은 대왕을 위협하여 호랑이나 이리처럼 사나운 진(秦)나라와 함께 천하를 침범하라고 하는데, 일단 위나라가 진나라의 공격을 받으면 그 화는 돌아보지도 않을 것입니다.
대저 강한 진나라를 끼고 안으로 그 군주를 겁박하니 죄로 말하자면 이보다 더한 죄는 없을 것입니다.
위는 천하의 강국이고, 대왕은 천하의 현명한 왕이십니다. 그런데 지금 서쪽으로 진을 섬길 뜻을 가지고 동쪽의 울타리로 자청하며 제왕의 궁을 짓고 관과 허리띠를 받아들여 봄 가을로 제사를 드리려 하니 신은 가만히 대왕을 대신하여 부끄럽습니다.
신이 듣기에 월왕(越王) 구천(句踐)은 지친 병졸 3천으로 부차(夫差)를 간수(干遂)에서 사로잡았고, 무왕(武王)은 병졸 3천 명과 전차 3백 대로 목야(牧野)에서 주(紂)를 제압했습니다. 어찌 그 병사가 많아서였겠습니까? 참으로 그들의 위세를 다 발휘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듣자하니 대왕의 군대는 무사 20만, 창두(蒼頭) 20만, 분격(奮擊) 20만, 잡역부 l0만, 전차 6백대, 군마 5천 필이라 하더군요. 이는 월왕 구천과 무왕을 한참 뛰어넘습니다.
그런데 지금 신하들의 말을 들으시고는 진나라를 신하의 신분으로 섬기려 하신다더군요. 대저 진을 섬기려면 땅을 떼주면서 성의를 나타내야 할 것이니 군대를 사용하지 않고도 나라에 손실을 끼치는 것입니다.
무릇 진을 섬기자고 말하는 신하들은 모두 간사한 자들이지 충신이 아닙니다. 무릇 신하된 사람으로 그 군주의 땅을 떼어서 외교를 구걸하는 것은 한 때의 공을 훔치려고 그 뒷일은 돌아보지 않는 것으로, 공실을 깨서 자기 집을 키우고, 밖으로 강한 진의 위세를 끼고 안으로 그 군주를 겁박하여 땅을 떼어주길 바라는 것입니다. 원하옵건대 대왕께서는 깊게 살피십시오.
'주서(周書)'에, '싹을 날 때 자르지 않아 덩굴이 퍼지면 어찌 할까? 작을 때 자르지 않아 장차 도끼를 써야 하지'라고 했습니다.
대왕께서 정말 신의 말씀을 들어 여섯 나라와 합종하여 한 마음으로 힘을 합친다면 강력한 진나라의 침략은 더 이상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저희 조왕께서 신에게 어리석은 계책을 내어 분명하게 맹약하고자 하오니 모든 것을 대왕의 뜻에 따를 것이옵니다.'
위왕은, '과인이 불초하여 이런 좋은 가르침을 들어보질 못했소이다. 지금 그대는 조왕의 지시로 나에게 계시를 주었으니 삼가 거국적으로 따르겠소이다!'고 했다.
제(齊)나라 유세
이어 동쪽 제(齊) 선왕(宣王)에게 이렇게 유세했다. '제나라는 남쪽으로 태산(泰山)이, 동쪽으로 낭야산(琅琊山)이, 서쪽으로 청하(淸河)가, 북쪽으로 발해가 있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사방이 요새인 나라입니다.
제의 땅은 사방 2천 리가 넘고 갑옷을 입은 병사가 수십 만에 식량은 산더미입니다. 삼군(三軍)의 정예병과 오도(五都)의 병사는 진격할 때는 화살 같고, 전투에서는 우레가 치는 것 같고, 물러날 때는 비바람 같습니다.
전쟁이 터지더라도 (적이) 태산을 넘거나 청하를 끊어버리거나 발해를 건넌 적이 없습니다. 임치(臨菑)에 7만 호가 있는데, 제가 가만히 헤아려보니 한 집에 남자가 셋 정도이니 먼 현에서 징발하지 않아도 임치의 병사만 아마 21만입니다.
임치는 매우 부유하여 생황을 불고 비파와 거문고를 타며 축을 두드리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모두 닭싸움과 개 경주를 즐기고, 육박과 축국을 즐깁니다.
임치의 도로는 수레바퀴가 서로 부딪치고 사람들의 어깨가 서로 부대끼며, 옷을 벗어 펼치거나 소매를 들어올리면 장막이 되고, 흘리는 땀이 비가 될 정도입니다. 집집마다 풍족하니 의지와 기세가 대단합니다.
무릇 대왕의 현명하심과 제나라의 강력함은 천하가 당해낼 수 없습니다. 지금 그런데 서쪽으로 진을 섬기려 하시니 신은 가만히 대왕을 대신하여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그리고 한과 위가 진을 그렇게 두려워하는 것은 진과 국경을 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출병하여 서로 맞부딪치면 열흘을 넘기지 않고 승패와 존망의 추세가 결정됩니다.
만일 한과 위가 싸워 진을 이긴다면 병력의 반은 잃게 되어 사방 변경을 지킬 수 없게 됩니다. 싸워 이기지 못하더라도 나라는 위기와 멸망이 뒤따를 것입니다. 이 때문에 한과 위가 진과의 싸움을 중시하는 반면 가볍게 진의 신하가 되려는 것입니다.
지금 진이 제를 공격한다면 상황은 이와 다를 것입니다. 한과 위의 땅을 등지고 위(衛)의 양진(陽晉) 길을 지나 항보(亢父)라는 험지를 지나야 하는데, 전차와 말이 서로 지나갈 수 없어 100명으로 험지를 지키면 1,000명이 지나갈 수 없는 곳입니다.
진이 깊숙이 들어오고 싶어도 이리가 뒤를 돌아보듯 한과 위가 뒤에서 어찌 할까봐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진은 두려움과 의심에 사로잡혀 허풍을 떨며 잘난 척하지만 감히 쳐들어오지 못하는 것이니 진이 제를 해칠 수 없음 또한 분명합니다.
대저 진이 제를 어찌 할 수 없다는 것을 깊이 헤아리지 않고 서쪽의 진을 섬기려는 것은 신하들의 잘못된 계책입니다. 지금 신하로서 진을 섬긴다는 말을 듣지 않고도 나라를 강하게 만들 방법이 있으니, 신은 이 때문에 대왕께 이 점에 유의해서 일을 꾀하시길 바라옵니다.'
제왕은, '과인이 영민하지 못한데다 먼 바다가에 의지한 길이 없는 동쪽 끝에 위치한 나라인지라 가르침을 들을 기회가 없었소. 지금 그대가 조왕의 지시로 나를 깨우치니 삼가 나라를 들어 따르겠소이다!'고 했다.
초(楚)나라 유세
이에 서남으로 가서 초(楚) 위왕(威王)에게 이렇게 유세했다. '초는 천하의 강국이고, 왕은 천하의 현명한 왕이십니다.
서쪽으로 검중(黔中)과 무군(巫郡)이, 동쪽으로 하주(夏州)와 해양(海陽)이, 남쪽으로 동정호(洞庭湖)와 창오(蒼梧)가, 북쪽으로 형색(陘塞), 순양(郇陽)이 있고, 땅은 사방 5천리에 갑옷으로 무장한 병사가 100만, 전차가 1천 량, 기마가 1만 필이며, 식량은 10년을 버팁니다. 이는 패왕의 밑천입니다.
대저 초의 강대함과 왕의 현명함은 천하가 당해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서쪽으로 진을 섬기려 하시니 서쪽 장대(章臺) 아래로 입조하지 않는 제후가 없을 것입니다.
진이 두려워하기로는 초만한 나라가 없습니다. 초가 강하면 진은 약해지고, 진이 강하면 초가 약해지므로 그 기세상 양립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대왕을 위한 계책으로는 합종으로 진을 고립시키는 것만한 것이 없습니다.
대왕께서 합종을 따르지 않으신다면 진은 틀림없이 양군을 일으켜 하나는 무관을 나올 것이고 하나는 검중으로 내려올 것이니 (도성) 언영(鄢郢)이 흔들릴 것입니다.
신이 듣기에 일이란 혼란스러워지기 전에 다스려야 한고 발생하기 전에 조치해야 한다고 합니다. 근심이 닥친 다음 걱정해봐야 늦습니다. 그러니 대왕께서는 일찌감치 잘 숙고하시길 원하옵니다.
대왕께서 참으로 신의 말씀을 들으신다면 신은 산동의 나라들로 하여금 사시사철 제물을 바치게 하고, 대왕의 영명하신 가르침을 잇게 하며, 종묘사직을 대왕께 맡기게 할 것이며, 병사를 훈련시키고 무기를 갈게 하여 대왕이 쓰실 수 있게 하겠습니다.
대왕께서 진실로 신의 어리석은 계책을 활용하시면 한, 위, 제, 연, 조, 위의 기막힌 음악과 미녀들이 틀림없이 후궁에 가득 찰 것이고, 연과 대(代)의 낙타와 좋은 말들이 틀림없이 마굿간을 채우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합종을 하면 초가 왕이 되고, 연횡을 하면 진이 제왕이 됩니다. 지금 패왕의 대업을 버리고 남을 섬긴다는 소리를 듣는다면 신이 가만히 생각건대 대왕을 위해서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무릇 진은 호랑이와 이리 같은 나라로 천하를 삼킬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진은 천하의 원수입니다. 연횡을 주장하는 자들은 죄다 제후국의 땅을 떼어서 진을 섬기려 합니다.
이는 말하자면 원수를 받들어 공양하는 것입니다. 무릇 신하된 자가 자기 군주의 땅을 떼어 힘센 호랑이와 늑대 같은 진과 외교하여 천하를 침범하게 하니 언젠가 진 때문에 근심이 생겨도 (그 자들은) 그 화를 나몰라라 할 것입니다.
밖으로 강력한 진의 위세를 끼고 안으로 그 군주를 겁박하여 땅을 떼주라 하니 대역불충이 이보다 더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합종하면 제후들이 땅을 떼어 초를 섬길 것이고, 연회하면 초는 땅을 떼어 진을 섬겨야 할 것이니 이 두 계책이 이렇게 서로 거리가 멉니다.
이 둘 중에 대왕께서는 어느 쪽에 서시렵니까? 그러기에 저희 조왕께서 신을 시켜 어리석은 계책을 아뢰게 하셨으니 약속을 분명하게 받들어 대왕의 말씀을 따를 것입니다.'
초왕은, '과인의 나라는 서쪽으로 진과 접해 있고, 진은 파(巴), 촉(蜀)을 빼앗고 한중(漢中)을 집어삼킬 야심을 갖고 있소. 진은 호랑이와 이리 같은 나라라 친할 수 없소. 한, 위는 진의 위협을 직접 받는지라 그들과 깊은 논의를 함께 할 수 없소.
자칫 깊게 도모했다가 도리어 그들이 진에게 일을 누설하여 모의가 실행되기도 전에 나라가 위험해질까 두렵소. 과인이 생각해보건대 초가 진에 맞서 승리할 수 없고, 안으로 신하들과 모의하자니 믿음이 부족하오.
과인은 좌불안석이 되어 먹어도 맛을 모르고, 마음은 깃발을 장대에 매단 것처럼 흔들려 어디로 가야 할 지를 모르겠소. 지금 그대가 천하를 하나로 하여 제후들을 거두고 나라를 위기에서 보존하려 하니 과인이 삼가 사직을 받들어 따르도록 하겠소!'라 했다.
이에 6국은 합종하여 힘을 합치게 되었고, 소진은 합종의 장이 되어 6국의 재상을 겸하게 되었다.
소진의 출세와 합종의 와해
소진이 북쪽으로 조왕에게 보고하러 가다가 낙양을 지나게 되었는데 따르는 마차와 각국의 호송 사신들이 얼마나 많은지 왕인가 의심할 정도였다.
주(周) 현왕(顯王)이 이를 듣고는 겁이 나서 도로를 청소하고 교외로 사람을 보내 위로했다.
소진의 형제, 처, 형수는 곁눈질만 할 뿐 감히 쳐다보지 못하고 엎드려 식사 시중을 들었다. 소진은 웃으며 그 형수에게, '전에는 오만하더니 지금은 어째서 이렇게 공손합니까?'라 했다.
형수는 몸을 굽혀 기면서 얼굴을 땅바닥에 대고는, '시동생의 지위가 높고 돈이 많은 것을 보았기 때문이지요'라며 사죄했다.
소진은 길게 탄식하며, '이 한 사람의 몸이 부귀해지니 친척들이 두려워하고, 가난하고 천할 때는 경시하니 하물며 남들이야! 나한테 낙양 교외에 밭 두 이랑이라도 있었던들 내가 어찌 6국 재상의 도장을 찰 수 있었겠는가?'고 했다. 그리고는 천금을 풀어 종족과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일찍이 소진이 연나라로 갈 때 어떤 사람에게 100전을 빌려 노자로 삼은 적이 있는데, 부귀해지자 100금으로 갚았다. 일찍이 덕을 본 사람 모두에게 두루 보답했는데, 그의 시종 중 오직 한 사람만 보상을 받지 못하자 소진에게로 와서 말했다.
소진은, '내가 너를 잊지 않았다. 네가 나와 함께 연나라로 갈 때 역수에서 나를 두 번 세 번 버리려 했다. 그 당시 내가 곤경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너를 아주 잘 기억한다. 그래서 너를 뒤로 미루어 두었는데 이제 너에게도 주마!'라고 했다.
소진은 여섯 나라와 합종을 맺고 조나라로 돌아오니 조 숙후는 그를 무안군(武安君)으로 삼고 바로 진나라에 맹약서를 보냈다. 진나라 군대가 함곡관을 15년 동안 감히 넘보지 못했다.
그 후 진은 서수(犀首)에게 제와 위를 속여 함께 조를 치게 하여 합종의 맹약을 깨려고 했다. 제와 위가 조를 공격하자 조왕은 소진을 꾸짖었다. 소진은 두려워 연에 사신으로 가서 반드시 제에 보복하길 청했다. 소진이 조를 떠나자 합종은 완전 와해되었다.
소진의 재활약과 죽음
진 혜왕(惠王)은 그 딸을 연 태자의 아내가 되게 했다. 이해에 연 문후(文侯)가 죽고 태자가 즉위했는데 이가 연 역왕(易王)이다. 역왕이 막 즉위했을 때 선왕(宣王)은 연의 국상을 틈타 연을 토벌하여 열 개 성을 취했다.
역왕은 소진에게, '지난 날 선생이 연에 오자 선왕께서는 선생에게 자금을 주어 조로 가게 하여 마침내 6국이 합종의 맹약을 맺었소. 지금 제가 먼저 조를 치고 이어 연에 이르렀으니 선생 때문에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었소이다. 선생은 연을 위해 침탈당한 땅을 돌려받을 수 있겠소?'라고 했다.
소진이 크게 부끄러워 하며, '왕을 위하여 되찾아 오길 청합니다'고 했다.
소진은 제왕을 만나 두 번 절하고 고개를 숙여 축하하고 고개를 들며 조의를 나타냈다.
제왕이, '어째서 축하와 조의를 잇따라 급하게 표하는 것이오?'라고 했다.
소진은, '신이 듣기에 굶주린 사람이 아무리 배가 고파도 오훼(烏喙)는 먹지 않는 것은 잠시 배를 채울 수는 있어도 굶어죽는 것과 같은 고통이 따르기 때문이랍니다. 지금 연이 비록 약소하긴 하지만 그래도 진왕의 작은 사위입니다.
대왕께서 그 성 열 개가 탐이 나서 강한 진과 오래도록 원수가 되려고 합니다. 이제 약한 연이 앞장을 서고 강한 진이 그 뒤를 따르면서 천하의 정예병들을 불러들이게 될 터이니 이는 오훼를 먹는 것과 같습니다'고 했다.
제왕은 걱정에 얼굴색이 바뀌며, '그렇다면 어찌 하면 좋겠소?'라고 했다.
소진은, '신이 듣기에 예로부터 일을 잘 통제하는 사람은 화를 복으로 바꾸고, 실패를 성공으로 삼는다고 합니다. 대왕께서 진정 신이 계책을 들으시고 연의 열 개 성을 돌려 주신다면 연은 아무 일 없이 열 개 성을 얻으니 기뻐할 것이 틀림없고, 진왕은 자기 때문에 연의 열 개 성을 돌려 주었다고 여기고 또한 기뻐할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이 이른바 원수를 버리고 돌처럼 단단한 친구를 얻는다는 것입니다.
연과 진이 모두 제를 섬기게 되면 대왕께서는 천하를 호령하게 되어 말을 듣지 않는 자가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왕께서는 빈말로 진에 붙고 성 열 개로 천하를 취하신다면 이것이야말로 패왕의 업이 아니겠습니까?'고 했다.
왕이, '좋소!'라 하고는 바로 연의 열 개 성을 돌려주었다.
누군가 소진을 헐뜰길, '이쪽 저쪽을 오가며 나라를 팔고 뒤집는 신하입니다. 장차 난을 일으킬 것입니다'고 했다. 소진은 죄를 얻을까 두려워 제에서 연으로 돌아왔으나 연왕은 복직시키지 않았다.
소진이 연왕을 만나서는, '신은 동주(東周)의 보잘 것 없는 사람으로 작은 공도 세우지 못했는데 대왕께서 몸소 종묘에서 접견하시고 조정에서는 예로 대해 주셨습니다.
지금 신이 왕을 위해 제의 군대를 물러가게 하고 열 개의 성을 얻었으니 더욱 가까이 하셔야 마땅할 것입니다. 지금 이렇게 왔지만 왕께서 신을 복직시키지 않으시는 것은 누군가 왕께 신을 믿을 수 없다고 헐뜯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신에 대한 불신은 왕의 복입니다. 신이 듣기에 충성이니 믿음이니를 말하는 자는 자신을 위한 것이고, 나라를 위해 나아가 무엇인가를 얻으내려는 자는 타인을 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왕에 대한 신의 유세는 연을 위해 속인 것 아니었던가요?
신이 늙으신 어머니를 동주에 남겨둔 것은 정말이지 저 자신을 위한 것을 버리고 타인을 위해 나아가 실행한 것이었습니다.
지금 효도하면 증삼(曾參), 청렴하면 백이(伯夷), 믿음하면 미생(尾生)이라 하는데 이 세 사람을 얻어 대왕을 섬기게 한다면 어떻겠습니까?'고 했다.
왕이, '충분하지'라고 했다.
소진은, '증삼 같은 효자는 효도 때문에 부모를 떠나 밖에서는 하루도 잘 수 없는 사람입니다. 왕께서는 어떻게 그런 사람을 천 리를 나가 약한 연과 위기에 처한 왕을 섬기게 하시렵니까?
청렴한 백이는 고죽군(孤竹君)의 후계자를 거부하고 무왕(武王)의 신하가 되는 것이 싫어 제후 책봉을 받지 않은 채 수양산에서 굶어 죽었습니다. 이렇게 청렴한 사람을 왕께서는 어떻게 천 리를 나가 제로부터 무엇인가를 얻어내게 하시렵니까?
믿음하면 미생인데, 여자와 다리 아래에서 만나기로 약속했으나 여자는 오지 않고 물이 찼지만 떠나지 않고 기둥을 끌어안은 채 죽었습니다.
이렇게 신의를 지키는 자를 왕께서는 어떻게 천 리 밖으로 나가 제의 강한 군대를 물러가게 만드시렵니까? 신은 이른바 그 충성과 신의 때문에 윗사람에게 죄를 지은 것입니다'고 했다.
연왕은 말하기를, '그대는 충성과 신의가 없다고 해놓고 어째서 충성과 신의 때문에 죄를 얻었다고 하는 것이오?'라고 했다.
소진은, '그렇지 않습니다. 신이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먼 곳으로 관리가 되어 나갔는데 그 처가 다른 사람과 간통을 했습니다.
그 남편이 돌아올 때가 되자 간통한 자가 걱정을 하자 아내는 '걱정말라. 내가 이미 술에다 약을 타서 그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습니다.
석 달 뒤 그 남편이 오자 아내는 첩을 시켜 약을 탄 술을 갖다 주게 했습니다. 첩은 술에 약이 들었다고 말하자니 주인의 아내에게 쫓겨날 것이 걱정되었고, 말하지 않자니 주인을 죽일까 겁이 났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넘어져서 술을 쏟아버렸습니다.
주인이 크게 노하여 50대나 매질을 했습니다. 첩은 한 번 넘어져서 술을 엎질러 버림으로써 위로는 주인을 살리고 아래로는 주인의 아내도 살렸지만 매질을 면치 못했습니다. 그러니 충성과 신의를 지키고도 어찌 죄가 없다 하겠습니까? 무릇 신의 잘못도 불행하게도 이와 비슷하지요'고 했다.
연왕은, '선생은 다시 지난 번 관직으로 나가십시오'라 하고는 더욱 더 잘 대해주었다.
연나라 역왕(易王)의 어머니는 문후의 부인으로 소진과 사사로이 간통을 저질렀다. 연왕이 이를 알고도 소진을 더 후하게 대우하자 소진은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 바로 연왕에게, '신이 연에 남아 있어서는 연을 높일 수 없고, 제에 있으면 연은 중요해질 수 있습니다'고 했다.
연왕은, '선생이 원하는 대로 하시오'라고 했다. 이에 소진은 연에서 죄를 얻은 것처럼 꾸며서 제로 도망가자 제 선왕은 그를 객경(客卿)으로 삼았다.
제 선왕이 죽고 민왕(湣王)이 즉위하자 소진은 민왕에게 후하게 장례를 지내는 것이 효도이며 궁실을 높이고 놀이터를 크게 하는 것이 뜻을 얻는 것이라고 유세하여 연을 위해 제를 피폐하게 만들고자 했다.
연 역왕이 죽고 쾌(噲)가 왕이 되었다. 그 후 제의 대부들 중 소진과 총애를 다투는 자가 많아져 사람을 시켜 소진을 찔렀으나 죽지 않고 부상을 입은 채 도망쳐 돌아왔다.
제왕이 사람을 시켜 적을 찾게 했으나 찾지 못했다. 소진이 죽음을 앞두고 제왕에게, '신은 죽으면 신을 거열형에 처해 저자거리에서 조리를 돌리며 '소진이 연을 위해 제에서 난리를 일으켰다'고 말하게 하십시오. 이렇게 하면 신을 죽이려던 적을 틀림없이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고 말했다.
이에 그 말대로 했더니 소진을 죽인 자가 과연 제발로 나타났고, 제왕은 그 자를 잡아서 죽였다. 연이 이 소식을 듣고는 '심하구나, 제가 소진 선생을 위해 원수를 갚는 정도가!'고 했다.
▶️ 前(앞 전/자를 전)은 ❶형성문자이나 회의문자로 보는 견해도 있다. 뜻을 나타내는 선칼도방(刂=刀; 칼, 베다, 자르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歬(전)으로 이루어졌다. 歬(전)은 舟(주; 배, 탈것)와 止(지; 발의 모양, 나아가는 일)의 합자(合字)이다. ❷회의문자로 前자는 '앞'이나 '먼저', '앞서 나가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前자는 月(달 월)자와 刀(칼 도)자와 함께 상단에는 머리 모양이 결합한 것이다. 그런데 前자의 금문을 보면 舟(배 주)자와 止(발 지)자가 결합한 歬(앞 전)자가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배가)앞으로 가다'라는 뜻을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갑골문과 금문, 소전에서는 歬자가 '앞'이나 '앞서 나가다'라는 뜻으로 쓰였었다. 그러나 해서에서는 舟자가 月자가 바뀌었고 止자는 ()로 변형되었다. 여기에 刀자까지 더해지면서 지금의 前자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해서에서 刀자가 더해진 것은 '가위'를 뜻하기 위해서였다. 후에 '자르다'라는 뜻은 剪(자를 전)자로 따로 만들어지면서 뜻이 분리되었다. 그래서 前(전)은 (1)이전(以前) (2)막연하게 과거를 이를 적에 쓰는 말. 그건 (3)어떤 직함이나 자격 등을 나타내는 명사(名詞) 앞에 붙여 전날의 경력을 나타내는 말 (4)일부 명사 앞에 붙어 전기(前期)의 뜻을 나타냄 (5)일부 명사 앞에 붙어 앞부분의 뜻을 나타냄 (6)연대(年代), 연호(年號) 앞에 붙어 기원전(紀元前)의 뜻을 나타냄 등의 뜻으로 ①앞 ②먼저 ③미래(未來), 앞날 ④미리, 앞서서, 사전에 ⑤거무스름한 빛깔 ⑥가위 ⑦앞서다 ⑧나아가다 ⑨인도하다 ⑩뵙다, 찾아뵙다 ⑪소멸하다 ⑫자르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먼저 선(先),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뒤 후(後)이다. 용례로는 어떤 사물을 의논할 때 먼저 내세우는 기본이 되는 것을 전제(前提), 앞과 뒤와 먼저와 나중을 전후(前後), 전에 가졌던 직업 또는 벼슬을 전직(前職), 지난해나 작년을 전년(前年), 앞으로 나아감을 전진(前進), 이미 있었던 사례를 전례(前例), 앞쪽이나 일선을 전방(前方), 앞쪽에 친 진을 전진(前陣), 지나간 시대를 전대(前代), 앞서의 경력을 전력(前歷), 미리 나타나 보이는 조짐을 전조(前兆), 전번의 시기를 전기(前期), 직접 뛰어든 일정한 활동 분야를 전선(前線), 글이나 편지 전문을 생략함을 전략(前略), 전에 그 임무를 맡았던 사람을 전임(前任), 앞에서 이미 서술함을 전진(前陳), 앞의 부분을 전부(前部), 앞으로 갈 길을 전도(前途), 앞에 게재함 또는 지난해를 전재(前載), 변함이 없이 전과 같음을 여전(如前), 오래 전이나 그 전을 이전(以前), 자정으로부터 낮 열두 시까지의 동안을 오전(午前), 어떤 일을 시작하거나 실행하기 전을 사전(事前), 이전이나 이제까지를 종전(從前), 바로 앞이나 일이 생기기 바로 전을 진전(直前), 식을 거행하기 전을 식전(式前), 살아 있는 동안을 생전(生前), 앞 수레가 엎어진 바퀴 자국이란 뜻으로 앞사람의 실패를 거울삼아 주의하라는 교훈을 이르는 말을 전거복철(前車覆轍), 앞수레가 엎어진 것을 보고 뒷수레가 경계하여 넘어지지 않도록 한다는 말로 전인의 실패를 보고 후인은 이를 경계로 삼아야 한다는 의미의 말을 전거가감(前車可鑑), 지난 시대에는 들어 본 적이 없다는 뜻으로 매우 놀랍거나 새로운 일을 이르는 말을 전대미문(前代未聞), 이전 세상에는 듣지 못하였다는 뜻으로 지금까지는 들어 본 적이 없는 새로운 것임의 비유하는 말을 전고미문(前古未聞), 이전 사람이 아직 밟지 않았다는 뜻으로 지금까지 아무도 손을 대거나 발을 디딘 일이 없음을 일컫는 말을 전인미답(前人未踏), 앞문에서 호랑이를 막고 있으려니까 뒷문으로 이리가 들어온다는 뜻으로 재앙이 끊임 없이 닥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을 전호후랑(前虎後狼), 앞으로 갈 길이 아득히 멀다는 뜻으로 목적하는 바에 이르기에는 아직도 남은 일이 많음을 이르는 말을 전도요원(前途遙遠), 앞으로 잘 될 희망이 있음 또는 장래가 유망함을 이르는 말을 전도유망(前途有望), 일에 부닥쳐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앞뒤를 재며 머뭇거림을 이르는 말을 전첨후고(前瞻後顧),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있을 수 없음을 일컫는 말을 전무후무(前無後無), 처음에는 거만하다가 나중에는 공손하다는 뜻으로 상대의 입지에 따라 태도가 변하는 것을 이르는 말을 전거후공(前倨後恭), 앞길이나 앞날이 크게 열리어 희망이 있음을 이르는 말을 전도양양(前途洋洋), 앞길이나 앞날에 어려움이나 재난이 많음을 이르는 말을 전도다난(前途多難), 대문 앞이 저자를 이룬다는 뜻으로 세도가나 부잣집 문 앞이 방문객으로 저자를 이루다시피 함을 이르는 말을 문전성시(門前成市), 바람 앞의 등불이란 뜻으로 사물이 오래 견디지 못하고 매우 위급한 자리에 놓여 있음을 가리키는 말을 풍전등화(風前燈火), 범에게 고기 달라기라는 속담의 한역으로 어림도 없는 일을 하려고 함을 이르는 말을 호전걸육(虎前乞肉) 등에 쓰인다.
▶️ 倨(거만할 거)는 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사람인변(亻=人; 사람)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居(거)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그래서 倨(거)는 ①거만하다(倨慢--), 불손하다(不遜--) ②걸터앉다(=踞) ③굽다, 구부러지다 ④아무 생각 없는 모양,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거만할 오(傲), 거만할 만(慢), 거만할 오(敖) 등이다. 용례로는 잘난체하고 건방진 태도를 거만(倨慢), 거만스럽고 남을 낮추어 보는 교만한 태도를 거오(倨傲), 거만하여 남을 업신여김을 거모(倨侮), 거만한 태도를 거기(倨氣), 겸손하지 않고 거만함을 간거(簡倨), 교만하고 거만함을 교거(驕倨), 처음에는 거만하다가 나중에는 공손하다는 뜻으로 상대의 입지에 따라 태도가 변하는 것을 이르는 말을 전거후공(前倨後恭) 등에 쓰인다.
▶️ 後(뒤 후/임금 후)는 ❶회의문자로 后(후)는 간자(簡字)이다. 발걸음(彳; 걷다, 자축거리다)을 조금씩(문자의 오른쪽 윗부분) 내딛으며 뒤처져(夂; 머뭇거림, 뒤져 옴) 오니 뒤를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後자는 '뒤'나 '뒤떨어지다', '뒤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後자는 彳(조금 걸을 척)자와 幺(작을 요)자, 夂(뒤져서 올 치)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後자는 족쇄를 찬 노예가 길을 가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갑골문에 나온 後자를 보면 족쇄에 묶인 발과 彳자가 그려져 있었다. 발에 족쇄가 채워져 있으니 걸음이 뒤처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後자는 '뒤떨어지다'나 '뒤치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後(후)는 (1)무슨 뒤, 또는 그 다음. 나중 (2)추후(追後) 등의 뜻으로 ①뒤 ②곁 ③딸림 ④아랫사람 ⑤뒤떨어지다 ⑥능력 따위가 뒤떨어지다 ⑦뒤지다 ⑧뒤서다 ⑨늦다 ⑩뒤로 미루다 ⑪뒤로 돌리다 ⑫뒤로 하다 ⑬임금 ⑭왕후(王后), 후비(后妃) ⑮신령(神靈) 따위의 뜻이 있다.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먼저 선(先), 앞 전(前), 맏 곤(昆)이다. 용례로는 뒤를 이어 계속 됨을 후속(後續), 이후에 태어나는 자손들을 후손(後孫), 뒤로 물러남을 후퇴(後退), 일이 지난 뒤에 잘못을 깨치고 뉘우침을 후회(後悔), 같은 학교를 나중에 나온 사람을 후배(後輩), 반반씩 둘로 나눈 것의 뒷부분을 후반(後半), 핏줄을 이은 먼 후손을 후예(後裔), 뒷 세상이나 뒤의 자손을 후세(後世), 뒤에서 도와줌을 후원(後援), 뒤의 시기 또는 뒤의 기간을 후기(後期), 중심의 뒤쪽 또는 전선에서 뒤로 떨어져 있는 곳을 후방(後方), 뒤지거나 뒤떨어짐 또는 그런 사람을 후진(後進), 맨 마지막을 최후(最後), 일이 끝난 뒤를 사후(事後), 일정한 때로부터 그 뒤를 이후(以後), 정오로부터 밤 열두 시까지의 동안을 오후(午後), 바로 뒤나 그 후 곧 즉후를 직후(直後), 그 뒤에 곧 잇따라 오는 때나 자리를 향후(向後), 앞과 뒤나 먼저와 나중을 전후(前後), 후배 중의 뛰어난 인물을 이르는 말을 후기지수(後起之秀), 젊은 후학들을 두려워할 만하다는 뜻으로 후진들이 선배들보다 젊고 기력이 좋아 학문을 닦음에 따라 큰 인물이 될 수 있으므로 가히 두렵다는 말을 후생가외(後生可畏), 때 늦은 한탄을 이르는 말을 후시지탄(後時之嘆), 뒤에 난 뿔이 우뚝하다는 뜻으로 제자나 후배가 스승이나 선배보다 뛰어날 때 이르는 말을 후생각고(後生角高), 내세에서의 안락을 가장 소중히 여겨 믿는 마음으로 선행을 쌓음을 이르는 말을 후생대사(後生大事), 아무리 후회하여도 다시 어찌할 수가 없음이나 일이 잘못된 뒤라 아무리 뉘우쳐도 어찌할 수 없음을 이르는 말을 후회막급(後悔莫及) 등에 쓰인다.
▶️ 恭(공손할 공)은 ❶형성문자로 心(심)의 변한 모양이 뜻을 나타내는 마음 심밑(㣺=心, 忄; 마음, 심장)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에 '두 손을 마주잡다'의 뜻을 가진 共(공)으로 이루어졌다. 공손한 마음 가짐의 뜻이다. ❷회의문자로 恭자는 '공손하다'나 '받들다'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恭자는 共(함께 공)자와 心(마음 심)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共자는 양손으로 물건을 받드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함께'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그런데 본래 '공손하다'는 뜻은 龍(용 룡)자가 들어간 龔(공손할 공)자가 쓰였었다. 갑골문에 나온 恭자를 보면 용을 양손으로 떠받드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경배한다는 뜻을 표현한 것이다. 중국에서 용은 길상(吉祥)을 상징하는 존재로서 신성시됐었다. 그래서 갑골문에서는 용을 받드는 모습으로 그려져 '삼가다'나 '공손하다'는 뜻을 표현했었지만 소전에서는 글자가 간략화되면서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그래서 恭(공)은 ①공손(恭遜)하다, 예의 바르다 ②삼가다(몸가짐이나 언행을 조심하다), 직분(職分)을 다하다 ③받들다 ④섬기다 ⑤높이다, 존중(尊重)하다 ⑥고분고분하다, 순종(順從)하다 ⑦조심하다 ⑧크다 ⑨성(姓)의 하나,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공경 경(敬), 공경할 흠(欽), 공경할 지(祗), 겸손할 손(遜), 공경할 건(虔)이다. 용례로는 삼가서 공손히 섬김을 공경(恭敬), 공경하고 겸손함을 공손(恭遜), 공손하고 온순함을 공순(恭順), 삼가 생각함을 공유(恭惟), 공손하고 삼감을 공건(恭虔), 공손하고 검소함을 공검(恭儉), 공손하고 부지런함을 공근(恭勤), 공손히 대접함을 공대(恭待), 공손하고 삼감을 공근(恭謹), 삼가 기뻐함을 공열(恭悅), 공손하고 말이 없음을 묵공(恭黙), 남을 높이고 자기를 낮춤을 뜻하는 말을 겸공(謙恭), 극히 공손함을 극공(極恭), 삼가고 존경함을 경공(敬恭), 삼가서 경솔하게 행동하지 않는 모양을 건공(虔恭), 공손하지 아니함을 불공(不恭), 온화하고 공손함을 온공(溫恭), 인정이 많고 공손함을 독공(篤恭), 지나치게 공손함을 과공(過恭), 다할 수 없이 지극히 공손함을 지공(至恭), 삼가 새해를 축하한다는 말을 공하신년(恭賀新年), 공손하면 수모를 당하지 않는다는 말을 공즉불모(恭則不侮), 언행이 공손하지 아니하고 건방지며 버릇이 없다는 말을 불공불손(不恭不遜), 공손한 태도가 없이 함부로 하는 말을 불공지설(不恭之說), 지나친 공손은 오히려 예의에 벗어난다는 말을 과공비례(過恭非禮), 주는 것을 물리치는 것은 공손하지 못하다는 말을 각지불공(却之不恭), 남의 말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귀담아 듣는 것을 이르는 말을 세이공청(洗耳恭聽), 처음에는 거만하다가 나중에는 공손하다는 뜻으로 상대의 입지에 따라 태도가 변하는 것을 이르는 말을 전거후공(前倨後恭)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