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페르시아 사원에서 발견한 석판의 글
(한 불교 승려가 페허가 된 고대 페르시아의 사원에서 명상을 하는 중, 아름다운 노랫소리에 이끌려 따라가 석판을 발견하였던 바, 석판들이 너무나 아름답고 귀한 것임을 알고, 안전한 장소로 옮기고자, 동참해줄 동료를 찾는 데 3년의 세월이 걸렸다.
같이 뜻을 하고자 하는 3인의 동료들은 석판을 보고 너무 흥분한 나머니 사흘동안 잠도 자지 못했다. 그들은 열다섯마리의 낙타를 구해 페르시아의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페사와르에 이르는 기나긴 여행길에 올랐다. 페사와르 근처의 한 동굴에 짐을 풀어놓고 5년 동안 거기에 석판을 숨겨두었다.
석판은 페샤와르에서 펀잡지방 란다로 옮겨졌다. 거기서 다시 10년을 지체한 다음, 천천히 여러 단계를 거치면서 달라이 라마의 궁정에까지 옮겨지게 되었다.
이렇게 하는 데에는 40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아래 글은 석판을 해석한 내용중 가장 중요한 부분을 적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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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한 지성적인 靈이 있다.
무한하고 神적인 이 靈은 만물 속에 침투해 있다.
이 사실들은 부인할 수 없다. 만물 속에 침투해 있는 이 지성은 무한하며 만물의 근원이다.
(이를 수행계에서는 우주의식ㆍ 우주정신ㆍ본성ㆍ신성ㆍ불성ㆍ진아 등으로 칭한다)
이 지성은 신적이다. 그리고 이 지성의 神性은 눈에 보이고 생각할 수 있는 대상, 즉 만물이라는 객관적인 사실로 나타난다.
당신은 각 사물에 이름을 부여하듯이 이 전지한 지성적인 영을 하느님, 궁극적인 善, 또는 원하는 그 무엇으로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에게는 무엇인가에 이름을 붙이면 그 이름에 해당하는 것이 나타나도록 하는 힘이 주어져 있다.
진정한 존경과 경배와 찬양의 심정으로 이름을 붙이면, 그는 자기가 이름을 붙인 것과 같은 차원에 있을 수 있고 사실 또 그렇게 된다.
그래서 인간은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하느님이 될 수도 있고 동물이 될 수도 있다. 자신이 따르는 이상에 부합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사람은 하느님의 독생자가 될 수도 있고 동물의 독생자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악한 것을 바라보면 악마가 되지만 하느님을 바라보면 하느님이 되는 것이다.
전지한 지성적인 영은 무형의 상태로 침묵 중에 관조하고 있었다. 그러나 형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지성적인 영은 분명히 현존하고 있었다. 그 지성적인 영은 자기 자신을 모든 호흡이 있는 생물과 무생물의 창조자로 여기고 있었다.
전지한 지성적인 영은 침묵 속에서 아무것도 수정할 것이 없는 완전한 우주의 상을 그린 다음 자기가 그린 대로의 우주를 창출해냈다.
우주는 지성적인 영이 침묵 속에서 그린 완전한 상…즉 신적인 계획에 따라 형태를 취하게 된 것이다. 우주가 태어나는 데에는 그 외에 아무 것도 필요치 않았다.
신적인 마음이 그린 이상적인 상은 눈에 보이는 완전한 형태를 가지고 나타났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우주이다.
이 우주는 완결된 것이 아니라 아직도 신적인 완전한 계획에 따라 이루어져 가고 있는 중이다.
(옮긴이주 ㅡ 사람도 생로병사를 반복하듯이 우주도 성주괴멸을 순환과정을 통해 진화해가고 있다)
이 전지한 지성이 바로 신적인 마음이 그린 이상적인 상을 받아 그대로 성취시켜나가는 지휘자이다.
전지한 지성은 호흡이 있는 생명체를 창출해내고,
그 생명체에 자기 자신을 완전히 표현해낼 수 있도록 필요한 모든 잠재력을 부여해 주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전지한 지성은 불멸의 인간상을 마음속으로 그리게 된 것이다.
다양한 형태로 분화 발전해 가는 신적인 이상은 결국 인간의 불멸성으로 그 초점이 모아진다. 인간은 지성적인 전지한 영이 품고 있던 신적인 이상에 따라 태어난 존재이기 때문에, 만물과 모든 상황을 지배하는 우주적인 대원리의 아들이다.
아들이라 함은 종처럼 종속된 존재가 아니라 아버지와 일체인 자라는 뜻이다. 아들은 완전한 선택의 자유를 가지고 있어 노예나 꼭두각시가 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 불멸성에 대한 이상 속에는 만물의 근원이 되는 중심적인 존재의 불꽃이 간직되어 있다. 이 불꽃에서 첫 번째 세포가 탄생되며, 그 세포는 결국 인간의 육체가 된다. 즉 중심적인 존재의 불꽃이야말로 영원히 꺼지지 않는 생명의 불꽃이라는 말이다.
중심적인 존재의 불꽃에서 탄생된 첫 번째 세포를 그리스도라 한다. 이 첫 번째 세포는 수없이 갈라져 분열에 분열을 거듭하지만 그 안에 심어져 있는 신적인 영의 이미지는 결코 소멸되지 않는다. 그 이미지는 인간의 생각으로 왜곡시킬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은 언제나 신적인 존재인 것이다.
인간이 상념을 통해서 왜곡시키지만 않는다면, 첫 번째 세포는 분열에 분열을 거듭하면서 자신 속에 심어져 있는 신성을 각 세포들에게 전한다. 새로이 태어나는 세포들이 모여 인간의 육체를 이룬다.
그러므로 인간의 육체는 신성을 담고 있는 그릇이자 전달매체인 셈이다. 신성이 인간의 육체 속에 담긴 후에도 그 본질, 즉 신적인 영은 변화되어 가는 현상을 통찰하는 전지한 지성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인간이 자신의 궁극적인 차원에 설 때 그는 곧 하느님의 靈인 것이다.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이 고귀한 자아를 깊이 생각하고 찬양하며 경배해야만 한다.
먼저 신적인 자아가 내재하고 있다는 신앙을 가져야만 한다. 신앙이 있으면 신적인 자아가 자신의 내면에 깃들여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성경을 보면 예수께서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신다. 내 뜻대로 행하는게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기 때문에 내가 하는 일은 참되다' 라고 하였다.)
앎이 생긴 다음에는 내면의 신적인 자아를 축복하고 감사드리면 신적인 자아가 눈에 보이는 형태로 나타난다. 인간은 참으로 신적인 자아 그 자체이다. 신적인 자아가 나타나도록 하는 것이 모든 지식을 얻는 길이다.
두뇌는 다른 세포들보다 일층 정교한 세포 집단이기 때문에…언뜻 보기에는 두뇌 자체가 무엇을 인지하는 주체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영적인 진동을 받아들여 인간이 인지할 수 있도록 증폭하는 세포 집단일 뿐이다.
두뇌는 자기가 받아들인 진동을 어디로 보낼 것인가를 선별하여 신적인 질서에 순응하는 다른 기관들로 전달한다.
인체의 각 기관과 신경중추는 각기 진동의 증폭기 역할을 수행하며, 그들이 증폭시킨 진동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완전한 한 인간이 된다.
각 기관과 신경 중추에서 증폭된 진동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협력할 때 인간에게는 모든 능력과 권세가 주어지며, 전지한 지성적인 영, 즉 성령의 능력으로 창조적인 행위를 하게 된다.
성령의 창조적 행위를 수행할 때 인간의 영혼과 육체는 하나가 되어 그 행위의 구심점이 된다. 의식적으로든지 아니면 무의식적으로든지, 영혼과 육체가 하나로 통일된 이 구심점에 모든 능력을 집중시키지 않고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
이 구심점은 능력의 자리이며, 인간 속에 내재한 그리스도, 즉 인간이 설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영역이다.
부조화나 죄와 질병 같은 것은…인간이 마음속에 그런 것들을 생각함으로 해서 존재하게 된다. 만약 생각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것들이 어찌 인간을 괴롭힐 수 있겠는가?
언제 어디서나 전지한 지성적인 영에만 생각을 집중한다면 죄와 질병과 같은 부조화한 것들은 아예 머리에 떠오르지도 않을 것이다.
생각을 항상 맑은 물처럼 깨끗하게 하고 지고한 이상만을 품음으로서…인간은 하느님이 된다. 그는 항상 내면의 목소리에 확실하게 응답하는 것이다.
의지의 배후에는 욕망이 있다. 의지 자체는 아무 것에도 물들지 않은 순수한 힘이다. 의지는 욕망에 의해 활동하기 시작한다. 어떤 상황이나 방향성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의지는 활동하지 못한다. (옮긴이주 ㅡ 무엇을 하려고 하는 의도의 배후에는 욕망이 있기에 붓다는 의도가 카르마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욕망과 의지의 힘을 조화시킬 필요가 있다. 의지와 욕망이 조화를 이루면…그 즉시 활동력이 생겨 영의 명령을 수행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요구되는 것은 …그 명령이 신적인 질서에 부합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 하나뿐이다.
무수한 세계가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그 모든 세계는 그 세계들을 마음속으로 그린 한 가지 상념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이것은 결코 예외가 없는 법칙이다.
창조된 피조물들은 선택의 자유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이 무질서로 인해 고통을 당하고 미움과 두려움과 저주 속에서 산다면…그것은 전적으로 그들 자신의 책임이다. 왜냐하면 그들 자신이 그런 것들을 (자유의지로) 창조해 낸 것이기 때문이다.
이 우주의 대원리는 변하지 않는 황금률이다. 이 원리는 멀리 있지 않다. 바로 너 자신의 내면에 있다. 그 빛 속에 너 자신을 두라. 그러면 만물의 실상을 똑똑히 보게 될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네 생각대로 온 세상이 창조되어 나온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너라는 존재 전체가 이 한 가지 사실을 확실히 알도록 하라.
무질서의 흑암과 그로 인한 인류의 고통에서 벗어나 평화를 가져다주는 질서의 세계가 열리지 않으면 안 된다.
일단 아름다움과 능력과 안식의 상념과 자신이 일체라는 사실을 배우고 나면…자신의 마음의 소망을 빼앗아 갈 자는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는 대원리의 빛 가운데에 서서 그것을 끌어당겨 자기 것으로 삼을 것이다.
내 아들아, 네가 원하는 상, 즉 진리만을 마음에 품으라. 네 마음속의 진실한 욕구에 대해서만 명상하라. 그렇게 한다고 해서 해를 받는 사람은 없으며, 오히려 그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일인 줄을 알라.
네가 마음속에 품은 것은 물질적인 형태를 가지고 나타나 너의 소유가 될 것이다. 이것이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는 법칙이니라.
번개를 끌어다가 누군가를 해치려는 사람은 먼저 자신의 영혼과 육체가 번갯불에 태워질 것이라는 것을 명심하라.
- '초인들의 삶과 가르침을 찾아서' 의 내용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