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약계는 오는 12월 획기적인 시스템 변화를 겪게 될 전망이다.
의약품 처방조제지원시스템(DUR) 전국 확대시행이 그것이다.
시장형실거래가제, 쌍벌제 등 다른 대형이슈에 밀렸지만 결코 간과될 수 없는 ‘매머드급’ 사업이다.
처방조제를 분리해 의약품 오남용 소지를 최소화한다는 의약분업의 수행목표를 완성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DUR은 부적절한 의약품 사용을 사전 점검해 잠재적인 국민 건강위해 요인을 제거하고, 불필요한 의료비용을 없앤다는 점에서 의약분업의 대원칙과 궤를 같이 한다.
점검항목은 금기약물, 안전성 급여중지 약물, 저함량 배수처방 조제약물 등이다.
2008년 4월 동일 처방전 내에서 사전 점검하는 '1단계' 사업을 시작으로 2009년 5월부터는 다른 요양기관간, 동일요양기관 내 다른 진료과목간 처방.조제 내역을 점검하는 '2단계' 사업으로 확대 시행됐다.
'2단계' 고양시 시범사업에서는 동일성분 중복투약, 제주도 시범사업에서는 일부 일반약까지 점검대상에 포함시켰다.
또 12월 전국 시행에서는 비급여 의약품까지 추가하기로 이미 합의를 마쳤다. 일부 일반약을 제외한 허가된 거의 모든 의약품이 DUR시스템에 편입되는 셈이다.
심평원은 이를 위해 비급여 약물과 일반약에 대한 코드부여 작업을 진행 중이다. 처방.조제전에 실시간으로 사전점검이 가능하도록 지원하는 시스템 구축도 사실상 구축을 완료했다.
2008년 '1단계' 사업이 시작된 이래 불과 2년 6개월만에 이뤄낸 놀라운 성과다.
정부 관계자는 “의약계의 협조가 잘 이뤄졌기 때문에 가능했다. DUR 의무화 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면 제도적 기반도 확고해 질 것”이라고 말했다.
복지부는 지난 7월에는 DUR 전국 확대사업의 수용성을 높이고 조기 정착을 위한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DUR 전국 확대 추진위원회’를 출범시키기도 했다.
◆고양시 시범사업=의료계는 초기만해도 DUR을 통해 처방내역이 실시간 심평원에 집적되는 것을 꺼려 시범사업에 참여하지 않았다.
정부는 불가피하게 약국만을 대상으로 2009년 1월부터 시범사업을 실시하기로 하고 점검 프로그램도 약국 조제중심으로 설계했다.
이후 의료계가 참여의사를 밝힘에 따라 기본계획이 수정돼 동구지역은 병의원과 약국의 이중점검, 나머지 지역은 약국단독 점검으로 사업이 수행됐다.
약국은 91%(고양시), 병의원 79%(고양시 동구)가 이 사업에 참여했고,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고양시 시범사업은 일부 한계에도 불구하고 제주도 시범사업과 전국 확대시행을 준비하는 정부와 의약계에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했다.
이의경 숙명약대 교수 등이 수행한 평가연구 결과를 보면, 의료기관과 약국 이중점검이 중복 및 금기약물 점검에 더 효과적인 것으로 평가됐다. 약품비도 이중점검 결과 약 48억원이 절감돼 약국단독 26억원보다 훨씬 많았다.
환자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는 응답자 중 92.5%가 DUR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국민들 또한 제도취지를 설명하면 수용성이 높을 것이라는 얘기다.
대기 시간은 5~9분을 지목한 환자가 34.5%로 가장 많았는데, 무제한으로 대기하겠다고 응답자도 15.2%나 됐다.
이 교수팀은 의약사 동시 DUR 방식 유지, 원활한 DUR 실무를 위한 인프라 구축, 의약사간 협조체계 강화, 대국민 홍보 등을 본사업을 위한 정책대안으로 내놨다.
특히 비급여 약물과 일반약까지 점검대상을 확대해야 정책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 교수팀은 “DUR제도가 원활히 운영되기 위해서는 의사의 자율 결정권이 존중돼야 한다. 무엇보다 환자들에게 보다 양질의 의약품을 안전하게 제공할 수 있도록 의사들간, 혹은 의약간 정보교류 및 논의가 활성화돼야 한다”고 제안했다.
◆제주도 시범사업=고양시 사업에 뒤이은 제주지역 사업에서는 획기적인 변화가 있었다. 일부 일반약이 지난 5월부터 점검항목에 추가된 것이다. 약국은 97%, 의원은 84%, 병원은 33%가 시범사업에 합류했다.
박정연 심평원 DUR사업단장은 “사업시행 초기부터 일반약 적용여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면서 “정부와 의약단체간 협의 끝에 일부 성분을 시범 적용키로 결론냈다”고 말했다.
해당약물은 금기 및 중복 등 처방.조제 비율이 높은 해열진통소염제, 항히스타민제 등 4개 성분이다. 하지만 일반약 DUR은 시작부터 불협화음이 끊이질 않았다.
환자가 인적사항 제시나 대기시간 등 불편함을 이유로 DUR 점검을 거부하거나 투약정보 확인을 위해 필요한 주민번호를 알려주는 것을 꺼렸기 때문이다.
의사협회도 가세했다.
지난 7월 윤창겸 의사협회 보험부회장 등의 일행이 제주도를 방문해 DUR 시행실태를 직접 현장 점검했다.
의사협회는 점검결과를 통해 “일반약 구매시 신분증을 확인하는 약국이 단 한 곳도 없었다”며, 실효성이 없는 시범사업을 통해 과연 전국확대시 일반약 DUR을 실시할 수 있을 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현재 제주도 DUR 시범사업에 대한 평가연구는 권순만 서울대교수팀이 맡아 진행 중이다.
전체적인 평가와 함께 일반약 DUR 확대 가능성을 평가하게 되는데, (일반약 DUR) 참여약국 수가 많지 않아 과연 제대로 된 정책대안을 내놓을 수 있을 지 의구심을 갖는 지적이 많다.
물론 비관적이지는 않다. 윤창겸 의사협회 부회장은 "일부 시행착오가 있기는 하지만 전국 확대시행을 진행하지 못할 수준은 아니다"고 말했다.
◆모의운영과 시범사업 확대=DUR 중앙통제시스템은 현재 시험가동을 준비 중이다.
박정연 단장은 "이달 중 예정대로 모의운영에 착수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모의운영은 심평원 전산팀이 자체 수행한다. 이 시스템은 하루평균 접수되는 처방전 건수보다 더 많은 용량을 수용할 수 있는 수준에서 설계됐다.
자체 점검이 끝나면 전국 시행에 앞선 마지막 시범사업이 11월 한달동안 진행된다.
정부와 의약단체는 이를 위해 제3의 '2단계' 사업 시범지역을 물색키로 했다.
박정연 단장은 "일반약과 비급여까지 포함된 DUR이 시범 가동될 것"이라고 귀띔했다.
◆DUR 의무화 법안=오는 12월에는 DUR '2단계' 사업이 전국적으로 확대 시행된다. 물론 법적 근거가 없기 때문에 일단은 자율시행으로 갈 수 밖에 없다. DUR 사전점검 의무화가 필요한 이유다.
정부는 당초 DUR 사전점검을 의무화하는 의료법과 약사법 개정안을 지난 6월 중 발의해 연내 통과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다.
전국 확대 초기에는 자율시행하다가 요양기관이 시스템에 적응하고, 시스템이 완벽히 구현되면 곧바로 강제시행이 이뤄지도록 법적 기반을 마련한다는 의도였다.
또 조기입법을 위해 정부입법 대신 의원입법을 택했다. 하지만 DUR 의무화 법안은 국회에서 발의되지 못하고 잠자고 있다.
국회 한 관계자는 “명분상으로는 의약계가 모두 DUR 사업에 찬성하고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 실제 각론을 들여다보면 티격태격 말들이 많다”면서 “정리해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고 말했다.
의약계가 DUR 전국확대 시행에는 합의했지만, 강제시행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얘기다.
국회 다른 관계자는 “의약계가 DUR을 거부할 수 없어서 수용하겠다고는 했지만 의무화되는 것은 꺼림직하게 여기는 것 같다”면서 “국민을 위해 필요한 제도인만큼 밀어붙일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