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공상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대학에 들어가자마자였던가.
서교동 집 내 방에서 어두운 밤 하늘을 내다보며 대우주 속의 은하계, 거기서도 태양계의 지구라는 행성, 한반도하고도 남한 땅의 이 왜소한 내가 중산층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몇 시간씩 상념에 젖었던 적도 있다.
그러나 그런 몽상적인 기질의 배면에는 역설적이게도 목적이 정해지면 감정을 제어하고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이랄까가 도사리고 있었다. 사업을시작한 뒤로 나의 몽상적 기질은 의식 밑바닥으로 갈아앉았다. 늘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성취보다는 성취의 과정을 즐기는 것은 성취의 과정에는 집중의 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집중과 성취의 조합으로 이어지는 사업은 내게 그런대로 맞는 듯하다. 풀무원의 성장 배경에는 다른 여러 요소와 함께 내 개인의 이런 품성도 조금은 작용했을지 모르겠다.
나는 경영의 초기 단계에는 필요한 이론적 지침들을 책을 통해 배웠다.
재무, 판매, 조직 관리에 이르기까지 경영자가 알고 있어야 할 실용적인지식을 개론 수준으로 정리해 놓은 책들이 많았다. 그런 정도의 기초 위에 각종 기업 관련 세미나, 경영학 교수들의 외부 강의, 컨설팅 전문가의 조언과, 실제 경영에서의 시행 착오를 통해 경영을 깨우쳐 나갔다.
암중모색에 다름 아니었던 이런 학습 과정에서 "빛"처럼 내 눈 앞을 환히 밝혀 주었던 책이 서울 대학교 윤석철 교수의 '경영학적 사고의 틀'이었다. 그 책을 읽은 다음 그 분을 개인적으로 찾아뵙고 경영 원리를 지도받기 시작하면서 경영에 대해 내 나름의 개안이랄까가 시작되었다.
생각하면 원경선 원장님에 이어 이런 존경스러운 경영 철학자를 만날 수있었던 것은 더없는 행운이었다.
이와 같은 학습 과정과 현장 경영을 통해 내가 규정한 최고 경영자의 모델은 대개 이렇다. 어떤 경우에도 사업이 지속되는 동안에는 매출과 자금을 책임져야 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회사가 백척간두에 서 있을지라도언제나 조직원들에게 비전과 전략을 제시해야 하는, 비오는 날 밤에 초행길을 앞서 걷는 길잡이 같은 존재이다. 거기에 더하여 경영자는 학교 공부를 끝내고 세상에 나온 인재를 받아서 다시 일과 인생을 가르쳐야 하는 교사의 역할까지도 해야 한다.
나는 내게 지워진 이 책무에 위선없는 솔선수범으로 대응하고자 애써 왔다. 그 밖의 더 좋은 리더쉽이 있는지 아직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말하면 나는 리더쉽을 함양시키는 책은 따로 읽지 않았다. "기교"보다 본질적인 것은 경영에서도 "진실"일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사업은 해결의 연속이다. 긴 긴장 뒤에 이완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나는 내가 부디 거기 함몰되어 살지 않기를 바란다. 집중이 아니라 함몰은 자유로운 사고를 차단하기 때문이다. 내 사업을 위해서도 그것은 경계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다행히도 나는 논쟁적 인간이다. 풍부한 예시가 밑받침이 된 논거로 정연한 논리를 펼치는 사람을 좋아하고 내 스스로 거기 끼어들기를 즐긴다, 경영학적 두뇌 회전이 필요한 화제라도 좋고 그렇지 않아도 상관없다.
사실 내가 좋아하는 화제는 생명의 기원, 인류학적 상상력이 보태진 진화론 등이다. 아득한 감회 속에 시간에 대한 명상적 대화를 나누는 것도각별히 재미있다.
틈이 있기만 하면 나는 그런 내용이 담긴 책들을 읽는다. 예컨대 인류 문명사에 대한 새로운 관점의 해설서나 첨단의 과학적 성과를 소설적 장치로 재미있게 구성한 과학 소설을 특히 흥미로워한다. 더러 여러 번 읽어서 인상적인 귀절을 암기하고 있는 책도 있다. 그리고 만화를 본다.
사업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드물게 집에서 쉬었던 어느 일요일 오후에 슬그머니 슬리퍼를 끌고 집 근처 만화 가게에 가서 저물도록 만화를 보고 돌아왔던 일은 언제 생각해도 기분이 좋다. 그때 독파한 만화가 <공포의 외인구단>이었다. 나는 만화를 주로 외국 출장 때 비행기 안에서읽는다. 만화 중에는 우주 과학에 대한 상당한 정도의 지식과 뛰어난 상상력이 배합된 걸작들이 많다.
부천시가 대주주인 만화 제작 회사 PCN(,부천 카툰 네트워크)이 나를 "월급 1원"짜리 전문 경영인으로 영입한 것도 부천 시장 원혜영이 내가 만화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나는 사장 자격으로 한주일에한번씩 PCN으로부터 업무 보고를 받는다. 주로 애니메이션, 출판 만화, 캐릭터 등이 주된 화제여서 흥미로우나 사업이 뜻과 같지 않아서 걱정이다.
경영의 다양한 이론서들이 절박한 필요에 의해 읽었고 읽고 있는 실용서라면 다른 책들과 만화는 잠재해 있는 내 몽상적 기질을 잠깐 의식 위로띄워 올려 주는 책들인 듯하다. 논증적 과정을 염두에 두고 하는 다양한대화들도 "집중" 속의 쉼표 같은 구실을 하지 않나 싶다. 냉혹한 지상의척도에서 촌각도 자유로울 수 없는 사업가에게 몽상 또는 쉼표는 창의적사고의 작은 씨앗이 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