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안공파 시향 • 갑진년 종중회의 봉행 • 전주이씨효열비 답사보고]
1. 일시: 2024. 11. 10(일) 10:00~
2. 장소: 염수재
3. 참석: 동수 회장 외 [1.동수 회장(35문안), 2-4. 성호 종친(36문안) 내외 & 온유(37), 5-7. 종락 종친(34문안) & 병수•혁수(35), 8. 형택 종친(35), 9.종연(34), 10-11. 진욱•준호(35), 12.만수(35), 13.옥범 총무이사(35), 14.종열 재무이사(34), 16.세환 서울총무 외]
[문안공 외 53위 시향 봉행 보고]
- 초헌: 형택(종손, 36문안)
- 아헌: 종락(34)
- 종헌: 만수(34)
우집사: 병수•종연
좌집사: 성호•온유
봉 축: 옥범(35문안)
집 례: 준호(35문안)
[문안공파 큰문중 종중 갑진년 정기총회 보고]
1. 회장인사
2. 안건 심의
1) 2024년도 결산보고
2) 종무현황 설명 및 토의
3. 기타 토의:
1) 건물 관리 및 유지보수 문제
2) 정관 관련
3) 전주이씨효열비 보존 유지
4) 기타사항
4. 첨부 자료
1) 전주이씨효열비 찬장
2) 알기쉬운 문안공파 큰문중 파보
3) 효열비 배치에 관하여(문안34 종락)
◈ 전주이씨 효열부 찬장(이금녀, 33문안 재민의 아내)
전주이씨 이금녀 여사는 전주인 이홍섭의 딸로 태어나 17세에 고부이씨 문안공 13대손 재민(33문안, 5남2녀 중 막내)의 처로서 동곡마을로 시집 왔다. 비록 시댁이 몹시 가난하고 남편은 정신적⦁육체적 장애인이었으나 일편단심으로 남편을 하늘보다 더 높이 떠받들고 존경하였다.
이런 가정을 이끌어 4남 2녀를 낳아 키우고 가르치면서 밤낮으로 김을 매고 길쌈을 하여 생계를 꾸리면서도 시어머니의 뜻을 하늘처럼 따르고 동서지간에도 깊은 우애와 신뢰로 틈 없이 화목하였다.
6.25 전쟁 때 2년 연속 흉년이 들어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중 시어머니께서 노환으로 여름에 운명하시어 장례식 비용으로 상당한 빚을 지게 되었는데, 곤궁하기 짝이 없던 당시 그 빚을 갚을 길이 참으로 막막하였다. 시댁의 다른 형제들은 모두 그 빚을 갚기 주저하였으나 막내 며느리인 여사께서 가산의 전부였던 소 한 마리를 팔아 홀로 그 빚 전부를 변제하니, 그 효심과 선함이 고을 곳곳에 널리 퍼져 이르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후 남편이 중증으로 쓰러져 의식불명으로 사경을 헤메일 때 형편이 가난하였기에 병원 치료는커녕 약 한 첩마저 마련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여사는 오로지 남편을 살려내겠다는 굳은 신념과 의지로 온갖 수발과 정성을 다하여 이로부터 무려 7년 이상을 살 수 있게 하였으니 그 칭송이 고을 사방에 자자하고 덕망이 끊이지 아니하였다.
이 어찌 아름답고 장하다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에 우리 성균관은 여사를 수신지기(修身知己)의 모범으로 그 감흥에 기뻐하고 존경함을 세우지 않을 수 없다. 부디 전주이씨 이금녀 여사의 곱디 고운 삶과 마음을 깊이 새겨 우리 후손을 대대로 번성케 하는 초석으로 삼아 영원히 쓰러지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유림의 의론을 따라 참으로 찬양할지어다.
서기 1994년 갑술년 5월 성균관장 김경수 근찬
[전주이씨 효열비(문안33 재민의 처): 종락대부 대담]
- 2024. 9. 22(일) 오후1시,
청량리 라이닝뷔페 (02)960-5985;
종락 종친 내외 & 병수 변호사, 서)정훈재무, 세환총무
- 2024. 11. 10(일) 새벽6;29 오후6:15
용산 – 정읍 – 용산
종락 종친 & 병수⦁혁수 형제, 서)세환총무
[종락대부 인터뷰]
덕천면 용전마을 선산: 20세 종근 선조 묘 – 33세 재민/ 전주이씨효열비
• 조부 병순(32문안, 1860 경신 9.2 - 1917 정사 윤.2.17)
영광정씨(1872 임신 12.23 - 1892 임진 6.14)
• 부친 재민(33문안, 1908 무신 5.17 - 1968 무신 4.8)
전주이씨(1910 경술 8.23 - 1993 계유 3.3)
•모친 별세(1993년 음력 3월 3일)
- 초근목피, 만고풍상. 고생만 지지리 하시다가 가셨다.
- 효열부찬; 1)장례비 - 소팔아서 2)부친 - 어려서부터 불구/ 다들 어려운 시절.. 말그대로 신랑이 장애인임에도 불구하고 시집와서, 시부모 섬기고 남편을 하늘처럼 떠받들며 사셨다(생산가능할까도 걱정했다. 5형제 중 막내인 부친 재민) ; 할머니가 불구인 아들을 애뜻하게 사랑하고, 어머니도 남편 극진하게 섬겼다/ 내장산까지 새벽밥 먹고 가서 쑥을 캐와 쌀 한 주먹 넣고 쑥죽으로 연명했고, 당면공장 찌꺼기를 주어 마대로 담아와서 짜서 먹었다/ 할머니 돌아가시고… 우리집 전재산인, 그것도 새끼까지 밴 소를 팔아 장례비 빚 변제.. / 5형제가 있었으나../
어머니가 1993년 경술 음력 3. 10 돌아가시고, 정읍 유림이 천거하자, 성균관에서 ‘수신지기’의 모범으로 삼아 김경수 성균관장이 ‘효열부찬문’을 내렸다.
- 아버지를 모셨다/ 아들 하나 도망가려 동네를 나서는데.. 도망가는 한밤중 울어대는 아기 울음소리에 갈길을 멈췄다/. 동곡마을 동골..
문안공 생가터가 있는 동골.. 그 동네에서 제일 가난한 오두막집으로 시집오셨는데, 외가는 우리보다 더욱 빈곤하고 식구들이 많았다네. 입 하나 줄이자고 보낸거지. 문안공 집안이니 명문이요, 사는거야 외가보다는 형편이 나아 밥굶을 일은 없을 테고.. 어려서서부터 불구셨던 부친임에도.. 당시 동네에서는 부친이 자식 생산이 과연 가능할까, 라고 걱정들 했다셨네.
- 국졸임에도 군대에서 행정병/ 3:1의 경쟁을 뚫고.. 교육계로 발탁/ 둘은 통신병. 펜대로 글씨를 썼다. 필체도 좋았다/ 아마 지켜보니 성실해서 교육계 행정병으로 착출했다고 들었네.
- 제대후 이것저것.. 그러나 형님 가게 일을 도우면서 몰래 영어학원을 다녔는데, 종수 형님한테 들켜 그만 뒀네. 무언가 펜대 굴리는 일을 하고 싶었는데..
동골에서는 동네서 제일 작은 오두막에서 살다가, 종수 형님네가 정읍으로 이사가면서 그 집으로 옮겨 살았다. 외삼촌이 자기 누님 고생한다고./ 아마 1985년? 형님이 어머니 모시고 동솔에서 사시다가 1985년쯤 대전으로 이사했어. 그곳에서 1993년, 운명하셨어.
(중략) 나? 말그대로 만고풍상 다 겪었네. 나중에는 중동에서 목수 일도 하고, 온갖 행상을 안해 본 게 없네. 그 어려운 시절에도 자식들 무탈하게 건사한 게 큰 복이라 생각하지. 병수가 2년만에 사시 패스한 것도 모두 조상님 음덕이고.. 내가 지금은 경동시장에서 칼가는 일을 하는데, 나름 독보적인 방법을 개발하여 이 나이에도 경제적인 활동을 하고 있는 것도 조상님의 큰 은혜지.
그러니까 옹골 언덕 아래 문안공 생가 – 그 아래 아래가 종수 형님네 – 그 아래 아래가 대문안집, 당시 방앗간도 운영했던 집안의 이희진 대동보편찬위원장네 – 그 아래 오두막집이 우리집이었네.
어머니 ‘전주이씨 효열부찬문’도 희진 어른이 유림에 천거하고, 성균관에서 크게 평가하여 당시 성균관장이 직접 찬문을 지었다 했네.
모친께서 17살 되던 1926년에 시집오시고, 4년만인 1930년 가을에 큰아들을 낳았는데.. 밤낮으로 김을 매고 길쌈을 하여 초근목피로 생계를 책임지셨는데, 젖먹이까지 보채대니.. 그래서 야반도주를 택하셨다지. 한밤중에 마악~ 동네를 벗어나려는데.. 온동네 떠나갈 듯 울어제끼는 젖먹이가 울음소리에 그만.. 발길을 돌렸다셨네. 그리고는 이악물고 사셨다셨네. 4남2녀를 무탈하게 키워내셨고.
할머니 동래정씨(1872-1952, 32문안 병순의 처)께서 동란 직후인 1952년 한여름에 돌아가셨데. 2년 연속 흉년이 들어 굶기를 밥먹듯하던 시절이었네. 사상 초유의 곤궁기에 상을 치르고 큰 빚을 지제 되었는데.. 모두들 어려운 상황이라 위로 세 분 시숙분들이 쩔쩔메시고 계시는데 어머니 당신이 나서 우리집 전 재산인 소팔아 빚을 갚았다 들었네. 이 소문이 자자하게 퍼져 ‘정읍의 효부’라 칭송받았고.
그러다가 부친께서 쓰러지셨네. 1961년, 의식불명으로 사경을 헤메시는데 병원 치료는커녕 약 한 첩 쓰지 못했다네. 그럼에도 남편을 살리시겠다고, 그분의 손발이 되어 온갖 정성을 다하셨고, 이 이후 무려 7년 이상 사시다가 아버지께서 돌아가시니, 이 소문이 퍼지면서 ‘정읍의 효열부’로 칭송받으신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