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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작소설비평회♣ 원문보기 글쓴이: cafe
다시 바다에 서다 조미형 11월4일 금요일. 아주 긴 하루다. 비가 그친 저녁 무렵부터 북서쪽에서 찬 바람이 불었다. 거리는 텅 비어 있다. 비에 젖은 낙엽 냄새가 공기 중에 떠다닌다. 가로등 아래에서 걸음을 멈추고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한동안 끊었다가 그를 만나지 못하게 되면서 다시 시작한 담배였다. 담배 연기는 어둠에 잡아먹히듯 눈앞에서 사라졌다. 휴대전화 폴더를 열고 단축 번호 1을 눌렀다. 신호가 간다. 나는 숨을 죽이고 신호음 끝의 그를 기다린다. 기대와 달리 엉뚱한 남자가 전화를 받는다. 영화사 사람이거나 병실 문 앞에서 그를 지키고 있는 남자일 게 분명했다. "정미아씨. 자꾸 이리로 전화를 하면 안 된다고 분명히 말했죠?" 낮고 무거운 그러면서 차가운 기계음에 가까운 목소리다. 남자의 말에 나는 뭔가 부당하다는, 분노가 치민다. "우리도 다 생각이 있어서 하는 일이니까, 가만히 있어요. 제기랄 전화기를 없애버리든지 해야지…." 전화가 뚝 끊겼다. 나는 폴더를 소리나게 덮었다. 분노를 삭이느라 천천히 발목을 돌렸다. 왼쪽으로 두 번, 오른쪽으로 두 번. 그리고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차도를 건너다말고 노란색 중앙선을 따라 달린다. 느린 속도로 택시가 내 옆을 지나간다. 택시 기사가 창문에 고개를 내밀고 나를 힐끔 본다. 이 시각이 되어도 거리는 충분히 밝다. 그러나 사람들은 눈에 띄지 않는다. 어딘가로 달려가는 택시 뒤로 황색불이 깜박인다. 축축한 공기에서 소금 냄새가 난다. 바닷가로 내려가는 계단을 미끄러지지 않게 내려간다. 나는 모래사장을 밟고 서서 어두움 저편 바다를 바라본다. 숨을 크게 들이쉰 후 달리기 시작했다. 늦은 밤, 모래사장을 달리는 것은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한다. 몸이 지치면 머릿속은 가벼워진다. 거친 숨결이 입 밖으로 튀어 나온다. 바다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규칙적으로 올라오는 내 발자국 소리가 전부다.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증상이 깊어진 것이 벌써 삼 개월을 넘기고 있다. 정확히 96일째였다. 그 날은 제민의 마지막 촬영이 있던 날이었다. 처음에는 환청이 들렸다. 얕은 잠에 들면 매번 제민의 경주용 자동차인 포뮬러 F1머신이 처참히 부서졌다. 끔직한 악몽이었다. 어떤 날은 불길에 휩싸인 그의 F1머신이 튕겨 올라 내 머리 위로 떨어지는 꿈도 꾸었다. 악몽에 시달리는 날이 많아지면서 나는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생업인 영화 번역일은 중단되었다. 더 이상 견뎌낼 수가 없던 어느 날 나는 병원을 찾았다. 내과에서 출발된 병원순례는 피부과, 비뇨기과를 거쳐 신경정신과에 이르렀다. 건물 전체가 개별적으로 개원한 의사들이 모여 있는 그야말로 마트 같은 병원이었다. 병원은 잘 포장된 진열장 같았다. 의사는 갓 대학을 졸업한 청년처럼 젊어보였다. 황갈색으로 물들인 긴 머리에 옅은 청색 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는 차트에 머리를 숙이고 질문을 던졌다. "언제부터 잠이 안 왔죠?" "한 두 달 전부터요." "이 개월 전에 특별히 기억나는 일이 있습니까? 누가 죽었다거나 사고를 당했다거나 크게 싸웠다거나 이별을 했다거나 하는 일 말이죠."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의사에게 그 모든 꿈들을 이야기 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이미 얼굴이 알려진 영화배우 신제민과 나의 이야기를 그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두려웠다. 의사는 굳어버린 내 표정을 흘끔 살펴보고 나서 차트에 알아보기 힘든 글씨로 휘갈겨 썼다. "두통은 없습니까?" 나는 주머니 속에 손을 넣고 빨간 캡슐을 손끝으로 만진다. 약국에서 구입한 혈전성 편두통 약이다. "편두통이 자주 있어요. 그리고 가슴이 두근거리고 답답해요. 목구멍을 스펀지 같은 걸로 막아 놓은 것 같이요. 이따금 아무런 까닭도 없이 깜짝 놀라기도 하구요." 의사가 날려 쓰는 글씨체는 국적을 알 수 없는 언어로 보인다. "같이 사는 사람은 있겠죠? 그리고 지금 어떤 일을 하시죠?" 순간 눈앞이 뿌옇게 흐려진다. 잠긴 내 목에서는 듣기 거북한 말이 띄엄띄엄 나온다. "혼자 살아요. 외화 번역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의사는 다시 몇 자를 적고 내 눈을 본다. 그리고 질문을 한다. "신기한 일을 하시는군요. 어려울 때 가끔 친구라도 만나 대화도 나누고 그럽니까?" 의사는 내게 당연히 친구가 있을 것이라 단정하고 묻는다. 나는 친구라고 부를 만한 사람이 없다. 나는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았다. 내게는 단 하나 제민이 있다. 그러나 제민을 친구라고 부르기엔 적절치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문득 제민과의 관계를 규정지을 만한 단어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렇다면 제민은 내게 무엇일까. 나는 무엇일까. 내가 머뭇거리고 대답을 못하고 있는 동안 의사는 시계를 흘낏 보고는 처방전 설명서를 읽듯 말한다. "불면은 병도 아니라고 하는 사람도 있던데, 웃기는 소리죠. 이미 우울증, 조울증도 함께 와 있다고 보면 돼요. 요즘 사람들 마음이 언제나 초조하고 급해요. 길거리에 사람들 자동차 운전하는 것만 봐도 그렇죠. 단 몇 미터 앞서기 위해서 사생결단을 하고 달려들잖아요? 지하철 타는 것도 그렇고, 공부하는 거, 돈버는 거, 연애하는 거…. 가족관계도 그렇고 사는 게 다 난장판이죠. 일단 일주일 치 약을 드릴 테니까 다음주에 다시 오세요." 의자에서 일어나지 않고 가만히 있는 나를 의사가 바라본다.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 미간에 주름이 가늘게 잡힌다. "매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시고, 선택과 포기를 빨리 결단하는 게 중요합니다. 내 것이 될 수 없는 것들은 일찌감치 포기할 수 있도록 훈련하세요. 요즘 사람들 너무 욕심이 많아요. 모두 다 도착증 환자라고 보면 돼요. 돈 도착증 환자. 수능성적 도착증 환자. 성도착증 환자. 출세 도착증 환자…. 암튼 운동이 도움이 됩니다. 조깅이 좋아요. 땀이 약간 배어나올 만큼, 사십분씩, 일주일에 나흘 정도만 하세요." 병원을 다녀온 그날 밤 나는 약을 먹었다. 세 개의 알약이었다. 분홍색, 자주색, 흰색 알약이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조금 혼미해진 정신을 부여잡고 침대를 뒤척이는 게 고작이었다. 그래서 나만의 처방전을 내렸다. 아예 낮과 밤을 바꿔버리기로 한 것이다. 아침이 오면 침대에 눕고, 오후에 작업하고, 해가 지면 운동을 한다. 꽤 괜찮은 아이디어였다. 아침잠은 숙면은 아니라도, 불면으로 온몸이 허청거리지 않을 정도의 수면은 취할 수 있었다. 정오에 일어나 간단한 식사를 하고 번역일을 했다. 해가 지면 조깅복을 입고 제민이 선물로 사 준 러닝화를 신고 집을 나왔다. 그리고 아침이 올 때까지 도시를 걷고 바다에 갔다. 도시는 밤이면 오히려 더욱 살아났다. 24시간 영업을 하는 할인 마트, 유리 건물 안의 형광 조명이 눈부신 헬스장, 인터넷 동호회 회원전용 세미나 시설을 갖춘 카페, 야식 전문 식당…. 도시는 잠들지 않는다. 반짝이는 네온사인은 사람들의 잠을 진공청소기처럼 흡수해 갔다. 정작 수면제가 필요한 것은 도시였다. 난 발걸음을 더욱 빨리 했다. 가벼운 조깅은 백 미터 달리기처럼 바뀌었다. 물비린내가 난다. 익숙해진 길을 따라 언덕을 오른다. 멀리 붉고 노란 불빛에 휩싸인 광안대교가 화려한 자태를 드러낸다. 그리고 눈 아래 그곳이 보였다. 녹색 십자가 아래 하얀 색 건물. 갑작스레 거친 기침이 튀어나온다. 허리를 접고 한참동안 기침을 한다. 해무 속에 생선비늘이 있어 그것들이 내 몸속에서 번득이는 것 같다. 고개를 들어 녹색 십자가를 본다. 해무 때문에 길 잃은 별처럼 보인다. 포르말린 냄새와 향냄새가 뒤섞여 난다. 시멘트 바닥에 흰 국화꽃들이 이리저리 나뒹굴고 있다. 건물의 왼쪽 입구에 즐비하게 늘어선 화환에서 떨어져 나온 것들이다. 삼베옷을 입은 여인이 건물 벽에 기대어 있다. 머리에 황색 굴건을 쓴 남자가 담배 몇 모금을 빨고 급하게 건물 안으로 쫓아 들어간다. 오른쪽 입구는 응급실, 왼쪽 입구는 영안실이다. 나는 다시 하늘을 본다. 응급실 쪽 6층 병실에 그가 있다. 잠든 그를 지키는 사람은 두 명이다. 두 명의 사내는 엔터테인먼트 K사 사람이다. 나는 그들과 세 번 만났고, 세 번 모두 건물 밖으로 쫓겨났다. 뭐, 사랑하는 사이라고! 그게 뭔데? 사내는 커다란 어깨를 흔들며 유들유들 말했었다. 제민은 내가 자신을 찾아왔다가 비참하게 쫓겨난 사실을 모를 것이다. 제민의 시간은 6월30일 오후 3시에서 멈추어 있다. 지금은 11월4일 밤 11시를 넘고 있다. 오늘은 그가 뜻하지 않은 자동차 사고와 함께 촬영을 마친 영화가 개봉한 날이다. 그 사실 때문에 나는 아침잠을 자지 못했다. 제민의 사고 장면이 고스란히 담겨진 영화를 본다는 것이 두려웠다. 하지만 일이 여기에서 그치지 않을 것 같은 불길한 암시 같은 것에 나는 하루종일 시달려야 했다. 잠을 놓쳐버린 나는 건물과 건물사이를 먼지처럼 떠돌았다. 그리고 맨 마지막 상영 시간에 그의 영화를 보러 가기로 정했다. 한낮보다는 깊은 밤이 어쩐지 편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제 그의 영화를 보러갈 시간이다. 그를 만나는 시간. 그가 보고 싶다. 부쩍 간절해진 마음에 손등으로 거칠게 눈을 훔친다. 내 걸음은 점점 빨라진다. 그러다 후박나무 무성한 길을 달려 내려가기 시작했다. "예약 확인해 드릴까요?" 그녀가 날 반갑게 맞는다. 나도 그녀의 얼굴을 안다. 하지만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그녀의 터질 듯한 가슴에 달린 명찰에서 나는 그녀의 이름을 재빨리 읽어 내린다. 백나희. 상영관이 10개나 있는 복합 영화관 메가박스의 예약 카운터 담당. 사람들을 만나면서 가장 힘든 일이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사회생활을 하는 나의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공간이 가상의 공간이었다. 나는 외화 번역을 하면서 영화를 통해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그들에게 이름은 의미가 없다. 영화 '위기의 주부들'에서 정원사와 놀아난 여자가 '이디'이건 '브리'이건 혹은 '리네트'이건 하등에 관계가 없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잠시 스치는 사람이라도 이름을 기억해 주기를 바란다. 이름 석자를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도 있는 게 사실이니까. 나는 지하 서점 앞 자판기에서 뽑아온 이온 음료 캔 두 개 가운데 하나를 내밀었다. 무엇이든 두 개를 사 드는 것은 제민을 만난 후 생긴 습관이다. 한번 생긴 습관은 그 상황이 달라져도 쉽게 변하거나 고쳐지지 않는다. 그녀는 내가 내민 이온 음료를 받으며 생긋 웃는다. 그리고 몇 차례 키보드를 두드리고 주홍빛 바탕에 까만 글씨가 인쇄된 티켓을 내민다. 그녀는 익숙한 동작으로 빨간 색연필을 들고 상영시간과 상영관, 금액에 동그라미를 친다. "확인해 드릴게요. 25시8분, 6관이구요. 오늘 개봉작 '게임의 규칙-하트 타임', 사천 원입니다." 메가박스에서 마지막 심야 영화는 25시8분이다. 자정을 넘긴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목소리는 맑다. 나는 티켓을 받았다. "또 운동하고 오셨어요! 피곤하진 않으세요?" 그녀는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같은 질문을 한다. 나는 흘러내리는 앞머리를 귀 뒤로 넘겨 눌렀다. 어깨 길이에서 컬한 생머리는 금세 귀 뒤를 벗어나 코와 잎, 뺨에 달라붙는다. "정말 선생님은 영화를 좋아 하시나 봐요. 이렇게 밤에 꼭 영화를 보시러 오시는 걸 보면. 잠도 안 주무시고." 나는 대답 대신 눈가를 덮는 머리카락을 손바닥으로 쓸어 올렸다. 치렁거리며 제멋대로 뻗치는 생머리가 오늘따라 계속 신경 쓰인다. 아마도 손에 쥔, 제민의 영화 티켓 때문일 것이다. 그녀가 고개를 내밀고 묻는다. "하트타임에 주연으로 나온 신제민씨 아시죠!" 다른 사람의 입에서 너무나 익숙하게 흘러나오는 그의 이름. 나는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았다. 다시 그녀가 생끗 웃으면서 말한다. "요즘 뜨기 시작한 신제민. 텔레비전에도 나왔었잖아요. M채널에 나오는 영화 주제곡 죽이지 않아요? 하트타임 뮤직 비디오를 볼 때마다 저 울잖아요." 순간 내 가슴은 고통으로 뻐근해진다. 그녀는 복숭아 음료를 몇 모금 홀짝이고 말을 잇는다. "이번 영화를 찍다가 사고를 당했다면서요. 어쩜 너무 안타까워요. 인터넷에 신제민씨 검색 1위잖아요. 그 사람 입원해 있는 병원에 매일 찾아가서 기도하는 팬이 한둘이 아니래요. 뇌사상태라는 말도 있고….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말도 있어요." 무엇이 마지막이라는 걸까? 나는 손의 떨림을 숨기기 위해 두 손으로 캔을 감싸 쥐어야 했다. 그는 자고 있을 뿐인데. 곧 깨어날 텐데…. 내가 모르는 사람들이 나보다 그를 더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이 이해되지 않는다. "그 사람 죽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나고 나서 대박 떴어요. 어쨌거나 오늘 영화에 류시형 역으로 나온 신제민 정말 멋져요! 섹스 오르가즘보다 레이싱 할 때의 속도감이 더 죽여준다는데." 25시3분. 나는 상영관 6관의 빨간 의자에 앉아있다. 엉덩이를 의자 깊숙이 밀어 넣고, 등받이에 어깨를 기대고 눈을 감는다. 얇게 덮인 눈꺼풀 위로 형광 조명이 사그라지고 있다. 눈을 감는다.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근육들이 이완되면서 신발이 무겁게 느껴진다. 운동화의 무게는 320g. 최신형 러닝화다. 흰색 바탕에 초록색 선이 두 줄, 붉은 선이 한줄 들어있다. 신발 끈은 연녹색, 끈을 조율하는 구멍은 양쪽 합해서 12개. 인체 공학을 전문으로 하는 연구기관에서 기존의 러닝화에서 8g을 줄였다는 획기적인 상품으로 광고된 신발이다. 외화 번역일을 하면서부터 나는 숫자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0.1초는 외화 번역에서도 중요하다. 관객들이 화면을 보면서 자막을 보는 시간, 내용 전달이 정확한 대화문을 만들어내야 한다. 외화 자막은 시간과의 싸움이다. 0.1초를 다투는 제민은 시간을 부수는 일이 삶의 전부다. 카레이서인 그는 0.1초를 다툰다. 그러나 그는 시간을 단축하는 것이 아닌, 시간을 깨부수는 일이 삶의 전부다. 그를 만난 것은 새로 작업 들어가는 번역문제로 사무실에 갔을 때였다. 그는 책상 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생수를 마시고 있었다. 생수병과 입술이 묘하게 하나가 되어 있는 모습에 나는 눈을 뗄 수 없었다. 부드럽게 움직이는 목울대가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것은 내가 지금까지 보아온 어떤 영화의 한 장면보다 아름다웠다. 그의 머리카락은 심하게 헝클어져 있었다. 옆 머리카락 몇 가닥은 밝은 황금색으로 염색이 되어 있었다. 올리브색 셔츠는 세탁을 자주한 듯 물이 빠져 있고, 청바지는 구멍이 세 군데, 닳아 헤진 곳이 두 군데였고, 검은 얼룩이 무늬처럼 묻어 있었다. 낡은 옷은 조금 마른 그의 체형에 썩 잘 어울렸다. 책상을 짚고 있는 왼손 손등위에 길쭉한 흉터가 있다. 주위의 피부가 당겨져 있다. 나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렸다. 그가 말했다. "이건 포뮬러를 가지는 대가로 얻는 상처예요. 그렇게 아프지 않았어요. 사실 화상 입은 줄도 몰랐죠." 내가 상처에서 시선을 돌리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 묻는다. "저어, 우리 한번 만난 것 같은데. 혹시 미아… 정미아 맞죠?" 나는 물끄러미 그의 입술만 쳐다보았다. 그가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얼굴을 앞으로 내밀고 내 얼굴을 살핀다. "맞네! 언어의 주술사라는 정미아." 그는 익숙한 이름을 부르듯 내 이름을 부르며 손을 내밀었다. 왼손이다. 의지와 상관없이 어느새 나는 그의 손을 쥐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이 내 손등을 지그시 누르는 동안 내 손가락은 그의 화상 자국을 덮고 있다. 그의 옷에서 불냄새와 기름냄새가 났다. 그가 눈을 가리는 내 앞 머리카락을 오른손 검지로 들어 올리면서 내 눈을 말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이런, 나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나 보네. 섭섭해지려고 하는데." 그는 정말 상처 입은 표정을 지었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손등의 상처는 분명 눈에 익다. 어디서 본 것일까? 남자는 여전히 내 손을 꽉 잡은 채로 말했다. "나, 신제민이라고 해요." 두 달 후, 나는 그의 이름에 붙어 다니는 또 다른 이름을 알게 되었다. '광란의 귀공자 신제민'. 포뮬러 레이서 국내 경기 2번 우승, 호주 그랑프리 2000년 우승. 현재 영화배우로 활동 시작. 그제야 생각났다. 씨네월간지에 난 기사. 신인 배우를 과감하게 선택한 영화사의 홍보기사였다. '게임의 규칙-하트타임' 제작 발표회 기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가 나온 두 페이지 앞에 나에 대한 기사가 반 페이지 실렸다. 전면에 그의 사진이 실린 것과 달리 나는 증명사진 크기의 흑백 사진이 실렸다. "영화를 보러 가기 전에 누가 번역했는지 먼저 확인해요. 그래서 이름을 기억하고 있지. 잡지에 난 흑백 사진보다 실물이 훨씬 좋은데. 내가 생각했던 모습이야. 자기가 번역한 영화의 대사는 정말이지 너무 실감나서 외국에서 살고 있는 교포인가 했지. 유학파인가?" 그는 나를 알고 있었다. 나보다 더 많이 나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몸짓으로 내게 페트병을 내밀었다. 그리고 싱긋 웃는다. 주술에 사로잡힌 듯 그때까지 느끼지 못한 갈증에 입안이 말랐다. 나는 그가 내민 페트병을 들고 물을 마셨다. 이상한 일이었지만 그 순간 내가 물을 마시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25시8분. 노예들의 합창이 웅장한 오케스트라의 선율을 타고 흘러나온다. 그리고 잠시 후 출발선에 서있는 900마력의 포물러머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엔진소리가 배경음악을 밀어낸다. 레이스가 시작된다. 카메라 앵글은 자신감으로 넘치는 제민의 얼굴을 따라 움직인다. 바람이 칼처럼 스쳐간다. 밝은 갈색으로 염색한 머리카락이 흔들린다. 눈앞을 덮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는 제민의 손가락으로 밝은 조명이 쏟아진다. 카메라는 제민을 모든 여자들의 연인으로 만들고 있다. 헬멧을 들고 있는 그의 왼손 넷째 손가락에 그와 함께 고른 반지가 있다. 나는 오른손 검지로 왼손 넷째 손가락을 더듬는다. 단단한 링이 손끝에 잡힌다. 두개의 잎사귀가 마주한 반지, 손끝에 만져지는 잎사귀는 네 개다. 연인의 나무로 알려진 자귀나무 잎사귀 모양을 본 떠 만든 커플 반지. 그러나 지금 제민은 스크린 속에 있고, 나는 관객으로 영화관 의자에 앉아 그를 만난다. 손을 내밀면 그가 달려올 것 같다. 하지만 그는 너무 멀리 있다. 두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F1은 경주용 자동차의 모델 이름이다. 앞이 뾰족하고, 커다란 바퀴가 차체 높이만큼 튀어나온 특이한 모습이다. 차체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운전자는 머신의 일부가 된다. 이 차량들은 경주만을 위해 특별히 개발된 엔진을 탑재하고 있다. 또한 초고속 질주에서 노면의 접지력을 최대한 높이기 위해 타이어에 양각 무늬가 없는 슬릭타이어를 사용한다. 슬릭타이어가 만들어내는 굉음은 언제나 사람들을 압도한다. 속도를 더할수록 흥분한 관중들의 몸에서는 땀샘이 열린다. 공기는 사람들이 뿜어내는 열기와 땀 냄새로 끈적거린다. 어느새 나는 두 손을 마주 잡고 기도하고 있다. 눈을 부릅뜨고 질주하는 그 앞에 시간이 느려지기를 아니 이대로 멈추어 버리기를 빈다. 초록색이 스크린 가득 넘친다. 초록색은 제민의 상징이다. 그의 F1 넘버 21. 그 뒤를 빨강색 F1 넘버 8이 쫓고 있다. 나선형으로 진입하던 넘버 8의 타이어에서 시커먼 연기가 피어올랐다. 제법 굵은 빗방울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예보에 없던 비다. 그러나 머신은 멈추지 않는다. 아니 멈출 수 없다. 관중들은 일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 때문이 아니었다. 경기장 안에서 일어난 뜻밖의 상황 때문이었다. 넘버 8이 노면을 적신 비로 인해 속도 조절에 실패한 것이다. 슬로모션처럼 세 바퀴를 구른 넘버 8은 넘버 11의 뒷바퀴를 쳤다. 넘버 11은 순식간에 전복되어 옆으로 미끄러진다. 바닥 긁히는 소리와 함께 불꽃이 팍팍 터진다. 넘버 21이 앞서 주행하고 있다. 뒤쫓아 달리던 넘버 23은 사고 차를 교묘하게 빠져 앞으로 튕겨 나간다. 뒤에서 일어난 사고 같은 건 아랑곳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사고를 즐기고 있을 터였다. 21번과 23번. 두 대의 머신은 같은 시위를 떠난 두 개의 화살처럼 질주한다. 한 치의 틈도 없이 붙어서 달리는 차체 주위로 연기가 피어난다. 두 대의 머신은 소리보다 앞서 달린다. 짧은 트랙을 80바퀴 주행하는 경기다. 전광판의 숫자가 번쩍이며 바뀔 때마다 관중석의 술렁거림도 높아진다. 속도계에 나타난 242.615 라는 숫자에 관중들은 함성을 내지른다. 달려! 더 달려! 달려! 열광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주행 횟수를 외친다. 일흔 일곱… 일흔 여덟…. 카운트다운을 하듯이 그들은 머신을 결승점으로 밀어붙이고 있다. 모든 시선들이 선두를 달리는 두 대의 머신을 따라 간다. 그들의 앞쪽에 갑자기 나타난 넘버 7. 한 바퀴를 뒤처진 신참 레이서의 머신이다. 두 대의 머신은 거의 동시에 넘버 7의 뒤를 치고, 중심을 잃은 넘버 7은 트랙 안쪽으로 밀린다. 중심에 끼어버린 제민의 넘버 21은 공중으로 튕겨 올라 오십 미터 옆 시멘트벽에 부딪히고 바닥으로 떨어진다. 굉음은 곧 차체가 부서지는 파열음과 뒤섞이고 폭발음으로 이어진다. 불꽃이 순식간에 제민이 타고 있는 머신을 휘감는다. 불꽃이 커진다. 중심에서 붉은 꽃으로 핀 불은 커질수록 검붉어진다. 자동차, 사람, 하늘. 눈앞에 보이던 것들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스크린 가득 검붉은 불꽃이 널름거린다. 극장 안은 쥐죽은 듯 고요하다. 관객들은 스크린 속에서 일어난 사고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다. 특수 제작된 머신들이 장난감처럼 부서지고 있다. 찌그러들고 짓눌리고 분해되고 뾰족한 앞은 부러져 튕겨 나간다. 모두가 속도가 만들어낸 파괴의 장면에 넋을 잃고 있다. 나는 옷자락을 쥐어뜯었다. 영화일 뿐야. 이건 진짜가 아니야. 편집된 거야. 나는 그 말을 주문을 외듯 되뇌었다. 턱이 아프다. 레이스 장면 동안 이를 앙다물고 있었음을 알았다. 손은 땀으로 축축하다. 스크린이 하얗게 변한다. 화면이 보이지 않는다. 눈이 아프다. 눈을 뜰 수 없다. 손바닥으로 눈앞을 가려도 백광현상은 막을 수 없다. 머리를 감싸 쥐고 흔든다. 나는 어딘가로 달려가고 있다. 숨이 목에 차오른다. 사람들이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린다. 누군가 내 팔을 잡아당긴다. 오른팔이 떨어져 나간다. 끈적이는 붉은 피가 내 몸에 덕지덕지 달라붙는다. 또 다른 사람이 내 등을 밀치고 누른다. 등에 올라탄 사람을 떨쳐버리기 위해 왼쪽 팔을 휘두른다. 허벅지 근육이 찢어지는지 칼끝으로 긋는 듯한 통증이 계속된다. 가슴에는 작고 날카로운 손 하나가 들어가 헤집는 것 같다. 백광현상은 한 동안 계속되었다. 어느 순간 등을 내리 누르던 사람, 팔을 잡아채 간사람, 고막을 찢어대듯 비명을 질러대던 사람들이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간다. 눈부신 빛이 조금씩 사라진다. 질끈 감았던 눈을 떴다. 내 몸을 찢어발기던 그들은 모두 스크린 속으로 빨려 들어가 있다. 내 자리는 여전히 영화관 객석의 한가운데다. 눈앞에 그가 웃고 있다. 색색의 색종이가 꽃잎처럼 흩날리고 있다. 제민은 우승 트로피를 들고, 환하게 웃으며 샴페인을 터뜨리고 있다. 그의 머리위로 샴페인 거품이 흰 눈처럼 날린다. 레이싱 걸들이 그의 팔에 매달려 에스라인 몸매를 한껏 뽐내며 카메라맨들을 향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111분 짧고도 길었던 시간이 지나고 자막이 올라간다. 불이 켜진 극장 안에는 사람들이 허청허청 열려진 문을 빠져나간다. 누군가 흥분한 듯 큰 소리로 말한다. "부서진 머신이 좀 아깝기는 하다. 돈이 얼마냐? 대단한데, 역시 신제민이야!" "야, 저거 진짜 사고래." "진짜면 어떠니, 영화만 재밌으면 되지. 어차피 짜고 하는 건데." "신제민 돈 방석에 앉는 건데. 재수 더럽게 없기는 해. 오늘 내일 한다며?" 내 몸은 결승점을 지난 마라톤 선수처럼 땀에 절어 있다. 머릿속이 쿵쿵 울린다. 한꺼번에 떠오른 영상은 나를 꼼짝달싹 할 수 없도록 의자에 묶어두고 있다. 마지막 촬영이 있기 전날, 제민은 나를 찾아왔다. 그가 오는 시간은 언제나 깊은 밤, 자정이나 새벽이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다. 그의 격렬한 애무가 만들어 놓은 열기가 사그라지고 나면 나는 그가 즐겨 먹는 야식을 만든다. 그는 담백한 국물에 여러 종류의 면을 넣어 먹는 것을 좋아한다. 냉장고는 해산물과 가다랭이 포, 멸치, 다시마, 무, 양파가 항상 준비되어 있다. 나에게로 와서 그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오디오에 CD를 넣는 것이다. 그는 황병기의 가야금 연주곡 중에서 춘설만 고집스레 듣는다. 그는 소파에 다리를 뻗고 누워 눈을 감고 가야금 가락을 흥얼거린다. "머신을 타고 나면 그 후유증이 한나절은 가는 것 같아. 땅이 휙휙 달려가고 내 몸이 빙빙 도는 것 같고 그래. 그런데 여기 와서 이 음악을 들으면 편해져. 그게 정미아 때문인지 가야금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부탁이 있어. 이번 촬영에 대역을 쓰면 안 될까?" 제민은 갑작스런 내 말에 희미하지만 얼굴이 굳어졌다. 곧 헛기침을 하면서 말했다. "난 레이서야. 사람들은 내가 직접 하기를 원해. 난 나를 대신하는 그 누구도 용납할 수 없어. 대역을 쓰면 영화배우로서 치명적이야. 알아둬. 난 이미 그냥 사람이 아냐. 난 상품이고 레이스는 내 브랜드야." 그는 미소를 지으며 내 코를 살짝 쥐고 흔들었다. 나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너무 위험해. 실제와 같은 속도를 낼 거잖아. 그럼 어떻게 되겠어? 죽을 수도 있다고!" "영화 속에나 그렇지. 실제 촬영은 그렇지 않아. 몇 장면 나누어서 촬영한 후 합성한다고. 위험하지 않아." 제민의 설명에도 나는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 그것은 어쩌면 속도에 집착하는 제민을 너무 깊이 알아버린 탓인지도 몰랐다. 제민은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자신이 처음 머신을 만난 날의 감격에 대해 말했다. "선배의 소개로 포뮬러 경기장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어. 처음에는 타이어를 교체해주는 일만 했지. 한 달 후 경기장에 갔어." 제민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햇살 아래 낮게 웅크린 머신에 시동을 거는 순간 알았지. 그 놈은 단순한 기계가 아니라는 걸 말이야. 그놈의 엔진 소리는 나를 부르고 있었어. 최소중량 600kg으로 평균 시속 245km를 주행하지. 그때는 머신과 내가 하나가 되는 거야. 그 순간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어. 머신 속에서 비로소 몸은 의식으로부터 자유롭고, 의식은 몸으로부터 자유를 찾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시간을 앞서 가는 거야. 그게 내 인생의 목표니까. 난 그걸 위해 살아. 시간을 깨부수는 거." 머리가 희끗한 중년 여인이 파란 쓰레기봉투를 들고 들어온다. 자리에 앉아 있는 나를 한번 쳐다보고는 좌석을 돌며 관객들이 두고 간 종이컵을 줍는다. 그 여자가 입구에서 문을 닫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상영관 6관을 나와 화장실로 달려갔다. 세면대에 물을 틀었다. 찬물을 얼굴에 끼얹었다. 울렁거리는 속이 금방이라도 뒤집혀 올라 올 것 같았다. 먹은 것이라곤 생수 반 병, 이온음료 캔 하나뿐이었는데 말이다. 비치되어 있는 액체 비누를 꾹 누른다. 손바닥을 문지르고, 손가락 사이사이를 반복해서 씻는다. 거울에 비친 얼굴을 본다. 충혈된 눈 주위가 움푹 들어가 있다. 다크 서클이 진해서 무대 화장이라도 한 것처럼 보인다. 두 손으로 거울속의 얼굴을 가린다. 그가 보고 싶다. 그는 지금 쉬고 있는 걸까, 자고 있는 걸까? 나는 화장실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일층에 내렸다. 메가박스 건물 주변 어디에도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방금 전까지 영화를 본 사람들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몸은 무겁다. 팔, 다리, 어깨, 머리를 들고 서 있기도 힘들다. 의식은 뭔가에 걸려 체한 상태다. 그에게 말해야 한다. 그의 영화가 개봉되었다고 말하면, 깊은 잠에서 깨어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몸을 움직이게 했다. 나는 병원을 향해 달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영화 속의 이야기가 사실이 아님을 눈으로 확인해야 했다. 가쁜 숨소리가 몸을 재촉한다. 언덕을 올라 병원 건물 안으로 쑥 들어간다. 계단을 오른다. 새벽, 병원 계단은 침묵에 싸여있다. 제민이 있는 중환자실 입구, 유리문 앞에 까만 정장 차림의 두 사내가 서서 내 앞을 가로막았다. "곤란합니다. 누구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사내는 내 몸보다 족히 세 배는 되어 보였지만 나는 물러설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나는 문을 가로 막는 사내의 가슴을 밀었다. 사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도리어 내 손목을 잡아채 비틀었다. 어깨가 빠지는 것처럼 아팠다. 억양이라고 없던 처음과 달리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또 한명의 사내가 내 앞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 사내의 귀 밑에서 목까지 긴 칼자국이 있었다. 내 옆에 바싹 다가선 사내는 고개를 숙여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사내의 음성은 얼음을 칼날로 치는 소리와 흡사했다. "이봐, 정미아씨. 그만 하시지. 이건 단순한 일이 아냐. 엄청난 돈이 걸린 대형 이벤트 같은 거라고. 썩 꺼져. 그쪽이 정말로 그를 생각한다면, 다시는 근처에 얼씬거리지도 마." 4시25분. 나는 또다시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드물게 별이 보인다. 어제 비를 뿌렸던 구름이 사라졌다는 증거다. 좋은 일이 생기려는 것일까. 선택과 포기를 빨리 결단하는 게 중요합니다. 내 것이 될 수 없는 것들은 일찌감치 포기할 수 있도록 훈련하세요. 뜬금없이 의사의 말이 떠올랐다. 그날 의사의 말을 들으면서 난 제민을 떠올리고 있었다. 제민은 내게 선택의 대상일까, 포기의 대상일까. 의사는 내게 그것을 묻고 있는 것 같았다.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단축 번호 1을 눌렀다. 신호가 간다. 하나 둘 셋 넷…. 신호가 열 번째에 이르자 나는 폴더를 덮었다. 그의 전화기는 검정색 양복을 입은 사내들의 손아귀에 들려있을 것이 뻔했다. 어쨌건 그의 목소리를 단 한번도 들을 수 없었지만, 그의 전화에 신호를 보낼 수 있다는 것이 다행스러웠다. 문을 열고 들어선다. 현관 미등이 켜진다. 순간 그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 배고파.' 나의 원룸에 들어서면서 그는 언제나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는 보이지 않는다. 대신 샛노란 불빛만이 두터운 어둠에 둘러싸여 있다. 흙먼지 한점 없는 제민의 흰색 러닝화 한 켤레가 가지런히 놓여있다. 지난번 마지막 촬영을 가면서 바꿔 신고 간 운동화다. 제민의 러닝화 옆에 나는 신발을 벗어 가지런히 놓았다. 거실 벽에 걸린 시계를 본다. 바늘은 4시48분을 가리키고 있다. 야광 초바늘이 매끄럽게 움직인다. 건전지가 다하는 그 순간까지 바늘은 쉬지 않고 움직일 것이다. 리모컨을 들고 전원 버튼을 누른다. 텔레비전이 살아난다. 엠넷와이드 연예뉴스는 24시간 방송이다. 그에 관한 소식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기도 하다. 그가 병원에서 나오면 다시 여행 이야길 꺼낼 생각이다. 물론 여행사를 통한 여행은 불가능하겠지만, 아무도 모르게 감쪽같이 사라질 방법이 있을 것 같았다.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가슴이 뛴다. 그에게 다시 전화를 해볼까? 아니면 문자를 띄워 볼까? "바로 어제 개봉된 영화 하트 타임의 주인공 신제민씨는 포뮬러 드라이버 자격증을 가지고 있는 전문 레이서입니다." 제민이 화면에 나온다. 십대로 보이는 VJ가 화면 왼쪽에 나온다. 목소리가 통통 튄다. 음량을 높인다. 이어 제민의 얼굴이 화면에 나오고, VJ 여자의 목소리가 갑자기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나는 볼륨을 높인다. "그는 영화 '게임의 규칙-하트 타임'에 출현하면서 영화계의 주목을 받았죠. 대역없이 직접 충돌장면을 촬영하던 지난 6월30일 사고로 큰 부상을 입었습니다. 차체를 절단한 후 급히 병원으로 후송했으나 아직 의식이 깨어나지 않고 있다고 하네요. 대역을 쓰자는 영화사 관계자들의 조언을 신제민씨는 끝내 거절했다고 합니다.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은 119대원들이 출동한 후에야 그것이 연출된 장면이 아니라 실제 사고라는 사실을 알았다고 합니다. 감독은 생생한 사고 현장을 필름에 담았고, 그 장면은 영화에 그대로 사용되었습니다." 활짝 웃고 있는 제민의 얼굴 너머로 화살처럼 달리는 경주용 자동차들이 나타난다. 그러다 그것들이 서로 부딪쳐 공중으로 튀어 오르더니 폭발음으로 이어진다. 이어 커다란 불길이 제민의 머신을 휘감는다. 브라운관 가득 널름거리는 검붉은 불꽃 앞에 제민은 여전히 활짝 웃고 있다. "관객들에게 거짓 장면을 보여줄 수 없다며, 시속 250 킬로미터로 달리는 자동차에 직접 몸을 실었던 영화배우 신제민씨. 그의 숭고한 예술혼에 힘입어 영화 '게임의 규칙-하트타임'은 개봉 첫날부터 매진사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럼 영화 '게임의 규칙'과 신제민씨에 얽힌 감동의 드라마를 제작자와 감독님을 모시고 몇 말씀 나누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숨이 막혔다. 나는 숨조차 쉴 수가 없는데 제민은 여전한 웃음을 입에 달고 세상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신제민씨는 여전히 의식이 없는 상태에 있다고 합니다. 방금 들어온 소식에 의하면 오늘 밤이 고비라고 하는군요.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더 이상 이렇게 앉아서 기다릴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불길처럼 솟아났다. 나는 문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복도를 달려 엘리베이터 속으로 들어가 닫힘 버턴과 1층을 번갈아 가며 계속 눌렀다. 새벽, 인적없는 도로를 달린다. 아스팔트 위를 조급하게 뛰어가는 조깅화 소리가 과장되게 울린다. 병원 입구를 지나 계단으로 올라간다. 병실이 있는 6층 복도 계단 앞, 숨을 가다듬는다. 들어쉰 숨을 멈추고 고개를 내민다. 그의 병실을 지키고 있는 사내는 한명뿐이다. 사내는 팔짱을 낀채 벽에 기대어 고개를 숙이고 있다. 사내의 고개가 옆으로 휘청한다. 그는 자고 있었다. 조깅화는 모노륨 바닥에서 소리가 거의 나지 않았다. 지난 삼개월간 나를 가로 막았던 문을 조용히 열었다. 순간 냄새가 확 끼쳐왔다. 병원 특유의 크로젤 냄새에 뒤섞여 있는 것은 뜻밖에도 담배가 타는 냄새다. 꺾어진 벽 뒤로 VJ 여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조금 전 내가 원룸에서 들었던 그 텔레비전 프로그램이었다. 그것을 이 병실 안의 누군가가 보고 있었다. 하지만 제민은 인사불성일 터였다, 누구일까? 벽을 짚고 조금씩 다가간다. 브라운관을 뿜어져 나와 출렁이는 빛살을 타고 낮은 흐느낌 같은 것이 들린다. 이것은 환청인가? 흐느낌 같기도 하고 교성 같기도 한 그 소리 속엔 여자의 음성도 섞여 있었다.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온 소리인가? 나는 장딴지에 힘을 주어 두어 발걸음을 옮겨갔다. 끊어진 전선을 잡은 듯 움직일 때 마다 근육들이 경련을 일으킨다. 벽의 모서리를 돌았다. 순간 내가 허상을 보고 있는 듯이 느껴졌다. 엉뚱하게도 침대 위에 벌거벗은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여자의 터질 듯한 가슴을 어루만지고 있는 손. 그 손가락에는 자귀나무 잎사귀 모양의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어머나! 나를 발견한 여자가 소리를 쳤다. 이어 텔레비전의 불빛으로 그늘이 드리워진 여자의 등쪽에서 한 사내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어이없이 그는 제민이었다. 땀으로 번들거리는 가슴, 헝클어진 머리카락. 조금 전 이곳에서 벌어졌을 질탕한 열락을 짐작케 하는 모습이다. 그의 얼굴에 '게임의 규칙-하트타임' 뮤직비디오의 잔영이 농도 짙은 색감으로 일렁이고 있다. "아니?!" 그의 시선이 커다랗게 일그러지며 내 얼굴에 꽂힌다. 그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하지만 당황한 것은 오히려 나였다. 산소마스크를 끼고 의식불명 상태로 누워 있어야 할 그였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출렁이는 바다 위에 서 있는 듯 다리가 후들거렸다. "아니, 어떻게 들어왔어? 여긴 아무나 들어오면 안 돼." 숨막히는 침묵이 그와 나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을 만든다. 투명한 벽 너머, 그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진다. 입술 끝이 기묘한 형상을 그리며 말려 올라간다. 그가 뭐라고 말했지만 내 귀에는 마치 벌떼가 달려들어 윙윙대는 소리처럼 들릴 뿐이었다. 그의 어깨 너머로 여자가 고개를 내밀었다. 나는 그녀를 알아볼 수가 있었다. 올해의 레이싱 걸로 뽑혀 영화에 함께 출연을 했던 여자였다. 언제부터 입술을 깨물고 있었는지 비릿한 피가 내 입안으로 스민다. 내가 선택한 일, 가상의 공간에서도 이런 결말은 없었다. 이건 분명 누군가의 장난이다. 그것도 아주 지독한 장난. 그 순간 병실 안의 모든 것들이 나를 숨막히게 했다. 침대에서 벌떡 일어선 그가 벌거벗은 모습으로 내 앞으로 다가와 어깨를 잡는다. "돌아가! 네가 여기서 본 건 절대 비밀이야! 난 위독한 상태로, 사경을 헤매고 있어야 한단 말이야. 배우가 연기를 잘 한다고 영화가 대박을 터뜨리는 건 아냐. 부탁이야! 제발… 부탁한다!" 어깨에 그의 손가락이 파고든다. 나는 낚싯바늘에 걸려 수면 위에서 헐떡이는 고기처럼 숨이 가빠온다. 평면 브라운관 속의 제민이 절정에 이른 포뮬러의 불꽃 속에서 걸어나오고 있었다. 의식의 희미한 틈을 비집고 그의 목소리가 들어온다. "이건 다 너와 나를 위한 거야. 나중에 이야기할게. 이번 일만 끝나면…." 나는 버럭 고함을 질렀다. 아냐. 아냐. 이건 아니야. 하지만 내 입술을 젖히고 나온 것은 거친 숨소리뿐이었다. 밤을 낮 삼아 달려야 했던 지난 96일 간, 내 어두운 기억의 저편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이제야 나는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병실을 뛰쳐나왔다. 급한 발소리, 고함치는 소리가 채찍처럼 등줄기를 후려친다. 새벽공기는 해무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온통 희멀건 잿빛이었다. 그 잿빛 세상 위로 브라운관의 불빛들이 끝도 없이 출렁이고 있었다. 익숙한 냄새를 쫓아 바닷가 계단을 내려갔다. 바다에는 어느새 여명이 비치고 있었다.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그 빈 공간을 따라 나는 조금씩 발길을 옮겨가고 있었다. 신발위로 차가운 바닷물이 스며들었다. |
심사평 인터넷 영향 소설 구심력 약화 아쉬워 최근 소설이 가벼워지고 엉클어지고 있다. 엉클어진다는 건 정연한 논리성이나 이야기의 흐름이 없어지고 파편화된다는 말인데, 이는 어쩌면 영화나 인터넷의 영향이 아닌가 싶다. 그래도 소설이라면 최소한의 이야기 얼개가 있어야 하고 구심점(주제)은 선명해야 하겠는데 그러하지 못하다. 최종심에 오른 일곱 편 가운데 '피그말리온의 역습'(양호식)이 특히 그러하다. 이런 소설은 원심적 구성이 특징이 돼 구심점을 놓치면 그냥 이야기가 밖으로 흩어져 버리고 남는 게 없다. 그런대로 구심력이 용하게 버티고 있는 작품이 '새들은 우리 집에 와서 죽는다'(윤혜령), '다시 바다에 서다'(조미형) '스웨덴이 보이는 해변'(장소연) 등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야기에 집착하다 보면 곁가지를 적절하게 쳐내지 않아 어수선하거나 뒤얽혀 어지럽고, 평범한 소재를 덩굴처럼 헝클어 놓는데 지나지 않는 이야기, 혼자 심각하니 독자에게 호소하는 힘이 없어진다. '무저갱'(김서원)은 전자에, '유리천장'(정민호) '스물 둘, 그 풀빛 이름'(홍애영)은 후자에 속한다. '스웨덴이 보이는 해변'은 동기성이 작위적이어서 필연성이 약해졌고, '새들은 우리 집에 와서 죽는다'는 지나치게 사변적이어서 이야기로서의 설득력을 잃었다. 그래도 계속 정진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으로 '다시 바다에 서다'를 당선작으로 뽑는다. |
당선소감 당선의 기쁨 꺼지지 않는 등불로 간직 조미형 흉중에 있는 말들이 제 옷을 입은 단어로 쏟아지지 않으면 온몸이 아팠습니다. 커다란 여백의 앞에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한 채 커서가 깜박거리면, 전 바다를 보러 갑니다. 자판기 커피 한 잔을 들고 모래사장에 앉아 세상만사를 잊어버리고자 애를 씁니다. 끊임없이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단어들을 하나씩 버립니다. 다 비우고 나면 가슴이 시원해집니다. 그리고 돌아와 다시 시작합니다. 당선 소식을 듣고 처음에는 믿기지 않았습니다. 아마 익숙해진 낙선의 경험 때문일 것입니다. 소설을 쓰겠다고 늦은 밤까지 컴퓨터 자판과 씨름하는 나를 믿어준 가족과 소설의 기초에서 작품을 보는 마음의 눈까지 깨워준 선생님들이 없었다면 결코 이 자리까지 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작품은 지난 여름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시작한 작품입니다. 삶이 무엇인지, 인생이 무엇인지, 사랑은 무엇인지,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모르고 마냥 방황할 때, 조르바는 명쾌하게 저에게 말했습니다. "개뼈다귀 같은 소리, 글, 책. 불이나 싸질러 버려." 그러면서 조르바는 지중해 해풍에 몸을 맡기고 산투리를 켜면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습니다. 그 모습을 상상하면서, 그의 말을 음미하면서 저는 눈물을 흘리며 웃고 또 웃었습니다. 생각으로부터 자유를 얻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매일 매일 도를 닦는 것 같다고 하더군요. 문장 부호 하나에 수도 없이 많은 고민을 하고, 조사 하나에 머리카락을 열 개도 더 뽑았습니다. 삶의 가장 깊은 곳을 들여다보는 현미경이 제 손끝에 달려 있는 기분입니다. 너무나 두렵고, 또 조심스럽습니다. 오늘 당선의 기쁨은 길고 긴 터널을 지나는 데 꺼지지 않는 등불로 가슴에 간직하겠습니다. 부족한 작품을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국제신문 관계자 여러분께도 감사드립니다. 이제 다시 바다의 끝자락에 와 섰습니다.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 더 치열해지고 더욱 열심히 공부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