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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용어500(16)불상~사십이장경~박쥐중
197. 불상 (佛像)
불상(佛像)이란 불, 보살 등의 형상을 말한다. 돌이나 나무로 조각한 석가모니 형상을 일반적으로
불상이라 한다.
금속으로 부어 만든 형상, 천이나 종이에 그린 형상, 흙으로 빚어 만든 형상 등을 석상(石像), 목상(木像), 주상(鑄像), 畵像(화상), 소조상(塑造像), 토상(土像)이라 한다.
불상(佛像)을 조성하여 전당(殿堂)에 모시는 것은 부처님이 살아 계실 적에 예배하는 것과 같은 생각으로 공경, 예배하기 위한 것이었다.
부처님이 멸도(滅道) 하실 때에 교법과 계율로서 스승을 삼아 수행하여 숭배(崇拜)할 것을 가르쳤으나
어떤 제자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형상을 조성하여 당탑(堂塔)에 모시고, 살아 계실 때의 큰 은혜를 보답하고자 하기도 하고 복덕을 희구(希求)하였다.
또한 불상(佛像)을 조성하게 된 유래는 부처님이 어머님을 위하여 도리천에서 설법하시고 아직
내려오시지 않으실 적에 우전왕이 앙모하는 정성을 금할 길 없어 전단향 나무로 높이 5척의 부처님
형상을 조성하였다 한다. 또 바사닉 왕은 자마금(紫磨金)으로 5척의 부처님 형상을 조성하였다 한다.
이렇게 하여 부처님 불상은 석가모니 재세시에 이미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한다.
198. 불상의 재료 (佛像材料)
불상을 만든 재료의 선택에는 아무 제한도 없었고 또한 없다. 재료의 종류에 따라 석불ㆍ마애불ㆍ
목조불ㆍ금불ㆍ소조불ㆍ건칠불 등으로 나눈다.
1) 석불(石佛)은 돌로 만든 불상. 불상 제작 초기부터 만들어졌던 것으로 가장 일반적인 불상형태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화강암으로 만든 불상이 많이 남아 있다.
2) 마애불(磨崖佛)은 커다란 암벽에 부조 또는 선각 등으로 얕게 새긴 불 상. 우리나라에서도 삼국
시대부터 제작되기 시작하여 경주 남산의 마 애불상군을 비롯하여 태안 마애삼존불, 선산 마애삼존불 등 곳곳에서 볼 수 있다.
3) 목조불(木造佛)은 나무로 만든 불상. 목조불상은 시대나 장소에 관계 없이 많이 제작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나 재료상의 취약성 때문에 남아 있는 예는 극히 드물다.
4) 금불(金佛)은 금으로 주조된 불상. 불상 조성의 규범 중 하나가 부처는 금빛이 나야 한다고 되어 있어 불상제작 초기부터 금으로 만들어진 것 같다. 재료가 비싸고 귀해 별로 유행하지는 못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순금상은 많이 만들어지지 않았으나 경주 황복사 터 삼층석탑에서 출 토된
통일신라시대의 금제불좌상과 금제불입상이 남아있다.
5) 금동불(金銅佛)은 동(銅)이나 청동으로 만든 불상에 금을 입힌 것이다. 금(金)이 귀했기 때문에 자연히 부식을 방지하고 황금과 같은 효과를 내는 금동불이 크게 유행하였다. 중국에서는 불교의 전래와 함께
남북 조 시대부터 많이 만들어졌다.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로 개인용의 작은 호신불(護身佛)에서부터 거대한 상에 이르기까지 금동으로 많이 제작되었다.
6) 철불(鐵佛)은 철로 주조한 불상. 우리나라의 경우는 금동불보다 많이 만들어지지는 않았지만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시대에 걸쳐 유행하였 다. 대표적인 예는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을 비롯하여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상, 광주 철불좌상 등이다.
7) 소조불(塑造佛)은 점토로 만든 불상. 우리나라에서는 삼국 시대 이후 많이 만들어졌는데 현재 남아있는 작품은 별로 없다. 기록상으로는 신라 시대에 양지(良志)가 만든 영묘사 장륙상 등이 있다.
현재 부석사 소조불좌상, 성주사지 출토소조불 등이 유명하다.
8) 건칠불(乾漆佛)은 나무로 간단한 골격을 만들고 종이나 천 같은 것으 로 불상을 만든 후 옻칠을 하고
다시 금물을 입힌 것이다. 우리나라에 는 알려져 있는 불상으로는 조선 시대의 기림사 건칠보살좌상과
불회 사 건칠삼존불좌상 등이 있다.
☀ ‘조주대사’는 이렇게 읊었다.
철불은 용광로를 건너지 못하고, 목불은 불을 건너지 못하고,
소불은 물을 건너지 못하니 그러므로 부처는 너 안에 있다.
색성향미촉법의 단계를 넘어 마음으로 부처를 찾아라!
199. 불상조성 경위
부처님은 도리천에 계시는 어머니를 제도하기 위해 그곳에서 3개월간 지장경을 설하시고 하강하셨다.
부처님이 안 계시니 부처님이 보고 싶고 그리워하던 우전국 우전왕은 상사병이 나서 앓아눕게 되니
부처님의 제자가 우전왕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향기롭고 가장 좋은 나무가 전단향나무이니 이를 구하여 부처님 모습과 똑같은 등상(等像)을 조성하여 불전(佛殿)을 지어 모셔놓고 보고 싶고 그리울 때 쳐다보고 찬배(讚拜)하면 그리운 마음이 사라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우전왕은 가장 향기롭고 가장 잘생긴 전단향나무를 구하여 부처님과 똑같은 등상을 조성(범천왕이 조성)하여 전각을 짓고 등상을 모시여 그리울 때 보고 참배하니 상사병이 완쾌되었다.
부처님이 설법을 마치고 돌아온다 하니 우전왕은 전각에 모셔놓은 등상을 업고 마중을 나아갔다.
우전왕 등에 업힌 부처님의 등상이 등에서 떨어져 천상으로 올라가다 공중에서 현신불인 석가모니
부처님과 마주치니 조각한 등상불은 없어지고 부처님만 내려오신다.
부처님은 대중에게 법신은 상주하고 육신은 필멸한다는 도리를 알려주기 위해 머지않아 열반에 들 것이다. 열반에 들면 너희들도 우전왕과 같이 등상불을 조성하여 전각에 모시고 조석으로 예불하면 내가
있을 때와 똑같은 영험을 주리라 하시며 열반에 드시었다.
이런 연유로 부처님의 불상을 조성하여 전각에 안치하고 신앙의 대상으로 예불하고 기도하게 되었다.
200. 불성 (佛性)
일체중생은 불성(佛性)이 있다. 불성론은 선불교의 핵심사상이다. 선불교에서 불성은 삼라만상에 두루
편재해 있다. 불성(佛性)은 중생심의 본질적인 자성을 이야기한다.
혜능선사는 불성(佛性)의 공적한 성질에 대해 말했다.
“나에게 법이 있는데 이름도 글자도 없고 눈도 귀도 없으며 몸도 마음도 없고 말도 없고 보이지도 않으며 머리도 꼬리도 없고 안과 밖과 중간도 없으며 오고 감도 없고 청황적백흑색도 아니며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으며 인(因)도 아니고 과(果)도 아니다”
그 무엇도 아닌 불성(佛性)은 결코 철학적 개념이 아니다. 이름도 없고 글자도 없고 머리도 없는
그 무엇인 불성은 자기 자심속에 이미 내재해 있는 진실한 성(性)을 가르킨다.
후천적으로 생겨난 것도 아니며 밖에서 주어진 것도 아닌
불성(佛性)은 선천적으로 완전무결하게 미리 이루어진 것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선불교에서는 선천적으로 완전하게 주어진 불성을 마음 안에서 찾으라고 하는 것이다.
조사선에 있어서 본각(本覺)의 개념은 그런 점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이미 깨달아 이루어져 있는 것을
본각으로 이야기한다면 중생은 곧 부처가 되는 것이다.
불성론의 최종귀착점은 “일체중생은 모두 불성(佛性)이 있다”로 끝날 수밖에 없다.
불성론은 곧 자불성(自佛性)이다.
“내 마음에 스스로 부처가 있으니 자불(自佛)이야 말로 진불(眞佛)이다.”
201. 불자 (拂子)
짐승의 털이나 삼 등을 묶어서 벌레 등을 쫓을 때 사용한다.
흰말(白馬)의 꼬리로 만든 것을 귀하게 여겼으며, 특히 중국에서는 선종(禪宗)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불진(佛塵)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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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율에는 부처가 승려들에게 불자를 들고 벌레를 떨어 쫓아내는 용도로 사용하도록 하였는데 실로 만든 불자, 부드러운 천을 찢어서 만든 불자, 지푸라기로 만든 불자, 나무껍질로 만든 불자 등을 허용하였다.
그러나 야크의 꼬리털이나 말의 꼬리털로 만든 불자, 금과 은을 소재로 한 손자루가 붙어 있는 불자 등
사치스런 불자의 사용은 금하였다.
경전에는 보살이나 장자들이 흰 말의 꼬리털로 만든 백불(白拂)을 잡고 있다는 기록이 적지 않게
나오는데, 이들 대부분은 번뇌를 털어 없애는 상징물로 제시된 것이다.
또한 불교에서 백불은 귀하게 여겨져 조사(祖師)의 영정에 지물로 그리는 경우도 많다.
석가모니의 과거세의 원인과 현재세의 결과에 대해 설한 불교 경전인 『과거현재인과경』에는 부처께서
탄생하실 때 석제환인이 보개를 들고 대범천왕은 백불을 잡고 부처의 좌우에서 시봉하였다고 한다.
초기 밀교의 백과사전적 경전으로 알려진『다라니집경』에는 관세음보살은 왼손에, 보현보살은 오른손에 백불을 잡고 부처님의 좌우에서 시봉했다고 한다.
선종에서 불자는 법문을 펼칠 때 애용하는 장엄구 중 하나이다.
수행승을 지도하는 선사인 조실(祖室)이나 절의 주지가 불자를 들고 대중에게 내리는 설법을 병불(秉拂)이라고 하며, 불자는 중요한 법물로 사용되었다.
202. 불전사물 (佛典四物) : 범종, 법고, 목어, 운판
불교의식(佛敎儀式)에 사용되는 불구(佛具)의 하나이다. 범종ㆍ법고ㆍ
목어ㆍ운판(梵鐘, 法鼓, 木魚, 雲版) 등과 함께 불전사물(佛典四物)이라고 일컬어진다.
범종
(1). 범종 (梵鐘)
불교에서 종교적 분위기를 높이기 위해 소리내는 일체의 용구를 범음구(梵音具)라 하고 청정한 불사나
범찰(梵刹)에서 사용하는 종을 범종(梵鐘)이라고 한다.
산스크리트 원어, 브라흐마(Brahma)를 음역(音譯)하여 범(梵)이라고 하는데 “청정(淸淨)하다”
“적정(寂靜)하다”는 뜻이다. 범종이란 말은 즉 “청정한 불가(佛家)에서 쓰이는 맑은 소리의 종”이라는
뜻이다.
범종은 홍종ㆍ경종ㆍ화종ㆍ거경ㆍ조종ㆍ당종(洪種, 鯨鐘, 華鯨, 巨鯨, 釣鐘, 撞鐘)등 여러 가지 다른
명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또 크기에 따라서 반종ㆍ만종(半鐘, 晩鐘)등으로 구분하기도 하나 대부분
통틀어 범종(梵鐘)이라고 부르며 특별히 유형별로 구분하지는 않는다.
범(梵)이란 우주만물이며 진리란 뜻으로 바로 그런 소리를 내는 것이 범종(梵鐘)이다.
따라서 범종의 신앙적 의미는 모든 중생이 종소리를 듣는 순간 번뇌가 없어지고 지혜가 생겨 악도에서
벗어나게 되므로 지옥중생까지 제도하는 데 있다.
원컨대 이 종소리 법계에 두루 퍼져 번뇌가 소멸되며 어둠에서 밝아지고 삼악도의 고통을 여의고
도산을 허물어 모든 중생이 정각을 이루게 해 달라는 중생제도의 간절한 발원이 담겨 있다.
새벽예불의 종송(鐘頌)은 미망(迷妄)의 잠을 깨우는 28번의 타종소리에 실려 허공계로 울려 퍼진다.
저녁예불 때는 33번 타종한다.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부터 범종(梵鐘)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지금 남아 있는 종(鐘)은 8세기 이후 통일신라 때부터의 것들이다. 조선시대까지의 현존하는 한국 범종은 오백여 구 이상이 된다.
한국 범종(梵鐘)은 용뉴ㆍ음통ㆍ천판ㆍ유곽ㆍ유두ㆍ비천ㆍ당좌ㆍ종구(龍鈕,音筒,天板,遊廓,乳頭,飛天,撞座,鐘口) 등으로 겉모양을 갖추고 있는데
음통(音筒)은 다른 나라 종(鐘)에서 찾아볼 수 없는 우리나라 범종(梵鐘)의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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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절에 갔을 때 범종이 있는 종각(鐘閣) 혹은 2층으로 된 종루(鐘樓)를 보게 될 것이다. 그러면 마음속으로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독송(讀誦)해 보라. 그러면 부처님께서 불이(不二)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환영하고 입증(立證)하신 원만한 일승원음(一乘圓音)을 울려주실 것이다.
무릇 지극한 도(道)는 형상(形象) 밖의 것도 포함하나니 범종의 소리를 부처의 음성(音聲)이라고 하였다.
부처의 말씀을 글로 표현하면 불경(佛經)이 되고, 부처의 모습(模襲)을 형상화(形象化)하면 불상(佛像)이 되고, 부처의 깨달음을 그림으로 나타내면 만다라가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처의 음성은 곧 범종의 소리라고 한 것이다. 범종(梵鐘)은 지옥중생의 이고득락(離苦得樂)을 위하여 종을 치는 것이다.
① 새벽 예불 때의 28번치는 것은 인도의 가섭존자에게서 중국의 달마대 사까지 28대조사들을 위하여
또는 천상의 세계인 28천을 위하여,
② 저녁 예불 때 33번을 치는 것은 33천의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욕계 6천, 색계 18천, 무색계4천, 지옥, 축생, 아귀, 수라, 인간을 합하면 33이 된다) 또는 제석천왕이 머무는
선견궁을 포함한 도리천 33천을 열기 위해서, 또는 삼십삼조사의 법을 전하기 위하여 친다고 한다.
☀ 새 벽 종 성
원컨대 이 종 소리 법계에 두루 퍼져 願此鐘聲篇法界
철위산 어둠에서 벗어나 모두 밝아지게 하소서 鐵圍幽暗悉皆明
삼악도 고통 여의고 도산지옥 허물어져서 三途離苦破刀山
일체 중생들이 올바른 깨달음 이루어지이다. 一切衆生成正覺
(원차종성변법계 철위유암실개명 삼도이고파도산 일체중생성정각)
☀ 저 녁 종 성
이 종소리 들으면 번뇌는 끊어지고 聞鐘聲煩惱斷
지혜는 자라나고 깨달음이 생겨나네 智慧長菩提生
지옥을 떠나 삼계를 벗어나서 離地獄出三界
원컨대 성불하여 모든 중생 제도하여지이다. 願成佛度衆生
(문종서번뇌단 지혜장보리생 이지옥출삼계 원성불도중생)
☀ 조선시대에는
사찰 밖에서도 매일 새벽에 33회, 저녁에 28회 종을 쳤다. 야간 통행금지를 알리기 위한 방법이었는데,
저녁에 종을 치는 일을 인정(人定)이라 하고, 새벽에 종을 치는 일을 파루(罷漏)라고 한다.
저녁 이경(二更)에 하늘의 별자리 28수(宿)를 상징하여 28번 큰 종을 치고 성문을 닫았다.
그러다가 오경(五更) 삼점(三點)이 되면 33수(宿)의 뜻으로 33번 쇠북을 치고 통행금지를 풀었다.
인정에 쳤던 28회의 타종은 하늘의 28개의 별자리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것은 욕계, 색계,
무색계의 28곳의 하늘을 의미한다고 하는 불교 범종의 경우와 다르다.
그리고 파루에 쳤던 33회의 타종 수는 사방의 28수와 하늘 중앙의
오제좌(五帝座:임금 자리의 별)의 5를 합한 수이므로 이 또한 불교의 33천의 개념과는 다른 것이다.
(2) 법고 (法鼓)
법고(法鼓)는 법을 전하는 북이라는 뜻이다. 즉 북소리가 세간에 널리 울려 퍼지듯이 불법(佛法)의 진리(眞理)는 중생의 마음을 울려 일심을 깨우친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축생제도(畜生濟度)를 위해 친다. 나아가 짐승을 비롯한 땅에 사는 모든 중생들이 불교의 가르침에 따라 온갖 번뇌(煩惱)를 없애는 것을, 마치 진(陣)을 치고 있던 군사들이 북소리에 따라 적군(敵軍)을 무찌르는 것과 같다고 비유(比喩)하기도 한다. 해탈(解脫)을 이루게 한다는 함축적(含蓄的)인 의미가 담겨있다.
우리나라 사찰에서 사용되고 있는 북은 홍고와 대고, 소고(弘鼓,大鼓,小鼓)로 나누어진다.
홍고는 범종과 같이 범종각(梵鐘閣)에 두고 조석예불(朝夕禮佛) 때 치게 되며 소고는 염불의식(念佛儀式) 때 많이 사용된다.
우리나라 전통예술(傳統藝術)의 하나인 승무(僧舞)에는 소고(小鼓)가 필수적(必須的)으로 등장하여
승무(僧舞)를 더욱 정중한 분위기 속으로 몰아가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두드려 소리를 내는 양면(兩面)은 암소와 황소의 가죽을 각각 부착(附着)하여야
좋은 소리를 낸다고 한다.
왜 암소, 황소 가죽을 양면에 대는 것일까? 바로 이것이 음양(陰陽)의 조화(調和)이다. 음으로만,
양으로만 이루어 져서는 결코 좋은 소리를 낼 수 없다는 것이다.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는 소리,
화음(和合)의 소리, 조화(調和)의 소리야말로 중생의 심금(心琴)을 울리고 중생을 깨달음으로
인도할 수 있다는 상징성에 의한 것이다.
소가죽을 댄 법고는 축생중생(畜生衆生)의 이고득락(離苦得樂)을 기원(祈願)하며 두드리는 것이다.
☀ 법고 (허균 : 한국민예미술연구소장)
북의 역사는 삼국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고구려 안악고분 벽화의 주악도
(奏樂圖)에 보이는 입고(立鼓), 행렬도에 보이는 담고(擔鼓:어깨에 메는 북)등이 그 최초의 증거가 된다. 삼국시대 이래로 우리나라에서는 여러 종류의 북이 사용돼 왔다. 조선시대에도 군기시(軍器寺)에 북을
만드는 고장(鼓匠)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북의 종류는 좌고, 교방고, 소고, 소리북(고장북), 매구북(농악북) 등 20여 종이 있다.
이 중에서 예기적(禮器的) 성격이 가장 강한 것이 사찰의 법고(法鼓)라 할 수 있다.
북을 만드는 공예기술을 말할 때 가죽을 북통에 씌우는 일을 ‘메운다’라고 부른다.
이 일이 북 만드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작업이기 때문에 북 만드는 기술 전체를 일컬을 때도
‘북 메우기’라고 부른다.
북을 메울 때는 소나무 여러 쪽을 둥글게 깎아 서로 짝을 맞춰 붙여 북통을 만들고, 기름을 뺀 쇠가죽을
북통의 양편에 메고 못을 박아 고정시킨다. 마지막으로 북통에 단청을 하고 주석 고리를 달면 법고가
완성된다.
단청을 할 때는 가죽 부분 중앙에 청, 적, 황색으로 된 삼파문(三巴紋:삼태극이라고도 함)을 그리거나
만자문(卍字紋)을 그려 넣기도 하고 변죽을 돌아가면서 적, 청, 황, 녹색 등 색 띠를 치장하기도 한다.
북통에는 용을 단독으로 그리거나 구름과 함께 그리는 것이 상례인데, 이 용의 이름이 기룡(夔龍)으로
알려져 있다.
<산해경(山海經)>에 의하면 기룡(夔龍)은 용의 우두머리로서 먹거나 마시는데 절도가 있으며,
더러운 곳에 노닐지 않고, 찌든 샘물은 마시지 않는다고 하며, 기룡(夔龍)의 가죽으로 만든 북을 치면
소리가 오 백리까지 들린다고 한다. 북통에 용을 그린 뜻은 오직 북소리가 멀리 퍼지게 하려는데 있다.
ㅡ 중략 ㅡ
사찰에서 법고가 갖고 있는 근원적 가치와 의미는 오직 소리에 있다. 외형이 아무리 아름답다 하더라도
소리가 좋지 않으면 법고로서의 가치와 의미를 잃게 된다는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당초부터 법고는 사찰을 시각적으로 장엄하는 장식품이 아니라 소리공양을 위한 의기(儀器)로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법고는 소리와 관련해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법고 소리가 나무에 의지하고, 가죽에 의지하여 소리가 나지만 법고 소리는 과거에도 空이고 미래에도 공(空)이며 지금도 空이다. 왜냐하면 이 법고 소리는 나무로부터 나오는 것도 아니며 가죽과 북채로부터 나오는 것도 아니며 삼세에서 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니 이것은 곧 나지 않는 것이다.”
<금강명최승왕경>제5권 의공만원품.>
북소리는 나무나 가죽이나 북채에서 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무음(無音)이라 할 수 있다.
무음은 부처님의 소리이고, 부처님의 소리는 곧 원음(圓音)이다. 북소리는 특정한 곡조가 없는 소리이기 때문에 일음이고, 일음(一音)은 곧 원음이다. 그러므로 북소리는 부처님의 소리임을 이 경의 내용은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또한 <묘법연화경>제 3권 화성유품에, “여러 범천왕들이 부처님께 말하되, ‘무상법륜을 굴리시어
법 북을 울리시고, 큰 법라(法螺) 부시며, 법 비를 널리 내려 중생 제도하여 주시기 바라오니 연설하여
주옵소서’”라는 대목이 있는데, 이것은 법고 소리가 부처님의 설법에 비유됨을 알게 해주고,
또한 “사천왕과 모든 하늘은 부처님을 공양하기 위하여 항상 하늘 북을 울리며, 다른 모든 하늘은 하늘의 기악을 울리돼, 십 소겁을 다하고 멸도하실 때까지 또한 이와 같이 함이니라.”고 한 대목은 북소리가
부처님에 대한 공양의 한 방법임을 알게 해준다.
사찰에는 종루나 법고각에 있는 북 외에 또 하나의 중요한 북, 쇠북이 있다. 쇠북은 당(堂)의 처마 밑이나 법당 안에 두고 시간을 알릴 때나 대중을 모을 때 사용한다.
쇠북에는 금고(金鼓)와 반자(飯子) 두 종류가 있는데 금고는 ‘금구(金口)’ 또는 ‘금구(禁口)’라고도 하며,
양면을 모두 사용할 수 있는 구조로 되어있다. 그리고 반자는 ‘반자(半子)’ 또는 ‘반자(般子)’로 표기하기도 하는데, 모양은 징처럼 생겼고 한쪽 면만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후대에 와서 이들 명칭은 쇠북의 모양이나 구조와 상관없이 같이 쓰이고 있다.
경에서는 이처럼 법고나 쇠북에서 나오는 묘하고 아름다운 소리는 삼세의 중생들로 하여금 온갖 고통과 번뇌에서 벗어나게 해 주고 두려움을 끊어주고, 삼천대천세계에 두루 퍼져 삼악도의 지극한 무거운 죄와 인간의 모든 고액을 없애준다고 설하고 있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북과 북소리가 갖고 있는 참된
의미는 어디까지나 무성(無聲)과 일음(一音)과 원음(圓音)에 있음을 강조해 가르치고 있다.
무성의 북소리는 진리 그 자체이며, 곡조 없는 북소리는 일음으로서 그것은 곧 원음이다. 이런 의미를
갖고 있는 북소리이기에 아침저녁 예불할 때 북을 불전사물 중 가장 먼저 두드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3) 목어 (木魚)
목어고, 어고, 어판(木魚鼓,魚鼓,魚板) 이라고도 하며 나무로써 긴 고기 모양을 만들어 걸어두고
두드리는 법구(法具)이다. 중국에서 유래(由來)된 이 법구는 고기의 배 부분을 비워 나무 막대기로
고기 배의 양 벽을 두드려서 소리를 내게 하였다. 목어를 작게 만든 것이 목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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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어느 절에 덕(德) 높은 스님이 제자 몇 사람을 가르치며 살고 있었다. 대부분의 제자들은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힘써 도를 닦았으나 유독 한 제자만이 스승의 가르침을 어기고 제멋대로 생활할 뿐 아니라 계율에 어긋나는 속된 짓을 저지르는 것조차 주저하지 않았다.
마침내 그 제자는 몹쓸 병에 걸려 일찍 죽고 곧바로 물고기의 과보를 받아 태어났다.
그것도 등에 커다란 나무가 솟아난 물고기가 되어 헤엄치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을 뿐 아니라 풍랑이
칠 때마다 나무가 흔들려서 피를 흘리는 고통을 감수하여야만 했다.
하루는 그 스승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가는데 등에 커다란 나무가 난 물고기가 뱃전에 머리를 들이대고
슬피 우는 것이었다.
스승이 깊은 선정에 들어 물고기의 전생을 살펴보니 그 물고기가 바로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일찍 병들어 죽은 자신의 제자였다.
가여운 생각이 든 스승은 곧 그 제자를 위하여 수륙재를 베풀어서 물고기의 몸을 벗어나게 해주었다.
그날 밤 스승의 꿈에 물고기의 몸을 벗은 제자가 나타나서 감사와 함께 서원을 밝혔다.
‘스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다음 생에는 참으로 발심하여 열심히 정진하겠나이다.
바라옵건대 스님 저의 등에 난 나무를 베어서 저와 같이 생긴 물고기를 만들어 나무막대로 쳐주십시오.
그리고 저의 이야기를 들려주십시오. 수행하는 사람들에게는 제 이야기가 좋은 교훈이 될 것이요,
강이나 바다에 사는 물고기가 그 소리를 들으면 해탈할 수 있는 좋은 인연이 될 것입니다.’
스승은 그 부탁에 따라 나무를 베어 물고기 모양을 딴 목어를 만들어서 모든 사람들의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도록 하였다.
이 설화 속에 깃든 인과(因果)와 자비와 서원의 법문은 결코 전설로만 끝날 이야기가 아니다.
그 속에는 방일함과 방탕함을 경계하고 깨달음에 이르겠다는 대서원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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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유래는 현장법사(玄裝法師)의 <지귀곡(指歸曲)>에 전한다. 현장법사가 귀국 도중에,
한 장자의 집에 머물게 되었다. 그 집 주인에게는 새로 장가든 아내와 전처소생의 세 살 난 아이가 있었다.
어느 날 장자가 사냥하러 집을 비운 틈을 타서 이 아내가 평소에 미워하던 전처의 아들을 바다에 던져
버렸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장자는 매우 슬퍼하면서 아기를 위해 천도재를 올리려고 하던 참에 현장법사를 만나게 된 것이다.
장자가 기쁘게 맞이하여 좋은 음식을 차려 놓고 들기를 청하니 현장이 먹지 아니하고 말하기를,
“내가 산 넘고 물을 건너 먼 길을 여행하느라고 몸이 지쳐 있는 관계로 물고기를 먹고 싶은데,
반드시 큰 물고기어야 한다”고 말하니 좌석에 있던 여러 사람들이 크게 놀랐다.
장자는 즉시 사람을 보내 큰 물고기를 잡아오게 하였는데, 현장은 그 물고기의 배를 갈라 아이를
꺼내주면서, “이 아이가 전생에 불살계를 가진 까닭으로 물고기에 먹혔으나 지금까지 죽지 아니하였다”고 말했다.
장자가 크게 기뻐하여 “어찌하면 이 물고기의 은혜를 갚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었니, 현장이 답하되, “나무로 물고기 모양을 조각하여 절에 걸어 두고 재를 올릴 때마다 두드리면 물고기의 은혜를 갚을 수
있다”고 말했다. 지금 절에서 볼 수 있는 목어가 바로 이것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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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및 우리나라의 선종에서 사찰 규범의 지침서로 삼았던 <백장청규>에 의하면 물고기는 밤낮으로
눈을 감지 않으므로 수행자로 하여금 잠을 자지 않고 도를 닦으리라는 뜻으로 목어를 만들었다고
하였으며 그것을 두드려 수행자의 잠을 쫓고 혼침(昏沈 어둡고 희미한 정신상태)을 경책 한다고 한다.
그리고 현재에는 새벽과 저녁 예불과 큰 행사가 있을 때 이 목어를 두드려서 물속에 사는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는 상징적인 의미까지를 포함하고 있지만 처음에는 식당이나 창고 등에 걸어두고 오로지
대중을 모으는 데만 사용하였다고 한다.
즉 길게 두 번을 두드려서 대중에게 끼니때를 알리고 한 번 길게 두드려서 대중을 모으는 데만 사용하였던 것이 뒷날 독경이나 의식에 쓰는 법구로 용도가 바뀌게 된 것이다.
또한 그 형태도 처음에는 단순한 물고기 모양이었으나 차츰 용머리에 물고기의 몸을 취한 용두어신
(龍頭漁身)의 형태로 변형되어 갔고 입에 여의주를 물고 있는 모습을 많이 취하게 되었다.
용두어신과 여의주 그 속에는 동양의 깊은 철리(哲理)가 만들어 낸 대전환의 의미가 담겨져 있다.
용두어신은 물고기가 변하여 용이 되는 어변성용(魚變成龍)을 뜻한다.
어변성룡은 <후한서(後漢書)> 이응전의 등용문에 나오는 이야기를 근거로 삼고 있다.
즉 도화꽃이 필 무렵 황하(黃河)의 잉어들은 센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서 상류의 협곡에 있는 용문으로
다투어 뛰어 오르는데 그곳을 넘어서면 용이 된다는 것이다. 후세의 사람들은 면학에 힘쓰는 선비가
온갖 고초를 겪은 뒤 과거에 급제하여 높은 관리에 오르는 것을 잉어가 변해 용이 되는 것에 비유하였다.
불가(佛家) 또한 이와 다를 바가 없다. 다만 불교의 입장에서 볼 때 어변성룡과 용두어신은 등용문이
아니라 깨달음을 상징한다는 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물고기라는 중생이 깨달은 중생 즉 보살이 됨을
뜻하는 것이다. 결국 목어를 울리는 뜻은 보살이 되라는 데 있다.
목어가 입에 여의주를 머금었다는 것은 대자재(大自在)를 얻은 물고기(보살)를 상징화한 것이다.
나무를 등에 진 그 물고기는 마침내 여의주를 입에 문 목어로 화하였으며 목어는 다시 비감 어린 음성을 토하여 혹업(惑業)의 중생을 대자재한 불국정토로 인도하는 것이다.
(4) 운판 (雲版)
공중을 날아다니는 조류(鳥類)나 허공(虛空)을 헤매는 영혼(靈魂)을 천도(薦度)하기 위해 치는 불전사물(佛典四物)의 하나이다.
청동(靑銅) 또는 철(鐵)로써 구름무늬 모양의 넓은 판을 만들고 판 위에 보살상(菩薩像)이나
‘옴 마니 반메 훔’ 등의 진언을 새기기도 하며 가장자리로는 두 마리의 용(龍)이 승천(昇天)하는 듯,
호위(護衛)하는 듯한 모습을 조각하기도 한다. 그리고 구름과 달을 새기는 경우도 있다.
이와 같은 이유로 판의 전체적인 모습이 뭉게구름 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어 운판(雲板)이라 하게
된 것이다.
운판이 인도에서부터 사용이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중국의 선종사찰(禪宗寺刹)에서는 부엌이나 재당(齋堂)에 달아 놓고 대중에게 끼니때를 알리기 위해 쳤다. 이를 구름 모양으로 만든 것도 구름이
비를 머금고 있기 때문에 불을 다루는 부엌에 걸어 두어 화재를 막고자 함이었다.
즉 수화상극(水火相剋)의 오행원리(五行原理)에 입각한 주술적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그리고 부엌에서는 밥이나 죽이 끓을 때 세 번을 치므로 화판(火板)이라고도 하였고, 끼니때를 알리는
경우에는 여러 번 길게 침으로 장판(長板)이라고도 불렀다.
우리나라에서도 고려시대(高麗時代)에는 부엌에서 운판을 많이 사용하였으나 차츰 불전사물의
하나로 바뀌어 조석예불(朝夕,禮佛) 때에 치는 의식 용구가 되었다.
운판이 울리면 공중을 날아다니는 중생을 제도(濟度)하고 허공을 헤매며 떠도는 영혼을 천도(遷度)할 수 있다. 그 소리를 들을 때 허공계(虛空界)의 중생은 안식(安息)을 얻어서 용이 구름 사이를 뚫고 승천(昇天)하듯이 해탈의 세계로 향한다.
운판에는 몇 가지 종류가 있다.
매다는 구멍이 뚫린 머리 부분의 모양을 기준으로 할 때,
운판은 호형(삼호형:三弧形), 계관화형(鷄冠花形:맨드라미꽃 모양), 여의두형(如意頭形)으로 분류될 수
있고, 판을 파고 들어간 부분의 모양을 기준으로 보면 반월형(半月形), 과운형(渦雲形)이 있으며,
본체 부분 모양에 따라 분류하자면 오호형(五弧形), 여의두형(如意頭形) 등이 있다.
운판에 시문되는 문양은 구름, 해와 달, 비천, 범어, 옴마니반메훔 등이 있는데, 때로 이들 문양이
복합적으로 시문된 것도 볼 수 있다.
도교에서는 쇠나 옥이나 돌로 만든 경(磬)이 내는 소리 효과를 두 가지로 말하고 있다.
그 하나는 신령을 감동시켜 사람과 통하게 하는 것(감동군신:感動群神)이고 또 하나는 사람들을
경계하여 절도(節度)와 위의(威儀)를 지키게 하는 것(경계인중:警戒人衆)이다.
운판도 쇠나 청동으로 만든 타악기로서 경과 비슷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운판을 두드려 나는 소리 또한 신령을 감동시키고, 뭇 중생을 미혹에서 깨어나게 하는 효과를 가진 소리로 이해할 수 있다. 남해 용문사 운판, 국립박물관소장 쌍용문 운판 등이 유명하다.
☀ “범종을 치는 것은 그 소리로써 범음(梵音)을 듣게 하려는 것이고,
법고를 울리는 것은 일음(一音)으로써 불법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
나무로 만든 목어를 두드려 내는 소리는 성(醒)의 소리이고,
쇠로 만든 운판을 울려 내는 소리는 각(覺)의 소리이다.”
이런 까닭에 불전 사물은 소리 신호용 실용적 용구가 아니라 종교적
의기(儀器)로서의 기능과 의미를 가진 한국 사찰의 대표적 상징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203. 불조삼경(佛祖三經)
불조삼경은 불문(佛門)에 처음 들어오는 사람이나 승가(僧家)에 귀의하는 수행자는 꼭 한 번 읽어보아야 하는 경전으로 사십이장경ㆍ불유교경ㆍ위산대원선사경책을 말한다.
중국에서는 옛적부터 선원(禪院)에 처음 들어오는 수행자들은 꼭 이 삼경을 배워야만 들어오는 것을
허락할 정도로 아주 중요하게 여기는 경전들이었다.
사십이장경은 수행자들이라면 누구나 갖추어야 할 정신 자세와 또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하여 주고 있다.
유교경(遺敎經)은 부처님께서 구시나가라성 사라쌍수 사이에서 열반에 임박하여 마지막으로 설법을
하시면서 자신이 입멸한 후에는 계율을 스승으로 삼아 계를 지키면서 선정을 닦아 깨달음의 지혜를
얻을 것을 말씀하신 내용이다.
위산대원선사의 경책문은 출가 수행자들이 초발심이 마음을 잊어버리고 수행하는데 점점 게을러지면서 안위만을 생각하는 폐단을 경책하고자 지으신 것이다.
☀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은 선가(仙家)에서 유교경(遺敎經), 위산대원선사경책(潙山大圓禪師警策)과 함께 불조삼경(佛祖三經)이라고 일컫는 경전으로 늘 독송되어 왔다. 이경은 후한(後漢)의 효 명제(孝明帝)가
꿈에 금인(金人)을 보고 나서 채음(蔡愔)과 진경(秦景)등을 천축[月支國]으로 보내 불법을 찾도록
하였는데, 그때 가섭마등(迦葉摩騰)과 축법란(竺法蘭)을 만나 경전을 가져와서 낙양(洛陽)의 백마사에서 가섭마등과 축법란이 함께 번역했다고 한다.
중국에 있어서 최초의 한역 경전이라고 전해지고 있으나 역자(譯者)와 전역(傳譯)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많고, 한편으로 이 경은 중국에서 찬술(撰述)된 위경(僞經)이라는 설도 있다.
이 경전은 일반 대중을 위한 가르침이라기보다는 출가 수행자를 위한 짤막짤막한 덕목들로 이루어져
있다. 내용은 부처님의 훈계(訓戒)로 사십이장경(四十二章)은 주로 아함경을 비롯한 여러 경전에서
초출(抄出)하여 모은 것이다.
문장이 매우 간결하면서도 불교의 기본적인 덕목들인 고(苦)ㆍ무상(無常)ㆍ무아(無我)ㆍ애욕(愛慾) 등의 두려움을 설한 문장이 실려 있어서 자연히 초기 불교의 수행관을 엿볼 수 있으며, 또 수행자들에게 출가의 목적인 깨달음과 해탈에 이르는 길을 일러주고 있다. 그래서 본 경은 불교 입문서로 널리 애독되어 왔다.
그래서인지 이 경에는 약 10여 종의 이본(異本)이 있고, 이본은 크게 고형본(古型本)[고려ㆍ송ㆍ원의
대장경 속에 있는 것]과 보림전본(寶林傳本)의 두 계통으로 분류되는데, 후자는 송대(宋代) 이후에 유행한 여러 이본의 원류가 된다.
본 경에 대한 주석본에는 송(宋) 진종황제(眞宗皇帝)의 사십이장경어주(四十二章經御註) 1권ㆍ송(宋)
수수(守遂)의 사십이장경주(四十二章經註) 1권ㆍ명(明) 지욱(智旭)의 사십이장경해(四十二章經解) 1권ㆍ청(淸) 속법(續法)의 사십이장경소초(四十二章經疏鈔) 5권ㆍ정복보(丁福保)의 사십이장경전주
(四十二章經箋註) 등이 있다.
☀ 불유교경(佛遺敎經)
불유교경(佛遺敎經)의 원제목은 불수반열반약설교계경(佛垂般涅槃略說敎誡經)으로 5세기초에
후진(後秦) 구자국(龜玆國)의 삼장법사 구마라집(鳩滅什)이 번역하였다. 이 경은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 위산경책(潙山警策)과 함께 불조삼경(佛祖三經)의 하나로 선종(禪宗)에서는 중요하고 비중있게 다루는 경전이다.
옛날부터 우리나라나 일본까지 불유교경은 총림에서 스님들의 필습(必習)의 기본경전이며 불교를 처음 접하는 불자들이 꼭 봐야하는 필수 경전이다.
부처님께서 최후의 설법으로 수발타라를 제도하여 인연 있는 중생들
모두 제도하심으로써 그 사명을 마치시고 쿠시나가라의 숲 속 사라쌍수 아래에서 입멸 직전에 마지막
가르침을 설하려 하는 정경을 보여준다.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열심히 수행하여 생사고(生死苦)에서 해탈하라는 부처님의 마지막 육성이
간절하게 실려 있다. 부처님께서는 마지막까지 제자들을 생사의 고에서 해탈케 하기 위하여 대비심으로 간절히 수행하기를 권하신다.
시간은 기다려 주지 않는다. 때문에 세상은 무상하고 위태롭다.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 실로 여유를
가질 여가가 없다고 경고 하시면서 오로지 간절히 수행하기를 제자에게 당부하신다.
이것이 부처님이 마지막으로 남기신 가르침이다.
이 불유교경의 내용은 '오로지 수행정진하라'라는 부처님 말씀뿐이다.
☀ 위산대원선사경책(僞山大圓禪師警策)
위산영우(潙山靈祐, 771~853) 선사는 당나라 때 스님으로서 위앙종(潙仰宗)의 초조이며 속성은
조(趙)씨이고 복건성(福建省) 장경(長慶) 출신이다. 15세에 출가하여 절강성(浙江省) 항주(杭州)
용흥사(龍興寺)에서 경·율을 배우고, 백장회해의 문하에 들어가 법을 이었다.
위산은 그가 주석한 대위산(大潙山)을 가리킨다.
선사는 특히 경책문 때문에 강원에서는 잘 알려진 분이다. 경책문은 독립된 한 권으로서 불교의 역대
명문 중의 하나에 속한다.
『유교경』과『사십이장경』, 이 위산경책문을 묶어서 불조삼경(佛祖三經)이라고 일컫는다.
위산 스님은 당시에 수행자들이 점점 게으르고 위의를 갖추지 않으며 승려의 본분을 지키지 않으므로,
드디어 이 경책문을 지어서 그들을 경책하여 수행의 정도로 돌아오게 하였다.
204. 불화 (佛畵)
불화라 하면 일반적으로 탱화(幀畵)라고 말한다.
탱화라는 말이 성립될 때의 불화는 좁은 뜻으로 해석되어진 것이며,
불교의 교리를 전달하기 위한 변상도(變相圖)나 수행과 이념을 추구하는 선화(禪畵), 또는 사찰 건물을
장엄하기 위해서 그려지는 벽화(壁畵), 단청(丹靑) 등의 불교적 성격을 띠고 있는 모든 불교회화(佛敎繪畵)를 통틀어 불화라고 지칭할 때에는 넓은 뜻으로 해석되어진 것이다. 불교신앙이 복합적인 3단(三檀)신앙으로 발전됨에 따라 탱화의 유형도 상, 중, 하단으로 제작되어 봉안되었다.
시대나 교리에 따라서 분류에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상단불화(上壇佛畵)ㆍ중단불화(中壇佛畵)ㆍ
하단불화(下壇佛畵)로 분류한다.
1. 상단불화(上壇佛畵)
(1) 석가모니불 탱화
①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
보통 화면 중앙에 편단우견(偏袒右肩)의 법의(法衣)를 걸친 석가모니 부처님이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손 모양을 하고 설법하시는 모습을 보이며, 그 주위에는 문수, 보현보살을 위시한 여러 협시보살들과 10대 제자 및 설법을 듣기 위해 모여 든 분신불(分身佛)들, 그리고 이들을 보호하는 사천왕, 팔부신중 등이 등장한다.
② 팔상도(八相圖)
석가모니 부처님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여덟 장면을 묘사한 탱화로 특별히 팔상전을 건립하여 봉안하기도 한다. 석가팔상(釋迦八相), 팔상성도(八相聖圖)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의 팔상도는 『불본행집경(佛本行集經)』을 기본으로 하여 제작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1447년에 제작된『석보상절(釋譜詳節)』의 목판 팔상도가 가장 오래되었다.
(2) 비로자나불탱화(毘盧舍那佛幀畵)
『화엄경』을 설법하는 장면들이 묘사되어 탱화로 모셔지거나, 『화엄경』변상인 7처9회도(七處九會圖)가 모셔지기도 한다.
① 비로자나후불도(毘盧舍那後佛圖)
중앙에 지권인(智拳印)을 취한 비로자나불과 그 좌, 우에 문수, 보현보살을 위시한 여러 보살 및
10대 제자, 분신불, 성문중 등을 배치한 구조는 영산회상도의 구도와 비슷하지만, 외호중인 사천왕,
팔부중을 배치하지 않은 것이 원칙이다.
② 화엄경변상도(華嚴經變相圖)
화엄경의 내용을 집약하여 압축 묘사한 그림인 화엄경변상도에는 일곱 장소에서 아홉 번 설법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기 때문에 7처9회도(七處九會圖)라고도 한다. 구도는 화면 상단에 천상에서의
설법장면이, 가운데에는 지상에서의 설법 장면이 묘사되어 있고, 화면 아래쪽에는 선재동자(善財童子)가 53선지식(五十三善知識)을 찾아 구도행각을 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3) 아미타불탱화(阿彌陀佛幀畵)
일명 극락회상도(極樂會上圖)라고 불리는 아미타설법도, 선행과 염불을 많이 행한 중생을 아미타
부처님이 극락세계로 맞이해 가는 장면의 아미타내영도, 그리고 관무량수경에 의해 설해진 내용을
그린 관경변상도 등이 있다.
① 아미타설법도(阿彌陀說法圖)
아미타 부처님이 서방정토 극락세계에서 무량한 설법을 행하시는 장면을 말한다. 여기에는 여러 형식이 있다. 아미타불 단독으로 설법하시는 형식과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 혹은 지장보살 3존이
등장하는 아미타삼존도, 여기에 문수, 보현보살을 더한 오존도, 미륵, 지장, 제장애, 금강장보살을
등장시킨 구족도, 그리고 영산회상도의 구도와 유사한 10대 제자 성문 중 외호중이 첨가된 형식 등의
극락회상도가 있다.
② 아미타내영도(阿彌陀來迎圖)
염불 수행을 행한 자를 서방극락으로 데려가기 위해 아미타 부처님이 내려오시는 장면이 묘사된 탱화로 고려시대에 많이 제작되었다.
여기에도 몇 가지 형식으로 제작되어 있는데, 아미타불 단독으로 등장하는 형식과 아미타불과 관음,
대세지 혹은 지장보살의 삼존불, 아미타불과 25보살, 아미타불과 8대보살 및 성중, 그리고 왕생자들을
용선(龍船)에 싣고 인로왕보살(引路王菩薩)과 관음보살이 아미타불에게 인도해 가는 형식 등이 있다.
③ 관경변상도(觀經變相圖)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중에『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의 내용을 탱화로 제작했다. 여기에도 두 가지 형식이 있다. 『관경』을 설하게 된 배경을 표현하는 장면, 그리고 부처님에게 기원하는 왕비와 이에 따라 자비를 베푸는 부처님의 모습 등이 묘사되었고 또 하나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16가지 극락정토를
보여주는 것과 이에 따른 왕비 및 시녀들의 구원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4) 미륵탱화(彌勒幀畵)
세 가지 형식이 있다.
첫째, 미륵보살이 설법하시고 있는 도솔천의 미륵천궁을 묘사한 형식이고,
둘째, 미래에 용하수 아래에서 미륵불이 되어 중생을 제도하는 형식,
셋째, 미륵보살이 구름을 타고 내려오시는 미륵내영도 형식이다.
(5) 관음탱화(觀音幀畵)
관세음보살이 자신의 몸을 변화시켜 가면서 중생을 구제하고 있으므로 다양한 명칭의 관세음 보살탱화가 등장한다. 이들 변화관음은 법화경 관세음보살의 관음 33응신설에 의한 33관음과 밀교에서 발달한
6관음, 7관음으로 구별되지만 대체로 7관음이 많이 등장한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33관음 중에 수월관음, 양류관음, 백의관음이 많이 제작되었다.
2.중단불화 (中壇佛畵)
인도, 중국, 한국 등의 재래 민간 토속신을 불교화한 신중(神衆)의 불화로 신중도(神衆圖)라 부른다.
신중도는 불교를 외호하고 도와주는 선신(善神)이기 때문에 상단불화에 속해 있었으나 밀교의 영향에
의해서 중단신앙으로 분화되었다.
중단불화의 대표적 탱화는 제석신중도(帝釋神衆圖)이다.
제석신중도에는 화엄신중의 39위와 여기에 토속신을 합친 104위 신중을 도설화하기도 했다.
대체로 상단부분에는 인도의 토속신, 중단부분에는 중국의 토속신, 하단부분에는 한국의 토속신을
배치한다. 그러나 보다 간략화 된 신중도가 많이 제작되었고 또한 독립적으로 봉안되기도 했다.
3.하단불화(下壇佛畵)
하단에 봉안되는 대표적인 것은 감로탱화를 비롯해서 독립적으로 봉안되던 지옥계불화도, 지장보살도, 시왕도 등이 있다.
① 감로왕도(甘露王圖)
일명 우란분경변상도(盂蘭盆經變相圖)라고도 하는 이 감로탱화는 영가(靈駕)의 위패(位牌)를 모신 영단(靈壇)에 봉안되는 대표적인 하단탱화(下壇幀畵)이다.
특히『우란분경』과『목련경』을 근거하여 음력 7월 15일 백중날에 “돌아가신 부모나 가족을 위하여 시방의 부처님과 스님들께 우란분재의 성반(盛飯)을 올림으로써 아귀(餓鬼) 혹은 지옥중생에게 감로수(甘露水)를 베풀어 극락왕생하게 한다.”는 내용이다.
감로탱화의 화면 구성은 상단부분에 7여래(七如來:다보,보승,묘색신,광박신,이포외,감로왕,아미타:
多寶,寶勝,妙色身,廣博身,離怖畏,甘露王,阿彌陀)를 중심에 두고 왼쪽에 아미타삼존, 오른쪽에
인로왕보살(引路王菩薩)등이 표현되어 지옥 중생을 극락으로 맞이해 가는 장면과 중단부분에 성반을
진설하여 재의식을 올리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으며, 하단부분에는 중앙에 아귀상과 그 양쪽에 지옥의
여러 모습 및 중생의 여러 생활상을 묘사하고 있다.
② 지장보살도(地藏菩薩圖)
지장전의 본존인 지장보살이 후불탱화로 모셔지는 지장보살도는 망인천도(亡人遷度)의 재의식(齋儀式)의 발달에 따라 영단의 후불탱화로 모셔지기에 이르렀다.
지장탱화의 형식에는 지장보살 단독으로 표현된 지장독존도(地藏獨尊圖)ㆍ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이 협시한 지장삼존도(地藏三尊圖) 그리고 지장삼존에 명부시왕과 그 권속들을
모두 표현한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 등이 있다.
③ 시왕도(十王圖)
중생이 죽은 뒤 염라대왕 앞에 끌려가 지은 지를 심판 받게 되는 장면을 묘사한 불화다.
시왕도에는 지장보살도를 중심으로 왼쪽에 1ㆍ3ㆍ5ㆍ7ㆍ9의 홀수 대왕이,
오른쪽에는 2ㆍ4ㆍ6ㆍ8ㆍ10의 짝수 대왕이 배치되는 것이 일반적인 형태다.
그림의 내용은 상단부분에는 대왕을 중심으로 시녀(侍女), 판관(判官), 외호신장(外護神將)들이 둘러
서 있고, 그림의 하단에는 구름으로 구별하여 형벌을 받는 죄인과 형벌을 주는 사자(使者), 귀졸(鬼卒),
죄인에게 죄를 열거하며 일러주는 판관 등이 그려져 있다.
205. 비구(니), 사미(니) (比丘,尼: 沙彌,尼))
수계식(受戒式)을 통해 사미(니)가 되고, 구족계를 받고 비구(니)가 된다. 불교에서 수행자는 정식 승려인 비구(니)와 예비승려인 사미(니)로 구분된다. 조계종단에서는 현재 6개월 이상의 행자 생활과 약1개월
동안의 교육과정을 거쳐 사미(니)계를 받고 사미(니)가 되도록 하고 있다.
사미는 4년 동안 강원, 선방, 대학 등에서 교육과정을 거치는데 여자인 사미니의 경우 사미니계를 받고
2년이 지나면 식차마나계를 받는다. 이 의식을 거친 승려는 비구계를 받고 스님이 되며 이때부터 승납
(불가의 나이)을 부여받는다.
‘비구(比丘)’란 용어는 인도의 탁발하는 독신 수행자를 지칭하는 말에서 따온 것으로 比丘(vicus),
비구니(vicusni)로 걸사, 포마, 파악이라고도 한다. 걸사는 위로는 진리를 빌어 마음이 밝고 맑게 되며
아래로는 밥을 빌어 몸을 기른다는 뜻이며, 포마는 나쁜 무리를 두렵게 한다는 뜻이고, 파악은 마음속의 온갖 나쁜 죄를 없앤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사미(沙彌)’ ‘사미니(沙彌尼)’는 범어 ‘sramanera’ ‘sramanerica’를 음역한 것으로,
삼사미(三沙彌)가 있는데 7~13세 사이의 사미는 절에서 식탁의 음식을 보고 날아드는 까마귀나 쫓는
일을 맡았다 하여 구오사미(驅烏沙彌)라 하고, 14~19세의 사미는 사미로서의 생활을 충분히 할 수
있음으로 응법사미(應法沙彌)라 부르며, 20세가 넘었지만 아직 비구로서 완전한 계(戒)를 받지 못하고
사미상태로 있는 것을 명자사미(名字沙彌)라고도 한다.
현재 우리나라는 약 1주일간의 구족계 수계산림을 통해 비구가 250계를, 비구니가 348계를 받고
“스님”이 된다.
206. 비구니(比丘尼, 팔귀경계:八歸敬戒)
비구니(比丘尼)는 출가하여 불교의 구족계(具足戒)인 348 계(戒)를 받고 수행하는 여자 승려로 팔리어(語) 비쿠니(bhikkuni)를 음역한 것으로, 걸사녀(乞士女)라고도 한다.
출가한 여자가 사미니(沙彌尼) 생활을 거쳐 2 년 동안의 시험 기간인 식차마나(式叉摩那)로 있다가
평생 출가ㆍ수행할 수 있을 것이 인정되면 348계를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고, 이 구족계를 받으면
비구니가 된다.
남자 승려의 경우에는 사미에서 바로 비구(比丘)로 될 수 있지만, 비구니는 사미니에서 식차마나의
과정을 더 거쳐야 하는 것이 특징이다.
(식차마나계: 식차마나가 지켜야 할 여섯 가지 계(戒). 음란한 짓을 하지 않음, 훔치지 않음,
살생하지 않음, 거짓말하지 않음, 술 마시지 않음, 끼니때가 아니면 먹지 않음의 여섯 가지이다.)
현재 동남아시아 일대의 불교에서는 비구니(또는 그 교단)가 소멸하였으나, 대승불교를 신봉하는 한국 ·중국 ·타이완 ·일본 등지에서는 지금도 비구니(比丘尼)가 활약하고 있는데, 특히 한국에서는 비구(比丘)와 거의 같은 수를 차지한다.
불교 교단 최초의 비구니(比丘尼)는 석가모니의 이모인 마하프라자파티(Maha prajapati)이다.
석가모니가 고향인 카필라성에 갔을 때 이모는 출가하여 승려가 될 것을 세 번 청하였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그 뒤 석가모니가 바이샤알리성으로 옮겨 머물렀을 때, 이모는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은 뒤
맨발로 걸어 석가모니를 찾아갔다. 이를 본 아난(阿難)이 불쌍히 생각하여 부처님께 세 번을 간청하여
이모의 출가를 허락받았다.
그러나 부처님은 여자도 출가하여 도를 이룰 수는 있으나, 정법(正法)의 수명을 500년 감하게 되었음을 밝히고, 교단의 규율을 위하여 특별히 여덟 가지 경계해야 할 점을 일러주어 이를 지키도록 하였다.
이 여덟 가지를 비구니 팔귀경계(八歸敬戒)라고 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비록 승려가 된 지 100년이 된 여승이라도 금방 계를 받은 비구에게 예배해야 한다.
② 비구니는 비구의 처소에서 수행해서는 안 된다.
③ 보름에 한 번씩 비구들로부터 계법(戒法)의 강설을 받아야 한다.
④ 안거(安居:3개월의 수행기간)를 마친 뒤에는 비구들에게 나아가서 안거중의 잘못이 있으면
참회해야 하며, 의심난 일들은 물어야 한다.
⑤ 무거운 죄를 지은 비구니는 대중의 처소에서 떠나 반 달 동안 별거해 야 한다.
⑥ 비구니가 되려는 자는 2년 동안 기초 수행과 의식을 닦아 익힌 뒤에 계를 받아야 한다.
⑦ 비구니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비구를 나무라거나 욕질을 해서는 아 니 된다.
⑧ 비구니는 비구의 죄를 말해서는 아니되지만 비구는 비구니의 죄를 말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이 불교에서는 비구와 비구니 사이에 큰 격차를 두었다.
우리 나라에서 비구니가 된 최초의 인물은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신라 법흥왕·진흥왕의 비를 비롯한
수많은 왕족들이 비구니가 되었으며, 일본 최초의 비구니인 선신(善信)도 우리나라의 고승에 의해
생겨나게 되었다.
팔기계(八棄戒; 비구니가 지켜야 할 여덟가지 계율)
1. 살생하지 말라(不殺生:불살생)
2. 도둑질 하지 말라(不偸盜:불투도)
3. 사음하지 말라(不邪婬:불사음)
4. 거짓말을 하지 말라(不妄語:불망어)
5. 남자와 몸을 부딪쳐 음욕을 내지 말라(謂與男身相觸起染欲心:위여남신 상촉기염욕심
6. 염심을 가지고 남자와 손을 붙잡거나 옷을 부딪치지 말라 혹 한적한 곳에 마주앉아 말하고 걷고
기대고 약속하지 말라(謂與染心 男子兩手 相促 或促其衣 或同入屛處供坐 惑共語 或共行 或相倚
或與其相犯等 八 種:위여염심 남자양수상촉 혹촉기의 혹동입병처공좌 혹공어 혹공행 혹상의
혹여기상범등 팔종
7. 비구의 죄상을 숨겨 대중을 진노케 하지 말라
(覆 謂遮覆罪相 不肯陳露 於大衆:복 위차복죄상 불긍진로어대중)
8. 대중의 규율을 지키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생활하지 말라
(隨 謂不依僧衆嚴規而 任自意隨彼共住者也:수 위불의승중엄규이 임자의수피공주자야)
207. 빈자일등 (貧者一燈)
‘가난한 여인의 등불’(貧者一燈 또는 貧女一燈) 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이 설화는
<아사세왕수결경(阿사世王授決經)에 수록되어 있다. 간단한 윤색을 덧붙여서 엮어보자.
석가모니 당시의 사위성(舍衛城)에는 가족도 친척도 없이 홀로 사는 외롭고 가난한 노파가 있었다.
너무나 가난했던 그 노파는 이집 저집을 다니면서 밥을 빌어 겨우 목숨을 이어가야만 했다. 하루는
온 성안 사람들이 기쁨에 겨워 환호하고 있었다. 노파는 궁금증에 못이겨 무슨 일이 있는가를 물었다.
“오늘은 부처님께서 이 성으로 오시는 날이랍니다. 밤이 되면 아사세왕과 백성들이 수많은 등불을 밝혀 부처님을 맞이할 것입니다. 그래서 온 성안이 이렇게 붐비고 있답니다.”
이 말을 들은 노파는 깊은 탄식과 함께 슬픈 사색에 잠기고 말았다.
‘아! 나는 어찌 이다지도 복이 없단 말인가? 세상에서 가장 큰 복밭(福田)인 부처님을 만나면서도
그 복밭에 뿌릴 한 알의 씨앗조차 없으니… 구걸을 해서라도 부처님께 공양할 등불을 밝히리라.’
비탄을 떨쳐버린 노파는 가난을 슬퍼하지 않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동전 두 닢을 겨우 구걸하여
기름집을 찾아갔다. 얼핏 보기에도 가난에 찌든 노파의 모습을 보고 기름집 주인은 기름의 쓰임새를
물었다.
“이 세상에서 부처님을 만나 뵙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고 들었습니다. 나는 다행히 부처님께서 계신 세상에 태어났지만 너무나 가난하여 지금까지 아무 것도 공양하지 못했습니다. 오늘같이 부처님을 맞아 왕과 백성들이 함께 등불을 밝히는 날 , 나도 하나의 등불이나마 밝혀 공양하고자 합니다.”
기름집 주인은 크게 감동하여 갑절이나 많은 기름을 주었다. 비록 하룻밤의 반도 밝힐 수 없는
기름의 양이었으나 노파는 기쁜 마음으로 부처님께서 지나가실 길목에 등불을 밝히고 기도하였다.
“저는 가난하여 이 조그마한 등불밖에는 부처님께 공양할 수 없사옵니다. 부디 이 공덕으로 오는
세상에는 성불(成佛)하여 그 지혜의 빛으로 모든 중생의 어두운 마음을 밝게 하여지이다.”
밤이 깊어감에 따라 다른 등불은 하나 둘 꺼져 갔으나 가난한 노파의 등불만은 더욱 밝게 빛나면서
주위의 어둠을 비추고 있었다.
날이 밝아오자 부처님은 제자들 중에서 신통력이 가장 뛰어난 목련존쟈(木連尊者)에게 아직 꺼지지
않은 등불을 모두 끌 것을 지시하셨다. 목련존자는 모든 등불을 차례로 꺼나갔지만,
이 등불만은 세 번이나 끄려 했으나 꺼지지 않았다. 가사 자락을 크게 휘둘러 꺼보았지만 불꽃은 더욱
강해질 뿐이었다. 마침내 목련은 신통력으로 바람을 일으켰으나 그 불빛은 오히려 하늘에까지 비쳤다.
이 광경을 묵묵히 지켜보던 부처님이 비로소 말씀하셨다.
“목련아, 부질없이 애쓰지 말아라, 그 등불은 비록 가난하지만 마음씨 착한 노파의 넓고 큰 서원(誓願)과 정성으로 밝혀진 등불이니라. 너의 신통력으로는 끌 수가 없다. 이 등불의 공덕으로 그 노파는 오는 세상에 반드시 부처를 이룰 것이다. 한결같은 정성이 깃든 등불은 결코 꺼지지 않느니라.”
부처님은 이 노파가 30겁(劫) 후에 수미등광여래(須彌燈光如來)라는 이름의 부처가 될 것이라는
수기(授記)를 하셨다. 작은 등불 하나, 그렇지만 지극한 정성이 담긴 그 등불이 한 역할은 무엇일까?
지혜의 빛이 가득한 부처님의 나아갈 길을 밝혀 주는 역할을 한 것일까?
아니다. 그 등불의 참뜻은 부처님께 있지 않다. 그 등불은 노파의 마음 속에 깃든 어둠을 밝히고
외로움과 가난의 업을 녹였던 것이다. 노파가 가난을 핑계 삼아 등불을 밝힐 뜻을 포기하였거나,
등불을 올린 공덕을 모든 중생의 어두운 마음을 밝히는 데로 돌리지 않고 개인적인 행복을 기원하는
것으로 만족하였다면 노파는 어두움과 가난 속에서 영원토록 헤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동양의 가르침은 한 생각 바르게 가지고 지성을 다할 때 운명이 바뀐다는 것을 강조한다.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렸음을 깨우친다. 한 생각(一念) 바르게 가지고 한 마음(一心)으로 정성을 다해 올린 노파의 등불은 목련존자의 신통력을 넘어섰을 뿐만 아니라, 오는 세상의 성불까지를 보장받는
결과를 낳았다.
노파는 마음의 등불을 밝힌 것이지 형식의 등불을 켠 것이 아니었다. 노파는 자비의 등불을 밝힌 것이지 구복(求福)과 이기심의 등불을 켠 것이 아니었다.
어찌 노파가 밝힌 등불을 평범한 기름으로 켠 등불이라 하리, 그것은 일심의 신묘한 작용과 공덕으로
밝힌 다함이 없는 등불, 영원히 꺼지지 않는 무진등(無盡燈)인 것이다.
208. 박쥐중 (불교에서 나온 말)
조선중기의 고승인 서산대사 휴정(休靜)스님은 말세(末世)의 비구들 가운데 부처를 팔아
온갖 나쁜 업을 짓는 무리가 있음을 지적했습니다.
곧 인과(因果)를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죄도 복도 없다’고 하면서
몸과 말로 그릇된 업을 함부로 짓고, 사랑과 미움의 마음을 쉴새 없이 일으킨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중도 아닌 체 속인도 아닌 체하는 비구를 ‘박쥐중’이라 하고,
혀를 가지고도 설법하지 못하는 이를 ‘벙어리 염소중’이라 하였으며,
승려의 모습을 하고 속인의 마음을 쓰는 이를 ‘머리 깍은 거사’,
지은 죄가 무거워 꼼짝할 수 없는 이를 ‘지옥 찌꺼기’,
부처를 팔아서 살아가는 이를 ‘가사 입은 도둑’ 이라고 하셨습니다.
‘수행인들은 마땅히 마음을 단정히 하여 검소하고 진실한 것으로써 근본을 삼아야 하며,
표주박 한 개와 누더기 한 벌을 가지고 거리낌 없이 살아야 함’을 간곡히 당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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