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백정책: (원래의 위치까지 밀어붙이는 정책이란 뜻으로)방어하는 처지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공세로 전환하여 상대를 반격하는 외교 정책. (한때의 미국의 대소 정책 따위)
<스탈린의 롤백이론>
스탈린이 중국공산혁명 이후 새롭게 재편되는 아시아의 전략적 상황과 북한 지도부의 모력통일론을 이용하여 미국과의 냉전 대결에서 결정적인 승기를 잡기 위하여 한국을 미국의 세력권으로부터 제거하려는 롤백전략(rollback strategy)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한국전쟁을 발발하였고, 이러한 스탈린의 롤백을 저지하기 위하여 미국은 한국전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인천상륙적전 후 승기를 잡은 미국은 소련과 마찬가지로 38선을 넘어 북한을 소련의 세력권으로부터 제거하기 위해 롤백전략을 추구했다. 결국 소련과 미국은 한반도에서 각각 한 번씩의 롤백을 교환했고 이 과정에서 두 초강대국이 한치의 양보도 없는 전쟁을 수행함으로써 한국 전쟁의 강도가 그만큼 격렬했던 것이다.
우선 스탈린은 북한을 이용하여 미국의 봉쇄선인 38선을 넘어서 롤백전략을 추구하고자 했다. 미국의 한국전쟁 개입으로 북한이 롤백전략을 수행하는 데 실패할 경우에 대비하여 스탈린은 한국전쟁 결과과정에서 모택동을 연루시켰다. 스탈린은 실제로 미국의 개입이 확실시되자마자 중국이 한국전쟁에 개입하도록 모택동을 압박했다. 그리고 중국마저도 한반도에서 미국을 저지하지 못하고 미국이 롤백을 추구하여 만주로 확전할 경우 스탈린은 미국을 침략자로 낙인찍고 중소방위동맹조약을 발동하여 한국전쟁 이전에 자신이 만들어둔 만주 - 북한 - 연해주를 잇는 거대한 전략적 지대의 한부분인 만주에서 미국과 직접 전쟁을 할 계획이었다.
이처럼 다단계로 구성된 롤백전략을 추구하면서 스탈린은 처음부터 무모하게 미국과 전면전을 일으키려 했다고 우리는 주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스칼린은 미국이 만주로 확전할 경우 소련군을 투입하여 미국에 맞써 싸울 것이라고 모택동에게 약속하고 롤백전략의 결과로서 발생할지도 모르는 미국과의 전면전이라는 위험부담을 기꺼이 감수하려 했다. 실제로 스탈린은 만주와 북한지역에 소련 공군을 동원하여 미공군과 맞서게 했고, 그 결과 소련은 모두 335대의 비행기와 120명의 조종사를 잃었다는 사실을 최근 공개된 소련문서는 보여주고 있다. 트루먼이 만주로의 확전을 주장한 맥아더를 해임시키고 전쟁의 범위를 한반도 내에 국한시키려는 제한전에 대한 미국의 의지를 분명히 함으로써 한국전쟁에서 미국과 소련의 지상군이 직접 충돌하는 전면전은 발생하지 않았다. 맥아더가 해임당한 후 전선이 소강상태에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약 2년 넘게 소모전이 계속된 이유는 스탈린이 한반도 내에서 계속해서 미국의 국력과 위신을 약화시키고자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전쟁의 종전은 롤백전략을 추구한 스탈린의 사망을 기다리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롤백이란 용어의 사전적의미는 특정 지역을 장악하고 있는 세력을 그 지역으로부터 여러 가지 수단들을 동원하여 몰아내거나 격퇴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국가가 다른 국가를 특정지역으로부터 제거하기 위해 가장 흔히 선택하는 수단들은 직접 군사력을 동원하거나 제 3의 국가에게 무기를 지원하여 대리전쟁(proxy war)을 수행하게 하거나 이 두가지가 복합된 형태가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사전적 의미를 갖는 롤백이라는 개념은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과 아시아를 포함한 전세계가 미국과 소련의 세력권으로 양분되고 미소 냉전대결이 심화되면서 미국의 대소전략을 설명하기 위하여 원용되기 시작했고,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후 미국이 38선을 넘어 소련의 영향권 하에 있는 북한을 군사적 수단을 동원하여 제거하려고 시도하는 과정에서 이 개념은 가장 극적으로 등장한다.
롤백 개념은 트루먼 행정부의 대소 기본정책이었던 봉쇄전략(contrain-memt strategy)과 비교해보면 그 의미가 더욱더 분명해질 것이다. 미국의 소련전문가이고 국무성 산하 정책기획실(Policy Planning Staff)의 초대실장을 역임한 케난(George F. Kennan)은 제 2차 세계대전 중 동원된 군사력을 이용하여 소련이 점령한 지역을 위성국화시키고 소련의 체제를 주입하여 소련 주변에 일종의 소련의 세력권이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전후 이 소련의 세력권을 더 이상 팽창하지 않도록 미국과 소련의 세력권이 만나는 경계선 내에 소련을 묶어두는 전략을 미국이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소련을 현존 경계선 밖으로 벗어나서 팽장하지 못하도록 차단한다는 것은 바로 소련을 이 지역 내에 봉쇄(封鎖)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 경계선은 미국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지켜야 하는 봉쇄선(封鎖線)이 되는 것이다. 제 2차 세계대전 종전 시에 미국과 소련의 합의에 의해 한반도상에 그어진 38선은 봉쇄선의 대표적인 예의 하나이다.
케난은 봉쇄정책을 입안하면서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현대적인 군사력을 만들어낼 수 있는 산업시설 기반과 고도로 훈련된 기술인력을 갖고 있는 국가는 세계적으로 다섯 개밖에 없다고 주장하였다. 여기에는 미국, 일본, 영국, 서부 유럽국가들, 그리고 소련이 포함된다. 케난에 의하면 당시 중국은 인구만 많을 뿐 산업과 기술 수준이 매우 낮았기 때문에 고려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케난의 봉쇄정책의 핵심은 소련이 이 국가들 중 어느 것도 차지하지 못하도록 서유럽과 일본을 미국의 동맹권으로 흡수하고 이러한 전략적 구도 하에서 미국이 인내심을 갖고 봉쇄정책을 추구하면 소련은 미국의 이러한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내부적으로 붕괴하리라는 것이었다. 세계의 어떤 전략가도 케난만큼 고르바초프의 등장 이후 소련이 걷게될 붕괴 과정을 정확하게 예측하지는 못했다.
냉전이 종식된 이후 오늘의 시점에서 보면 케난이 제시한 봉쇄전략의 선견지명이 돋보이지만 이 전략은 당시 미국 사회 내부에서 소련에 대해서 적극적이지 못하고 너무 수동적 정책이라는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다. 유럽에서 아시아에 이르는 봉쇄선을 소련이 내부적으로 멸망할 때까지 인내를 갖고 무한정 기다려야 한다는 케난의 전략적 요구는 미국민에게는 너무 가혹한 측면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케난의 봉쇄전략이 갖고 있는 문제점들을 극복하기 위하여 트루먼 행정부 내의 일부 전략가들은 미국에게 유리한 상황이 전개될 경우 미국이 적극적으로 주도권을 행사하여 대소 봉쇄선을 넘어들어가 소련 세력권 내의 일부 지역을 소련으로부터 떼어내거나 제거하자는 롤백전약을 주창하게 되었다. 물론 케난은 롤백전략이 미소 사이의 전면전을 유발할 가능성이 있으며 미국의 국력의 한계를 벗어나는 정책이라는 이유를 들어 극구 반대하였고, 봉쇄전략이 최선의 전략은 아니지만 롤백전략보다는 나은 차선의 전략이라고 굳게 믿었던 것이다.
스탈린의 롤백이론은 미국의 대소전략을 설명하기 위해 전개된 롤백 개념을 스탈린의 한국전쟁 결과과정에 적용시켜 한국전쟁의 현실을 포착하려는 이론적 시도이다. 이 이론은 스탈린이 냉전 개시 이후 최초로 북한군을 이용하여 미국의 봉쇄선인 38선을 넘어서 남한을 북한에 흡수시키고 전한반도를 소련의 영향권 하로 편입시켜 미국과의 냉전 대결에서 소련의 세계전략적 목적들을 솬철시키려는 과정에서 한국전쟁이 발생했다고 주장한다. 냉전 시기에 한국전쟁을 통하여 스탈린이 롤백전략을 추구했다는 우리의 주장은 한국전쟁이 내전으로 시작되었다가 한국전쟁 기간 중 미국만이 롤백을 추구했다는 지금까지의 주장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미국의 롤백전략은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 승리 이후 미국이 유엔의 깃발 아래 미국의 봉쇄선인 38선을 북진하여 북한을 소련의 세력권으로부터 제거하려고 시도하는 과정에서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우리는 미국이 롤백전략을 추구하기 이전에 스탈린이 먼저 미국의 봉쇄선을 뛰어넘는 롤백전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한국전쟁이 발발했다고 나는 주장한다. 이처럼 스탈린의 선제 롤백에 대한 대응으로 미국의 롤백을 이해할 때 우리는 한국전쟁의 현실을 훨씬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스탈린은 한반도에서 롤백전략을 추구하면서 여러 가지 전략적 목적들을 추구하고 있었다. 물론 스탈린은 일차적으로 북한에 의해 남한을 완전히 적화시키는 목적을 달성하고자 했다. 만약 이것만이 롤백전략의 목적이었다고 한다면 스탈린은 김일성의 목적인 한반도 무력통일을 달성시켜 주기 위해 한국전쟁을 승인했다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한반도 적화의 결과가 미소 냉전 대결이라는 세계적 차원에서 미칠 영향력을 간과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한반도 전체의 적화는 소련이 제정 러시아 당시부터 이 지역에서 얻고자 했던 부동항의 확보를 가능케 할 것이고, 태평양은 더 이상 미국이 독점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 조용한 호수가 되지 않을 것이다. 스탈린이 롤백전략을 추구하면서 이러한 전략적 목적을 관철하려고 했다는 사실은 상식적인 수준에서 우리가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최근에 공개된 소련문서들은 스탈린이 한반도에서 롤백전략을 추구하면서 어떤한 정치적 목적들을 달성하고자 하였는지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스탈린은 이 롤백전략을 통하여 일본에게 심리적 압박을 가하여 당시 일본의 대미일변도정책을 좌절시키고, 일본에 대한 대규모의 침투와 교란 행위를 감행할 수 있는 교두보를 한반도에 마련하고자 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케난이 대소봉쇄정책의 효율적 실행을 위한 아시아에서의 가장 중요한 중심축의 하나로 일본을 중시하였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한반도 전체의 적화는 미국의 전략적 구상에 심각한 타격을 가져올 것이다. 나아가 스탈린은 롤백전략을 통하여 남한을 적화시킴으로써 유엔과 함께 대한민국의 건국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미국의 위신에 일대 타격을 가하고자 하였다.
마지막으로 스탈린은 롤백전략을 추구하면서 미국의 한국전쟁 개입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았으며 미국의 개입을 중국을 동원하여 저지하고자 했고, 만약 미국이 한반도에서 중공군을 패배시키고 만주로 침략해올 경우 스탈린은 중소방위조약을 발동하여 미국을 광활한 황무지인 만주로 끌어들여 미국을 약화시키고 냉전 대결에서 소련의 결정적 승기를 잡고자 시도했다.
미국의 만주로의 확전과 중소조약에 의한 소련의 대응은 만주 지역을 중심으로 미국과 소련이 직접적으로 충돌함으로써 한국전쟁이 제 3차 세계대전으로 확대되는 것의 의미하는데, 스탈린의 롤백이론은 스탈린이 한국전쟁 초기부터 미국과의 전면전을 구상하고 있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스탈린은 미국과의 직적접으로 제 3차 세계대전을 수행하지 않고 한반도 내에 전쟁의 범위가 국한되는 제한전을 통하여 소련의 세계전략적 목적을 달성하고자 했다는 롤백이론은 주장한다. 한국전쟁의 결정과 계획 단계에서 스탈린은 소련의 개입을 은폐하고 한반도에서 미국과의 직접적 대결을 피하기 위하여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고 있다. 미국 역시 북한의 배후에는 소련이 있다는 사실을 어느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소련에 대해 공개적으로 책임을 물을 경우 미국의 여론을 자극하여 소련과 세계대전에 빠질 위험이 있기 때문에 소련의 개입 사실을 은폐하고자 노력했다.
이러한 스탈린의 은폐 기도에도 불구하고 만약 미국이 만주로 확전을 해온다면 스탈린은 중국과 함께 전략적으로 아주 유리한 지역인 만주에서 미국을 맞아 싸울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만약 미국이 만주로 확전했다면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만주와 중국 침략 후 파탄을 맞이했던 것처럼 미국도 베트남에서 실패를 경험하기 20년 전에 벌써 한반도와 만주에서 파탄을 맞이했을 것이다. 한국전쟁 중 미국의 중요한 우방들이 만주로의 확전을 극구반대했던 사실에 비추어볼 때, 미국은 고립무원이 되어 만주벌판을 헤매야 했을 것이다. 나아가 트루먼 행정부는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또 다른 세계대전을 치룸으로써 국내여론으로부터도 완전히 고립되는 결과를 맞이했을 것이다. 그탈린의 전략적 구상은 스탈린이 한반도에서 롤백전략을 추구하면서 얼마나 용의주도한 계획 하에서 자신의 전략적 목적들을 추구하고자 했는지를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