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래된 근대 건축물을 간직한 독립운동의 현장이자
북촌 속의
한류관광지 -
중앙고등학교(中央高等學校)
▲ 중앙고등학교 본관 - 사적 281호 |
북촌의 주요 간선
골목길인 계동길의 북쪽 끝에는 서울 도심권 명문학교의 하나이자 오랜 역사
를 자랑하는 중앙고등학교(중앙중고교)가 자리해 있다.
보통 본인의 답사기에는 학교나 도서관이 거의 나오질 않는다. 설령 나온다고
해도 그 안에 오
래되거나 흥미를 유발하는 볼거리가 있는 경우에 한해서이며, 그 볼거리만 중점적으로 다룰 뿐
학교 부분은 간략하게 처리하거나 쿨하게 빼버린다. 허나 중앙고등학교는 사정이 좀 다르다.
이곳은 무려 100년 이상 숙성된 오래된 학교로 왜정(倭政)과 1940~1970년대에 많은 유명인사를
배출했던 현장이다. 또한 사적으로 지정된 근대
건축물을 3개씩이나 간직하고 있고, 비록 지금
은 없지만 인문학박물관이란 박물관까지 보유하고 있었으며, 창덕궁의 통제구역인 신선원전(新
璿源殿)을 유일하게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게다가 21세기 이후 전파를 타고 한류관광지로
유명세를 타면서 북촌에서 통과의례로 거쳐야 되는 명소의 하나가 되었다.
계동길의 북쪽 끝인 중앙고 교문(校門)은 언덕이다. 여기서 서쪽으로 인왕산을 가리고 선 높은
고개를 넘으면 북촌로로 이어지며, 그 중간에 북촌3경이 있는 가회동11번지로 이어지는 조그만
골목길이 왼쪽으로
가늘게 손을 내밀고 있다. 동쪽에도 시야를 가릴 정도로 높은 고개가 버티
고 있는데, 그
고개를 넘으면 원서동(苑西洞)과
창덕궁길로 이어진다.
교문 안쪽에는 500년 묵은 큼직한 은행나무가 각박한 언덕길에 그늘을 드리워준다. 나무 옆에
는
1941년에 지어진 수위실이 있으며, 언덕진 길을 오르면 중앙고등학교 본관이 수면 위로 서
서히 떠오르는 해처럼 그 모습을 드러내 보인다.
짧은 오르막을 다 오르면 정면에 본관, 서쪽에는 원파도서관, 동쪽 높은 곳에는 강당이 있다.
보통 교문을 들어서면 학교 건물 사이로 운동장이 있기 마련이나 여기는 흙먼지가 이는 운동
장 대신 콘크리트를 깐 넓은 공간이 본관 앞에 닦여져 있다. 그리고 그 공간 복판에 동그랗게
자리를 다져 주변에 얕게 난간석을 둘렀으며, 안에는 잔디를 깔아 그 핵심부에 학교를 일으켜
세운
인촌
김성수(仁村 金性洙)의 동상을 세웠다.
또한 본관의 모습이 고려대학교(高麗大學校) 본관과 많이도 닮았고, 본관 주변 풍경은 여기가
고등학교가 아닌 고려대나 서양의 명문 대학교에 들어선 기분을 진하게 들게 만든다. 기존에
생각하고 있던
고등학교의 모습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것이다. 겉모습이 이러니 누가 여길 고
등학교라고 보겠는가? 그냥 사진만 보면 오래된 대학교로 봐도 이상할 것은 없다.
본관을 지나면 뒤에 고색이 깊은 서관과 동관이 있으며, 북쪽을 가린 신관(新館)을 지나면 인
조 잔디를 깐 축구장 겸 운동장이 나타난다. 운동장 북쪽에 보이는 건물은 중앙중학교이며 운
동장 동쪽 아래에 신선원전이 뉘워져 있다.
* 중앙고등학교의 역사
북촌 동북쪽 끝에 자리한 중앙고등학교는 1908년 6월 1일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가 세운 기호
학교(畿湖學校)에서 비롯되었다.
1910년 9월 흥사단(興士團)에서 운영하던 융희(隆熙)학교와 통합되었는데, 그때 교장은 서유견
문(西遊見聞)으로 유명한 유길준(兪吉濬) 그 사람이었다. 이후 기호학회는 호남, 교남, 서북
등 여러 학회와 통합해 중앙학회로 간판을 바꾸고 학교 이름 또한 중앙학교로 갈았으며, 1915
년 4월 인촌 김성수가 이를 인수했다.
1916년 우리나라 최초로 보트를 도입하여 수상스포츠인 조정부를 설치했으며, 1917년 웅원(雄
遠, 높은 이상), 웅견(雄堅, 굳은 의지), 성신(誠信, 성실한 행동)을 학교의 교훈(校訓)으로
삼아 지금까지 변함없이 이어져 오고 있다. 교목(校牧)은 잣나무, 교화(校花)는 무궁화꽃이며,
1917년 12월 김성수의 백부(伯父)인 김기중(金祺中)이 교사(校舍)를 지으면서 현재 자리로 학
교를 이전했다. 김기중은 김성수만큼이나 중앙고에서 비중이 큰 인물이다.
1919년에는 교장 송진우(宋鎭禹)와 김성수가 숙직실에서 3.1운동을 계획했으며, 백두산을 상징
하는 백산(白山)으로 학교 이름을 바꾸려고 했으나 왜정의 방해로 1921년 중앙고등보통학교(중
앙고보)로 개명했다. 그리고 그해 4월 고등학교 인가를 받아 굵직하게 본관과 서관, 동관을
세
웠고, 1926년에는 6.10만세 운동을 벌였으며, 1929년 2월 재단법인 중앙학원을 설립하였다.
1934년 12월 원인이 아리송한 화재가 일어나 본관이 속절없이 무너지자 그 남쪽에 다시 본관을
만들어
1937년 9월 완성을 보았다. 이 본관이 바로 지금의 본관 건물이다. 1941년에는 창립 30
주년 기념으로 대강당과 수위실을 세웠다.
1938년 조선교육령 개정으로 중앙중학교로 간판을 바꾸었으며, 1939년에 왜정이 무궁화 모표를
폐지하라고 하자 월계관으로 모표를 바꿨다. 1940년에는 당시 중앙고보 역사 교사인 최복현이
4학년 학생 5명과 민족정기 고취와 독립을 목적으로 '5인 독서회'를 조직했는데, 1941년 한 학
생의 연락
편지가 왜경(倭警)에 발각되어 최복현과 관련 학생 모두 함흥교도소로 끌려가 심한
고문을 당했다. 이 사건을 '중앙고보 5인 독서회' 사건이라고 한다.
그때 최복현은 재판정에서 '내 수업을 듣고 학생들이 항일 사상을 가지게 되었으니 나를 처벌
하고 학생들은 풀어달라' 호소하여 학생들은 3달 뒤 풀려나고 최선생은 2년 후 석방되었다.
1946년 9월, 6년제 중학교로 변경되고, 1950년 4월 대한교육법으로 4년제로 변경되면서 3년제
고등학교를 병설했다. 그래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같이 꾸리게 되었다. 1960년 4.19시절에는
학교
학생들이 4.19시위에 동참했으며, 1964년에는 고려중앙학원으로 이름을 갈았다.
1966년 신관을 짓고 김성수의 동상을 세웠으며, 1973년 신선원전과 인접한 운동장 동쪽에 축대
를 쌓아 운동장을 넓혔다. 1981년 학교 본관과 동관, 서관이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어 문화유산
을 보유한 학교가 되었고, 1986년 6월 7일 교우의 날을 정해 행사를 거행했다.
1992년 2월 원파기념관을 세웠고, 2008년 6월 개교 100주년 기념으로 인문학박물관을 개관하면
서 이 땅의 고등학교 가운데 최초로 박물관을 소유한 학교가 되기도 했다. (지금은 없음)
또한 주변 나라에서 높은 인기를 누린 '겨울연가'의 촬영지로 요란하게 전파를 타면서 왜열도
와 중원대륙 사람들이 구름처럼 찾아와 북촌 속 한류 관광지로 존재감을 크게 살찌웠다. 솔직
히 그 이전에는 동네 사람들이 가끔 산책이나 마실을 가는 정도에 불과했었다. 이처럼 학교가
관광지로 유명해지자 교문 앞 문방구와 가게들은 앞다투어 한류스타의 사진과 브로마이드를 판
매하며 적지 않게 재미를 보고 있다. (지금도 여전히 팔고 있음)
※ 중앙고등학교 찾아가기 (2017년 2월 기준)
* 지하철 1호선 종각역(3-1번 출구), 3호선 안국역(2번 출구)에서 종로구 마을버스 01번을 타
고 중앙중고에서 하차
* 안국역 3번 출구를 나와서 현대사옥(현대빌딩) 서쪽 골목인 계동길을 따라 도보 12분
★ 중앙고등학교 관람정보
* 평일은 학교 수업으로 개방을 하지 않으며, 토요일과 일요일, 공휴일에만 문을 열어두고 있
다. (매월 2,4주 토요일은 9시~18시까지 / 1,3,5주 토요일은 13시~18시까지 / 일요일, 공휴
일은 9시~18시)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1 (창덕궁길 164, ☎ 02-742-1321~2)
* 중앙고등학교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 1966년에 세워진 친일파 김성수 동상
이렇게 보니 정말 고려대에 들어선 듯한 기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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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문 옆에 자라난 오래된 은행나무
- 서울시 보호수 512호 교문 옆에는 푸른 옷을
걸친 커다란 은행나무
가 살포시 뿌리를 내렸다. 그는 높이 20m, 가
슴둘레
3.1m로 무려 500여 년을 헤아리는 지긋
한 나이를 가지고 있다.
이 나무는 지역의 수호신으로 오랫동안 숭상을
받아와 매년 가을에 오곡백과(五穀百果)를 차
려 당제(堂祭)를 지냈으며, 중앙고등학교가 들
어선 이후에는 학생들 등교길에 시원한
그늘을
제공해 그들을 응원한다. 또한 1987년 천안 독
립기념관 개관을 기념하고자
이 나무를 삼목이
식하기도 했다. |
▲ 6.10만세 기념비 |
본관 뜨락 서쪽에는 기묘하게 생긴 형상과 함께 6.10만세 기념비가 3.1운동 책원비가 있는 동
쪽을 바라보고 있다.
1926년 4월 26일 조선의 마지막 황제 순종(純宗)이 붕어(崩御)하자 중앙고보 학생을 중심으로
격문(檄文) 3만장을 인쇄해 주변 학교에 뿌렸다. 그리고 6월 10일 순종의 인산일(因山日)에
황
제의 대여(大輿)가 단성사(團成社)를 지나자 중앙고보생 이선호의 선창으로 수천 명의 학생들
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격문 1,000매와 태극기를 군중에게 뿌려 이른바 6.10만세운동의 분
위기를 한껏
고조시켰다.
이 기념비는 6.10만세운동의 67주년이 되는 1983년 6월 10일 중앙고등학교 동우회와 동아일보
사가 합심하여 세웠다. |
▲ 3.1운동 책원비(策源碑) |
본관 뜨락 동쪽에도 기묘하게 생긴 형상과 함께 3.1운동 책원비가 6.10만세 기념비가 있는
서
쪽을 넌지시 바라보고 있다.
3.1운동 발생 2달 전인 1919년 1월 왜열도 동경(東京) 유학생인 송계백(宋繼白. 1896~1920)이
중앙학교 숙직실에 문을 두드렸다. 그는 이곳 교사인 현상윤(玄相允, 1893~1950)에게 사각모에
담긴 비단에 쓰여진 2.8독립선언서 초안을 건네며, 동경 유학생들의 거사 계획을 살짝 알렸다.
현상윤은 그것을 교장 송진우와 김성수에게 급히 보여주었는데, 그것을 본 그들은 크게 감동을
받고 독립운동을 준비하게 된다. 그래서 숙직실에서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를 작성하고 3.1운
동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이를 기념하고자 1973년 6월 1일 동아일보사에서 세웠다. |
▲ 원파도서관 (옛 인문학박물관) |
본관 서쪽에는 본관을
약간 닮은 서구식 건물인 원파도서관이 있다. '원파'는 학교를 크게 일
으킨 원파
김기중의 호로 이곳에는 2008년 6월 개교 100주년 기념으로 개원한 인문학박물관이
야심차게 둥지를 틀고 있었다. 인문학(人文學) 자료들을 풍부하게 머금고 있던 착한 박물관이
었으나 이 땅의 인문학이 몰락했음을 상징하듯, 결국 10년도 못채우고 문을 닫고 말았다. (나
는 다행히 2010년과 2011년에 2번 관람을 했음)
인간은 일반적인 동물과 달리 정신적 수양도 어느 정도 닦아야 된다. 그래서 인문학(철학, 역
사, 윤리, 문학 등)은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이 땅의 꼬라지는 어떠한가? 인간의 말초신경
이나 건드리며 백성들의 단순화를 꾀하는 이 나라의 우민화정책, 그리고 그 정책에 춤을 추는
썩어빠진 방송과 언론들, 독서와 교양 지식을 멀리하며 오로지 돈과 쾌락만을 추구하는 이 시
대의 사람들, 여유를 부리기 어려울 정도로 팍팍해진 백성들의 경제 사정, 인문학으로는 입에
풀칠 조차 하지 힘든 현실에서 인문학은 점점 바닥을 향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이 나라의 위정자와 졸부들이 바라는 세상일 것이다. 그래야 그들 입맛대로 대대
손손 금수저를 물며 백성들의 등골을 빼먹을 수 있으니 말이다. |
▲ 중앙고등학교 본관의 뒷모습
마치 유럽 중세시대 건축물이나 요새처럼 보인다. |
고려대 본관과 많이 빼어닮은 중앙고 본관은 콘크리트 철근의 2층 석조 건물로 1935년에 삽을
떠서 1937년 9월 완성을 보았다. 원래 본관은 동관과 서관 사이에 있었으나 1934년 화재로 무
너지자 현 위치에 더 크고 화려하게 다시 지은 것이다.
왜정 때 건축가인 박동진이 서구 학교의 건물을 모델로 삼아 설계하고 건축한 길다란 'H'형태
의 건축물로 지붕 부분을 포함하면 가히 3층 규모인데, 그 시절 이 땅의 사람들이 세운 큰 건
물의 하나이기도 했다.
건물 중앙에는 4층의 중앙탑을 높이 세워 본관의 위엄을 드높였고, 벽면은 돌을 질서있게 쌓아
올렸다. 하여 그 모습이 오래되고 전통이 있는 서양 학교나 중세시대 건축물의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거기에 담쟁이덩굴까지 걸치고 있으니
고색과 중후한 멋까지 마음껏 드러낸다.
학교가 이렇게
크고 잘나갔으니 왜정 때 이곳에 다닌 학생들의 자부심은 자못 대단했을 것이다.
비록
왜인의 눈치를 보며 살던 우울한 시기이나 여기서만큼은 왜인들도 오히려 부러운 눈빛으
로 학교를 바라봤을 것이다.
현재 1층 중앙은 학교 행정공간으로 나머지는 교실로 사용되고 있으며, 근대 초기 양식으로 만
들어진 민족 교육의 현장이자 민간학교의 건물로 유서가 아주 깊다. 또한 왜정과 대한민국 초
기에 이름 꽤나 알려진 인물들이 많이 배출된 현장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널린 학교 건물보다 더욱 정감이 가며, 저 건물에 들어가면 절로 책을 펴고 공부에
임할 정도로 면학분위기도 진하게 나온다. 나도 이곳에
들어와 공부를 했어야 했는데. 사는 곳
이 엉뚱해서 그러지도 못했다. 하긴 이곳에 들어온다고
해도 내가 워낙 타고난 돌머리라 얼마
나 효과가 있었을지는 미지수이다.
|
▲ 본관 뒤쪽에 자리한 빛바랜 종 |
학교 종이 땡땡땡 어서 모이자. 선생님이 우리를 기다리신다~~♪
중앙고보 시절부터 수업시간과 점심시간, 수업 종료 시간마다 땡땡땡~~♬ 종소리를 내며 학생
과 교사들을 분주하게
만들었던 종, 허나 지금은 현역에서 물러난 이곳의 옛 유물로 마음에도
없는 한가한 시간을 보낸다.
왕년에는 몸을 흔들며 학교를 움직이는 큰 손이었건만, 이제는 종소리를 울릴 일도 없으니 그
의 피부에는 그저 하얀 먼지만 가득하다. 가끔 관광객들이 호기심 삼아 그를 흔들어 주변의 적
막을 살짝 깨뜨리곤 한다. (나도 몇
번 쳐봤음~) 그렇게 울려 퍼진 종소리는 예나 지금이나 늘
비슷한 목소리다.
(그렇다고 요란하게 치지는 말자~~~!)
사람이든 물건이든 건물이든 현역에서 은퇴하여 뒤로 나앉은 모습은 정말 쓸쓸하기 그지 없다. |
▲ 왕년을 생각하며 우수에 잠긴 종
종의 청동색 피부에는 무심한 세월의 먼지로 가득하다. 하긴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이
무엇이 있으랴? 그저 장대한 세월에 아주 잠깐씩 몸을 담굴 뿐이다. 그것이
우리네 인생이요. 천하만물의 운명이다.
▲ 본관 뒤쪽에 나란히 자리한 서관과 동관
쌍둥이 형제처럼 서로 닮은 모습이다.
▲ 중앙고등학교 서관(西館) - 사적 282호 |
중앙고 서관은 1921년에 지어진 고딕양식의 2층 붉은 벽돌집이다. (지붕을 포함하면 3층) 'T'
자형 구조로 본관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른데, 뾰족한 아치형 창틀, 가파른 고딕식 지붕, 그리
고 화강암과 붉은 벽돌을 엇물려 지어 20세기 초반 건축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붉은 피부의 벽돌이 고색의 향기를 더욱 우려내고 있으며, 여기서는 조선 소년군 창설과 6.10
만세운동, 1929년 광주학생운동 등이 일어나기도 했다. 현재는 교실로 쓰이고 있다. |
▲ 중앙고등학교 동관(東館) - 사적 283호 |
서관과 마주하고 있는 동관은 1923년 10월에 지어진 2층 붉은 벽돌 건물이다. (지붕 포함하면 3
층) 건물 구조와 전체적인 모습은 서관과 비슷하며 여전히 교실의 역할을 하고 있다. |
▲ 선비의 모습으로 조성된 김기중(金祺中) 동상 |
동관과 서관 사이에는 원래 본관이 있었다. 허나 1934년 화재를 만나 건물이 주저앉으면서 남
쪽으로 자리를 옮겨 더 크고 화려하게 지었다.
본관의 강제 이전으로 비게 된 공간에는 소나무를 심어 조촐히 정원을 닦았는데 그 한쪽에
원
파(圓坡) 김기중(1859~1933)의
동상이 자리해 있다. 그는 김성수와 더불어 중앙학교를 일으킨
인물로 김성수의 바로 큰아버지가 된다. 그래서 그런지 양복스타일의 김성수 동상과 달리 전형
적인 선비 스타일로 동상을 지어 그를 기린다.
김기중은 1886년 진사(進士)가 되었고, 1904년 용담(龍潭,
전북 진안) 군수(郡守)를
지내기도
했다. 1906년 정3품에 올랐으나 멸망의 끝으로 향하는 나라꼴에 한숨을 쉬며 민중계몽을 교육
사업에 나서기 시작했다. 하여 1908년 재산을 털어 영신(永新)학교를 세웠고, 왜열도로 직접
건너가 그곳의 교육 제도를 살폈으며, 조카 김성수와 함께 중앙학교를 인수했다. 그리고 1921 년 다시 재산을 털어 지금의 자리에
교사를 만들면서 중앙학교는 이곳에 뿌리를 내리게 된다.
1932년 아우 김경중(金暻中)과
보성전문(고려대)을 인수하고 민립대학을 꿈꾸던 김성수에게 운
영을 넘겼으며, 그 이듬해 7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아마 10년을 더 살았다면 조카의 비
열한 친일 행위에 분개하며 피를 토하고 죽었을 지도 모르겠다. 결국 조카가 큰아버지의 민족
교육 사업에 똥칠을 했으니 말이다. |
▲ 창립30주년기념관 (대강당)
본관 동쪽 높은 곳에 자리한 대강당은 1941년 11월, 창립30주년 기념으로 지어졌다.
▲ 단촐하게 생긴 삼일기념관(三一記念館) |
대강당 뒤쪽에는 삼일기념관이라 불리는 기와집이 있다. 무슨 사연이 있을 듯 싶은데 그에 대
한 마땅한 안내문이 없어 많은 이들은 그냥 지나치기 일쑤이다. 허나 여기가 바로 1919년 당시
중앙학교 숙직실 자리로 처음으로 3.1운동을 계획하고 논의했던 유서 깊은 곳이다.
기념관 뒤로 담장과 울창한 수목이 보이는데, 담장 너머는 동궐(東闕)이라 불리는 창덕궁이다. |
▲ 여기도 친일파와 독재 딸랑이의 흔적이??
서정주(徐廷柱, 1915~2000)의 '국화옆에서' 시비(詩碑) |
20세기에 이름난 현대 시인의 하나이자 우리 말이 지닌 표현력의 극한을 보여준 것으로 칭송받
는
미당 서정주, 그는 전북 고창 출신으로 인촌 김성수의 대농장을 관리하던 중간 관리인(마름
)의
아들로 태어났다. 서울로 올라와 역시 김성수가 손을 대고 있던 중앙고보에 보결생(補缺生
)으로 들어왔으나 광주학생운동 참여로 퇴학을 당하고 말았다.
이후 중앙불교전문학교(현 동국대학교)에 들어갔으며, 죽을 때까지 많은 시집을 내었다. 허나
1943년부터 비열하게 친일 행위(왜정을 찬양하는 시를 작성)에 몸을 담기 시작했으며, 이승만
과 박정희,
전두환에게 두루두루 아부를 떨며 독재를 찬양했다. 또한 죽을 때까지 자신의 죄를
반성하기는 커녕
오히려 자기 합리화에 열을 올렸던 속 좁은 작자이기도 하다.
문제는 그를 비롯하여 친일 떨거지들의 문학 작품이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적지 않게 실린다는
것과 그들을 기리는 문학 행사와 기념관이 부지기수로 많다는 것이다. 상황이 이 꼬라지가 된
것은 그들의 후학과 그들을 옹호하는 작자들이 문학계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
다. 이는 식민사관(植民史觀) 계열이 장악하고 있는 역사 분야도 비슷하다. 역사 청산을 제대
로 하지 못한 후유증이 아직도 이 나라의 곳곳을 갉아먹고 있는 것이다. |
▲ 신관 뒤쪽에 있는 백릉 채만식(白菱 蔡萬植, 1902~1950) 문학비 |
채만식은 중앙고보 13회 교우로 소설가로 유명하다. 그의 작품은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지겹도
록 나오는 단골로
1929년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하여 수십 편의 걸쭉한 소설을 남겼다. |
첫댓글 좋은 정보 감사드립니다.
행복하세요 ^^
아침 일찍 이렇게 보아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