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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18일 일요일
오늘 산행의 들머리로 잡은 비룡마을 야트막한 언덕배기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11시를 10여 분 남겨 둔 시각이다.초하의 날씨가 더욱 무덥게만 느껴지는
날씨다.대전시 동구의 비룡동과 대청호를 끼고 있는 주산동과 용계동
그리고 마산동 등을 잇는 지방도가 이 야트막한 고개를 고리로 해서 이어져있다.
언덕배기 직전 좌측 길섶에 "지하대장군"이란 이름을 가슴에 세로로 새기고 있는
화강암으로 빗어놓은 장승이 발길을 잡는다.
1.7m의 화강암으로 눈썹은 기다랗고 짙으며, 두 눈은 자비로움이 가득담긴 동그란 형태의
인자스런 눈매를 띄고 있으며 입매는 입꼬리가 양옆으로 치켜올라 웃음끼를 머금은 모습이다.
얼굴 전체로는 둥굴넙적하게 생긴 후덕하고 자비로운 사람의 전형적인 얼굴이다.
길쭉한 화강암에 이러한 사람의 얼굴을 새긴 장승이 차도를 마주보며 우뚝 서 있다.
비룡동 장승이다.장승 앞을 지나면 곧바로 좌측의 마을 고샅을 들어서면 비룡마을회관 앞을
지나게 되며, "雙谿堂墳庵"(쌍계당분암)이란 현판이 걸린 솟을대문 앞으로도
지나가게 되는데, 솟을대문 맞은쪽 공터에는 여럿의 목장승들이 다양한 표정을 지으며
길손을 손짓한다.숲으로 드는 본격적인 산길은 이곳에서 농가 두어 곳의
곁을 지나치면 이내 만나게 된다.대전둘랫길 제5구간이라고 쓰여있는
노란색 리본이 산길을 안내한다.산길 옆으로는 심심찮게 묘지들이 자리하고 있다.
영혼의 쉼터,끊임없는 입산객들의 드나듦에 적적하지는 않을게다.
송전철탑의 거대한 구조물을 뒤로하면 새울약수터 삼거리가 나온다.
각목계단을 따라서 야트막한 멧부리를 오르고 내려서면 화강암사각기둥에
"기념물 제 12호 갈현성"이라고 새겨진 작은기둥을 만나는데,
그 뒤를 조금 따르면 야트막한 멧부리 주변으로 석축으로 이루어진 성곽의 형태를
만난다.갈현성 유적지다. 갈현성의 이력을 알 수 있는 안내문이 세워져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이 산성은 해발 263m의 산봉우리에 축조된 테뫼식 석축산성으로,
성 둘레는 약 350m라고.성벽은 대부분 허물어졌고 동쪽 성벽만 높이 2m 가량 남아있는데,
네모난 돌로 앞면은 맞추어 쌓았다고,성은 남북으로 긴 타원형의 모습을하고 있다고
하고 문터는 남문터만 남아있으며 문폭은 4.8m 정도이다.중앙에는 지름 4m 정도되는
움푹 파인 곳이 있는데,이는 저장시설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성재 곳곳에서
삼국시대의토기조각과 기와조각을 찾아 볼 수 있다고 한다.
대청호
갈현성을 내려서는 산길도 성의 축조에 사용되었던 네모난 돌들이 흩어져있는
내리막이다.봉분이 벌겋게 벗겨진 묘지를 지나면 대전둘레길잇기 안내도가 세워져 있는
비룡임도에 내려선다.안내팻말에는 좌측으로 1.4km거리에 대전대학교가 자리하고 있음을
알린다.소나무 숲길로 들어서면 산길 이곳저곳에 군시설물이 심심찮게 모습을
드러낸다.참호도 보이고 둥근 타이어를 이용한 포복훈련용 설치물도 간간이
눈길을 끈다.광활한 무변의 파란 하늘을 향하여 솟아있는 거대한 송전철탑을 지나면
갈현성과 유사한 돌무더기로 이루어진 멧부리와 다름없는 성터의 봉우리에 오르게 된다.
능성(陵城)이다. 안내문에 의하면,
이 능성은 가양동 뒷산 비름들 고개 위에 돌을 쌓아 만든 산성으로 성 둘레는
약 300m 정도라고 한.성벽에는 동문과 남문터가 있고,동쪽과 남쪽 성벽에는 성벽이 직각으로
만나는 부분에 치성의 흔적이 남아있지만,성벽의 대부분은 무너져 내려원래의
모습을 파악하기 어렵다고.성내에는백제시대의 토기 조각이 일부 발견되었다고 한.
동쪽 성벽에 남아있는 치성의 흔적으로 보아 동쪽에서 침입해 오던 신라를 감시하기 위한
성으로 추정된다고.지정번호는 기념물 제11호다.
이 능성도 내려서는 산길 대부분이 성을 쌓았던 돌들이 허물어지고 주저앉아 흩어진
상태일 것으로 짐작이 되며 상상력을 동원하며 머릿속에 추정만 할 뿐이다.
온갖 체육시설이며 운동기구들이 즐비한 헬스장을 방불할 만한 능선이 이어진다.
꼭 세 군데가 연이어 모습을 보이는데 젊은 처자들과 지긋한 나이의 사내들이
체력단련에 여념이 없다.사거리 안부를 뒤로하면 송전탑이 또 다시 모습을 보이고
곧바로 임도로 꼬리를 내린다.길치고개다.주능선의 동서를 잇는 산간도로,동쪽의 주산동 방면과
서쪽의 비래동 방면을 잇는 소통로 인 셈이다.보현사 입구를 알리는 입간판의
손짓 방향을 따르면 보현사가 빤히 올려다 보이는 삼갈래 길에서 우측의 비탈을
오르면 질현성 성터의 멧부리에 오르게 된다.이 질현성도 다른 석축의 성과 다를 바 없이
정수리 형태는 거뭇하게 물때가 묻어있는 돌무더기 봉우리다.
멧부리 주위를 따라 타원형의 흔적과 일부 석성의 모습이 퇴락을 거듭하며
쇄락한 형태로 남아있다. 입산객들이 주변에 흩어진 돌들을 주워 샇아올린 돌탑이
서넛 정수리를 지킨다.질현성도 유래와 이력이 갈현성과 능성에 비해 큰 차이가 없이 어슷하다.
굳이 재론하기에는 따분한 일이 아닐 수 없다.질현성 바로 아래의 기슭에 제비집 처럼
자리한 보현사에서 세워놓은 탑인 모양이다.길 옆으로 화강암 5층석탑이 푸른 녹음아래
오똑하다.5층석탑을 뒤로하면 붕긋하게 솟은 멧부리에 오르게 되는데
이곳은 대청호의 아름다운 풍광을 한 눈에 담으며 완상할 수 있는 전망대다.
마냥 머물러 흐릿한 눈동자를 말끔히 닦아가며 완상의 즐거음을 만끽하고 싶지만
무심하고 냉정한 시간이 허리춤을 잡아 당긴다.
계족산성
울창한 숲 그늘아래 2층 누각형태의 팔각정이 나온다.누각에는 이미 자리를 차지하고
한담과 수다에 시끌법석인 중년의 아낙들과 사내들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둥그스름한 멧부리에 오르니 헬기장으로 쓰여졌던 모양인지 넓은 공터에 주변으로
벤치도 서넛이 입산객을 고대하고 있다.쉼터봉을 내려서면 이내 임도가
기다린다.절고개다.그늘막용의 정자도 자리하고 있으며 간단하게 몸을 스트레칭
할 수 있는 간이 운동기구도 놓여있다.여러 입산객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절고개를 벗어나면 산길은 이제부터 계족산의 심장부를 겨누며 산객을 이끌어
나가게 된다.계족산성과 계족산 정상으로 향하는 산길이 갈리는 삼거리,
산행안내 팻말에 계족산성까지는 1.3km라고 표시하고 있다. 어느 쪽으로 진행을 하더라도
두 곳을 모두 찾아가려면 두 곳 중의 한 곳은 왕복산행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귀가 교통편이 유리한 방법을 모색해야 하는데,두 방책에서 계족산성을
왕복산행코스로 삼을 수밖에 없다.교통편에서 확실한 점수를 얻었기 때문이다.
계족산성까지는 왕복 2.6km이니 대략 한 시간이내의 발품이 소요가 될 것이다.
삼거리를 뒤로하면 헬기장으로 꾸며져 있는 붕긋한 봉우리를 맞닥드리게 되는데
대청호와 계족산의 주능선이 시원하게 조망이 되며 산객의 힘을 빼려는가?
계족산성이 아스라하다. 어쨋든 더할 나위없는 즐거움을 안겨주는 시원한 멧부리다.
낙엽송이 울창하게 우거져 깊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으며 깊은 그늘 못지않게
짙게 배어나오는 솔향의 그윽한 향취는 찌든 땀과 지친 몸의 기력을 회복시키는
영양제가 되고도 남음이 있겠다.돌뿌리도 없이 잘 다져진 산길은 발걸음을 더욱 가볍게
만들어 준다.산새들의 지저귐이 다양하다.숲이 울창하고 짙으니 깃드는 산새들도
숫자가 많아 질 것이고 종류도 여럿으로 늘어 났기 때문일 것이리라.
아카시아 향내가 진동을 하는 숲을 지나면 무선기지구조물이 우뚝한 멧부리에 오른다.
삼각점이 있는데 해발 399m라고 표시하고 있다.성재산이다.
계족산의 주능선상의 여느 봉우리중의 하나인데 굳이 산이름까지 만들 필요가 있는가,
계족산의 부속 봉우리로서 성재봉이라고 한 수 낮춰 부르는 것이 타당해 보이는 멧부리다.
성재봉을 뒤로하면 숲길은 또 다시 낙엽송과 활엽수 교목들이 울창한 그늘속으로
꼬리를 늘이며 이어진다.어슷비슷한 봉우리 서넛을 오르고 내리면 계족산성 턱밑에
다다른다.1991년 10월25일 사적 제355호로 지정된 계족산성은 계족산 정상인
해발 423m의 봉황정에서 북동쪽으로 둥글게 발달된 능선을 따라 약 1.3m 지점에 있는
해발 420m의 산봉우리에 머리띠를 두르듯 돌을 쌓아 만든 석축산성이다.
성벽은 당시 삼국의 치열했던 전쟁을 반영하듯 대부분 무너진 상태였으나 일부 성벽은
1992년부터 복원한 것이다.성벽의 높이는 4~6m,남벽이 2~8.1m,서벽은 7~8m,북벽은
9.4m이다.삼국시대애 백제의 동쪽 변방에 불과했던 대전지방이 요충지로 부각된 것은
고구려군에게 한상을 빼앗기고 도읍을 웅진(공주)으로 옮긴 뒤부터이다.
대전지역이 신라가 침입했을 때 웅진을 막는 중요한 관문 역할을 하게 되면서
많은 산성을 쌓았으며,계족산성이 그 중심 역할을 하였다.
계족산 남문터를 지나서 정수리에 오른다.밋밋하고 기름한 구릉지에서의
조망이 눈부시다.계족산의 주능선이 한 눈에 들이비치고 아름다운 대청호가 그림같다.
명주바람이 살랑거리며 산객의 땀을 닦아준다.마른 목을 적시며 일망무제의 아름다운
풍광에 잠시 넋을 놓는다.아쉬움을 남기며 발걸음을 옮긴다.방금 왔던 길을 되짚어
걷는 것은 여느 산객이나 다름없이 따분한 여정일 수밖에 없다.그러나 이번 여정은
놀랍게도 따분한 기색이 전혀 솟아나질 않는다.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누가 뭐래도 계족산성터에서의 광대무변의 조망에서 오는 후련함이 마음속의
온갖 번잡스러운 것을 닦아 낸 탓이고 낙엽송을 비롯한 울창한 교목의 숲길이
가져온 아늑함과 향기로움에 있다 하겠다.성재봉을 넘어서 계족산의 정상으로
향하는 길목이 기다리는 곳으로 부리나케 발걸음을 재우친다.
계족산성
삼거리를 지나면 산길은 내리막을 내려서고 야트막한 봉우리를 넘나들며
널따란 임도로 꼬리를 내린다.널따란 임도다.수돗물가도 보이며 간단한 음료 행상도
눈에 띤다.많은 입산객들이 이곳저곳 그늘에서 망중한을 보낸다.
봉황정은 맞은 쪽 계단을 올라서도 되는데 주력이 부족하면 왼쪽에 보이는 숲길을
따라가도 괜찮다.각목계단을 따라 줄창 능선길을 따른다.넉넉하게 잡아도 20여 분이면
계족산 정수리에 오를 수 있다.정수리에는 묘1기가 있다.비석을 보니 파평윤가의 것이다.
해발 419m의 계족산 정수리에서 왼쪽으로 내려서면 작고 아담한 산불초소가 자리하고 있으며
그 앞으로는 무선기지구조물도 보인다. 그곳에서 해가 지는 방향으로 조금 만 더 이동을 하면
곧바로 봉황정이다.봉황정은 계족산의 봉우리에 세운 팔각의 정자다.
계룡산 너머 해질녘의 저녁노을은 가히 장관이어서 대전팔경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그리고 계족산은 봉황산이라고도 불리는 산으로서 산줄기가 닭발처럼 퍼져나갔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에서부터 일제에 의해 격하되어 불려진 이름이라는 설과
중요하거나 귀한 이름은 원래 감춰 불렀다는 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대전시내 곳곳이 봉황정발치에서 꿈틀거린다.명주바람에 묻어오는 차량들의 엔진음이며
세속의 소음이 날벌레들의 날개짓 소리처럼 웅웅거리며 귓전을 울린다.
대부분의 자동차 엔진음은 이곳의 발치아래로 지나는 경부고속도로에서
들려오는 자동차들의 헐떡임이리라.그렇다면 나머지 소음은 무엇일까?
산새들의 지저귐도 아닐테고 명주바람과 희롱하는 푸른 잎새들의 춤사위는 더욱 아닐 터이다.
그것은 속세의 한가운데에서 헐떡이는 고단한 중생들의 신음소리인거다.
하산길은 이곳 봉황정에서 해가 지는 쪽 읍내동의 용화사로 내려서면 교통편이
수월하니 그렇게 진행을 하여도 무관하다.그러나 계족산 정상에서 서북능선을 이어가기로
내심 마음을 먹었으니 그리 할 참이다.계족산 정수리로 다시 돌아와 서북능선으로
내려선다.오른쪽 건너 편으로 계족산성이 손을 뻗으면 손을 내밀듯 친밀하게 다가온다.
능선길은 호젖하기만 하다. 봉황정 주변의 음료행상들의 번잡함과 혼란스러움,
음식물과 술이 내뿜는 야릇한 냄새를 벗어났으니 숲길 본래의 향기로움이
후각을 털어주고 산새들의 노래소리가 귓가를 씻어준다.산길은 오가는 입산객들도
드물어 비교적 한산하다. 팝콘을 뿌려 놓은 듯이 아카시아 흰꽃잎이 하얗게 깔려있는 산길,
진한 아카시아꽃 향기가 코끝을 찌른다. 아카시아 꽃잎은 흰눈이 내리듯이
명주바람을 타고 팝콘처럼 숲길에 소리없이 내려 앉는다.산들거리는 명주바람에
덩달아 꽃잎들도 더덩실 공중제비를 돌기도 하고, 도지개를 틀기도 하며, 피루에트의
무용동작을 시연하더니 산길바닥으로 냅다 곤두박질을 친다.
날머리인 와동의 한국수자원공사를 가리키는 안내팻말을 따르며 애면글면 기신거리면,
산등성이는 시나브로 야트막하게 허리를 굽혀가며 이속의 세상에서 저자의 시끄럽고
번잡한 이승으로 산객을 조용하게 이끈다.산새들의 지저귐이 시나브로 잦아든다.
세속의 소음이 점령군처럼 되알지게 그 빈 공간을 파고들기 시작한다(16시).
대전시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