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습관
이강흠
나는 어려서부터 글에 대한 욕심이 참 많았다. 고향 마을에는 육십 여호가 살고 있었지만, 초등학교 졸업 후 중학교를 간 사람은 나와 형님 두 분밖에 없었다. 시골 살림은 농사 일손이 부족하여 초등학교만 졸업하면 자동으로 농사꾼이 되는 시절이었다. 또한, 곡식을 팔기 전엔 현찰이 귀하고 먹고살기도 힘든 시절이라 자식 공부시킨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나 역시도 수업료를 내지 못해 수업 중 쫓겨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부모님께 돈을 달라고 하기도 어려워 교내 온실 당번은 수업료 면제가 된다는 말을 듣고 신청을 하였다. 그도 자격기준이 있었는데 온실 담당 선생님의 친척인 학우가 당번이 될 거라는 소문이 돌았다. 나는 매우 분하고 절박하였다. 내 생각으론 그 학우는 자격 미달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학급회의 시 건의사항에 “선생님들이 백(back)을 행사하여서는 아니 된다.”라고 의견을 개진하였고, 회의가 끝이 나자 선생님은 나를 교무실로 끌고 가셨다. 매를 맞을 각오를 하고 따라 갔는데 나의 이야기를 들은 선생님은 오해일 거라고 말씀을 하셨다. 얼마 후 선생님의 말씀처럼 나는 온실 당번이 되었다. 교사에 대한 불신을 해결하려고 담임선생님이 많은 노력을 하셨을 거란 생각에 지금도 중학교 때 담임선생님 생각을 많이 한다.
중학교 때의 고생으로 고등학교는 가지 않으려 하였다. 아버지 또한 보낼 마음이 없으셨던 것 같다. 그러나 큰형님은 아버지와 나를 설득하여 원서 마감 날 늦게 학교엘 갔다. 담임선생님은 퇴근하고 안 계셨다. 그러나 온실 당번을 하며 선생님들을 많이 알게 되었고 더구나 다행인 것은 중고교무실이 같이 있어 접수하여 주셨다. 1963년 괴산고등학교 입학시험 수험번호 끝번은 내가 되었다. 나는 살아가면서 참 행운아라는 생각을 많이 하며 살았다. 자연히 나의 어려운 사정이 알려져서 고등학교 때는 도서관 일을 보며 학비 면제를 받으며 다니게 되었다.
책과의 인연은 그때부터 시작이다. 당시 교장 선생님은 나중에 도 교육감 까지 하셨던 분으로 도서관에 많은 책을 사 주셨고 수시로 방문 하시어 공부하는 학생들을 칭찬하시고, 또한 나를 무척 예뻐하셨다. 나는 졸업 후에도 충주실고 계실 때도 찾아뵈었고, 교육감이 되신 뒤에도 수시로 찾아뵙고 인사드렸지만, 퇴임 후 대전 아들 집으로 가신 뒤 뵙지 못하였다. 돌아가신지 오래 되었지만, 지금도 나의 맨토 자리는 항상 지키고 계신다.
많은 책을 분류하고 접하다 보니 직업의 달인이 되어 밤에 불을 켜지 않아도 책장에서 내가 보고 싶은 책을 찾아낼 정도로 책에 정이 들어 있었다. 그 후 평화시장 헌책방 점원으로도 있었다. 하지만 젊은 나이에 지병이 생기며 오래 있지 못하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그러나 책에 대한 욕심은 끝이 없어 버스, 기차, 대합실, 병원, 거리에서나 어디에든 책, 잡지, 신문, 심지어 전단지까지 눈에 보이는 대로 수집하는 습관이 생겼다. 그리고 좋은 글귀는 메모지에 기록하여 40여 년 모으고 모은 메모지가 수십 키로 그램은 되었다. 이사를 열 번은 넘게 하였으니 메모 보따리도 4년에 한 번씩 나와 함께 이사를 했다.
청주에서 요양원 원장으로 살면 좋겠는데 뜻하지 않게 시골 살림을 하게 되었다. 전에는 평범하지 않은 사람들의 삶을 보면서 왜 저렇게 살까 했는데, TV에서 ‘세상에 이런 일’ 을 보면서 나름대로 사정들이 있는 것을 알면서 고생스럽게 사는 사람들에게도 정이 가는 마음이 생겼다. 내가 그런 사연의 주인공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간 살아온 게 다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 앞에 큰 소각시설이 있어 그동안 소중하게 모았던 메모지를 불사르고 말았다. 아쉽지만 정리할 용기도 없고 머리만 아파 모든 걸 잊고 싶었다.
아침저녁 시간이 날 때마다 부모님 산소에 성묘를 간다. 그리고 어린 시절 이웃에 같이 살았던 분들의 산소도 다 돌보며 살고 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요즘은 마음이 편하다. 매일 산소에 가다시피 하니 내가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사람인가 하는 착각까지 든다.
부모님 산소에 가서 그간 살아온 사연을 말씀드리면서 부모님께 대한 사랑의 기억들을 세월에 묻어 버릴 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의 알뜰한 사랑을 글로 남기고 가야겠다. 40년 세월 모아왔던 메모지에 써놓았던 글들은 없어졌지만, 한번 생성된 메모들은 생명력이 있는 듯 기억에 남아있다. 메모하던 습관은 부모님을 생각나게 하는 마음을 남기고 갔다. 다시 하나하나씩 추억을 되새기며 내가 살아있는 날까지 부모님에 대한 은혜를 글로 보답 하고 싶다.
(2011.1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