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민중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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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빼앗긴 서울의 봄과 5·17 쿠데타
1979년 10월 26일에 박정희가 죽은 뒤 나라 안 정세는 겉으로는 민족·민주 운동에 유리하게 바뀌었다. 18년 동안 군사 통치에 짓눌려 온 민중이 민주화를 열망하고 요구하는 기운이 사회 각 부문에서 하늘 높이 치솟았다. 당시 민중에게는 유신 잔재를 말끔히 청산하고 민족 자주 정부를 세워 자립적 민족 경제의 터전을 닦는 한편, 민족 통일을 이루는 일이 중요한 시대의 과제로 떠올랐다. 이러한 민중의 요구는 갑작스러운 박정희의 죽음으로 정치 중심을 잃어버린 집권 세력과 독점 재벌 등의 이익과는 뿌리부터 달랐다.
따라서 사회를 변혁하려는 민중과 지금까지의 남한 사회통치체제를 지탱하여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세력 사이의 싸움은 피할 수 없었다. 그런 가운데 그 동안 반유신 투쟁을 함께 해 온 정치인들은 투쟁 대상이 갑자기 사라지자 마치 자기만이 대권을 잡을 수 있을 듯한 착각에 빠져 대권 경쟁에 열중하였다. 박정희의 뒤를 이어 대통령 권한 대행을 맡은 최규하 국무 총리는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유신 헌법을 따라 대통령을 뽑은 뒤 개헌하겠다는 기만적인 '정치 발전 일정' 을 발표하였다. 그것은 곧바로 민주화되기를 바라던 민중의 의지를 단숨에 꺾어버리는 것이었다.
일의 변화를 지켜보던 민주세력들은 이 반동 음모에 맞서 새롭게 투쟁을 시작하였다. 1979년 11월 24일에 각계 민주세력들은 국민 대회를 열어 통일주체 국민회의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는 것을 중단하라고 강력히 요구하였다. 이들은 당시 상황을 10년 넘게 각계 각층 민중이 고난에 찬 반독재 투쟁을 벌인 결과로 보면서 참된 국민의 합의에 기초를 둔 민주 헌정을 서둘러 출범시키라고 요구하였다. 독재를 연장하려는 유신 잔당들의 음모에 맞서 민주인사들과 민중은 "유신철폐" 와 "계엄해제"를 외치며 거리로 뛰어 나왔다.
유신 잔당들은 12월 6일, 계엄령의 힘을 빌려 최규하를 또다시 '체육관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이어 12일에는 몇몇 정치 군인들이 한밤의 정적을 가르며 총과 군화발로 또다시 쿠데타를 일으켰다. 12·12 쿠데타의 주역들은 최규하와 신현확 등을 앞세워 유신체제가 정당하다고 주장하고 '이원 집정제 개헌'을 내걸어 민중을 속였다. 이들은 겉으로는 민주 인사와 학생을 복권시켜 주는 유화적인 몸짓을 보이면서, 뒤로는 은밀하게 지배집단의 개편을 준비해 갔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앞으로 밀고 나가려는 민중과 이를 가로막으려는 세력은 다시 맞부딪쳤다. 민족·민주세력은 민중의 열망을 대변하며 "계엄해제", "정부 주도의 개헌반대" 등의 구호를 내걸고 사회 민주화 투쟁에 앞장섰다.
그 즈음인 1980년 4월12일, 사북 광산 노동자들의 분노가 폭발하였다. 민중항쟁의 양상을 띤 사북항쟁은, 견디기 어려운 막장생활 속에서 병들어 버린 광산 노동자들이 자신의 힘으로 사람다운 삶을 쟁취하려한 몸부림이었다.
동국 제강·인천 제철 일신 제강 등의 노동자들도 치열하게 싸움을 벌여 나갔다. 1980년 한 해 동안 노동쟁의는 무려 2,168건에 이르렀다. 이는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에 시달려온 1970년대 노동자들의 열악한 처지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노동자들의 요구는 주로 근로조건 개선, 밀린 임금의 즉각 지불, 휴폐업 반대, 노동 조합 결성의 자유 보장, 어용노동조합의 민주화 등이었다. 5월 들어 민주화 투쟁은 절정에 이르렀다. 5월 15일 학생들을 중심으로 수십만 명의 시민이 서울역 광장을 가득 메우고 "유신 철폐"와 "계엄 해제"를 온몸으로 외치며 민주화를 촉구하였다. 그러나 그 외침에 대한 메아리는 너무도 무서운 것이었다.
정부는 5월 17일 24시에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비상 계엄령을 확대하고, 그날 밤 수많은 민주인사를 체포하여 감옥에 넣거나 수배하였다. 설마 하던 '보수반동화'가 현실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민주화의 열기로 가득 찼던 서울의 봄은 삽시간에 살얼음이 어는 겨울로 변하였다.
2. 전개과정
5·17 비상계엄 확대조치는 참혹한 유혈 비극을 가져왔다.
5월 18일, 광주 학생들은 "비상계엄해제"를 외치며 투쟁에 나섰다. 일부 정치군인들이 동원한 공수 부대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야만적 폭력을 마구 저질렀다. 평화 시위로 맞섰던 광주의 시위 양상은 폭력 항쟁으로 바뀌었다. 시민과 학생은 5월 19일 오전부터 금남로에 모여 군부의 정치 개입을 규탄하는 연좌 시위를 벌였다. 시민은 자기를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수단인 돌과 각목 등을 들고 계엄군의 총칼에 용감하게 맞서 싸웠다. 공수 부대는 공포의 유혈 진압을 조금도 멈추지 않았다. 흩어지고 모이기를 되풀이하는 가운데 시위 대열은 차츰 불어 났다. 20일에는 차량 시위를 하는 등 투쟁은 한층 격렬해졌다. 시위대는 광주 시민을 폭도로 왜곡하여 편파 보도하는 MBC와 KBS방송국을 응징하였다. 일부 청년과 시민들은 차량을 나누어 타고 광주를 빠져나가 전남 일대를 누비며 진실을 알리고 시위를 널리 퍼뜨렸다.
노동자·농민·청년학생 등 광주의 모든 애국 시민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지키고 광주를 지키려고 굳게 단결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계엄군에 맞섰다. 야만적인 공수 부대의 진압은 마침내 국민의 군대가 국민의 심장을 향해 마구 발포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시위 군중은 자신과 가족과 이웃을 지키려고 관청을 습격하고 무기고를 접수하여 무장하기 시작하였다. 상황은 삽시간에 시가전의 양상으로 바뀌었다. 시내 곳곳에서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21일 밤을 고비로, 계엄군은 무장 시위대의 거센 공격을 견딜 수 없어 도청을 빠져나갔다. 광주의 애국 시민은 국민을 살상한 '폭도'를 몰아내고 광주를 해방공동체로 만들었다.
투쟁의 불길은 더욱 거세게 타올라 목포·해남·화순·함평 등 전남 일대로 번져 갔다. 광주에서 쫓겨난 계엄군은 병력을 보충하고 시 외각을 차단하여 광주를 철저히 고립시켰다. 계엄군의 봉쇄 조치로 다른 지역과 차단되어 광주시민은 식량과 생활필수품을 공급받을 수 없었지만, 자치조직과 무장조직을 만들어 스스로 질서를 잡아 나갔다. 식량이 떨어진 이웃과 쌀을 나누었으며, 부녀자들은 주먹밥과 음료수를 이고 거리로 나와 곳곳에서 시민군에게 나누어주었다. 의사와 간호원들은 정성을 다하여 부상자들을 치료해 주었다. 나이 어린 여학생들까지 헌혈에 앞장서 혈액은 남아돌았다. 광주시민 모두가 개인보다는 전체를 생각하였으며 개인의 무사안일보다는 공동체의 안녕을 빌었다.
23일 이후 광주시민은 도청 앞 광장에서 여러 차례 민주 수호 범시민 궐기 대회를 열고 투쟁 의지를 가다듬었다. 이러한 가운데 25일 밤, 광주 시민은 새로운 항쟁 지도부를 결성하였다. 이튿날 오후 항쟁 지도부는 제 5차 궐기대회를 열고,‘80만 광주 민주 시민의 결의를 채택하였다. 광주 시민은, ①모든 책임은 과도정부에 있다, ②계엄령해제, ③전두환 공개처단, ④민주인사 석방, 구국 과도정부 수립, ⑤허위 조작, 왜곡 보도 중지, ⑥피해 보상과 연행자 석방만이 아니라 진정한 민주주의 정부 수립, ⑦끝까지 투쟁할 것 등 7개 항을 문제 해결을 위한 요구 조건으로 내걸었다.
이 시기 전국의 언론은 하나같이 광주민중항쟁을‘폭도들의 난동’이라고 왜곡 보도하였다. 정부와 계엄 사령부는 고정 간첩·불순 분자·깡패 등이 폭동을 저질렀다고 발표하면서 빨리 해산하라고 명령하였다. 정부는 광주를 고립시키고 시민군을 분열시키려는 것에만 혈안이 되었을뿐, 문제를 진정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않았다.
계엄군이 광주를 다시 공격해 올 것이 확실해지면서, 항쟁 지도부는 시민군을 다시 편성하고 결사대를 조직하여 계엄군과의 마지막 항쟁을 준비하였다. 27일 새벽, 계엄군은 극비리에 작전을 개시하여, 물밀듯 시내로 밀고 들어왔다. 학살 만행에 치를 떨며 일어선 시민군은 계엄군의 폭력성을 폭로하고 광주의 정당성을 지키려고 마지막 죽음으로 도청을 지켰다.
3. 역사적 의의
광주민중항쟁은 비록 좌절되었지만, 그것이 우리 역사에 남긴 의의는 너무나 컸다. 광주민중 항쟁은 외세와 일부 정치 성향을 지닌 군부 세력에게 치명적인 도덕적 타격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제 5공화국을 정통성을 잃은 정치 집단으로 규정하는 확실한 근거가 되었고, 민족·민주 운동의 정통성을 확립하였다.
광주민중항쟁은 민족 민주 운동에 큰 교훈을 남겼다. 먼저, 분단된 뒤 지금까지 숨겨졌던 외세에 대한 문제, 즉 민족모순 문제를 새롭게 제기하였다. 다음으로, 아무리 객관적 모순이 깊더라도 변혁의 운동의 주체 역량이 튼튼히 건설되어 있지 않을 때는 결코 결정적으로 승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하였다.
이러한 교훈과 함께 광주 민중 항쟁에서 흘린 숭고한 피는 1980년대 민족 민주 운동을 확산시키는 저수지가 되어 사회변혁과 통일로 나아가는 민중 역사의 새로운 변환점이 되었다.
1995년 이후 우리는 두 눈으로 역사의 심판을 똑똑히 보아 왔으나, 1998년 현재, 그 심판이 완결되지 않은 채 정치적 문제로만 축소되어 버린 상태로 아직 남아 있음을 알고 있다. 광주의 문제는 비단 광주만의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살아 있는 비판 정신과 청년다운 열정으로 사회인으로서의 나를 바라보고 올바르게 나아갈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소위 '문민 시대'라 불리는 사회에서 그나마 목청을 높일 수 있는 것은 1980년 5월 18일, 그날의 광주 때문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